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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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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符存審 字德詳이니 陳州宛丘人也 初名이니 少微賤하야 嘗犯法當死러니
臨刑 指旁壞垣하고 顧主者曰 願就死于彼하니 冀得垣土覆尸라하니 主者哀而許之하야 爲徙垣下
而主將方飮酒라가 顧其愛妓하야 思得善歌者佐酒하니 妓言有符存 常爲妾歌하니 甚善이라하다
主將馳騎하야 召存審한대 而存審以徙垣下故 未加刑이라 因往就召한대 使歌而悅之하니 存審因得不死하다
其後 事李罕之하야 從罕之歸晉하니 晉王以爲義兒軍使하고 賜姓李氏하고 名存審이라
從晉王擊李匡儔할새 爲前鋒하야하다 又從擊王行瑜하야 破龍泉寨하니 以功遷檢校左僕射하다
從李嗣昭攻汾州하야 執李瑭하니 遷左右廂步軍都指揮使하다
又從嗣昭攻潞州하야 降丁會하고 從周德威破梁夾城하니 遷忻州刺史蕃漢馬步軍都指揮使하다
晉趙攻燕 梁救燕하야 擊趙深州하야 圍蓨縣한대 存審與史建瑭軍下博하야 擊走梁軍하니 하다
魏博叛梁降晉할새 存審爲前鋒하야 屯臨淸이라 莊宗入魏 存審殿軍魏縣하니 與劉鄩相距於莘西
從莊宗敗鄩於故元城하니 閻寶以邢州降이라 乃以存審爲安國軍節度使하다 毛璋以滄州降하니 徙存審橫海하고 加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契丹圍幽州어늘 是時 晉與梁相持河上이라 欲發兵이나 兵少하야 欲勿救하면 懼失之
莊宗疑하야 以問諸將이어늘 而存審獨以爲當救라하야 曰 願假臣騎兵五千이면 足矣라하다
乃遣存審分兵救之하니 卒擊走契丹하다 從戰胡柳陂어늘晨敗하야 亡周德威하다
存審與其子彦圖力戰하야 暮復敗梁軍于土山하야 遂取德勝하고 築河南北爲兩城하니 遷內外蕃漢馬步軍總管하다
梁朱友謙以河中同州降晉이어늘 梁遣劉鄩攻同州하니 友謙求救 乃遣存審與李嗣昭救之하다
河中 兵少而弱하야 梁人素易之 且不虞晉軍之速至也
存審選精騎二百하야 雜河中兵하야 出擊鄩壘라가 陽敗而走어늘 鄩兵追之한대
晉騎反擊하야 獲其騎兵五十하니 梁人知其晉軍也하고 皆大驚이라 然河中糧少而新降일새 人心頗持兩端이라
晉軍屯하니 諸將皆欲速戰이어늘 存審曰 使梁軍知吾利於速戰이면 則將夾渭而營하야 斷我餉道以持久困我
則我進退不可하리니 敗之道也 不若緩師示弱하고 伺隙出奇 可以取勝이라하고 乃按軍不動이라
居旬日 望氣者言有黑氣하니 狀如鬪雞라한대 存審曰 可以一戰矣라하고 乃進軍擊鄩하야 大敗之하니 鄩閉壁不復出하니라
存審曰 鄩兵已敗하니 不如逸之라하고 乃休士卒하고 遣裨將王建及牧馬于하니
張文禮殺趙王王鎔하니 晉遣閻寶李嗣昭等攻之로되 最後遣存審破之하니라
存審爲將 有機略하야 大小百餘戰 未嘗敗衂하야 與周德威齊名이러니 德威死 晉之舊將 獨存審在
契丹攻遮虜어늘 乃以存審爲盧龍軍節度使한대 時存審已病하야 辭不肯行이라 莊宗使人慰諭하고 彊遣之하다
莊宗滅梁入洛 存審自以身爲大將호되 不得與破梁之功하야 怏怏하야 疾益甚이라 因請朝京師하다
是時 郭崇韜權位已重이나 然其名望素出存審下 不樂其來而加己上하야 因沮其事하니
存審妻郭氏泣訴于崇韜曰 吾夫於國有功而어늘 奈何忍令死棄窮野오하니 崇韜愈怒 存審章累上輒不許
存審伏枕嘆曰 이러니 今日天下一家하야 四夷遠俗으로
至於亡國之將 皆得親見天子하야 奉觴爲壽어늘 而獨予棄死於此하니 豈非命哉리오하다
崇韜度存審病已亟하고 乃請許其來朝하다 徙存審宣武軍節度使하니 卒于幽州하다
臨終 戒其子曰 吾少提一劍去鄕里하야 四十年間 取將相이라 然履鋒冒刃하야 出死入生而得至此也라하고
