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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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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唐臣傳
01.
二傳 摹倣史遷而得其髓矣
郭崇韜 代州雁門人也 爲河東敎練使하다 爲人明敏하고 能應對하야 以幹材見稱하다
莊宗爲晉王 爲中門使 崇韜爲副使
中門之職 參管機要어늘 先時 吳珙張虔厚等 皆以中門使 相繼獲罪러라
知祥懼하야 求外任한대 莊宗曰 公欲避事인댄 當擧可代公者라하니 知祥乃薦崇韜爲中門使하니 甚見親信하니라
晉兵圍于鎭州하야 久不下어늘 而定州引契丹入寇 契丹至新樂한대 晉人皆恐하야 欲解圍去어늘
莊宗未決하니 崇韜曰 契丹之來 非救文禮 爲王都以利誘之耳 且晉新破梁軍하니 宜乘已振之勢 不可遽自退怯이니이다
莊宗然之하니 果敗契丹하다 莊宗卽位하야 拜崇韜兵部尙書樞密使하다
擊破하니 唐軍東保어늘 彦章圍之
莊宗登壘하야 望見彦章爲重塹以絶唐軍하고 意輕之하야 笑曰 我知其心矣 其欲持久以弊我也라하고
卽引短兵出戰이라가 爲彦章伏兵所射하야 大敗而歸하다
莊宗問崇韜計安出고하니 是時 唐已得鄆州矣 崇韜因曰 彦章圍我於此 其志在取鄆州也
臣願得兵數千하야 據河下流하야 築壘於必爭之地하되 以應鄆州爲名이면 彦章必來爭하리니 旣分其兵이면 可以圖也니이다
然板築之功 難卒就하니 陛下日以精兵挑戰하야 使彦章兵으로 不得東이면 리이다
莊宗以爲然하고 乃遣崇韜與將數千人夜行하야 所過 驅掠居人하고 毁屋伐木하야 渡河築壘於博州東하야 晝夜督役하니 六日壘成이라
하니 時方大暑 彦章兵熱死하야 及攻壘不克하야 所失大半하고 還趨楊劉한대 莊宗迎擊하야 遂敗之하다
康延孝自梁奔唐하야 先見崇韜어늘 崇韜延之臥內하야 盡得梁虛實이라
是時 莊宗軍하고 段凝軍臨河 唐自失德勝으로 梁兵日掠澶相黎陽衛州하니
而李繼韜以澤潞叛入于梁하고 契丹數犯幽涿하고 又聞延孝言梁方召諸鎭兵欲大擧하고 唐諸將皆憂惑하야 以謂成敗未可知
莊宗患之하야 以問諸將하니 諸將皆曰 唐得鄆州로되 隔河難守
不若棄鄆與梁하고 而西取衛州黎陽하야 以河爲界하야 與梁約罷兵毋相攻이면 庶幾以爲後圖니이다
莊宗不悅하야 退臥帳中하야 召崇韜問計하니 崇韜曰 陛下興兵仗義하야 將士疲戰爭하고 生民苦轉餉者 十餘年矣
況今大號已建하야 自河以北으로 人皆引首以望成功而思休息이라 今得一鄆州로되 不能守而棄之 雖欲指河爲界 誰爲陛下守之리잇고
且唐未失德勝時 四方商賈 征輸必集하야 薪蒭糧餉 其積如山이러니 自失南城하야 保楊劉 道路轉徙 耗亡大半이라
而魏博五州 秋稼不稔하야 竭民而斂이라도 不支數月이니 此豈按兵持久之時乎리오 臣自康延孝來 盡得梁之虛實하니 此眞天亡之時也
願陛下分兵守魏하야 固楊劉而自鄆長驅하야 擣其巢穴이면 不出半月 天下定矣라하니 莊宗大喜曰 此大丈夫之事也라하다
因問司天하니 司天言歲不利用兵이라하다 崇韜曰 古者命將 이라 況成算已決하니 區區常談 何足信也리오하니
莊宗卽日下令軍中하야 歸其家屬於魏하고 夜渡楊劉하야 하야 八日而滅梁하다
莊宗推功하야 賜崇韜鐵券하고 拜侍中成德軍節度使하고 依前樞密使하다
莊宗與諸將으로 以兵取天下어늘 而崇韜未嘗居戰陣이요
徒以謀議居第一之功하야 位兼將相하야 遂以天下爲己任하야 遇事無所回避하니 而宦官伶人用事 特不便也러라
崇韜與宦官俱爲中門使어늘 而紹宏位在上이라
及莊宗卽位하야 二人當爲樞密使어늘 而崇韜不欲紹宏在己上하야 乃以爲樞密使하고 紹宏爲宣徽使하다
紹宏失職怨望하니 崇韜因置內勾使하야 以紹宏領之하니 凡天下錢穀出入于租庸者 皆經內勾
旣而 文簿繁多하야 州縣爲弊 遽罷其事하니 而紹宏尤側目이라
崇韜頗懼하야 語其故人子弟曰 吾佐天子하야 取天下러니 今大功已就 而群小交興하니 吾欲避之하야 歸守鎭陽하야 庶幾免禍 可乎아하니
故人子弟對曰 俚語 曰 騎虎者勢不得下라하니 今公權位已隆하야 而下多怨嫉하니 一失其勢 能自安乎아하다
崇韜曰 奈何오하니 對曰 今中宮未立而劉氏有寵하니 宜請立劉氏爲皇后하고 而多建天下利害以便民者
然後退而乞身이면 天子以公有大功而無過라하야 必不聽公去리니 外有避權之名而內有中宮之助하고 又爲天下所悅이니
雖有讒間이나 其可動乎아하니 崇韜以爲然하고 乃上書請立劉氏爲皇后하다
崇韜素廉이러니 自從入洛으로 始受四方賂遺하니 故人子弟或以爲言이어늘
崇韜曰 吾位兼將相하야 祿賜巨萬이니 豈少此耶리오 今藩鎭諸侯 多梁舊將이니 皆主上之人也어늘 豈無反側이리오
且藏予私室 何異公帑이리오 明年 天子有事南郊한대 乃悉獻其所藏하야 以佐賞給하다
莊宗已郊 遂立劉氏爲皇后하다 崇韜累表自陳하야 請依唐舊制하야 還樞密使于內臣하고 而幷辭鎭陽한대 優詔不允하다
崇韜又曰 臣從陛下軍朝城하야 定計破梁할새 陛下撫臣背而約曰 事了 與卿一鎭이라하더시니
今天下一家 賢竝進이라 臣憊矣 願乞身如約이라하니
莊宗召崇韜하야 謂曰 朝城之約 許卿一鎭이요 不許卿去 欲捨朕 安之乎아하다 崇韜因建天下利害二十五事하야 施行之하다
