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本紀
01.
通篇이 克用與全忠兩相搆釁處와 及莊宗所繼其父行事慷慨大略이니 歐公一一點綴生色並如畫로다
莊宗光聖神閔孝皇帝는 其先本號朱邪니 蓋出於西突厥이라 至其後世하야 別自號曰 沙陀하고 而以朱邪爲姓하다
唐德宗時
에 有朱邪盡忠者居於
之金滿州
라 中
에 吐蕃
가 攻陷北庭
하야 徙盡忠於甘州而役屬之
라
贊普怒
하야 追之
하야 及于
하야 盡忠戰死
하고 執宜獨走歸唐
하야 居之鹽州
하야 以隷河西節度使范希朝
하다
希朝徙鎭太原
에 執宜從之
하야 居之
神武川之新城
하니 其部落萬騎
가 皆驍勇善騎射
하야 號沙陀軍
이라
執宜死하니 其子曰赤心이라 懿宗咸通十年에 神策大將軍康承訓이 統十八將하야 討龐勛於徐州할새 以朱邪赤心爲太原行營招討沙陀三部落軍使하다
以從破勛功
하야 拜單于大都護振武軍節度使
하고 賜姓名曰李國昌
하야 以之
하다
沙陀素彊이러니 而國昌恃功하야 益橫恣라 懿宗患之하야 十二年에 徙國昌雲州刺史大同軍防禦使하니 國昌稱疾拒命이라
國昌子克用은 尤善騎射하야 能仰中雙鳧하야 爲雲州守捉使하다
國昌已拒命하니 克用乃殺大同軍防禦使段文楚하야 據雲州하고 自稱留後라
明年에 僖宗卽位하야 以謂前太原節度使李業遇沙陀有恩이러니
而業已死
라 乃以其子鈞爲靈武節度使宣慰沙陀
하야 以招緝之
하고 拜克用大同軍防禦使
하다
居久之
에 國昌出擊
한대 吐渾赫連鐸襲破振武
라 克用聞之
하고 自雲州往迎國昌
이나 而雲州人亦閉關拒之
라
國昌父子無所歸하야 因掠蔚朔間하야 得兵三千하야 國昌入保蔚州하고 克用還據新城하다
僖宗乃拜鐸大同軍使하고 以李鈞爲代北招討使하야 以討沙陀라
乾符五年에 沙陀破遮虜軍하고 又破岢嵐軍하야 而唐兵數敗하니
沙陀由此益熾
하야 北據蔚朔
하고 南侵忻代嵐石
하야 至于
焉
이라
廣明元年에 招討使李琢이 會幽州李可擧雲州赫連鐸하야 擊沙陀하니 克用與可擧相距雄武軍이라
其叔父友金以蔚朔州降于琢한대 克用聞之하고 遽還이어늘 可擧追하야 至藥兒嶺하야 大敗之하고
琢軍夾擊
하야 又敗之于蔚州
하니 沙陀大潰
하야 克用父子亡入
하다
克用少驍勇
하야 軍中號曰李鴉兒
하고 하니 其威名蓋於代北
이라
其在韃靼久之에 鬱鬱不得志하고 又常懼其圖己라 因時時從其群豪射獵하야 或掛鍼于木하고 或立馬鞭하야 百步射之輒中하니 群豪皆服하야 以爲神하다
黃巢已陷京師러니 中和元年에 代北起軍하야 使陳景思發沙陀先所降者하야 與吐渾安慶等萬人으로 赴京師한대
行至絳州에 沙陀軍亂하야 大掠而還이라 景思念沙陀非克用不可將하야 乃以詔書召克用於韃靼하야 承制以爲代州刺史鴈門以北行營節度使라
率蕃漢萬人하야 出石嶺關하야 過太原할새 求發軍錢하니 節度使鄭從讜이 與之錢千緡米千石이어늘 克用怒하야 縱兵大掠而還하다
二年十一月에 景思克用이 復以步騎萬七千으로 赴京師하야 三年正月에 至于河中하야 進屯乾坑한대 巢黨驚曰 鴉兒軍至矣라하다
二月
에 敗巢將黃鄴於石隄谷
하고 三月
에 又敗趙璋尙讓於良田坡
하니 橫尸三十里
라 是時
에 諸鎭兵
이 皆會長安
하야 大戰
하니 賊敗走入城
이라
克用乘勝追之하야 自光泰門先入하야 戰望春宮昇陽殿하니 巢敗南走하야 出藍田關이라
京師平에 克用功第一이라 天子拜克用檢校司空同中書門下平章事河東節度使하고 以國昌爲鴈門以北行營節度使하다
十月에 國昌卒하다 十一月에 遣其弟克修하야 攻昭義孟方立하야 取其澤潞二州하니
하다 黃巢南走
하야 至蔡州
하야 降秦宗權
하고 遂攻陳州
하다
四年에 克用以兵五萬救陳州하야 出天井關하야 假道河陽한대 諸葛爽不許어늘 乃自河中渡河하다
四月
에 敗尙讓於
하고 又敗黃鄴於
라 巢且戰且走
하야 至中牟
하야 臨河未渡
어늘 而克用追及之
하니 賊衆驚潰
라
比至封丘하야 又敗之하니 巢脫身走라 克用追之하야 一日夜馳二百里하야 至于寃朐하되 不及而還하니라
過汴州할새 休軍封禪寺하니 朱全忠饗克用於上源驛이라 夜酒罷에 克用醉臥어늘
伏兵發火起하니 侍者郭景銖滅燭하고 匿克用牀下하야 以水醒面而告以難이라
會天大雨滅火하야 克用得從者薛鐵山賀回鶻等하야 隨電光하야 縋尉氏門出還軍中이라
七月에 至于太原하야 訟其事于京師하야 請加兵於汴하고 遣弟克修하야 將兵萬人하야 屯于河中以待라
光啓元年
에 河中王重榮
이 與宦者田令孜有隙
하야 徙重榮兗州
하고 以定州王處存爲河中節度使
하고 詔
하야 以兵護處存之鎭
이라
重榮使人紿克用曰 天子詔重榮하야 俟克用至하야 與處存共誅之라하고 因僞爲詔書하야 示克用曰 此朱全忠之謀也라하다
克用信之하야 入上表請討全忠이어늘 僖宗不許하니 克用大怒라 重榮旣不肯徙어늘 僖宗遣邠州朱玫鳳翔李昌符討之한대
克用反以兵助重榮하야 敗玫于沙苑하고 遂犯京師하야 縱火大掠하니 天子出居于興元하고 克用退屯河中하다
朱玫亦反하야 以兵追天子나 不及이어늘 得襄王熅하야 迫之稱帝하고 屯于鳳翔이라
僖宗念獨克用可以破玫나 而不能使也라 當破黃巢長安時에 天下兵馬都監楊復恭이 與克用善하야
大順元年에 克用擊破孟遷하야 取邢洺磁三州하고 乃遣安金俊하야 攻赫連鐸於雲州하니
幽州李匡威救鐸하야 戰於蔚州하야 金俊大敗라 於是에 匡威鐸及朱全忠等이 皆請因其敗伐之라
昭宗以克用破黃巢功高
로 不可伐
하고 下其事
四品官議
하니 議者多言不可
라
宰相張濬은 獨以謂沙陀前逼僖宗하야 幸興元하니 罪當誅라 可伐이라하다
일새 又極諫以爲不可
하니 昭宗然之
하야 詔諭全忠等
하다
全忠陰賂濬하야 使持其議益堅하니 昭宗不得已하야 以濬爲太原四面行營兵馬都統하고 韓建爲副使하다
是時에 潞州將馮霸가 叛降于梁하니 梁遣葛從周하야 入潞州하다
唐
이 以京兆尹孫揆爲昭義軍節度使
하니 克用遣李存孝
하야 執揆於
하고 又遣康君立
하야 取潞州
하다
十一月
에 濬及克用戰于陰地
하야 濬軍三戰三敗
하니 濬建遯歸
라 克用兵
이 大掠晉絳
하야 至于河中
하니 千里
라
克用이 上表自訴에 其辭慢侮어늘 天子爲之引咎하야 優詔答之하다
二年二月
에 復拜克用河東節度使隴西郡王
하고 加檢校太師兼中書令
