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延朗等五人이 擁廢帝爲亂이러니 已而오 遂及與廢帝俱亡이라 中所托張濛事神一節은 尤爲昏騃라
歐公序次其事明爽하니 可爲鑒戒라 予故錄而出之하니라
劉延朗은 宋州虞城人也라 初廢帝起於鳳翔할새 與共事者五人이니 節度判官韓昭胤, 掌書記李專美, 牙將宋審虔, 客將房暠요
而延朗爲孔目官이라 初에 愍帝卽位에 徙廢帝爲北京留守어늘 不降制書하고 遣供奉官趙處愿하야 促帝上道라
帝疑惑하야 召昭胤等計議어늘 昭胤等皆勸帝反이라 由是로 事無大小히 皆此五人謀之라
而暠又喜鬼神巫祝之說
이러니 有瞽者張濛
이 自言事太白山神
이라하니 神
은 魏
也
라
其言吉凶이 無不中하니 暠素信之라 嘗引濛見한대 帝聞其語聲하고 驚曰 此는 非人臣也라하다
暠使濛問於神한대 神傳語曰 三珠併一珠요 驢馬沒人驅라 歲月甲庚午요 中興戊己土라하다
暠不曉其義하야 使問濛하니 濛曰 神言如此하니 我能傳之요 不能解也라하다 帝卽以濛爲館驛巡官하다
帝將反이로되 而兵少요 又乏食이라 由此甚懼하야 使暠問濛한대 濛傳神語曰 王當有天下니 可無憂라하다
於是決反
하고 使專美作檄書
하니 言朱弘昭馮贇
이 幸明宗病
하야 殺
而立
라
帝年少하야 小人用事하야 離間骨肉하니 將問罪於朝라하다 遣使者馳告諸鎭하니 皆不應이로되
獨隴州防禦使相里金이 遣其判官薛文遇計事라 帝得文遇하고 大喜라 而延朗調率城中民財以給軍하다
王思同率諸鎭兵圍鳳翔하니 廢帝懼하야 又遣暠問神하니 神曰 王兵少에 東兵來하니 所以迎王也라하야늘 已而오 東兵果叛降于帝하다
帝入京師
하야 卽位之日
에 受冊明宗柩前
하니 元年歲次甲午四月庚午朔
이라하다
帝回顧暠曰 張濛神言
이 豈不驗哉
아하니 由是
로 暠益見親
하야 而專以巫祝用事
하다
帝旣立
에 以昭胤爲左諫議大夫端明殿學士
하고 專美爲比部郞中樞密院直學士
하고 審虔爲皇城使
하고 暠爲宣徽北院使
하고 하다
久之에 以昭胤暠爲樞密使하고 延朗爲副使하고 審虔爲侍衛步軍都指揮使하고 而薛文遇亦爲職方郞中樞密院直學士하다
由是로 審虔將兵하고 專美文遇主謀議하고 而昭胤暠及延朗掌機密이라
乃陽爲羸疾하야 灸灼滿身하야 冀帝憐而遣之하다 延朗等多言敬瑭可留京師라하야늘
昭胤專美曰 敬瑭與趙延壽皆尙唐公主하니 不可獨留라하니 乃復授高祖河東而遣之라
是時에 契丹數寇北邊이어늘 以高祖爲大同振武威塞彰國等軍蕃漢馬步軍都總管하야 屯于忻州하다
而屯兵忽變하야 擁高祖呼萬歲하니 高祖懼하야 斬三十餘人而後止라 於是帝益疑之하다
是時에 高祖悉握精兵在北이라 饋運芻糧에 遠近勞弊라
帝與延朗等으로 日夕謀議하고 而專美文遇가 迭宿中興殿廬하니 召見訪問하야 常至夜分而罷하다
是時에 高祖弟重胤爲皇城副使하고 而石氏公主母曹太后居中일새 因得伺帝動靜言語하야 以報高祖하니 高祖益自危懼하다
每帝遣使者勞軍이면 卽陽爲羸疾不自堪하야 因數求解總管以探帝心이라
是時
에 帝母魏氏追封宣憲皇太后
하니 而墓在太原
이러니 有司議立寢宮
