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之衰也에 天子不能誅宦官이어늘 而崔胤等爲之外倚彊藩하니 彊藩入하야 宦官誅나 而唐亦以亡이라
歐陽公次梁紀
에 其所摹寫殆盡
이나 而與
兩爭處尤工
이라 予故錄之
하야 以見公之史才云
이라
太祖神武元聖孝皇帝는 姓朱氏니 宋州碭山午溝里人也라 其父誠은 以五經敎授鄕里라
生三子하니 曰 全昱存溫이라 誠卒에 三子貧하야 不能爲生하야 與其母傭食蕭縣人劉崇家라
唐僖宗乾符四年
에 起
이라 存溫亡入賊中
이러니 巢攻嶺南
에 存戰死
라
巢陷京師
하고 以溫爲東南面行營先鋒使
하야 攻陷
하고 以爲同州防禦使
라 是時
에 天子在蜀
하고 會兵討賊
이라
溫數爲河中王重榮所敗하야 屢請益兵於巢어늘 巢中尉孟楷抑而不通이라
溫客謝瞳說溫曰 黃家起於草莽이로대 幸唐衰亂하야 直投其隙而取之爾요 非有功德興王之業也니 此豈足與共成事哉리오
今天子在蜀하고 諸鎭之兵이 日集以謀興復하니 是唐德未厭於人也라
且將軍力戰於外
어늘 而庸人制之於內
하니 此
也
라하니
溫以爲然하다 乃殺其監軍嚴實하고 自歸于河中하야 因王重榮以降하니
都統王鐸承制拜溫左金吾衛大將軍河中行營招討副使하고 天子賜溫名全忠하다
中和三年三月
에 拜全忠
刺史宣武軍節度使
라 四月
에 諸鎭兵破巢
하고 復京師
한대 巢走
이라
七月丁卯
에 全忠歸于宣武
라 是歲
에 黃巢出
하야 陷
하니 節度使
이 叛附于巢
라 遂圍陳州
하니라
爲東南面行營兵馬都統
하야 會東諸鎭兵以救陳
하니 陳州刺史趙犨
가 亦乞兵于全忠
이라
溥雖爲都統이나 而不親兵이러니 四年에 全忠乃自將救犨하고 率諸鎭兵하야 擊敗巢將黃鄴尙讓等하니 犨以全忠爲德하야 始附屬焉이라
是時
에 河東李克用下兵
渡河
하야 出洛陽
하야 與東兵會擊巢
라
巢已敗去
에 全忠及克用追敗之于
하고 巢走
어늘 又敗之于王滿
하고 巢走
어늘 又大敗之
하고
巢挺身東走어늘 至泰山狼虎谷하야 爲時溥追兵所殺하다 九月에 天子가 以全忠爲檢校司徒同中書門下平章事하고 封沛郡侯라
光啓二年三月에 進爵王하다 義成軍亂한대 逐其節度使安師儒하고 推牙將張驍爲留後하니 師儒來奔이어늘 殺之라
自黃巢死로 秦宗權稱帝하야 陷陝洛懷孟唐許汝鄭州하고
遣其將秦賢盧瑭張晊攻汴하니 賢軍板橋하고 晊軍北郊하고 瑭軍萬勝하여 環汴爲三十六柵하다
王顧兵少하야 不敢出하고 乃遣朱珍募兵於東方하고 而求救於兗鄆하다
三年春에 珍得兵萬人馬數百匹以歸어늘 乃擊賢板橋하야 拔其四柵하고 又擊瑭萬勝하니 瑭敗投水死라
宗權聞瑭等敗
하고 乃自將精兵數千
하야 柵北郊
라 五月
에 兗州朱瑾
한대 王置酒軍中
이러니
中席에 王陽起如厠하야 以輕兵出北門襲晊한대 而樂聲不輟하니 晊不意兵之至也라
兗鄆之兵이 又從而合擊하야 遂大敗之하야 斬首二萬餘級하니 宗權與晊이 夜走過鄭하야 屠其城而去하다
宗權至蔡하야 復遣張晊攻汴이라 王聞晊復來하고 登封禪寺後岡하야 望晊兵過하고
遣朱珍躡之하야 戒曰 晊見吾兵이면 必止하리니 望其止면 當速返하고 毋與之鬪也하라
已而오 晊見珍在後하고 果止어늘 珍卽馳還이라 王令珍引兵蔽大林하고 而自率精騎出其東하야 伏大冢間이러니
晊止而食하고 食畢에 拔旗幟하야 馳擊珍이라 珍兵小却이어늘 王引伏兵橫出하야 斷晊軍爲三而擊之한대 晊大敗하야 脫身走라
宗權怒斬晊이어늘 而河陽陝洛之兵爲宗權守者가 聞蔡精兵皆已殲於汴하고 因各潰去라 故諸葛爽將李罕之取河陽張全義取洛陽하야 以來附하다
十月에 天子使來하야 賜王紀功碑하다 朱宣朱瑾兵助汴하야 已破宗權東歸라
王移檄兗鄆하야 誣其誘汴亡卒以東하고 乃發兵攻之하야 取其曹州濮州하고 遂遣朱珍攻鄆州라가 大敗而還이라
十二月
에 天子使來
하야 賜王
及德政碑
하다 淮南節度使
死
하니 入揚州
라
天子以王兼淮南節度使하니 王乃表行密爲副使하고 以行軍司馬李璠爲留後한대 璠之揚州어늘 行密不納하다
是時에 秦宗權陷襄州하고 以趙德諲爲節度使한대 德諲叛于宗權以來附라 天子因以王爲蔡州四面行營都統하고 以德諲爲副하다
其子相州刺史從訓攻魏할새 來乞兵이어늘 遣朱珍하야 助從訓攻魏한대 而魏軍殺彦眞하고 從訓戰死라
魏人立羅弘信이어늘 珍乃還하다 張全義取河陽하고 逐李罕之하니 罕之奔于河東이라
李克用遣兵圍河陽
이어늘 全義來求救
하니 遣丁會牛存節救之
하야 擊敗河東兵于
하다
五月에 行營討蔡州하야 圍之百餘日不克이라 是時에 時溥已爲東南面都統하고 又以王統行營이나 而溥猶稱都統이라
王乃上書하야 論溥討蔡無功이나 而不落都統하야 且欲激怒溥하야 以起兵端하다
初에 高騈死에 淮南亂한대 楚州刺史劉瓚來奔이어늘 納之라
及王兵攻蔡不克還하야 欲攻徐하야 乃遣朱珍將兵數千以東하고 聲言送瓚還楚州라 溥怒論己하고 又聞珍以兵來하야 果出兵拒之하다
珍戰于吳康
하야 大敗之
하야 取其豐蕭二縣
하고 遂攻
下之
라 珍屯蕭縣
하고 別遣龐師古
하야 攻徐州
하다
龍紀元年正月에 師古敗溥于呂梁한대 淮西牙將申叢執秦宗權하야 折其足하고 將檻送京師러니 別將郭璠殺叢하고 簒宗權以來獻하다