하다 四月
에 攻赫連鐸于雲州
하야 圍之百餘日
하니 鐸走
하다
八月
에 于太原
하니 出晉絳
하야 掠懷孟
하야 至于邢州
하고 遂攻王鎔于鎭州
하다
克用
이 柵常山西
하야 以十餘騎渡
覘敵
한대 遇大雨
하야 平地水深數尺
이라
鎭人襲之하야 克用匿林中하야 禱其馬曰 吾世有太原者니 馬不嘶라하니 馬偶不嘶以免이라
前軍李存孝가 取臨城하고 進攻元氏한대 李匡威救鎔이어늘 克用還軍邢州하다
景福元年
에 王鎔攻邢州
한대 李存信李嗣勳等
이 敗鎔于
하다 二月
에 會王處存攻鎔
하야 戰于
하야 爲鎔所敗
하다
八月에 李匡威攻雲州하야 以牽克用之兵이어늘 克用潛入于雲州하야 返出擊匡威하니 匡威敗走하다
十月
에 李存孝
가 以邢州叛
하다 二年
에 存孝求援於王鎔
한대 克用出兵
하야 擊鎔
하고 且以書招鎔
하야 而急攻其平山
하니
鎔懼하야 遂與克用通和하야 獻帛五十萬匹하고 出兵하야 助攻邢州하다
乾寧元年二月에 執存孝殺之하다 冬에 攻幽州한대 李匡儔가 棄城走어늘 追至景城에 見殺하여 以劉仁恭爲留後하다
二年에 河中王重榮卒하니 其諸子珂珙爭立이라 克用은 請立珂하고 鳳翔李茂貞邠寧王行瑜華州韓建은 請立珙이라
昭宗이 初兩難之라가 乃以宰相崔胤爲河中節度使하고 旣而오 許克用立珂하다
茂貞等怒하야 三鎭兵犯京師라가 聞克用亦起兵하고 乃皆罷去하다
六月에 克用攻絳州하야 斬刺史王瑤하다 瑤는 珙弟이니 助珙以爭者라
七月에 至于河中하니 同州王行約이 奔于京師하야 陽言曰 沙陀十萬至矣라하고 謀奉天子幸邠州하고
茂貞假子閻圭도 亦謀劫幸鳳翔하니 京師大亂이라 昭宗이 出居于石門하니 克用軍留月餘不進이라
昭宗이 遣延王戒丕丹王允하야 兄事克用하고 且告急하다 八月에 克用이 進軍渭橋하니 以爲邠寧四面行營都統하고 昭宗이 還京師라
十一月에 克用擊破邠州하니 王行瑜走하야 至慶州見殺이라 克用이 還軍雲陽하고 請擊茂貞하니 昭宗이 慰勞克用하야 使與茂貞解仇以紓難하고
拜克用忠正平難功臣하고 封晉王하다 是時에 晉軍渭北이러니 遇雨六十日이라 或勸克用入朝어늘 克用未決이라
都押衙蓋寓가 曰 天子還自石門하야 寢未安席하니 若晉兵渡渭면 人情豈復能安이리오 勤王而已니 何必朝哉리오하니
克用이 笑曰 蓋寓猶不信我어든 況天下乎아하고 乃收軍而還하다
乃上表하야 曰 若陛下朝以濬爲相이면 則臣將暮至闕庭하리이다하니 京師大恐하야 濬命遽止하다
朱全忠之攻兗鄆也에 克用이 遣李存信하야 假道魏州하야 以救朱宣等이라
存信이 屯于莘縣에 軍士侵掠魏境이어늘 羅弘信이 伏兵攻之하니 存信敗走洺州라
克用이 自將擊魏에 戰于洹水라가 亡其子落落하다 六月에 破魏成安洹水臨漳等十餘邑하다
十月에 又敗魏人于白龍潭하고 進攻觀音門이러니 全忠救至하야 乃解하다
四年에 劉仁恭이 叛晉이어늘 克用以兵五萬擊仁恭하야 戰于安塞하야 克用大敗라
光化元年
에 朱全忠
이 遣葛從周
하야 攻下邢洺磁三州
라 克用
이 遣周德威
하야 出靑山口
하야 遇從周于
한대 德威大敗
하다
冬에 潞州守將薛志勤卒한대 李罕之據潞州하야 叛附于朱全忠하다
二年
에 全忠
이 遣氏叔琮
하야 攻破承天軍
하고 又破遼州
하야 至于
한대 周德威敗之于
하다 秋
에 李嗣昭復取澤潞
하다
三年
에 嗣昭敗汴軍于
하고 復取洺州
어늘 朱全忠
이 自將圍之
하니 嗣昭走
라가 至靑山口
하야 遇汴伏兵
하야 嗣昭大敗
하다
秋에 嗣昭取懷州하다 是歲에 汴人攻鎭定하니 鎭定皆絶晉하야 以附于朱全忠하다
天復元年에 全忠封梁王하다 梁攻下晉絳河中하고 執王珂以歸하다
晉失三與國이라 乃下意爲書幣聘梁以求和라 梁王이 以爲晉弱可取라 乃曰 晉雖請盟이나 而書辭慢이라하고 因大擧擊晉하다
四月에 氏叔琮은 入天井하고 張文敬은 入新口하고 葛從周는 入土門하고 王處直은 入飛狐하고 侯言은 入陰地라
叔琮取澤潞하고 其別將白奉國이 破承天軍한대 遼州守將張鄂과 汾州守將李瑭이 皆迎梁軍降하니
晉人大懼러니 會天大雨霖하야 梁兵多疾하야 皆解去하다 五月에 晉復取汾州하고 誅李瑭하다 六月에 周德威李嗣昭取慈隰하다
二年에 進攻晉絳하야 大敗于蒲縣이라 梁軍乘勝하야 破汾慈隰三州하고 遂圍太原하니 克用大懼하야 謀出奔雲州라
라가 未決
에 而梁軍大疫解去
하니 周德威
가 復取汾慈隰三州
하다
四年에 梁遷唐都于洛陽하고 改元曰天祐라 克用以謂劫天子以遷都者는 梁也라 天祐는 非唐號니 不可稱이라하고 乃仍稱天復이라
五年
에 會契丹阿保機於
하야 約爲兄弟
하다 六年
에 梁攻燕滄州
하니 燕王劉仁恭
이 來乞師
어늘 克用恨仁恭反覆
하야 欲不許
라
其子存勖이 諫曰 此吾復振之時也라 今天下之勢는 歸梁者十七八이라 彊如趙魏中山이 莫不聽命하니
是自河以北은 無爲梁患者라 其所憚者는 惟我與仁恭耳니 若燕晉合勢면 非梁之福也라
夫爲天下者는 不顧小怨이라 且彼常困我나 而我急其難이면 可因以德而懷之니 是謂一擧而兩得이니 此不可失之機也라하다
克用以爲然하고 乃爲燕出兵하야 攻破潞州하니 梁圍乃解去어늘 以李嗣昭爲潞州留後하다
七年
에 梁兵十萬
이 攻潞州
하야 圍以
하니 遣周德威
하야 救潞州
하고 軍于亂柳
라
冬
에 克用疾
이라 是歲
에 梁滅唐
하고 克用復稱天祐
하다 四年正月辛卯
에 克用卒
하니 年五十三
이라 子存勖立
하고 葬克用於
하다
存勖
은 克用長子也
라 初
에 克用
이 破孟方立于邢州
하고 還軍
하야 置酒三垂岡
이라
伶人奏
하야 至于衰老之際
하야 聲辭甚悲
하니 坐上皆悽愴
이라
時에 存勖在側하니 方五歲라 克用이 慨然捋鬚하고 指而笑曰 吾行老矣나 此奇兒也니 後二十年에 其能代我戰于此乎인저하다
昭宗이 異其狀貌하야 賜以鸂鶒巵翡翠盤하고 而撫其背하고 曰 兒有奇表라 後當富貴하리니 無忘予家하라하다
及長에 善騎射하고 膽勇過人하고 稍習春秋에 通大義하고 尤喜音聲歌舞俳優之戱라
天祐五年正月에 卽王位于太原하다 叔父克寧이 殺都虞候李存質하니 倖臣史敬鎔이 告克寧謀叛하다
二月에 執而戕之하고 且以先王之喪叔父之難告周德威하니 德威自亂柳還軍太原하다 梁夾城兵이 聞晉有大喪하고 德威軍且去하고 因頗懈라