爲成德軍節度使하고 徙崇韜忠武하니 崇韜因自陳權位已極 言甚懇至
莊宗曰 豈可朕居天下之尊하고 使卿無尺寸之地리오하야늘 崇韜辭不已어늘 遂罷其命하고 仍爲侍中樞密使하다
三年夏 霖雨不止하야 大水害民田하니 民多流死 莊宗患宮中暑濕不可居하야 思得高樓避暑하다
宦官進曰 臣見長安全盛時 樓閣百數러니 今大內 不及故時卿相家라하다
莊宗曰 吾富有天下하니 豈不能作一樓리오하고 乃遣宮苑使王允平營之하다
宦官曰 郭崇韜眉頭不伸하야 爲租庸惜財用하니 陛下雖欲有作이나 其可得乎리잇가하다
莊宗乃使人問崇韜曰 昔吾與梁對壘於河上할새 雖祁寒盛暑 被甲跨馬라도 不以爲勞러니 今居深宮蔭廣厦언마는 不勝其熱 何也오한대
崇韜對曰 陛下昔以天下爲心이러시니 今以一身爲意하니 艱難逸豫 爲慮不同 其勢自然也니이다
願陛下無忘創業之難하야 常如河上하시면 則可使繁暑坐變淸涼이라하니 莊宗默然이라가
終遣允平起樓하니 崇韜果切諫이라 宦官曰 崇韜之第 無異皇居하니 安知陛下之熱이릿고하다 由是 讒間愈入하다
河南縣令羅貫 爲人彊直하야 頗爲崇韜所知 貫正身奉法하야 不受權豪請託이요
宦官伶人有所求請하야 書積几案이라도 一不以報하고 皆以示崇韜 崇韜數以爲言하니 宦官伶人 由此切齒하니라
河南自故唐時張全義爲尹으로 縣令多出其門하야 全義厮養畜之러니 及貫爲之하야 奉全義不屈하고 縣民恃全義爲不法者 皆按誅之
全義大怒하야 嘗使人告劉皇后하니 從容爲白貫事하고 而左右日夜共攻其短이로되 莊宗未有以發이라
皇太后崩 葬坤陵하니 陵在壽安이라 莊宗幸陵作所 而道路泥塗橋壞
莊宗止輿하고 問誰主者 宦官曰 屬河南이니이다 因亟召貫하니 貫至하야 對曰 臣初不奉詔하니 請詰主者라하다
莊宗曰 爾之所部어늘 復問何人고하고 卽下貫獄한대 獄吏搒掠하야 體無完膚
明日 傳詔殺之한대 崇韜諫曰 貫罪無他 橋道不修 法不當死라하다
莊宗怒曰 太后靈駕將發하야 天子車輿往來 橋道不修어늘 卿言無罪라하니 朋黨也라하니
崇韜曰 貫雖有罪 當具獄行法于有司니이다 陛下以萬乘之尊으로 怒一縣令하야 使天下人言陛下用法不公하면 臣等之過也라하다
莊宗曰 貫 公所愛 任公裁決이라하고 因起入宮하니 崇韜隨之하야 論不已어늘 莊宗自闔殿門하야 崇韜不得入이라 貫卒見殺하니라
議擇大將하니 明宗爲總管이라 當行이나
而崇韜以讒見危하야 思立大功爲自安之計하고 乃曰 契丹 爲患北邊하니 非總管이면 不可禦
國之儲副 而大功未立이요 且親王爲元帥 唐故事也라하다
莊宗曰 繼岌 小子 豈任大事리오 公爲我擇其副하라 崇韜未及言이어늘 莊宗曰 吾得之矣 無以易卿也로다하고
乃以繼岌爲西南面行營都統하고 崇韜爲招討使하야 軍政皆決崇韜하다
唐軍入蜀 所過迎降이어늘 王衍弟宗弼 陰送款于崇韜하야 求爲西川兵馬留後하니 崇韜以節度使許之하다
軍至成都하니 宗弼遷衍于西宮하고 悉取衍嬪妓珍寶하야 奉崇韜及其子廷誨하다 又與蜀人列狀見魏王하야 請崇韜留鎭蜀한대 繼岌頗疑崇韜어늘
崇韜無以自明하야 因以事斬宗弼及其弟宗渥宗勳하고 沒其家財하니 蜀人大恐하다
崇韜素嫉宦官하야 嘗謂繼岌曰 王有破蜀功하니 師旋이면 必爲太子리이다
俟主上 當盡去宦官하고 至於扇馬하야도 亦不可騎라하다
繼岌監軍李從襲等 見崇韜專任軍事하고 心已不平이러니 及聞此言하야 遂皆切齒하야 思有以圖之하다
莊宗聞破蜀하고 遣宦官向延嗣勞軍이어늘 崇韜不郊迎한대 延嗣大怒하야 因與從襲等으로 共構之하다
延嗣還하야 上蜀簿하니 得兵三十萬 馬九千五百匹 兵器七百萬
糧二百五十三萬石 錢一百九十二萬緡 金銀二十二萬兩 珠玉犀象二萬文 錦綾羅五十萬匹하다
莊宗曰 人言蜀天下之富國也라하야늘 所得 止於此邪아한대 延嗣因言蜀之寶貨皆入崇韜라하고
且誣其有異志하야 將危魏王하니 莊宗怒하야 遣宦官馬彦珪至蜀하야 視崇韜去就하다 彦珪以告劉皇后하니 劉皇后敎彦珪矯詔魏王殺之하다
崇韜有子五人 其二從死于蜀하고 餘皆見殺이요 其破蜀所得 皆籍沒하다
明宗卽位 詔許歸葬하고 以其太原故宅으로 賜其一孫하다
當崇韜用事時하야 自宰相豆盧革韋悅等으로 皆傾附之 崇韜父諱弘이니 革等卽因他事하야 奏改弘文館爲崇文館하다
以其姓郭으로 因以爲之後러니 崇韜遂以爲然하다 其伐蜀也 過子儀墓하야 下馬號慟而去하니 聞者頗以爲笑
然崇韜盡忠國家하고 有大略이라 其已破蜀 因遣使者하야 以唐威德으로 風諭諸蠻하야 欲因以綏來之하니 可謂有志矣로다


01. 郭崇韜傳記
列傳司馬遷의 ≪史記≫를 모방했으되 그 骨髓를 얻었다.
郭崇韜代州 雁門 사람이니 河東敎練使를 지냈다. 사람됨이 明敏하고 應對를 잘하여 일처리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莊宗晉王이었을 때 孟知祥中門使였고 郭崇韜가 그 副使였다.
중문사라는 직무는 국가의 機務에 관여하였는데 이전에 吳珙張虔厚 등이 모두 중문사로 있으면서 연달아 죄를 받았다.
맹지상이 이를 두려워하여 外任을 청하자, 장종이 말하기를 “이 이 일을 피하려고 한다면 의당 공을 대신할 만한 이를 천거해야 하오.”라고 하니, 맹지상이 이에 곽숭도를 천거하여 중문사로 삼으니 곽숭도가 장종에게 매우 친애와 신뢰를 받았다.
