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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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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其結胎 全在感當時事上하고 歸重於憤世
하야 曰 此 智者 識其性하야 當復中庸이요 愚者 雖讀此 不曉也 不作可焉이라하고
又讀하야 以謂翶特窮時憤世無薦已者 故丁寧如此하니 使其得志 亦未必然이라하고
以翶爲秦漢間好俠行義之一豪雋이요 亦善論人者也러라 最後讀然後 置書而歎하고 歎已復讀하야 不自休
恨翶不生於今하야 不得與之交하고 又恨予不得生翶時하야 與翶上下其論也러라
若翶獨不然하야 其賦曰 衆囂囂而雜處兮 咸歎老而嗟卑로다 로다하고
嗚呼 使當時君子皆易其歎老嗟悲之心하야 爲翶所憂之心이면 則唐之天下 豈有亂與亡哉
然翶幸不生今時하니 則其憂又甚矣 奈何今之人不憂也
余行天下 見人多矣 有一人能如翶憂者 又皆疏遠 與翶無異
其餘光榮而飽者 一聞憂世之言이면 不以爲狂人則以爲病癡子 不怒則笑之矣
嗚呼 在位而不肯自憂하고 又禁他人使皆不得憂하니 可歎也夫인저


09. 李翶의 글을 읽다
글의 발단이 모두 당시의 일에 대한 느낌을 서술하는 데 있고 世態憤激하는 데 중점을 돌렸다.
내가 처음 李翶의 〈復性書〉 3을 읽고서 “이는 ≪中庸≫의 義疏일 뿐이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을 알아 中庸을 회복할 것이고, 어리석은 자는 비록 이 글을 읽더라도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니 짓지 않는 게 옳다.”라고 하였고,
또 〈與韓侍郞薦賢書〉를 읽고서 “李翶가 단지 곤궁할 때 세상에서 자기를 천거해주는 이가 없는 데 분을 품었으므로 이와 같이 간곡하게 말하였을 뿐이니, 만약 그가 뜻을 얻었다면 또한 꼭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여기고서,
李翶秦漢시대의 俠氣를 좋아하고 義理를 실천하는 한 호걸이자 또한 남을 평론하기 좋아하는 자라고 여겼다. 그런데 최후에 〈幽懷賦〉를 읽은 뒤에는 글을 놓고 탄식하다가 탄식을 그치고 다시 읽기를 반복하면서 스스로 그만두지 못했다.
나는 李翶가 지금 세상에 태어나지 못해 그와 더불어 사귀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고, 또 내가 李翶 당시에 태어나서 李翶와 더불어 토론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게다가 李翶의 당대인으로 가 있으면서 문장을 잘 지은 이로는 韓愈만 한 이가 없었다. 韓愈가 일찍이 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두 마리 새의 光榮을 부러워하며 한 번도 배부른 적이 없었음을 탄식한 데 불과하였다.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나가게 되면 만약 光榮을 누리고 배부르게만 된다면 다시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고는 홀로 그렇지 않아서 그가 지은 에 “무리가 떠들썩하게 어지러이 모여 있음이여, 모두들 늙음을 탄식하면서 지위가 낮음을 한탄하도다. 내 마음이 그렇지 않음을 보니 세상에 아직도 도가 행해지지 못함을 염려하노라.”라고 하였고,
神堯가 한 무리의 군대로 천하를 취하였는데 후세의 자손들은 천하를 가지고 河北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며 근심으로 삼았다.
아, 만약 당시의 군자들이 모두 그 늙음을 탄식하고 一身을 서글퍼하는 마음을 바꾸어 이고가 근심했던 마음을 먹었다면 天下가 어찌 혼란에 빠지고 멸망하였겠는가.
그러나 李翶가 다행히 오늘날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지금의 일을 그가 본다면 그 근심이 더욱 깊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사람들은 근심하지 않는 것인가.
내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이 많으니 설령 그중에 이고처럼 근심할 수 있는 자가 있었다면, 또 모두 이고와 다름없이 疏遠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고,
이외에 光榮을 누리면서 배부른 자들은 세상을 근심하는 말을 듣기만 하면 미친 사람이라 여기지 않으면 愚昧한 사람이라고 여기고는 성내지 않으면 비웃을 것이다.
