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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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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康義誠 字信臣이니 三部落人也 以騎射事晉王이러니 莊宗時 爲突騎指揮使하다
從明宗討趙在禮 至魏而軍變 義誠前陳莊宗過失하고 勸明宗南嚮이러라
明宗卽位 遷捧聖指揮使하고 하다 從破朱守殷하야 遷侍衛親軍馬步軍都指揮使하고 領河陽三城節度使하다
出爲山南東道節度使하고 復爲親軍都指揮使하고 領河陽하야 加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秦王從榮素驕하야 自爲河南尹으로 典六軍하야 拜大元帥하니 唐諸大臣 皆懼禍及하야 思自脫이로되 獨義誠心結之하야 遣其子事秦王府하다
明宗病커늘 從榮謀以兵入宮하니 唐大臣朱弘昭馮贇等 皆以爲不可어늘 而義誠獨持兩端이라
從榮已擧兵하야한대 弘昭等入하야 以反白하니 明宗涕泣하야 召義誠하야 使自處置어늘 而義誠卒不出兵이라
馬軍指揮使朱弘實 以兵擊從榮하니 從榮敗走라가 見殺하다
三司使孫岳嘗爲馮贇言從榮必敗之狀하니 義誠聞而不悅이러니 及從榮死하야 義誠始引兵入河南府하야 召岳檢閱從榮家貲하다
岳至 義誠乘亂하야 使人射之하니 岳走至通利坊見殺이어늘 明宗不能詰하다
義誠已殺岳하고 又以從榮故 與弘實有隙이라 愍帝卽位 弘實常以誅從榮功自負어늘 義誠心益不平이라
潞王從珂反鳳翔커늘 王思同率諸鎭兵圍之 興元張虔釗兵叛降從珂하니 思同走하고 諸鎭兵皆潰하다
愍帝大怒하야 謂朱弘昭等曰 朕新卽位 天下事皆出諸公이라
然於事 未有失節이러니 諸公以大計見迫하야 不能獨違일새 事一至此하니 何方轉禍
吾當率左右하야 往迎吾兄하야 遜以位 苟不吾信이면 死其所也라하다
弘昭等惶恐不能對어늘 義誠前曰 西師驚潰 主將怯耳
今京師兵尙多하니 臣請盡將以西하야 扼關而守하야 招集亡散하야 以爲後圖하소서하다
愍帝以爲然하고 幸左藏庫하야 親給將士人絹二十匹錢五千하다 是時 明宗山陵未畢하야 帑藏空虛하다
軍士負物揚言曰 到鳳翔 更請一分이라 朱弘實見軍士無鬪志而義誠盡將以西하고
疑其有二心하야 謂義誠曰 今西師小衂이어늘 而無一騎東者하니 人心可知
不如以見兵守京師以自固 彼雖幸勝이라도 特得虔釗一軍耳 諸鎭之兵在後하니 其敢徑來邪아하니
義誠怒曰 如此言인댄 弘實反矣라하다 弘實曰 公謂誰欲反邪아하니 其聲厲而聞이라
愍帝召兩人訊之하니 兩人爭於前하야 帝不能決이러니 遂斬弘實하고 以義誠爲招討使하야 悉將禁軍以西하다
愍帝奔衛州하다 義誠行至新安하야 降于從珂하다 元年四月 斬于興敎門外하고 夷其族하다
嗚呼 五代爲國 興亡以兵이로되 而其軍制 後世無足稱焉이요 惟侍衛親軍之號 今猶因之而甚重하니 此五代之遺制也
然原其始 起微矣라가 及其至也하야 可謂盛哉인저 當唐之末하야 方鎭之兵多矣
凡一軍有指揮使一人하야 而合一州之諸軍하고 又有馬步軍都指揮使一人하니 蓋其卒伍之長也
自梁以宣武軍建國으로 因其舊制하야 有在京馬步軍都指揮使러니 後唐因之 至明宗時하야 始更爲侍衛親軍馬步軍都指揮使
當是時하야 天子自有六軍諸衛之職하야 六軍有統軍하고 諸衛有將軍하며 而又以大臣宗室一人으로 六軍諸衛事하니 此朝廷大將天子國兵之舊制也
而侍衛親軍者 天子自將之私兵也 推其名號 可知矣 이면 則都指揮使乃其卒伍之都長耳
然自漢周以來 其職益重하야 하야 凡朝廷大事 皆決侍衛獄이라
是時 史弘肇爲都指揮使하야 與宰相樞密使 竝執國政호되 而弘肇尤專任이라가 以至於亡이라
然是時 方鎭各自有兵하야 天子親軍 猶不過京師之兵而已러니 今方鎭名存而實亡하고
六軍諸衛 又益以廢하야 朝廷無大將之職하고 而擧天下內外之兵 皆屬侍衛司矣 則爲都指揮使者 其權豈不益重哉
하고 其後又有殿前都指揮使하니 亦親軍也로되 皆不見其更置之始 今天下之兵 皆分屬此兩司矣


05. 康義誠傳記
康義誠信臣이니 代北 三部落 사람이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晉王(李克用)을 섬겼는데 莊宗 때에 突騎指揮使가 되었다.
