胡安定生平所著見者는 師道一節이라 故通篇摹寫盡在此라
先生
은 諱瑗
이요 字翼之
요 姓胡氏
라 其上世爲
人
이라가 後爲
人
이라
先生은 爲人師에 言行而身化之하야 使誠明者達하며 昏愚者勵하고 而頑傲者革이라 故其爲法이 嚴而信하고 爲道가 久而遵이라
師道廢久矣
러니 自
以來
로 學者有師
하니 惟先生曁
三人
이로되 而先生之徒最盛
이러라
其在
에 弟子去來常數百人
이어늘 各以其經轉相傳授
하야 其敎學之法
이 最備
라
慶曆四年에 天子開天章閣하야 與大臣講天下事할새 始慨然詔州縣皆立學이라
於是에 建太學於京師할새 而有司請下湖州하야 取先生之法하야 以爲太學法하니 至今爲著令이라
後十餘年에 先生始來居太學하니 學者自遠而至太學하야 不能容이라 取旁官署하야 以爲學舍러라
禮部貢擧하야 歲所得士에 先生弟子十常居四五라 其高第者는 知名當時하야 或取甲科하야 居顯仕하고
其餘散在四方하야 隨其人賢愚하야 皆循循雅飭하니 其言談擧止에 不問可知爲先生弟子요 其學者相語稱先生에 不問可知爲胡公也러라
先生初以白衣
로 하야 拜祕書省校書郞
하고 辟丹州軍事推官
하고 改密州觀察推官
하야
丁父憂去職이라가 服除에 爲保寧軍節度推官하야 遂居湖學이러니
召爲諸王宮敎授에 以疾免하고 已而以太子中舍致仕하야 遷殿中丞於家하다
皇祐中에 驛召하야 至京師議樂하고 復以爲大理評事兼太常寺主簿어늘 又以疾辭러니 歲餘에 爲光祿寺丞 國子監直講이라
迺居太學이라가 遷大理寺丞하야 賜緋衣銀魚러라 嘉祐元年遷太子中允하야 充天章閣侍講하고
仍居太學이라가 已而病不能朝하니 天子數遣使者存問하고 又以太常博士致仕라
東歸之日에 太學之諸生與朝廷賢士大夫가 送之東門하야 執弟子禮하니 路人嗟歎하야 以爲榮이러라
以四年六月六日로 卒于杭州하니 享年六十有七이라 以明年十月五日로 葬于烏程何山之原이라
嗚呼라 先生之德은 在乎人하니 不待表而見於後世라
然非此면 無以慰學者之思라 乃揭于其墓之原하노라 六年八月三日에 廬陵歐陽脩述하노라
胡安定의 일생에 드러난 점은 師道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全篇에 서술한 것이 모두 여기에 있다.
선생은
諱가
瑗이고
字가
翼之이고
姓이
胡氏이다.
先世는
陵州 사람이었는데 뒤에
泰州 如皐 사람이 되었다.
胡瑗(≪萬古際會圖像≫)
선생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언행으로 몸소 교화하여 誠明한 사람은 통달하게 하였으며 昏愚한 사람은 면려하게 하였고 頑惡한 자는 습성을 고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법은 엄격하면서 미더웠고, 그 도는 시일이 오래될수록 따르게 되었다.
師道가 실추된 지 오래였는데 景祐와 明道 연간 이래로 배우는 자들에게 스승이 있게 되었으니, 오직 선생과 泰山 孫明復과 石守道 세 사람이었으되 선생의 문도가 가장 번성하였다.
湖州의 學館에 있을 때에 왕래하는 제자들이 항상 수백 명이었는데, 저마다 배우는 경전을 가지고 돌아가며 전수하여 그 敎學하는 방법이 가장 구비되었다.
선생이 이렇게 가르친 지 수년 만에 東南 지방의 선비가 仁義禮樂을 배우지 않는 이가 없었다.
慶曆 4년(1044)에 천자가 天章閣을 열어 大臣들과 천하의 일을 강론할 때 비로소 개연히 조칙을 내려 州縣에 모두 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에 京師에 太學을 세울 적에 有司가 호주에 내려가 선생이 가르치는 방법을 배워 와서 태학에서 가르치는 법으로 삼기를 청하니, 지금까지도 學規로 되어 있다.
10여 년 뒤에 선생이 비로소 태학에 와서 있으니 배우는 자들이 먼 지방에서부터 태학에 와서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태학 옆의 官署를 學舍로 삼았다.
禮部에서 과거를 치러 해마다 선발한 선비 가운데 선생의 제자가 열에 네다섯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자는 당세에 이름이 알려져 혹 甲科로 뽑혀 현달한 관직에 나아가고,
그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져 그 사람의 賢愚에 따라 모두 법도에 맞게 언행을 典雅하게 하여 그 사람의 말과 행동거지를 보면 묻지 않아도 선생의 제자임을 알 수 있었고, 배우는 자들이 서로 말하면서 선생을 일컬으면 묻지 않아도 그 선생이 胡公임을 알 수 있었다.
선생은 애당초 布衣의 신분으로 천자를 뵙고 음악을 논하여 祕書省校書郞에 배수되고 丹州軍事推官에 천거되었고 密州觀察推官에 改差되어,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했다가 탈상하고서 保寧軍節度推官이 되어 마침내 호주의 학관에 부임하였다.
이후 선생을 불러서 여러 王宮의 敎授로 삼았는데 병으로 免職하고 얼마 후 太子中舍로 致仕하여, 家居 중에 殿中丞으로 승진하였다.
皇祐 연간에 선생을 역말로 불러 京師에 이르러 음악을 논의하고, 다시 大理評事兼太常寺主簿로 삼자 또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1년 남짓 지나 光祿寺丞 國子監直講이 되었다.
이에 太學에 있다가 승진하여 大理寺丞이 되어 緋衣와 銀魚를 하사받았다. 嘉祐 원년(1056)에 승진하여 太子中允이 되어 天章閣侍講에 充任되고
이어서 太學에 있다가 얼마 뒤 병으로 조회하지 못하니 천자가 자주 사자를 보내 문안하고 다시 太常博士로 致仕하였다.
선생이 동쪽으로 돌아가던 날에 태학의 생도들과 조정의 어진 士大夫들이 東門에서 전송하면서 제자의 예를 갖추니 길에 있던 사람들이 찬탄하면서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嘉祐 4년(1059) 6월 6일에 杭州에서 졸하니 향년 67세였다. 이듬해 10월 5일에 烏程 何山 언덕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世次와 官邑과 行事는 莆陽 蔡君謨가 선생의 묘에 지어 넣은 墓誌에 갖추어져 있다.
오호라! 선생의 덕은 사람들에게 남아 있으니, 墓表를 기다리지 않고도 후세에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 묘표가 아니면 배우는 자들의 사모하는 마음을 위로할 길이 없으므로 이에 묘소가 있는 언덕에 묘표를 게시하노라. 嘉祐 6년(1061) 8월 3일에 廬陵 歐陽脩는 짓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