覽歐公序次本末하니 昭宗當時未必有除全忠之心이나 而中外流傳은 不無如是라
所以全忠非惟不敢赴召요 幷敬翔亦麾之使去라 所以上下積猜하야 釀成簒弑之亂이니 悲夫라
敬翔
은 字子振
이요 同州馮翊人也
요 自言唐平陽王暉之後
라 少好學
하고 이라
中擧進士
하야 不中
이어늘 乃客大梁
하다 翔同里人王發
이 爲汴州觀察支使
하야 遂往依焉
이러니
久之
에 發無所薦引
하니 翔客益窘
하야 爲人作
하야 傳之軍中
이라
素不知書
라 翔所作
이 皆俚俗語
로되 太祖愛之
하야 謂發曰 聞君有故人
하니 可與俱來
라하다
翔見太祖에 太祖問曰 聞子讀春秋라하니 春秋所記何等事오하다 翔曰 諸侯爭戰之事耳라
太祖曰 其用兵之法
을 可以爲吾用乎
아하니 翔曰 兵者
는 應變出
以取勝
이니 春秋古法
은 不可用於今
이라하다
太祖大喜하야 補以軍職하니 非其所好라 乃以爲館驛巡官하다
太祖與蔡人戰汴郊에 翔時時爲太祖謀畫하야 多中이라 太祖欣然以謂得翔之晩이라하고 動靜에 輒以問之하다
太祖奉昭宗하야 自岐還長安에 昭宗이 召翔與李振하야 升延喜樓하야 勞之하고 拜翔太府卿하다
初에 太祖常侍殿上이러니 昭宗意衛兵有能擒之者라하고 乃佯爲鞋結解하야 以顧太祖라
太祖跪而結之나 而左右無敢動者하니 太祖流汗洽背라 由此로 稀復進見이라
昭宗이 遷洛陽하야 宴崇勳殿할새 酒半에 起하야 使人召太祖入內殿하니 將有所託일새라
太祖益懼하야 辭以疾하니 昭宗曰 卿不欲來하니 可使敬翔來라한대 太祖遽麾翔出하니 翔亦佯醉去라
太祖已破趙匡凝하야 取荊襄하고 遂攻淮南이라 翔切諫하야 以謂新勝之兵은 宜持重以養威라하니 太祖不聽이라
太祖卽位하야 以唐樞密院故用宦者로 乃改爲崇政院하야 以翔爲使라 遷兵部尙書金鑾殿大學士라
翔亦盡心勤勞하야 晝夜不寐하고 自言惟馬上乃得休息이라하고
而太祖剛暴難近이라 有所不可면 翔亦未嘗顯言하고 微開其端하니 太祖意悟하야 多爲之改易이라
太祖破徐州
하고 得
寵姬劉氏
하야 愛幸之
하니 劉氏
는 故尙讓妻也
라 乃以妻翔
이라
翔已貴나 劉氏猶侍太祖하야 出入臥內가 如平時하니 翔頗患之라
劉氏誚翔
하야 曰 爾以我嘗失身於賊乎
아 尙讓
은 이요 時溥
는 國之忠臣
이라
以卿門地로 猶爲辱我하니 請從此訣矣라하니 翔以太祖故로 謝而止之라
劉氏車服驕侈
하고 別置
하야 交結藩鎭
하야 權貴往往附之
하니 寵信言事
가 不下於翔
이라 當時貴家往往效之
라
太祖崩
하고 立
에 以翔先帝謀臣
으로 懼其圖己
하야 不欲翔居內職
이라
乃以李振代翔하야 爲崇政使하고 拜翔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하니 翔以友珪畏己하야 多稱疾하야 未嘗省事라
卽位
에 趙巖等
이 用事
하야 頗離間舊臣
하니 翔愈鬱鬱不得志
라 其後
에 梁盡失河北
하고 與晉相距楊劉
라
翔曰 故時에 河朔半在에 以先帝之武로 御貔虎之臣이로대 猶不得志於晉이라
今晉日益彊
하고 梁日益削
이로대 陛下處深宮之中
하야 計事者
는 非其近習
이면 則皆親戚之私
니 而望成事乎
아
陛下委蛇
하야 以儒雅自喜
하야 而遣賀環爲將
하니 豈足當彼之餘鋒乎
아
臣雖憊矣나 受國恩深하니 若其乏材인댄 願得自效라 巖等이 以翔爲怨言하야 遂不用이라
其後王彦章이 敗于中都하니 末帝懼하야 召段凝於河上이라 是時에 梁精兵은 悉在凝軍한대 凝有異志하야 顧望不來라
末帝遽呼翔曰 朕居常忽卿言이러니 今急矣라 勿以爲懟하고 卿其敎我當安歸오하니
翔曰 臣從先帝三十餘年이러니 今雖爲相이나 實朱氏老奴爾라 事陛下如郞君하니 以臣之心으로 敢有所隱이리오
陛下初用段凝에 臣已爭之러니 今凝不來하고 敵勢已迫이라
欲爲陛下謀면 則小人間之하야 必不見聽하리니 請先死하야 不忍見宗廟之亡이라하니 君臣相向慟哭이라
翔與李振俱爲太祖所信任이라 莊宗入汴하야 詔赦梁群臣한대 李振喜謂翔曰 有詔洗滌하니 將朝新君이라하고 邀翔欲俱入見이라
翔夜止高頭車坊이러니 將旦에 左右報曰 崇政李公入朝矣라하다 翔歎曰 李振은 謬爲丈夫矣로다 復何面目入梁建國門乎아하고 乃自經而卒하다
歐陽公이 序次한 本末을 보니, 唐 昭宗은 당시에 반드시 朱全忠을 제거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中外에 퍼진 소문은 이와 같음이 없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주전충이 감히 召命에 달려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주전충이 敬翔까지도 물리쳐 떠나게 하였다. 이런 이유로 上下가 의심을 쌓아 簒奪과 弑逆의 난을 양성한 것이니, 슬프다.