이라 高祖建言陵與民
墓相雜
하니 不可立宮
이라하다
帝疑高祖欲毁民墓하야 爲國取怨이라 帝由此發怒하야 罷高祖總管하고 徙鎭鄆州어늘
延朗等多言不可
하고 而
亦言天象失度
하니 宜安靜以弭災
라한대 其事遂止
하다
後月餘
에 文遇獨直
할새 帝夜召之
하야 語罷敬瑭事
하니 文遇曰 臣聞
이라호니 國家之事
는 斷在陛下
라
且敬瑭은 徙亦反이요 不徙亦反이라 遲速爾니 不如先事圖之라하다
帝大喜曰 術者言朕今年當得一賢佐하야 以定天下라한대 卿其是邪아하고
乃令文遇手書
하고 夜半下學士院草制
하다 明日宣制
에 文武兩班皆失色
이라 하다
延朗等請帝親征커늘 帝心憂懼하야 常惡言敬瑭事하야 每戒人曰 爾無說石郞하야 令我心膽墮地하라하다
由此不欲行
이어늘 而延朗等屢迫之
에야 乃行
하다 至
하야 帝夜召李崧
하야 問以計策
하다
文遇不知而繼至어늘 帝見之色變하니 崧躡其足에야 文遇乃出이라
帝曰 我見文遇肉顫하야 遽欲抽刀刺之라한대 崧曰 文遇는 小人이라 致誤大事어늘 刺之益醜라하니 乃已하다
是時에 契丹已立敬瑭爲天子하고 以兵而南하니 帝惶惑하야 不知所之라
遣審虔將千騎하야 至白司馬坡하야 踏戰地한대 審虔曰 何地不堪戰이리오마는 雖有其地나 何人肯立于此리오 不如還也니이다
하야 自焚
하다 高祖入京師
하니 延朗等六人
이 皆除名爲民
하다
初에 延朗與暠竝掌機密하되 延朗專任事하니 諸將當得州者不以功次爲先後하고
納賂多者得善州요 少及無賂者得惡州어나 或久而不得이라 由是로 人人皆怨하다
暠心患之而不能爭也요 但日飽食高枕而已라 每延朗議事면 則垂頭陽睡不省하다
及晉兵入하야 延朗以一騎走南山하야 過其家할새 指而嘆曰 吾積錢三十萬于此하니 不知何人取之오하더니 遂爲追兵所殺하다
晉高祖聞暠常不與延朗事
하고 哀之
라 後復以爲將
이러니 歲餘卒
하다 專美事晉爲大理卿
이러니 中卒
하다
嗚呼라 禍福成敗之理를 可不戒哉아 張濛神言驗矣라 然焉知其不爲禍也리오
予之所記는 大扺如此하니 覽者可以深思焉이니라 廢帝之起에 所與圖議者는 此五六人而已라
考其逆順之理하면 雖有智者爲之謀라도 未必能不敗어든 況如此五六人者哉아 故幷述以附延朗하야 見其終始之際云이라
劉延朗 등 다섯 사람이 後唐 廢帝를 擁衛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얼마 있다가 마침내 폐제와 함께 모두 패망하였다. 내용 중에 張濛이 神을 섬긴 일에 가탁한 부분은 더욱 어리석다.
歐陽公이 그 일을 명쾌하게 서술하였으니 鑑戒가 될 만하다. 내가 그래서 수록하여 드러낸다.
劉延朗은 宋州 虞城 사람이다. 처음에 唐 廢帝가 鳳翔에서 起兵할 때 그와 일을 함께한 자가 다섯 사람이니 節度判官 韓昭胤, 掌書記 李專美, 牙將 宋審虔, 客將 房暠이고,
劉延朗은 孔目官이었다. 처음에 唐 愍帝가 즉위하였을 때 폐제를 옮겨 北京留守로 삼았는데 詔書를 내리지 않고 供奉官 趙處愿을 보내 폐제에게 길에 오르라고 재촉하였다.
