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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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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劉延朗等五人 擁廢帝爲亂이러니 已而 遂及與廢帝俱亡이라 中所托張濛事神一節 尤爲昏騃
歐公序次其事明爽하니 可爲鑒戒 予故錄而出之하니라
劉延朗 宋州虞城人也 初廢帝起於鳳翔할새 與共事者五人이니 節度判官韓昭胤, 掌書記李專美, 牙將宋審虔, 客將房暠
而延朗爲孔目官이라 愍帝卽位 徙廢帝爲北京留守어늘 不降制書하고 遣供奉官趙處愿하야 促帝上道
帝疑惑하야 召昭胤等計議어늘 昭胤等皆勸帝反이라 由是 事無大小 皆此五人謀之
而暠又喜鬼神巫祝之說이러니 有瞽者張濛 自言事太白山神이라하니
其言吉凶 無不中하니 暠素信之 嘗引濛見한대 帝聞其語聲하고 驚曰 此 非人臣也라하다
暠使濛問於神한대 神傳語曰 三珠併一珠 驢馬沒人驅 歲月甲庚午 中興戊己土라하다
暠不曉其義하야 使問濛하니 濛曰 神言如此하니 我能傳之 不能解也라하다 帝卽以濛爲館驛巡官하다
帝將反이로되 而兵少 又乏食이라 由此甚懼하야 使暠問濛한대 濛傳神語曰 王當有天下 可無憂라하다
於是決反하고 使專美作檄書하니 言朱弘昭馮贇 幸明宗病하야而立
帝年少하야 小人用事하야 離間骨肉하니 將問罪於朝라하다 遣使者馳告諸鎭하니 皆不應이로되
獨隴州防禦使相里金 遣其判官薛文遇計事 帝得文遇하고 大喜 而延朗調率城中民財以給軍하다
王思同率諸鎭兵圍鳳翔하니 廢帝懼하야 又遣暠問神하니 神曰 王兵少 東兵來하니 所以迎王也라하야늘 已而 東兵果叛降于帝하다
帝入京師하야 卽位之日 受冊明宗柩前하니 元年歲次甲午四月庚午朔이라하다
帝回顧暠曰 張濛神言 豈不驗哉아하니 由是 暠益見親하야 而專以巫祝用事하다
帝旣立 以昭胤爲左諫議大夫端明殿學士하고 專美爲比部郞中樞密院直學士하고 審虔爲皇城使하고 暠爲宣徽北院使하고 하다
久之 以昭胤暠爲樞密使하고 延朗爲副使하고 審虔爲侍衛步軍都指揮使하고 而薛文遇亦爲職方郞中樞密院直學士하다
由是 審虔將兵하고 專美文遇主謀議하고 而昭胤暠及延朗掌機密이라
乃陽爲羸疾하야 灸灼滿身하야 冀帝憐而遣之하다 延朗等多言敬瑭可留京師라하야늘
昭胤專美曰 敬瑭與趙延壽皆尙唐公主하니 不可獨留라하니 乃復授高祖河東而遣之
是時 契丹數寇北邊이어늘 以高祖爲大同振武威塞彰國等軍蕃漢馬步軍都總管하야 屯于忻州하다
而屯兵忽變하야 擁高祖呼萬歲하니 高祖懼하야 斬三十餘人而後止 於是帝益疑之하다
是時 高祖悉握精兵在北이라 饋運芻糧 遠近勞弊
帝與延朗等으로 日夕謀議하고 而專美文遇 迭宿中興殿廬하니 召見訪問하야 常至夜分而罷하다
是時 高祖弟重胤爲皇城副使하고 而石氏公主母曹太后居中일새 因得伺帝動靜言語하야 以報高祖하니 高祖益自危懼하다
每帝遣使者勞軍이면 卽陽爲羸疾不自堪하야 因數求解總管以探帝心이라
是時 帝母魏氏追封宣憲皇太后하니 而墓在太原이러니 有司議立寢宮이라 高祖建言陵與民墓相雜하니 不可立宮이라하다
帝疑高祖欲毁民墓하야 爲國取怨이라 帝由此發怒하야 罷高祖總管하고 徙鎭鄆州어늘
延朗等多言不可하고亦言天象失度하니 宜安靜以弭災라한대 其事遂止하다
後月餘 文遇獨直할새 帝夜召之하야 語罷敬瑭事하니 文遇曰 臣聞이라호니 國家之事 斷在陛下
且敬瑭 徙亦反이요 不徙亦反이라 遲速爾 不如先事圖之라하다
帝大喜曰 術者言朕今年當得一賢佐하야 以定天下라한대 卿其是邪아하고
乃令文遇手書하고 夜半下學士院草制하다 明日宣制 文武兩班皆失色이라 하다