나라 군대가 鎭州에서 張文禮를 포위하고서 오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는데 定州 王都契丹의 군사를 끌어와서 침략하였다. 거란의 군대가 新樂에 이르자 나라 군대가 모두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떠나려 하였는데,
莊宗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니 郭崇韜가 말하기를 “거란이 온 것은 張文禮를 구원하려 해서가 아니라 왕도가 이익으로 거란을 유인하였기 때문일 뿐입니다. 게다가 나라가 나라 군대를 지금 막 격파하였으니 이미 떨친 勝勢를 타야 할 것이요, 대뜸 스스로 겁먹고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옳다고 여기니 과연 거란을 물리쳤다. 장종이 즉위하여 곽숭도를 兵部尙書 樞密使에 배수하였다.
나라 王彦章德勝을 격파하니 나라 군대가 동쪽으로 물러나 楊劉를 지켰는데 왕언장이 나라 군대를 포위하였다.
莊宗營壘에 올라 왕언장이 깊은 구덩이를 파서 나라 군대의 퇴로를 끊어놓은 것을 바라보고 속으로 하찮게 여기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의 의도를 알겠다. 그는 持久戰을 펼치면서 나를 지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고,
곧장 짧은 병기를 든 병사들을 거느리고 出戰하였다가 왕언장의 伏兵에게 화살을 맞고 크게 패하여 돌아갔다.
장종이 郭崇韜에게 묻기를 “무슨 좋은 계책을 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때에 이 이미 鄆州를 함락한지라 곽숭도가 이로 인하여 말하기를 “왕언장이 여기서 우리를 포위한 것은 그 뜻이 운주를 취하려는 데 있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黃河下流占據하고서 반드시 빼앗아야 하는 곳에 堡壘를 수축하되 운주에 호응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는다면, 왕언장이 반드시 와서 빼앗으려 할 것이니 그의 군대를 분산시키기만 하면 승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修築하는 工役은 금방 이루기가 어려우니 陛下께서 날마다 精兵을 거느리고 그에게 싸움을 걸어 왕언장의 군대로 하여금 동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해주신다면 열흘이면 보루가 완성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이에 곽숭도와 毛璋을 보내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밤에 행군하여 지나가는 곳마다 거주하는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집을 부수며 나무를 잘라 황하를 건너 博州의 동쪽에 보루를 수축하고서 밤낮으로 공역을 督責하니 엿새만에 보루가 완성되었다.
왕언장이 과연 군대를 이끌고 급히 공격하니 이때 한창 더위가 심한지라 왕언장의 군사들이 熱射病에 걸려 죽어 미처 보루를 공격하여 이기기도 전에 잃어버린 병사가 태반이나 되었고, 회군하여 양류에 다다르자 장종이 그를 맞아 공격하여 마침내 무찔렀다.
康延孝나라에서 나라로 도망쳐 와서 먼저 郭崇韜를 만났는데 곽숭도가 침실 안으로 맞이하여 나라의 虛實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이때에 莊宗朝城에 주둔하였고 段凝臨河에 주둔하였다. 나라가 德勝을 잃어버린 뒤로 나라 군대가 날마다 澶州相州黎陽衛州侵掠하니,
李繼韜澤州潞州를 가지고 배반하여 나라에 투항하고, 契丹幽州涿州를 자주 침범하였으며, 또 나라가 막 여러 兵力을 소집하여 군대를 크게 일으키려 한다는 강연효의 말을 듣고는 나라의 장수들이 모두 근심하고 의혹하면서 전쟁의 成敗를 알 수가 없다고 여겼다.
장종이 이를 근심하여 장수들에게 물으니,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나라가 鄆州를 차지하였으나 黃河를 사이에 두고 있어 지키기가 어려우니,
운주를 버려 나라에 주고 서쪽으로 衛州黎陽을 취하여 황하를 경계로 삼고서 나라와 군대를 물려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하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이 계책을 좋아하지 않아 軍幕에 물러나 누운 채로 곽숭도를 불러 계책을 물으니, 곽숭도가 말하기를 “陛下께서 大義를 내걸고 起兵하여 將士들이 戰爭에 지치고 백성들이 軍糧을 수송하느라 허덕인 지가 10여 년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국가의 大號를 이미 세워 황하 이북으로는 사람들이 모두 간절히 목을 뺀 채로 功業을 이루기를 바라고 휴식하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겨우 일개 운주를 함락하였는데도 지키지 못해 버린다면 비록 황하를 지정하여 경계로 삼고자 할지라도 누가 폐하를 위해 지키겠습니까.
게다가 나라가 아직 德勝을 잃지 않았을 때에 四方의 상인들이 징수하고 운반하는 물자들이 반드시 그곳에 모여 땔감과 꼴, 양식이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南城을 잃고 楊劉를 지키면서부터 도로에서 옮기며 운반할 때 소모되는 물자가 태반입니다.
魏州博州 등 다섯 는 가을걷이 철에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을 쥐어짜서 거두더라도 수개월을 버티지 못하니, 이 어찌 군대를 주둔하면서 오래 버티고 있을 때이겠습니까. 신은 강연효가 도망쳐 온 뒤로 나라의 허실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이 나라를 망하게 할 때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군대를 나누어 魏州를 지켜 양류를 튼튼하게 하고 운주에서 멀리 내달려 나라의 소굴을 부순다면 반달이 지나지 않아 천하가 통일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장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이것이 大丈夫의 사업이다.”라고 하였다.
이 일로 司天監에 자문하니, 사천감에서 말하기를 “올해는 군대를 움직이기에 이롭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곽숭도가 말하기를 “옛날 장수를 임명할 때 凶門을 뚫고 나가게 하였습니다. 하물며 논의를 마친 계책을 실행하기로 이미 결정하였으니 보잘것없는 이의 늘상 하는 이야기를 믿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장종이 그날 즉시 軍中에 명령을 내려 그 家屬魏州에 돌려보내고 밤에 양류를 건너 운주에서 汴州로 쳐들어가서 여드레 만에 나라를 멸망시켰다.
장종이 論功行賞하여 곽숭도에게 鐵券을 하사하고 侍中 成德軍節度使에 제수하고 이전처럼 樞密使로 있도록 하였다.
莊宗이 장수들과 武力으로 천하를 취하였는데 郭崇韜戰場에 직접 있은 적이 없었고,
그저 謀議로 제왕의 창업을 보좌한 제일 큰 공훈을 차지하여 장군과 재상의 지위를 겸임하고서 마침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회피하는 바가 없으니, 宦官伶人들이 권세를 휘두르는 데 있어 특히 불편하게 여겼다.
당초에 郭崇韜宦官 馬紹宏과 함께 모두 中門使가 되었는데 마소굉이 자신보다 직위가 높았다.
