此篇은 公以先爲誌라 故不欲復爲表하야 於以婉其文이 如此라
公은 諱塾이요 字宗道요 姓薛氏니 資政殿學士兵部尙書簡肅公之弟라 薛之世德終始는 有簡肅公之誌與碑라
公官至內殿崇斑
하고 以某年某月某日
로 卒官于
하니 其子仲孺以其喪歸
하야 葬于
한대
其銘曰 公躬直淸하고 官以材稱이라 惟賢是似하니 不媿其兄이라
旣葬而仲孺又來請曰 銘之藏은 誠以永吾先君于不朽라 然不若碣于隧하야 以表見于世之昭昭也라하다
予惟薛氏는 於絳爲著姓이요 簡肅公은 於公爲兄弟며 而公之世德을 予旣見之銘이어늘 而其子又欲碣以昭顯于世하니 可謂孝矣로다
然予考古所謂賢人君子功臣烈士之所以銘見于後世者컨대 其言簡而著러니
及後世衰言者하얀 自疑於不信하야 始繁其文而猶患於不章하고 又備其行事하야 惟恐不爲世之信也라
若薛氏之著于絳하고 簡肅公之信于天下하며 而予之銘公이 不愧于其兄은 則公之銘은 不待繁言而信也라
然其行事終始는 予亦不敢略而誌諸墓矣라 今之碣者無以加焉하니 則取其可以簡而著者書之하야 以慰其子之孝思而信于絳之人云이라
이 글은 공이 이 글에 앞서 薛君의 墓誌를 지었으므로 다시 별도의 묘표를 짓고자 하지 않았기에 글의 간략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공은 諱가 塾이고 字가 宗道이고 姓이 薛氏이니, 資政殿學士 兵部尙書 簡肅公(薛奎)의 아우이다. 설씨가 대대로 이어온 아름다운 덕의 始終은 간숙공의 墓誌와 墓碑에 있다.
공은 관직이 內殿崇斑에 이르렀고 某年 某月 某日에 蜀州의 관사에서 졸하니, 그 아들 仲孺가 영구를 모시고 돌아와 絳州의 正平에 안장하려고 하였는데,
장사에 앞서 나에게 와 묘지명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다행히 간숙공의 덕을 기술한 적이 있고 또 공의 묘지명도 짓게 되었다.
그 비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공은 몸가짐이 곧고 청렴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유능하다 일컬어졌네 오직 어진 사람이라야 이러한 모습에 비슷하니 그 형에 비해 손색이 없네
이미 공을 장사 지내고서 중유가 다시 와서 청하기를 “묘지명을 묻은 것은 진실로 우리 先君을 不朽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墓道에 碑碣을 세워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 분명함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설씨는 絳州에서 드러난 성씨이고 간숙공은 공에게는 형제 사이이며 공의 世德을 내가 이미 묘지명에 드러냈는데, 그 아들이 다시 비갈을 세워 세상에 밝게 드러내고자 하니 효성스럽다 이를 만하다.
그러나 내가 옛날의 이른바 賢人, 君子, 功臣, 烈士의 묘비명이 후세에까지 드러난 까닭을 고찰해보건대 그 말이 간략하면서도 분명했다.
그런데 후세의 쇠미한 문장가는 스스로 신뢰를 받지 못할까 의심하여 비로소 그 문장을 번만하게 짓고도 오히려 드러나지 못할까 근심하고, 다시 죽은 이의 行事를 두루 갖추어 기록하면서 오직 세상 사람들이 믿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설씨가 강주에서 드러난 성씨이고 간숙공이 천하에 신뢰를 받으며 내가 공의 銘에서 〈공을 언급한 것이〉 그 형의 풍모에 비해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으니, 공의 銘은 번거로운 말이 필요 없이 믿을 만할 것이다.
그러나 그 行事의 始終은 내가 또한 감히 간략하게 하지 못하여 墓誌에 기록하였다. 지금 세우는 비갈은 더 보탤 내용이 없으니, 간략하면서도 분명한 사실을 취하여 적어서 그 아들의 효성을 위로하고 강주 사람들이 믿게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