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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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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景延廣 字航川이니 陝州人也 父建善射러니 嘗敎延廣曰 射不入鐵이면 不如不發이라하니 由是 延廣以挽彊見稱이라
한대 友誨謀反被幽하니 延廣亡去 後從戰中都한대 彦章敗하고 延廣身被數創하야 僅以身免이라
以汴州反이어늘 晉高祖爲六軍副使하야 主誅從守殷反者
延廣爲汴州軍校當誅어늘 高祖惜其才하야 陰縱之使亡하고 後錄以爲客將하다
高祖卽位 以爲侍衛步軍都指揮使하고 領果州團練使하고 徙領寧江軍節度使하다 天福四年 出鎭義成하고 又徙保義하고
復召爲侍衛馬步軍都虞候하고 徙鎭河陽三城하고 遷馬步軍都指揮使하고 領天平하다
高祖崩하고 出帝立 延廣有力하야 頗伐其功이라 出帝立하야 晉大臣議告契丹하고 致表稱臣한대
延廣獨不肯하고 但致書稱孫而已하니 大臣皆知其不可而不能奪이라 契丹果怒하야 數以責晉하니
延廣謂契丹使者喬瑩曰 先皇帝 北朝所立이요 今天子 中國自冊이니 可以爲孫이요 而不可爲臣이라
且晉有十萬口하니 要戰則來하라 他日不禁孫子하야 取笑天下리라하니
瑩知其言必起兩國之爭하고 懼後無以取信也하야 因請載于紙하야 以備遺忘이라
延廣勑吏具載以授瑩하니 瑩藏其書衣領中以歸하야 具以延廣語告契丹하니 契丹益怒하다
天福八年秋 出帝幸大年莊還할새 置酒延廣第한대 延廣所進器服鞍馬茶狀椅榻皆裹金銀하고 飾以龍鳳하며
又進帛五千匹綿一千四百兩馬二十二匹玉鞍衣襲犀玉金帶等하야 請賜從官하니
自皇弟重睿 下至重睿從者 各有差 帝亦賜延廣及其母妻從事等稱是
天下旱蝗하야 民餓死者歲十數萬이어늘 而君臣窮極奢侈以相誇 尙如此러라
明年春 契丹入寇하니 延廣從出帝北征하야 爲禦營使하야 相拒澶魏之間이라
先鋒石公霸遇虜於이어늘 高行周符彦卿兵少不能救일새 馳騎促延廣益兵한대 延廣按兵不動이라
三將被圍數重일새 帝自禦軍救之하니 三將得出하야 皆泣訴 然延廣方握親兵하야 恃功恣橫하니 諸將皆由其節度하고 帝亦不能制也러라
契丹嘗呼晉人曰 景延廣喚我來러니 何不速戰고하다 是時 諸將皆力戰이로대 而延廣未嘗見敵하고 契丹已去 延廣獨閉壁不敢出이라
自延廣一言而契丹與晉交惡 凡號令征伐 一出延廣이요 晉大臣皆不得與
故契丹凡所書檄 未嘗不以延廣爲言이러라 契丹去하고 出帝還京師하야 乃出延廣爲河南尹하고 留守西京하다
明年 出帝幸澶淵할새 以延廣從이러니 皆無功이라 延廣居洛陽하야 鬱鬱不得志하고 見晉日削하야 度必不能支契丹하야
乃爲長夜之飮하고 大治第宅하고 園置妓樂하야 惟意所爲 後帝亦追悔하고 遣供奉官張暉하야 奉表稱臣以求和하니
德光報曰 使桑維翰景延廣來하고 而割鎭定與我라야 乃可和라하니 晉知其不可하고 乃止하다
契丹至하니 延廣屯河陽이라가 聞杜重威降하고 乃還하다
德光犯京師 行至하야 遣騎兵數千하야 雜晉軍渡河趨洛하야 以取延廣할새
戒曰 延廣南奔吳하고 西走蜀이니 必追而取之하라하다
而延廣顧慮其家하야 未能引決일새 虜騎奄至어늘 乃與從事閻丕 馳騎見德光於封丘하고 幷丕見鎖
延廣曰 丕 臣從事也 以職相隨어니 何罪而見鎖오하니 丕乃得釋이라
德光責延廣曰 南北失歡 皆因爾也라하고 召喬瑩하야 質其前言하니 延廣初不服이라가 瑩從衣領中出所藏書하니 延廣乃服이라
因以十事責延廣하되 하니 授至八籌 延廣以面伏地하야 不能仰視
遂叱而鎖之하고 將送之北行하야하야 止民家