敬翔은 字가 子振이고 同州 馮翊 사람이며 스스로 唐나라 平陽王 敬暉의 후손이라 하였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였고 문서 기록을 공교롭게 잘하였다.
乾符 연간에 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자 이에 大梁에 가서 타향살이하였다. 경상의 같은 향리 사람 王發이 汴州觀察支使가 되었기에 마침내 그에게 가서 의탁하였는데,
오래도록 왕발이 자신을 추천해주지 않자 경상은 객지에서 더욱 곤궁해져 남을 위해 牋刺를 써서 軍中에 전해주는 일을 하였다.
後梁 太祖가 평소 글을 알지 못한지라 敬翔이 지은 글은 모두 비속한 말인데도 태조가 이를 좋아하여 王發에게 “그대에게 친구가 있다고 들었으니 함께 나에게 오라.”라고 하였다.
경상이 태조를 뵙자 태조가 묻기를 “그대가 ≪春秋≫를 읽었다고 하니, ≪춘추≫에 기록한 바는 무슨 일인가?”라고 하였다. 경상이 말하기를 “제후들이 전쟁했던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춘추≫에 用兵한 방법을 우리가 쓸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경상이 대답하기를 “전쟁은 변화에 대응하여 奇를 내어 승리를 취하는 것이니, ≪춘추≫의 옛 用兵術은 지금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軍職을 맡겼는데 그가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에 館驛巡官으로 삼았다.
太祖가 蔡州의 사람들과 汴州의 郊外에서 전투를 할 때에 敬翔이 때때로 태조를 위하여 계책을 세워 적중한 것이 많았다. 태조가 기뻐하여 경상을 얻은 것이 늦었다고 하면서 모든 일마다 매번 그에게 물었다.
태조가 唐 昭宗을 모시고 岐州로부터 長安으로 돌아오자 소종이 경상과 李振을 불러 延喜樓에 오르게 하여 치하하고 경상을 太府卿에 배수하였다.
당초에 太祖가 늘 殿上에서 〈昭宗을〉 모셨는데, 소종이 衛兵 중에 태조를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에 거짓으로 신발 끈을 풀고서 태조를 돌아보았다.
태조가 무릎을 꿇고 끈을 묶었지만 좌우에서 감히 움직이는 사람이 없으니, 태조가 땀을 흘려 등이 다 젖었다. 이로부터 다시 소종에게 나아가 뵙는 일이 드물어졌다.
소종이 洛陽으로 遷都하고 崇勳殿에서 연회를 베풀 때 술이 몇 차례 돌자 〈소종이〉 일어나 사람을 시켜 태조를 불러 內殿으로 들게 하니, 장차 부탁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가 더욱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사양하니, 소종이 말하기를 “卿이 오려고 하지 않으니, 敬翔을 오게 하라.”라고 하자 태조가 갑자기 경상에게 손을 내저어 나가게 하니, 경상도 술에 취한 척하며 떠났다.
太祖가 趙匡凝을 이미 격파하여 荊州와 襄州를 점령하고 마침내 淮南을 공격하였다. 敬翔이 간절하게 간하여 “새로 승리한 군사는 신중을 기해 威嚴을 길러야 합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듣지 않았다.
군사가 光州로 나갔다가 큰 비를 만나 거의 진군하지 못하였고, 진군하여 壽州를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많이 亡失하니, 태조가 비로소 크게 후회하고서 돌아와 분해하고 조급해져 唐나라 大臣들을 거의 다 죽였다.
그러나 더욱 경상을 신임할 만하다고 여겼다. 梁나라가 찬탈하고 시해할 때에 경상이 계획한 것이 많았는데,
태조가 즉위하여 唐나라의 樞密院은 예로부터 宦官을 등용하였다는 이유로 이에 崇政院으로 바꾸고 경상을 崇政使로 삼았다. 후에 兵部尙書 金鑾殿大學士로 옮겼다.
