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後微遠하야 不能譜錄이라가 府君之九代祖隱朝가 始復得次序하니
曰
하되 而猶爲弘農人
이러니 堪生承休
하니 是謂皇高祖
라
唐天祐元年
에 爲刑部員外郞
이라 副給事中鄭祁
하야 使吳越
하야 冊
爲王
이라가
亂江淮
에 道阻不克歸
하야 遂留杭州
라 始分弘農之籍
하야 籍錢塘
이라하다
初承休之行也에 挈其子巖以俱러니 巖仕吳越國하야 位至丞相하니 是謂皇曾祖라
生尙書職方員外郞諱郾하니 是謂皇祖라 生贈禮部尙書諱蠙하니 是謂皇考라
府君幼失其父하고 有志節不群諸兒어늘 母元夫人獨愛之러라
夫人之喪尙書也에 內外之姻이 未嘗有見其笑者러니 府君生十歲에 作雪賦一篇하니 始爲之笑러라
及長에 尤好學하야 日必誦讀數萬言하야 或晝夜不息하고 臨食至失匕筯러니 已而病其目이라
元夫人奪藏其書하니 府君盜之하야 亡隣家以讀이러라
歷
新昌縣令
하고 遷著作佐郞 知德州
하야 爲政有治迹
이어늘 詔書褒之
러라
라 府君
이 以祕書丞監在京商稅院
하야 因奏犀賦
한대
眞宗嘉之하야 召試學士院하고 遷太常博士하니 賦를 一時文士爭相傳誦이러라
不及明年
하야 又上書自薦
하야 獻所爲文二十餘萬言
하니 乃直集賢院
하고
然少孤能自立하야 力勤苦爲文章하고 履其身以儉約하야 不妄自爲進取라
其官業行己之方을 一皆自信於聖人之道하야 不肯少顧時之人所爲하고 而時之人亦以有德君子名之라
故其直集賢院者
하고 由太常博士
로 纔至刑部郞中
하니 有出其後者
가 往往至榮顯
이라
或有笑其違世自守하야 以質朴諷하야 使少改其爲者한대
府君歎曰 吾不學乎世而學乎聖人이라 由是以至此하니 吾之所有를 不敢以薦於人이요 而嘗自獻於天子矣라
今欲孰附以進邪아하니 其信道深篤하야 不可屈曲이 如此러라
天聖四年
에 以久次
로 遷集賢修撰
하고 出知應天府
이라가 轉兵部郞中
이라
六年
에 年六十五
니 老矣
라 始召以知制誥
라 府君與
가 皆以好古有文行知名
이라
然二人者皆久不用하야 遂以老러니 旣而一日竝用之라
是時에 學者稍相習하야 務婾窳爲文章하니 在位稍以爲患하야 皆以謂天子用耆老는 將有意矣러니
而
하야 使近古道然後
에 以謂用二人皆不無意矣
로되 而皆恨其晩也
러라
居二歲
에 拜右諫議大夫 集賢院學士
하고 出知
하야 於州
에 封虢略縣男
하니 食邑三百戶
러라
明道二年四月十日
에 以疾卒於州之
하니 年六十有九
라 其病將卒
에도 猶不廢學
이러라
有文三十卷하니 曰大隱集이요 又五卷하니 曰西垣集이라
嗚呼라 畜其學以老하야 不克用하고 獨見於文章이라 然其文卒待一施於朝廷하야 遂位榮顯이라
旣貴에 贈其皇考禮部尙書母太原郡太君이라 其婦曰漳南縣君張氏요 後夫人南陽郡君亦張氏라
廕其男
하니 長曰洎
는 요 次曰濬
은 이요 次曰泳漸沆渢
은 皆將作監主簿
라
旣終
에 又廕二孫某官
이라 其
之及者三世
이니 則夫守道者未必果不遇也
라
漢之亂에 更魏涉晉하야 戕賊於夷胡하야 而漢之大人苗裔盡矣라 比數百歲하야 下而及唐이나
然
으로 又以名顯於唐
하고 居
楊氏者
는 大以其族著
러라
唐之亂
이 極於
하야 下更
에 天下庬裂
하야 焚蕩翦薙
하니 而唐之名臣之後盡矣
라
又幾百年至于今이나 然楊氏之後獨在하야 及府君하야 又大顯이라
始震嘗有德於漢이로되 而死以無辜하니 君子悼震曰不幸이나 然孰知夫世不昌且久歟아 而府君又畜其德하니 則孰知其後世又不然歟아
於其葬也에 是宜銘이니 銘은 蓋所以使後世之有考也라 府君卒後若干年에 以景祐二年某月某日로 葬杭州某縣某鄕하다
銘曰 楊氏之先 自震有聞이라 有盛有衰하야 世惟厥人이라
由漢迄今
에 更難冒亂
하니 이라 府君之顯
은 不彰于初
러니 其久不渝
하야 卒克以敷
라
弘農之分이 遂播南土러라 嗚呼라 德則承先이요 而葬也塋于祖로다
世系에 근거하여 차례대로 서술하니 누차 탄식하고 슬퍼하고 慷慨하는 뜻이다.