延朗等請帝親征커늘 帝心憂懼하야 常惡言敬瑭事하야 每戒人曰 爾無說石郞하야 令我心膽墮地하라하다
由此不欲行이어늘 而延朗等屢迫之에야 乃行하다하야 帝夜召李崧하야 問以計策하다
文遇不知而繼至어늘 帝見之色變하니 崧躡其足에야 文遇乃出이라
帝曰 我見文遇肉顫하야 遽欲抽刀刺之라한대 崧曰 文遇 小人이라 致誤大事어늘 刺之益醜라하니 乃已하다
是時 契丹已立敬瑭爲天子하고 以兵而南하니 帝惶惑하야 不知所之
遣審虔將千騎하야 至白司馬坡하야 踏戰地한대 審虔曰 何地不堪戰이리오마는 雖有其地 何人肯立于此리오 不如還也니이다
하야 自焚하다 高祖入京師하니 延朗等六人 皆除名爲民하다
延朗與暠竝掌機密하되 延朗專任事하니 諸將當得州者不以功次爲先後하고
納賂多者得善州 少及無賂者得惡州어나 或久而不得이라 由是 人人皆怨하다
暠心患之而不能爭也 但日飽食高枕而已 每延朗議事 則垂頭陽睡不省하다
及晉兵入하야 延朗以一騎走南山하야 過其家할새 指而嘆曰 吾積錢三十萬于此하니 不知何人取之오하더니 遂爲追兵所殺하다
晉高祖聞暠常不與延朗事하고 哀之 後復以爲將이러니 歲餘卒하다 專美事晉爲大理卿이러니 中卒하다
嗚呼 禍福成敗之理 可不戒哉 張濛神言驗矣 然焉知其不爲禍也리오
予之所記 大扺如此하니 覽者可以深思焉이니라 廢帝之起 所與圖議者 此五六人而已
考其逆順之理하면 雖有智者爲之謀라도 未必能不敗어든 況如此五六人者哉 故幷述以附延朗하야 見其終始之際云이라


04. 劉延朗傳記
劉延朗 등 다섯 사람이 後唐 廢帝擁衛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얼마 있다가 마침내 폐제와 함께 모두 패망하였다. 내용 중에 張濛을 섬긴 일에 가탁한 부분은 더욱 어리석다.
歐陽公이 그 일을 명쾌하게 서술하였으니 鑑戒가 될 만하다. 내가 그래서 수록하여 드러낸다.
劉延朗宋州 虞城 사람이다. 처음에 廢帝鳳翔에서 起兵할 때 그와 일을 함께한 자가 다섯 사람이니 節度判官 韓昭胤, 掌書記 李專美, 牙將 宋審虔, 客將 房暠이고,
劉延朗孔目官이었다. 처음에 愍帝가 즉위하였을 때 폐제를 옮겨 北京留守로 삼았는데 詔書를 내리지 않고 供奉官 趙處愿을 보내 폐제에게 길에 오르라고 재촉하였다.
폐제가 疑惑하고서 한소윤 등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한소윤 등이 모두 폐제에게 반란하기를 권하였다. 이로부터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이 다섯 사람이 의논하였다.
방고는 鬼神巫祝을 특히 좋아하였는데 맹인 張濛이 자칭 太白山神을 섬긴다고 하니 이 北魏 사람 崔浩였다.
그가 吉凶을 예언한 것이 적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방고가 평소 그를 믿었다. 방고가 일찍이 장몽을 이끌고 가서 폐제를 보게 하자 폐제가 그의 말소리를 듣고 놀라 말하기를 “이자는 사람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방고가 장몽을 시켜서 에게 묻자 이 장몽에게 말을 전하기를 “세 구슬은 한 구슬로 합쳐지고 驢馬는 몰 사람이 없다. 歲月甲庚午이고 中興戊己土이다.”라고 하였다.
방고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 장몽에게 물으니, 장몽이 말하기를 “의 말씀이 이와 같으니 나는 전할 수 있을 뿐이지 해석하지는 못한다.”라고 하였다. 폐제가 곧바로 장몽을 館驛巡官으로 삼았다.