王遣行軍司馬李璠하야 獻俘于京師하고 表郭璠淮西留後라 三月에 天子封王爲東平王하다
七月에 朱珍殺李唐賓한대 王如蕭縣하야 執珍殺之하고 遂攻徐州하다 冬에 大雨水하야 不能屯軍而旋하다
初에 秦宗權이 遣其弟宗衡하야 掠地淮南하다 是歲에 宗衡이 爲其將孫儒所殺하고
儒攻楊行密于揚州하야 淮南大亂하니 行密走宣州하고 儒入揚州라
大順元年春에 遣龐師古하야 攻孫儒於淮南이라가 大敗而還하다
四月에 宿州將張筠이 以宿州復歸於時溥어늘 王自將攻之不克하다
初에 黃巢敗走어늘 李克用追之하야 至于寃朐하야 不及而旋하야 過汴할새 駐軍于北郊어늘
王邀克用
하야 置酒
하고 夜以兵攻之
하니 克用踰城而免
하야 訟其事于京師
하니 天子知曲在汴而和解之
라
至是
하야 宰相
私與汴交
어늘 王厚之以賂
하니 濬爲汴請伐河東
하다
唐諸大臣은 皆以爲不可興師로대 濬挾汴力하야 請益堅하니 天子不得已而許之하다
五月에 以濬爲太原四面行營都統하고 王爲東南面招討使라 然王不親兵하고 以兵三千屬濬而已라
濬屯于陰地하니 河東叛將馮霸가 殺潞州守將李克恭來降이라 遣葛從周入潞州한대 李克用遣康君立攻之하니 從周走河陽하다
九月에 王如河陽하다 十月에 天子以王兼宣義軍節度使라 遂如滑州하야 假道于魏하야 以攻河東하고
且責其軍須하니 亦所以怒魏爲兵端也라 魏人果以謂非兵所當出하고 而辭以糧乏하야 皆不許하니 於是攻魏라
十一月에 張濬之師大敗于陰地하다 二年正月에 王及魏人戰于內黃하야 大敗之하고 屠故元城하니 羅弘信來送款하다
十月에 克宿州하다 十一月에 曹州將郭紹賓殺其刺史郭饒來降하다 十二月에 丁會敗朱瑾于金鄕하다
景福元年二月에 攻鄆州한대 前軍朱友裕敗于斗門하고 王軍後至하야 又敗而還하다
冬에 友裕取濮州하고 遂攻徐州하다 二年四月에 龐師古克徐州하고 殺時溥하니 王如徐州하야 以師古爲留後하야 遂攻兗鄆하다
乾寧元年二月에 王及朱宣戰于漁山하야 大敗之하다 二年八月에 又敗宣于梁山하고 十二月에 又敗之于鉅野라
兗鄆求救于河東하니 李克用發兵救之하야 假道于魏러니 旣而오 魏人擊之라
克用怒하야 大擧攻魏한대 羅弘信來求救하니 遣葛從周救魏하다 是歲에 李克用封晉王하다
三年五月
에 戰于洹水
하야 擒克用子落落
하야 送于魏
하니 殺之
하다 七月
에 犯京師
하니 天子出居于華州
라
王請以兵赴難이어늘 天子優詔止之하고 又請遷都洛陽하니 不許하다
四年正月에 龐師古克鄆州한대 王如鄆州하야 以朱友裕爲留後하고 遂攻兗州하니 朱瑾奔于淮南이어늘 以葛從周爲兗州留後하다
九月에 攻淮南할새 龐師古出淸口하고 葛從周出安豐하고 王軍屯于宿州라
楊行密이 遣瑾하야 先擊淸口하니 師古敗死라 從周亟返兵하야 至于渒河어늘 瑾又敗之하니 王懼馳歸하다
光化元年三月에 天子以王兼天平軍節度使하다 四月에 遣葛從周하야 攻晉之山東하야 取邢洺磁三州하다
襄州趙匡凝은 自其父德諲時來附러니 匡凝이 又與楊行密李克用通而其事泄하다
七月
에 遣氏叔琮康懷英
하야 攻匡凝
하야 取其
隨鄧三州
하니 匡凝請和
어늘 乃止
하다 十二月
에 李罕之
가 以潞州來降
하다
二年에 幽州劉仁恭이 攻魏한대 羅紹威가 來求救하니 王救魏하야 敗仁恭于內黃하다
四月
에 遣氏叔琮
하야 攻晉
不克
하다 七月
에 李克用
이 取
하다
十一月에 保義軍亂하야 殺其節度使王珙하고 推其牙將李璠爲留後하니 其將朱簡이 殺璠來降이어늘 以簡爲保義軍節度使하다
三年四月에 遣從周하야 攻劉仁恭之滄州하야 取其德州하고 及仁恭戰于老鴉堤하야 大敗之하다
八月에 晉取洺州한대 王如洺州하야 復取之하다 是時에 鎭定皆附于晉이라 遂攻鎭州하야 破臨城하니 王鎔來送款하다
進攻定州에 王郜奔于晉하니 其將王處直以定州降하다 唐宦者劉季述이 作亂에 天子幽于東宮하다
天復元年正月에 護駕都頭孫德昭가 誅季述하니 天子復立하야 封王爲梁王하다
遣張存敬
하야 攻王珂于河中
하니 出
하야 下晉絳二州
하다 王珂求救于晉
한대 晉不能救
어늘 乃來降
하다
三月에 大擧攻晉하니 氏叔琮出太行하야 取澤潞하고 葛從周張存敬侯言張歸厚及鎭定之兵이 皆會于太原하야 圍之不克하고 遇雨而退하다
五月에 天子以王兼河中尹護國軍節度使하다 六月에 晉取慈隰하다
自劉季述等已誅로 宰相崔胤外與梁交하야 欲假梁兵하야 盡誅宦者러니
而鳳翔李茂貞邠寧王行瑜等이 皆遣子弟以精兵宿衛天子하니 宦者韓全誨等이 亦因恃以爲助라 天子與胤計事어늘 宦者屬耳하야 頗聞之라
乃選美女하야 內之宮中하야 陰令伺察其實이러니 久之에 果得胤奏謀所以誅宦者之說이라
全誨等大懼하야 日夜相與涕泣하야 思圖胤以求全이라 胤知謀泄하고 事急에 卽矯爲制하야 召梁兵入誅宦者하다
十月에 王以宣武宣義天平護國兵七萬으로 至于河中하야 取同州하고 遂攻華州하니 韓建出降이라
全誨等은 聞梁王兵且至하고 卽以岐邠宿衛兵劫天子하야 奔于鳳翔이어늘 王乃上書하야 言胤所以召之之意하니
天子怒하야 罷胤相하야 責授工部尙書하고 詔梁兵還鎭하다
王引兵去
하야 攻邠州
하고 屯于
하니 邠州節度使楊崇本以邠寧慶衍四州降