王謂諸將曰 梁人이 幸我大喪하고 謂我少而新立無能爲也하니 宜乘其怠擊之라하다
乃出兵하야 趨上黨하야 行至三垂岡한대 歎曰 此는 先王置酒處也라하다
會天大霧晝暝이라 兵行霧中하야 攻其夾城하야 破之하니 梁軍大敗라 凱旋告廟하다
九月
에 蜀王王建岐王李茂貞及楊崇本
이 攻梁
한대 晉亦遣周德威
하야 攻其晉州
하야 敗梁軍于神山
하다
六年에 劉知俊이 叛梁하고 來乞師하니 王이 自將至陰地關하야 遣周德威하야 攻晉州하야 敗梁軍于蒙邟하다
七年冬에 梁遣王景仁하야 攻趙한대 趙王王鎔이 來乞師라 諸將皆疑鎔詐하야 未可出兵이어늘 王不聽하고 乃救趙하다
八年正月에 敗梁軍于柏鄕하야 斬首二萬級하고 獲其將校三百人馬三千匹하다 進攻邢州나 不下하야 留兵圍之하고 去攻魏하다
別遣周德威
하야 徇梁
하고 攻博州
하야 破東武
하고 遂擊
淇門
하고 掠新鄕
하다
燕王劉守光
이 聞晉攻梁深入
하고 乃大治兵
하야 聲言助
晉
한대 王患之
하야 乃旋師
하다
七月에 會趙王王鎔于承天軍하다 劉守光稱帝于燕하다
九年正月에 遣周德威하야 會鎭定하야 以攻燕이라 守光求救于梁하야 梁軍攻趙하야 屠棗彊하니 李存審擊走之라
八月에 朱友謙이 以河中叛于梁來降한대 梁遣康懷英討友謙하니 友謙復臣于梁이나 而亦陰附于晉이라
十年十月에 劉守光請降하여 王如幽州한대 守光背約不降하니 攻破之라 十一年에 殺燕王劉守光于太原하고 用其父仁恭于鴈門하다
於是
에 趙王王鎔
과 北平王王處直
이 奉冊推王爲尙書令
하고 始建
라 七月
에 攻梁邢州
하야 戰于張公橋
나 晉軍大敗
라
十二年에 魏州軍亂하야 賀德倫이 以魏博二州로 叛于梁來附라
王入魏州하야 行至永濟하야 誅其亂首張彦하고 以其兵五百自衛하고 號帳前銀鎗軍이라 六月에 王兼領魏博節度使하고 取德州하다
七月에 取澶州라 劉鄩軍于洹水하니 王率百騎하야 覘其營이라가 遇鄩伏兵하야 圍之數重하니 決圍而出에 亡七八騎라
八月에 梁復取澶州라 晉軍與鄩對壘于莘한대 晉軍數挑戰이나 鄩閉壁不出이라
十三年正月에 王留李存審于莘하고 聲言西歸하니 鄩聞晉王且去하고 卽引兵擊魏하야 攻城東이라
王行至貝州하야 返擊鄩하야 大敗之하고 追至于故元城하야 又敗之하니 鄩走黎陽하다
三月에 攻梁衛州하야 降其刺史米昭하고 克磁州하야 殺其刺史靳昭하다
四月에 克洺州하고 八月에 圍邢州하야 降其節度使閻寶하다
梁張筠이 棄相州하고 戴思遠棄滄州而逃하야 遂取二州한대 而貝州人殺梁守將張源德以城降하다
契丹寇蔚州하야 執振武節度使李嗣本하다 十四年에 契丹寇新州하고 遂寇幽州하니 李嗣源擊走之하다
冬
에 梁謝彦章軍于
하다 十二月
에 攻楊劉
할새 王自負芻以堙塹
하야 遂破之
하다
十五年正月에 梁晉相拒于楊劉한대 彦章決河水以隔晉軍하다 六月에 渡水擊彦章하야 破其四寨라
八月
에 大閱于魏
하고 合盧龍橫海昭義安國及鎭定之兵十萬馬萬匹
하야 軍于
하다 彦章
은 軍于行臺
하다
十二月에 進軍臨濮한대 梁軍追之하야 戰于胡柳하야 晉軍大敗하고 周德威死之하다
梁軍暮休于土山
이어늘 晉軍復擊
하야 大敗之
하고 遂軍
하고 爲
하다
十六年正月에 王兼領盧龍軍節度使하다 梁王瓚이 攻德勝南城不克하다 十月에 廣德勝北城하고 十二月에 敗梁軍于河南하다
十七年에 朱友謙襲同州하니 梁遣劉鄩擊友謙이어늘 李存審이 敗梁軍于同州하다
十八年正月
에 魏州僧傳眞
이 獻唐
一
하니 趙將張文禮
가 弑其君鎔
하고 文禮來請命
하다 二月
에 以文禮爲鎭州兵馬留後
하다
三月에 河中節度使朱友謙昭義軍節度使李嗣昭橫海軍節度使李存審義武軍節度使王處直安國軍節度使李嗣源鎭州兵馬留後張文禮가
領天平軍節度使閻寶大同軍節度使李存璋振武軍節度使李存進匡國軍節度使朱令德하야 請王卽皇帝位하다
王三辭어늘 友謙等이 三請하니 王曰 予當思之호리라하다
八月遣趙王王鎔故將符習及閻寶史建瑭等하야 攻張文禮於鎭州하니 建瑭取趙州라 張文禮卒에 其子處瑾이 閉城拒守하다
九月에 建瑭戰死하고 十月梁戴思遠攻德勝北城한대 李嗣源敗之于戚城하다
王處直이 叛附于契丹하니 其子都幽處直以來附하다 十二月에 契丹寇涿州하고 遂寇定州하다
十九年正月에 敗契丹于新城望都하고 追奔至于幽州하다 三月에 閻寶敗于鎭州하야 以李嗣昭代之하고 四月에 嗣昭戰死하야 以李存進代之하다
八月에 梁取衛州하고 九月에 存進敗鎭人于東垣이나 存進戰死하다 十月에 李存審克鎭州하니 王兼領成德軍節度使하다
元年春三月
에 李繼韜以潞州叛附于梁
하다 夏四月己巳
에 皇帝卽位
하고 大赦
하며 改元國號唐
이라
李氏之先은 蓋出於西突厥하야 本號朱邪러니 至其後世하야 別自號曰沙陀요 而以朱邪爲姓이요 拔野古爲始祖라
其自序云 沙陀者
는 之磧也
라 當唐太宗時
하야 破西突厥諸部
하고 分同羅僕骨之人於此磧
하야 置沙陀府
하고 而以其始祖拔野古爲都督
이라
其傳子孫하야 數世皆爲沙陀都督이라 故其後世에 因自號沙陀라 然이나 予考於傳記하니 其說皆非也라
夷狄無姓氏요 朱邪는 部族之號耳라 拔野古與朱邪는 同時人이요 非其始祖며 而唐太宗時에 未嘗有沙陀府也라
唐太宗이 破西突厥하고 分其諸部하야 置十三州하야 以同羅爲龜林都督府하고 僕骨爲金微都督府하고 拔野古爲幽陵都督府하니 未嘗有沙陀府也라
當是時하야 西突厥有鐵勒薛延陀阿史那之類가 爲最大요 其別部에 有同羅僕骨拔野古等은 以十數蓋其小者也라
又有處月處密諸部하니 又其小者也라 朱邪者는 處月別部之號耳니 太宗二十二年에 已降拔野古라
其明年
에 阿史那賀魯叛
한대 至高宗
二年
하야 處月朱邪孤注從賀魯戰于牢山
이라가 爲契苾何力所敗
하야 遂沒不見
이라
後百五六十年에 當憲宗時하야 有朱邪盡忠及子執宜見於中國하고 而自號沙陀하야 以朱邪爲姓矣라
自處月以來로 居此磧하야 號沙陀突厥이요 而夷狄無文字傳記하고 朱邪又微不足錄이라 故其後世自失其傳이라
至盡忠孫하야 始賜姓李氏하고 後大而夷狄之人이 遂以沙陀爲貴種云
편의 전체 내용은 李克用과 朱全忠이 서로 원한을 가져 틈이 벌어졌다는 대목과, 莊宗이 아버지의 행사를 계승하여 慷慨한 대략이니, 歐陽公이 하나하나 묘사한 것이 마치 그림처럼 생동감이 있다.