府君은 杭州 錢塘 사람이다. 그 譜系에, 漢 太尉 楊震 이후에 대대로 弘農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 후대는 희미하고 멀어져 譜系에 수록되지 못하다가 府君의 9대조 隱朝가 비로소 다시 譜系에 들게 되니,
거기에 “隱朝는 燕客을 낳고 燕客은 堪을 낳았는데 이때까지는 그대로 弘農 사람이었다. 그런데 堪이 承休를 낳으니 이분이 부군의 高祖이다.
唐나라 天祐 元年(904)에 刑部員外郞이 되었다. 給事中 鄭祁의 副使가 되어 吳越에 사신으로 가서 錢鏐를 王으로 책봉하였다가
楊行密이 江淮에서 난을 일으키자 길이 막혀 돌아오지 못하여 마침내 杭州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비로소 弘農의 본적에서 떨어져 나와 錢塘을 본적으로 삼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承休가 사신으로 떠날 때 그 아들 巖을 데리고 함께 갔는데, 巖은 吳越國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丞相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부군의 曾祖이다.
증조가 尙書 職方員外郞 諱 郾을 낳으니 이분이 부군의 조부이다. 조부는 贈禮部尙書 諱 蠙을 낳으니 이분이 부군의 부친이다.
府君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志節이 있어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으니 모친 元夫人이 유독 사랑하였다.
원부인이 남편 尙書公을 사별하였을 때 內外의 姻戚들이 부인이 웃는 모습을 본 자가 없었는데, 府君이 열 살이 되어 〈雪賦〉 한 篇을 짓자 비로소 웃음을 띠었다.
부군이 장성하자 더욱 학문을 좋아하여 날마다 반드시 수만 字를 誦讀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기도 하고 밥상에서 수저와 젓가락을 떨어뜨리기까지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눈병이 났다.
원부인이 읽던 책을 빼앗아 감추니 부군이 책을 몰래 가져다 이웃집으로 달아나서 읽었다.
大宋이 天命을 받은지라 太宗皇帝가 즉위한 지 3년에 吳越 忠懿王이 京師에 朝會하고서 관할하던 땅과 그 文籍을 관장하는 관리에게 바치니 吳越國이 없어졌다.
〈부군은〉 그 조부를 따라 가족과 함께 떠나서 宋州에 寓居하였다. 세 번 進士에 應擧하여 端拱 2년(989)에 乙科에 급제하였다.
蔡州 新昌縣令을 역임하고 著作佐郞 知德州에 승진하여 政事에 治迹이 있자 詔書를 내려 褒獎하였다.
咸平 3년(1000)에 交趾에서 馴犀(길들인 무소)를 바쳤다. 府君이 祕書丞監으로 京商稅院에 있으면서 이 일로 인해 〈犀賦〉를 올리자
眞宗이 가상하게 여겨 學士院에 불러 시험하였고 太常博士로 승진하니 〈犀賦〉를 당시의 文士들이 다투어 傳誦하였다.
한 해가 가기 전에 다시 글을 올려 자신을 천거하여 작성한 글 20여만 자를 올리니 비로소 直集賢院 知袁筠二州 提點開封府界諸縣이 되었고
조정에 들어와 三司鹽鐵判官 知越州 提點淮南刑獄이 되었는데, 宰相 王文穆公에게 미움을 받아 어떤 일로 파직되었고
결국 國子監 生徒들을 考試한 일에 연루되어 監陳州榷酒에 폄적되었다가 이듬해에 知常州가 되었고 다시 조정에 들어와 三司判磨勘司가 되었다.
元夫人의 喪을 당하여 喪期를 마치고 判戶部勾院이 되니 자신을 천거한 때로부터 이때까지가 27년이었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자신을 확립하여 부지런히 힘쓰며 애써 문장을 공부하고 儉約하게 처신하여 함부로 스스로 進取를 꾀하지 않았다.
그 공무를 처리하고 처신하는 방도는 한결같이 모두 聖人의 道를 자신하였고 당시 사람들의 행위는 조금도 돌아보려 하지 않았으며 당시 사람들 역시 덕이 있는 君子라고 일컬었다.
그래서 부군이 集賢院에서 근무한 27년 동안 官署를 옮기지 않고 太常博士에서 단지 刑部郞中으로 옮기기만 하였으니, 부군보다 뒤에 宦路에 들어선 자가 종종 더 현달하기까지 하였다.
부군이 세상과 어긋나며 자신을 지키는 것을 비웃으면서 너무 질박하다고 넌지시 말하여 조금 그 행실을 고치게 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부군이 탄식하면서 “나는 世態를 배우는 게 아니라 聖人을 배운다. 이를 통해 여기에 이른 것이니 내가 가진 것을 감히 남에게 드릴 수는 없고 天子께 직접 아뢴 적은 있었다.
지금 내가 누구에게 붙어서 進取하고자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부군이 매우 독실하게 도를 믿어 굽히지 않았던 것이 이와 같았다.
