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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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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覽歐公序次本末하니 昭宗當時未必有除全忠之心이나 而中外流傳 不無如是
所以全忠非惟不敢赴召 幷敬翔亦麾之使去 所以上下積猜하야 釀成簒弑之亂이니 悲夫
敬翔 字子振이요 同州馮翊人也 自言唐平陽王暉之後 少好學하고 이라
中擧進士하야 不中이어늘 乃客大梁하다 翔同里人王發 爲汴州觀察支使하야 遂往依焉이러니
久之 發無所薦引하니 翔客益窘하야 爲人作하야 傳之軍中이라
素不知書 翔所作 皆俚俗語로되 太祖愛之하야 謂發曰 聞君有故人하니 可與俱來라하다
翔見太祖 太祖問曰 聞子讀春秋라하니 春秋所記何等事오하다 翔曰 諸侯爭戰之事耳
太祖曰 其用兵之法 可以爲吾用乎아하니 翔曰 兵者 應變出以取勝이니 春秋古法 不可用於今이라하다
太祖大喜하야 補以軍職하니 非其所好 乃以爲館驛巡官하다
太祖與蔡人戰汴郊 翔時時爲太祖謀畫하야 多中이라 太祖欣然以謂得翔之晩이라하고 動靜 輒以問之하다
太祖奉昭宗하야 自岐還長安 昭宗 召翔與李振하야 升延喜樓하야 勞之하고 拜翔太府卿하다
太祖常侍殿上이러니 昭宗意衛兵有能擒之者라하고 乃佯爲鞋結解하야 以顧太祖
太祖跪而結之 而左右無敢動者하니 太祖流汗洽背 由此 稀復進見이라
昭宗 遷洛陽하야 宴崇勳殿할새 酒半하야 使人召太祖入內殿하니 將有所託일새라
太祖益懼하야 辭以疾하니 昭宗曰 卿不欲來하니 可使敬翔來라한대 太祖遽麾翔出하니 翔亦佯醉去
太祖已破趙匡凝하야 取荊襄하고 遂攻淮南이라 翔切諫하야 以謂新勝之兵 宜持重以養威라하니 太祖不聽이라
然益以爲可信任이라 梁之簒弑 翔之謀爲多러니
太祖卽位하야 以唐樞密院故用宦者 乃改爲崇政院하야 以翔爲使 遷兵部尙書金鑾殿大學士
翔爲人深沈하고 有大略하야
翔亦盡心勤勞하야 晝夜不寐하고 自言惟馬上乃得休息이라하고
而太祖剛暴難近이라 有所不可 翔亦未嘗顯言하고 微開其端하니 太祖意悟하야 多爲之改易이라
太祖破徐州하고寵姬劉氏하야 愛幸之하니 劉氏 故尙讓妻也 乃以妻翔이라
翔已貴 劉氏猶侍太祖하야 出入臥內 如平時하니 翔頗患之
劉氏誚翔하야 曰 爾以我嘗失身於賊乎 尙讓 이요 時溥 國之忠臣이라
以卿門地 猶爲辱我하니 請從此訣矣라하니 翔以太祖故 謝而止之
劉氏車服驕侈하고 別置하야 交結藩鎭하야 權貴往往附之하니 寵信言事 不下於翔이라 當時貴家往往效之
太祖崩하고 以翔先帝謀臣으로 懼其圖己하야 不欲翔居內職이라
乃以李振代翔하야 爲崇政使하고 拜翔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하니 翔以友珪畏己하야 多稱疾하야 未嘗省事
卽位 趙巖等 用事하야 頗離間舊臣하니 翔愈鬱鬱不得志 其後 梁盡失河北하고 與晉相距楊劉
翔曰 故時 河朔半在 以先帝之武 御貔虎之臣이로대 猶不得志於晉이라
今晉日益彊하고 梁日益削이로대 陛下處深宮之中하야 計事者 非其近習이면 則皆親戚之私 而望成事乎
臣聞晉攻楊劉 負薪渡水하야 爲士卒先이라
陛下委蛇하야 以儒雅自喜하야 而遣賀環爲將하니 豈足當彼之餘鋒乎
臣雖憊矣 受國恩深하니 若其乏材인댄 願得自效 巖等 以翔爲怨言하야 遂不用이라
其後王彦章 敗于中都하니 末帝懼하야 召段凝於河上이라 是時 梁精兵 悉在凝軍한대 凝有異志하야 顧望不來
末帝遽呼翔曰 朕居常忽卿言이러니 今急矣 勿以爲懟하고 卿其敎我當安歸오하니
翔曰 臣從先帝三十餘年이러니 今雖爲相이나 實朱氏老奴爾 事陛下如郞君하니 以臣之心으로 敢有所隱이리오
