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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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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直敘逼太史公이라
翰林侍讀學士給事中 其孤及其兄之子堯臣來하야
曰 吾叔父病且亟矣로되 猶臥而使我誦子之文하니 今其葬 宜得子銘以藏이라하다
公之名在人耳目 五十餘年이로되 하니
公雖衰且病이나 其言談詞氣 尙足動人일새 嗟予不及見其壯也러라
然嘗聞長老하니 道公 一遇眞宗하야 言天下事合意 遂以人主爲知己하니 當時搢紳之士 望之若不可及이러니
已而擯斥流離 四十年間이라 白首翰林이라가 卒老一州하니 嗟夫 士果能自爲材邪
惟世用不用爾 故予記公終始 至於咸平景德之際하야 尤爲詳焉 良以悲其志也
諱詢이요 字昌言이니 世家宣城이라 年二十六 進士及第하야 試校書郞 利豐監判官하고
遷將作監丞 知하고 又遷著作佐郞 擧御史臺推勘官하니 時亦未之奇也
咸平三年 與考進士於崇政殿이러니 眞宗過殿廬中할새 一見以爲奇材하야 召試中書하며 直集賢院하고 賜緋衣銀魚러라
天子新卽位하야 銳於爲治어늘 公乃上書하야 하야 使自攻取 是謂以蠻夷攻蠻夷라하니
眞宗然其言하야 問誰可使羅支者오하야늘 公自請行하니 天子惜之하야 不欲使蹈兵間한대
公曰 苟活靈州而罷西兵이면 何惜一梅詢이리오하니 天子壯其言하야 因遣使羅支한대 未至而靈州沒于賊이라
召還하야 遷太常丞 三司戶部判官한대 數訪時事 於是 屢言西北事하다
邊將皆守境하야 不能出師 公請大臣臨邊督戰하야 募遊兵擊賊하고 하고
可責其效以贖過凡數十事
其言甚壯하니 天子益器其材하야 數欲以知制誥로되 宰相有言不可者하야 乃已러라
하니 而河北之兵解하야 天下無事矣러라
하야 通判杭州라가 徙知蘇州하고
又徙兩浙轉運使하고 하고 遷太常博士라가 하야 遷祠部員外郞하고
又坐事하야 出知하고 以刑部員外郞으로 爲荊湖北路轉運使
坐擅給驛馬與人奔喪而馬死하야 奪一官하야 通判라가 徙知하고 又徙蘇州라가 天禧元年 復爲刑部員外郞 陝西轉運使하다
靈州棄已久 公與秦州曹瑋 得胡蘆河하니 路可出兵이요 無沙行之阻하야 而能徑趨靈州 遂請瑋居環慶하야 以圖出師러니
會瑋入爲宣徽使 不克而止하고 遷工部郞中이라가 하야 라가
天聖元年 拜度支員外郞 하고 라가 遷兵部員外郞 하고 又知陝府러라
六年復直集賢院하고 又遷工部郞中하고 改直昭文館 라가 召爲龍圖閣待制 糾察在京刑獄 判流內銓하고
改龍圖閣直學士 知幷州라가 未行 遷兵部郞中 樞密直學士以往하고
就遷右諫議大夫라가 入知通進銀臺司하고 復判流內銓이라가 改翰林侍讀學士 群牧使하고 遷給事中 知審官院이러니
以疾出知許州하야 康定二年六月某日 卒於官하다
公好學有文하고 尤喜爲詩 而材辯敏明하며 少能慷慨하야 見奇眞宗이러라
自初召試 感激言事하야 自以謂君臣之遇러니 已而失職逾二十年이라가 始復直於集賢하니
比登侍從하야 而門生故吏曩時所考進士 或至宰相居大官이라 故其視時人 常以先生長者自處하고 論事尤多發憤이라
其在許昌 이로되 而公已老하야 不復言兵矣 享年七十有八以終이러라
하야 世久而譜不明이라
公之皇曾祖諱超皇祖諱遠 皆不仕하고 父諱邈 贈刑部侍郞하고 夫人劉氏 彭城縣君이라
子五人이니 長曰鼎臣 官至殿中丞이요 次曰寶臣이니 皆先公卒이라
次曰得臣 太子中舍 次曰輔臣 前將作監丞이요 次曰淸臣 大理評事
公之卒 天子贈賻優恤하고 加得臣殿中丞 淸臣衛尉寺丞이라 明年八月某日 이러라
銘曰 士之所難 有蘊無時어늘 偉歟梅公 人主之知 勇無不敢하야 惟義之爲러니 困于하야 이라
一失其塗 進退而坎이러니 理不終窮하야 旣晩而通이라 이로다


01. 翰林侍讀學士 給事中 梅公墓誌銘
곧바로 서술함이 太史公(司馬遷)에 핍진하다.