明宗을 따라 趙在禮를 토벌하였고 魏州에 이르러 군대가 변란을 일으켰을 때 강의성이 장종의 過失을 앞에 나와 진술하고 明宗에게 남쪽으로 진군할 것을 권유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捧聖指揮使로 승진하고 汾州刺史를 맡았다. 명종을 따라 朱守殷을 물리쳐 侍衛親軍馬步軍都指揮使로 승진하고 河陽三城節度使를 맡았다.
외직으로 나가 山南東道節度使가 되고 다시 親軍都指揮使가 되고 河陽을 맡고서 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였다.
秦王 李從榮이 평소 교만하여 河南尹이 되고 나서부터 六軍을 관장하면서 大元帥에 배수되니 大臣들이 모두 가 미칠까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벗어날 길을 생각하였는데도, 유독 康義誠만은 마음속으로 그와 결탁하고자 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 秦王府를 섬겼다.
明宗이 병이 들자 이종영이 군대를 거느리고 궁궐로 진입할 것을 모의하니 大臣 朱弘昭馮贇 등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는데 강의성만 홀로 두 생각을 가졌다.
이종영이 이미 擧兵하여 天津橋에 이르자 주홍소 등이 궁궐로 들어가 이종영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아뢰니, 명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강의성을 불러 스스로 이 일을 처리하게 하였는데 강의성이 끝내 출병하지 않았다.
馬軍指揮使 朱弘實이 군대를 거느리고 이종영을 공격하니 이종영이 敗走하다가 피살되었다.
三司使 孫岳이 예전에 馮贇에게 李從榮이 반드시 실패하고 말 정황을 말하니 康義誠이 이를 듣고 기뻐하지 않았는데, 이종영이 죽고 나자 강의성이 비로소 군대를 이끌고 河南府로 들어가 손악을 불러 이종영의 家財를 검사하였다.
손악이 이르자 강의성이 난리를 틈타 사람을 시켜 그를 화살로 쏘니 손악이 도망가 通利坊에 이르러 피살되었는데 明宗이 강의성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였다.
강의성은 이미 손악을 죽인 데다 이종영에 대한 일 때문에 朱弘實과 틈이 있었다. 愍帝가 즉위하자 주홍실이 항상 이종영을 誅殺한 공로로 자부하니 강의성이 내심 더욱 불만을 품었다.
潞王 李從珂鳳翔에서 반란하자 王思同이 각 의 군대를 거느리고 포위하였다. 興元 張虔釗의 군대가 반란하여 이종가에게 투항하니 왕사동이 달아나고 각 의 군대가 모두 흩어졌다.
愍帝가 크게 노하여 朱弘昭 등에게 이르기를 “이 막 즉위한 터라 天下의 일이 모두 공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그러나 짐이 형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잘못한 일이 없었는데 공들이 국가의 大計를 구실로 짐을 다그쳐 짐이 혼자 어길 수가 없었기에 일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무슨 방법으로 를 돌릴 수 있겠는가.