陛下初用段凝 臣已爭之러니 今凝不來하고 敵勢已迫이라
欲爲陛下謀 則小人間之하야 必不見聽하리니 請先死하야 不忍見宗廟之亡이라하니 君臣相向慟哭이라
翔與李振俱爲太祖所信任이라 莊宗入汴하야 詔赦梁群臣한대 李振喜謂翔曰 有詔洗滌하니 將朝新君이라하고 邀翔欲俱入見이라
翔夜止高頭車坊이러니 將旦 左右報曰 崇政李公入朝矣라하다 翔歎曰 李振 謬爲丈夫矣로다 復何面目入梁建國門乎아하고 乃自經而卒하다


02. 敬翔傳記
歐陽公序次本末을 보니, 昭宗은 당시에 반드시 朱全忠을 제거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中外에 퍼진 소문은 이와 같음이 없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주전충이 감히 召命에 달려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주전충이 敬翔까지도 물리쳐 떠나게 하였다. 이런 이유로 上下가 의심을 쌓아 簒奪弑逆의 난을 양성한 것이니, 슬프다.
敬翔子振이고 同州 馮翊 사람이며 스스로 나라 平陽王 敬暉의 후손이라 하였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였고 문서 기록을 공교롭게 잘하였다.
乾符 연간에 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자 이에 大梁에 가서 타향살이하였다. 경상의 같은 향리 사람 王發汴州觀察支使가 되었기에 마침내 그에게 가서 의탁하였는데,
오래도록 왕발이 자신을 추천해주지 않자 경상은 객지에서 더욱 곤궁해져 남을 위해 牋刺를 써서 軍中에 전해주는 일을 하였다.
後梁 太祖가 평소 글을 알지 못한지라 敬翔이 지은 글은 모두 비속한 말인데도 태조가 이를 좋아하여 王發에게 “그대에게 친구가 있다고 들었으니 함께 나에게 오라.”라고 하였다.
경상이 태조를 뵙자 태조가 묻기를 “그대가 ≪春秋≫를 읽었다고 하니, ≪춘추≫에 기록한 바는 무슨 일인가?”라고 하였다. 경상이 말하기를 “제후들이 전쟁했던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춘추≫에 用兵한 방법을 우리가 쓸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경상이 대답하기를 “전쟁은 변화에 대응하여 를 내어 승리를 취하는 것이니, ≪춘추≫의 옛 用兵術은 지금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軍職을 맡겼는데 그가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에 館驛巡官으로 삼았다.
太祖蔡州의 사람들과 汴州郊外에서 전투를 할 때에 敬翔이 때때로 태조를 위하여 계책을 세워 적중한 것이 많았다. 태조가 기뻐하여 경상을 얻은 것이 늦었다고 하면서 모든 일마다 매번 그에게 물었다.
태조가 昭宗을 모시고 岐州로부터 長安으로 돌아오자 소종이 경상과 李振을 불러 延喜樓에 오르게 하여 치하하고 경상을 太府卿에 배수하였다.
당초에 太祖가 늘 殿上에서 〈昭宗을〉 모셨는데, 소종이 衛兵 중에 태조를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에 거짓으로 신발 끈을 풀고서 태조를 돌아보았다.
태조가 무릎을 꿇고 끈을 묶었지만 좌우에서 감히 움직이는 사람이 없으니, 태조가 땀을 흘려 등이 다 젖었다. 이로부터 다시 소종에게 나아가 뵙는 일이 드물어졌다.