莊宗이 즉위하게 되자 두 사람이 樞密使가 되어야 했는데, 곽숭도는 마소굉이 자기 윗자리에 있는 것을 바라지 않아 이에 張居翰을 추밀사로 삼고 마소굉을 宣徽使로 삼았다.
마소굉이 추밀사의 직위를 잃어 곽숭도를 원망하니 곽숭도가 이로 인해 內勾使를 설치하여 마소굉이 거느리게 하니 租稅로 들고 나는 천하의 錢穀들이 모두 내구사를 거쳤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文簿의 일이 너무 繁多하여 州縣들이 그 폐해를 입기에 갑자기 이 일을 폐지하니 마소굉이 더욱 원한을 품었다.
곽숭도가 몹시 두려워져서 벗과 子弟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자를 보좌하여 천하를 얻었는데 지금 큰 공업을 이루고 나자 소인배들이 분분하게 일어나니 내가 그들을 피하여 돌아가 鎭陽을 지킴으로써 災禍를 면할까 하는데, 가능하겠는가?”라고 하니,
벗과 자제가 대답하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범을 타고 있는 자는 그 형세가 내려올 수 없다.’라고 합니다. 지금 공의 권세와 지위가 이미 매우 높아 아래에 원망하고 질시하는 이가 많으니 한번 그 권세를 잃으면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곽숭도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자, 〈벗과 자제가〉 대답하기를 “지금 中宮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는데 劉氏가 총애를 받고 있으니 유씨를 세워 皇后로 삼을 것을 청하고, 백성을 편하게 해줄 天下利害에 관한 일들을 많이 건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 은퇴하기를 구한다면 천자께서 공이 큰 공로가 있고 허물이 없다고 여겨 반드시 공이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는 밖으로는 권세를 사양한다는 명분이 있고 안으로는 중궁의 도움이 있게 되는 것이며 또 천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니,
비록 讒言과 이간질이 있더라도 〈공의 권세를〉 흔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곽숭도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이에 글을 올려 유씨를 세워 황후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郭崇韜는 평소 청렴하였는데 洛陽에 들어오고부터 비로소 四方에서 들어오는 뇌물을 받으니 벗과 자제 가운데 어떤 이가 이를 지적하여 말하자,
곽숭도가 말하기를 “내가 장수와 재상의 직위를 겸하고 있어 俸祿과 하사받은 재물이 巨萬이나 되니 어찌 이 재물이 부족하겠는가. 지금 藩鎭諸侯들은 나라의 옛 장수들이 많으니 모두 主上을 해치려고 했다가 신하가 된 사람들인데 지금 이들을 일절 물리친다면 어찌 원한을 품지 않겠는가.
더구나 나의 私家에 보관하는 것이 公家의 창고에 보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듬해 천자가 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이에 그 보관하고 있던 재물을 다 바쳐 賞給에 보태었다.
莊宗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마침내 劉氏를 세워 皇后로 삼았다. 郭崇韜가 누차 表文을 올려 자기 의견을 진달하여 나라의 옛 제도를 따라 內臣에게 樞密使의 직무를 돌려주고 아울러 자기는 鎭陽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였는데 장종이 優渥한 조서를 내리며 윤허하지 않았다.
곽숭도가 다시 말하기를 “陛下를 따라 朝城에 주둔하여 나라 군대를 격파할 계책을 정할 때에 폐하께서 신의 등을 어루만지며 약속하시기를 ‘일을 마치면 에게 하나를 주겠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천하가 통일되어 걸출하고 현명한 인재들이 모두 조정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은 지쳤으니 약속하신 대로 직책에서 물러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장종이 곽숭도를 불러 이르기를 “조성에서의 약속은 에게 하나를 허락한 것이지, 경이 떠나라고 허락한 것은 아니니 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곽숭도가 이에 天下利害에 관계된 25가지 일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李嗣源成德軍節度使가 되고 郭崇韜忠武軍으로 옮겨주니 곽숭도가 이에 자신의 권세와 지위가 이미 극에 달했다고 진달하면서 〈사양하는〉 말이 몹시 간절하였다.
莊宗이 말하기를 “어찌 이 천하의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서 경에게 작은 땅조차 없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곽숭도가 사양하여 마지않자 마침내 그 임명을 철회하고 그대로 그를 侍中 樞密使에 임명하였다.
同光 3년(925) 여름에 장맛비가 그치지 않아 큰물이 民田에 피해를 입히니 유랑하다 죽는 백성들이 많았다. 莊宗宮中이 무덥고 습해 지내지 못하겠다고 힘들어하면서 높은 樓閣을 세워 더위를 피하려고 생각하였다.
宦官이 나아와 말하기를 “신은 長安이 전성했던 시절에 大明宮興慶宮樓閣이 백으로 헤아리던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大內가 그 시절 卿相의 저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唐大明宮圖唐大明宮圖
장종이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소유하였으니 어찌 누각 하나를 짓지 못하겠는가.”라고 하고, 이에 宮苑使 王允平을 보내 누각을 짓게 하였다.
宦官이 말하기를 “郭崇韜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租稅 문제로 재물 쓰기를 아까워하니 폐하께서 비록 누각을 지으려 하시더라도 이룰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종이 이에 사람을 보내 곽숭도에게 묻기를 “과거에 내가 黃河 가에서 나라 군대와 對峙하고 있을 때엔 비록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에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있더라도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깊은 궁궐에 지내면서 큰 집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건만 이 더위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자,
곽숭도가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과거에는 천하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셨는데 지금은 본인 一身만 생각하시니, 힘들 때와 편할 때 걱정하는 사정이 다른 것은 그 상황이 절로 그러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創業의 어려움을 잊지 마시어 늘 마치 황하 가에 있는 것처럼 여긴다면 무더위가 이로 인해 청량하게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장종이 말없이 듣기만 하였다.
그러다 결국 왕윤평을 보내 누각을 세우니 곽숭도가 과연 간절하게 直諫하였다. 환관이 말하기를 “곽숭도의 저택이 황제의 거처와 다름이 없으니 어찌 폐하가 더위에 시달리시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이간질하는 참소가 점점 황제에게 들어가게 되었다.
河南 縣令 羅貫은 사람됨이 彊直하여 자못 郭崇韜에게 知遇를 받았다. 나관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법대로 공무를 집행하여 權貴富豪의 청탁을 접수하지 않았고,
宦官이나 伶人이 요청하는 일이 있어 그 書信이 책상에 가득 쌓이더라도 일절 답장을 하지 않고 모두 곽숭도에게 가져다 보여주었다. 곽숭도가 자주 이 일을 가지고 말하니 환관과 영인들이 이로 인해 이를 갈았다.
河南은 예전 나라 때 張全義河南尹을 맡은 이래로 縣令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어 장전의가 하인처럼 그들을 부렸는데, 나관이 현령을 맡고 나서는 장전의를 모시면서 굽히지 않고 장전의를 믿고 不法을 저지르는 縣民들을 모두 國法에 따라 誅罰하였다.