莊宗光聖神閔孝皇帝는 그 선계가 본래 朱邪(주야)라고 불렸으니 대개 西突厥에서 나왔다. 후세에 이르러 스스로 沙陀라는 별호를 쓰고 朱邪를 姓으로 삼았다.
唐 德宗 때에 朱邪盡忠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北庭의 金滿州에 거주하였다. 貞元 연간에 吐番의 贊普가 북정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甘州로 주야진충을 이주시키고 자신에게 예속시켜 부역을 시켰다.
그 후에 찬보가 回鶻에게 패하자 주야진충이 자신의 아들 執宜와 함께 동쪽으로 달아났다.
찬보가 노하여 이들을 추격하여 石門關에 이르러 주야진충은 전사하고 집의만 홀로 달아나 唐나라에 歸附하여 鹽州에 거주하면서 河西節度使 范希朝에게 예속되었다.
범희조가 太原으로 옮겨가 鎭守하자 집의도 그를 따라가 定襄 神武川 新城에 거주하였는데, 그 부락의 1만 기병이 모두 용맹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沙陀軍이라 불렀다.
執宜가 죽으니 그 아들은 赤心이었다. 懿宗 咸通 10년(869)에 神策大將軍 康承訓이 18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徐州에서 龐勛을 토벌할 때에 朱邪赤心을 太原行營招討沙陀三部落軍使로 삼았다.
從戰해서 방훈을 격파한 공으로 單于大都護 振武軍節度使에 배수되었고, 李國昌이라는 姓과 이름을 하사받아 이로써 屬籍되었다.
沙陀가 평소 強暴하였는데, 이국창이 功을 믿고 더욱 방자하였다. 懿宗이 이를 걱정하여 함통 12년(871)에 이국창을 雲州刺史 大同軍防禦使로 옮기게 하니, 이국창은 병을 핑계 대고 命을 거부하였다.
李國昌의 아들 李克用은 더욱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능히 하늘을 나는 두 마리의 물오리를 동시에 맞힐 수 있어서 雲州守捉使가 되었다.
이국창이 이미 命을 거부하니, 이극용이 이에 大同軍防禦使 段文楚를 살해하고 雲州를 점거하고 스스로 留後라 칭하였다.
唐나라가 太僕卿 盧簡方을 振武節度使로 삼아 幽州와 幷州의 병사를 모아 토벌하게 하니, 노간방이 鳳州에 이르자 군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부터 沙陀가 代北을 침략하여 변방의 우환거리가 되었다.
이듬해에 唐 僖宗이 즉위하여 이전 太原節度使 李業이 사타를 대우하여 은혜가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업이 이미 죽었는지라 그의 아들 李鈞을 靈武節度使 宣慰沙陀六州三部落使로 삼아 군사를 召集하게 하고 이극용을 대동군방어사에 배수하였다.
머문 지 오래 지나서 李國昌이 출정하여 黨項을 공격하였는데, 吐渾의 赫連鐸이 振武軍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李克用이 이 소식을 듣고 雲州로부터 가서 이국창을 맞이하였으나 운주 사람들도 관문을 닫고 이들을 막았다.
이국창 父子가 돌아갈 곳이 없게 되자 이로 인해 蔚州와 朔州 일대를 약탈하여 병사 3천 명을 얻어 이국창은 울주로 들어가 지키고 이극용은 돌아와 新城을 점거하였다.
僖宗이 이에 혁련탁를 大同軍使에 배수하고 李鈞을 代北招討使로 삼아 沙陀를 토벌하였다.
乾符 5년(878)에 사타가 遮虜軍을 격파하고 또 岢嵐軍을 격파하여 唐나라 군사가 자주 패하니,
사타가 이로부터 더욱 세력이 흥성해져 북쪽으로 울주와 삭주를 점거하고 남쪽으로 忻州‧代州‧嵐州‧石州를 침략하여 太谷에까지 이르렀다.
廣明 원년(880)에 招討使 李琢이 幽州의 李可擧와 雲州의 赫連鐸을 회합하여 沙陀를 공격하니, 李克用은 이가거와 雄武軍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이극용의 숙부 李友金이 蔚州와 朔州를 바치고 이탁에게 항복하자 이극용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회군하였다. 이가거가 추격하여 藥兒嶺에 이르러 크게 패퇴시키고,
이탁의 군사가 협공하여 또 울주에서 패퇴시키니, 사타가 크게 궤멸되어 이극용 父子는 달아나 韃靼으로 들어갔다.
이극용은 어려서 날래고 용맹하여 軍中에서 李鴉兒라고 불렀고, 한쪽 눈이 멀었는데 신분이 貴하게 되어서는 또 獨眼龍이라 불렀으니, 그 위엄과 명성이 代北을 덮었다.
달단에 머문 지 오래됨에 울울하여 뜻을 펴지 못하고, 또 늘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였다. 이로 인해 때때로 달단의 호걸들과 함께 사냥을 가서 혹 나무에 針을 걸어놓기도 하고 혹 말 채찍을 세워놓고서 100보 뒤에서 활을 쏘아 쏠 때마다 맞히니, 호걸들이 모두 탄복하여 神의 솜씨라 하였다.
黃巢가 이미 京師를 함락하였는데, 中和 원년(881)에 代北이 군사를 일으켜 陳景思으로 하여금 沙陀의 먼저 항복한 자들을 동원하여 吐渾과 安慶 등 1만 명과 함께 경사로 가게 하였다.
그런데 행군하다 絳州에 이르자 沙陀軍이 반란을 일으켜 크게 약탈하고 돌아갔다. 진경사가 사타는 李克用이 아니면 통솔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에 詔書를 보내 韃靼에서 이극용을 소환하고는 천자의 명을 받아 代州刺史 鴈門以北行營節度使로 삼았다.
이극용이 蕃漢軍 1만을 거느리고 石嶺關으로 나와 太原을 지날 때에 군사를 운용할 자금을 요청하자 節度使 鄭從讜이 錢 1,000緡과 쌀 1,000石을 주거늘 이극용이 노하여 병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돌아갔다.
廣明 2년(881) 11월에 陳景思와 李克用이 다시 보병과 기병 1만 7천 명을 거느리고 京師로 나가서 廣明 3년(882) 정월에 河中에 이르러 진군하여 乾坑에 주둔하였는데, 黃巢의 무리들이 놀라서 “鴉兒의 군대가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2월에 황소의 장수 黃鄴을 石隄谷에서 패퇴시키고, 3월에 또 趙璋과 尙讓을 良田坡에서 패퇴시키니, 시신이 30里나 이어졌다. 이때에 각 鎭의 병사들이 모두 長安에 모여 渭橋에서 크게 싸우니, 적이 패주하여 城으로 들어갔다.