廢帝가 반란하고자 했으나 병사가 적은 데다 양식이 부족한지라 이로 인해 몹시 두려워서 房暠를 보내 張濛에게 묻자, 장몽이 의 말을 전하기를 “은 응당 天下를 소유하게 될 것이니 근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반란을 결정하고 李專美에게 檄書를 만들게 하니, 거기에 “朱弘昭馮贇明宗이 병든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서 秦王을 죽이고 愍帝를 세웠다.
민제가 나이가 어려 小人政事를 농단하면서 骨肉을 이간시키니 장차 朝廷에 죄를 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신을 보내 각 에 말을 달려 고하니 모두 호응하지 않았으나,
隴州防禦使 相里金만이 자신의 判官 薛文遇를 보내 일을 논의하게 한지라 폐제가 설문우를 얻고 크게 기뻐하였다. 한편 劉延朗城中의 백성들의 재물을 거두어다가 군대에 지급하였다.
王思同이 각 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鳳翔을 포위하니 폐제가 두려워서 다시 방고를 보내 에게 물으니, 이 말하기를 “의 군대가 적은데 동쪽의 군대가 오니 왕을 맞이하려 해서이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동쪽의 군대가 과연 반란하고서 폐제에게 투항하였다.
폐제가 京師에 들어가 즉위한 날에 명종의 靈柩 앞에서 冊書를 받으니, 그 책서에 “應順 元年 歲次 甲午年 4 庚午日 초하루”라고 하였다.
폐제가 방고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장몽이 전한 의 말이 어찌 靈驗하지 않은가?”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방고가 더욱 총애와 신뢰를 받아 오로지 巫祝으로 정사를 행하였다.
廢帝가 즉위한 뒤에 韓昭胤左諫議大夫 端明殿學士로 삼고, 李專美比部郞中 樞密院直學士로 삼고, 宋審虔皇城使로 삼고, 房暠宣徽北院使로 삼고, 劉延朗莊宅使로 삼았다.
오래 뒤에 한소윤과 방고를 樞密使로 삼고, 유연랑을 樞密副使로 삼고, 송심건을 侍衛步軍都指揮使로 삼고, 설문우 역시 職方郞中 樞密院直學士로 삼았다.
이로부터 송심건은 군대를 통솔하고, 이전미와 설문우는 계책 세우는 일을 주관하고, 한소윤‧방고 및 유연랑은 機務를 관장하였다.
당초에 廢帝 高祖(石敬瑭)와 함께 明宗을 섬기면서 마음속으로 서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폐제가 京師에 들어가 즉위한 뒤에 진 고조가 어쩔 수 없이 나아와 朝見하였으되 마음으로는 자못 스스로 의심하여 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하려 하였으나 또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이에 거짓으로 병을 앓는 척하며 온몸에 뜸을 떠 화상을 입고서 폐제가 불쌍히 여겨 보내주기를 바랐다. 劉延朗 등이 石敬瑭은 경사에 체류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는데,
韓昭胤李專美가 말하기를 “석경당과 趙延壽 모두 公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석경당 혼자만 경사에 체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이에 다시 고조에게 河東節度使를 제수하여 보냈다.
이때에 契丹이 자주 북쪽 변경에 침략하거늘 고조를 大同軍振武軍威塞軍彰國軍 등의 蕃漢馬步軍都總管으로 삼아 忻州에 주둔시켰다.
그런데 주둔하던 군대가 돌연 變亂을 일으켜 고조를 擁衛하고 萬歲를 부르니 고조가 두려워하여 30여 인을 참수한 뒤에야 그쳤다. 이에 폐제가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이때에 高祖가 정예 군대를 모두 掌握하여 북방에 있는지라 건초와 양식을 운송하느라 遠近에 있는 사람들이 시달리고 피폐해졌다.
廢帝劉延朗 등과 함께 밤낮으로 계책을 논의하였고 李專美薛文遇中興殿에서 번갈아 숙직하니 폐제가 召見하고 諮問하면서 항상 한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이때에 고조의 아우 石重胤皇城副使로 있고 石氏 公主의 모친 曹太后가 궁중에 있었기에, 이를 통해 폐제의 言動을 엿보아 고조에게 보고하니 고조가 더욱 스스로 위험하다고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매번 폐제가 사신을 보내 군대를 위로하기만 하면 곧장 거짓으로 병을 앓느라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는 척하면서 이를 통해 여러 번 總管에서 해직되기를 청하며 폐제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때에 폐제의 모친 魏氏宣憲皇太后追封되니 陵墓太原에 있었는데 有司寢宮을 세우자고 건의하였다. 고조는 능묘가 백성의 墳墓와 서로 섞여 있으니 침궁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다.