아, 국가를 다스리는 지위에 있으면서 스스로 근심하려고 하지 않는 데다, 또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지 못하게 금지하니 개탄할 노릇이다.


역주
역주1 讀李翶文 : 이 글은 歐陽脩가 景祐 3년(1036) 폄적지인 夷陵을 떠나는 도중에 지은 것이다. 李翶(772~841)는 字가 習之로, 唐代의 散文家인데 隴西 成紀 사람이다. 貞元 연간에 進士가 되어 벼슬이 山南東道節度使에 이르렀고 諡號는 文이다. 韓愈을 따라 古文을 배워 古文運動에 동조하였는바, 文風이 平易하였다. ≪李文公集≫이 있다.
역주2 予始讀翶復性書三篇 : 〈復性書〉는 李翶가 人性에 대해 논의한 철학 저술이다. 그는 儒家와 佛家 두 사상을 한데 버무려서 사람의 性은 하늘이 내린 것으로 선하고 情이 악한 것이라고 하면서 情이 어두워져서 性이 사라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正思’를 사용하여 사악한 情을 소멸시켜 ‘復性’의 경지에 이르러 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韓愈의 관점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으로 宋代 理學의 先驅가 된다.
역주3 中庸之義疏 : ≪中庸≫은 본래 ≪禮記≫의 한 편인데 뒤에 宋代 성리학자들에 의해 ‘四書’의 하나로 존중되었다. 전하는 말로는, 孔子의 손자 孔伋(子思)이 지었다고 한다. 義疏는 意義를 해석하는 문자, 즉 주석문자를 가리킨다.
역주4 與韓侍郞薦賢書 : 李翶가 吏部侍郞을 지낸 韓愈에게 써서 보낸 書信이다.
역주5 幽懷賦 : 李翶가 지은 賦로, 시대를 한탄하는 벗에게 화답하는 형식으로 唐代의 혼란상과 세상을 걱정하는 자신의 마음을 서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文苑英華 권98≫
역주6 愈嘗有賦矣……則不復云矣 : 韓愈는 出仕하기 전에 세 번 宰相들에게 自薦하는 글을 올렸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떤 사람이 흰 까마귀와 구관조[鸜鵒]를 새장에 넣어 황제에게 進獻하러 가는 것을 보고 〈感二鳥賦〉를 지었다. 그 賦에 “무지한 두 마리 새에 느낌이 일어나니 바야흐로 은혜 입고 도성에 들어가 총애 받겠구나. 진퇴가 나와는 다르니 내 마음의 수심을 돕는도다. 저의 마음이 무엇이 아름답겠는가. 그저 외면을 꾸미는 데 혈안이로다. 내 생명이 곤궁함이여, 저 두 마리 새보다 못하구나. 동서와 남북으로 흘러다녔어라, 십 년 동안 늘 잘 지내지 못했네. 배불리 먹는 것조차 운수가 있으니 하물며 천거의 글에 이름이 오르는 것임에랴. 세속이 좋아하는 것이 어진 것이니 어찌 내가 어리석지 않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역주7 視予心之不然兮 慮行道之猶非 : 唐代는 德宗, 順宗 이후로 戰亂이 그치지 않고 黨爭이 첨예하여 나라가 흔들리고 백성들이 날로 피폐해져 갔는데 이것이 李翶가 근심한 것이었다.
역주8 又怪神堯以一旅取天下 : 唐 高祖 李淵이 太原留守로 군대를 일으켜 천하를 평정한 일을 가리킨다. 神堯는 高祖의 廟號가 ‘神堯大聖大光孝皇帝’인 것에서 약칭한 것이다.
역주9 後世子孫不能以天下取河北 : 唐나라는 安史의 난 이후로 河北 等地에서 藩鎭들이 割據하여 전란이 그치지 않았는데 唐 왕조에서는 시종일관 收復할 방법이 없었다.
역주10 今之事 : 北宋 왕조가 西北 변방에서 여러 차례 遼와 西夏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줄곧 연약하게 무능한 모습만 드러내면서 구차하게 평안을 추구하려 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11 : ‘가령, 만일’의 뜻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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