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祖는 二弟三子니 弟曰崇曰信이요 子曰承訓承祐承勳이라 崇子曰贇이니 高祖愛之하야 以爲己子라
乾祐元年에 拜贇徐州節度使하고 承訓早卒에 追封魏王이라 承祐次立하니 是謂隱帝요 承勳爲開封尹이라
가 已敗漢兵于北郊
하고 隱帝遇弑
하니 太祖
가 入京師
하야 以謂漢大臣
은 必相推戴
러니
及見宰相馮道等하얀 道殊無意라 太祖不得已하야 見道猶下拜라 道受太祖拜하고 如平時徐勞之曰 公行良苦라하다
太祖意色皆沮
하야 以謂漢大臣未有推立己意
라하되 又難於自立
하야 因白
하야 擇立漢嗣
어늘
而宗室河東節度使崇等在者四人이 乃爲太后誥曰 河東節度使崇과 許州節度使信은 皆高祖之弟요
徐州節度使贇과 開封尹承勳은 皆高祖之子니 文武百辟이 其擇嗣君以承天統이라하다
於是에 周太祖가 與王峻入見하니 太后言 開封尹承勳은 高祖皇帝之子니 宜立이라하다
太后가 以承勳久病으로 不任爲嗣하니 太祖가 與群臣請見承勳하야 視起居라 太后命하야 以臥榻舁承勳出見群臣하니 群臣視之信然이라
乃共奏曰 徐州節度使贇은 高祖愛以爲子니 宜立爲嗣라하니 乃遣太師馮道하야 率群臣迎贇이라
道揣周太祖意不在贇하고 謂太祖曰 公此擧由衷乎아하니 太祖指天爲誓라 道旣行에 謂人曰 吾平生不爲謬語人이러니 今謬語矣라하다
道見贇하고 傳太后意召之라 贇이 行至宋州하니 太祖自澶州로 爲兵士擁還京師라
王峻이 慮贇左右生變하야 遣侍衛馬軍指揮使郭崇하야 以兵七百騎로 衛贇이라
崇至宋州에 贇登樓하야 問崇所以來之意하니 崇曰 澶州軍變이어늘 懼未察之하야 遣崇護衛요 非惡意也라하다
贇召崇하니 崇不敢進이라 馮道出與崇語하니 崇乃登樓見贇하고 已而오 奪贇部下兵이라
太祖以書召道先歸
하고 留其副趙上交王度奉贇入朝太后
하니 이라
贇謂道曰 寡人此來에 所恃者는 以公三十年舊相이라 是以로 不疑라하니 道默然이라
贇客將賈正等이 數目道하여 欲圖之한대 贇曰 勿草草하라 事豈出於公邪아하다
道已去에 郭崇幽贇于外館하고 殺賈正及判官董裔牙內都虞候劉福孔目官夏昭度等하다
太祖已
에 太后乃下詔曰 比者
에 樞密使郭威志安宗社
하야 議立長君
하야
以徐州節度使贇高祖近親으로 立爲漢嗣하야 乃自藩鎭으로 召赴京師라 雖誥命已行이나 而軍情不附하고 天道在北하여 人心靡東이라
適當
之初
하야 俾膺分土之命
하니 贇可降授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上柱國
하고 封湘陰公
이라하다 贇以幽死
라
初에 贇自徐州入也에 以都押牙鞏庭美敎練使楊溫으로 守徐州라 庭美等聞贇不得立하고 乃閉城拒命이라
太祖拜王彦超徐州節度使하고 下詔諭庭美等하야 許以刺史하고 幷詔贇赦庭美等이라
廣順元年三月에 彦超克徐州하니 庭美等皆見殺이라 承勳은 廣順元年에 以疾卒하고 追封陳王이라
嗚呼라 予旣悲湘陰公贇之事하고 又嘉鞏庭美楊溫之所爲라
贇
은 於漢非嫡長
이나 特以
移國
에 畏天下而難之
라 故假贇以伺間爾
라 當是之時
하야 天下皆知贇之必不立也
라
然庭美溫區區가 爲贇守孤城以死하니 其始終之迹이 何媿於死節之士哉아
然予考於實錄하니 二人之死狀不明이라 夫二人之事는 固知其無所成이나 其所重者는 死爾라 然史氏不著는 不知其何以死也일새라
當王彦超之攻徐州也에 周嘗遣人하야 招庭美等이라 予得其詔書四하니 皆言庭美等이 嘗已送款於周러니 後懼罪而復叛이라
然庭美等款狀亦不見
하니 是皆不可知也
라 夫史之闕文
은 可不愼哉
아 면 則信者信矣
라
予固嘉二人之忠하고 而悲其志라 然不得列於死節之士者는 惜哉라
〈
後漢의〉
高祖는 형제가 둘이고 아들이 셋이니, 아우는
崇과
信이고, 아들은
承訓‧
承祐‧
承勳이다.