폐제는 고조가 백성의 분묘를 훼손하여 백성들이 국가에 원한을 품게 하려 한다고 의심한지라 폐제가 이로 인해 노하여 고조를 총관에서 파직하고 鄆州로 옮겨 鎭守하게 하였다.
그런데 劉延朗 등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司天監 趙延義 역시 天象이 법도를 잃었으니 安靜하여 災殃을 그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 일이 결국 무산되었다.
한 달 남짓 지난 뒤 薛文遇가 혼자 숙직할 때 廢帝가 밤에 그를 불러 石敬瑭을 파면하는 일을 말하니, 설문우가 아뢰기를 “이 듣건대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이루지 못한다고 하니 國家大事陛下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게다가 석경당은 옮겨도 반란할 것이고 옮기지 않아도 반란할 것입니다. 늦든 빠르든 〈시기의 문제일〉 뿐이니 일이 나기 전에 그를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폐제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術者이 올해 어진 補佐 한 사람을 얻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아마도 그 사람인 듯하구려.”라고 하고,
이에 설문우에게 除目을 직접 쓰게 하고 한밤중에 學士院에 내려 詔書를 쓰게 하였다. 이튿날 조서를 선포하자 文武 兩班이 모두 大驚失色하였다. 대엿새가 지난 뒤에 석경당이 배반하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석경당이 上書하여 “황제는 明宗의 친아들이 아니니 許王 李從益이 서열에 따라 응당 황제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폐제가 이 글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수 찢어 내던지고는 學士 馬胤孫을 불러 答詔를 쓰게 하며 말하기를 “악독한 말을 가지고 그를 꾸짖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劉延朗 등이 廢帝에게 親征하기를 청하거늘 폐제가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늘 石敬瑭의 일을 말하는 것을 싫어하여, 매번 사람들에게 경고하기를 “너희는 石郞의 일을 말하여 나의 心膽이 땅에 떨어지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出征하려 하지 않았는데 유연랑 등이 누차 황제를 다그치고서야 비로소 출정하였다. 懷州에 이르러 폐제가 밤에 李崧을 불러 計策을 물었다.
薛文遇가 이를 모르고 뒤따라 이르렀는데 폐제가 그를 보고 안색이 변하자 이숭이 그의 발을 밟고 나서야 설문우가 비로소 나갔다.
폐제가 말하기를 “내가 설문우를 보고 살이 떨려 곧바로 칼을 뽑아 그를 찌르려고 하였다.”라고 하자, 이숭이 말하기를 “설문우는 小人이라 大事를 그르치게 만들고 말았거늘 〈이제 와서〉 그를 찔러 죽인다면 더욱 추한 꼴이 됩니다.”라고 하니 그제야 그만두었다.
이때에 契丹이 이미 석경당을 세워 天子로 삼고 군대를 거느리고 남하하니 폐제가 두렵고 당혹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宋審虔을 보내 騎兵 천 명을 거느리고서 白司馬坡에 이르러 戰場을 답사하게 하였는데, 송심건이 말하기를 “어느 곳인들 전투할 만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비록 전쟁할 땅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이곳에 기꺼이 서 있고자 하겠습니까? 돌아가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폐제는 마침내 돌아와 스스로 焚身하여 자결하였다. 高祖(石敬瑭)가 京師에 들어가니 유연랑 등 여섯 사람이 모두 官籍에서 이름이 삭탈되어 평민이 되었다.
당초에 劉延朗房暠와 함께 機務를 관장하였으되 유연랑이 專權을 행사하니, 장수들 가운데 州官에 임명되어야 할 자들을 공로의 등급에 따라 그 先後를 정하지 않고,
뇌물을 많이 바치는 자가 좋은 를 얻고, 뇌물을 적게 바치거나 아예 바치지 않는 자는 나쁜 를 얻거나 오래 지나도 얻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원망하였다.
방고가 내심 이를 우려하였으나 〈유연랑과〉 다투지 못하고 단지 날마다 배불리 먹고 편히 잠만 잘 뿐이었다. 매번 유연랑이 일을 의논하기만 하면 머리를 떨구며 거짓으로 잠들어 알지 못하는 체하였다.
나라 군대가 쳐들어오게 되자 유연랑이 말 한 마리를 타고 南山으로 내달려 자기 집을 지나갈 적에, 집을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내가 이곳에 30만 을 쌓아두었으니 어떤 사람이 이것을 가져갈지 모르겠구나.”라고 하더니 결국 그는 추격병에게 살해되었다.