이라 崔胤奔于華州
하다
二年春에 王退軍于河中이러니 晉攻晉絳에 遣朱友寧하야 擊敗晉軍于蒲縣하야 取汾慈隰하고 遂圍太原이나 不克而還하니 汾慈隰復入于晉이라
四月
에 友寧引兵西
하야 至
하야 及李茂貞戰于
하야 大敗之
하다 王兵犯鳳翔
에 茂貞數出戰
하야 輒敗
어늘 遂圍之
하다
十一月에 鄜坊李周彛以兵救鳳翔한대 王遣孔勍襲鄜州하야 虜周彛之族하야 徙于河中하니 周彛乃降하다
是時에 岐兵屢敗而圍久하야 城中食盡하니 自天子至後宮히 皆凍餒하다
三年正月에 茂貞이 殺韓全誨等二十人하고 囊其首하야 示梁軍하고 約出天子以爲解甲이라
天子出幸梁軍하야 遣使者馳召崔胤하니 胤托疾不至라
王使人戲胤曰 吾未識天子하니 懼其非是라 子來爲我辨之하라하다 天子還至興平한대 胤率百官奉迎이라
王自爲天子執轡하고 且泣且行하야 行十餘里止之하니 人見者咸以爲忠이라
己巳에 天子至自鳳翔하야 素服哭于太廟而後入하야 殺宦者七百餘人하다
二月甲戌에 天子賜王回天再造竭忠守正功臣하고 以輝王祚爲諸道兵馬元帥하고 王爲副元帥하다
爲護駕指揮使
하야 以爲天子衛
하고 引兵東歸
할새 天子餞于延喜樓
하야 賜
五曲
하다
初에 梁兵已西에 靑州王師範이 遣其將劉鄩하야 襲據梁兗州하다
王已還梁하고 四月에 如鄆州하야 遣朱友寧하야 攻靑州한대 師範敗之于石樓하니 友寧死하다
九月에 楊師厚가 敗靑人于臨朐하야 取其棣州하니 師範以靑州降하고 而鄩亦降하다
友倫擊鞠
이라가 墮馬死
하니 王怒以爲崔胤殺之
하야 하고 其與友倫擊鞠者
를 皆殺之
하다
自天子華州로 王請遷都洛陽하니 雖不許나 而王命河南張全義하야 修洛陽宮以待하다
天祐元年正月에 王如河中하야 遣牙將寇彦卿하야 如京師하야 請遷都洛陽하고 幷徙長安居人以東이라
是時
에 六軍諸衛兵已散亡
하야 其從以東者
는 十數人
과 打毬供奉內園小兒等二百餘人
이라
行至穀水한대 王敎醫官許昭遠하야 告其謀亂하야 悉殺而代之然後以聞이라 由是로 天子左右皆梁人矣라
四月甲辰
에 天子至自西都
하다 是時
에 이 聞梁遷天子洛陽
하고 皆欲擧兵討梁
하니 王大懼
하다
六月
에 楊崇本
이 復附于岐
라 王乃以兵如河中
하야 聲言攻崇本
하고 遣朱友恭氏叔琮蔣玄暉等行弑
하니 崩
하다
十月에 王이 朝于京師하야 殺朱友恭氏叔琮하다 十一月에 攻淮南하야 取其光州하고 攻壽州不克而旋하다
六月
에 殺司空裴贄等百餘人
하다 七月
에 復使來
하야 賜王迎鑾紀功碑
하다
王欲代唐하야 使人諭諸鎭어늘 襄州趙匡凝이 以爲不可하니 遣楊師厚攻之하야 取其唐鄧復郢隨均房七州하고 王如襄州하야 軍于漢北하다
九月
에 師厚破襄州
하니 匡凝奔于淮南
이라 師厚取
하니 荊南留後趙匡明
이 奔于蜀
하야 遂出光州
하야 以攻壽州不克
하다
天子卜祀天于
한대 王怒以爲蔣玄暉等欲祈天以延唐
이어늘 天子懼
하야 改卜郊
하다
十一月辛巳
에 天子封王爲魏王相國
하야 總百揆
하야 以宣武宣義天平
國天雄武順佑國河陽義武昭義
武寧保義忠義武昭武定泰寧平盧匡國鎭國荊南忠武二十一軍爲魏國
하고 備
이어늘 王怒不受
하다
十二月에 天子以王爲天下兵馬元帥하니 王益怒하야 遣人告樞密使蔣玄暉與何太后私通하야 殺玄暉而焚之하고 遂弑太后于積善宮하고
又殺宰相柳璨太常卿張延範하야 車裂以徇하다 天子下詔하야 以太后故停郊하다
王爲發兵하야 北攻劉仁恭之滄州한대 兵過魏而紹威已殺牙軍하니 其兵之在外者가 果皆叛하야 據貝衛澶博州어늘
王以兵悉殺之하고 遂攻滄州하고 軍于長蘆라 劉仁恭求救于晉이어늘 晉人取潞州하니 王乃旋軍하다
開平元年春正月壬寅에 天子使御史大夫薛貽矩來勞軍하고 宰相張文蔚率百官來勸進하다
夏四月壬戌
에 更名晃
하고 하고 戊辰
에 하고 改元國號梁
하다
라 天下之惡梁
이 久矣
라 自後唐以來
로 皆以爲僞也
로대 至予論次五代
하얀 獨不僞梁
하니
議者或譏予大失春秋之旨하야 以謂梁負大惡하니 當加誅絶이어늘 而反進之하니 是獎簒也요 非春秋之志也라하거늘
而自立者
요 而自立者
어늘 聖人於春秋
에 皆不絶其爲君
하니
此予所以不僞梁者는 用春秋之法也라 然則春秋亦獎簒乎아 曰 惟不絶四者之爲君하니 於此에 見春秋之意也라
聖人之於春秋에 用意深이라 故能勸戒切하고 爲言信하니 然後에 善惡明이라
夫欲著其罪於後世인댄 在乎不沒其實하니 其實嘗爲君矣면 書其爲君하고 其實簒也면 書其簒하야
各傳其實하야 而使後世信之면 則四君之罪는 不可得而掩爾라 使爲君者로 不得掩其惡然後에 人知惡名不可逃면
則爲惡者는 庶乎其息矣라 是謂用意深而勸戒切하고 爲言信而善惡明也라
桀紂는 不待貶其王而萬世所共惡者也라 春秋於大惡之君에 不誅絶之者는 不害其褒善貶惡之旨也라
惟不沒其實하야 以著其罪하야 而信乎後世와 與其爲君而不得掩其惡하야 以息人之爲惡은 能知春秋之此意然後라야 知予不僞梁之旨也라
唐나라가 쇠퇴하자 천자가 宦官을 주벌하지 못하거늘 崔胤 등이 천자를 위해 외부의 강한 藩鎭을 끌어들였는데, 강한 번진이 들어와 환관은 주벌되었지만 당나라 또한 망하였다.