소종이 洛陽으로 遷都하고 崇勳殿에서 연회를 베풀 때 술이 몇 차례 돌자 〈소종이〉 일어나 사람을 시켜 태조를 불러 內殿으로 들게 하니, 장차 부탁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가 더욱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사양하니, 소종이 말하기를 “이 오려고 하지 않으니, 敬翔을 오게 하라.”라고 하자 태조가 갑자기 경상에게 손을 내저어 나가게 하니, 경상도 술에 취한 척하며 떠났다.
太祖趙匡凝을 이미 격파하여 荊州襄州를 점령하고 마침내 淮南을 공격하였다. 敬翔이 간절하게 간하여 “새로 승리한 군사는 신중을 기해 威嚴을 길러야 합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듣지 않았다.
군사가 光州로 나갔다가 큰 비를 만나 거의 진군하지 못하였고, 진군하여 壽州를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많이 亡失하니, 태조가 비로소 크게 후회하고서 돌아와 분해하고 조급해져 나라 大臣들을 거의 다 죽였다.
그러나 더욱 경상을 신임할 만하다고 여겼다. 나라가 찬탈하고 시해할 때에 경상이 계획한 것이 많았는데,
태조가 즉위하여 나라의 樞密院은 예로부터 宦官을 등용하였다는 이유로 이에 崇政院으로 바꾸고 경상을 崇政使로 삼았다. 후에 兵部尙書 金鑾殿大學士로 옮겼다.
敬翔은 사람이 침착하고 큰 계략이 있어 太祖를 따라 용병한 지 3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軍務에 반드시 관계하였다.
경상은 또한 誠心을 다해 일하여 밤낮으로 잠도 자지 않고 스스로 “오직 말 위가 바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조가 강포하여 가까이하기 어렵기에 〈태조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으면 경상도 드러내 말한 적이 없고 은미하게 그 단서만 약간 열어 보이니, 태조가 깨달아 고친 것이 많았다.
태조가 徐州를 격파하고 時溥의 애첩인 劉氏를 얻어 총애하였다. 유씨는 죽은 尙讓의 아내인지라 이에 경상의 아내로 삼아주었다.
경상이 이미 현달하였지만 유씨는 여전히 태조를 모시며 태조의 처소에 출입하는 것이 평시와 같으니, 경상이 이를 퍽 근심하였다.
유씨가 경상을 꾸짖어 말하기를 “당신은 내가 에게 몸을 잃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상양은 黃家宰相이고, 時溥는 나라의 忠臣입니다.
이 가진 문벌의 지위로 오히려 나를 욕보이려 하니 이로부터 서로 헤어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경상이 태조와의 관계 때문에 사죄하고 만류하였다.
劉氏는 수레와 옷이 사치스러웠고 별도로 典謁을 두어 藩鎭과 교류하여 權貴들이 왕왕 歸附하니, 〈太祖가 유씨의〉 言事를 총애하여 신뢰하는 것이 敬翔보다 못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부귀한 집안들이 종종 이를 본받았다.
태조가 崩御하고 朱友珪가 즉위하여 경상이 先帝謀臣으로 자신을 도모할까 두려워 경상을 內職에 두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경상을 대신해 李振崇政使로 삼고 경상을 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하니, 경상은 주우규가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기고 걸핏하면 병을 핑계 대고 업무를 보지 않을 때가 많았다.
末帝가 즉위하자 趙巖 등이 일을 천단하여 舊臣들을 이간하니, 敬翔은 더욱 뜻을 펴지 못한 채 울울하였다. 그 뒤에 나라가 河北을 모두 잃고 나라와 楊劉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경상이 말하기를 “옛날 河朔(河北)을 반쯤 소유하였을 때에 先帝武勇으로 貔貅(비휴)와 범 같은 武臣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나라를 무너뜨리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나라는 날로 더욱 강성해지고 나라는 날로 땅이 줄어드는데 폐하께서는 깊은 궁궐 안에 계시면서 함께 일을 계획하는 사람은 近習이 아니면 모두 사사로운 친척뿐이니,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나라가 양류를 공격할 때에 李亞子(李存勖)가 섶을 짊어지고 물을 건너 군사들의 솔선수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느긋하게 守文하여 박학한 선비를 스스로 좋아하여 賀環을 보내 將帥로 삼았으니, 어찌 저들의 날선 銳鋒을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신은 비록 노쇠했으나 國恩을 받은 것이 심중하니, 만약 인재가 없다면 스스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趙巖 등이 경상이 원망하는 말을 한다고 여겨 끝내 쓰지 않았다.