이극용이 승기를 타고 추격하여 光泰門을 통해 먼저 城으로 들어가 望春宮과 昇陽殿에서 싸우니, 황소가 패하여 남쪽으로 달아나 藍田關으로 나갔다.
경사가 평정됨에 이극용의 공이 가장 높았다. 천자가 이극용을 檢校司空 同中書門下平章事 河東節度使에 拜受하고, 李國昌을 鴈門以北行營節度使로 삼았다.
10월에 이국창이 졸하였다. 11월에 아우인 李克修를 보내 昭義軍의 孟方立을 공격하여 澤州와 潞州 2개의 州를 점령하니,
맹방립이 山東으로 달아나 邢州‧洺州‧磁州 3개의 州를 가지고 스스로 별도의 소의군을 만들었다. 황소가 남쪽으로 달아나 蔡州에 이르러 陳宗權을 항복시키고 마침내 陳州를 공격하였다.
廣明 4년(883)에 李克用이 병사 5만을 거느리고 陳州를 구원하기 위하여 天井關으로 나가 河陽에 길을 빌리고자 하였는데, 諸葛爽이 허락하지 않거늘 이에 河中으로부터 河水를 건넜다.
4월에 太康에서 尙讓을 패퇴시키고 또 西華에서 黃鄴을 패퇴시켰다. 黃巢가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달아나 中牟에 이르러 하수에 임하여 미처 건너지 못하였는데, 이극용이 추격해 오니, 적들이 놀라 흩어졌다.
封丘에 이르러 또 패배시키니 황소가 몸만 빼내 달아났다. 이극용이 하룻밤 사이에 200里를 추격하여 寃朐까지 이르렀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汴州를 지날 때에 封禪寺에서 군사들을 쉬게 하였는데, 朱全忠이 上源驛에서 이극용을 향응하였다. 밤에 술자리가 파하자 이극용이 취하여 누웠는데,
伏兵이 불을 지르고 일어나니 侍者인 郭景銖가 촛불을 끄고 이극용을 평상 아래에 숨기고는 물을 얼굴에 뿌려 깨워 變亂이 일어났다고 고하였다.
마침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불이 꺼지자 이극용이 從者인 薛鐵山‧賀回鶻 등과 만나 번갯불을 따라 밧줄을 잡고 尉氏門을 넘어 나와 軍中으로 돌아갔다.
7월에 太原에 이르러 京師에 이 일에 대해 訴訟하고서 변주에 병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아우인 李克修를 보내 병사 1만을 거느리고서 河中에서 주둔하고 대기하게 하였다.
僖宗이 화해시키고 황소를 격파한 공으로 이극용을 隴西郡王으로 봉하였다.
光啓 원년(885)에 河中 王重榮이 환관인 田令孜와 사이가 좋지 않아 왕중영을 兗州로 옮기고 定州의 王處存을 河中節度使로 삼고 李克用에게 詔書를 보내 병사를 동원해 왕처존의 鎭을 호위하게 하였다.
왕중영이 사람을 보내 이극용에게 거짓으로 말하기를 “천자가 나에게 詔書를 보내 이극용이 오기를 기다려서 왕처존과 함께 주살하라고 하였다.”라고 하고는, 인하여 조서를 위조하여 이극용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는 朱全忠의 계략이다.”라고 하였다.
이극용이 이 말을 믿고 表文을 올려 주전충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僖宗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극용이 크게 노여워하였다. 왕중영이 이미 연주로 옮기려 하지 않거늘 희종이 邠州의 朱玫와 鳳翔의 李昌符를 보내 토벌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극용이 도리어 병사를 보내 왕중영을 도와 沙苑에서 주매를 패퇴시키고 마침내 京師를 침범하여 불을 지르고 크게 약탈하니, 천자는 경사를 나가 興元에 거처하고 이극용은 물러나 河中에 주둔하였다.
주매도 반란을 일으켜 병사를 동원해 천자를 추격하였으나 잡지 못하자 襄王 李熅을 잡아 稱帝하도록 협박하고 봉상에 주둔하였다.
희종이 “이극용만이 주매를 격파할 수 있지만 그를 부릴 수 없다. 長安에서 黃巢를 격파할 때에 天下兵馬都監 楊復恭이 이극용과 친분이 있었다.”라고 생각하고는,
이에 諫議大夫 劉崇望을 보내 조서로 이극용을 부르고, 한편으로는 양복공의 의도를 말해주어 이극용으로 하여금 병사를 진군하여 주매 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극용은 거짓으로 승낙하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듬해(886)에 孟方立이 죽자 그 아우 孟遷이 지위를 계승하였다.
大順 元年(890)에 李克用이 孟遷을 격파하고 邢州‧洺州‧磁州 3개 州를 취하고 安金俊을 보내 赫連鐸을 雲州에서 공격하니,
幽州 李匡威가 혁련탁을 구원하여 蔚州에서 싸워 안금준이 크게 패하였다. 이에 이광위와 혁련탁과 朱全忠 등이 모두 안금준의 패배를 틈타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昭宗이 이극용은 黃巢를 격파한 공이 크므로 정벌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그 일을 臺省의 4品官에게 논의하게 하니 의논하는 자들이 대부분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재상 張濬은 홀로 “沙陀가 이전에 僖宗을 핍박하여 興元으로 幸行하게 하였으니, 그의 죄는 주륙을 당할 만하므로 토벌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軍容使 楊復恭은 이극용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또한 토벌해서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간언하니 소종이 이를 옳다고 여겨 주전충 등에게 詔書를 내려 주전충 등을 타일렀다.
주전충이 은밀히 장준에게 뇌물을 주어 토벌해야 한다는 의론을 더욱 굳게 견지하게 하니, 소종이 부득이하여 장준을 太原四面行營兵馬都統으로 삼고 韓建을 副使로 삼았다.
이때에 潞州將 馮霸가 반란을 일으켜 梁나라에 항복하니, 梁나라가 葛從周를 보내 노주로 들어가게 하였다.
唐나라가 京兆尹 孫揆를 昭義軍節度使로 삼으니, 李克用이 李存孝를 보내 長子에서 손규를 사로잡고, 또 康君立을 보내 노주를 취하였다.
11월에 張濬과 이극용이 陰地에서 싸워 장준의 군사가 세 번 싸워 세 번을 패하니, 장준과 韓建이 달아나 돌아왔다. 이극용의 병사가 晉州와 絳州를 크게 약탈하고 河中에까지 이르니, 千里가 모두 赤地가 되었다.
이극용이 表文을 올려 스스로 해명하였지만 그 말이 오만하였는데, 천자가 자신의 과실로 돌리고 優渥한 詔書로 답하였다.
大順 2년(891) 2월에 李克用을 다시 河東節度使 隴西郡王에 배수하고 檢校太師 兼中書令의 벼슬을 더해주었다. 4월에 雲州에서 赫連鐸을 공격하여 100여 일을 포위하니, 혁련탁이 吐渾으로 달아났다.
8월에 太原에서 大蒐하니, 이극용이 晉州와 絳州로 나와 懷州와 孟州를 약탈하여 邢州에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鎭州에서 王鎔을 공격하였다.
이극용이 常山縣 서쪽에 성책을 세우고 기병 10여 기를 거느리고 滹沱河를 건너 적을 정탐하였는데, 큰 비를 만나 평지에 물이 수 尺이나 깊어졌다.
이에 鎭州의 사람들이 습격하자 이극용이 숲 속으로 숨어 자신의 말에게 애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대로 太原을 소유한 사람이니, 말아 울지 마라.”라고 하니, 말이 마침 울지 않아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前軍 李存孝가 臨城을 취하고 진군하여 元氏縣을 공격하자 李匡威가 왕용을 구원해주었는데, 이극용이 邢州로 돌아갔다.
景福 元年(892)에 王鎔이 邢州를 공격하였는데, 李存信과 李嗣勳 등이 堯山에서 왕용을 패퇴시켰다. 2월에 王處存과 회합하여 왕용을 공격하여 新市에서 싸워 왕용에게 패하였다.