歐陽公이 〈梁本紀〉를 편찬할 때에 묘사가 극진하였지만 李克用과 두 차례 전쟁한 부분은 더욱 공교하다. 내가 이 때문에 이를 수록하여 구양공의 史筆에 대한 재능을 드러내고자 한다.
太祖神武元聖孝皇帝는 성이 朱氏이니, 宋州 碭山 午溝里 사람이다. 아버지인 誠은 향리에서 五經敎授로 있었다.
아들 셋을 낳으니 全昱과 存과 溫이었다. 誠이 졸하자 세 아들은 가난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그 어머니와 함께 蕭縣 사람인 劉崇의 집에서 품을 팔아 생활하였다.
朱全昱은 별다른 재능은 없지만 사람됨이 제법 長者다웠고, 朱存과 朱溫은 勇力이 있었는데 주온은 더욱 凶暴하였다.
唐나라 僖宗 乾符 4년(877)에 黃巢가 曹州와 濮州에서 일어나자 朱存과 朱溫은 賊中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황소가 嶺南을 공격할 때에 주존은 戰死하였다.
황소가 京師(長安)를 함락하고는 주온을 東南面行營先鋒使로 삼고서 同州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주온을 同州防禦使로 삼았다. 이때에 天子가 蜀에 있었고 여러 藩鎭에서 병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다.
주온이 河中의 王重榮에게 자주 패하자 여러 번 황소에게 병사를 증원해달라 청하거늘 황소의 中尉 孟楷가 이를 묵살하고 황소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주온의 門客 謝瞳이 주온을 설득하기를 “황소는 초야에서 일어났는데 요행이 당나라가 쇠란하여 곧장 그 틈을 타 당나라를 취했을 뿐이고, 功德이 있어 王業을 일으킨 것은 아니니 어찌 함께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지금 天子가 蜀에 있고 여러 번진의 병사들이 날로 모여 부흥을 도모하고 있으니, 이는 당나라의 德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將軍들이 밖에서 힘써 싸우거늘 용렬한 사람들이 내부에서 전횡을 일삼으니, 이는 章邯이 秦나라를 등지고 楚나라로 간 이유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온이 이 말을 옳다고 여겨 이에 監軍 嚴實을 죽이고 스스로 河中으로 돌아가 王重榮을 통해 항복하니,
都統 王鐸이 천자의 명을 받아 주온을 左金吾衛大將軍 河中行營招討副使에 제수하고, 천자가 주온에게 朱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中和 3년(883) 3월에 朱全忠을 汴州刺史 宣武軍節度使로 배수하였다. 4월에 각 藩鎭의 병사들이 黃巢를 격파하고 京師를 되찾자 황소는 藍田으로 달아났다.
7월 丁卯日에 주전충이 宣武로 돌아왔다. 이때에 황소가 藍田關을 나와 蔡州를 함락하니 節度使 秦宗權이 배반하여 황소에게 붙었는지라 황소가 마침내 陳州를 포위하였다.
徐州 時溥가 東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동쪽 지역 번진의 병사들을 모아 진주를 구원하니, 陳州刺史 趙犨 또한 주전충에게 救援兵을 청하였다.
시부는 비록 都統이 되었지만 병력을 직접 통솔하지 못하였는데, 중화 4년(884)에 주전충이 비로소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조주를 구원하고 번진의 병사들을 통솔하여 황소의 장수 黃鄴과 尙讓 등을 패퇴시키니, 조주가 주전충에게 은혜를 입었다 여겨 비로소 依附하였다.
이때에 河東 李克用이 太行山 쪽으로 병사를 내려보내 黃河를 건너서 낙양으로 나가 동쪽의 병사들과 회합하여 黃巢를 격퇴하였다.
황소가 패주하자 朱全忠과 이극용이 추격하여 郾城에서 패퇴시켰고 황소가 中牟로 달아나거늘 또 王滿에서 패퇴시켰고 황소가 封丘로 달아나거늘 또 크게 패퇴시키니,
황소가 몸만 빠져나와 동쪽으로 달아나 泰山 狼虎谷에 이르러 時溥의 추격병에게 피살되었다. 9월에 천자가 주전충을 檢校司徒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고 沛郡侯로 봉해주었다.
光啓 2년(886) 3월에 爵位가 올라 王이 되었다. 義成軍이 반란을 일으키자 節度使 安師儒를 축출하고 牙將 張驍를 추천하여 留後로 삼으니 안사유가 투항하거늘 그를 죽였다.
朱珍과 李唐賓을 보내 滑州를 함락하고 胡眞을 유후로 삼았다. 12월에 주전충이 吳興郡王으로 옮겨 봉해졌다.
黃巢가 죽은 뒤로 秦宗權이 稱帝하고서 陝州‧洛州‧懷州‧孟州‧唐州‧許州‧汝州‧鄭州를 함락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장수 秦賢‧盧瑭‧張晊을 보내 汴州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진현은 板橋에 주둔하고 장질은 北郊에 주둔하고 노당은 萬勝에 주둔하여 변주를 에워싸고 36개의 성채를 만들었다.
王(朱全忠)은 자신의 군사가 적음을 헤아려 감히 출전하지 않고, 이에 朱珍을 동쪽 방면으로 보내 병사를 모집하게 하고, 兗州와 鄆州에 원병을 청하였다.
光啓 3년(887) 봄에 주진이 병사 1만 명과 말 수백 필을 얻어 돌아오거늘 비로소 판교에 주둔한 진현을 공격하여 4개의 성채를 빼앗고, 또 만승에서 노당을 공격하니 노당은 패하여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진종권은 노당 등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정예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와 북교에 성채를 구축하였다. 5월에 연주의 朱瑾과 운주의 朱宣이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자 왕이 군중에서 주연을 베풀었는데,
주연 도중에 왕이 거짓으로 일어나 측간에 가는 척하다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문을 나가 장질을 습격하였는데, 음악소리가 끊어지지 않으니 장질은 군사가 이른지도 몰랐다.