高祖는 방고가 항상 유연랑과 일을 함께하지 않은 사실을 듣고 그를 애처롭게 여긴지라 뒤에 다시 그를 장수로 삼았는데 한 해 남짓 지나 하였다. 李專美나라를 섬겨 大理寺卿이 되었는데 開運 연간에 졸하였다.
나라가 일어나려고 할 때에 廢帝韓昭胤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하고 외직으로 보내 河陽節度使에 임명하였는데, 宋審虔薛文遇와 함께 모두 최후가 어떠했는지 알지 못한다.
오호라! 禍福成敗의 이치를 경계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張濛이 전달한 의 말은 영험하였다. 그렇지만 어찌 그것이 가 되지 않을 줄 알았겠는가.
내가 기록한 것은 대체로 이와 같으니 이 글을 보는 자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廢帝가 일어날 때 함께 圖謀한 자들은 이 대여섯 사람일 뿐이었다.
그가 事理를 거슬렀는지 따랐는지 그 이치를 고찰하면 비록 지혜로운 자가 그를 위해 계책을 내더라도 꼭 패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데 하물며 이와 같은 대여섯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아울러 서술하여 〈劉延朗傳〉에 붙여 그 사실의 顚末을 드러낸다.


역주
역주1 劉延朗傳 : 劉延朗(?~936? 宋州 虞城 사람이다. 유연랑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69 〈唐書 第45 列傳21〉과 ≪新五代史≫ 卷27 〈唐臣傳 第15〉에 실려 있다.
歐陽脩는 ≪구오대사≫에 220여 자 정도로 수록되어 있던 유연랑의 傳記를 1천 4백여 자 분량으로 대폭 늘려 기술하였다.
≪구오대사≫에서는 유연랑의 官歷을 간단하게 나열한 뒤 유연랑이 뇌물을 받은 사실과 後晉 高祖 石敬瑭이 쳐들어올 때 그가 집에 둔 재산을 아까워했던 말을 수록하여 그의 愚暗함을 비판하였다.
이에 반해 구양수는 鳳翔에서부터 廢帝를 섬겼던 韓昭胤‧李專美‧宋審虔‧房暠를 함께 서술하여 이들 여섯 사람의 君臣이 벌이는 반란 및 뒤에 다시 석경당의 반란을 당할 때까지의 顚末을 자세히 소개함으로써, 이 글이 단순히 유연랑의 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폐제와 그 측근들이 左衝右突하며 벌이는 한 편의 寸劇을 彷佛하게 하였다.
구양수는 폐제를 비판의 중심에 놓고 글을 전개하는데, 鬼神을 섬기는 盲人 張濛의 虛誕한 말로 大事를 결단하는 폐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도입부의 敍事는 폐제의 용렬함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면서 뒤에 벌어지는 일들의 張本이 되는 부분이다.
이후 폐제가 유연랑을 비롯한 측근들에게 重任을 맡겨 정사를 처리한 사실을 말한 뒤 석경당의 반란과 이에 대한 폐제의 대응 과정에 글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여 서술하였다.
폐제는 석경당을 의심하면서도 그에게 거란을 막는 重責을 맡겼다. 그리고 폐제가 愍帝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함께하였던 薛文遇를 重用하여 그의 의견에 따라 대비 없이 석경당을 파면한 뒤 석경당이 막상 배반하자 한동안 정벌을 주저하는 등 시종일관 우유부단하였다. 이러한 폐제의 용렬한 행태에 대한 묘사를 통해 구양수는 당시 정치의 亂脈相을 효과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유연랑이 後唐 정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이는 ≪구오대사≫의 간결한 서술과 비교해볼 때, 구양수가 이처럼 유연랑의 주변 인물들을 충분히 다루면서 당시의 정국을 해부하여 입체적으로 서술하는 전략을 구사한 데에는 다분히 의도한 바가 있어서일 것이다.
이는 구양수의 史評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는바,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 몇몇의 측근들로만 정책을 결정하는 일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유연랑의 전기를 이렇게 구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능력 있는 인재를 다 불러 모아 논의해도 부족할 판에 폐제가 측근 몇몇과만 亂局을 풀어가려 한 행태를 구양수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을 통해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역주2 崔浩 : 381~450. 北魏 太武帝 世祖의 명신으로, 자는 伯淵이고 淸河郡 武城 사람이다. 명문 漢人 가문 출신이며 431년에는 한인 사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인 司徒에 임명되었다. 智謀가 많아서 軍國大事가 있을 적마다 태무제는 반드시 그에게 물었다. 뒤에 國史를 수찬하면서 북위의 선조가 개와 교미하여 拓跋氏를 낳았다는 전설을 피하지 않고 써넣었다가 태무제의 눈에 거슬려 처형되었다. 뒤에 태무제는 최호를 죽인 일을 후회하였다.(≪北史≫ 卷21 〈崔浩列傳〉)
역주3 秦王 : 後唐 明宗 李嗣源의 둘째 아들 李從榮이다. 933년 명종이 병에 걸리자 宋王 李從厚, 즉 후일의 愍帝가 제위를 계승할 것을 염려하여 명종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할 목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궁에 들어왔지만 실패하고 살해당하였다. 명종은 아들이 자신을 살해하려고 하였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결국 병이 깊어져 세상을 떠났다.