후에 王彦章中都에서 패하니, 末帝가 두려워하여 段凝黃河로 불렀다. 이때에 나라 정예병은 모두 단응의 군사로 편입되어 있었는데, 단응이 딴마음을 품고 관망만 할 뿐 오지 않았다.
말제가 급히 敬翔을 불러 “이 평소에 의 말을 홀대하였는데, 이제는 급박한 상황이다. 원망하지 말고 경은 내가 응당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달라.”라고 하였다.
경상이 말하기를 “신이 先帝를 따른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지금 비록 재상이라고는 하지만 실로 朱氏의 늙은 종일 뿐입니다. 폐하를 郞君처럼 섬겼으니, 신의 마음을 감히 숨기는 바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처음 단응을 등용하셨을 때에 신이 이미 諫諍하여 말렸는데, 지금 단응은 오지 않고 적의 大軍이 이미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폐하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자 한다면 小人이 이간질하여 반드시 저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니, 청컨대 신이 먼저 죽어 宗廟가 망하는 것을 차마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君臣이 서로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敬翔李振은 모두 太祖에게 신임받던 신하였다. 後唐 莊宗이 〈나라를 멸망시키고〉 汴州로 들어와 詔書를 내려 나라의 군신들을 사면하자 이진이 기뻐하며 경상에게 “조서가 내려와 죄를 씻어준다 하니 새로운 군주를 朝見(조현)할 것이다.”라고 하고 경상을 불러 함께 들어가 조현하고자 하였다.
경상이 밤에 高頭車坊에 머물러 있었는데, 날이 밝으려 할 때에 시종이 아뢰기를 “崇政使 李公入朝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경상이 탄식하며 “이진은 그릇된 장부가 되었다. 다시 무슨 낯으로 나라의 建國門을 들어간단 말인가?”라고 하고 이에 스스로 목을 매어 하였다.


역주
역주1 敬翔傳 : 敬翔(?~923 字가 子振으로 同州 馮翊 사람이며 스스로 唐나라 平陽王 敬暉의 후손이라 하였다. 경상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18 〈梁書 第18 列傳 第8〉, 그리고 ≪新五代史≫ 卷21 〈梁臣傳 第9〉에 각각 실려 있다.
이 열전은 경상이 後梁 太祖 朱全忠의 신임을 얻어 唐나라를 멸망시키는 과정, 후량을 건국한 뒤의 행적, 후량이 국난을 당했을 때 충절을 바치는 모습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경상은 唐나라 乾符 연간에 進士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객지에서 곤궁해져 남을 위해 牋刺를 써서 軍中에 전해주는 일을 하다 후량 태조에게 신임을 얻어 30여 년간 크고 작은 軍務를 관할하였고, 태조에게 忠言을 아끼지 않는 충신이 되었다. 특히 경상은 침착하고 큰 계략이 있어 30여 년간 태조를 위해 軍務를 관할하며 성공한 일이 많았고, 밤낮으로 잠도 자지 않고 스스로 “오직 말 위가 바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며 성심을 다해 일하였다.