장전의가 크게 노하여 사람을 보내 劉皇后에게 고하니 유황후가 조용히 나관의 일을 황제에게 아뢰었고, 左右에서 모시는 자들이 밤낮으로 함께 나관의 단점을 공격하였으나 莊宗은 이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皇太后가 붕어하자 坤陵에 장사 지내니 곤릉은 壽安에 있었다. 莊宗陵墓를 짓고 있는 곳에 거둥할 때 도로는 진흙탕인 데다 다리가 무너져 있었다.
장종이 御駕를 멈추고 이 지방을 누가 맡아 다스리는지 묻자, 宦官이 말하기를 “이곳은 河南縣에 속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급히 羅貫을 소환하니 나관이 이르러 대답하기를 “신은 애초 詔書를 받은 적이 없으니 관장하는 자에게 묻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말하기를 “이곳은 너의 관할인데 다시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 것인가?”라고 하고 곧장 나관을 감옥에 넣자, 獄吏가 그를 매질하여 몸에 온전한 살이 없었다.
이튿날 조서를 내려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자, 郭崇韜諫言을 올려 “나관은 다른 죄가 없고 다리와 도로를 改修하지 않은 것이니 법에 비추어볼 때 사형에 처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노하여 “太后의 상여가 출발하려 하여 천자의 수레가 왕래하려 할 때 다리와 도로를 개수하지 않았는데 이 그의 죄가 없다고 말하니 이는 그와 朋黨을 이룬 것이다.”라고 하니,
곽숭도가 말하기를 “나관이 비록 죄가 있으나 의당 해당 관사에서 獄案을 갖추어 법을 집행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萬乘의 천하를 다스리는 존엄한 지위에 계시면서 일개 縣令에게 노하여 천하 사람들이 폐하께서 법을 집행하시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수군거리게 한다면 이는 신들의 잘못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말하기를 “나관은 공이 아끼는 자이니 공이 마음대로 裁決하라.”라고 하고는, 이어 일어나 궁궐로 들어가니 곽숭도가 장종을 뒤따르며 쉬지 않고 諍論하였는데, 장종이 직접 殿門을 닫아걸어 곽숭도가 따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관은 결국 사형을 당하였다.
이듬해 을 정벌할 때 大將을 선발하는 일을 논의하니 이때 明宗(李思源)이 總管인지라 마땅히 가야 했다.
그러나 郭崇韜는 참소를 당해 위험한 처지에 빠져 큰 공훈을 세워 자신을 보전하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생각하고서, 이에 말하기를 “契丹北邊에서 근심을 끼치니 총관이 아니면 거란을 막을 수가 없지만,
魏王 李繼岌은 국가의 元子이며 아직 큰 공훈을 세우지 못했고 또한 親王元帥를 맡는 것은 나라 때의 관례입니다.”라고 하였다.
莊宗이 말하기를 “繼岌은 아직 어린아이이니 어찌 국가의 대사를 맡기겠는가? 공이 나를 위해 그 副將을 선발하라.”고 하였다. 곽숭도가 미처 대답하지 못했는데, 장종이 말하기를 “내가 알았다. 을 대신할 이가 없다.”라고 하고는,
이에 이계급을 西南面行營都統으로 삼고 곽숭도를 招討使로 삼아 軍政을 모두 곽숭도에게 결정하게 하였다.
나라 군대가 에 쳐들어갈 때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영접하며 투항하였는데, 王衍의 아우 王宗弼이 은밀히 郭崇韜에게 투항의 뜻을 보내면서 西川兵馬留後가 되기를 구하니 곽숭도가 節度使를 주기로 허락하였다.
나라 군대가 成都에 이르니 왕종필이 왕연을 西宮에 옮기고 왕연의 嬪妓珍寶를 모두 차지하고서 곽숭도 및 그의 아들 郭廷誨를 받들었다. 또 蜀人들과 함께 連名으로 글을 올려 魏王을 알현하여 곽숭도를 남겨 鎭守하게 해달라고 청하자 李繼岌이 자못 곽숭도를 의심하였는데,
곽숭도가 자신을 해명할 길이 없어 이에 어떤 일을 가지고 왕종필 및 그 아우 王宗渥王宗勳을 참수하고 그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니, 촉인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郭崇韜가 평소 宦官들을 미워하여 일찍이 李繼岌에게 이르기를 “親王께서 을 정벌한 공훈이 있으니 군대가 개선하면 반드시 太子가 되실 것입니다.
主上께서 千秋萬歲하시길 기다린 뒤에 〈제위에 오르시면〉 응당 환관들을 모조리 제거하여야 하고 불깐 말조차도 타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계급의 監軍 李從襲 등이 곽숭도가 軍事專權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이미 불평스러워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마침내 모두 이를 갈면서 곽숭도를 도모하려고 생각하였다.
莊宗을 격파했다는 말을 듣고 宦官 向延嗣를 보내 군대를 위로하였는데, 郭崇韜郊外에서 그를 영접하지 않자 상연사가 크게 노하여 이에 李從襲 등과 함께 일을 꾸며 해치려고 하였다.
상연사가 京師로 돌아와 의 〈兵馬와 재물을 기록한〉 帳簿를 올리니 군사 30만 명, 말 9,500, 兵器 7백만 개,
양식 253만 , 192만 , 金銀 22만 , 진주‧玉器‧무소뿔‧상아 2만 개, 각종 비단 50만 을 얻었다.
장종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은 천하의 富國이라고 말들 하는데 얻은 것이 이것뿐인가?”라고 하자, 상연사가 이에 寶貨가 모두 곽숭도에게 들어갔다고 말하고,
또 그가 다른 뜻을 품고서 장차 魏王을 위태롭게 하려 한다고 誣告하니, 장종이 노하여 宦官 馬彦珪를 보내 에 이르러 곽숭도의 去就를 살피게 하였다. 마언규가 이를 劉皇后에게 보고하니 유황후가 마언규에게 거짓 詔書를 꾸며서 위왕에게 내려 곽숭도를 죽이게 하였다.
郭崇韜는 아들이 다섯이었는데 그중 두 명은 에서 곽숭도를 따라 죽었고 나머지는 모두 피살되었으며 을 격파하여 얻은 재물들은 모두 籍沒되었다.
明宗이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고, 太原에 있는 그의 옛집을 그의 한 손자에게 하사하였다.
郭崇韜가 권세를 잡았을 때에는 宰相 豆盧革韋悅 등을 비롯하여 모두 그에게 빌붙었다. 곽숭도의 부친은 이니 두로혁 등이 다른 일을 빙자하여 弘文館崇文館으로 고칠 것을 상주하였다.
그의 이었기에 이에 郭子儀의 후손이라고 하였는데 곽숭도가 마침내 이 일을 사실로 여겼다. 곽숭도가 을 정벌할 때 곽자의의 에 들러 말에서 내려 통곡하고 떠나가니 이 일을 들은 이들이 자못 가소롭게 여겼다.