연주와 운주의 병사가 또 따라서 연합하여 공격해서 마침내 크게 패퇴시켜 2만여 명의 首級을 베니, 진종권과 장질이 밤에 달아나 鄭州를 지나면서 그 성을 도륙하고 떠났다.
秦宗權이 蔡州에 이르러 다시 張晊을 보내 汴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이 장질이 다시 온다는 말을 듣고 封禪寺 뒤편 산등성에 올라 장질의 군대가 지나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朱珍을 보내 추격하게 하고는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장질이 우리 군대를 보면 반드시 진군을 멈출 것이니, 멈추는 것을 보면 속히 회군하고 그들과 싸우지 말라.”
이윽고 주진이 뒤에 있음을 보고 장질이 과연 진군을 멈추었는데 주진이 곧장 빠르게 회군하였다. 왕이 주진을 시켜 군대를 이끌고 큰 숲속에 숨게 하고, 자신은 정예기병을 이끌고 그 동쪽으로 나가 큰 무덤 사이에 매복하였는데,
장질이 진군을 멈추고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치자마자 旗幟를 뽑아들고 주진을 급히 공격하였다. 주진의 군대가 조금 퇴각하니, 왕이 복병을 이끌고 기습하여 장질의 군대를 셋으로 갈라놓고 공격하였는데, 장질이 크게 패하여 몸만 빼내 달아났다.
진종권이 노하여 장질을 참수하였는데 진종권을 위하여 수비하던 河陽‧陝州‧洛州의 병사들이 蔡州의 정예병이 汴州에서 모두 이미 섬멸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각자 흩어져 떠났다. 그러므로 諸葛爽이, 李罕之가 河陽에서 취한 병사와 張全義가 낙양에서 취한 병사를 거느리고 와 귀부하였다.
10월에 천자의 사신이 와서 왕에게 紀功碑를 하사하였다. 朱宣과 朱瑾의 군대가 汴州를 구원하러 와 이미 秦宗權을 패퇴시키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왕이 兗州와 鄆州에 격문을 보내 주선과 주근이 변주에서 도망친 군사들을 유인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고 誣陷하고는, 곧장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공격하여 曹州와 濮州를 취하고 마침내 朱珍을 보내 운주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12월에 천자의 사신이 와서 왕에게
鐵券와
德政碑를 하사하였다.
淮南節度使 高騈이 죽자
楊行密이
揚州로 들어왔다.
鐵券
천자가 왕에게 회남절도사를 겸임하게 하니 왕이 이에 표문을 올려 추천하여 양행밀을 副使로 삼고 行軍司馬 李璠을 留後로 삼았는데, 이번이 양주로 가자 양행밀이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文德 元年(888) 正月에 왕이 淮南으로 가다 宋州에 이르러 돌아왔다.
이때에 秦宗權이 襄州를 함락하고 趙德諲을 節度使로 삼았는데, 조덕인이 진종권을 배반하고 왕에게 와서 붙었다. 천자가 이로 인해 왕을 蔡州四面行營都統으로 삼고 조덕인을 副로 삼았다.
3월 癸卯日에 唐 僖宗이 붕어하였다. 天雄軍이 반란을 일으켜 節度使 樂彦眞을 구금하니,
그의 아들 相州刺史 樂從訓이 魏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에 원병을 청하자 朱珍을 보내 樂從訓을 도와 魏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魏나라 병사가 악언진을 죽였고 악종훈도 전사하였다.
魏나라 사람이 羅弘信을 옹립하자 주진이 이에 회군하였다. 張全義가 河陽을 점령하고 李罕之를 추격하니 이한지는 河東으로 달아났다.
李克用이 병사를 보내 하양을 포위하자 장전의가 와서 구원을 청하였는데, 丁會와 牛存節을 보내 구원하게 하여 沇河에서 하동의 병사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5월에 行營이 蔡州를 토벌하여 100여 일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때에 時溥는 이미 東南面都統이 되었고, 또 왕에게 행영을 통솔하게 하였으나 시부는 오히려 都統이라 칭하였다.
왕이 이에 上書하여 시부는 채주를 토벌할 때에 공이 없었는데도 도통의 職務에서 파면되지 않았음을 논핵하여 장차 시부를 격발시켜 노하게 하여 병란의 단초를 야기하려고 하였다.
당초에 高騈이 죽어 淮南이 혼란하자 楚州刺史 劉瓚이 망명하거늘 왕이 받아주었다.
왕의 병사가 채주를 공격하다 이기지 못하고 돌아오자 徐州를 공격하기 위해 朱珍을 보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게 하고 유찬을 송환하고 楚州를 돌려준 일에 대해 소문을 냈다. 시부가 자신을 논죄한 것에 노하였고, 또 주진이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과연 출병하여 이를 막았다.
주진이 吳康에서 싸워 크게 패퇴시켜 豐縣과 蕭縣 두 현을 취하고 마침내 宿州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주진은 소현에 주둔하고 따로 龐師古를 보내 徐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龍紀 元年(889) 정월에 龐師古가 呂梁에서 時溥를 패퇴시켰다. 淮西牙將 申叢이 秦宗權을 잡아 다리를 부러뜨리고 檻車에 실어 京師로 보내려 하였는데, 別將 郭璠이 신총을 죽이고 진종권을 빼앗아 왕에게 와서 바쳤다.
왕이 行軍司馬 李璠을 보내 京師에 진종권을 포로로 바치고, 곽번을 淮西留後로 삼아달라고 表文을 올려 奏請하였다. 3월에 천자가 왕을 東平王으로 봉했다.
7월에 朱珍이 李唐賓을 죽이자 왕이 蕭縣으로 가 주진을 잡아 죽이고 마침내 徐州를 공격하였다. 겨울에 큰 비가 내려 물이 불어 군대를 주둔할 수 없게 되자 회군하였다.
당초에 秦宗權이 아우 秦宗衡을 보내 淮南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해에 진종형이 그의 장수 孫儒에게 살해당하였고,
손유가 揚州에서 楊行密을 공격하여 淮南이 크게 혼란해지니 양행밀은 宣州로 달아나고 손유는 양주로 들어갔다.
大順 元年(890) 봄에 龐師古를 보내 회남에서 손유를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4월에 宿州將 張筠이 宿州를 가지고 다시 時溥에게 귀부하였는데, 왕이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당초에 黃巢가 패주하였는데 李克用이 추격하다 寃朐에 이르러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와 汴州를 지날 때에 북쪽 교외에 군을 주둔시켰다.
왕이 이극용을 맞이하여 上源驛에 주연을 베풀고 밤에 병사를 풀어 공격하니 이극용은 성을 넘어 달아나 화를 면하여 이 일을 京師에 訴訟하자, 천자가 변주에서 일어난 曲折을 알고서 和解를 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宰相 張濬이 개인적으로 변주와 交通하거늘 왕이 뇌물을 후하게 주니, 장준이 변주를 위해 河東을 정벌할 것을 청하였다.