8월에 李匡威가 雲州를 공격하여 李克用의 군사를 牽制하였는데, 이극용이 몰래 운주로 들어가서 도로 나와 이광위를 공격하니 이광위가 패하여 달아났다.
10월에 李存孝가 형주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경복 2년(893)에 이존효가 왕용에게 구원을 청하자 이극용이 井陘으로 출병하여 왕용을 공격하고, 또 서신을 보내 왕용에게 항복을 권하고서 빠르게 平山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왕용이 두려워하여 마침내 이극용과 和親을 맺어 비단 50만 필을 바치고 출병하여 형주를 공격하는 것을 도왔다.
乾寧 元年(894) 2월에 李存孝를 잡아 죽였다. 겨울에 幽州를 공격하였는데, 李匡儔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거늘 추격하여 景城에 이르렀을 때 이광주가 피살당하자 劉仁恭을 留後로 삼았다.
건녕 2년(895)에 河中의 王重榮이 졸하자 그 아들인 王珂와 王珙이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李克用은 왕가를 세울 것을 청하고 李鳳祥, 李茂貞, 邠寧 王行瑜, 華州 韓建은 왕공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昭宗이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어렵다고 여기다가 비로소 宰相 崔胤을 河中節度使로 삼고, 이윽고 〈왕가를 세우라는〉 이극용의 청을 들어 왕가를 후계로 세웠다.
이무정 등이 노하여 세 鎭의 군사가 京師를 침범하였다가 이극용도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에 모두 군사를 해산하고 떠났다.
6월에 이극용이 絳州를 공격하여 刺史 王瑤를 참수하였다. 왕요는 왕공의 아우이니, 왕공을 도와 자리를 다투던 사람이었다.
7월에 河中에 이르니, 同州의 王行約이 京師로 달아나 거짓으로 말하기를 “沙陀의 10만 군사가 이르렀다.”라고 하고는 천자를 邠州로 모시고 떠날 것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李茂貞의 양자 李閻圭도 천자를 겁박하여 鳳翔으로 幸行할 것을 도모하니, 경사가 크게 혼란하였다. 昭宗이 경사를 나와 石門에 거처하니, 李克用의 군사는 한 달 남짓 駐屯만 하고 진군하지 않았다.
소종이 延王 李戒丕와 丹王 李允을 보내 이극용을 형으로 섬기고 또 급변을 고하게 하였다. 8월에 이극용이 渭橋로 진군하자 이극용을 邠寧四面行營都統으로 삼고, 소종이 경사로 돌아왔다.
11월에 이극용이 빈주를 격파하니, 王行瑜가 달아나 慶州에 이르러 피살되었다. 이극용이 雲陽으로 회군하고 이무정을 공격할 것을 청하니, 소종이 이극용을 위무하고서 이무정과 화해하여 國難을 해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극용을 忠正平難功臣에 배수하고 晉王에 봉하였다. 이때에 晉나라 군사가 渭水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60일 동안 비가 내렸다. 혹자가 이극용에게 入朝할 것을 권하거늘 이극용이 결정하지 못하였다.
都押衙 蓋寓가 말하기를 “천자가 石門에서 京師로 돌아와 寢席이 편안하지 못하니, 만약 晉나라 군사가 위수를 건너면 인정상 어찌 다시 안정되겠습니까. 勤王할 따름이니 어찌 굳이 입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극용이 웃으며 말하기를 “갑우조차도 나를 믿지 않는데, 더구나 천하 사람들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이에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乾寧 3년(896) 정월에 昭宗이 다시 張濬을 재상으로 삼으니, 李克用이 말하기를 “이는 朱全忠의 계략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만약 폐하께서 아침에 장준을 재상으로 삼으시면 신은 장차 저녁에 군사를 거느리고 궐의 뜰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하니, 京師가 크게 두려워하여 장준을 재상으로 삼으려는 명을 급히 중지하였다.
주전충이 兗州와 鄆州를 공격할 때에 이극용이 李存信을 보내 魏州에 길을 빌려 朱宣 등을 구원하려고 하였다.
이존신이 莘縣에 주둔함에 군사들이 위주를 침범하여 약탈하거늘 羅弘信이 복병으로 공격하니, 이존신이 패하여 洺州로 달아났다.
이극용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위주를 공격할 때에 洹水에서 싸우다가 아들 落落을 잃었다. 6월에 위주의 成安‧洹水‧臨漳 등 10여 개의 읍을 격파하였다.
10월에 또 白龍潭에서 위주의 군사를 패퇴시키고 진군하여 觀音門에 이르렀는데, 주전충이 구원하기 위해 이르자 그제야 군사를 해산하였다.
건녕 4년(897)에 劉仁恭이 晉나라를 배반하거늘 이극용이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유인공을 공격하여 安塞에서 싸웠는데 이극용이 크게 패하였다.
光化 원년(898)에 朱全忠이 葛從周를 보내 邢州‧洺州‧磁州 3州를 함락시켰다. 李克用이 周德威를 보내 靑山口로 나가 張公橋에서 갈종주의 군사와 만났는데 주덕위가 크게 패하였다.
겨울에 潞州守將 薛志勤이 졸하자 李罕之가 潞州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주전충에게 붙었다.
광화 2년(899)에 주전충이 氏叔琮을 보내 承天軍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또 遼州를 격파하고서 楡次에 이르렀는데, 주덕위가 洞渦에서 패퇴시켰다. 가을에 李嗣昭가 澤州와 潞州를 다시 공격하여 취하였다.
광화 3년(900)에 이사소가 沙河에서 汴州의 군사를 패퇴시키고 다시 洺州를 취하였는데, 朱全忠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포위하니 이사소가 달아나다 청산구에 이르러 변주의 복병을 만나 이사소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에 이사소가 懷州를 취하였다. 이해에 변주 사람들이 鎭州와 定州를 공격하니, 진주와 정주가 모두 晉나라와 斷交하고 주전충에게 붙었다.
天復 元年(901)에 朱全忠을 梁王에 봉하였다. 梁나라가 晉州‧絳州‧河中을 함락하고 王珂를 잡아 돌아갔다.
晉나라가 세 동맹국을 잃었는지라 이에 뜻을 굽혀 書信을 작성하여 梁나라에 폐백을 갖추어 聘問하여 화친을 청하였다. 양왕은 晉나라가 약하여 취할 만하다고 여겼다. 이에 “晉나라가 비록 동맹을 청하지만 서신의 말이 거만하다.”라고 하고 인하여 크게 군사를 일으켜 晉나라를 공격하였다.
4월에 氏叔琮은 天井으로 들어가고 張文敬은 新口로 들어가고 葛從周는 土門으로 들어가고 王處直은 飛狐로 들어가고 侯言은 陰地로 들어갔다.
씨숙종이 澤州‧潞州를 취하고 그 別將 白奉國이 承天軍을 격파하자 遼州守將 張鄂과 汾州守將 李瑭이 모두 梁나라 군사를 맞이하여 항복하니,
晉나라 사람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마침 큰 장맛비가 내려 梁나라 병사들이 질병에 걸린 이가 많아지자 모두 포위를 풀고 떠났다. 5월에 晉나라가 다시 汾州를 취하고 李瑭을 주살하였다. 6월에 周德威와 李嗣昭가 慈州와 隰州를 취하였다.
天復 2년(902)에 진군하여 晉州와 絳州를 공격하다가 蒲縣에서 크게 패하였다. 梁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서 汾州‧慈州‧隰州의 세 주를 격파하고 마침내 太原을 포위하니, 李克用이 크게 두려워하여 雲州로 달아날 것을 도모하였다.
또 匈奴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결정하기도 전에 梁나라 군사가 크게 역병에 걸려 포위를 풀고 떠나니, 周德威가 다시 분주‧자주‧습주의 세 주를 취하였다.
