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本世系以次하니 累欷悲慨之旨
其後微遠하야 不能譜錄이라가 府君之九代祖隱朝 始復得次序하니
하되 而猶爲弘農人이러니 堪生承休하니 是謂皇高祖
唐天祐元年 爲刑部員外郞이라 副給事中鄭祁하야 使吳越하야爲王이라가
亂江淮 道阻不克歸하야 遂留杭州 始分弘農之籍하야 籍錢塘이라하다
初承休之行也 挈其子巖以俱러니 巖仕吳越國하야 位至丞相하니 是謂皇曾祖
生尙書職方員外郞諱郾하니 是謂皇祖 生贈禮部尙書諱蠙하니 是謂皇考
府君幼失其父하고 有志節不群諸兒어늘 母元夫人獨愛之러라
夫人之喪尙書也 內外之姻 未嘗有見其笑者러니 府君生十歲 作雪賦一篇하니 始爲之笑러라
及長 尤好學하야 日必誦讀數萬言하야 或晝夜不息하고 臨食至失匕筯러니 已而病其目이라
元夫人奪藏其書하니 府君盜之하야 亡隣家以讀이러라
러라 三擧進士하야 端拱二年 中乙科하고
新昌縣令하고 遷著作佐郞 知德州하야 爲政有治迹이어늘 詔書褒之러라
府君 以祕書丞監在京商稅院하야 因奏犀賦한대
眞宗嘉之하야 召試學士院하고 遷太常博士하니 一時文士爭相傳誦이러라
不及明年하야 又上書自薦하야 獻所爲文二十餘萬言하니 乃直集賢院 하고
이러니 爲宰相不悅하야 以事罷之하고
卒坐考試國子監生하야 라가 逾年
丁元夫人憂하야 服除 判戶部勾院하니
然少孤能自立하야 力勤苦爲文章하고 履其身以儉約하야 不妄自爲進取
其官業行己之方 一皆自信於聖人之道하야 不肯少顧時之人所爲하고 而時之人亦以有德君子名之
故其直集賢院者하고 由太常博士 纔至刑部郞中하니 有出其後者 往往至榮顯이라
或有笑其違世自守하야 以質朴諷하야 使少改其爲者한대
府君歎曰 吾不學乎世而學乎聖人이라 由是以至此하니 吾之所有 不敢以薦於人이요 而嘗自獻於天子矣
今欲孰附以進邪아하니 其信道深篤하야 不可屈曲 如此러라
天聖四年 以久次 遷集賢修撰하고 出知應天府 이라가 轉兵部郞中이라
六年 年六十五 老矣 始召以知制誥 府君與 皆以好古有文行知名이라
然二人者皆久不用하야 遂以老러니 旣而一日竝用之
是時 學者稍相習하야 務婾窳爲文章하니 在位稍以爲患하야 皆以謂天子用耆老 將有意矣러니
하야 使近古道然後 以謂用二人皆不無意矣로되 而皆恨其晩也러라
居二歲 拜右諫議大夫 集賢院學士하고 出知하야 於州 封虢略縣男하니 食邑三百戶러라
明道二年四月十日 以疾卒於州之하니 年六十有九 其病將卒에도 猶不廢學이러라
有文三十卷하니 曰大隱集이요 又五卷하니 曰西垣集이라
嗚呼 畜其學以老하야 不克用하고 獨見於文章이라 然其文卒待一施於朝廷하야 遂位榮顯이라
旣貴 贈其皇考禮部尙書母太原郡太君이라 其婦曰漳南縣君張氏 後夫人南陽郡君亦張氏
廕其男하니 長曰洎 次曰濬 이요 次曰泳漸沆渢 皆將作監主簿
旣終 又廕二孫某官이라之及者三世이니 則夫守道者未必果不遇也
楊氏嘗以族顯於漢하야者四世
漢之亂 更魏涉晉하야 戕賊於夷胡하야 而漢之大人苗裔盡矣 比數百歲하야 下而及唐이나
으로 又以名顯於唐하고楊氏者 大以其族著러라
唐之亂 極於하야 下更 天下庬裂하야 焚蕩翦薙하니 而唐之名臣之後盡矣
又幾百年至于今이나 然楊氏之後獨在하야 及府君하야 又大顯이라
始震嘗有德於漢이로되 而死以無辜하니 君子悼震曰不幸이나 然孰知夫世不昌且久歟 而府君又畜其德하니 則孰知其後世又不然歟
於其葬也 是宜銘이니 蓋所以使後世之有考也 府君卒後若干年 以景祐二年某月某日 葬杭州某縣某鄕하다
이러니 及是合葬하니 自有誌
府君初名侃이러니 하야 改曰大雅 字子正이라
銘曰 楊氏之先 自震有聞이라 有盛有衰하야 世惟厥人이라
由漢迄今 更難冒亂하니 이라 府君之顯 不彰于初러니 其久不渝하야 卒克以敷
弘農之分 遂播南土러라 嗚呼 德則承先이요 而葬也塋于祖로다


05. 諫議大夫 楊公墓誌銘
世系에 근거하여 차례대로 서술하니 누차 탄식하고 슬퍼하고 慷慨하는 뜻이다.
