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存節은 字가 贊正이니 靑州博昌人也라 初名은 禮라
事
於河陽
이러니 爽卒
에 存節顧其徒曰 天下洶洶
하니 當得英雄事之
라하고 乃率其徒十餘人
하야 歸梁太祖
하다
張晊攻
할새 存節破其二寨
하고 梁攻
할새 戰南劉橋范縣
한대 存節功多
라
圍
於河陽
에 全義乞兵於梁
한대 太祖以存節故事河陽
하야 知其間道
라하야 使以兵爲前鋒
이라
是時歲饑하야 兵行乏食이어늘 存節以金帛就民하야 易乾葚以食軍하고 擊走罕之하다
太祖攻魏할새 存節下魏黎陽臨河하야 殺魏萬二千人하고 與太祖會內黃하다 遷滑州牢城遏後指揮使하다
梁兵攻
할새 存節使都將王言藏船鄆西北隅濠中
하고 期以日午渡兵踰濠急攻之
한대
會營中火起
하야 鄆人登城望火
하니 言伏不敢動
하야 與存節失期
한대 存節獨破鄆西甕城門
하야 奪其濠橋
하야 梁兵得俱進
하야 遂破
하다
從葛從周攻淮南할새 從周敗渒河어늘 存節收其散卒八千以歸하니 拜亳宿二州刺史하다
朱瑾走吳하야 召吳兵攻徐宿하니 存節謀曰 淮兵必不先攻宿이라 然宿溝壘素固하야 可以禦敵이라하야
乃夜以兵急趣徐州
하야 傅徐城下
하니 瑾兵方至
하야 望其塵起
하고 驚曰 梁兵已來
하니 何其速也
오하고 不能攻而去
하다
已而오 太祖使者至하야 授存節軍機하니 悉與存節意合이라 由是諸將益服其能하다 遷潞州都指揮使러니 太祖攻鳳翔할새 使召存節이라
存節爲將에 法令嚴整而善得士心이라 潞人送者皆號泣하니라 累拜邢州團練使元帥府左都押衙하다
太祖卽位에 拜右千牛衛上將軍하다 從康懷英攻潞州할새 爲行營排陣使라
存節顧諸將曰 吾行雖不受命이나 然澤州는 要害니 不可失也라한대 諸將皆不欲救之라
存節戒士卒熟息하고 已而오 謂曰 事急不赴면 豈曰 勇乎리오하고 擧策而先하니 士卒隨之하니라
比至澤州하야 州人已焚外城하야 將降晉이라가 聞存節至하고 乃稍定이라
存節入城하야 助澤人守어늘 晉人穴地道以攻之한대 存節選勇士數十하야 亦穴地以應之하야 戰于隧中하니 敵不得入하야 晉人解去하니라
遷左龍虎統軍六軍都指揮使絳州刺史라가 遷鄜州留後하다
友珪立에 朱友謙叛附于晉하니 西連鳳翔일새 存節東西受敵하다
同州水鹹而無井일새 知俊叛梁에 以渴不能守而走라 故友謙與岐兵合圍持久하야 欲以渴疲之한대
存節禱而擇地하야 鑿井八十하니 水皆甘可食이라 友謙卒不能下하다
末帝立
에 加同中書門下平章事
하고 徙鎭天平
하다 反徐州
에 遣存節攻破之
하고 以功加太尉
하다
梁晉相
於河上
이러니 存節病痟
로되 而梁晉方苦戰
일새 存節忠憤彌激
하야 治軍督士
에 未嘗言病
이라
病革에 召歸京師어늘 將卒에 語其子知業曰 忠孝가 吾子也라하고 不及其佗하니라 贈太師하다
牛存節은 字가 贊正이니 靑州 博昌 사람이다. 초명은 禮이다.
河陽에서 諸葛爽을 섬겼는데 제갈상이 죽자 우존절이 자기 무리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천하가 매우 어지러우니 영웅을 찾아 섬겨야 한다.”라고 하고, 자기 무리 10여 명을 거느리고서 梁 太祖의 휘하에 들어갔다.
우존절은 사람됨이 순박하고 굳세며 충성스럽고 謹愼하니 양 태조가 그를 아껴서 이름과 字를 하사하고 小校로 삼았다.
張晊이 汴州를 공격했을 때 牛存節이 그의 두 兵營을 격파하였고, 梁나라가 濮州를 공격할 때 南劉橋와 范縣에서 싸웠는데 우존절의 戰功이 많았다.
李罕之가 河陽에서 張全義를 포위했을 때 장전의가 梁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 梁 太祖가 우존절이 예전에 하양에서 일하여 그곳의 사잇길을 잘 알고 있다고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였다.
이때 흉년이 들어 행군하면서 양식이 부족했는데 우존절이 금과 비단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가서 말린 오디와 바꿔 군대를 먹이고 이한지를 격퇴하였다.
太祖가 魏를 공격할 때 우존절이 魏의 黎陽과 臨河를 함락하고서 魏軍 1만 2천 명을 죽이고 태조와 內黃에서 만났다. 滑州牢城遏後指揮使로 승진하였다.