崇의 아들이
贇이니
高祖가 아껴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後漢 高祖
乾祐 원년(948)에 贇을 徐州節度使에 배수하였고, 承訓이 일찍 졸하자 魏王에 追封되었다. 承祐가 다음으로 제위에 오르니 바로 隱帝이고, 承勳은 開封尹이 되었다.
周 太祖가 이미 北郊에서 漢나라 군사를 패퇴시키고 隱帝가 시해당하자 태조가 京師로 들어와 漢나라 대신들은 반드시 서로 자신을 추대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宰相 馮道 등을 만나봄에 풍도는 전혀 그런 뜻이 없었다. 태조가 부득이 풍도를 보고는 자신이 오히려 下拜하였다. 풍도는 태조의 절을 받고도 평시와 다름없이 천천히 위로하여 말하기를 “공은 오느라 몹시 고생하셨소.”라고 하였다.
태조가 마음과 얼굴에 모두 실망한 기색을 띠고 漢나라 대신들은 자신을 皇帝로 추대할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되, 또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르기는 어려워 인하여 漢나라 太后에게 아뢰어 漢나라의 後嗣를 선택하게 하였다.
그런데 宗室인 河東節度使 劉崇 등 생존해 있는 네 사람이 이에 태후에게 말하기를 “하동절도사 유숭과 許州節度使 劉信은 모두 高祖의 아우이고,
徐州節度使 劉贇과 開封尹 劉承勳은 모두 고조의 아들이니, 文武 百官들이 嗣君을 택하여 天統을 잇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周 太祖가 王峻과 함께 들어가 뵈니, 太后가 “開封尹 劉承勳은 高祖皇帝의 아들이니, 마땅히 後嗣로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유승훈이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후사로 삼지 못하니, 太祖가 군신들과 함께 유승훈을 보고 안부를 살필 수 있게 해달라 청하였다. 태후가 명하여 臥榻에 유승훈을 싣고 나와 군신들에게 보이니, 군신들이 이를 보고서야 믿었다.
이에 함께 주청하기를 “徐州節度使 劉贇은 高祖께서 아껴 아들로 삼았으니 당연히 후사로 세워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太師 馮道를 보내 신하들을 거느리고 가 유빈을 맞이하게 하였다.
馮道가 周 太祖의 뜻이 劉贇에게 있지 않음을 헤아려 알고 태조에게 말하기를 “공께서는 이 일을 衷心에서 우러나와 하신 것입니까?”라고 하니, 태조가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였다. 풍도가 떠난 뒤에 태조가 남에게 말하기를 “나는 평소 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에야 거짓말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풍도가 유빈을 만나 太后의 뜻을 전하여 불렀다. 유빈이 上京하다 宋州에 이르니, 태조가 澶州에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京師를 에워쌌다.
王峻이 유빈의 주변 사람이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侍衛馬軍指揮使 郭崇을 보내 7백 명의 기마병으로 유빈을 호위하게 하였다.
