看行欽與莊宗君臣이 兩相慷慨하며 兩相悲歌處하면 生色可睹라
元行欽
은 幽州人也
라 爲劉守光裨將
이러니 守光簒其父仁恭
하고 而囚之
하고 又使行欽害諸兄弟
라
其後晉攻幽州
한대 守光使行欽募兵雲朔間
하다 是時
에 明宗掠地山北
하야 與行欽相拒
하야 凡八戰
하니
明宗七射中行欽이어늘 行欽拔矢而戰하야 亦射明宗中股라 行欽屢敗하야 乃降하니
明宗撫其背而飮以酒曰 壯士也
로다하고 因養以爲子
하다 從明宗戰
하야 數立功
하니라
莊宗已下魏
에 益選驍將自衛
한대 하고 取之以爲散員都部署
하고 賜姓名曰 李紹榮
이라
莊宗好戰而輕敵하야 與梁軍戰潘張에 軍敗而潰라 莊宗得三四騎馳去어늘 梁兵數百追及하야 攢矟圍之하다
行欽望其旗而識之하고 馳一騎하야 奮劍斷其二矛하고 斬首一級하니 梁兵解去라
莊宗還營하야 持行欽泣曰 富貴與卿共之호리라하다 由是로 寵絶諸將하다 拜忻州刺史라가 遷武寧軍節度使하다
莊宗宴群臣於內殿할새 酒酣樂作하야 道平生戰陣事以爲笑樂이라가 而怪行欽不在하야 因左右顧視曰 紹榮安在오하니
所司奏曰 奉勑宴
하니 紹榮
은 이라 不得與也
니이다 莊宗罷會不樂
하다
明日에 卽拜行欽同中書門下平章事하니 自此不召群臣入內殿하고 但宴武臣而已러라
反於魏
한대 莊宗方選大將擊之
하니 劉皇后曰 此
는 小事
라 可趣紹榮指揮
라하니
乃以
爲鄴都行營招撫使
하야 將二千人討之
하다 行欽攻鄴南門
하야 以詔書招在禮
하니
在禮送羊酒犒軍하고 登城謂行欽曰 將士經年離去父母하고 不取敕旨奔歸하야 上貽聖憂하니 追悔何及고 若公善爲之辭하면 尙能改過自新이라하니
行欽曰 天子以汝等有社稷之功
하시니 小過必當赦宥
라하다 在禮再拜
하고 以詔書示諸軍
하다 從旁奪詔書壞之
한대 軍士大譟
라
行欽具以聞하니 莊宗大怒하야 勑行欽破城之日에 無遺種이라하고 乃益召諸鎭兵하야 皆屬行欽하다
行欽屯澶州하야 分諸鎭兵爲五道하야 毁民車輪門扉屋椽爲筏하야 渡長慶河하야 攻冠氏門이나 不克이라
是時에 邢洺諸州相繼皆叛이어늘 而行欽攻鄴無功일새 莊宗欲自將以往한대 群臣皆諫止라 乃遣明宗討之하다
明宗至魏하야 軍城西하고 行欽軍城南한대 而明宗軍變하야 入于魏하야 與在禮合이라 行欽聞之하고 退屯衛州하야 以明宗反聞하다
莊宗遣金槍指揮使李從璟하야 馳詔明宗計事하니 從璟은 明宗子也라
行至衛州而明宗已反이라 行欽乃縶從璟하야 將殺之어늘 從璟請還京師한대 乃許之라 明宗自魏縣引兵南하니 行欽率兵趨還京師하다
從莊宗幸汴州하야 行至滎澤이라가 聞明宗已渡黎陽하고 莊宗復遣從璟通問于明宗이어늘 行欽以爲不可라하고 因擊殺從璟하다
明宗入汴州하니 莊宗至萬勝鎭하야 不得進이라 與行欽登道旁冢하야 置酒하고 相顧泣下하다
有野人獻雉어늘 問其冢名하니 野人曰 愁臺也라한대 莊宗益不悅하야 因罷酒去하다
西至石橋하야 置酒野次하니 莊宗謂行欽曰 卿等從我久하야 富貴急難에 無不同也러니 今玆危蹙而默默無言하야 坐視成敗라
我至滎澤하야 欲單騎渡河하야 自求總管이어늘 卿等各陳利害하야 今日俾我至此하니 卿等何如오하다
行欽泣而對曰 臣本小人으로 蒙陛下撫養하야 位至將相이로되 危難之時에 不能報國하니 雖死無以塞責이라하고
因與諸將百餘人으로 皆解髻斷髮하야 置之于地하야 誓以死報하니 君臣相持慟哭이라
莊宗還洛陽
하고 하다 郭從謙反
커늘 莊宗崩
이라 行欽出奔
하다
行至平陸
하야 爲野人所執
하야 送虢州
하니 하고 載以
하야 送京師
하다
明宗見之하고 罵曰 我兒何負於爾오하니 行欽瞋目直視曰 先皇帝何負於爾오하다 乃斬于洛陽市하니 市人皆爲之流涕하니라
嗚呼
라 死之所以可貴者
는 以其義不苟生爾
라 故曰
라
方明宗之兵變于魏하야 諸將未知去就로되 而行欽獨以反聞하고 又殺其子從璟하고 至于斷髮自誓하니 其誠節이 有足嘉矣라
元行欽과 唐 莊宗이 君臣 사이에 둘이 서로 慷慨하며 둘이 서로 悲歌를 부른 곳을 보면 生色이 있어 볼만하다.