천복 4년(904에) 梁나라가 唐나라 都邑을 洛陽으로 옮기고 연호를 天祐로 고쳤다. 이극용이 이르기를 “천자를 겁박하여 천도한 것은 梁나라 때문이다. 천우는 唐나라의 연호가 아니니 쓸 수 없다.”라고 하고 그대로 천복으로 칭하였다.
천복 5년(905)에 雲中에서 契丹 阿保機와 회동하여 맹약하여 형제가 되었다. 천복 6년(906)에 梁나라가 燕나라의 滄州를 공격하니, 燕王 劉仁恭이 와서 원군을 청하거늘 이극용이 유인공이 태도를 번복하는 것을 원망하여 허락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 아들 李存勖이 간하기를 “이는 우리들이 다시 세력을 떨칠 기회입니다. 지금 천하의 형세는 梁나라에 귀부한 나라가 열에 일고여덟인지라 趙나라‧魏나라‧中山과 같이 강대한 나라도 梁나라의 명을 받들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는 河水 북쪽은 梁나라의 우환이 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梁나라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오직 우리와 유인공밖에 없으니, 만약 燕나라와 晉나라가 연합한다면 梁나라는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대저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작은 원한을 돌아보지 않는 법입니다. 또 저들이 늘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었지만 우리가 저들의 어려움에 급히 달려가준다면 이를 계기로 德으로 저들을 품어줄 수 있으니, 이것이 一擧兩得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잃을 수 없는 기회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극용이 옳다고 여기고 비로소 燕나라를 위하여 출병하여 潞州를 공격하여 격파하니, 梁나라가 비로소 포위를 풀고 떠나거늘 晉나라가 李嗣昭를 潞州留後로 삼았다.
천복 7년(907)에 梁나라 군사 10만이 노주를 공격하여 夾城으로 포위하니, 周德威를 보내 노주를 구원하고 亂柳에 주둔하게 하였다.
겨울에 이극용이 병들었다. 이해에 梁나라가 唐나라를 멸하고 이극용이 다시 연호를 天祐로 칭하였다. 天祐 4년(907) 正月 신묘일에 이극용이 졸하니 나이 53세였다. 아들 이존욱이 즉위하였고 鴈門에 이극용을 장사 지냈다.
李存勖은 李克用의 長子이다. 애초에 이극용이 邢州에서 孟方立을 격파하고 上黨으로 환군하여 三垂岡에 주연을 베풀었다.
樂工이 〈百年歌〉를 노래하여 노쇠한 지경을 읊은 가사에 이르러 聲音과 가사가 몹시 슬퍼지니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슬픔에 잠겼다.
이때에 이존욱이 옆에 있었는데 당시 5세였다. 이극용이 개연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존욱을 가리켜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장차 늙을 것이지만 이 아이는 기특한 아이이니, 20년 뒤에 능히 나를 대신하여 이곳에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존욱은 나이 11세에 이극용을 따라 王行瑜을 격파하였다. 이극용이 이존욱을 보내 京師에 승전보를 바치게 하니,
唐 昭宗이 그 모습을 기이하게 여겨 鸂鶒巵와 翡翠盤을 하사하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너는 기이한 외모가 있는지라 후에 응당 부귀해질 것이니, 나의 집안을 잊지 말라.”라고 하였다.
장성하자 騎射를 잘하고 담력과 용맹함이 출중하였으며 ≪春秋≫를 조금 배우자 大義를 깨우쳤고 音樂‧歌舞‧俳優의 遊戲를 특히 좋아하였다.
天祐 5년(908) 정월에 太原에서 王位에 올랐다. 숙부인 李克寧이 都虞候 李存質을 죽이니, 총애하던 신하인 史敬鎔이 이극녕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고변하였다.
2월에 이극녕을 잡아 죽이고 또 先王의 喪과 숙부의 변란을 周德威에게 고하니, 주덕위가 亂柳로부터 태원으로 회군하였다. 梁나라 夾城의 병사들이 晉나라에 큰 喪이 있고 주덕위의 군사마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로 인해 크게 기강이 해이해졌다.
晉王이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梁나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큰 喪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나를 두고 어린 데다 새로 왕위에 올라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저들이 해이해졌을 때를 틈타 공격해야만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출병하여 上黨으로 향해 가다 三垂岡에 이르렀는데,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곳은 선왕께서 주연을 베풀었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마침 짙은 안개가 껴 낮인데도 어두웠기에 군사를 안개 속에 행군시켜 협성을 공격하여 격파하니 梁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凱旋하여 祠堂에 고하였다.
9월에 蜀王 王建, 岐王 李茂貞, 楊崇本이 梁나라 大安을 공격하였는데, 晉나라 또한 주덕위을 보내 晉州를 공격하게 하여 神山에서 梁나라 군사를 패퇴시켰다.
天祐 6년(909)에 劉知俊이 梁나라를 배반하고 와서 원군을 청하니,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陰地關에 이르러 周德威를 보내 晉州를 공격하게 하여 蒙邟에서 梁나라 군사를 패퇴시켰다.
천우 7년(910) 겨울에 梁나라가 王景仁을 보내 趙나라를 공격하자 趙王 王鎔이 와서 원군을 요청하였다. 장수들이 모두 왕용의 속임수라고 의심하여 원군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왕은 듣지 않고 이에 趙나라를 구원해주었다.
천우 8년(911) 정월에 柏鄕에서 梁나라 군사를 패퇴시켜 2만 명을 참수하고 將校 300명과 말 3천 필을 노획하였다. 진군하여 邢州를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여 병사를 남겨두어 포위하고는 떠나 魏州를 공격하였다.
별도로 周德威를 보내 梁나라의 夏津과 高唐을 점령하고 博州를 공격하여 東武와 朝城을 격파하고 마침내 黎陽‧臨河‧淇門을 공격하여 新鄕과 共城을 빼앗았다.
燕王 劉守光이 晉나라가 梁나라를 공격하여 깊이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크게 병사를 정비하여 晉나라를 돕는다고 소문을 내자 왕이 이를 근심하여 비로소 회군하였다.
7월에 承天軍에서 조왕 왕용과 회동하였다. 유수광이 燕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天祐 9년(912) 정월에 周德威를 보내 鎭州와 定州의 군사들과 연합하여 燕나라를 공격하였다. 劉守光이 梁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梁나라 군사가 趙나라를 공격하여 棗彊을 도륙하니, 李存審이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8월에 朱友謙이 河中을 가지고 梁나라를 배반하여 와서 항복하자 梁나라가 康懷英을 보내 주우겸을 토벌하니, 주우겸이 다시 梁나라의 신하가 되었지만 또한 몰래 晉나라에게 귀부하였다.
천우 10년(913)에 10월에 유수광이 항복을 청하여 왕이 幽州로 가자 유수광이 약속을 어기고 항복하지 않으니,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천우 11년(914) 燕王 유수광을 太原에서 죽이고 그 아버지 仁恭을 鴈門에서 등용하였다.
이에 趙王 王鎔과 北平王 王處直이 冊書를 받들고 왕을 천거하여 尙書令으로 삼고 비로소 行臺를 건립하였다. 7월에 梁나라의 邢州를 공격하여 張公橋에서 싸웠으나 晉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天祐 12년(915)에 魏州의 군사가 반란을 일으키자 賀德倫이 魏州와 博州 두 개의 州를 가지고 梁나라를 배반하고 와서 귀부하였다.
왕이 위주로 들어가 진군하여 永濟에 이르러 반란의 수괴 張彦을 참하고, 그의 병사 500명에게 자신을 호위하게 하고는 帳前銀鎗軍이라 명명하였다.
7월에 澶州를 취하였다. 劉鄩이 洹水에 군대를 주둔하자 왕이 기병 100騎를 거느리고 진영을 염탐하다 유심의 복병을 만나 몇 겹으로 포위되었는데 포위를 뚫고 나옴에 기병 7, 8騎를 잃었다.