곽숭이 송주에 이르자 유빈이 樓에 올라 곽숭에게 여기에 온 의도를 물으니, 곽숭이 말하기를 “전주의 군사가 변란을 일으켰는데, 아직 이 사실을 모를까 걱정되어 저를 보내 호위하게 한 것이니 나쁜 의도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유빈이 곽숭을 부르니, 곽숭이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풍도가 나와 곽숭과 더불어 말하니, 곽숭이 이에 樓에 올라 유빈을 만나보고는 얼마 뒤에 유빈에게 예속된 병사를 빼앗았다.
太祖가 글을 보내 馮道를 불러 먼저 돌아오게 하고 副官 趙上交와 王度를 남겨두어 劉贇을 모시고 들어와 太后를 뵙게 했는데 풍도가 먼저 돌아왔다.
유빈이 풍도에게 말하기를 “과인이 이곳에 올 때에 믿었던 것은 공이 30년 동안 宰相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않았다.”라고 하니 풍도는 묵묵히 있었다.
유빈의 客將 賈正 등이 자주 풍도를 주시하며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유빈이 말하기를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 이 일이 어찌 풍도에 의해 계획된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풍도가 떠나자 郭崇이 外館에 유빈을 유폐시키고 賈正, 判官 董裔, 牙內都虞候 劉福, 孔目官 夏昭度 등을 살해하였다.
太祖가 監國이 되자 太后가 이에 詔書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근자에 樞密使 郭威가 宗社를 안정시킬 뜻을 가지고 장성한 사람을 군주로 옹립할 것을 의논하여,
徐州節度使 劉贇이 高祖의 近親이라는 이유로 漢나라의 嗣君으로 옹립하여 이에 藩鎭으로부터 불러 京師로 오게 하였다. 비록 誥命이 이미 공포되었으나 軍心이 유빈에게 귀부하지 않고 天道가 北方에 있어 人心이 동쪽으로 향하지 않는다.
마침 改卜하는 초기에 토지를 分封하는 명을 받게 하니, 유빈을 강등하여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上柱國을 제수하고 湘陰公에 봉한다.” 유빈은 유폐되어 죽었다.
당초에 劉贇이 徐州로부터 京師에 들어올 때 都押牙 鞏庭美와 敎練使 楊溫에게 徐州를 지키게 하였다. 공정미 등이 유빈이 옹립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에 성문을 닫고 抗命하였다.
太祖가 王彦超를 徐州節度使에 배수하고 詔書를 내려 공정미 등을 회유하여 刺史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아울러 유빈에게 조서를 내려 공정미 등을 용서하게 하였다.
廣順 원년(951) 3월에 왕언초가 徐州를 점령하니 공정미 등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劉承勳은 광순 원년에 병으로 졸하고 陳王에 追封되었다.
오호라. 나는 이미 湘陰公 劉贇의 일을 슬퍼하고, 또 鞏庭美와 楊溫이 한 일을 가상히 여긴다.
유빈은 漢나라의 嫡長子가 아니지만 다만 周氏(郭威)가 나라를 찬탈하려 함에 천하를 두려워하여 난감해하였으므로 유빈을 임시로 내세워 틈을 엿본 것일 뿐이다. 이러한 때에 천하 사람들은 모두 유빈이 반드시 옹립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공정미와 양온은 유빈을 위하여 외로운 성을 지키다 죽었으니, 始終의 자취가 어찌 死節한 선비에게 부끄러울 것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實錄을 상고해보니, 두 사람의 죽은 정황이 분명하지 않았다. 저 두 사람의 일은 성취한 바는 없는 줄을 잘 알지만 중요한 점은 사절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史官이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王彦超가 徐州를 공격할 때에 周 太祖가 일찍이 사람을 보내 공정미 등을 불렀다. 내가 詔書 네 편을 보았더니, 모두 공정미 등이 일찍이 주 태조에게 항복문서를 이미 보냈는데, 뒤에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정미 등의 항복문서 또한 보이지 않으니 이는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대저 史官이 闕文하는 것은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심되는 것을 의심되는 대로 기록한다면 확실한 것은 확신하게 될 것이다.
나는 실로 두 사람의 충성을 가상히 여기고 그 뜻을 서글퍼한다. 그러나 사절한 선비에 끼이지 못한 점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