하지만 朱友珪가 태조를 시해하고 즉위하자 경상이 先帝의 謀臣으로 자신을 도모할까 두려워 內職에 두지 않았는데, 경상은 주우규가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기고 병을 핑계 대고 업무를 보지 않을 때가 많았다. 末帝가 즉위하자 趙巖 등이 일을 천단하여 舊臣들을 이간하니 경상은 더욱 뜻을 펴지 못한 채 울울하였다. 梁나라가 河北을 모두 잃고 晉나라와 楊劉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노구를 이끌고 전쟁에 참전하기를 청하였으나 간신들의 참소로 인해 저지되었고, 후에 梁나라가 晉나라에 멸망당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경상은 혼탁한 五代時代에 보기 드문 업적과 충절을 남겼다. 하지만 歐陽脩는 그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렸다. 구양수는 ≪新五代史≫ 〈唐莊宗本紀〉에 “기묘년에 梁나라를 멸망시키자 敬翔이 자살하였다.[已卯滅梁敬翔自殺]”라고 기록하였는데, 구양수의 제자 徐無黨은 ‘死’라고 쓰지 않고 ‘自殺’이라 기술한 것에 대해 “경상은 梁나라의 신하가 되어 양나라가 당나라를 멸망시킬 때에 경상이 계책을 낸 것이 많았다. 梁나라가 망하자 경상이 죽었는데, ‘死’라고 쓰지 않고 ‘自殺’이라고 썼으니 ‘死’는 큰 절개이므로 사람에게 가볍게 부여할 수 없음을 드러내었다.[翔爲梁臣 梁所以亡唐 翔之謀爲多 梁之亡也 翔雖死之 不書死而書自殺 死大節也 見不輕予人]”라고 하였다.
즉 구양수는 경상이 唐나라의 신하였다가 태조에게 붙어 唐나라를 멸망시키는 데에 일등공신으로 활약한 반면 僞朝인 後梁을 위해 충절을 바쳐 결국 자결까지 하는 다소 모순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므로 그의 절개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工書檄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아래에 ‘敬翔이 지은 것은 모두 비속한 말이다.’라고 한 말이 있고, 〈李襲吉傳〉에 ‘경상이 답한 글은 문사가 공교롭지 못하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공교롭다’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資治通鑑考異≫ 卷27 註釋에 ≪唐末見聞錄≫의 敬翔이 晉에 보낸 答書가 수록되어 있는데 ‘전년에 洹水의 회합에서 賢郞을 얻었고 작년 靑山에서 또 장수들을 사로잡았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공교롭지 못하다.[按下翔所作 皆俚俗語 李襲吉傳曰 及翔所答書 辭不工 此曰工何也 通鑑考異 載唐末見聞錄 翔答晉書 有曰 前年洹水會 獲賢郞 去歲靑山 又擒列將 信不工矣]”라고 하였다.
역주3 乾符 : 唐 僖宗 李儇(862~888 첫 번째 연호로 874년~879년의 6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 牋刺 : 箋書라고도 하는데, 長官에게 올리는 문서를 말한다.
역주5 太祖 : 五代의 後梁을 건국한 朱全忠(852~912. 본래의 이름은 朱溫이었으나 唐 僖宗이 ‘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황제가 된 뒤에는 ‘晃’으로 개명하였다.
역주6 : 고대의 兵法에 사용하던 말로 正과 奇가 있는데, 正은 常法으로 군사를 운용하는 것이고, 奇는 變法으로 군사를 운용하는 것이다.
역주7 太祖已破趙匡凝……殺唐大臣幾盡 : ≪五代史纂誤≫ 巻上에 “지금 살펴보건대 이 傳紀에서 ‘唐나라 大臣들을 거의 다 죽였다.’라고 말하였는데 죽인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裴樞 등이라 한다면 배추 등을 죽인 것은 바로 天佑 2년(905) 6월 중인데 朱全忠이 淮南을 공격한 날은 바로 그해 9월 후반이니 배추 등을 죽인 일과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별도의 대신이 있었다고 한다면 歐陽脩의 ≪新五代史≫ 本紀와 ≪新唐書≫ 本紀에 각각 간략하게라도 수록되어 있지 않고, 이미 대신이라 하였다면 名字를 반드시 기록하였을 것이고 함부로 姓名을 기록하지 않음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해 6월에 바야흐로 배추 등을 살해하여 도륙당한 사람이 수백 명이므로 조정이 이 때문에 텅 비게 되었는데, 어찌 9월에 또 전쟁에서 패했다는 이유로 돌아와 분해하고 조급해져 또 대신을 거의 다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비록 주전충이 흉포하고 무도한 사람일지라도 또한 이런 일을 하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해하고 조급해져 대신을 죽인 일은 믿을 만한 증거가 없으니 대개 잘못 서술한 것인 듯하다.[今按此傳稱殺唐大臣幾盡 所殺果何人耶 以爲裴樞等耶 則殺樞等 乃天祐二年六月中 而全忠攻淮南日 是其年九月後 與裴樞等事不相連屬 以爲別有大臣耶 則歐陽五代史本紀及唐本紀 各不略載 旣云大臣 則名字必有著者 無容漫無姓名 況其年六月方殺裴樞等 而貶死者數百人 朝廷爲之一空 豈有九月 又以用兵失利 歸而忿躁 又殺大臣幾至于盡 雖全忠凶賊悖戾 亦當不至于此 忿躁殺大臣事 無所指歸 蓋誤書也]”라고 하였다.
