錄此以見歐公爲文이 其用意如此어늘 世之覽者不之知하고 其好訾之如彼라
然而公之沒이 且五百年矣로되 其知公而猶未盡其所欲訾公者를 猶時時見之하니 予不能無慨云이라
誌에 言 天下之人識與不識이 皆知師魯文學議論材能하니 則文學之長과 議論之高와 材能之美를 不言可知라하되
又恐太略일새 故條析其事하야 再述于後라 述其文則曰 簡而有法이라하니
此一句
는 在
에 惟春秋可當之
요 其他經非孔子自作文章
이라 故雖有法而不簡也
라
脩於師魯之文不薄矣나 而世之無識者는 不考文之輕重하고 但責言之多少하야 云 師魯文章不合秪著一句道了라
旣述其文하면 則又述其學하야 曰 通知古今이라하니 此語에 若必求其可當者면 惟孔孟也요
旣述其學하면 則又述其論議하야 云 是是非非를 務盡其道理하고 不苟止而妄隨라하니 亦非孟子不可當此語요
使天下之人으로 盡知師魯材能이면 此三者는 皆君子之極美나 然在師魯에 猶爲末事라
其大節은 乃篤於仁義하야 窮達禍福에 不媿古人하니 其事不可徧擧라 故擧其要者一兩事하야 以取信하노니
如上書論范公而自請同貶하고 臨死而語不及私에 則平生忠義를 可知也요 其臨窮達禍福에 不媿古人을 又可知也라
又言其死後妻子困窮之狀하니 欲使後世知有如此人이 以如此事廢死하고 至於妻子如此困窮하니
春秋之義
는 痛之益至
면 則其辭益深
하니 이 是也
요 詩人之意
는 責之愈切
이면 則其言愈緩
하니 가 是也
라
不必號天叫屈然後에 爲師魯稱寃也라 故於其銘文에 但云 藏之深하고 固之密하니 石可朽언정 銘不滅이라하니
意謂擧世無可告語라 但深藏牢埋하니 此銘使其不朽면 則後世必有知師魯者라
其語愈緩하며 其意愈切하니 詩人之意也어늘 而世之無識者乃云 銘文不合不講德이요 不辯師魯以非罪라하다
蓋爲前言其窮達禍福에 無媿古人하니 則必不犯法이온 況是讐人所告라 故不必區區曲辯也라
今止直言所坐에 自然知非罪矣로되 添之無害라 故勉徇議者添之라
若作古文自師魯始
는 則
及有大宋先達甚多
하니 不敢斷自師魯始也
라
은 苟合于理
면 未必爲非
라 故不是此而非彼也
라 라
誌云 師魯喜論兵이라하니 論兵은 儒者末事나 言喜無害라 喜非嬉戲之戲니 喜者는 好也라 君子固有所好矣니
이라하니 豈是薄顔回乎
아 後生小子
가 未經師友
하고 苟恣所見
이면 豈足聽哉
리오
는 便似孟郊詩
하고 與
作誌
는 便似樊文
하니 慕其如此
라
故師魯之誌에 用意特深而語簡하니 蓋爲師魯文簡而意深이요 又思平生作文에 惟師魯一見에 展卷疾讀하야 五行俱下에 便曉人深處라
因謂死者有知면 必受此文이라 所以慰吾亡友爾니 豈恤小子輩哉아
이를 수록하여, 歐公이 글을 지을 때 그 用意가 이와 같거늘 歐公의 글을 보는 세상 사람들이 歐公의 뜻을 알지 못하고 저렇게 헐뜯기 좋아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지만 공이 세상을 떠난 지 5백 년이 되어가는데도 공을 안다면서도 오히려 공을 헐뜯으려는 마음을 다 충족하지 못한 자를 아직도 때때로 볼 수가 있으니 내가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尹師魯墓誌〉에서 天下 사람 가운데 그를 아는 이나 모르는 이 모두 師魯의 文學과 議論과 材能을 알고 있으니 文學의 뛰어남과 議論의 고매함과 材能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또 글이 너무 간략한 것을 염려하였기에 그 사례를 조목별로 나누어 뒤에 거듭 서술하였다. 師魯의 文章을 서술한 부분에서는 簡潔하면서도 法度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한 句는 孔子의 六經 가운데 오직 ≪春秋≫만이 부합할 수 있고, 다른 經들은 공자가 직접 그 文章을 지은 것이 아니므로 비록 법도가 있다 하더라도 簡潔하지는 못한 것이다.
내가 師魯의 文章에 대해 박절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글의 輕重을 헤아리지 못하고 말의 분량만 놓고 따져서 師魯의 文章에 대해 이 한 句만 말해서는 마땅하지 않다고 말한다.
師魯의 문장을 서술하고는 또 그 學問을 서술하여 “고금의 일을 환히 알았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에 만약 굳이 해당될 만한 이를 찾아본다면 오직 孔子, 孟子일 뿐이다.
師魯의 학문을 서술하고는 또 師魯의 論議를 서술하여 “是是非非의 道理를 모두 궁구하기를 힘쓰고서야 〈그만두었고〉 구차하게 議論을 그치고 함부로 동조하여 따르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孟子가 아니면 이 말에 해당될 수 없다.