府君杭州 錢塘 사람이다. 그 譜系에, 太尉 楊震 이후에 대대로 弘農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 후대는 희미하고 멀어져 譜系에 수록되지 못하다가 府君의 9대조 隱朝가 비로소 다시 譜系에 들게 되니,
거기에 “隱朝燕客을 낳고 燕客을 낳았는데 이때까지는 그대로 弘農 사람이었다. 그런데 承休를 낳으니 이분이 부군의 高祖이다.
나라 天祐 元年(904)에 刑部員外郞이 되었다. 給事中 鄭祁副使가 되어 吳越에 사신으로 가서 錢鏐으로 책봉하였다가
楊行密江淮에서 난을 일으키자 길이 막혀 돌아오지 못하여 마침내 杭州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비로소 弘農의 본적에서 떨어져 나와 錢塘을 본적으로 삼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承休가 사신으로 떠날 때 그 아들 을 데리고 함께 갔는데, 吳越國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丞相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부군의 曾祖이다.
증조가 尙書 職方員外郞 을 낳으니 이분이 부군의 조부이다. 조부는 贈禮部尙書 을 낳으니 이분이 부군의 부친이다.
府君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志節이 있어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으니 모친 元夫人이 유독 사랑하였다.
원부인이 남편 尙書公을 사별하였을 때 內外姻戚들이 부인이 웃는 모습을 본 자가 없었는데, 府君이 열 살이 되어 〈雪賦〉 한 을 짓자 비로소 웃음을 띠었다.
부군이 장성하자 더욱 학문을 좋아하여 날마다 반드시 수만 誦讀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기도 하고 밥상에서 수저와 젓가락을 떨어뜨리기까지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눈병이 났다.
원부인이 읽던 책을 빼앗아 감추니 부군이 책을 몰래 가져다 이웃집으로 달아나서 읽었다.
大宋天命을 받은지라 太宗皇帝가 즉위한 지 3년에 吳越 忠懿王京師朝會하고서 관할하던 땅과 그 文籍을 관장하는 관리에게 바치니 吳越國이 없어졌다.
〈부군은〉 그 조부를 따라 가족과 함께 떠나서 宋州寓居하였다. 세 번 進士應擧하여 端拱 2년(989)에 乙科에 급제하였다.
蔡州 新昌縣令을 역임하고 著作佐郞 知德州에 승진하여 政事治迹이 있자 詔書를 내려 褒獎하였다.
咸平 3년(1000)에 交趾에서 馴犀(길들인 무소)를 바쳤다. 府君祕書丞監으로 京商稅院에 있으면서 이 일로 인해 〈犀賦〉를 올리자
眞宗이 가상하게 여겨 學士院에 불러 시험하였고 太常博士로 승진하니 〈犀賦〉를 당시의 文士들이 다투어 傳誦하였다.
한 해가 가기 전에 다시 글을 올려 자신을 천거하여 작성한 글 20여만 자를 올리니 비로소 直集賢院 知袁筠二州 提點開封府界諸縣이 되었고
조정에 들어와 三司鹽鐵判官 知越州 提點淮南刑獄이 되었는데, 宰相 王文穆公에게 미움을 받아 어떤 일로 파직되었고
결국 國子監 生徒들을 考試한 일에 연루되어 監陳州榷酒에 폄적되었다가 이듬해에 知常州가 되었고 다시 조정에 들어와 三司判磨勘司가 되었다.