因出其平生身所中矢鏃百餘而示之曰 爾其勉哉어다 이라


02. 符存審傳記
符存審德詳이니 陳州 宛丘 사람이다. 초명은 이니 젊은 시절에 微賤해서 犯法하여 死刑을 받아야 했던 적이 있었는데,
형벌을 받을 때 곁에 있는 무너진 담을 가리키며 형을 집행하는 이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저곳에서 죽기를 원하니 담의 흙으로 내 시신을 덮어주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형을 집행하는 자가 불쌍하게 여겨 이를 허락하고서 담 밑으로 옮겨주었다.
그런데 主將이 이때 술을 마시고 있다가 자신이 아끼는 妓女를 돌아보고서 노래를 잘 부르는 자를 찾아 酒興을 돋우려고 생각하니, 기녀가 “符存이 늘 첩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데 매우 잘 부릅니다.”라고 하였다.
주장이 말을 보내 부존심을 부르자 부존심이 담 밑으로 옮기고 있던 연유로 아직 형벌을 가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부존심이 나아가 부름에 응하자 주장이 그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기뻐하니 부존심이 이로 인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이후에 李罕之를 섬겨 이한지를 따라 나라에 투항하니 晉王(李克用)이 그를 義兒軍使로 삼고 李氏 성을 하사하며 存審이라고 이름하였다.
晉王을 따라 李匡儔를 칠 때 先鋒이 되어 居庸關을 함락하였다. 또 진왕을 따라 王行瑜를 쳐서 龍泉寨를 격파하니 이 戰功으로 승진하여 檢校左僕射가 되었다.
李嗣昭를 따라 汾州를 공격하여 李瑭을 잡으니 승진하여 左右廂步軍都指揮使가 되었다.
다시 이사소를 따라 潞州를 공격하여 丁會를 항복시키고 周德威를 따라 나라의 夾城을 격파하니 승진하여 忻州刺史 蕃漢馬步軍都指揮使가 되었다.
나라와 나라가 나라를 공격할 때 나라가 나라를 구원하여 深州를 쳐서 蓨縣을 포위하자, 符存審史建瑭下博에 주둔하여 나라 군대를 쳐서 몰아내니 승진하여 邢州團練使를 맡았다.
魏博나라를 배반하고 나라에 투항할 때 부존심이 선봉이 되어 臨淸에 주둔하였다. 莊宗에 들어갈 때 부존심이 후방을 맡아 魏縣에 주둔하니 劉鄩莘州의 서쪽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장종을 따라 옛 元城에서 유심을 물리치니 閻寶邢州를 가지고 투항한지라 이에 부존심을 安國軍節度使로 삼았다. 毛璋滄州를 가지고 투항하니 부존심을 橫海로 옮기고 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해주었다.
契丹幽州를 포위하였는데 이때에 나라가 나라와 黃河 가에서 대치하고 있는지라 군대를 출동하려고 하였다가 군사가 부족하여 유주를 구원하지 않으려 하니 그러면 유주를 잃을 것이 두려웠다.
莊宗이 마음을 정하지 못해 장수들에게 물었는데, 符存審만 유주를 구원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신에게 騎兵 5천을 빌려주시면 충분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부존심을 보내 군사를 나누어주어 유주를 구원하게 하니 마침내 거란을 쳐서 敗走시켰다. 장종을 따라 胡柳陂에서 전투하였는데 나라 군대가 새벽에 패배하여 周德威를 잃었다.
