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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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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胡安定生平所著見者 師道一節이라 故通篇摹寫盡在此
先生 諱瑗이요 字翼之 姓胡氏 其上世爲이라가 後爲이라
先生 爲人師 言行而身化之하야 使誠明者達하며 昏愚者勵하고 而頑傲者革이라 故其爲法 嚴而信하고 爲道 久而遵이라
師道廢久矣러니以來 學者有師하니 惟先生曁三人이로되 而先生之徒最盛이러라
其在 弟子去來常數百人이어늘 各以其經轉相傳授하야 其敎學之法 最備
行之數年 東南之士 莫不以仁義禮樂爲學이러라
慶曆四年 天子開天章閣하야 與大臣講天下事할새 始慨然詔州縣皆立學이라
於是 建太學於京師할새 而有司請下湖州하야 取先生之法하야 以爲太學法하니 至今爲著令이라
後十餘年 先生始來居太學하니 學者自遠而至太學하야 不能容이라 取旁官署하야 以爲學舍러라
禮部貢擧하야 歲所得士 先生弟子十常居四五 其高第者 知名當時하야 或取甲科하야 居顯仕하고
其餘散在四方하야 隨其人賢愚하야 皆循循雅飭하니 其言談擧止 不問可知爲先生弟子 其學者相語稱先生 不問可知爲胡公也러라
先生初以白衣 하야 拜祕書省校書郞하고 辟丹州軍事推官하고 改密州觀察推官하야
丁父憂去職이라가 服除 爲保寧軍節度推官하야 遂居湖學이러니
召爲諸王宮敎授 以疾免하고 已而以太子中舍致仕하야 遷殿中丞於家하다
皇祐中 驛召하야 至京師議樂하고 復以爲大理評事兼太常寺主簿어늘 又以疾辭러니 歲餘 爲光祿寺丞 國子監直講이라
迺居太學이라가 遷大理寺丞하야 賜緋衣銀魚러라 嘉祐元年遷太子中允하야 充天章閣侍講하고
仍居太學이라가 已而病不能朝하니 天子數遣使者存問하고 又以太常博士致仕
東歸之日 太學之諸生與朝廷賢士大夫 送之東門하야 執弟子禮하니 路人嗟歎하야 以爲榮이러라
以四年六月六日 卒于杭州하니 享年六十有七이라 以明年十月五日 葬于烏程何山之原이라
其世次官邑與其行事 具誌于幽堂이라
嗚呼 先生之德 在乎人하니 不待表而見於後世
然非此 無以慰學者之思 乃揭于其墓之原하노라 六年八月三日 廬陵歐陽脩述하노라


10. 胡先生墓表
胡安定의 일생에 드러난 점은 師道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全篇에 서술한 것이 모두 여기에 있다.
선생은 이고 翼之이고 胡氏이다. 先世陵州 사람이었는데 뒤에 泰州 如皐 사람이 되었다.
胡瑗(≪萬古際會圖像≫)胡瑗(≪萬古際會圖像≫)
선생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언행으로 몸소 교화하여 誠明한 사람은 통달하게 하였으며 昏愚한 사람은 면려하게 하였고 頑惡한 자는 습성을 고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법은 엄격하면서 미더웠고, 그 도는 시일이 오래될수록 따르게 되었다.
師道가 실추된 지 오래였는데 景祐明道 연간 이래로 배우는 자들에게 스승이 있게 되었으니, 오직 선생과 泰山 孫明復石守道 세 사람이었으되 선생의 문도가 가장 번성하였다.
湖州學館에 있을 때에 왕래하는 제자들이 항상 수백 명이었는데, 저마다 배우는 경전을 가지고 돌아가며 전수하여 그 敎學하는 방법이 가장 구비되었다.
선생이 이렇게 가르친 지 수년 만에 東南 지방의 선비가 仁義禮樂을 배우지 않는 이가 없었다.
慶曆 4년(1044)에 천자가 天章閣을 열어 大臣들과 천하의 일을 강론할 때 비로소 개연히 조칙을 내려 州縣에 모두 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에 京師太學을 세울 적에 有司가 호주에 내려가 선생이 가르치는 방법을 배워 와서 태학에서 가르치는 법으로 삼기를 청하니, 지금까지도 學規로 되어 있다.
10여 년 뒤에 선생이 비로소 태학에 와서 있으니 배우는 자들이 먼 지방에서부터 태학에 와서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태학 옆의 官署學舍로 삼았다.