역주8 (祖)[翔] : 저본에는 ‘祖’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翔’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從太祖 用兵三十餘年 : ≪五代史纂誤≫ 巻上에 “지금 살펴보건대 朱全忠은 中和 3년(883) 癸卯年에 汴州節度使가 되었고 건국하고 受禪함에 이르러 乾化 2년(912) 壬申年에 이르러 시해를 당하였으니, 그 기간이 정확히 30년이므로 30여 년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今按朱全忠以中和三年癸卯歲 爲汴州節度使 至建國受禪 迄于乾化二年壬申歲遇弑 正三十年 不得云三十餘年也]”라고 하였다.
역주10 細大之務 必關之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위 단락에서 ‘모든 일마다 매번 그에게 물었다.[動靜輒以問之]’라고 하였으니 어찌 여기와 다른가. 둘 중에 반드시 하나는 삭제할 것이 있다.[按與動靜輒以問之 何異 二者必有可去]”라고 하였다.
역주11 時溥 : ?~893. 唐나라 말기의 인물이다. 黃巢의 휘하 장수 尙讓 등의 항복을 받아 황소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그 뒤 朱全忠(後梁 太祖 군대를 막다가 패하여 자살하였다.
역주12 黃家宰相 : 黃家는 黃巢를 가리킨다. 尙讓이 黃巢의 將帥로 亂에 가담하였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3 典謁 : 賓客들이 만나기를 청할 때 그 일을 관리하는 관리를 말한다.
역주14 友珪 : ?~913. 後梁 太祖 朱溫의 庶子로 자는 遙喜이다. 변론에 능하고 지혜가 많았다. 태조가 受禪하자 郢王에 봉해졌다. 태조가 병에 걸려 양자 朱友文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그가 사람을 시켜 태조와 주우문을 살해하고 帝位에 올라 鳳曆이라 연호를 고쳤다. 재위한 지 8개월 뒤 袁象先이 禁兵으로 토벌하자 자살하였다. 末帝가 즉위한 뒤 庶人으로 폐출되었다.
역주15 末帝 : 後梁의 마지막 황제 朱友貞(888~923 가리킨다. 후량 太祖 朱溫의 셋째 아들이다. 성격이 침착하고 후덕하면서 말수가 적었고, 儒士를 좋아했다. 태조가 즉위하자 均王에 봉해졌다. 朱友珪가 등극하자 東京留守와 開封尹을 역임하였는데 얼마 뒤 병사를 일으켜 주우규를 살해하였다. 즉위하자 이름을 鍠이라 고치고 연호를 乾化로 고쳤다. 얼마 뒤 이름을 다시 瑱으로 고쳤다. 晉王 李存勖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결국 패하여 죽임을 당하고 후량은 멸망하였다.
역주16 (與所)[所與] : 저본에는 ‘與所’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所與’로 바로잡았다.
역주17 李亞子 : 亞子는 後唐 莊宗 李存勖의 어릴 적 이름이다. 이존욱에 대해서는 본서 권2 〈唐莊宗紀〉 참조.
역주18 守文 : ≪春秋公羊傳≫ 文公 9년에 “文王의 체제를 계승하고 문왕의 법도를 지키다.[繼文王之體 守文王之法度]”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본래는 문왕의 법도를 따르는 것을 말했으나 후에 일반적으로 先王의 법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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