짐은 응당 좌우의 신하를 거느리고 우리 형님을 가서 맞이하여 讓位할 것이니 만일 형님이 짐을 믿지 않는다면 짐은 거기서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홍소 등이 황공하여 대답하지 못하고 있거늘 康義誠이 앞에 나와 말하기를 “서쪽의 군대가 놀라 흩어진 것은 主將이 겁을 집어먹어서일 뿐입니다.
지금 京師의 군대가 아직 많으니 신은 청컨대 전부 거느리고 서쪽으로 出征하여 關門을 잡아 지키면서 도망가고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후일을 도모하소서.”라고 하였다.
민제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左藏庫로 가서 將士들에게 인당 비단 20, 5천을 직접 지급하였다. 이때 明宗山陵의 일을 아직 마치지 못하여 국고가 텅 비어 있었다.
군사들이 받은 물건을 짊어지고 크게 말하기를 “鳳翔에 도착하면 다시 一分을 더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朱弘實은 군사들이 투지가 없는데도 강의성이 전부 거느리고 서쪽으로 출정하는 것을 보고,
그가 두 마음이 있는가 의심하여 강의성에게 이르기를 “지금 서쪽의 군대가 조금 패했거늘 騎兵 하나도 동쪽으로 오는 자가 없으니 人心을 알 만합니다.
현재 있는 군대를 가지고 京師를 지키며 굳게 버티는 것만 못하니, 저들이 비록 요행히 이기더라도 다만 張虔釗의 군대 하나만 이기는 데 그칠 뿐입니다. 각 의 군대가 후방에 있으니 그가 감히 곧바로 오겠습니까?”라고 하니,
강의성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 말대로라면 주홍실 당신이 반란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홍실이 말하기를 “은 누구에게 반란하려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그 소리가 사나워 황제에게 들렸다.
민제가 두 사람을 불러 물으니 두 사람이 황제의 면전에서 다투어 황제가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결국 주홍실을 斬首하고 강의성을 招討使로 삼아 禁軍을 모두 거느리고 서쪽으로 출정하게 하였다.
愍帝衛州로 달아났다. 康義誠이 진군하여 新安에 이르러서 李從珂에게 투항하였다. 淸泰 元年(934) 4월에 강의성을 興敎門 밖에서 斬首하고 滅族시켰다.
오호라! 五代 때에 국가는 군대에 의해 興亡이 결정되었는데 그 군사 제도는 후세에 족히 일컬을 만한 것이 없고, 다만 侍衛親軍의 명칭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면서 매우 중시하니 이것이 五代遺制이다.
그렇지만 그 근원을 따져보면 처음에는 미약하였다가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 盛大해졌다고 할 만하다. 나라 말엽이 되자 지방 藩鎭[方鎭]의 군대가 많아졌다.
대개 1指揮使 1을 두고서 1의 각 을 합하고 또 馬步軍都指揮使 1을 두니 이는 부대의 隊長이다.
나라가 宣武軍을 가지고 建國하고부터 그 옛 제도를 인습하여 在京馬步軍都指揮使를 두었는데 後唐이 이 제도를 인습하였고, 明宗(後唐)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쳐 侍衛親軍馬步軍都指揮使로 삼았다.
이때에 天子가 직접 六軍諸衛의 직무를 두어 육군에 統軍을 두고 제위에 將軍을 두는 한편 다시 大臣宗室 1으로 육군‧제위의 일을 관장하게 하니 이것이 조정의 大將, 천자의 國兵의 옛 제도이다.
시위와 친군은 천자가 직접 통솔하는 私兵이었으니 그 명칭을 고찰해보면 알 수가 있다. 천자가 직접 장수가 되면 도지휘사는 바로 그 부대의 대장일 뿐이었다.
그러나 後漢後周 이래로 그 직책이 더욱 중요해져서 후한은 侍衛司獄을 두어 무릇 조정의 大事를 모두 侍衛獄에서 결정하였다.