元行欽은 幽州 사람이다. 劉守光의 裨將이 되었는데 유수광이 그 부친 劉仁恭의 자리를 簒奪하고 원행흠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大安山에서 유인공을 공격하여 그를 가두게 하고 다시 원행흠에게 자신의 형제들을 해치게 하였다.
이후 晉나라가 幽州를 공격하자 유수광이 원행흠에게 雲州와 朔州 사이에서 군대를 모집하게 하였다. 이때 唐 明宗(李嗣源)이 山北에서 땅을 빼앗고서 원행흠과 廣邊軍에서 대치하면서 여덟 차례 전투하니,
명종이 원행흠에게 일곱 번이나 화살을 쏘아 맞혔는데 원행흠은 화살을 뽑고서 계속 싸워 그도 화살을 쏘아 명종의 넓적다리를 맞혔다. 원행흠이 여러 차례 패배하고서야 비로소 항복하니
명종이 그의 등을 어루만지고 술을 마시게 하면서 말하기를 “壯士로다.”라고 하고, 이어 그를 養子로 삼았다. 명종을 따라 전투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莊宗이 이미 魏를 함락한 뒤에 용맹한 장수를 더 선발하여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원행흠의 용맹함을 듣고 그를 데려다가 散員都部署를 삼고 李紹榮이라는 姓名을 하사하였다.
莊宗은 전쟁하기를 좋아하고 적을 얕잡아보아 梁나라 군대와 潘張에서 전투할 때 군대가 패하여 흩어졌다. 장종이 騎兵 서넛을 데리고 도망갔는데 梁나라 군사 수백 명이 따라잡아서 창끝을 겨누어 그들을 포위하였다.
元行欽이 그들의 깃발을 바라보고 상황을 파악하고서 말 한 필을 타고 내달려 칼을 휘둘러 창 두 개를 잘라버리고 梁나라 군사 한 명의 머리를 베니 梁나라 군사들이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장종이 軍營에 돌아와 원행흠을 붙잡고 흐느끼면서 말하기를 “富貴를 卿과 함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총애가 다른 장수들보다 월등하였다. 忻州刺史에 제수되었다가 승진하여 武寧軍節度使가 되었다.
장종이 內殿에서 신료들에게 연회를 베풀 때 酒興이 올라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서 평생 동안 戰場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웃고 즐거워하다가, 원행흠이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서 이에 左右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紹榮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니,
담당하는 이가 아뢰기를 “勅命을 받들어 使相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니 소영은 散官이라 참석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연회를 파하고 즐거워하지 않았다.
이튿날에 곧바로 원행흠을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하니, 이로부터 신료들을 內殿에 들어오도록 부르지 않고 단지 武臣들과 연회를 할 뿐이었다.
趙在禮가 魏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莊宗이 大將을 선발하여 치려고 하니, 劉皇后가 말하기를 “이는 작은 일입니다. 李紹榮을 재촉해 指揮하게 하면 됩니다.”라고 하니,
이에 元行欽을 鄴都行營招撫使로 삼아 2천 명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다. 원행흠이 鄴都의 南門을 공격하면서 詔書로 조재례를 부르니
조재례가 양고기와 술을 보내 군사들을 犒饋하고 城에 올라 원행흠에게 이르기를 “將士들이 해를 넘기도록 부모 곁을 떠난 데다 집으로 달려 돌아가라는 勅書를 받지 못해 위로 성상께 근심을 끼쳤으니 뒤미쳐 후회한들 어찌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공께서 저희의 상황을 잘 해명해주시면 아직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니,
원행흠이 말하기를 “天子께서 너희들이 社稷을 수호한 공로가 있다고 여기시니 이러한 작은 허물은 반드시 용서하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재례가 再拜하고 조서를 가지고 군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皇甫暉가 곁에서 조서를 빼앗아 찢어버리자 군사들이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원행흠이 이 일을 모두 보고하니 장종이 크게 노하여 원행흠에게 칙서를 내리기를 “城을 함락하는 날에 씨를 남기지 말라.”라고 하고, 이어 각 鎭의 군대를 더 불러서 모두 원행흠에게 소속시켰다.