敬翔은 사람이 침착하고 큰 계략이 있어 太祖를 따라 용병한 지 3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軍務에 반드시 관계하였다.
경상은 또한 誠心을 다해 일하여 밤낮으로 잠도 자지 않고 스스로 “오직 말 위가 바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조가 강포하여 가까이하기 어렵기에 〈태조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으면 경상도 드러내 말한 적이 없고 은미하게 그 단서만 약간 열어 보이니, 태조가 깨달아 고친 것이 많았다.
태조가 徐州를 격파하고 時溥의 애첩인 劉氏를 얻어 총애하였다. 유씨는 죽은 尙讓의 아내인지라 이에 경상의 아내로 삼아주었다.
경상이 이미 현달하였지만 유씨는 여전히 태조를 모시며 태조의 처소에 출입하는 것이 평시와 같으니, 경상이 이를 퍽 근심하였다.
유씨가 경상을 꾸짖어 말하기를 “당신은 내가 賊에게 몸을 잃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상양은 黃家의 宰相이고, 時溥는 나라의 忠臣입니다.
卿이 가진 문벌의 지위로 오히려 나를 욕보이려 하니 이로부터 서로 헤어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경상이 태조와의 관계 때문에 사죄하고 만류하였다.
劉氏는 수레와 옷이 사치스러웠고 별도로 典謁을 두어 藩鎭과 교류하여 權貴들이 왕왕 歸附하니, 〈太祖가 유씨의〉 言事를 총애하여 신뢰하는 것이 敬翔보다 못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부귀한 집안들이 종종 이를 본받았다.
태조가 崩御하고 朱友珪가 즉위하여 경상이 先帝의 謀臣으로 자신을 도모할까 두려워 경상을 內職에 두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경상을 대신해 李振을 崇政使로 삼고 경상을 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하니, 경상은 주우규가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기고 걸핏하면 병을 핑계 대고 업무를 보지 않을 때가 많았다.
末帝가 즉위하자 趙巖 등이 일을 천단하여 舊臣들을 이간하니, 敬翔은 더욱 뜻을 펴지 못한 채 울울하였다. 그 뒤에 梁나라가 河北을 모두 잃고 晉나라와 楊劉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경상이 말하기를 “옛날 河朔(河北)을 반쯤 소유하였을 때에 先帝의 武勇으로 貔貅(비휴)와 범 같은 武臣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晉나라를 무너뜨리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晉나라는 날로 더욱 강성해지고 梁나라는 날로 땅이 줄어드는데 폐하께서는 깊은 궁궐 안에 계시면서 함께 일을 계획하는 사람은 近習이 아니면 모두 사사로운 친척뿐이니,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晉나라가 양류를 공격할 때에 李亞子(李存勖)가 섶을 짊어지고 물을 건너 군사들의 솔선수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느긋하게 守文하여 박학한 선비를 스스로 좋아하여 賀環을 보내 將帥로 삼았으니, 어찌 저들의 날선 銳鋒을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신은 비록 노쇠했으나 國恩을 받은 것이 심중하니, 만약 인재가 없다면 스스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趙巖 등이 경상이 원망하는 말을 한다고 여겨 끝내 쓰지 않았다.
후에 王彦章이 中都에서 패하니, 末帝가 두려워하여 段凝을 黃河로 불렀다. 이때에 梁나라 정예병은 모두 단응의 군사로 편입되어 있었는데, 단응이 딴마음을 품고 관망만 할 뿐 오지 않았다.
말제가 급히 敬翔을 불러 “朕이 평소에 卿의 말을 홀대하였는데, 이제는 급박한 상황이다. 원망하지 말고 경은 내가 응당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달라.”라고 하였다.
경상이 말하기를 “신이 先帝를 따른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지금 비록 재상이라고는 하지만 실로 朱氏의 늙은 종일 뿐입니다. 폐하를 郞君처럼 섬겼으니, 신의 마음을 감히 숨기는 바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처음 단응을 등용하셨을 때에 신이 이미 諫諍하여 말렸는데, 지금 단응은 오지 않고 적의 大軍이 이미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폐하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자 한다면 小人이 이간질하여 반드시 저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니, 청컨대 신이 먼저 죽어 宗廟가 망하는 것을 차마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君臣이 서로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敬翔과 李振은 모두 太祖에게 신임받던 신하였다. 後唐 莊宗이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汴州로 들어와 詔書를 내려 梁나라의 군신들을 사면하자 이진이 기뻐하며 경상에게 “조서가 내려와 죄를 씻어준다 하니 새로운 군주를 朝見(조현)할 것이다.”라고 하고 경상을 불러 함께 들어가 조현하고자 하였다.
경상이 밤에 高頭의 車坊에 머물러 있었는데, 날이 밝으려 할 때에 시종이 아뢰기를 “崇政使 李公이 入朝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경상이 탄식하며 “이진은 그릇된 장부가 되었다. 다시 무슨 낯으로 梁나라의 建國門을 들어간단 말인가?”라고 하고 이에 스스로 목을 매어 卒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