天聖 4년(1026)에 오래 官階가 정체되었다고 하여 集賢院修撰으로 승진하고 외직으로 나가 知應天府 同糾察在京刑獄이 되었다가 兵部郞中으로 옮겼다.
天聖 6년(1028)에 나이 65세가 되니 연로한지라 비로소 召命을 받아 知制誥가 되었다. 부군과 潁川 陳從易가 모두 옛것을 좋아하고 문장과 행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두 분은 모두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채 결국 늙어갔는데 얼마 있다가 일시에 함께 쓰이게 되었다.
이때에 배우는 자들이 점점 서로 습속에 젖어 비루하고 졸렬한 데만 힘쓰며 문장을 지으니 지위에 있는 분들이 점점 이를 근심으로 여겨서 모두 천자께서 耆老를 쓰신 것이 장차 뜻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또 詔書를 내려 배우는 자들에게 신칙하여 浮華한 文風을 금지하여 배우는 자들을 古道에 가까워지도록 하니, 그런 뒤에 관리들이 천자께서 이 두 분을 쓰신 것이 모두 뜻이 없지 않았다고 여겼으나 모두 그 시기가 늦은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두 해가 지나 右諫議大夫 集賢院學士에 임명되고 외직으로 나가 知亳州가 되어 亳州에 있을 때 虢略縣男에 봉해지니 食邑이 300戶였다.
明道 2년(1033) 4월 10일에 질병으로 亳州의 正寢에서 卒하니 향년 69세였다. 부군은 질병으로 임종할 즈음까지도 학문을 그만두지 않았다.
문집 30권이 있으니 ≪大隱集≫이고, 또 5권이 있으니 ≪西垣集≫이다.
아, 공은 그 학문을 쌓은 채 늙어가 조정에 쓰이지 못하고 그저 문장으로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그 문장이 마침내 조정에서 한번 베풀어지게 되면서 결국 현달한 지위에 이르게 되었다.
존귀해지자 부군의 부친은 禮部尙書에, 모친은 太原郡太君에 追贈되었다. 부군의 부인은 漳南縣君 張氏이고, 둘째 부인 南陽郡君 역시 張氏였다.
아들이 蔭職으로 나아가니, 맏아들 洎는 明州觀察支使이고 둘째 아들 濬은 江陰軍司理參軍이고 나머지 아들 泳, 漸, 沆, 渢은 모두 將作監主簿이다.
부군이 돌아가신 뒤에 또 음직으로 두 손자가 某官에 나아갔다. 부군의 餘慶이 3대에 이르렀으니, 도를 지키는 자가 반드시 정말로 불우하지는 않은 것이다.
아, 楊氏는 일찍이 그 종족이 漢나라에서 현달하여 三公이 된 분이 4대였다.
漢나라가 혼란해져 魏나라를 지나고 晉나라를 거치면서 오랑캐들(五胡)에게 짓밟혀서 漢代의 大人(世家)의 후예들이 다 사라지고 수백 년이 지나 아래로 唐代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楊氏의 후예만 유독 太和, 開成 연간에 살아남았으니, 汝士라는 분이 虞卿, 魯士, 漢公과 함께 다시 唐代에 이름이 드러났고, 靖恭坊에 살았던 楊氏는 크게 그 종족이 드러났다.
唐나라의 혼란이 懿宗, 僖宗, 昭宗 삼대에 극에 달하여 아래로 五代를 거치자 천하가 혼란하고 분열되어 쓸려나가고 파괴되니 唐나라의 名臣의 후예들이 다 사라졌다.
다시 몇 백 년이 지나 오늘에 이르렀으나 楊氏의 후예만 홀로 살아남아 부군에 이르러 다시 크게 현달하였다.
처음에 楊震이 漢代에 덕이 있었으나 무고한 죄로 죽으니 君子가 양진을 불행한 분이라고 애도하였다. 그렇지만 후대에 창성하고 장구하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는가. 부군이 또 그 덕을 쌓았으니 부군의 후세에 또 그러하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는가.
부군을 장사 지냄에 銘文을 짓는 것이 마땅하니 銘文은 후세 사람들이 상고할 수 있는 자료를 남겨주는 것이다. 부군이 졸하고 몇 해가 지나 景祐 2년(1035) 모월 모일에 杭州 某縣 某鄕에 장사 지냈다.
漳南縣君은 부군보다 26년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가 되어 合葬하였으니 따로 誌文이 있다.
부군은 初名이 侃이었는데 뒤에 眞宗皇帝의 舊名을 피하여 大雅로 개명하였고 字는 子正이다.
銘은 다음과 같다. 楊氏의 先祖는 楊震에서부터 알려졌네 창성하거나 쇠미한 때 모두 대대로 훌륭한 조상이 있었네
漢代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누차 난리를 겪었으니 천 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각 왕조에서 세 번 드러났네 부군께서 현달한 것은 처음에 드러나지 않았는데 오래 지나도 뜻이 변치 않아 끝내 포부를 펼 수 있었네
弘農에서 나온 分派가 마침내 南土에 퍼지게 되었네 오호라 덕은 선조를 계승하고 葬地는 先塋에 모시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