부존심이 그의 아들 周彦圖와 함께 奮鬪하여 저녁에 다시 土山에서 나라 군대를 패배시켜 마침내 德勝을 취하고 황하의 남북에 두 개의 성을 쌓으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일러 夾寨라고 하였다. 승진하여 內外蕃漢馬步軍總管이 되었다.
나라 朱友謙河中同州를 가지고 나라에 항복하자 나라가 劉鄩을 보내 동주를 공격하니, 주우겸이 구원해주기를 청한지라 이에 符存審李嗣昭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河中은 군사가 적고 약하여 나라 사람들이 평소 소홀하게 여기고 있었던 데다 나라 군대가 신속하게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였다.
부존심이 정예 騎兵 2백 명을 뽑아 하중의 병사들과 섞고서 출전하여 劉鄩營壘를 공격하다가 패한 척하면서 달아나자 유심의 군대가 추격하였는데,
나라 기병이 反擊하여 유심의 기병 5십 명을 잡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들이 나라 군대인 것을 알고는 모두 크게 놀랐다. 그러나 하중은 양식이 적고 이제 막 나라에 항복한 터라 人心이 자못 두 나라 사이에서 동요하였다.
나라 군대가 朝邑에 주둔하고 있으니 장수들이 모두 速戰하려고 하였는데, 부존심이 말하기를 “만약 나라 군대가 우리가 속전하는 것을 이롭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渭河를 끼고 영루를 구축하고서 우리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持久戰을 펴면서 우리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進退兩難이 될 것이니 이는 실패하는 전술이다. 군대의 공격을 잠시 늦추어 약한 척하는 모습을 보이고 틈을 엿보아 奇計를 쓰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해야〉 승리할 수 있다.”라고 하고, 이에 군대를 머무르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열흘이 지났을 때 雲氣를 살피는 자가 말하기를 “하늘에 黑氣가 있는데 형상이 싸움닭 같습니다.”라고 하자, 부존심이 말하기를 “한번 전투할 만하다.”라고 하고, 이에 進軍하여 유심을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니 유심이 영루를 굳게 닫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부존심이 말하기를 “유심의 군대가 이미 패배하였으니 그를 놓아주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 이에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裨將 王建及을 보내 沙苑에서 말을 기르게 하니,
유심이 나라 군대가 해이해졌다고 여기고 그제야 한밤에 달아나자 부존심이 渭河까지 追擊하여 다시 크게 패배시켰다.
張文禮趙王 王鎔을 시해하니 나라가 閻寶李嗣昭 등을 보내 그를 공격하였으나 도착하는 족족 전사하였고, 최후에 符存審을 보내 격파하였다.
符存審은 장수로서 〈지휘할 때〉 智略이 있어 크고 작은 백여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어 周德威와 명성이 나란하였는데, 주덕위가 죽은 뒤에 나라의 옛 장수 가운데 부존심만 살아 있었다.
契丹遮虜를 공격하자 이에 부존심을 盧龍軍節度使로 삼았는데, 이때 부존심이 이미 병이 들어 사양하고 나가려고 하지 않는지라 莊宗이 사람을 보내 위로하며 타이르고 억지로 그를 보냈다.
莊宗나라를 멸망시키고 洛陽에 들어갈 때 符存審은 자신이 大將이 되었는데도, 나라를 격파한 공훈을 함께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怏怏不樂하여 병이 더욱 심해진지라 이로 인해 京師에 가서 조회하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郭崇韜가 권세와 지위가 이미 높았으나 그 名望은 평소 부존심의 아래에 있는지라 그가 경사에 와서 자신의 위에 앉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아 이에 그가 조회하는 일을 저지하니,
부존심의 처 郭氏가 곽숭도에게 泣訴하기를 “저의 지아비가 국가에 공로가 있고 공과는 同鄕의 오랜 친구인데 어찌하여 차마 저의 지아비로 하여금 궁벽한 草野에서 죽게 놔두시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곽숭도가 더욱 노한지라 부존심이 누차 疏章을 올렸으나 번번이 받아주지 않았다.