郭子儀郭子儀
그러나 곽숭도는 國家에 충성을 다하였고 큰 智略이 있었다. 그가 을 격파하고 나서 이어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威武恩德으로 南詔蠻族들에게 曉諭하여 이를 통해 그들을 按撫하고 來朝하게 하려 하였으니 큰 뜻이 있었다고 할 만하다.


역주
역주1 郭崇韜傳 : 郭崇韜(?~926 字가 安時로 代州 鴈門 사람이다. 곽숭도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57 〈唐書 第33 列傳9〉와 ≪新五代史≫ 卷24 〈唐臣傳 第12〉에 실려 있다. 歐陽脩는 ≪구오대사≫에 3천 8백여 자 분량인 곽숭도의 傳記를 2천 7백여 자로 축약하여 서술하였는데,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열전의 전반부에서는 곽숭도가 中門使가 되어 後唐 莊宗의 총애를 받아 張文禮‧王都‧王彦章과의 전투에서 策略을 써서 이기고 마지막에 智謀를 발휘해 後梁을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일을 서술하여 곽숭도가 승승장구하며 榮華가 극에 달하였음을 드러내었다.
이에 반해 후반부에서는 곽숭도가 宦官과 伶人들에게 원한을 사게 되자 保身策을 강구하여 장종에게 총애받던 劉氏를 황후로 책립하는 데 힘을 써서 樞密使가 되기까지 하였으나, 이후 궁궐에 누각을 짓는 문제, 河南縣令 羅貫을 처벌하는 문제를 두고 환관의 讒訴를 받아 점점 몰락해가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급기야 蜀을 정벌한 뒤에 李繼岌의 의심과 환관들의 中傷으로 결국 자신이 책립했다고 할 劉后의 讒訴로 죽임을 당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구양수는 곽숭도가 상승하고 추락하는 과정을 대비하여 몰입도를 높이는 구성을 취하였는데, 곽숭도의 굴곡이 심한 인생 역정은 후대의 문인들에게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된 듯하다. 다른 시대에 비해볼 때 五代의 인물을 다룬 史論을 찾기가 쉽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곽숭도를 다룬 史論은 꽤 여러 편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구오대사≫권57에 수록된 곽숭도 열전의 마지막에 수록된 史臣의 말은 明哲保身의 교훈을 말하였는데 그 내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무릇 몸을 내어 君主를 섬겨서 높은 지위를 얻고 좋은 시기를 만나면 功業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고 名望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공업을 이루고 명망을 성취하고 나면 명망이 무거워져 몸이 위태롭게 되어 참소하는 사람이 죄를 덧씌워서 美玉이 이에 먼저 절단되어 버린다. 그래서 곽숭도가 誅罰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강대한 吳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范蠡가 떠나고 齊나라 全域을 점령한 뒤에 樂毅가 出奔한 이유를 알 수 있으니, 만약 賢明한 자가 아니라면 누가 그 災禍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明哲한 선비는 이것을 鑑戒로 삼아야 할 것이다.[夫出身事主 得位遭時 功不可以不圖 名不可以不立 洎功成而名遂 則望重而身危 貝錦於是成文 良玉以之先折 故崇韜之誅 蓋爲此也 是知強吳滅而范蠡去 全齊下而樂生奔 苟非其賢 孰免其禍 明哲之士 當鑒於斯]”
宋代 蘇軾(1037~1101 문인이었던 張耒(1054~1114 ≪古文眞寶≫에도 실려 있는 〈書五代郭崇韜卷後〉라는 유명한 글에서 “예로부터 大臣은 權勢가 이미 극도로 높고 富貴가 이미 가득 차서 더 이상 바랄 바가 없으면 물러나 一身을 위한 고려를 한다.……그 도모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우니 생각함이 깊지 않고 계획함이 정교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훗날 균열이 발생하는 것은 종종 지극히 깊고 지극히 정교한 데서 비롯한다. 이 때문에 正道로 하는 것만 못하다.……무릇 정도라는 것은 計較를 부리는 일이 없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감히 비판할 수 없다.[自古大臣 權勢已隆極 富貴已亢滿 前無所希 則退爲身慮……其爲謀實難 不憂思之不深 計之不工 然異日釁之所起 往往自夫至深至工 是故莫若以正……夫正者無所事計也 行所當然 雖怨仇 不敢議之]”라고 하여 處身의 이치를 말한 뒤 곽숭도의 일생을 요약하여 서술하였다.
이어 “謀略을 좋아하는 선비는 모략에 敗亡하고 辯論을 좋아하는 선비는 변론에 패망한다. 오직 道德을 갖춘 선비는 궁한 처지에 빠지지 않거니와 禍福의 變轉을 어찌 思慮로 궁구할 수 있겠는가.[好謀之士 敗於謀 好辯之士 敗於辯 惟道德之士 爲無所窮 而禍福之變 豈思慮能究之哉]”라고 결론을 내어 곽숭도의 사례를 處世의 교훈으로 삼았다.
한편 소식의 아우 蘇轍(1039~1112 〈郭崇韜論〉이라는 史論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자기 나라에 틈이 없은 뒤에야 남을 정벌할 수 있으니 자기 나라의 틈을 무릅쓰고 남을 정벌할 경우 적이 틈이 없으면 내가 그 재앙을 받게 되고 적이 틈이 있으면 나와 적이 다 패망하게 된다.[國無釁而後可以伐人 冒釁以伐人 敵無釁則已受其災 敵有釁則我與敵皆斃]”라고 前提한 뒤, 그 사례로 楚 靈王과 齊 湣王을 들었다. 이어 곽숭도 역시 국내의 틈을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一身의 安危만 도모할 요량으로 蜀이 혼란하여 틈이 생긴 것을 엿보고 출병하여 촉을 정벌하였는바, 이것이 곽숭도 본인이 환관과 劉后의 참소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고 莊宗이 형제인 明宗의 반란에 패망한 원인이라고 하였다.
明代의 茅坤(1512~1601 陰險하고 邪僻한 유후가 측근에 있는 환관의 참소로 아들 李繼岌을 강권하여 곽숭도를 蜀에서 죽인 것이 明宗 李思源의 반란을 초래한 것이고 곽숭도가 죽지 않았다면 이계급이 촉에서나마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 후세의 임금은 後宮을 경계해야 할 것이라는 교훈을 언급하였다. 이는 앞에 수록된 〈唐繼岌傳〉의 史評에 나오는 내용으로 두 열전을 함께 살펴보면 구양수의 立傳의 의도와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밖에도 淸代의 趙翼(1727~1814 ≪二十二史箚記≫ 卷21에서 구양수의 ≪신오대사≫에 있는 贊들이 깊은 뜻을 품고 있다고 하면서 “〈張承業傳〉에서는 환관의 폐해를 있는 힘껏 논하였고, 곽숭도의 죽음이 환관의 참언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밝혔다. 만약 곽숭도가 죽지 않았다면 그가 거느렸던 蜀을 정벌한 군사들이 모두 휘하에 있었을 것이니 명종이 장종의 천하를 차지해 그를 대신할 수 있었겠는가. 재난의 근본을 따져서 그 죄를 환관에게 돌린 것은 매우 절실하게 분명히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하여 모곤과 비슷한 논평을 하기도 하였다.