翰林 侍讀學士 給事中 梅公이 졸하고 난 이듬해에 그 孝子 및 그 형의 아들 堯臣이 나에게 찾아와
을 청해 받아 장사 지내려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叔父께서 병이 위독하셨으나 누워 계시면서도 우리들에게 선생의 글을 외게 하셨으니 지금 숙부를 장사 지낼 때 의당 선생의 을 받아 함께 묻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명성이 50여 년이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나 공이 졸하기 1년 전에야 내가 비로소 땅에서 공을 배알하였다.
이때 공은 비록 노쇠하고 병들었으나 그 言談詞氣가 오히려 족히 사람을 움직였기에 나는 공이 強壯했던 시절에 미처 뵙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다.
그렇지만 예전에 長老들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공이 咸平景德 연간 초기에 眞宗을 한 번 조우하여 천하의 일을 진언한 것이 임금의 뜻에 부합하였기에 마침내 임금을 知己로 여기니 당시에 사대부들이 공을 바라보며 공에게 미칠 수 없을 듯이 여겼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조정에서 내쳐져 40년 동안 떠돌아다닌지라 머리가 세도록 翰林에 머무르다가 결국 한 고을에서 늙어갔다고 하였다. 아, 슬프다. 선비가 과연 제 스스로 국가의 재목이 될 수가 있는가.
오직 세상에서 써주느냐 써주지 않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공의 일생을 기록하면서 咸平景德 연간에 이르러 더욱 자세하게 기술하는 것은 참으로 공의 뜻을 서글퍼해서이다.
공은 이고 昌言이니 대대로 宣城에 살았다. 나이 스물여섯에 進士及第하여 試校書郞 利豐監判官을 지내고
승진하여 將作監丞 知杭州仁和縣이 되고 또 著作佐郞으로 승진하고 御史臺推勘官擧用되니 이때에는 또한 아직 두드러지지는 못하였다.
咸平 3년(1000)에 崇政殿에서 進士試考官으로 참여하였는데 眞宗殿廬 안을 지나갈 때 한 번 보고는 빼어난 인재라고 여겨 中書省에 불러 시험하고는 直集賢院에 임명하고 緋衣銀魚를 하사하였다.
이때에 거란이 河北을 자주 침략하였고 李繼遷靈州를 급히 침공하였다.
天子께서 새로 즉위하여 善政을 펴는 데 마음을 쓰고 계셨는데 공이 이에 글을 올려, “朔方潘羅支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공격하여 취하게 할 것을 청하오니, 이것을 일러 오랑캐를 가지고 오랑캐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眞宗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누구를 潘羅支에게 사신으로 보낼 만한지 묻자, 공이 스스로 사신으로 갈 것을 청하니, 천자가 공을 아껴서 공을 전쟁터 한가운데로 가게 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만약 靈州 백성을 살리고 서쪽 변방의 군대를 해산할 수만 있다면 어찌 梅詢 한 사람을 아끼실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천자께서 공의 말을 장하게 여기시고서 이어 潘羅支에게 사신으로 보냈는데 미처 도착하기 전에 靈州가 적에게 함락되었다.