師魯의 論議를 서술하고는 또 師魯의 材能을 서술하여, 師魯의 貶謫 내력을 갖추어 말하고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師魯가 陝西에 있으면서 서쪽 변방의 일을 특히 깊이 알았으되 미처 시행해보지 못하고 趙元昊가 臣服하였고 師魯는 죄를 받았다.”라고 하였다.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師魯의 材能을 다 알게 한다면 이 세 가지(文學, 議論, 材能)는 모두 君子의 지극히 아름다운 점이지만, 師魯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말단적인 일이다.
그 大節은 바로 仁義에 篤實하여 窮達과 禍福에 있어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으니 그 사례들은 일일이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핵심적인 한두 가지 일을 들어 증거로 삼았으니,
이를테면 글을 올려 范公을 논하여 함께 폄적되기를 自請하고 죽음에 임하여 자기의 私事를 말하지 않은 데서 평생의 忠義를 알 수가 있고, 그가 窮達과 禍福에 임하여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음을 또 알 수가 있다.
이미 그 文章, 그 學問, 그 論議, 그 材能, 그 忠義를 말하고서, 마침내 또 그에게 원한을 품은 이가 감정을 품고 그를 論告한 일로 폄적되어 죽게 되었음을 말하였고,
또 그가 죽은 뒤 처자식들의 困窮한 상황을 말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이 이와 같은 일로 버려져 죽고 처자식들까지 이와 같이 곤궁하게 된 일을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죽은 이를 깊이 애통해하면서 당세의 군자들이 이 사람을 이 지경까지 내몬 것을 심히 책망한 것이다.
≪春秋≫의 의리는 애통함이 지극하면 지극할수록 그 言辭가 더욱 深切해지니 ‘子般이 卒하였다.’ 한 것이 이것이고, 〈≪詩經≫의〉 詩人의 뜻은 책망함이 절절하면 절절할수록 그 言辭가 더욱 완곡해지니 〈君子偕老〉편이 이것이다.
굳이 하늘에 부르짖고 억울함을 호소한 뒤에야 師魯를 위해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銘文에서 단지 ‘땅속 깊이 감추고 堅固하게 묻었으니 돌은 썩을 수 있을지언정 銘은 사라지지 않으리라.’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온 세상에 이런 말을 해줄 만한 사람이 없기에 단지 땅속 깊이 감추고 견고하게 묻으니 이 銘이 만약 썩지 않는다면 후세에 반드시 師魯를 알 자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 말이 더욱 완곡하며 그 뜻이 더욱 간절하니 詩人의 뜻인데 세상의 알지 못하는 자들은 도리어 “銘文에 師魯의 德을 말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師魯가 죄가 없음을 변론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그가 窮達과 禍福에 있어 옛사람에게 부끄러운 점이 없었다고 말하였으니 그가 반드시 법을 범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이 죄는 원한을 품은 사람이 誣告해서 받은 것이므로 굳이 구구하게 일일이 변명할 것이 없는 것이다.
지금 단지 죄에 연루된 곳을 곧바로 서술함에 자연스럽게 그의 죄가 아님을 알 수 있으나 말을 보태도 나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비판하는 자들의 주장을 애써 따라 말을 보태준 것이다.
古文이 師魯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쓰는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앞에 穆脩, 鄭條의 先輩 및 宋代의 先賢들이 매우 많으니 감히 師魯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偶儷의 문장은 이치에 부합하기만 하면 굳이 잘못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쪽(古文)을 옳다 하고 저쪽(騈文)을 그르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근래의 古文이 師魯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면 范公이 祭文에서 이미 이를 말하였다.
〈내 銘文과〉 상호 참조할 수 있으니 굳이 거듭 서술할 것이 없는 것이다. 皇甫湜의 〈韓文公墓誌〉와 李翶의 〈行狀〉이 반드시 같지는 않으니 또한 상호 참조할 수 있다.
墓誌에서 “師魯가 兵法 논하기를 좋아한다.[喜]”라고 하였는데, 병법을 논하는 일은 儒者의 지엽적인 일이나 좋아한다[喜]고 말해도 나쁠 것은 없다. 喜라는 것은 장난친다는 뜻인 嬉戲의 戲가 아니니, 喜라는 것은 좋아한다는[好] 뜻이다. 君子는 본디 좋아하는 것이 있다.
孔子께서 顔回는 학문을 좋아한다[好學]고 말씀하셨으니 어찌 이것이 顔回를 가볍게 본 것이겠는가. 뒤에 태어난 小子가 師友를 통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맘대로 말한다면 어찌 족히 들을 게 있겠는가.
내가 보건대, 韓退之가 孟郊에게 준 聯句는 孟郊의 詩와 흡사하고 樊宗師에게 지어준 墓誌는 樊宗師의 문장과 흡사하였으니, 韓退之가 이와 같이 그들을 欽慕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師魯의 墓誌를 지을 때 用意가 특히 깊었고 글이 簡潔하였던 것이니 師魯가 문장이 簡潔하면서도 意思가 深長하였다. 또 생각해보건대, 내가 평소 글을 지으면 오직 師魯가 한 번 보고는 책을 펴고 빠르게 읽어 다섯 줄을 함께 내려가면서 저자의 깊은 의중을 바로 알았다.
이로 인해 죽은 師魯가 앎이 있다면 반드시 내 이 글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내가 세상을 떠난 벗을 위로하는 것일 뿐이니, 어찌 小子 무리들을 고려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