夜分 延廣伺守者하야 引手扼吭而死하니 時年五十六이러라 贈侍中하다
嗚呼 自古禍福成敗之理 未有如晉氏之明驗也하니 其始以契丹而興하고 終爲契丹所滅이로다
然方其以逆抗順이라가 大事未集하야 하야 外無救援일새
而徒將一介之命하고 持片舌之強하야 能使契丹空國興師하야 應若符契하야 出危解難하야 成晉氏하니 當是之時하야 維翰之力爲多
及少主新立 釁結兵連하고 敗約起爭 發自延廣이니 然則晉氏之事 維翰成之 延廣壞之
二人之用心者異로대 而其受禍也同 其故何哉 蓋夫本末不順而與夷狄共事者 常見其禍 未見其福也 可不戒哉 可不戒哉


05. 後晉 신하 景延廣傳記
景延廣航川이니 陝州 사람이다. 아버지 景建이 활을 잘 쏘았는데 일찍이 경연광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활을 쏘아서 쇠를 꿰뚫지 못하면 쏘지 않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경연광이 強弓을 잘 쏘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邵王 朱友誨를 섬겼는데 주우회가 모반했다가 유폐당하자 경연광은 도주하였다. 후에 王彦章을 따라 中都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왕언장은 패하고 연광은 수많은 創傷을 입고서 겨우 몸만 빼내어 죽음을 면하였다.
明宗 때에 朱守殷汴州에서 모반을 일으켰는데, 高祖(石敬瑭)가 六軍副使가 되어 주수은을 따라 모반한 자를 誅殺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景延廣汴州軍校의 신분으로 주살 대상이었는데 고조가 그 재주를 아깝게 여겨 몰래 풀어주어 도망가게 하고는 뒤에 자신의 客將으로 임용하였다.
고조가 즉위하자 侍衛步軍都指揮使로 삼고 果州團練使를 맡겼으며 자리를 옮겨 寧江軍節度使를 맡겼다. 天福 4년(939)에 외직으로 나가 義成軍節度使鎭駐하였고 또 자리를 옮겨 保義軍節度使가 되었으며,
다시 조정으로 불려가 侍衛馬步軍都虞候가 되었고 자리를 옮겨 河陽三城節度使鎭駐하였고 승진하여 馬步軍都指揮使가 되었고 天平軍節度使를 맡았다.
高祖崩御하고 出帝가 즉위하자, 景延廣은 〈출제의 즉위에〉 공이 있어 자신의 공로를 몹시 내세웠다. 이보다 앞서 출제가 즉위하여 大臣들이 즉위 사실을 契丹通告하고 稱臣하는 表文을 보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경연광만이 달갑지 않게 여기고 孫子라고 칭하는 서한만을 보내고 마니, 대신들이 모두 그 불가함을 알았지만 저지할 수 없었다. 거란이 과연 노하여 자주 을 책망하니,
경연광이 거란의 사신 喬瑩에게 이르기를 “先皇帝北朝가 세워주었고, 지금 천자는 중국이 스스로 책봉한 것이니, 손자는 될 수 있어도 신하는 될 수 없다.
나라에는 십만의 橫磨大劍이 있으니, 께서 전쟁을 하고자 한다면 오시라. 뒷날 손자를 제재하지 못하여 천하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교영은 그 말이 반드시 양국간의 분쟁을 일으킬 것을 알고서 뒤에 그 말을 증빙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종이에 그 말을 적어 備忘記로 삼기를 청하였다.