공을 소환하여 太常丞 三司戶部判官으로 옮겼는데 천자께서 時事를 자주 자문하신지라 이에 西北方의 일을 여러 차례 진언하였다.
이때 변방의 장수들이 다 국경을 수비하여 출병할 수가 없었는데, 공이 大臣이 변방에 가서 전투를 督勵하면서 유격병을 모집하여 적군을 치게 할 것을 청하고 曹瑋馬가 절개를 알고 재주가 쓸 만하다고 논변하였다.
그리고 傅潛楊瓊이 패배한 것은 주벌해야 마땅하고 田紹斌王榮 등은 성과를 내라고 독책하고 그 허물을 용서할 만하다고 하는 등 모두 수십 가지 일을 논하였는데,
言論이 몹시 씩씩하니 천자께서 그 재주를 더욱 인정하여 자주 知制誥로 쓰고자 하셨으나 宰相 가운데 불가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어 결국 그만두었다.
그 뒤에 李繼遷이 마침내 潘羅支에게 곤경을 당하자 조정에서 兩鎭李德明에게 주니 李德明이 머리를 조아리고 죄를 자복하여 河西가 평정되었다.
천자께서 또한 澶淵에 다시 거둥하여 거란과 맹약하니 河北의 군대가 해산하여 천하가 무사하게 되었다.
공은 이미 소외당하여 쓰이지 못하였고 처음에 田訟을 실정대로 판결하지 못한 죄를 받아 杭州通判이 되었다가 옮겨 知蘇州가 되었다.
兩浙轉運使로 옮기고 다시 判三司開拆司가 되고 太常寺博士로 승진하였다가 封禪 때 내리는 은택으로 祠部員外郞으로 승진하였다.
또 일에 연루되어 외직으로 나가 知濠州가 되었고 刑部員外郞으로 荊湖北路轉運使가 되었다.
驛馬를 어떤 이에게 마음대로 주어 奔喪하게 해서 말이 죽은 일에 죄를 받아 一官을 삭탈당하고서 襄州通判이 되었다가 옮겨 知鄂州가 되고, 또 蘇州로 옮겼다가 天禧 元年(1017)에 다시 刑部員外郞 陝西轉運使가 되었다.
靈州는 방치된 지 이미 오래였다. 공과 秦州 曹瑋胡蘆河를 얻으니 길이 군대를 움직일 만하였고 모랫벌을 행군해야 하는 험난함이 없어서 靈州로 질러 나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曹瑋에게 環慶을 점거하고서 出兵을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마침 조위가 조정에 들어와 宣徽使가 되었는지라 이 일을 매듭짓지 못한 채 그만두고 工部郞中으로 승진하였다가 朱能의 반란에 연루되어 懷州團練副使로 폄적되고 다시 池州로 폄적되었다가
天聖 元年(1023)에 度支員外郞 知廣德軍에 배수되고 知楚州로 옮겼다가 兵部員外郞 知壽州로 승진하고 다시 知陝府가 되었다.
天聖 6년(1028)에 다시 直集賢院이 되고 또 工部郞中으로 승진하였고 直昭文館 知荊南府로 옮겼다가 조정으로 불려와 龍圖閣待制 糾察在京刑獄 判流內銓이 되었다.
龍圖閣直學士 知幷州로 옮겼다가 부임하기 전에 兵部郞中 樞密直學士로 승진하여 나갔다.
곧이어 右諫議大夫로 승진하였다가 조정에 들어와 知通進銀臺司가 되고 다시 判流內銓이 되었다가 翰林侍讀學士 群牧使로 옮기고 給事中 知審官院으로 승진하였는데
질병으로 외직으로 나가 知許州가 되어 康定 2년(1041) 6월 모일에 관직에 있으면서 졸하였다.