元夫人을 당하여 喪期를 마치고 判戶部勾院이 되니 자신을 천거한 때로부터 이때까지가 27년이었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자신을 확립하여 부지런히 힘쓰며 애써 문장을 공부하고 儉約하게 처신하여 함부로 스스로 進取를 꾀하지 않았다.
그 공무를 처리하고 처신하는 방도는 한결같이 모두 聖人를 자신하였고 당시 사람들의 행위는 조금도 돌아보려 하지 않았으며 당시 사람들 역시 덕이 있는 君子라고 일컬었다.
그래서 부군이 集賢院에서 근무한 27년 동안 官署를 옮기지 않고 太常博士에서 단지 刑部郞中으로 옮기기만 하였으니, 부군보다 뒤에 宦路에 들어선 자가 종종 더 현달하기까지 하였다.
부군이 세상과 어긋나며 자신을 지키는 것을 비웃으면서 너무 질박하다고 넌지시 말하여 조금 그 행실을 고치게 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부군이 탄식하면서 “나는 世態를 배우는 게 아니라 聖人을 배운다. 이를 통해 여기에 이른 것이니 내가 가진 것을 감히 남에게 드릴 수는 없고 天子께 직접 아뢴 적은 있었다.
지금 내가 누구에게 붙어서 進取하고자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부군이 매우 독실하게 도를 믿어 굽히지 않았던 것이 이와 같았다.
天聖 4년(1026)에 오래 官階가 정체되었다고 하여 集賢院修撰으로 승진하고 외직으로 나가 知應天府 同糾察在京刑獄이 되었다가 兵部郞中으로 옮겼다.
天聖 6년(1028)에 나이 65세가 되니 연로한지라 비로소 召命을 받아 知制誥가 되었다. 부군과 潁川 陳從易가 모두 옛것을 좋아하고 문장과 행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두 분은 모두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채 결국 늙어갔는데 얼마 있다가 일시에 함께 쓰이게 되었다.
이때에 배우는 자들이 점점 서로 습속에 젖어 비루하고 졸렬한 데만 힘쓰며 문장을 지으니 지위에 있는 분들이 점점 이를 근심으로 여겨서 모두 천자께서 耆老를 쓰신 것이 장차 뜻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또 詔書를 내려 배우는 자들에게 신칙하여 浮華文風을 금지하여 배우는 자들을 古道에 가까워지도록 하니, 그런 뒤에 관리들이 천자께서 이 두 분을 쓰신 것이 모두 뜻이 없지 않았다고 여겼으나 모두 그 시기가 늦은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두 해가 지나 右諫議大夫 集賢院學士에 임명되고 외직으로 나가 知亳州가 되어 亳州에 있을 때 虢略縣男에 봉해지니 食邑이 300였다.
明道 2년(1033) 4월 10일에 질병으로 亳州正寢에서 하니 향년 69세였다. 부군은 질병으로 임종할 즈음까지도 학문을 그만두지 않았다.
문집 30권이 있으니 ≪大隱集≫이고, 또 5권이 있으니 ≪西垣集≫이다.
아, 공은 그 학문을 쌓은 채 늙어가 조정에 쓰이지 못하고 그저 문장으로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그 문장이 마침내 조정에서 한번 베풀어지게 되면서 결국 현달한 지위에 이르게 되었다.
존귀해지자 부군의 부친은 禮部尙書에, 모친은 太原郡太君追贈되었다. 부군의 부인은 漳南縣君 張氏이고, 둘째 부인 南陽郡君 역시 張氏였다.
아들이 蔭職으로 나아가니, 맏아들 明州觀察支使이고 둘째 아들 江陰軍司理參軍이고 나머지 아들 , , , 은 모두 將作監主簿이다.
부군이 돌아가신 뒤에 또 음직으로 두 손자가 某官에 나아갔다. 부군의 餘慶이 3대에 이르렀으니, 도를 지키는 자가 반드시 정말로 불우하지는 않은 것이다.
아, 楊氏는 일찍이 그 종족이 나라에서 현달하여 三公이 된 분이 4대였다.