폐제가 疑惑하고서 한소윤 등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한소윤 등이 모두 폐제에게 반란하기를 권하였다. 이로부터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이 다섯 사람이 의논하였다.
방고는 鬼神과 巫祝의 說을 특히 좋아하였는데 맹인 張濛이 자칭 太白山神을 섬긴다고 하니 이 神은 北魏 사람 崔浩였다.
그가 吉凶을 예언한 것이 적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방고가 평소 그를 믿었다. 방고가 일찍이 장몽을 이끌고 가서 폐제를 보게 하자 폐제가 그의 말소리를 듣고 놀라 말하기를 “이자는 사람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방고가 장몽을 시켜서 神에게 묻자 神이 장몽에게 말을 전하기를 “세 구슬은 한 구슬로 합쳐지고 驢馬는 몰 사람이 없다. 歲月은 甲庚午이고 中興은 戊己土이다.”라고 하였다.
방고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 장몽에게 물으니, 장몽이 말하기를 “神의 말씀이 이와 같으니 나는 전할 수 있을 뿐이지 해석하지는 못한다.”라고 하였다. 폐제가 곧바로 장몽을 館驛巡官으로 삼았다.
廢帝가 반란하고자 했으나 병사가 적은 데다 양식이 부족한지라 이로 인해 몹시 두려워서 房暠를 보내 張濛에게 묻자, 장몽이 神의 말을 전하기를 “王은 응당 天下를 소유하게 될 것이니 근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반란을 결정하고 李專美에게 檄書를 만들게 하니, 거기에 “朱弘昭와 馮贇이 明宗이 병든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서 秦王을 죽이고 愍帝를 세웠다.
민제가 나이가 어려 小人이 政事를 농단하면서 骨肉을 이간시키니 장차 朝廷에 죄를 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신을 보내 각 鎭에 말을 달려 고하니 모두 호응하지 않았으나,
隴州防禦使 相里金만이 자신의 判官 薛文遇를 보내 일을 논의하게 한지라 폐제가 설문우를 얻고 크게 기뻐하였다. 한편 劉延朗은 城中의 백성들의 재물을 거두어다가 군대에 지급하였다.
王思同이 각 鎭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鳳翔을 포위하니 폐제가 두려워서 다시 방고를 보내 神에게 물으니, 神이 말하기를 “王의 군대가 적은데 동쪽의 군대가 오니 왕을 맞이하려 해서이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동쪽의 군대가 과연 반란하고서 폐제에게 투항하였다.
폐제가 京師에 들어가 즉위한 날에 명종의 靈柩 앞에서 冊書를 받으니, 그 책서에 “應順 元年 歲次 甲午年 4月 庚午日 초하루”라고 하였다.
폐제가 방고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장몽이 전한 神의 말이 어찌 靈驗하지 않은가?”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방고가 더욱 총애와 신뢰를 받아 오로지 巫祝으로 정사를 행하였다.
廢帝가 즉위한 뒤에 韓昭胤을 左諫議大夫 端明殿學士로 삼고, 李專美를 比部郞中 樞密院直學士로 삼고, 宋審虔을 皇城使로 삼고, 房暠를 宣徽北院使로 삼고, 劉延朗을 莊宅使로 삼았다.
오래 뒤에 한소윤과 방고를 樞密使로 삼고, 유연랑을 樞密副使로 삼고, 송심건을 侍衛步軍都指揮使로 삼고, 설문우 역시 職方郞中 樞密院直學士로 삼았다.
이로부터 송심건은 군대를 통솔하고, 이전미와 설문우는 계책 세우는 일을 주관하고, 한소윤‧방고 및 유연랑은 機務를 관장하였다.