공은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이 훌륭하였는데 특히 시 짓기를 좋아하였다. 사람됨이 嚴毅하고 修潔하며 材辯이 민첩하고 분명하였으며 어려서부터 慷慨할 줄 알아 眞宗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처음 불려 시험볼 적에 감격하여 정사에 대해 논하여 明君良臣이 조우하였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는데, 이윽고 직책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다시 集賢院에서 直宿하게 되니,
나란히 侍從에 올라 지난날 공이 進士로 선발한 門生과 옛 관리가 宰相에 이르거나 大官이 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공이 사람들을 만나볼 때 늘 先生長者自處하였고 정사를 論奏한 것들은 發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더욱 많았다.
공이 許昌에 있을 때 李繼遷의 손자가 다시 河西에서 반란을 일으킨지라 조정에서 서쪽 변방에 군대를 출정하였으나 공은 이미 노쇠하여 다시 軍事를 말하지 않았다. 향년 78세로 생을 마쳤다.
梅氏는 멀리 梅伯에게서 나와 世系가 오래되어 족보가 분명하지 않다.
공의 曾祖 祖父 은 모두 벼슬하지 않았고, 부친 贈刑部侍郞이고, 夫人 劉氏彭城縣君이다.
아들은 다섯 사람이니 맏아들은 鼎臣인데 벼슬이 殿中丞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은 寶臣인데 이들은 다 공보다 먼저 졸하였다.
셋째 아들 得臣太子中舍이고, 넷째 아들 輔臣 將作監丞이고, 다섯째 아들 淸臣大理評事이다.
공이 졸하자 天子께서 융숭하게 賻儀를 내리고 得臣에게 殿中丞을, 淸臣에게 衛尉寺丞을 더해주셨다. 이듬해 8월 모일에 宣州某縣 某鄕 某原에 공을 장사 지냈다.
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어렵게 여기는 일은 능력 있어도 때를 못 만나는 것인데 위대하여라 梅公은 임금의 知遇를 입었도다 그 용맹 모든 일에 과감하여 만을 따라 행하였더니 날개 펼쳐 나는 데 곤궁하여 중간에 날개를 접고 거두었어라
한번 그 길을 잃어버림에 진퇴가 모두 곤란하더니 이치가 끝내 막히지 않아 만년이 되어 형통하게 되었네 오직 공이 장수를 누림은 그 福祿이 융성하도다


역주
역주1 翰林侍讀學士給事中梅公墓誌銘 : 이 글은 歐陽脩가 慶曆 2년(1042)에 지은 것이다. 梅公은 梅詢(964~1041)으로, 字가 昌言인데 宣州 宣城 사람이고 저서에 ≪昌言集≫이 있다. ≪宋史≫에 傳記가 있다. 매순은 歐陽脩의 절친한 벗 梅堯臣의 숙부이다. 歐陽脩는 오래전부터 梅詢을 흠모해왔고 그의 불행을 동정하였지만 梅詢이 졸하기 1년 전에야 77세의 선배를 처음 배알하였다. 그래서 글 가운데 이에 대한 깊은 심정을 드러낸 단락이 있다. 이 글을 지을 당시 구양수는 31세였다. 王安石도 ≪梅公神道碑≫를 지었는데, 이 글과 참고하여 볼 수 있다.
역주2 梅公旣卒之明年 : 梅詢은 康定 2년(1041) 6월에 졸하였는데 이해 11월에 慶曆으로 改元하였으므로, 여기서 明年은 慶曆 2년(1042)이다.
역주3 其孤及其兄之子堯臣來 請銘以葬 : 梅詢은 아들이 모두 다섯이었는데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그보다 먼저 졸하였고 나머지 세 아들은 得臣, 輔臣, 淸臣이다. 梅詢의 형은 梅讓으로, 자가 克讓인데 太子中舍로 致仕하였다. 梅讓의 맏아들이 堯臣이다.
역주4 前卒一歲 予始拜公於許 : 康定 원년(1040) 봄에 歐陽脩는 襄陽에서 滑州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許州를 경유하였다. 梅詢을 배알한 것은 아마도 이때였을 것이다.
역주5 咸平景德之初 : 咸平(998~1004)과 景德(1004~1008)은 모두 宋 眞宗의 연호이다.