원행흠은 澶州에 주둔하여 각 鎭의 군대를 나눠 다섯 길로 가면서 백성들의 수레바퀴와 문짝과 지붕을 부숴 뗏목으로 만들어서 長慶河를 건너 冠氏門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때에 邢州‧洺州 등 각 州가 연이어 모두 반란을 일으켰는데 元行欽이 鄴都를 공격해도 전공이 없기에, 莊宗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가려고 하자 신료들이 모두 그만두시라고 간언하였다. 이에 明宗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명종은 魏에 이르러 城의 서쪽에 주둔하고, 원행흠은 城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그런데 명종의 군대가 반란하여 魏에 들어가 趙在禮와 함께 연합하였다. 원행흠이 이 소식을 듣고 물러나 衛州에 주둔하고서 명종이 반란하였다고 보고하였다.
莊宗이 金槍指揮使 李從璟을 보내 明宗에게 조서를 보내 상황을 논의하도록 하니, 이종경은 명종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달려가 衛州에 이르자 명종이 이미 반란을 일으킨지라 元行欽이 이에 이종경을 붙잡아두고서 장차 죽이려고 하거늘, 이종경이 京師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이에 허락하였다. 명종이 魏縣에서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니 원행흠이 군대를 이끌고 경사로 급히 돌아왔다.
장종을 따라 汴州에 이르러 행군하여 滎澤에 갔다가 명종이 이미 黎陽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장종은 다시 이종경을 보내 명종에게 講和할 것을 요청하게 하였는데 원행흠이 안 된다고 하고는 이어 이종경을 쳐 죽였다.
明宗이 汴州에 들어가니 莊宗이 萬勝鎭에 이르러 전진할 수가 없는지라 元行欽과 함께 길옆의 언덕에 올라 술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어떤 촌사람이 꿩을 바쳤는데 그 언덕의 이름을 물으니 촌사람이 말하기를 “愁臺라고 합니다.”라고 하자, 장종이 더욱 기쁘지 않아 이에 술자리를 파하고 떠났다.
서쪽으로 石橋에 이르러 들판에서 술자리를 마련하니 장종이 원행흠에게 이르기를 “卿들이 오랜 세월 나를 따라다니면서 富貴를 누릴 때나 危難을 겪을 때나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상황이 危急한데도 묵묵하게 말이 없이 成敗를 坐視하고만 있다.
내가 滎澤에 이르렀을 때 혼자 말을 타고 黃河를 건너 직접 總管(明宗)에게 요구하려고 하였는데 卿들이 저마다 그 일의 利害를 말하여 오늘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빠지게 하였으니 卿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였다.
원행흠이 흐느끼면서 대답하기를 “臣이 본래 小人으로 陛下의 돌보아주심을 입어 지위가 將相에 이르렀는데도 위난한 이때 국가에 보답하지 못하니 비록 죽더라도 책임을 다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이어 장수 백여 인과 함께 모두 상투를 풀어 머리카락을 잘라 땅에 놓고서 죽음으로 보답하기를 맹세하니 君臣간에 서로 붙잡고 慟哭하였다.
莊宗이 洛陽으로 돌아오고 나서 며칠 뒤에 다시 汜水에 거둥하였다. 郭從謙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장종이 崩御한지라 元行欽이 달아났다.
平陸에 이르러 野人에게 붙잡혀서 虢州로 보내지니 刺史 石潭이 그의 두 발을 부러뜨리고 檻車에 실어서 京師로 압송하였다.
明宗이 그를 보고 꾸짖기를 “내 아들이 너에게 무엇을 잘못했는가?”라고 하니, 원행흠이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명종을 쳐다보면서 말하기를 “先皇帝께서 너에게 무엇을 잘못했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낙양의 저자에서 원행흠을 斬首하니 저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오호라! 죽음이 귀하게 여겨질 만한 까닭은 그 義를 행하여 구차하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가 살면 함께 살고 군주가 망하면 함께 망하는 자는 社稷의 신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明宗이 魏에서 變亂을 일으켰을 때 장수들이 去就를 정하지 못하였으나 元行欽만 명종이 반란하였다고 보고하고 또 그 아들 李從璟을 죽이고 머리카락을 잘라 스스로 맹세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충성스러운 節操가 족히 가상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莊宗이 崩御하였을 때에는 自決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음을 피하여 살길을 찾다가 끝내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그 말은 비록 굴복하지 않았으나 죽게 된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으니 어찌 족히 귀하게 여길 만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