나라가 혼란해져 나라를 지나고 나라를 거치면서 오랑캐들(五胡)에게 짓밟혀서 漢代大人(世家)의 후예들이 다 사라지고 수백 년이 지나 아래로 唐代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楊氏의 후예만 유독 太和, 開成 연간에 살아남았으니, 汝士라는 분이 虞卿, 魯士, 漢公과 함께 다시 唐代에 이름이 드러났고, 靖恭坊에 살았던 楊氏는 크게 그 종족이 드러났다.
나라의 혼란이 懿宗, 僖宗, 昭宗 삼대에 극에 달하여 아래로 五代를 거치자 천하가 혼란하고 분열되어 쓸려나가고 파괴되니 나라의 名臣의 후예들이 다 사라졌다.
다시 몇 백 년이 지나 오늘에 이르렀으나 楊氏의 후예만 홀로 살아남아 부군에 이르러 다시 크게 현달하였다.
처음에 楊震漢代에 덕이 있었으나 무고한 죄로 죽으니 君子가 양진을 불행한 분이라고 애도하였다. 그렇지만 후대에 창성하고 장구하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는가. 부군이 또 그 덕을 쌓았으니 부군의 후세에 또 그러하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는가.
부군을 장사 지냄에 銘文을 짓는 것이 마땅하니 銘文은 후세 사람들이 상고할 수 있는 자료를 남겨주는 것이다. 부군이 졸하고 몇 해가 지나 景祐 2년(1035) 모월 모일에 杭州 某縣 某鄕에 장사 지냈다.
漳南縣君은 부군보다 26년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가 되어 合葬하였으니 따로 誌文이 있다.
부군은 初名이었는데 뒤에 眞宗皇帝舊名을 피하여 大雅로 개명하였고 子正이다.
은 다음과 같다. 楊氏先祖楊震에서부터 알려졌네 창성하거나 쇠미한 때 모두 대대로 훌륭한 조상이 있었네
漢代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누차 난리를 겪었으니 천 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각 왕조에서 세 번 드러났네 부군께서 현달한 것은 처음에 드러나지 않았는데 오래 지나도 뜻이 변치 않아 끝내 포부를 펼 수 있었네
弘農에서 나온 分派가 마침내 南土에 퍼지게 되었네 오호라 덕은 선조를 계승하고 葬地先塋에 모시었도다


역주
역주1 諫議大夫楊公墓誌銘 : 이 글은 歐陽脩가 繼室 楊氏의 부친 楊大雅(965~1033)를 위해 지은 것이다. 楊大雅는 明道 2년(1033) 4월에 졸하였는데, 본문의 내용에 근거하면 이 글은 歐陽脩가 景祐 2년(1035)에 지은 것이다.
역주2 府君 杭州錢塘人 : 府君은 唐代 이후에 죽은 자를 碑版에서 호칭할 때 쓰는 말이다. 杭州 錢塘은 옛 縣名으로, 宋代에는 兩浙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浙江省 杭州에 있었다.
역주3 漢太尉震之後 世出弘農 : 震은 楊震으로, 字는 伯超인데, 東漢 때 弘農 華陰 사람이다. 太守, 司徒, 太尉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安帝의 乳母 王聖과 中常侍 樊豐이 사치와 탐욕을 부리고 교만스럽게 굴자, 그가 여러 차례 글을 올려 極諫하였다가 樊豐의 무함을 받아 파직되고는 핍박을 받아 자살하였다. 弘農은 漢代의 郡名으로, 漢 武帝 元鼎 4년에 설치하였다.
역주4 隱朝生燕客 燕客生堪 : 楊堪이 楊燕客의 아들이자 楊隱朝의 손자라는 말이다. 그러나 ≪宋史≫ 〈楊大雅傳〉에는 楊堪의 부친이 楊虞卿이라고 하여 ≪新唐書≫ 〈楊虞卿傳〉의 기록과 같다. 그리고 ≪新唐書≫ 〈楊虞卿傳〉에 楊虞卿의 부친 성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에 인용한 家譜의 隱朝가 아니다.
역주5 錢鏐(류) : 五代 때 吳越國을 세운 사람이다. 唐代 말엽에 石鏡鎭의 장수 董昌을 따라 黃巢의 군대를 진압하여 鎭海節度使에 임명되었다. 乾寧 3년(896) 董昌의 반란을 평정하고 兩浙 지방을 모두 장악하였다. 天復 2년(902) 당나라로부터 越王에 봉해졌고 天祐 원년에 吳王으로 改封되었다.