역주6 杭州仁和縣 : 치소는 지금의 浙江省 杭州에 있었다.
역주7 是時 契丹數(삭)冦河北 : 河北은 河北路를 가리키는 것으로, 치소는 大名府에 있었다. 지금의 河北省 易水, 雄縣, 霸縣 및 天津市 海河 以南 그리고 山東省과 河南省의 黃河 以北을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였다. 眞宗 咸平 2년(999)에서 景德 원년(1004) 澶淵의 盟約이 체결되기까지 거란은 수차례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의 국경을 남침하였다.
역주8 李繼遷急攻靈州 : 眞宗 咸平 5년(1002) 3월에 李繼遷이 藩部를 크게 규합하여 靈州를 陷落하였다. 李繼遷은 西夏國의 임금으로 德明의 부친이고 元昊의 조부이다. 靈州는 치소가 지금의 寧夏 靈武의 서남쪽에 있었다.
역주9 請以朔方授潘羅支 : 朔方은 지금의 寧夏 靈武 일대에 있던 州縣으로 唐代에는 이곳에 朔方軍을 설치하였다. 潘羅支는 西北 변경 西涼府의 임금으로, 咸平 6년(1003)에 宋과 함께 西夏를 공격하여 李繼遷을 射殺하였다.
역주10 論曹瑋馬知節才可用 : 曹瑋는 字가 寶臣으로, 曹彬의 셋째 아들이다. 19세에 군대를 거느리고 西夏를 정벌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知鎭戎軍 簽書樞密院事가 되었다. 丁謂가 자신에게 附和하지 않는다고 그를 미워하여 그가 寇準의 黨與라고 지목하여 萊州觀察使로 폄적되었다. 뒤에 창무군절도사로 옮겼다. 독서를 좋아하여 春秋三傳에 該通하였고 침착하고 용맹한 데다 策略이 있어 병사를 쓸 때 死力을 다하도록 잘 유도하였으며 용병술이 신속하여 40년 동안 군대를 거느리면서 실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졸하자 武穆이라는 諡號를 내렸다.
馬知節은 字가 子元으로, 太宗 때 부친 全義로 인해 음직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眞宗 때 여러 관직을 거쳐 宣徽南院使 知樞密院事가 되어 조정에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直言하였다. 彰德軍留後 知貝州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졸하자 正惠라는 諡號를 내렸다.
역주11 論傅潛楊瓊敗績當誅 : 傅潛은 冀州 衡水 사람이다. 戰功으로 內殿直都虞侯 馬步都軍頭 領羅州刺史 富州團練使 雲州防禦使에 발탁되었다. 眞宗이 즉위하자 領忠武軍節度使가 되었다. 咸平 2년(999) 외직으로 나가 鎭, 定, 高陽三路行營都部署가 되었다. 거란이 크게 군대를 이끌고 변경을 침입하자 士卒들이 떨쳐 싸우고자 하였는데 부잠은 겁먹은 채 대책도 없이 성문을 닫고 지키기만 하였다.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그에게 出征을 독책하고 나머지 諸路에서도 여러 차례 出兵을 재촉하였지만 모두 듣지 않았고, 友軍이 적과 싸우고 있는데도 구원하지 않았다. 진종이 親征하려고 할 때 부잠은 그대로 머뭇거리며 나서지 않았고 원병을 청하였는데도 내주지 않았다. 이에 高瓊을 보내 그를 대신하게 하고, 부잠으로 하여금 行在所로 오게 하여 御史府에 내려 하룻저녁에 獄案을 갖추니, 신료들이 형법을 살펴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진종은 그 관직을 삭탈하되 참형은 면하게 하며 온 가족을 房州에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다. 뒤에 점차 승진하여 京師로 돌아와 그 집을 돌려받았고 天禧 원년(1017)에 졸하였다.