역주2 孟知祥 : 874~934. 字는 保胤으로, 邢州 龍岡 사람이다. 五代十國 시기 後蜀을 세웠다. 孟知祥은 晉王 李克用의 조카사위로 後唐에서 매우 重用되어 中門使‧馬步軍都虞候‧北京留守 등을 역임하였고, 뒤에 西川節度使를 맡았다. 後唐 明宗 연간 맹지상은 점차 蜀에 근거하여 자립하려는 마음을 품고 후당의 명령을 듣지 않다가 결국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였다. 長興 4년(933) 東川을 병탄하고 兩川 지역을 모두 점유하고서 檢校太尉 兼中書令 劍南兩川節度使를 배수하고 蜀王에 봉해졌다. 應順 元年(934) 正月에 맹지상은 成都에서 稱帝하고 後蜀을 建立하고 4월에 明德으로 改元하였다. 재위한 지 7개월 만에 61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廟號는 高祖이다.
역주3 張文禮 : ?~921. 燕 지방 출신이다. 처음에 劉仁恭의 裨將이 되었는데 성품이 凶險하고 간사한 모략을 잘 꾸몄고 말투가 용렬하여 남들과 교제할 때 늘 不遜하게 굴었다. 劉守文을 따라 滄州에 갈 때 비정규 부대를 이끌었다. 後梁에서 成德節度使를 지냈다.
역주4 王都 : ?~929. 본명은 劉雲郞으로 中山 陘邑 사람이다. 五代十國 초기에 義武節度使 王處直의 養子였다. 921년 왕처직이 비밀리에 耶律阿保機에게 연락하여 李存勖을 배반하였는데 定州의 장수들이 契丹과 연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왕처직의 양자 王都를 추대하여 왕처직을 살해한 뒤 왕도는 後唐 이존욱에게 투항하였다. 이존욱은 자기 아들 李繼岌을 왕도의 딸에게 장가보내고 왕도를 義武軍節度使로 삼았다. 後唐 明宗 李嗣源이 즉위한 뒤 왕도를 싫어하여 安重誨와 함께 그를 제거할 방안을 논의하였는데, 왕도가 이 사실을 알아채고서 거란과 연락하여 후당을 배반하였다. 이사원은 大將 王晏球를 보내 왕도의 근거지 定州를 토벌하였다. 왕도는 한 해 남짓 굳게 지켰는데, 天成 4년(929) 定州城이 격파되자 왕도와 家屬들이 모두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다.
역주5 王彦章 : 863~923. 字는 賢明으로, 鄆州 壽張 사람이다. 後梁의 名將으로, 朱溫이 후량을 세울 때 그는 전공으로 親軍將領이 되었고 刺史‧防禦使‧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용맹하고 힘이 세서 전투할 때마다 항상 先鋒이 되었고 鐵槍을 들고 말을 달려 나는 듯이 돌격하니 軍中에서 王鐵槍이라고 불렀다. 뒤에 李存勖에게 사로잡혔는데 죽을지언정 항복하지 않겠다고 하여 참수당하였다.
역주6 德勝 : 지금의 河南省 濮陽市 濮陽縣이다.
역주7 楊劉 : 지금의 山東省 東阿縣 일대이다.
역주8 十日壘成矣 : ≪舊五代史≫에는 ‘十日’이 ‘如三四日間’으로 되어 있다.(≪舊五代史考異≫)
역주9 毛璋 : ?~929. 滄州 사람이다. 後梁 末에 戴思遠이 橫海軍節度使가 되었는데 毛璋이 대사원을 섬겨 軍校가 되었다. 晉나라가 魏博을 함락하자 대사원이 滄州를 버리고 도망가니 모장이 창주를 가지고 晉나라에 투항하여 그 功으로 貝州刺史가 되었다. 모장은 사람됨이 담력과 용맹이 있어 晉나라가 梁나라와 黃河 가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여러 차례 戰功을 세웠다. 後唐 莊宗이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를 華州節度使에 배수하였다.
역주10 六日壘成 彦章果引兵急攻之 : ≪舊五代史≫에는 “사흘이 지나자 梁나라 군대가 과연 이르렀다.[居三日 梁軍果至]”라고 하였다.(≪舊五代史考異≫)
역주11 朝城 : 지금의 중국 山東省 莘縣 지역이다.
역주12 : ≪新五代史≫에는 없다.
역주13 鑿凶門而出 : ≪淮南子≫ 〈兵略訓〉에 “장군이 임금에게 斧鉞을 받고 나서, 수염을 깎고 明衣를 입고 凶門을 뚫고 나간다.[鑿凶門而出]”라고 하였는데, 高誘의 주에 “흉문은 북으로 나가는 문이다. 장군이 출전할 때 喪禮로 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기 때문이다.[凶門 北出門也 將軍之出 以喪禮處之 以其必死也]”라고 하였다. 흉문은 北門으로, 고대에 장군이 출전할 때 북쪽 문을 부수고 나가서 必死의 각오를 드러냈다.
역주14 從鄆州入襲汴(用)[州] 八日而滅梁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汴州의 ‘州’자는 監本에 ‘用’으로 되어 있는데 任大椿은 ‘「用」자가 옳다.’고 하였다.[謹案汴州之州字 監本作用 任氏大椿曰 用字是]”라고 하였고,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南監本‧彭注本에는 아래의 ‘州’자가 ‘用’자로 되어 있다.[按南監本彭注本 下州字作用]”라고 하였다.
역주15 (用)[州] : 저본에는 ‘用’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州’로 바로잡았다.
역주16 佐命 : 제왕이 새로 天命을 받아 創業할 때 보좌하여 이루는 것을 말한다.
역주17 馬紹宏 : ?~932. 宦官이다. 처음에 孟知祥과 함께 中門使가 되었는데, 周德威가 죽은 뒤에 後唐 莊宗이 幽州를 겸병하면서 그에게 權知州事를 맡겼다.