唐나라의 大臣들은 모두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장준이 변주의 힘을 믿고 더욱 강하게 청하니, 천자가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
5월에 張濬을 太原四面行營都統으로 삼고 왕을 東南面招討使로 삼았다. 그러나 왕은 직접 병사를 통솔하지 않고 병사 3천 명을 장준에게 통솔하게 하였을 뿐이었다.
장준이 陰地에 주둔하자 河東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수 馮霸가 潞州守將 李克恭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葛從周를 보내 潞州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李克用이 康君立을 보내 공격하게 하니 갈종주는 河陽으로 달아났다.
9월에 왕이 하양으로 갔다. 10월에 천자가 왕에게 宣義軍節度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왕이 마침내 滑州로 가서 魏나라에게 길을 빌려 河東을 공격하려 하였고,
또 魏나라에게 군수품을 요구하니, 또한 魏나라를 격발시켜 노하게 하여 병란을 일으킬 단초를 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魏나라 사람이 과연 왕의 군사가 지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양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모두 허락하지 않으니, 이에 魏나라를 공격하였다.
11월에 장준의 군사가 음지에서 크게 패하였다. 大順 2년(891) 정월에 왕과 魏나라 사람이 內黃에서 싸워 魏나라를 크게 패퇴시키고 옛 元城을 도륙하니, 羅弘信이 항복문서를 보내왔다.
10월에 宿州를 함락하였다. 11월에 曹州 장수 郭紹賓이 그 刺史 郭饒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12월에 丁會가 金鄕에서 朱瑾을 패퇴시켰다.
景福 元年(892) 2월에 鄆州를 공격하였는데, 前軍 朱友裕가 斗門에서 패하였고, 왕의 군대가 후에 이르러 또 패하여 회군하였다.
겨울에 주우유가 濮州를 취하고 마침내 徐州를 공격하였다. 경복 2년(893) 4월에 龐師古가 서주를 함락하고 時溥를 죽이니, 왕은 서주로 가서 방사고를 留後로 삼아 兗州와 鄆州를 공격하였다.
乾寧 元年(894) 2월에 왕이 朱宣과 漁山에서 전투하여 크게 패퇴시켰다. 건녕 2년(895) 8월 또 梁山에서 朱宣을 패퇴시켰다. 12월에 또 鉅野에서 패퇴시켰다.
연주와 운주의 사람들이 河東에 원병을 청하니 李克用이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려 하여 魏나라에게 길을 빌렸으나 얼마 뒤 魏나라 사람이 공격하였다.
이극용이 노하여 크게 군사를 일으켜 魏나라를 공격하였는데, 羅弘信이 와서 구원을 청하니, 葛從周를 보내 魏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이해에 이극용이 晉王에 봉해졌다.
건녕 3년(896) 5월에 洹水에서 전투하여 이극용의 아들 落落을 사로잡아 魏나라에 보냈는데, 魏나라에서 그를 죽였다. 7월에 鳳翔의 李茂貞이 京師를 범하자 천자가 궁을 나가 華州로 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환란에 달려가기를 청하였는데, 천자가 優渥한 조서를 내려 만류하고, 또 洛陽으로 遷都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乾寧 4년(897) 정월에 龐師古가 鄆州를 함락하자 왕이 운주로 가서 朱友裕를 留後로 삼아 마침내 兗州를 공격하니, 朱瑾이 淮南으로 달아나거늘 葛從周를 兗州留後로 삼았다.
9월에 淮南을 공격할 때에 방사고는 淸口로 나가고 갈종주는 安豐으로 나가고 왕의 군대는 宿州에 주둔하고 있었다.
楊行密이 주근을 보내 청구를 먼저 공격하게 하니 방사고가 패하여 죽었다. 갈종주가 급히 병사를 돌려 渒河에 이르렀는데, 주근이 또 패퇴시키니 왕이 두려워 급히 돌아갔다.
光化 元年(898) 3월에 천자가 왕에게 天平軍節度使를 겸하게 하였다. 4월에 葛從周를 보내 晉나라의 山東을 공격하게 하여 邢州‧洺州‧磁州 세 州를 취하였다.
襄州의 趙匡凝은 그 아버지 趙德諲이 생존해 있을 때부터 歸附하였는데, 조광응은 또 楊行密‧李克用과 내통하다 그 일이 누설되었다.
7월에 氏叔琮과 康懷英을 보내어 조광응을 공격하여 泌州‧隨州‧鄧州 세 州를 취하니, 조광응이 화친을 청하거늘 이에 공격을 멈추었다. 12월에 李罕之가 潞州를 가지고 와 항복하였다.
光化 2년(899)에 幽州 劉仁恭이 魏나라를 공격하였는데, 羅紹威가 와서 구원을 청하니, 왕이 魏를 구원하여 內黃에서 유인공을 패퇴시켰다.
4월에 氏叔琮을 보내 晉나라의 太原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7월에 李克用이 澤州와 潞州를 공격하여 취하였다.
11월에 保義軍이 난을 일으켜 節度使 王珙을 죽이고 왕공의 牙將 李璠을 추대하여 留後로 삼았는데, 이번의 장수 朱簡이 이번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니 주간을 保義軍節度使로 삼았다.
광화 3년(900) 4월에 葛從周를 보내 유인공의 滄州를 공격하여 德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유인공과 老鴉堤에서 전투를 벌여 크게 패퇴시켰다.
8월에 晉나라가 洺州를 공격하여 취하였는데, 왕이 명주로 가서 다시 공격하여 취하였다. 이때에 鎭州와 定州가 모두 晉나라에 붙었기에 마침내 진주를 공격하여 臨城을 격파하니 王鎔이 항복문서를 보냈다.
진군하여 정주를 공격하자 王郜가 晉나라로 달아나니, 그의 장수 王處直이 정주를 가지고 항복하였다. 唐나라의 환관 劉季述이 난을 일으킴에 천자가 東宮에 유폐되었다.
天復 元年(901) 정월에 護駕都頭 孫德昭가 劉季述을 죽이니, 천자가 다시 복위하여 왕을 梁王에 봉하였다.
張存敬을 보내 河中에서 王珂를 공격하니, 장존경이 含山으로 나가 晉州와 絳州 두 주를 함락하였다. 왕가가 晉에 구원을 청하였는데 晉나라가 구원하지 못하거늘 이에 와서 투항하였다.
3월에 크게 군사를 일으켜 晉나라를 공격하니, 氏叔琮은 太行山으로 나가 澤州와 潞州를 취하였고, 葛從周‧張存敬‧侯言‧張歸厚와 鎭州‧定州의 병사들이 모두 太原에 모여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비를 만나 퇴각하였다.