楊瓊은 汾州 西河 사람이다. 太宗을 보좌하여 太原 정벌에 참여하여 그 전공으로 顯州刺史가 되었다. 咸平 2년 鎭, 定, 高陽三路押策先鋒이 되었다. 咸平 4년(1001)에 淸遠, 積石河, 慶州에서 적과 대치하였는데 적을 두려워하여 싸우지 않고 줄곧 물러나 지키기만 하였다. 이 일이 황제에게 보고되자 그를 소환하여 御史府에 내리니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특별히 목숨은 살려주면서 관직을 삭탈하고 崖州에 유배 보냈다. 뒤에 조정으로 관직을 옮겼다가 景德 5년(1008)에 졸하였다.
역주12 田紹斌王榮等 : 田紹斌은 汾州 사람이다. 後周 顯德 4년(957)에 관할하고 있던 遼州를 가지고 周 世宗 柴榮에게 歸順하였다. 宋初 변방을 정벌한 공훈으로 龍捷都虞侯로 승진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龍衛軍指揮使 馬步都軍頭 冀州防禦使가 되었다. 咸平 2년(999) 鎭, 定, 高陽三路押先鋒으로 傅潛의 부하가 되었다. 石普와 함께 保州를 지켰는데 석보가 保州知州 楊嗣와 함께 제멋대로 출병하여 적을 쳤다. 전소빈은 군대를 거느리고 구원하여 敵兵 140여 명을 잡아 그 전공으로 邢州觀察使로 승진하였다. 부잠이 中山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전소빈이 세 차례 글을 보내 성을 등지고 싸우면서 추격하지 말자고 강조하였는데 부잠은 나가 싸우지 않았다. 眞宗이 大名府에 行幸하여 부잠과 전소빈을 御史府에 내려 죄를 물으라고 명하였다. 免職되어 左衛率府副率로 강등되고 上都에 보내져 禁錮되었다. 景德 2년(1006)에 졸하였다.
王榮은 定州 사람이다. 咸平 2년(999) 진종이 大名府에 行幸하였을 때 소환되어 行營副都部署가 되었다. 이듬해 靈武에 軍糧과 馬草를 운반하는 일을 도왔는데 智略이 부족하여 積石에 이르러 밤에 蕃寇들에게 침탈당하여 營都가 크게 혼란에 빠져 군대를 거의 잃었다. 형법에 따라 참형에 처해야 했지만 용서하여 均州에 유배 보냈다. 이후 左衛大將軍 領昌州防禦使로 승진하였다. 大中祥符 9년(1017)에 졸하였다.
역주13 其後繼遷卒爲潘羅支所困……河西平 : ≪宋史紀事本末≫ 咸平 6년(1003) 10월에 “이계천이 방향을 바꿔 西蕃을 공격하여 西涼府를 점령하였다. 都首領 潘羅支가 거짓 항복하였다가 六谷藩部를 모아 이계천을 合攻하니 이계천이 크게 패하여 화살에 맞아 죽었다. 아들 李德明이 즉위하자 거란에서는 이덕명을 西平王에 봉하였다.……景德 3년(1006)에 이덕명이 表文을 받들고 歸順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14 天子亦再幸澶淵 盟契丹 : 景德 원년(1004)에 眞宗이 수레를 타고 澶淵에 친림하여 거란을 대패시키고 澶淵의 盟約을 체결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15 公旣見疎不用 初坐斷田訟失實 : 梅詢을 황제가 소원하게 대하며 중용하지 않았는데 뒤에 田案을 판결한 것이 실정에 맞지 않은 일로 인해 죄를 범한 것을 말한다.
역주16 還判三司開拆司 : ≪宋史≫ 〈職官志2 三司 開拆司〉에 “判司官은 1인인데 朝官으로 충원한다. 宣勅 및 諸州에서 올리는 공문을 받아 發放하여 三部에 보내는 일을 관장하고 發放, 勾鑿, 催驅, 受事를 겸하여 관장한다.