역주4 愍帝 : 李從厚(914~934, 어릴 적 이름은 菩薩奴이다. 後唐의 세 번째 황제로, 明宗 李嗣源의 셋째 아들이고 生母는 昭懿皇後 夏氏이다. 어려서부터 이사원의 총애가 깊어 河南尹‧宣武節度使‧河東節度使‧成德節度使‧天雄節度使 등을 역임하고 中書令를 더하고 宋王에 봉해졌다. 長興 4년(933) 洛陽으로 소환되어 이사원의 靈柩 앞에서 즉위하였다. 應順 元年(934) 潞王 李從珂가 鳳翔에서 반란을 일으켜 洛陽을 함락하여 稱帝하고서 이종후를 폐위하여 鄂王으로 降封하였다. 이종후는 衛州로 도망갔다가 시해당하였다. 재위 기간은 5개월이고 향년 21세였다.
역주5 冊曰……四月庚午朔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薛居正의 ≪舊五代史≫ 〈本紀(末帝紀)〉에 ‘冊書에 「應順 元年 歲次 甲午年(934) 4月 庚午日이 초하루인 6일 乙亥日」이라고 하였다.’로 되어 있는데, 古文에서 날짜를 일컬을 때에는 대부분 초하루의 干支를 붙이는데 지금 ‘六日乙亥’ 네 글자를 刪去하여 庚午日이 卽位한 날짜라고 의심하게 하였으니 또한 〈본기〉와 어긋나지 않겠는가? 설거정의 ≪구오대사≫에는 즉위한 이후에 또한 ‘이때에 이르러 末帝가 책서를 받으니 그 책서에 「應順 元年 歲次 甲午年 4月 庚午日이 초하루이다.」로 되어 있었다. 末帝가 房暠를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張濛의 神이 말한 甲庚午가 또한 奇異하지 않은가?」라고 하였다.’로 되어 있으니 대체로 윗부분에 이미 책서를 全載하였으므로 後人으로 하여금 迷惑되게 하지 않은 것이다.[按薛史本紀 冊書曰 維應順元年歲次甲午四月庚午朔六日乙亥 古文稱日 多繫月朔 今刪去六日乙亥四字 將疑庚午爲卽位日 不且與本紀刺謬耶 薛史卽位後 亦作至是帝受冊 冊曰 維應順元年歲次甲午四月庚午朔 帝迴視房暠曰 張濛神言甲庚午不亦異乎 蓋上已全載冊書 故不令後人迷惑也]”라고 하였다.
역주6 應順 : 後唐 愍帝의 연호(934.
역주7 (宿)[信] : 저본에는 ‘宿’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信’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 延朗爲莊宅使 : ≪舊五代史≫에는 “淸泰 초년에 宣徽北院使에 제수되었다.[淸泰初 除宣徽北院使]”라고 하였다.(≪舊五代史考異≫)
역주9 初帝與晉高祖……高祖不得已來朝 : ≪五代史纂誤≫ 卷中에 “지금 살펴보건대, 〈唐愍帝紀〉 및 〈晉高祖紀〉, 〈漢高祖紀〉, 〈王弘贄傳〉, 〈朱弘昭傳〉에 의하면 後晉 高祖가 入朝한 일은 다음과 같다. 처음 應順 元年(934) 正月 중에 孟漢瓊이 魏州에서 와서 조정에 돌아오자 마침내 范延光을 成德에서 옮겨 魏州를 鎭守하게 하고 石敬瑭을 河東에서 成德으로 가게 하고 潞王 李從珂를 鳳翔에서 옮겨 河東으로 가게 함을 인하여 2월에 李從珂가 반란하였다. 3월 戊辰日에 愍帝가 나가 衛州로 가자 마침내 石敬瑭과 衛州의 동쪽에서 서로 만났다. 그런데 이때 석경당이 이미 成德軍節度使로 自稱하였으니 이는 명을 받아 鎭을 옮긴 뒤에 입조하고 邂逅하고서 민제와 서로 만난 것이다. 이윽고 석경당이 민제의 從者들을 모두 죽이고 衛州에 민제를 抑留하고서 직접 입조하였는데 때마침 廢帝가 洛陽에 들어가 卽位함을 만나 머무른 것일 뿐이지 폐제가 이미 들어가 즉위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와서 朝見한 것이 아니니 이는 매우 그 사실이 아니다.[今按唐愍帝及晉高祖漢高祖紀王弘贄朱弘昭傳 其高祖入朝事 始因應順元年正月中 孟漢瓊自魏來還朝 遂徙范延光自成德鎭魏 石敬瑭自河東往成德 而徙潞王從珂自鳳翔往河東 二月從珂反 三月戊辰 愍帝出如衛州 遂與敬瑭相遇于衛州之東 是時敬瑭已自稱成德軍節度使 則是受命移鎭後 入朝邂逅 與愍帝相遇也 旣而敬瑭盡殺愍帝從者 留之衛州 而身自入朝 適會廢帝入洛卽位而留駐耳 非爲廢帝旣入立 不得已而來朝 此甚非其實也]”라고 하였다.