5월에 천자가 왕에게 河中尹 護國軍節度使를 겸하게 하였다. 6월에 晉나라가 慈州와 隰州을 취하였다.
劉季述 등이 이미 주살된 뒤로 宰相 崔胤이 밖으로 梁나라와 交通하여 梁나라의 병사를 빌려 宦官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는데,
鳳翔의 李茂貞과 邠寧의 王行瑜 등이 모두 자제들을 보내 정예병으로 천자를 宿衛하게 하니, 환관 韓全誨 등이 또한 이들의 힘을 믿고 돕는 세력으로 삼았다. 천자가 최윤과 國事를 계획하거늘 환관들이 몰래 엿들어 계획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많았다.
이에 미녀를 뽑아 궁중으로 들여 그들에게 몰래 실정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오래 지나 과연 최윤이 도모한 계획이 환관들을 주살하고자 한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
한전회 등이 크게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서로 울면서 최윤을 도모하여 일신을 보전할 방법을 생각하였다. 최윤이 계획이 누설된 것을 알고 일이 다급해지자 즉시 거짓으로 詔書를 작성하여 梁나라 병사를 불러들여 환관들을 주살하였다.
10월에 왕이 宣武‧宣義‧天平‧護國의 병사 7만을 거느리고 河中에 이르러 同州를 취하고 마침내 華州를 공격하니, 韓建이 나와 항복하였다.
韓全誨 등은 梁王의 병사가 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즉시 岐州와 邠州의 숙위병으로 천자를 겁박하여 鳳翔으로 달아나거늘 왕이 이에 上書하여 崔胤이 자신을 부른 뜻을 말하니,
천자가 노하여 최윤을 宰相에서 파직하여 工部尙書에 강등시켜 제수하였고, 조서를 내려 梁나라 병사를 鎭州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떠나 邠州를 공격하고 三原에 주둔하니, 邠州節度使 楊崇本이 邠州‧寧州‧慶州‧衍州 네 州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최윤은 華州로 달아났다.
天復 2년(902) 봄에 왕이 河中으로 군을 물렸는데, 晉나라가 晉州와 絳州를 공격하자 朱友寧을 보내 蒲縣에서 晉나라 군사를 패퇴시켜 汾州‧慈州‧隰州를 취하고 마침내 太原을 포위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오니, 분주‧자주‧습주가 다시 晉나라로 편입되었다.
4월에 朱友寧이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 興平에 이르러 李茂貞과 武功에서 전투하여 크게 패퇴시켰다. 왕의 병사가 鳳翔을 침범하자 이무정이 수차례 출전하여 번번이 패하였는데 마침내 포위되었다.
11월에 鄜坊의 李周彛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 봉상을 구원하려 하였는데, 왕이 孔勍을 보내 鄜州을 습격하여 이주이의 가족을 사로잡아 河中으로 보내니, 이주이가 비로소 항복하였다.
이때에 岐州의 병사가 누차 패하고 포위된 지 오래되어 성안에 식량이 다 떨어지니, 천자로부터 후궁에 이르기까지 모두 추위에 떨고 굶주렸다.
天復 3년(903) 정월에 李茂貞이 韓全誨 등 20인을 죽이고 首級을 주머니에 담아 梁나라 군대에 보이고서 천자를 내보내면 무장을 해제할 것을 약속하였다.
천자가 나가 梁나라 군대로 행차하여 使者를 보내 崔胤을 급히 소환하니, 최윤은 병을 핑계 대고 오지 않았다.
왕이 사람을 보내 최윤을 조롱하며 말하기를 “나는 천자를 알지 못하니, 온 사람이 천자가 아닐까 염려된다. 그대가 와서 나를 위해 판별해달라.”라고 하였다. 천자가 돌아와 興平에 이르렀는데, 최윤이 백관을 거느리고 공경히 맞이하였다.
왕이 스스로 천자를 위하여 말고삐를 잡고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고 한편으로 가서 10여 리를 가다가 멈추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충성스럽다고 하였다.
己巳日에 천자가 鳳翔으로부터 이르러 素服을 입고 太廟에서 곡한 뒤에 들어가 환관 700여 명을 죽였다.
2월 甲戌日에 천자가 왕에게 回天再造竭忠守正功臣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輝王 李祚를 諸道兵馬元帥로 삼고 왕을 副元帥로 삼았다.
왕이 이에 아들 朱友倫을 남겨두고 護駕指揮使로 삼아 천자의 호위를 맡기고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갈 때에 천자가 延喜樓에서 전별연을 열고서 〈楊柳枝〉 다섯 曲을 연주하게 하였다.
당초에 梁나라 병사가 이미 서쪽으로 감에 靑州의 王師範이 장수 劉鄩을 보내 梁나라 兗州를 습격하여 점거하였다.
왕이 이미 梁나라로 돌아오고 4월에 鄆州로 가서 朱友寧을 보내 靑州를 공격하였는데, 왕사범이 石樓에서 패퇴하니 주우녕이 전사하였다.
9월에 楊師厚가 臨朐에서 청주의 군대를 패퇴시켜 棣州를 취하니 왕사범은 청주를 바치고 항복하였고 유심 또한 항복하였다.
朱友倫이 擊鞠을 하다 말에서 떨어져 죽으니, 왕이 노하여 崔胤이 그를 죽였다고 여겨 朱友謙을 보내 京師에서 최윤을 죽이고, 주우륜과 함께 격국을 했던 사람을 모두 죽였다.
천자가 華州로 파천하였을 때부터 왕이 洛陽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니, 비록 허락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왕이 河南 張全義에게 명하여 洛陽宮을 수축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天祐 元年(904) 정월에 왕이 河中으로 가서 牙將 寇彦卿을 보내 京師로 가서 洛陽으로 천도하고 아울러 長安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동쪽으로 이주시킬 것을 청하게 하였다.
천자가 幸行하여 陝州에 이르렀는데, 왕이 行在所에서 조회한 다음 먼저 東都(洛陽)로 갔다.
이때에 六軍의 위병들이 이미 흩어지고 도망하여 천자를 동쪽으로 호종하는 자는 小黃門 10여 명과 打毬供奉과 內園의 어린아이 등 200여 명뿐이었다.
길을 가다 穀水에 이르렀는데, 왕이 醫官 許昭遠을 시켜 저들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하고 모두 죽여 다른 사람으로 대체를 한 뒤에 천자에게 아뢰었다. 이로 인해 천자의 左右는 모두 梁나라 사람으로 채워졌다.