당초에 廢帝가 晉 高祖(石敬瑭)와 함께 明宗을 섬기면서 마음속으로 서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폐제가 京師에 들어가 즉위한 뒤에 진 고조가 어쩔 수 없이 나아와 朝見하였으되 마음으로는 자못 스스로 의심하여 鎭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하려 하였으나 또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이에 거짓으로 병을 앓는 척하며 온몸에 뜸을 떠 화상을 입고서 폐제가 불쌍히 여겨 보내주기를 바랐다. 劉延朗 등이 石敬瑭은 경사에 체류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는데,
韓昭胤‧李專美가 말하기를 “석경당과 趙延壽 모두 唐의 公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석경당 혼자만 경사에 체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이에 다시 고조에게 河東節度使를 제수하여 보냈다.
이때에 契丹이 자주 북쪽 변경에 침략하거늘 고조를 大同軍‧振武軍‧威塞軍‧彰國軍 등의 蕃漢馬步軍都總管으로 삼아 忻州에 주둔시켰다.
그런데 주둔하던 군대가 돌연 變亂을 일으켜 고조를 擁衛하고 萬歲를 부르니 고조가 두려워하여 30여 인을 참수한 뒤에야 그쳤다. 이에 폐제가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이때에 高祖가 정예 군대를 모두 掌握하여 북방에 있는지라 건초와 양식을 운송하느라 遠近에 있는 사람들이 시달리고 피폐해졌다.
廢帝가 劉延朗 등과 함께 밤낮으로 계책을 논의하였고 李專美‧薛文遇가 中興殿에서 번갈아 숙직하니 폐제가 召見하고 諮問하면서 항상 한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이때에 고조의 아우 石重胤이 皇城副使로 있고 石氏 公主의 모친 曹太后가 궁중에 있었기에, 이를 통해 폐제의 言動을 엿보아 고조에게 보고하니 고조가 더욱 스스로 위험하다고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매번 폐제가 사신을 보내 군대를 위로하기만 하면 곧장 거짓으로 병을 앓느라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는 척하면서 이를 통해 여러 번 總管에서 해직되기를 청하며 폐제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때에 폐제의 모친 魏氏가 宣憲皇太后로 追封되니 陵墓가 太原에 있었는데 有司가 寢宮을 세우자고 건의하였다. 고조는 능묘가 백성의 墳墓와 서로 섞여 있으니 침궁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다.
폐제는 고조가 백성의 분묘를 훼손하여 백성들이 국가에 원한을 품게 하려 한다고 의심한지라 폐제가 이로 인해 노하여 고조를 총관에서 파직하고 鄆州로 옮겨 鎭守하게 하였다.
그런데 劉延朗 등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司天監 趙延義 역시 天象이 법도를 잃었으니 安靜하여 災殃을 그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 일이 결국 무산되었다.
한 달 남짓 지난 뒤 薛文遇가 혼자 숙직할 때 廢帝가 밤에 그를 불러 石敬瑭을 파면하는 일을 말하니, 설문우가 아뢰기를 “臣이 듣건대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이루지 못한다고 하니 國家의 大事는 陛下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게다가 석경당은 옮겨도 반란할 것이고 옮기지 않아도 반란할 것입니다. 늦든 빠르든 〈시기의 문제일〉 뿐이니 일이 나기 전에 그를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폐제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術者가 朕이 올해 어진 補佐 한 사람을 얻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卿이 아마도 그 사람인 듯하구려.”라고 하고,
이에 설문우에게 除目을 직접 쓰게 하고 한밤중에 學士院에 내려 詔書를 쓰게 하였다. 이튿날 조서를 선포하자 文武 兩班이 모두 大驚失色하였다. 대엿새가 지난 뒤에 석경당이 배반하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석경당이 上書하여 “황제는 明宗의 친아들이 아니니 許王 李從益이 서열에 따라 응당 황제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폐제가 이 글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수 찢어 내던지고는 學士 馬胤孫을 불러 答詔를 쓰게 하며 말하기를 “악독한 말을 가지고 그를 꾸짖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劉延朗 등이 廢帝에게 親征하기를 청하거늘 폐제가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늘 石敬瑭의 일을 말하는 것을 싫어하여, 매번 사람들에게 경고하기를 “너희는 石郞의 일을 말하여 나의 心膽이 땅에 떨어지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出征하려 하지 않았는데 유연랑 등이 누차 황제를 다그치고서야 비로소 출정하였다. 懷州에 이르러 폐제가 밤에 李崧을 불러 計策을 물었다.