부존심이 枕席에 엎드려 탄식하기를 “老夫가 두 군주를 섬긴 지 40년인데 지금 천하가 통일되어 사방의 이민족과 遠方의 풍속이 다른 자들로부터
亡國의 장수와 主上을 해치려고 했다가 신하가 된 사람들까지 모두 직접 천자를 알현하여 술잔을 들어 祝壽하거늘, 나만 이곳에 버려져 죽게 되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곽숭도는 부존심의 병이 이미 위중한 것을 헤아리고 비로소 그가 조회 오는 것을 윤허하기를 청하였다. 부존심을 宣武軍節度使로 옮기니 幽州에서 졸하였다.
臨終할 때 그 아들들에게 당부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 칼 한 자루 들고 고향을 떠나 40년 사이에 將相이 되었다. 그러나 칼끝을 밟고 칼날을 무릅쓰고서 死生을 넘나들며 이 자리에 이를 수 있었다.”라고 하고,
이어 그가 한평생 몸에 맞은 화살촉 백여 개를 꺼내어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는 노력하도록 하거라.”라고 하였다. 부존심의 세 아들은 符彦超符彦饒符彦卿이다.


역주
역주1 符存審傳 : 符存審(862~924 本名이 存이고 字가 德祥으로 陳州 宛丘 사람이다. 부존심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56 〈唐書 第32 列傳8〉과 ≪新五代史≫ 卷25 〈唐臣傳 第13〉에 실려 있다.
歐陽脩는 ≪구오대사≫에 1천 7백여 자 분량인 부존심의 傳記를 1천여 자로 축약하여 서술하였는데, 크게 보아 긴요하지 않은 사실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장수로서 활약하였던 일들을 간추려 정리하였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구오대사≫에서 마지막 부분에 서술되어 있는 부존심이 젊은 시절 死刑을 면하게 된 일화를 ≪신오대사≫에서는 제일 앞부분으로 옮겨놓은 것인데,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려는 목적에서 단락 배치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 부존심은 李罕之를 섬겼는데 뒤에 그와 함께 晉王 李克用에게 투항하여 義兒軍使가 되어 李氏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구양수가 李嗣昭‧李嗣本‧李嗣恩‧李存信‧李存孝‧李存進‧李存璋‧李存賢 등 이극용의 養子들을 〈義兒傳〉에 大擧 수록하면서 이들 못지않은 비중이 있는 부존심을 거기에 수록하지 않고 별도로 立傳한 것은 부존심의 아들 符彦卿의 女息이 北宋 太宗의 后妃가 되었기 때문에 그 本姓을 보존한 것이다.
부존심은 周德威와 함께 後唐을 대표하는 名將이다. 그는 후당이 아직 代北과 幷州를 세력 범위으로 하던 晉國이었을 때, 다시 말해 晉陽이라고도 불리는 太原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때부터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는데, 구양수는 ≪구오대사≫의 서술을 토대로 부존심의 초반부의 행적은 가볍게 요약하는 방식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어 幽州를 포위한 契丹을 물리친 일, 胡柳陂 전투에서 戰死한 주덕위를 대신해 그의 아들과 함께 濮州의 土山을 빼앗아 德勝을 취한 일, 後梁에서 투항한 朱友謙을 구하기 위해 후량의 劉鄩과 河中의 同州에서 싸워 이긴 일, 張文禮를 격파한 일 등 굵직한 전투들을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여 그가 후당의 棟梁이 되는 장수였음을 충분히 드러내었다.
뛰어난 智略으로 패배를 몰랐던 부존심이었지만, 923년 莊宗이 후량을 멸망시키고 후당을 건국하였을 때 그 공훈을 함께 누리지 못하고 郭崇韜의 嫉視로 인해 불우하게 죽음을 맞게 되는 과정을 서술한 마지막 단락을 보면 그가 處身의 지혜에는 밝지 못하였던 것을 볼 수가 있다.