4월 甲辰日에 천자가 西都로부터 東都에 이르렀다. 이때에 晉王 李克用, 岐王 李茂貞, 楚王 趙匡凝, 蜀王 王建, 吳王 楊行密이, 梁王이 천자를 낙양으로 천도시켰다는 말을 듣고 모두 군사를 일으켜 梁나라를 토벌하려고 하니 왕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6월에 楊崇本이 다시 岐王에게 붙었다. 왕이 이에 병사를 河中으로 거느리고 가서 양숭본을 공격한다고 소문을 내고 朱友恭‧氏叔琮‧蔣玄暉 등을 보내 弑逆을 행하니 昭宗이 崩御하였다.
10월에 왕이 京師에서 朝見(조현)하여 朱友恭과 氏叔琮을 죽였다. 11월에 淮南을 공격하여 光州를 취하고 壽州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天祐 2년(905) 2월에 蔣玄暉를 보내 德王 李裕 등 아홉 명의 왕을 九曲池에서 죽였다.
6월에 司空 裴贄 등 100여 명을 죽였다. 7월에 천자가 다시 사신을 보내와 왕에게 迎鑾紀功碑를 하사하였다.
왕이 唐나라를 대신하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 여러 鎭에 이런 뜻을 알렸는데, 襄州의 趙匡凝이 불가하다고 하니 楊師厚를 보내 공격하게 하여 唐州‧鄧州‧復州‧郢州‧隨州‧均州‧房州 7개 州를 취하고 왕은 양주로 가서 漢水 북쪽에 주둔하였다.
9월에 양사후가 양주를 격파하니, 조광응이 회남으로 달아났다. 양사후가 荊南을 취하니, 荊南留後 趙匡明이 蜀으로 달아나, 마침내 光州로 나가 壽州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천자가 南郊에서 하늘에 제사 지낼 날을 점치자 왕이 노하여 “蔣玄暉 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唐나라의 國運을 연장시키려 한다.”라고 하거늘, 천자가 두려워하여 교외에서 제사 지낼 날을 다시 점쳤다.
11월 辛巳日에 천자가 왕을 봉하여 魏王과 相國으로 삼고서 백관을 총괄하게 하고서 宣武‧宣義‧天平‧護國‧天雄‧武順‧佑國‧河陽‧義武‧昭義‧
武寧‧保義‧忠義‧武昭‧武定‧泰寧‧平盧‧匡國‧鎭國‧荊南‧忠武 21개의 軍을 魏國으로 삼고 九錫을 갖추어 내렸는데, 왕이 노하여 받지 않았다.
12월에 천자가 왕을 天下兵馬元帥로 삼았는데, 왕이 더욱 노하여 사람을 보내 樞密使 蔣玄暉가 何太后(唐 昭宗의 妃)와 私通하였음을 고하고 장현휘를 죽여 불태우고 마침내 太后를 積善宮에서 시해하였다.
또 宰相 柳璨과 太常卿 張延範을 죽여 車裂하고서 조리돌렸다. 천자가 詔書를 내려 태후의 연고로 郊祭를 정지한다고 알렸다.
天祐 3년(906) 봄에 魏州의 羅紹威가 牙軍을 죽일 것을 계획하고서 왕에게 와서 병사를 빌려 變故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왕이 이를 위해 병사를 출병하여 북쪽으로 劉仁恭의 滄州를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병사가 위주를 지날 때에 나소위가 이미 아군을 죽이니 외부에 있던 아군들이 과연 모두 반란을 일으켜 貝州‧衛州‧澶州‧博州를 점령하였는데,
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가 모두 죽이고 마침내 창주를 공격하고 長蘆에 주둔하였다. 劉仁恭이 晉나라에 구원을 청하거늘 晉나라 사람이 潞州를 점령하니 왕이 이에 회군하였다.
開平 元年(907) 봄 정월 壬寅日에 천자가 御史大夫 薛貽矩를 보내와 군대를 위로하고, 宰相 張文蔚가 백관을 거느리고 와 제위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여름 4월 壬戌日에 이름을 晃으로 바꾸었다. 甲子日에 황제에 즉위하였다. 戊辰日에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바꾸고 국호를 梁이라 하였다.
오호라! 천하가 梁나라를 미워한 지가 오래되었다. 後唐 이래로 모두 僞朝라고들 하는데, 내가 五代를 論次함에 이르러서는 유독 梁나라를 위조라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의논하는 자들이 혹 내가 ≪春秋≫의 뜻을 크게 그르쳤다고 비난하면서 말하였다. “梁나라는 큰 악을 저질렀으므로 응당 誅罰하여 단절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치켜세웠으니, 이는 簒奪을 장려한 것이요 ≪춘추≫의 뜻이 아니다.”
내가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이것이 ≪춘추≫의 뜻이다. 魯 桓公은 隱公을 시해하고서 스스로 군주가 된 자이고, 魯 宣公은 아들 赤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가 된 자이고,
鄭 厲公은 世子 忽을 축출하고 스스로 군주가 된 자이고, 衛나라 公孫剽는 자신의 군주 衎을 축출하고 스스로 군주가 된 자인데 성인께서는 ≪춘추≫에 모두 단절시키지 않고 군주가 된 사실을 그대로 적었으니,
여기에서 내가 梁나라를 위조라 하지 않은 것은 ≪춘추≫의 筆法을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춘추≫ 또한 찬탈을 장려한 것인가.”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네 사람이 임금이 된 것을 단절시키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춘추≫의 志意를 드러냈다.
聖人이 ≪춘추≫에 마음을 쓴 것이 깊기 때문에 勸戒가 절실하고, 말을 미덥게 하였으니, 그런 뒤에 善惡이 분명해진다.
무릇 후세에 죄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 사실을 매몰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사실이 군주가 되었다면 군주가 되었다고 쓰고, 사실이 찬탈한 것이라면 찬탈하였다고 써서,
각각 사실을 전하여 후세로 하여금 미덥게 하면 네 임금의 죄를 덮을 수가 없다. 군주가 된 자로 하여금 죄악을 덮을 수 없게 한 뒤에 사람들로 하여금 惡名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하였으니,
이렇게 되면 악을 행하는 자가 거의 사라질 것이다. 이를 일러 저술한 뜻이 깊고 권계가 절실하며 그 말이 미덥고 선악이 분명하다고 하는 것이다.
桀紂는 그 왕을 貶下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萬世에서 공동으로 미워하는 자이니, ≪춘추≫가 크게 악한 군주에 대해 주벌하여 단절시키지 않는 것은 선을 襃獎하고 악을 貶斥하는 ≪춘추≫의 취지에 방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사실을 매몰하지 않음으로써 그 죄를 드러내어 후세에 미덥게 한 것과 군주가 된 자가 죄악을 덮지 못하게 하여 악을 행하는 사람이 사라지게 한 것은 ≪춘추≫의 이러한 의도를 능히 알아야만 내가 梁을 위조라고 하지 않은 뜻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