이때에 史弘肇가 도지휘사로 있으면서 宰相樞密使와 함께 國政을 관장하였으나, 사홍조가 더욱 專權을 행사하다가 멸망하는 데 이르렀다.
俗語에 이르기를 “작은 물을 끊지 않으면 흘러 모여 江河가 되고, 작은 불씨를 끄지 않으면 활활 타오르는 것을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때에는 方鎭이 저마다 자기 군대를 두어 천자의 친군조차도 京師의 군대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지금은 방진이 명칭만 있고 실질은 없으며
육군‧제위도 날로 더욱 폐지되어 조정에 대장이라는 직책이 없고 온 天下 內外의 군대가 모조리 侍衛司에 예속되었으니 도지휘사가 된 자는 그 권세가 어찌 더욱 크지 않겠는가.
친군이라는 명칭은 명종에게서 시작되고 이후 다시 殿前都指揮使를 두니 역시 친군이었으나 모두 그 변경해 설치한 초기의 정황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天下의 군대는 모두 이 두 分屬하게 되었다.


역주
역주1 康義誠傳 : 康義誠(?~934 字가 信臣으로 代北 三部落 사람이다. 강의성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66 〈唐書 第42 列傳18〉과 ≪新五代史≫ 卷27 〈唐臣傳 第15〉에 실려 있다.
歐陽脩는 ≪구오대사≫에 430여 자 정도로 수록되어 있던 강의성의 傳記를 7백여 자로 늘려 기술하였는데, 구양수의 글은 출세 지향적인 강의성이 大勢에 따라 태도를 바꾸었던 행적과 그가 조정에서 벌인 暗鬪의 전말을 서술하여 은연중에 褒貶을 담은 것이 특징이다.
강의성은 簒奪이 난무하였던 後唐 왕조에서 황제의 廢立에 깊이 간여하며 一身의 榮達을 위해 자유자재로 변신을 꾀한 장수이다. 그는 晉王 李克用, 莊宗 李存勖을 차례로 섬기며 군대에서 입지를 다졌는데 후당에 반기를 들었던 趙在禮를 정벌하러 떠난 明宗 李思源이 반란을 주저할 때 적극적으로 반란을 부추긴 野心家였다.
특히 구양수는 이 대목을 간단하게 서술한 반면, ≪구오대사≫에서는 강의성이 명종에게 “주상께서 社稷의 위태로움을 돌아보지 않고 군사들의 노고는 생각하지 않고서 사냥과 女色을 즐기고 酒樂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만약 무리의 뜻을 따르면 돌아갈 곳이 있을 테지만 만약 절개를 지킨다면 죽을 것입니다.[主上不慮社稷阽危 不思戰士勞苦 荒耽禽色 溺于酒樂 今從衆則有歸 守節則將死]”라고 장종을 聲討하면서 명종에게 반란을 종용하며 했던 말을 그대로 실어 강의성의 不敬함을 폭로하였다.
찬탈에 성공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강의성은 권력의 핵심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명종이 다스리던 926년에서 933년까지 8년간은 善政에 힘쓰고 풍년이 들기도 하는 등 五代에서 비교적 평화로웠던 때라 별 탈이 없었으나 명종 말년에 심각한 후계 갈등이 불거졌다.
우선 아들 秦王 李從榮이 933년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였고 愍帝 李從厚가 즉위한 뒤에는 민제의 형 潞王 李從珂가 반란을 일으켜 찬탈에 성공하였다. 2년도 안 되는 시기에 벌어진 거듭된 반란으로 두 번이나 황제가 바뀐 것이다.