역주6 楊行密 : 五代 때 吳國을 세운 사람이다. 唐代 말엽에 廬州에 자리잡고 군대를 일으켜 廬州刺史에 임명되었는데, 景福 원년(892)에 揚州를 빼앗고는 淮南節度使가 되어 淮南, 江東 지방을 점유하였다.
역주7 大宋受命……吳越國除 : ≪新五代史≫ 〈吳越世家〉에 “太平興國 3년(978)에 錢傶에게 入朝하라고 조서를 내리자 전척이 宗族을 이끌고 京師에 왔고 吳越國이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吳越 忠懿王은 바로 錢傶으로, 錢鏐의 손자인데 형 錢佐를 이어 吳越王이 되었다. 태평흥국 3년에 兩浙 13州를 바치고 宋나라에 귀순하니 鄧王에 봉해졌다. 端拱 원년(988)에 卒하니, 忠懿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역주8 隨其皇祖以族行 寓宋州 : 楊大雅의 조부 楊郾이 온 가족을 이끌고 北行하여 宋州에 寄居하였다는 말이다. 宋州는 宋代에 東京西路에 속하였다. 景德 3년(1006)에 승격하여 應天府가 되었고 大中祥符 7년(1014)에 南京이 되었다. 치소는 睢陽에 있었다.
역주9 蔡州新昌 : ≪宋史≫에는 蔡州에 新昌이라는 지명이 없으니 新息의 잘못인 듯하다. 京西北路에 속하였는데 지금의 河南省 息縣에 있었다.
역주10 咸平三年 交趾獻馴犀 : 交趾에서 馴犀를 바친 일이 ≪宋史≫ 〈眞宗紀〉와 〈外國傳4〉에는 모두 咸平 4년(1001)으로 되어 있으니, 여기서 咸平 3년이라고 한 것은 작자의 誤記이다. 交趾는 宋代에 安南, 越南의 竝稱이다.
역주11 知袁筠二州 提點開封府界諸縣 : 袁州는 江南西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宜春에 있었고, 筠州는 宋代에는 瑞州라고 하여 江南西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高安에 있었다. 提點開封府界諸縣은 提點開封府界諸縣鎭公事라고도 하는데 畿內 縣鎭의 刑獄, 盜賊, 場務, 河渠 등을 糾察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역주12 入爲三司鹽鐵判官……提點淮南刑獄 : 鹽鐵判官은 三司의 屬官으로, 三司 鹽鐵部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越州는 兩浙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會稽에 있었다. 淮南은 淮南路로, 宋代 至道十五路 가운데 하나인데, 치소는 揚州에 있었다.
역주13 王文穆公 : 王欽若으로, 字는 定國이다. 臨江軍 新喩 사람인데 淳化 연간 進士에 급제하였다. 咸平에서 大中祥符 연간 사이 參知政事, 樞密使를 역임하였고 天禧 원년(1017)에 재상에 임명되었다. 졸한 뒤 文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역주14 貶監陳州榷酒 : 陳州는 京西北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宛丘에 있었다.
역주15 得知常州 復入三司判磨勘司 : 常州는 兩浙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晉陵에 있었다. 磨勘司는 官署의 명칭으로, 磨勘院이라고도 불렀는데 관원들의 考核과 陞遷의 적절함을 살피는 일을 맡았다.
역주16 比自薦及是 二十七年矣 : 眞宗 咸平 4년에 楊大雅가 글을 올려 자신을 천거하고부터 判戶部勾院이 되기까지 27년이면 三司判戶部勾院이 되었을 때는 仁宗 天聖 2년(1024)이다.
역주17 二十七年不遷官 : ≪宋史≫ 本傳에는 ‘二十五年不遷’으로 되어 있다.
역주18 同糾察在京刑獄 : 大中祥符 2년(1009)에 糾察在京刑獄司를 설치하여 도성의 刑獄을 審査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御史臺와 開封府 등에서 판결한 徒刑 이상의 案件은 모두 이 官司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同糾察在京刑獄은 이 官司 장관의 副官이다.
