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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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悲痛慷慨
嗚呼元珍이여 善惡之殊 如火與水하니 不能相容 其勢然爾 是故 이라
子之美才 懿行純德이니 誰稱諸朝 當世有識이라 子之憔悴 遂以湮淪하니 問孰惡子 可知其人이라
毁善之言 譬若蠅矢 點彼白玉이나 濯之而已 小人得志 蹔快一時 要其得失 後世方知
是以君子 修身而俟 擾擾姦愚 經營一世 迨榮華之銷歇하얀 嗟泯沒其誰記리오
是皆生則狐鼠 死爲狗彘 惟一賢之不幸 歷千載而猶傷이니 自古孰不有死리오마는 至今獨弔乎沅湘
하니 使不遭罹於放斥이면 未必功顯而名彰이라
然則彼讒人之致力 乃借譽而揄揚이라 嗚呼元珍이여 道之通塞 有命在天하니 其如予何리오
孔孟亦然하니 何以慰子 聊爲此言하야 寄哀一奠하노니 有涕漣漣이라


08. 丁學士에 대한 祭文
비통하고 강개하다.
아, 元珍이여. 善惡이 다른 것은 불과 물 같으니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은 형세가 그러합니다. 이 때문에 鄕人이 모두 좋아하지만 孔子는 그렇지 않다고 여겼으니 不善한 자에게 미움을 받은 뒤에 賢者인 것입니다.
그대의 훌륭한 재능은 아름다운 행실과 순수한 덕이니 누가 조정에서 칭찬하였습니까. 당세에 알아주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대는 초췌한 채로 결국 泯沒되었으니 어떤 사람이 그대를 미워하는지 물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을 비난하는 말은 비유하면 파리똥과 같으니 저 白玉을 더럽힌들 씻으면 그만입니다. 小人이 뜻을 얻음에 잠시 한때에 기뻐하였지만 요컨대 그 得失後世에 가서야 바야흐로 알 것입니다.
모욕과 비방을 받은 것이 仲尼(孔子)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지만 우뚝한 袞冕桓魋를 제사 지내지 않습니다. 孟軻의 도는 오래될수록 더욱 빛나니 이름이 四書로 높아졌고 臧倉은 거론조차 되지 않습니다.
孔子(≪萬古際會圖像≫)孔子(≪萬古際會圖像≫)
孟子(≪萬古際會圖像≫)孟子(≪萬古際會圖像≫)
이 때문에 군자는 修養하고 때를 기다리니, 분란한 姦凶들은 一世를 경영하지만 榮華가 사라지면 아, 泯沒되니 누가 이들을 기억하겠습니까.
이들은 모두 살아서는 여우와 쥐 같은 존재이고 죽어서는 개나 돼지가 될 뿐입니다. 다만 한 賢人의 불행은 천년이 지나도 오히려 가슴 아프니, 예로부터 누군들 죽지 않겠는가마는 지금도 유독 沅水湘水 사이에서 조문하고 있습니다.
靈均(屈原)의 사업은 처음에는 남쪽 지방에 드러나지 않았으니, 가령 조정에서 放黜당하지 않았다면 필시 功業名聲이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屈原(≪萬古際會圖像≫)屈原(≪萬古際會圖像≫)
그렇다면 저 참소하는 사람들이 힘을 다한 것은 바로 명예를 빌려주어 명성을 드날리게 해준 것입니다. 아, 元珍이여. 가 세상에 실현되고 실현되지 못하는 것은 이 하늘에 달려 있으니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孔子孟子 또한 그러했으니 무엇을 가지고 그대를 위로하겠습니까. 그저 이 말을 해서 한 잔 술에 슬픔을 부치니 눈물만 줄줄 흐를 뿐입니다.


역주
역주1 祭丁學士文 : 이 글은 治平 4년(1067)에 지은 것이다. 丁學士는 丁寶臣(1010~1067)을 가리킨다. 본서 권30 〈集賢校理丁君墓表〉 참조.
역주2 鄕人皆好……然後爲賢 : ≪論語≫ 〈子路〉에 “子貢이 묻기를 ‘鄕人들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孔子께서 ‘可하지 못하다.’라고 대답하셨다. ‘향인들이 모두 미워하면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께서 ‘가하지 못하다. 사람 중에 善한 자가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자가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역주3 受侮被謗……不祀桓魋 : 桓魋는 春秋時代 宋나라 대부 向(상)魋이다. 공자가 曹나라를 떠나 宋나라로 갈 때에 桓魋가 공자를 죽이려 했던 사실이 있다.
袞冕은 天子가 古代에 중요한 禮를 행할 때에 입었던 禮服과 帽子인데, 여기서는 唐나라 때에 孔子를 文宣王으로 諡號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4 名尊四子 不數臧倉 : 四子는 ≪論語≫, ≪大學≫, ≪中庸≫, ≪孟子≫를 가리킨다. 臧倉은 戰國時代 魯 平公의 嬖人으로 平公이 孟子를 만나보려 하였을 때에 만나지 못하게 저지했던 인물이다.
역주5 自古孰不有死……初未見於南邦 : 沅湘은 沅水와 湘水로 屈原이 참소를 받아 유배를 가서 자결했던 瀟湘江 일대를 말한다. 靈均은 戰國時代 楚나라 충신 屈原의 字이다. 屈原은 박식하고 治亂의 도에 밝은 사람으로 楚 懷王 때 벼슬하여 국정을 맡아 신임을 받았는데 襄王이 즉위한 뒤에는 참소를 받아 沅水, 湘水를 건너 남쪽 해변인 長沙로 귀양 갔다. ≪史記 권84 屈原賈生列傳≫
여기서는 元珍이 남쪽 지방인 諸曁縣의 현령이 되어 폐단을 없애고 산업을 일으켜 越나라 사람들이 循吏라고 칭송한 일을 屈原이 남쪽 지방인 長沙로 귀양 간 일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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