歐陽公은 他文多本韓昌黎나 而其序次國家之大及謀臣戰將得失處는 余竊謂獨得太史公之遺라
其爲唐書
엔 則天子詔史官與
輩共爲分局視草
라 故僅得其志論十餘首
나
而五代史는 則出於公之所自勒者라 故梁唐帝紀及諸名臣戰功處에 往往點次如畫하야 風神燁然이라
惜也라 五代兵戈之世에 文字崩缺일새 公於其時에 特本野史與勢家鉅室家乘所傳者而爲之耳여
假令如太史公所本左傳國語戰國策楚漢春秋
와 又如
所得劉向
及
等書爲之本
하야
揚搉古今하고 詮次當世면 豈遽出其下哉리오 余錄若干首하고 稍爲品次而別傳之하야 以質世之有識者하노라 歸安鹿門茅坤題하노라
혹자가 나에게 묻기를 歐陽公에게 다시 史抄를 둔 것은 무엇 때문인가.
歐陽公은 다른 글은 대부분 韓昌黎(韓愈)를 본받았지만, 국가의 큰일 및 謀臣과 戰將의 득실을 차례로 논술한 부분은 太史公(司馬遷)의 遺法을 홀로 얻었다고 나는 내심 생각하고 있다.
≪新唐書≫를 편수할 때에는 천자가 조칙을 내려 史官과 宋庠 등이 함께 史局를 나누어 史草를 살피게 하였다. 그러므로 겨우 〈志論〉 10여 수뿐이었다.
그러나 ≪新五代史≫는 공이 스스로 편찬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梁本紀〉‧〈唐本紀〉 및 여러 名臣들의 戰功을 기록한 부분에 왕왕 그림같이 서술하여 文彩가 찬연하다.
안타깝다. 전쟁이 만연하던 五代의 시대에 문자가 붕괴되었기에 공이 그 당시에 다만 野史 및 勢力家와 富豪家의 家乘에 전해오던 것에 근거하여 ≪新五代史≫를 지음이여.
가령 太史公이 근본으로 삼았던 ≪春秋左氏傳≫‧≪國語≫‧≪戰國策≫‧≪楚漢春秋≫와, 또 班掾(班固)이 얻었던 劉向의 ≪東觀漢記≫와 ≪西京雜記≫ 등의 책을 근본으로 삼아
古今을 평론하고 當世를 서술하였다면 어찌 곧바로 저들보다 못하였겠는가. 내가 약간 수를 수록하고 조금 편차하여 별도로 전하여 세상의 식견 있는 자들에게 질정한다. 歸安 鹿門 茅坤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