梁나라 군대가 鄆州를 공격할 때 牛存節이 都將 王言을 보내 운주의 서북쪽 모퉁이 垓子에 배를 숨겨놓고 정오에 군대를 건네주어 해자를 넘어 급히 공격하도록 약속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군영에 불이 나서 운주 사람들이 성에 올라 불길을 바라보니 왕언이 매복한 채 감히 움직이지 못하여 우존절과 약속한 때를 놓치자, 우존절이 혼자 운주의 서쪽 甕城의 門을 격파하여 그 해자의 다리를 탈취하여 梁나라 군대가 모두 성으로 진입할 수 있어 마침내 朱宣을 격파하였다.
葛從周를 따라 淮南을 공격할 때 갈종주가 渒河에서 패배하였는데 우존절이 그 흩어진 병졸 8천 명을 수습하여 돌아오니 梁 太祖가 亳州와 宿州의 刺史에 제수하였다.
朱瑾이 吳나라로 달아나 吳나라 군대를 불러와서 徐州와 宿州를 공격하니 우존절이 계책을 세우기를 “淮의 군대는 반드시 숙주를 먼저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숙주는 해자와 城壘가 본래 견고하여 적병을 막을 수 있다.”라고 하고서,
밤에 군사를 거느리고 서주로 급히 달려가 서주 성 아래에 이르니, 주근의 군대가 막 도착하여 멀리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梁나라 군대가 벌써 왔으니 어쩌면 이리도 빠르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공격하지 못하고 떠났다.
이윽고 양 태조의 사신이 이르러 우존절에게 군사기밀을 하달하니 우존절과 뜻이 모두 합치하였다. 이로부터 장수들이 우존절의 재능에 더욱 복종하였다. 潞州都指揮使로 옮겼는데 양 태조가 鳳翔을 공격할 때 사람을 보내 우존절을 불렀다.
우존절이 장수로서 지휘할 때 法令이 嚴整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잘 얻었는지라 전송하는 潞州 사람들이 모두 울부짖으며 슬퍼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邢州團練使 元帥府左都押衙에 제수되었다.
梁 太祖가 즉위했을 때 牛存節을 右千牛衛上將軍에 배수하였다. 康懷英을 따라 潞州를 공격할 때 行營排陣使가 되었다.
晉나라 군대가 이미 夾城을 격파하고 나자 우존절 등이 남은 군사를 데리고 돌아오면서 행군하여 天井關에 이르러 晉나라 군대가 澤州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존절이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가 이번 出征에서 비록 따로 명령을 받지는 않았지만 택주는 要害處이니 잃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장수들이 모두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존절이 병사들에게 충분히 휴식하게 한 다음 이윽고 이르기를 “사정이 위급한데 달려가지 않으면 어찌 용맹하다고 하겠는가.”라고 하고 채찍을 들어 앞장서니 병사들이 그를 따랐다.
택주에 이르자 택주 사람들이 벌써 外城을 불태우고서 晉나라에 항복하려 하다가 우존절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조금 안정하였다.
우존절이 성에 들어가 택주 사람들을 도와 수비하였는데, 晉나라 군대가 땅굴을 파서 공격하자 우존절이 勇士 수십 명을 선발하여 역시 땅굴을 파서 대응하여 땅굴 속에서 싸우니 적군이 성에 들어올 수가 없어서 晉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떠났다.
左龍虎統軍 六軍都指揮使 絳州刺史로 승진하였다가 鄜州留後로 승진하였다.
同州의 劉知俊이 배반하여 鳳翔으로 달아나니 이에 牛存節을 匡國軍節度使로 옮겼다.
朱友珪가 즉위하자 朱友謙이 배반하여 晉나라에 붙으니 서쪽으로 鳳翔과 이어지는지라 우존절이 동서 양면으로 공격을 받게 되었다.
동주는 물이 짠 데다 우물이 없기에 유지준이 梁나라를 배반하고 나서 물이 부족해 지킬 수가 없어 달아났다. 그래서 주우겸이 岐州 군대와 함께 동주를 포위하여 持久戰을 벌여 물이 부족한 것을 이용해 지치게 하려고 하자,
우존절이 기도하고 땅을 골라 여든 군데에 우물을 파니 물이 모두 달아 마실 만한지라 주우겸이 결국 함락하지 못하였다.
梁 末帝가 즉위함에 同中書門下平章事의 직함을 더해주고 天平軍으로 옮겨 鎭守하게 하였다. 蔣殷이 徐州에서 반란하자 牛存節을 보내 격파하게 하고 그 戰功으로 太尉를 더하였다.
梁과 晉이 黃河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는데 우존절이 消渴症을 앓고 있었으나 梁과 晉이 한창 힘겹게 싸우는 와중이기에 우존절은 忠憤이 더욱 격발하여 군대를 지휘하고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자신의 병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병세가 위급해지자 召命을 받고 京師로 돌아왔는데 임종할 때가 되어 그 아들 牛知業에게 말하기를 “충성하고 효도하는 이가 내 아들이다.”라고 하고는 다른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太師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