역주18 張居翰 : 857~928. 字는 德卿으로, 淸河 사람이다. 宦官이다. 唐 昭宗 때 範陽軍監軍이 되었다. 天復 연간에 환관들을 도륙할 때 節度使 劉仁恭이 보호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뒤에 晉王을 따라 潞州를 함락하는 데 참여하여 昭義監軍을 맡았다. 莊宗이 즉위했을 때 그는 樞密使를 맡았으나 권세를 휘두르지 않았다. 前蜀의 王衍이 後唐에 항복하고 京師에 들어오는 도중에 장종이 그가 변심할 것을 염려하여 王衍 一行을 죽이라고 조서를 내렸는데 張居翰이 이 사실을 알고 ‘行’자를 ‘家’자로 고쳐 내려서 왕연을 수행한 천여 명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역주19 斬袪(거)射鉤 : 斬袪는 옷자락을 찢는 것으로, 春秋시대 晉 文公과 내시 披의 고사이다. 射鉤는 혁대의 갈고리를 쏘아 맞힌다는 말로, 齊 桓公과 管仲의 고사이다. 모두 자신을 해치려 했으나 뒤에 용서하여 신하로 받아들인 일을 가리킨다.
晉 獻公이 나중에 文公이 된 重耳를 죽이려고 내시로 있던 披를 보내자, 중이가 외국으로 도망쳤는데, 그때 중이가 담을 넘어 도망가므로, 피가 중이의 옷자락을 잡아 찢었다.[披斬其袪] 그 뒤에 중이가 다시 晉나라로 들어올 때 중이가 임금이 되어 복수할 것을 두려워한 呂甥과 郤芮(극예 公宮을 불태우려고 하였다. 이에 피가 중이에게 가 접견을 요청하니, 중이는 “내가 도망칠 때 너에게 찢긴 옷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접견을 거부하자, 피가 “신하가 임금의 명을 봉행함에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옛날의 법도입니다. 君께서 만약 옛날의 원한을 잊지 않는다면 떠나가는 자가 아주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중이가 접견을 허락하였다. 이로 인해 중이는 큰 혼란 없이 晉나라로 돌아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春秋左氏傳≫ 僖公 5년, 24년)
한편 齊 襄公의 조정이 혼란에 빠지자, 그의 아우인 公子 糾는 魯나라로 달아나 管仲‧召忽을 스승으로 삼았고, 다른 아우인 公子 小白은 莒(거 달아나 鮑叔을 스승으로 삼았다. 제 양공이 죽자 규와 소백이 서로 앞을 다투어 제나라로 돌아가 왕이 되려고 하였다. 관중이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 길목을 차단하고 소백의 입국을 저지하면서 활을 쏘아 혁대의 갈고리를 맞히자, 소백이 거짓으로 죽은 체하였다가 먼저 입국하여 왕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환공이다. 그런데 환공은 즉위한 뒤에 옛날의 원한을 기억하지 않고 관중을 재상으로 임용하여 결국 霸業을 이룩하였다.(≪春秋左氏傳≫ 僖公 5년)
역주20 今一切拒之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今’자는 앞의 〈‘今’자와〉 겹치니 삭제해도 된다.[按今字複上 可去]”라고 하였다.
역주21 (後)[俊] : 저본에는 ‘後’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俊’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2 李嗣源爲成德軍節度使 徙崇韜忠武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薛居正의 ≪舊五代史≫ 〈莊宗紀〉에는 ‘莊宗이 李嗣源을 鎭帥로 삼고 郭崇韜를 옮겨 汴州를 겸하여 맡도록 하였다.’라고 하였고, ≪冊府元龜≫에는 ‘同光 연간에 곽숭도가 거듭 表文을 올려 鎭을 사양하자 批答하기를, 「卿은 처음 常陽을 바치고 上將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였고, 또 梁苑을 겸하여 맡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거듭 汴州를 사양한 것은 의당 윤허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대개 이사원이 먼저 宣武를 鎭守하고 있을 때 곽숭도가 실제로 成德을 맡고 있었으니 여기서 서로간에 그 자리를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이 부분의 忠武는 마땅히 宣武의 착오이다.[謹案薛史莊宗紀 帝欲以李嗣源爲鎭帥 移郭崇韜兼領汴州 冊府元龜 同光中 崇韜再表辭鎭 批答曰 卿始納常陽 請歸上將 又稱梁苑不可兼權 其再讓汴州 所宜依允 蓋嗣源先鎭宣武 崇韜實領成德 玆欲互易其處也 此忠武當是宣武之誤]”라고 하였다.
역주23 李嗣源 : 後唐의 태조 晉王 李克用의 養子로, 이극용의 아들 莊宗 李存勖(재위 923~926 이어 후당의 임금이 된 明宗(재위 926~933. 이 당시 이사원은 아직 즉위하지 않았다.
역주24 同光 : 後唐 莊宗의 연호(923~925.
역주25 大明興慶宮 : 長安을 三內로 구분하여, 서쪽에 있는 皇城을 西內라 하고, 大明宮을 東內라 하고, 興慶宮을 南內라고 불렀다. 安史의 난 이후 태자였던 肅宗이 즉위하고 玄宗은 巴蜀에서 돌아와 太上皇이 되어 실권을 잃은 채 흥경궁에 거처하며 晩年을 쓸쓸히 보낸 일이 있다.
역주26 : ≪新五代史≫에는 ‘常’자로 되어 있다.
역주27 明年征蜀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莊宗本紀〉에서 同光 3년 8월에 羅貫을 죽이고 9월에 蜀을 토벌하였으니 이 부분의 ‘明年’자는 착오이다.[按本紀同光三年八月 殺羅貫 九月伐蜀 此明年字誤]”라고 하였다.
역주28 魏王繼岌 : 後唐 莊宗 李存勖의 아들 李繼岌(?~926. 장종이 즉위하였을 때 北都留守가 되었다가 判六軍諸衛事를 맡았고 승진하여 檢校太尉 同中書門下平章事 興聖宮使가 되었다. 同光 3년(925) 晉에서 魏王에 봉하고 西南行營都統으로 군대를 거느리고 前蜀을 공격하게 하여 전촉을 멸망시키자 王衍이 투항하였다. 회군하여 渭南에 이르렀을 때 장종이 明宗 李思源에게 敗亡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가 흩어지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역주29 千秋萬歲 : 帝王의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역주30 子儀 : 697~781. 唐나라 때 명장 郭子儀로, 華州 사람이다. 安祿山의 난 때에 朔方節度使가 되어 河北에서 史思明을 패퇴시켰다. 肅宗이 즉위한 뒤 關內河東副元帥로서 回紇의 군사와 연합하여 長安과 洛陽을 수복하였다. 그 후로도 수많은 공을 세워 벼슬이 中書令에 이르렀으며, 汾陽郡王에 봉해졌다. 代宗 때에는 회흘과 연합하여 토번의 침략을 막아내었다. 시호는 忠武이다. 누구보다 강한 충직함과 겸손함으로 끝없는 전란과 무능한 군주, 간신의 모함 속에서도 화를 입지 않고 역경을 넘길 수 있었다. 德宗 때에는 尙父라는 호를 받았다.(≪新唐書≫ 卷137 〈郭子儀列傳〉)
역주31 南詔 : 7세기 무렵 티베트어와 미얀마어 계통의 민족이 중국의 雲南‧四川‧貴州 일대에 세운 국가이다. 738년 六詔를 통일하며 唐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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