역주10 : 사고전서본과 ≪新五代史≫에는 ‘家’로 되어 있다.
역주11 司天趙延義 : ≪五代史纂誤≫ 卷中에 “지금 살펴보건대, 〈雜傳〉에는 바로 ‘趙延乂’이다.[今按雜傳 乃是趙延乂也]”라고 하였으나, ≪新五代史≫를 살펴보면, 〈雜傳〉에도 ‘趙延義’로 되어 있고, ≪舊五代史≫에서만 ‘趙延乂’로 되어 있다.
역주12 作舍道邊 三年不成 : ≪後漢書≫ 卷35 〈曹褒列傳〉에서 “속담에 이르기를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이루지 못하고, 禮를 따지는 사람이 모인 것을 이름하여 聚訟이라 한다.[作舍道邊 三年不成 會禮之家 名爲聚訟]’라고 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13 除目 : 임금이 除授한 관리들의 이름을 적은 목록을 말한다.
역주14 居五六日 敬瑭以反聞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文忠公 歐陽脩의 〈신하 되기 어려움에 대한 論〉에 ‘엿새 지난 뒤에 石敬瑭이 배반하였다고 알려졌다.’로 되어 있고, 薛居正의 ≪舊五代史≫ 〈本紀〉에는 ‘6, 7일이 지나 석경당이 상소를 올렸다.……’로 되어 있고, ≪資治通鑑≫에는 ‘辛卯日에 석경당을 天平軍節度使로 삼았는데 戊戌日에 昭義節度使 皇甫立이 석경당이 배반하였다고 上奏하였다.’로 되어 있으니, 조서를 내린 辛卯日을 제외하고 戊戌日까지 딱 이레이다. 여기에 대엿새로 되어 있는 것은 착오이다.[按文忠公爲臣難論作後六日而敬瑭反聞 薛史本紀作居六七日敬瑭上章云云 通鑑作辛卯以敬瑭爲天平軍節度使 戊戌昭義節度使皇甫立奏敬瑭反 除辛卯宣制日 至戊戌恰七日 是作五六日誤矣]”라고 하였다.
역주15 敬瑭上書……宜以惡語詆之 : ≪五代史纂誤≫ 卷中에 “지금 살펴보건대, 〈廢帝紀〉에는 ‘淸泰 3년(936) 3월 丙午日에 翰林學士 馬胤孫을 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았는데, 河東節度使 石敬瑭이 배반하자 여름 5월 乙卯日에 建雄軍節度使 張敬達을 太原四面都招討使로 삼았다.’고 하였고, 〈晉高祖紀〉에는 ‘天福 元年(936 바로 淸泰 3년이다. 5월에 天平으로 옮겨 鎭守하게 하니 석경당이 과연 명을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지금 만약 〈폐제기〉를 놓고 말한다면, 마윤손이 3월 병오일에 재상이 되었는데도 석경당이 이어 배반하고 5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장경달에게 그를 토벌하라고 명한즉 석경당이 배반한 뒤에 마윤손은 여전히 學士가 되어 答詔를 起草한 것이다. 세 說을 參攷하여 보면 상호 부합되지 않으니 이는 반드시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이다.[今按廢帝紀 淸泰三年三月丙午 翰林學士馬胤孫爲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河東節度使石敬瑭反 夏五月乙卯 建雄軍節度使張敬達爲太原四面都招討使 晉高祖紀云 天福元年 卽淸泰三年也 五月徙鎭天平 敬瑭果不受命 今若以廢帝紀言之 則馬胤孫以三月丙午爲相 而敬瑭繼反 至五月 乃命張敬達討之 則敬瑭反後 胤孫尙爲學士 草答詔 三說參攷 互不相合 是必有誤者矣]”라고 하였다.