이처럼 혼란했던 후당 말기에 강의성은 명종의 반란 때처럼 처음에 진왕과 결탁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노왕의 반란 때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이내 항복하였으나 결국 노왕에게 斬首되고 一族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事跡이 비록 국가의 存亡과 得失에 관계되어 〈唐臣傳〉에 실리기는 했지만 反覆無常하였던 그의 처신을 따져보면 〈雜傳〉에 실린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겠는데, 이는 구양수가 〈양신전〉의 序文에서 “나는 死節한 선비 세 사람을 얻었고, 두 왕조에 걸쳐 벼슬하지 않은 사람은 각각 그 나라로 묶어 〈梁臣傳〉, 〈唐臣傳〉, 〈晉臣傳〉, 〈漢臣傳〉, 〈周臣傳〉을 지었고, 나머지 벼슬한 것이 한 왕조가 아니어서 나라로 묶을 수 없는 사람은 〈잡전〉을 지었다. 〈잡전〉에 들어간 사람은 실로 군자가 부끄럽게 여기는 대상이지만 한 왕조에 벼슬한 사람도 반드시 모두 귀하게 여길 만한 것은 아니니, 보는 사람은 善惡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라고 한 말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하겠다.
특히 ≪구오대사≫에서는 史臣의 史評을 통해 당시 조정에서 論事하였던 朱弘昭‧朱弘實과 강의성을 한데 묶어 그들이 사직을 보위하지 못하고 國家를 안정시키지도 못한 채 서로 이어 망하였으니 누구를 탓하겠냐며 강한 어조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한편 열전 뒤에 附記한 구양수의 사평은 親軍의 沿革을 설명한 것으로, 앞서 〈安重誨傳〉의 사평에서 樞密使를 역임한 안중회를 들어 추밀사의 연혁을 설명하며 비판한 뜻과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親軍都指揮使를 맡아 권력을 擅斷하였던 강의성의 사례를 들어 宋代 親軍의 권력 집중에 대한 깊은 경계의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代北 : 代州의 북부 지역으로, 지금의 山西省 北部 및 河北省 西北部 일대를 가리킨다. 唐代에 이곳에 節度使를 두어 대주를 鎭守하게 하였다.
역주3 領汾州刺史 : ≪舊五代史≫에는 ‘汾州’가 ‘邠州’로 되어 있다.(≪舊五代史考異≫)
역주4 天津橋 : 洛陽에 있는 다리로, 隋나라 때 처음 건립되고 元나라 때 철거되었다. 처음에는 浮橋였는데 뒤에 石橋로 만들었다.
역주5 : 愍帝 李從厚(914~934 明宗 李嗣源의 셋째 아들이고, 潞王 李從珂(?~936 이사원의 養子로, 이종가가 愍帝의 형이다.
역주6 淸泰 : 後唐 廢帝 李從珂의 연호(934.
역주7 (制)[判] : 저본에는 ‘制’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判’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 天子自爲(之)將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南監本‧彭汪本에는 ‘爲’ 뒤에 ‘之’자가 있다.[按南監本彭汪本爲下有之字]”라고 하였다.
역주9 (之) : 저본에는 ‘之’가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10 漢有侍衛司獄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桑維翰傳〉에서 ‘軍吏가 앞으로 나와 桑維翰에게 아뢰면서 侍衛司의 감옥으로 가기를 청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때 後漢이 아직 建立되지 않았는데 이미 侍衛司獄이 있었던 것이다. ≪資治通鑑≫ 顯德 3년 11월에 ‘孫晟을 右軍巡院에 보냈다.’고 한 부분의 注에 ‘侍衛親軍은 左軍과 右軍으로 나누어 각기 巡院을 두고서 鞫問하기 위해 죄수를 가두었다.’고 하였으니 여기의 軍巡院은 바로 시위사옥이다. 軍巡獄은 〈毛璋傳〉‧〈呂琦傳〉에 보이니 다시 앞부분에 있다.[按桑維翰傳 軍吏前白維翰 請赴侍衛司獄 是時 漢未立 已有侍衛司獄 通鑑顯德三年十一月 送晟于右軍巡院注 侍衛親軍 分左右軍 各有巡院 以鞫繫囚 是軍巡院 卽侍衛司獄 軍巡獄見毛璋呂琦傳 更在前矣]”라고 하였다.