禮部에서 과거를 치러 해마다 선발한 선비 가운데 선생의 제자가 열에 네다섯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자는 당세에 이름이 알려져 혹 甲科로 뽑혀 현달한 관직에 나아가고,
그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져 그 사람의 賢愚에 따라 모두 법도에 맞게 언행을 典雅하게 하여 그 사람의 말과 행동거지를 보면 묻지 않아도 선생의 제자임을 알 수 있었고, 배우는 자들이 서로 말하면서 선생을 일컬으면 묻지 않아도 그 선생이 胡公임을 알 수 있었다.
선생은 애당초 布衣의 신분으로 천자를 뵙고 음악을 논하여 祕書省校書郞에 배수되고 丹州軍事推官에 천거되었고 密州觀察推官改差되어,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했다가 탈상하고서 保寧軍節度推官이 되어 마침내 호주의 학관에 부임하였다.
이후 선생을 불러서 여러 王宮敎授로 삼았는데 병으로 免職하고 얼마 후 太子中舍致仕하여, 家居 중에 殿中丞으로 승진하였다.
皇祐 연간에 선생을 역말로 불러 京師에 이르러 음악을 논의하고, 다시 大理評事兼太常寺主簿로 삼자 또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1년 남짓 지나 光祿寺丞 國子監直講이 되었다.
이에 太學에 있다가 승진하여 大理寺丞이 되어 緋衣銀魚를 하사받았다. 嘉祐 원년(1056)에 승진하여 太子中允이 되어 天章閣侍講充任되고
이어서 太學에 있다가 얼마 뒤 병으로 조회하지 못하니 천자가 자주 사자를 보내 문안하고 다시 太常博士致仕하였다.
선생이 동쪽으로 돌아가던 날에 태학의 생도들과 조정의 어진 士大夫들이 東門에서 전송하면서 제자의 예를 갖추니 길에 있던 사람들이 찬탄하면서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嘉祐 4년(1059) 6월 6일에 杭州에서 졸하니 향년 67세였다. 이듬해 10월 5일에 烏程 何山 언덕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世次官邑行事莆陽 蔡君謨가 선생의 묘에 지어 넣은 墓誌에 갖추어져 있다.
오호라! 선생의 덕은 사람들에게 남아 있으니, 墓表를 기다리지 않고도 후세에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 묘표가 아니면 배우는 자들의 사모하는 마음을 위로할 길이 없으므로 이에 묘소가 있는 언덕에 묘표를 게시하노라. 嘉祐 6년(1061) 8월 3일에 廬陵 歐陽脩는 짓노라.


역주
역주1 胡先生墓表 : 이 글은 嘉祐 6년(1061)에 지은 것이다. 묘표의 주인공인 胡瑗(993~1059)은 世稱 安定先生으로 불린 당대의 학자로 孫復, 石介와 함께 宋初三先生으로 불렸다.
역주2 陵州 : 지금의 四川 仁壽이다.
역주3 泰州如皐 : 지금의 江蘇 如皐이다.
역주4 景祐明道 : 宋 仁宗의 연호로 景祐는 1034년부터 1038년까지, 明道는 1032년부터 1034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5 泰山孫明復石守道 : 孫明復은 孫復(992~1057)이다. 晉州 平陽 사람으로 明復은 그의 자이고 호는 泰山이다. 과거에 낙제한 뒤 泰山에 은퇴하여 ≪春秋≫를 연구하면서 강학에 힘써 泰山先生으로 불렸다. 范中淹과 富弼 등의 천거로 祕書省校書郞에 나가 國子監直講, 邇英閣祗侯說書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春秋尊王發微≫, ≪孫明復小集≫ 등이 있다.
石守道는 石介(1005~1045)이다. 兗州 奉符 사람으로 守道는 그의 자이고 또 다른 자는 公操, 호는 徂徠先生이다. 孫復을 사사했다. 南京留守推官, 國子監直講, 太子中允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唐鑑≫, ≪徂徠集≫ 등이 있다. 본서 권28 〈徂徠先生墓誌銘〉 참조.
역주6 湖州之學 : 湖州는 治所가 지금의 浙江 吳興에 있었다. 蔡襄의 ≪忠惠集≫의 〈胡君墓誌銘〉에 따르면 胡瑗은 蘇州와 湖州의 敎授를 역임한 바 있다.
역주7 見天子論樂 : ≪宋史≫ 권432 〈胡瑗列傳〉에 따르면, 景祐 초에 雅樂을 개정할 때 范仲淹이 胡瑗을 천거하여 호원이 布衣 신분으로 阮逸과 함께 鐘律을 교정하고 鐘磬을 제작하였다.
역주8 莆陽蔡君謨 : 蔡襄이다. 福建 莆陽 사람으로 君謨는 그의 자이고 시호는 忠惠이다. 知諫院, 端明殿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忠惠集≫이 있다. 본서 권25 〈端明殿學士蔡公墓誌銘〉 참조.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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