경연광이 관리에게 그 내용을 모두 적어서 교영에게 주게 하니, 교영이 그 글을 옷소매 속에 넣어 돌아가 경연광의 말을 거란에 모두 고하자 거란은 더욱 노하였다.
天福 8년(943) 가을에 出帝大年莊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면서 景延廣의 사저에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경연광이 올린 기물과 의복과 말안장과 찻상과 의자들이 모두 金銀으로 싸였고 龍鳳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또 비단 5,000과 명주 1,400과 말 22과 옥안장과 옷벌과 무소뿔과 玉器金帶 등을 올리면서 시종관들에게 하사할 것을 청하니,
황제의 아우인 石重睿로부터 아래로 별 볼 일 없이 酒宴에 따라서 참석한 刺史와 석중예를 시종한 자에 이르기까지 각각 차등이 있었다. 황제가 또한 경연광과 그의 모친과 처와 종사관과 押衙孔目官 등에게 여기에 걸맞게 하사하였다.
당시 천하에 가뭄과 蝗蟲의 재해로 굶어 죽는 백성이 해마다 十數萬이었는데 임금과 신하가 극도로 사치를 부리며 서로 자랑한 것이 오히려 이와 같았다.
이듬해 봄에 契丹이 침공하니, 景延廣出帝를 따라 북쪽으로 정벌 가서 禦營使가 되어 澶州魏州 사이에서 적군과 서로 대치하였다.
先鋒石公霸戚城에서 적군과 만났는데 高行周符彦卿의 병사는 수가 적어 구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서둘러 騎兵을 보내 경연광에게 병사의 증원을 재촉하였는데 경연광은 병사를 주둔시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세 장수가 몇 겹으로 포위를 당하게 되자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니 세 장수가 탈출하여 모두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였다. 그러나 경연광이 바야흐로 親衛兵을 장악하고서 자신의 공로를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니, 장수들은 모두 그의 지휘를 받았고 황제 역시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거란이 항상 나라 사람들에게 외치기를 “경연광이 우리더러 오라고 하더니만 어찌하여 속히 싸우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장수들이 모두 힘써 싸웠으나 경연광은 적군을 본 적도 없었고, 거란이 撤軍할 적에도 경연광은 홀로 성을 굳게 지키며 감히 나가지 못하였다.
경연광의 한마디 말로 거란과 의 사이가 나빠진 이후로부터 모든 號令征伐이 하나같이 경연광에게서 나왔고 의 대신들은 모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거란이 보내오는 모든 문서에서 경연광을 언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거란이 철군하고 출제가 도성으로 돌아와 마침내 경연광을 河南尹 西京留守로 내보냈다.
이듬해에 出帝澶淵 지방으로 행차할 때 景延廣을 데리고 갔는데 모두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경연광은 洛陽에 있으면서 울울하게 뜻을 얻지 못하고 의 영토가 날마다 깎여나가는 것을 보면서 반드시 契丹에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는,
이에 밤새도록 술이나 마시고 저택을 크게 짓고 園中에는 妓女風樂을 두고서 마음 가는 대로 놀았다. 뒤에 황제도 후회하고서 供奉官 張暉를 보내 표문을 바치며 稱臣하고서 강화하기를 구하니,
耶律德光이 답하기를 “桑維翰과 경연광을 오게 하고 鎭州定州를 떼어 나에게 주어야지만 강화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고 결국 그만두었다.
거란이 中渡에 이르니, 경연광이 河陽에 주둔하고 있다가 杜重威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결국 회군하였다.
耶律德光京師를 침범할 때 相州에 이르러서 騎兵 수천을 보내 의 군대와 섞여 黃河를 건너 洛陽으로 신속히 가서 景延廣을 잡아오게 하면서,
단단히 분부하며 말하기를 “경연광이 남쪽으로는 땅으로 달아날 것이고 서쪽으로는 땅으로 도주할 것이니 반드시 추격하여 잡아 오라.”고 하였다.
경연광이 그 가솔들을 염려하여 자결하지 못하고 있다가 契丹의 기병이 갑자기 이르자 결국 종사관 閻丕와 함께 말을 타고 封丘에서 야율덕광을 알현하고서 염비와 함께 포박되었다.
