嘉祐四年冬
에 天子旣受
之福
하야 推恩群臣
하야 竝進爵秩
하고 旣又以及其親若在若亡
하야 無有中外遠邇
라
於是에 天章閣待制尙書戶部員外郞唐君이 得贈其皇考驍衛府君하야 爲右羽林將軍하다
府君
은 諱拱
이요 字某
라 其先
人
이러니 後徙爲
人
이라
曾祖諱休復
은 唐
中
에 擧明經
하야 爲建威軍節度推官
이요
祖諱仁恭
은 仕
하야 爲唐山縣令
하고 累贈諫議大夫
요 父諱謂
는 官至尙書職方郞中
하고 累贈禮部尙書
라
府君以父廕으로 補太廟齋郞하고 改三斑借職하고 再遷右斑殿直하고 監舒州孔城鎭 澧州酒稅하고 巡檢泰州鹽場 漳州兵馬監押이라가
乾興元年七月某日에 以疾卒于官하니 享年四十有六이라
府君孝悌于其家하며 信義於其朋友하며 廉讓於其鄕里라 其居於官에 名公鉅人이 皆以爲材로대 而未及用也에 享年不永하니 君子哀之라
自子方爲祕書丞
으로 始贈府君爲
이요 其爲尙書主客員外郞 殿中侍御史裏行
에 又贈府君爲右監門衛將軍
이요
其爲尙書工部員外郞 直集賢院 權開封府判官에 又贈府君爲右屯衛將軍이요 其遷戶部員外郞 河東轉運使에 又贈府君爲驍衛將軍하니
蓋自登于朝
로 以至榮顯
에 遇天子有事于天地宗廟
면 必及焉
이라
府君初娶博陵崔氏
는 贈仙游縣太君
이요 後娶崔氏
는 贈淸河縣太君
이니 皆衛尉卿
之女
라 生一男
하니 介也
라
五女는 長適太子中舍盧圭하고 次適歐陽昊하야 早卒하고 次適橫州推官高定하고 次適進士陸平仲하고 次適著作佐郞陳起하다
慶曆三年八月某日에 以府君及二夫人之喪하야 合葬于江陵龍山之東原하고 後十有七年에 廬陵歐陽脩乃表於其墓曰
嗚呼라 余於此에 見朝廷所以褒寵勸勵臣子之意하니 豈不厚哉아
又以見士之爲善者가 雖湮沒幽鬱이라도 其潛德隱行은 必有時而發하니 而遲速顯晦는 在其子孫이라
然則爲人之子者가 其可不自勉哉아 蓋古之爲子者는 祿不逮養이면 則無以及其親矣라
今之爲子者는 有克自立이면 則尙有榮名之寵焉하니 其所以敎人之孝者가 篤于古也深矣라
子方進用於時하야 其所以榮其親者가 未知其止也하니 姑立表以待焉하노라
자식이 귀해짐으로 인하여 증직된 이의 묘표를 찬술함에 있어 이 작품이 가장 뛰어나다.
嘉祐 4년(1059) 겨울에 천자가 祫享의 복을 받으시고서 신하들에게까지 은택을 미루시어 爵秩을 아울러 올려주시고, 이윽고 다시 생존해 있거나 죽은 어버이에게까지 미쳐서 中外와 遠近의 구분이 없었다.
이에 天章閣待制 尙書戶部員外郞 唐君(唐介)의 皇考인 驍衛府君이 증직을 받아 右羽林將軍이 되었다.
府君은 諱가 拱이고 字가 某이다. 그 선조는 晉原 사람이었는데 후에 이주하여 錢塘 사람이 되었다.
증조부 諱 休復은 唐나라 天復 연간에 明經科에 급제하여 建威軍節度推官이 되었고,
조부 諱 仁恭은 吳越王에게 벼슬하여 唐山縣令이 되고 여러 차례 증직되어 諫議大夫가 되었고, 부친 諱 謂는 관직이 尙書職方郞中에 이르고 여러 차례 증직되어 禮部尙書가 되었다.
부군은 부친의 蔭德으로 太廟齋郞에 보임되고 三斑借職으로 改差되었으며 다시 승진하여 右斑殿直이 되고 監舒州孔城鎭과 澧州酒稅가 되고 巡檢泰州鹽場과 漳州兵馬監押이 되었다가,
乾興 원년(1022) 7월 某日에 병으로 관직에 있으면서 졸하니 향년 46세였다.
부군은 집안에서는 孝悌를 행하고 붕우와는 信義로 사귀었으며 鄕里에서는 廉讓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名公大人들이 모두 부군을 인재로 여겼으나 미처 등용하기 전에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군자들이 슬프게 여겼다.
아들
介는
字가
子方이고 진사에 급제하여
皇祐 연간에
御史가 되었는데,
言事를
直切하게 하였다가
春州別駕로
貶職되었다.
唐介(≪古聖賢像傳略≫)
이때에 자방의 기풍이 천하를 놀라게 하였는데, 얼마 후 천자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서 貶所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등용하였다. 지금은 侍從臣의 반열에 있으며 諫官이 되었다.
자방이 祕書丞이 되고서 비로소 부군을 太子右淸道率府率로 증직하였고, 자방이 尙書主客員外郞 殿中侍御史裏行이 되자 다시 부군을 右監門衛將軍으로 증직하였다.
그리고 자방이 尙書工部員外郞 直集賢院 權開封府判官이 되자 다시 부군을 右屯衛將軍으로 증직하였고, 자방이 戶部員外郞 河東轉運使로 승진하자 다시 부군을 驍衛將軍으로 증직하였으니,
조정에 오르고부터 현달한 관직에 이르기까지 천자가 天地와 宗廟에 제사할 때를 만나면 推恩이 반드시 미쳤다.
부군의 初娶 博陵崔氏는 仙游縣太君에 증직되었고 後娶 崔氏는 淸河縣太君에 증직되었으니, 모두 衛尉卿 仁冀의 여식들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介이다.
딸 다섯 중에 장녀는 太子中舍 盧圭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歐陽昊에게 시집가서 일찍 죽었고, 3녀는 橫州推官 高定에게 시집갔고, 4녀는 進士 陸平仲에게 시집갔고, 5녀는 著作佐郞 陳起에게 시집갔다.
慶曆 3년(1043) 8월 某日에 부군을 두 부인의 喪事에 미쳐 江陵 龍山의 동쪽 언덕에 合葬하였고, 17년 뒤에 廬陵 歐陽脩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墓表를 짓는다.
오호라! 내가 여기에서, 조정에서 臣子를 총애하고 권면하는 뜻을 보았으니 어찌 두텁지 않겠는가.
또 선을 행한 선비가 비록 민몰되어 암울해지더라도 그 숨은 덕과 행실은 반드시 때가 되면 드러나는 법이니, 그것이 더디고 빠르고 드러나고 숨겨짐은 그 자손들에게 달린 것임을 보았다.
그렇다면 자식 된 자가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의 자식 된 자는 녹봉으로 어버이 생전에 봉양하지 못하면 어버이에게 효도를 미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식 된 자는 스스로 공적을 세우면 오히려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어버이에게 영예로운 이름이 내려지는 은총을 받을 수 있으니, 사람들에게 효도를 가르치는 것이 옛날보다 독실함이 깊다.
자방은 당세에 등용되어 어버이를 영예롭게 하는 것이 어디에 그칠지 알 수 없으니, 우선 묘표를 세워놓고 기다리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