8월에 梁나라가 다시 전주를 취하였다. 晉나라 군사가 유심과 莘縣에서 대치하였는데, 晉나라 군사가 수차례 도발하여 싸우려 하였으나 유심이 보루의 문을 닫고 출전하지 않았다.
天祐 13년(916) 정월에 왕이 莘縣에 李存審을 남겨두고 서쪽으로 돌아간다고 소문을 내자, 劉鄩이 晉王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병사를 이끌고 魏州를 공격하여 성 동쪽을 공격하였다.
왕이 행군하다 貝州에 이르러 회군하여 유심을 공격하여 크게 패퇴시키고, 추격하여 옛 元城에 이르러 또 패퇴시키니, 유심이 黎陽으로 달아났다.
3월에 梁나라 衛州를 공격하여 刺史 米昭를 투항하게 하였고, 磁州를 점령하여 刺史 靳昭를 죽였다.
4월에 洛州를 점령하고 8월에 邢州를 포위하여 節度使 閻寶를 투항하게 하였다.
梁나라 張筠이 相州를 버리고 戴思遠이 滄州를 버리고 달아나 마침내 두 州를 취하자 貝州의 사람들이 梁나라 守將 張源德을 죽이고 성을 가지고 투항하였다.
契丹이 蔚州를 침범하여 振武節度使 李嗣本을 사로잡았다. 천우 14년(917)에 거란이 新州를 침범하고 마침내 幽州를 침범하자 李嗣源이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겨울에 梁나라 謝彦章이 楊劉에 주둔하였다. 12월에 양류를 공격할 때에 왕이 스스로 꼴을 짊어지고 해자를 메워 마침내 격파하였다.
天祐 15년(918) 정월에 梁나라와 晉나라가 楊劉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謝彦章이 河水의 물을 틔워 晉나라 군사를 막았다. 6월에 물을 건너 사언장을 공격하여 4개의 목책을 격파하였다.
8월에 魏州에서 크게 閱兵하고 盧龍‧橫海‧昭義‧安國 및 鎭州‧定州의 병사 10만 명과 군마 1만 필과 연합하여 麻家渡에 주둔하였다. 사언장은 行臺에 주둔하였다.
12월에 진군하여 臨濮에 주둔하였는데, 梁나라 군사가 추격하여 胡柳에서 전투를 벌여 晉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고 周德威가 전사하였다.
梁나라 군사가 저물녘에 土山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晉나라 군사가 다시 공격하여 크게 패퇴시키고 마침내 德勝에 주둔하고 夾寨를 세웠다.
천우 16년(919) 정월에 왕이 盧龍軍節度使를 겸하였다. 梁나라 王瓚이 德勝南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0월에 德勝北城을 확충하고, 12월에 河南에서 梁나라 군사를 패퇴시켰다.
天祐 17년(920)에 朱友謙이 同州를 습격하니 梁나라가 劉鄩을 보내 주우겸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李存審이 동주에서 梁나라 군사를 패퇴시켰다.
천우 18년(921) 정월에 魏州의 승려 傳眞이 唐나라의 受命寶 하나를 바치니 趙나라 장수 張文禮가 군주 王鎔을 시해하고 장문례가 와서 歸附할 것을 청하였다. 2월에 장문례를 鎭州兵馬留後로 삼았다.
3월에 河中節度使 朱友謙, 昭義軍節度使 李嗣昭, 橫海軍節度使 李存審, 義武軍節度使 王處直, 安國軍節度使 李嗣源, 鎭州兵馬留後 張文禮가
天平軍節度使 閻寶, 大同軍節度使 李存璋, 振武軍節度使 李存進, 匡國軍節度使 朱令德을 거느리고서 왕에게 황제의 지위에 오를 것을 청하였다.
왕이 세 번 사양하자 주우겸 등이 세 번 청하니 왕이 “내가 생각해보겠다.”라고 하였다.
8월에 趙王 王鎔의 옛 장수 符習‧閻寶‧史建瑭 등을 보내 鎭州에서 張文禮를 공격하게 하니, 사건당이 趙州를 취하였다. 장문례가 죽자 아들 張處瑾이 성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켰다.
9월에 사건당이 전사하고, 10월에 梁나라 戴思遠이 德勝北城을 공격하자 李嗣源이 戚城에서 패퇴시켰다.
王處直이 배반하여 契丹에게 귀부하니, 그 아들 王都가 왕처직을 유폐시키고 와서 귀부하였다. 12월에 거란이 涿州를 침범하고 마침내 定州를 침범하였다.
天祐 19년(922) 정월에 거란을 新城과 望都에서 패퇴시키고 달아나는 거란을 추격하여 幽州에 이르렀다. 3월에 閻寶가 鎭州에서 패하자 李嗣昭로 교체하였고, 4월에 이사소가 전사하자 李存進으로 교체하였다.
8월에 梁나라가 衛州를 취하고, 9월에 이존진이 東垣에서 鎭州의 군사를 패퇴시켰으나 이존진은 전사하였다. 10월에 李存審이 진주를 점령하니 왕이 成德軍節度使를 겸하여 통솔하였다.
同光 元年(923) 봄 3월에 李繼韜가 潞州를 가지고 배반하여 梁나라에 귀부하였다. 여름 4월 己巳에 皇帝에 즉위하고 크게 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를 바꾸고 國號를 唐이라 하였다.
오호라. 세대가 오래 지남에 잘못 전해진 것이 많으니, 어찌 史官만의 잘못이겠는가.
李氏의 선조는 대개 西突厥에서 나와 본래 朱邪라고 불렀는데, 후세에 이르러 별도로 沙陀라고 불렀고 주야를 姓으로 삼고 拔野古를 시조로 삼았다.
그들의 自序에 이르기를 “사타는 北庭의 사막이었다. 唐 太宗 때에 서돌궐의 여러 部를 격파하고 同羅‧僕骨의 사람들을 이 사막에 분산해두고는 沙陀府를 설치하고 시조인 발야고를 都督으로 삼았다.
자손들에게 전하여 수 세대가 모두 沙陀都督이 되었다. 그러므로 후세에 인하여 사타라고 스스로 불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傳記를 상고해보니 그 설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
夷狄은 姓氏가 없고 주야는 부족의 호칭일 뿐이었다. 발야고와 주야는 동시대의 사람이고 그들의 시조가 아니며 唐 太宗 때에는 일찍이 사타부가 없었다.
唐 太宗이
西突厥을 격파하고 여러
部로 나누어 13
州를 두고서
同羅를
龜林都督府로 삼고
僕骨을
金微都督府로 삼고
拔野古를
幽陵都督府로 삼았으니, 일찍이
沙陀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唐 太宗
이때에 서돌궐에 鐵勒‧薛延陀‧阿史那의 무리들이 가장 큰 부락이었고, 다른 部로 동라‧복골‧발야고 등 10여 개 部가 있었는데, 대개 작은 부락이었다.
또 處月‧處密 등의 部도 있었는데, 더 작은 부락이었다. 朱邪는 처월에 별도로 있는 部의 호칭일 뿐이었으니 태종 22년(648)에 이미 발야고에게 항복하였다.
이듬해에 阿史那賀魯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高宗 永徽 2년(651)에 이르러 처월과 朱邪孤注가 아사나하로를 따라 牢山에서 전투를 벌였다가 契苾何力에게 패하여 마침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백오륙십 년 뒤 憲宗 때에 朱邪盡忠과 아들 朱邪執宜가 中國에 나타났고 沙陀라고 스스로 칭하며 주야를 姓으로 삼았다.
대개 사타는 큰 사막이니 金莎山의 남쪽 蒲類海의 동쪽에 있다.
처월로부터 이래로 이 사막에 거처하여 沙陀突厥이라 불렀는데 夷狄은 문자로 기록을 전한 것이 없는 데다 주야는 더 작은 부족이므로 기록이 없었다. 그러므로 후세에 절로 전함을 잃은 것이다.
주야진충의 손자에 이르러 비로소 李氏 姓을 하사받았고 후에 강성해져 이적의 사람들이 마침내 사타를 귀한 종족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