역주16 懷州 : 治所는 지금의 河南省 沁陽에 있었다.
역주17 是時……帝遂還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廢帝紀〉에 ‘9월 戊申日에 河陽에 갔다가 閏11월 丁丑日에 하양에서 이르렀다.’로 되어 있는데, 白司馬坡로 말하면 바로 洛陽의 북쪽, 河陽의 남쪽에 있다. 그래서 薛居正의 ≪舊五代史≫ 〈唐紀〉에 戰場을 답사한 날짜를 己卯日에 수록하였으니 廢帝가 낙양에 돌아온 뒤의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여기에서는 ‘폐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고 한 구절 뒤에 바로 ‘백사마파에 이르렀다.’는 구절을 잇고 ‘폐제가 마침내 돌아왔다.’는 구절로 마쳐서 폐제가 이때 비로소 懷州에서 돌아온 것처럼 서술한 것은 엉성하다.[謹案廢帝紀作九月戊申如河陽 閏十一月丁丑至自河陽 若白司馬坡 乃在洛陽之北河陽之南 故薛史唐紀于踏戰地之日 係之己卯 明是帝還洛陽後事 此于帝不知所之下 便接至白司馬坡 而以帝遂還之語終之 則似帝此時始自懷州還者 疏矣]”라고 하였고, ‘白司馬坡’에 대한 주석에 “≪舊唐書≫ 〈蘇珦傳〉에 백사마파가 있는데 바로 白司馬坂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8 開運 : 後晉 出帝의 연호(944~947.
역주19 廢帝以昭胤爲中書侍郞……皆不知所終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薛居正의 ≪舊五代史≫ 〈唐紀〉에 韓昭胤이 들어와 재상이 된 것은 淸泰 2년 4월이고 그가 파직된 것은 12월에 있었는데 이 사실을 〈帝紀〉에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니 漏落이다. 한소윤의 파직을 설거정의 ≪舊五代史≫에서는 河中節度使에 充任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河陽이라고 하였다. 상고해보건대, 설거정의 ≪구오대사≫에서 청태 2년 9월에 宋審虔을 河陽節度使로 삼고 3년 5월에 하양절도사 송심건을 河東節度使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한소윤이 재상에서 파직되고 鎭으로 나간 것은 또한 하양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본래 河中에 있어야 되는 것이다. 또 설거정의 ≪구오대사≫ 〈晉紀〉에 ‘天福 元年 閏11월 辛巳日에 唐 末帝가 그 皇族과 親將 송심건 등을 모아놓고 스스로 불을 붙여 자살하였다.’고 하고, ‘4년 4월 丙戌日에 한소윤을 兵部尙書로 삼았는데 致仕하였다.’고 하고, 〈周紀〉에 ‘廣順 元年 3월 丙子日에 兵部尙書로 致仕한 한소윤을 尙書右僕射로 삼았는데 이전처럼 致仕하였다.’고 하고, ‘顯德 元年 9월 己亥日에 右僕射로 致仕한 한소윤을 太子太保로 삼았는데 致仕하였다.’고 하였으니, 한소윤과 송심건은 모두 최후가 어떠했는지 알지 못한 자들이 아니다.[謹案薛史唐紀 韓昭(允)[胤]入相 在淸泰二年四月 其罷在十二月 此于帝紀 皆不書 漏也 昭(允)[胤]之罷 薛史云 充河中節度使 而此云 河陽 攷薛史淸泰二年九月 以宋審虔爲河陽節度使 三年五月 以河陽節度使宋審虔爲河東節度使 然則當昭(允)[胤]罷相出鎭 不容亦在河陽 而固當在河中矣 又薛史晉紀 天福元年閏十一月辛巳 唐末帝聚其族與親將宋審虔等 自焚而死 四年四月丙戌 以韓昭(允)[胤]爲兵部尙書 致仕 周紀廣順元年三月丙子 以兵部尙書致仕韓昭(允)[胤]爲尙書右僕射 依前致仕 顯德元年九月己亥 以右僕射致仕韓昭(允)[胤]爲太子太保 致仕 則昭(允)[胤]與審虔 俱非不知所終者也]”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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