薛文遇가 이를 모르고 뒤따라 이르렀는데 폐제가 그를 보고 안색이 변하자 이숭이 그의 발을 밟고 나서야 설문우가 비로소 나갔다.
폐제가 말하기를 “내가 설문우를 보고 살이 떨려 곧바로 칼을 뽑아 그를 찌르려고 하였다.”라고 하자, 이숭이 말하기를 “설문우는 小人이라 大事를 그르치게 만들고 말았거늘 〈이제 와서〉 그를 찔러 죽인다면 더욱 추한 꼴이 됩니다.”라고 하니 그제야 그만두었다.
이때에 契丹이 이미 석경당을 세워 天子로 삼고 군대를 거느리고 남하하니 폐제가 두렵고 당혹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宋審虔을 보내 騎兵 천 명을 거느리고서 白司馬坡에 이르러 戰場을 답사하게 하였는데, 송심건이 말하기를 “어느 곳인들 전투할 만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비록 전쟁할 땅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이곳에 기꺼이 서 있고자 하겠습니까? 돌아가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폐제는 마침내 돌아와 스스로 焚身하여 자결하였다. 高祖(石敬瑭)가 京師에 들어가니 유연랑 등 여섯 사람이 모두 官籍에서 이름이 삭탈되어 평민이 되었다.
당초에 劉延朗이 房暠와 함께 機務를 관장하였으되 유연랑이 專權을 행사하니, 장수들 가운데 州官에 임명되어야 할 자들을 공로의 등급에 따라 그 先後를 정하지 않고,
뇌물을 많이 바치는 자가 좋은 州를 얻고, 뇌물을 적게 바치거나 아예 바치지 않는 자는 나쁜 州를 얻거나 오래 지나도 얻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원망하였다.
방고가 내심 이를 우려하였으나 〈유연랑과〉 다투지 못하고 단지 날마다 배불리 먹고 편히 잠만 잘 뿐이었다. 매번 유연랑이 일을 의논하기만 하면 머리를 떨구며 거짓으로 잠들어 알지 못하는 체하였다.
晉나라 군대가 쳐들어오게 되자 유연랑이 말 한 마리를 타고 南山으로 내달려 자기 집을 지나갈 적에, 집을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내가 이곳에 30만 錢을 쌓아두었으니 어떤 사람이 이것을 가져갈지 모르겠구나.”라고 하더니 결국 그는 추격병에게 살해되었다.
晉 高祖는 방고가 항상 유연랑과 일을 함께하지 않은 사실을 듣고 그를 애처롭게 여긴지라 뒤에 다시 그를 장수로 삼았는데 한 해 남짓 지나 卒하였다. 李專美는 晉나라를 섬겨 大理寺卿이 되었는데 開運 연간에 졸하였다.
晉나라가 일어나려고 할 때에 廢帝가 韓昭胤을 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하고 외직으로 보내 河陽節度使에 임명하였는데, 宋審虔‧薛文遇와 함께 모두 최후가 어떠했는지 알지 못한다.
오호라! 禍福과 成敗의 이치를 경계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張濛이 전달한 神의 말은 영험하였다. 그렇지만 어찌 그것이 禍가 되지 않을 줄 알았겠는가.
내가 기록한 것은 대체로 이와 같으니 이 글을 보는 자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廢帝가 일어날 때 함께 圖謀한 자들은 이 대여섯 사람일 뿐이었다.
그가 事理를 거슬렀는지 따랐는지 그 이치를 고찰하면 비록 지혜로운 자가 그를 위해 계책을 내더라도 꼭 패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데 하물며 이와 같은 대여섯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아울러 서술하여 〈劉延朗傳〉에 붙여 그 사실의 顚末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