역주17 用封禪恩 : ≪宋史≫ 〈眞宗紀2〉에 의하면, 泰山에 封禪하는 예로 인해 천하에 큰 赦免을 베푸는 은택을 말한다. 大中祥符 원년(1008) 10월에 眞宗이 泰山에 거둥하여 封禪하고서 천하에 큰 사면을 베풀어 국가의 恩赦를 만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를 모두 사면하여 주고 文武 신료들의 품계를 올려주었다. 致仕한 관리에게는 물러날 때의 品階에 해당하는 녹봉 3개월치를 하사하였고, 京朝官으로 緋綠의 복장을 15년 동안 입은 자들에게는 다른 복색을 하사하였다.
역주18 濠州 : 치소가 鍾離, 지금의 安徽省 鳳陽縣 동쪽에 있었다.
역주19 襄州 : 치소가 北平, 지금의 河南省 方城縣 동남쪽에 있었다.
역주20 鄂州 : 치소가 江夏, 지금의 湖北省 武昌縣에 있었다.
역주21 坐朱能反 : 天禧 원년(1017)에 永興軍巡檢 朱能이 內侍都知 周懷政과 결탁하여 天書가 내려왔다고 詐稱하니 眞宗이 맞이해 절하고 殿閣에 들였다. 뒤에 주회정이 丁謂를 제거하고서 진종을 太上皇으로 받들고 太子에게 傳位하게 하며 寇準을 다시 재상에 복직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이 잘못되어 주회정은 주벌되었고 조칙을 내려 入內供奉官 盧守明 등을 보내 永興軍에 가서 朱能을 잡아오게 하였다. 주능은 使者가 온다는 것을 염탐하여 알고서는 노수명을 죽이고 반란하였다. 그러자 군대를 출동하여 그를 잡아오라고 조서가 내려지니 주능은 桑林에 들어가 목매어 자살하였다. 梅詢은 예전에 주능을 천거하였고 寇準과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懷州로 폄적되었다. ≪宋史 周懷政傳≫, ≪宋史 寇準傳≫, ≪宋史紀事本末 天書封祀≫
역주22 貶懷州團練副使 再貶池州 : 懷州는 지금의 河南省 沁陽縣이고 池州는 지금의 安徽省 貴池縣이다.
역주23 知廣德軍 : 廣德軍은 宋 太平興國 4년(979)에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지금의 安徽省 廣德縣에 있었다.
역주24 徙知楚州 : 楚州는 치소가 지금의 江蘇省 淮安縣에 있었다.
역주25 知壽州 : 壽州는 치소가 지금의 安徽省 鳳臺縣에 있었다.
역주26 知荊南府 : 荊南府는 치소가 지금의 湖北省 江陵에 있었다.
역주27 爲人嚴毅修潔 : 이른바 ‘嚴毅修潔’은 梅詢을 美化한 말이다. ≪宋史≫ 本傳에는 “조급하고 나아가기를 좋아하면서 생활이 사치스러웠는데 늙어서까지 줄어들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역주28 繼遷之孫……朝廷出師西方 : 康定 원년(1040) 봄에 趙元昊가 延州를 침략하자 연주를 지키던 장수 劉平, 石元孫이 대패하니, 2월에 夏守贇, 王守忠, 范仲淹 등을 보내 적을 토벌하라고 명하였다. 李繼遷의 손자는 바로 西夏의 임금 趙元昊이다.
역주29 梅氏遠出梅伯 : 梅伯은 商나라 紂임금 때의 제후로, 忠直하여 여러 차례 주임금에게 간언하니 주임금이 노하여 그를 죽이고 시신을 젓갈로 담갔다.
역주30 葬公宣州之某縣某鄕某原 : ‘葬於宣城縣長安鄕西山里’라고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역주31 翼飛 : 날개를 펴고 높이 나는 것을 말한다.
역주32 中垂以斂 : 새가 날개를 아래로 드리우고 높이 날지 못하는 것으로 梅詢이 중년에 실의에 빠져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했던 것을 말한다.
역주33 惟其壽考 福祿之隆 : 何焯의 ≪義門讀書記≫ 권39에,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은 단지 長壽뿐임을 말한 것이니 그가 불우했음을 깊이 서글퍼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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