역주2 居庸關 : 북경 북쪽의 長城에 있는 저명한 옛 關城으로, 天下九塞 가운데 하나이면서 太行八陘 가운데 하나이다. 太行山의 산맥을 따라 이어진 軍都山에 있는데 아래로 큰 강이 흐르고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어 매우 험준하다. 紫荊關‧倒馬關‧固關과 함께 明나라 때 京師에 조회 올 때 거치는 4대 관문인데, 이
居庸關居庸關
가운데 특히 거용관‧자형관‧도마관은 內三關이라고 일컬어진다.
역주3 遷領邢州團練使 : ≪舊五代史≫에는 ‘邢洺磁團練使’로 되어 있다.(≪舊五代史考異≫)
역주4 (兵)[軍] : 저본에는 ‘兵’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軍’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晉人謂之夾寨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王彦章傳〉에서도 ‘夾寨라고 불렀다.’고 하였고, 〈唐本紀〉에서 ‘마침내 덕승에 주둔하고 협채를 세웠다.’고 하였고, 〈義兒李存進傳〉에서 ‘이때 晉나라가 덕승에 주둔하고 南北으로 寨를 세웠다.’고 하였고, 李存推의 碑石에서 ‘이때 御駕가 德勝寨에 있었다.’고 하였고, 또 ‘과연 僞將 段凝이 군대를 거느리고 덕승채를 공격하였다.’고 하였다. ≪全唐文≫에서 後唐 莊宗이 지은 〈簡收德勝寨等處軍士骸骨敕〉에도 ‘德勝寨’로 되어 있다. 梁나라 사람이 先親(朱全忠의 부친 朱誠 嫌名을 避諱하였으므로 潞州 夾城을 일러 夾寨라고 한 것인데 晉나라 사람이 城을 명명할 때 어찌하여 또한 梁나라를 위해 피휘한 것인가? 그리고 〈王建及傳〉에서 ‘晉나라가 마침내 덕승에 주둔하고 황하에 남북으로 城을 세웠다.’고 하였고, 薛居正의 ≪舊五代史≫ 〈唐本紀〉에서 ‘李存審이 덕승에 성을 쌓아 황하를 끼고 柵을 세웠다.’고 하였고, 〈符存審傳〉에서 ‘덕승 입구에 남북으로 성을 쌓아 주둔하였다.’고 하였고, ≪資治通鑑≫에서 ‘이존심이 덕승의 남북에 두 城을 쌓아 지켰다.’고 하여 다시 ‘夾寨’라고 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按王彦章傳亦曰 號夾寨 唐本紀曰 遂軍德勝爲夾寨 義兒存進傳曰 是時晉軍德勝爲南北寨 存推碑曰 時駕在德勝寨 又曰 果僞將段凝領兵攻打德勝寨 全唐文後唐莊宗簡收德勝寨等處軍士骸骨敕 亦作德勝寨 梁人避考嫌名 故謂潞州夾城爲夾寨 晉人名城 何亦爲梁諱 王建及傳 晉遂軍德勝爲南北城于河上 薛史唐本紀 李存審城德勝 夾河爲柵 存審傳 于德勝口 築南北城以據之 通鑑李存審于德勝南北 築兩城而守之 又不作夾寨何也]”라고 하였다.
역주6 朝邑 : 陝西省 大荔縣 근처 黃河 가에 있다. 西魏 文帝 大統 6년(540) 서쪽의 朝阪을 끼고 있어 이렇게 명명하였다. 이전에는 臨晉‧五泉‧河西‧西原‧左馮翊 등으로 불렸다.
역주7 沙苑 : 陝西省 大荔縣 남쪽 洛水와 渭水 사이에 있는 광활한 초원으로, 西周와 秦漢 때 풀들이 풍부하여 동물이 많이 서식해서 역대로 牧馬하는 곳이었다. 唐나라 때는 이곳에 牧馬監을 두었다. 南北朝 때 高歡과 宇文泰가 여기서 大戰을 치르기도 하였다. 五代 이후 점차 植生이 변하여 明代 中後期에는 못이 사라지고 모래만 남아 사막화되어갔다.