역주19 潁川陳從易(이) : 陳從易는 字가 簡夫로 進士에 급제하여 여러 州의 推官을 역임하고 점점 승진하여 侍御史가 되어 여러 州의 知州를 역임하였다. 옛것을 좋아하고 행실이 독실하여 天聖 연간에 조정에서 文章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등용하여 左司郞中, 知制誥가 되었다. 潁川은 郡名으로 치소가 潁陰에 있었는데 北宋 前期에는 許州라고 칭하였다. ≪宋史≫ 〈陳從易傳〉에는 陳從易가 泉州 晉江 사람으로 되어 있고 潁川은 아닌데, 아마도 潁川은 선조의 본적인 듯하다.
역주20 又下詔書 勅學者禁浮華 : ≪宋史≫ 〈仁宗紀〉 天聖 7년 5월조에 “경신일에 文章의 폐단을 바로잡으라고 조서를 내렸다.”라고 하였다.
역주21 亳州 : 淮南東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譙(지금의 安徽省 亳縣)에 있었다.
역주22 正寢 : 古代에 천자, 제후가 늘 거처하며 정사를 보는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州衙를 가리킨다.
역주23 明州觀察支使 : 明州는 兩浙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覲見(지금의 浙江省 寧波)에 있었다. 觀察支使는 節度州 및 觀察州의 幕府에 속한 官職으로, 州의 政事를 보좌하면서 공문서를 총괄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역주24 江陰軍司理參軍 : 江陰은 五代 南唐 때 軍을 두었는데 宋代에는 여러 차례 廢置를 반복하였다. 치소는 江陰에 있었다. 司理參軍은 州의 보좌관으로 獄訟과 審問을 관장하였다.
역주25 餘慶 : 積善餘慶의 준말로, 善을 쌓으면 그 보답으로 복을 받고 惡을 지으면 그 보답으로 재앙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周易≫ 坤卦 〈文言傳〉에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餘慶이 있고, 불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餘殃이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26 三公 : 東漢 때 太尉, 司徒, 司空을 합칭하는 말이다.
역주27 楊氏之後……曰汝士者與虞卿魯士漢公 : 太和와 開成은 모두 唐 文宗 李昻의 연호(828~840)이다. 汝士는 楊汝士로, 字는 慕巢이다. 進士에 급제하여 開成 연간 초에 兵部侍郞을 역임하고 東川節度使가 되었고 刑部尙書에 이르렀다. 虞卿은 汝士의 형으로, 字는 師皐이다. 進士에 급제하고 博學宏辭科에 거듭 합격하여 校書郞이 되고 승진하여 監察御史가 되었다. 뒤에 李宗閔, 牛僧孺의 黨與가 되어 여러 차례 승진하여 右司郞中, 給事中, 工部侍郞, 京兆尹이 되었다. 魯士는 字가 宗尹으로, 制科에 급제하였다. 漢公은 字가 用乂로, 虞卿의 아들이다. 처음에 幕職에 있다가 여러 차례 승진하여 戶部郞中, 司封郞中, 同州刺史가 되었고 뒤에 宣武, 天平 節度使가 되었다.
역주28 靖恭坊 : 靜恭里라고도 하는데 唐代 長安城의 里坊으로 楊氏 가문이 이곳에 거주하였다.
역주29 懿僖昭三宗 : 唐代 말엽의 세 황제이다. 昭宗으로부터 哀帝에 이르러 오래지 않아 後梁에 멸망하였다.
역주30 五姓 : 五代를 가리키는바, 朱姓인 後梁, 李姓인 後唐, 石姓인 後晉, 劉姓인 後漢, 郭姓인 後周를 말한다.
역주31 漳南縣君 先府君二十六年以亡 : 본문 내용으로 추산해보면, 첫째 부인 張氏는 眞宗 大中祥符 원년(1008)에 세상을 떠났다.
역주32 後避眞宗皇帝舊名 : 宋 眞宗은 初名이 德昌이었는데 太平興國 8년(983)에 元休로 개명하였고 端拱 원년(988)에 元侃으로 개명하였으며 至道 원년(995) 太子를 세울 때 恒으로 개명하였다.
역주33 歷時千年 而世三顯 : 漢 安帝로부터 宋 仁宗 明道 연간까지 대략 900년인데 천 년이라고 말한 것은 成數를 든 것이다. 이 사이에 楊氏가 漢代에 처음 드러나고 唐代 중기에 다시 번성하고 宋代에 楊大雅에 이르러 다시 흥성하였으므로 ‘三顯’이라고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