역주11 語曰……炎炎奈何 : ≪說苑≫ 〈敬愼〉에서 “작은 불씨를 끄지 않으면 활활 타오르는 것을 어찌하겠으며, 작은 물을 막지 않으면 江河가 될 것이고, 줄줄이 이어지는 실을 끊지 않으면 그물을 이룰 것이며, 푸르고 푸른 풀을 베지 않으면 도끼를 써야 할 것이다.[熒熒不滅 炎炎柰何 涓涓不壅 將成江河 緜緜不絶 將成網羅 靑靑不伐 將尋斧柯]”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12 親軍之號……皆不見其更置之始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石林燕語≫에 이르기를 ‘殿前軍은 周 世宗 때 창시되었다. 이때 太祖(趙匡胤 殿前司都虞候가 되었는데 처음 天下에 조서를 내려 壯士를 모집하여 京師에 올려 보내게 하면서 태조에게 명하여 武藝가 精高한 자들을 선발하여 殿前諸班으로 삼으면서 都點檢을 두되 지위는 都指揮의 위에 있게 하니 태조가 참으로 이를 통해 禪讓을 받았다. 이 사실은 國史에 보이는데 歐陽公의 ≪新五代史≫에서는 도리어 창시된 유래를 모른다고 하였으니 자세하게 상고하지 않은 것이다.[謹案石林燕語云 殿前軍起于周世宗 是時 太祖爲殿前司都虞候 初詔天下選募壯士 送京師 命太祖擇其武藝精高者 爲殿前諸班 而置都點檢 位都指揮上 太祖實由此受禪 見於國史 歐公五代史 乃云 不知所始 蓋攷之未詳也]”라고 하였다.
역주13 親軍之號 始於明宗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劉捍傳〉에 ‘元從親軍都虞候’라 하였고, 〈王鎔傳〉에 ‘親軍이 모두 두려워했다.’고 하였고, 〈劉知俊傳〉에 ‘그의 아우 劉知浣이 親軍指揮使가 되었다.’고 하였고, 〈霍彦威傳〉에 ‘하물며 그대는 天子의 친군임에랴.’라고 하였고, 〈吳世家〉에 ‘늘 친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薛居正의 ≪舊五代史≫ 〈梁太祖本紀〉에 ‘開平 3년 6월 辛亥日에 詔書에서 「유지완은 逆黨 가운데 가장 頭角을 드러냈고 龍虎軍은 親兵 속에서 참으로 勇士의 으뜸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고, 〈末帝本紀〉에 ‘趙巖은 이때 禁軍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洛陽으로 돌아온 뒤로 侍衛親軍 袁象先에게 計謀를 고하였다.’고 하고, ‘龍德 元年 5월 초하루 丙戌日에 詔書에서 「侍衛親軍 및 諸道行營將士에게 등급에 따라 넉넉하게 상을 하사하는 일은 이미 別敕에 따라 처리하였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劉捍傳〉에 ‘劉捍을 親軍指揮로 삼았다.’고 하였고, 〈袁象先傳〉에 ‘얼마 있다가 左龍武統軍 兼侍衛親軍都指揮使를 제수하였다.’고 하였고, ≪資治通鑑≫ 天成 2년 10월에 ‘御營使 石敬瑭을 보내 親兵을 거느리게 하였다.’고 한 注에 ‘梁나라 이래로 侍衛親軍‧侍衛馬軍‧侍衛步軍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明宗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按劉捍傳元從親軍都虞候 王鎔傳親軍皆懼 劉知俊傳其弟知浣爲親軍指揮使 霍彦威傳況爾天子親軍 吳世家常以爲親軍 薛史梁太祖本紀 開平三年六月辛亥 敕劉知浣 逆黨之中最爲頭角 龍虎軍 親兵之內實冠爪牙 末帝本紀 巖時典禁軍 洎還洛 以謀告侍衛親軍袁象先 龍德元年五月丙戌朔 制侍衛親軍及諸道行營將士等第頒賜優賞 已從別敕處分 劉捍傳以捍爲親軍指揮 袁象先傳尋授左龍武統軍兼侍衛親軍都指揮使 通鑑天成二年十月 遣御營使石敬瑭將親兵 注自梁以來 有侍衛親軍侍衛馬軍侍衛步軍 此謂始于明宗非也]”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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