역주8 鄩以謂晉軍且懈……又大敗之 : ≪舊五代史≫에는 “劉鄩과 尹皓가 이를 알고 군대를 보전하여 물러가 마침내 同州의 포위를 풀었다.[劉鄩尹皓知之保衆退去遂解同州之圍]”라고 하였다.(≪舊五代史考異≫)
역주9 至輒戰死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史建瑭傳〉, 〈符習傳〉, 〈任圜傳〉, 〈義兒傳〉, 〈王鎔傳〉, 〈閻寶傳〉을 살펴보건대, 단지 史建瑭‧李嗣昭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고 李存進이 戰歿하였을 뿐이고, 閻寶는 바로 戰敗하여 부끄럽고 분에 겨워 등창이 나서 죽었지 戰死한 것이 아니고, 符習‧任圜은 모두 아직 죽지 않았으니 ‘輒’자는 마땅히 ‘多’자로 바꿔야 한다. 〈李存進傳〉에도 염보가 전몰하였다고 잘못 기록하였다. 그리고 부습 등을 물리칠 때 張文禮는 이미 죽었으니 바로 그의 아들 張處瑾의 일일 뿐이다.[按史建瑭符習任圜義兒王鎔閻寶傳 止建瑭李嗣昭中流矢卒 李存進戰歿 寶乃戰敗 慙憤發疽卒 非戰死 習圜並未死也 輒宜易多 存進傳亦誤寶爲戰歿 且敗習等時 張文禮已卒 乃其子處瑾事耳]”라고 하였다.
역주10 與公鄕里之舊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符存審은 陳州 宛丘 사람이고 郭崇韜는 바로 代州 雁門 사람이니 이 부분의 鄕里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薛居正의 ≪舊五代史≫에는 ‘公과 향리의 親舊이다.’라고 하였으니, ≪新五代史≫의 이 부분은 아마도 그대로 따온 것인 듯하다.[按存審陳州宛丘人 郭崇韜乃代州雁門人 此鄕里何解 薛史作與公鄕里親舊 此蓋仍之]”라고 하였다.
역주11 老夫事二主四十年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符存審이 李罕之를 따라 晉나라에 歸附한 것은 光啓 3년(887, 薛居正의 ≪舊五代史≫에는 梁나라를 平定한 이듬해(924) 5월에 죽었다고 하였으니 38년일 뿐이다. ≪구오대사≫에서 ‘거의 40년이다.’로 되어 있는 것이 옳다.[按存審從李罕之歸晉 在光啓三年 薛史平梁之明年五月卒 止三十八年 薛史作垂四十年爲得]”라고 하였다.
역주12 射鉤斬袪之人 : 射鉤는 혁대의 갈고리를 쏘아 맞힌다는 말로, 齊 桓公과 管仲의 고사이다. 斬袪는 옷자락을 찢는 것으로, 春秋시대 晉 文公과 내시 披의 고사이다. 모두 자신을 해치려 했으나 뒤에 용서하여 신하로 받아들인 일을 가리킨다.
앞의 권5 〈郭崇韜傳〉에서 郭崇韜가 평소 청렴하다가 洛陽에 오고부터 뇌물을 받자 어떤 이가 이를 비판하니, 곽숭도가 “내가 장수와 재상의 직위를 겸하고 있어 俸祿과 하사받은 재물이 巨萬이나 되니 어찌 이 뇌물이 부족해서겠는가. 지금 藩鎭의 諸侯들은 梁나라의 옛 장수들이 많으니 모두 主上을 해치려고 했다가 신하가 된 사람들인데[射鉤斬袪之人] 지금 이들을 일절 물리친다면 어찌 원한을 품지 않겠는가. 더구나 나의 私家에 보관하는 것이 公家의 창고에 보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말한 것이다. 본서 권5 〈郭崇韜傳〉의 ‘斬袪射鉤’ 주석 참조.
역주13 存審三子 彦超彦饒彦卿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上文에 符存審이 아들 彦圖가 있다고 하였고 薛居正의 ≪舊五代史≫에 부존심의 아들에 彦能‧彦琳까지 있으니 여기에서 세 아들만 말한 것은 잘못이다.[謹案上文 存審有子彦圖 薛史存審子尙有彦能彦琳 此止云三子非也]”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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