경연광이 말하기를 “염비는 의 종사관입니다. 자신의 직분 때문에 나를 수행한 것인데 무슨 죄가 있다고 포박을 당한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염비가 풀려날 수 있었다.
야율덕광이 경연광을 질책하면서 말하기를 “남북이 우호를 잃은 것은 다 너 때문이다.”라고 하고 喬瑩을 불러 이전에 했던 말을 대질하니, 경연광이 처음에는 승복하지 않다가 교영이 옷소매에 넣어둔 글을 꺼내자 경연광이 결국 승복하였다.
그리하여 10가지 일을 들어 경연광을 질책하면서 한 가지 일에 승복할 때마다 牙籌 하나씩을 주니, 여덟 개의 아주를 받게 되었을 때 경연광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마침내 경연광을 꾸짖으면서 포박하고 그를 호송하여 북쪽으로 가면서 陳橋에 이르러 民家에 투숙하였는데,
야밤에 경연광이 감시하는 자가 소홀한 틈을 타 손으로 목을 졸라 죽으니, 이때 향년 56세였다. 高祖 때에 侍中追贈하였다.
오호라! 예로부터 禍福成敗의 이치가 의 경우처럼 분명하게 밝혀진 사례는 있지 않으니, 그 처음에는 契丹의 힘으로 일어났고 그 마지막에는 거란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그러나 바야흐로 逆理順理에 대항하다가 大事가 성취되지 않아 외로운 성에 포위당해 바깥으로 구원받을 길도 없게 되었을 때,
한갓 使命을 받든 일개 使臣의 능란한 언설로 거란이 온 나라의 병사를 일으켜 마치 符節을 맞추듯 제때 호응하게 하여 危難에서 벗어나 마침내 나라를 이룩하였으니, 이 당시에 桑維翰의 힘이 컸다.
그러다가 어린 군주가 새로 즉위하여 거란과 불화가 생겨 兵禍가 연이어지고 盟約을 파기하여 분쟁이 일어난 것은 景延廣에게서 始發한 것이니, 그렇다면 의 사업은 상유한이 이룩하고 경연광이 무너뜨린 것이다.
두 사람의 마음 씀이 달랐으되, 똑같이 재앙을 받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체로 그 本末이 이치를 따르지 않고서 夷狄과 함께 일을 도모한 자는 항상 재앙을 받는 것은 보았고 복을 받는 것은 보지 못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晉臣景延廣傳 : 景延廣(892~947 字가 航川으로 陝州 사람이다. 경연광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88 〈晉書 第14 列傳3〉과 ≪新五代史≫ 卷29 〈晉臣傳 第17〉에 실려 있다.
이 열전은 경연광의 생애 중에서도 後晉에서의 사업을 주로 서술하였다. 경연광은 후진에서 크게 등용되어 권력을 잡았고 契丹과의 대립을 주도하다가 패망하였는데, 거란과의 일 한 부분이 바로 경연광의 생평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또한 경연광이 사치하고 권력을 전횡하며 거란과의 전쟁에서도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했음을 말하여 후진의 패망을 불러온 무능한 인물임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서술 방향은 ≪구오대사≫의 서술 내용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신오대사≫에서는 경연광이 후진에서 用事하고 거란과 대립한 사건 외의 나머지 부수적인 일은 대부분 생략하였다. 또한 말미의 史論에서 후진과 경연광의 사례에서 成敗禍福의 이치가 여실히 징험되었고 桑維翰과 경연광이 이치를 거스르고 夷狄과 함께 도모하다가 마침내 재앙을 받았다고 평가하였다.
경연광은 함께 조정에서 일했던 상유한과 대비되어 그 평가가 매우 박절하였다. 歐陽脩가 이미 열전의 편집 경향과 史論에서 경연광을 혹독하게 비판하였고, ≪구오대사≫의 史評에서도 “경연광은 두 황제를 보필한 공로가 있고 六軍을 맡아 관장하였으니 또한 晉나라의 勳臣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국가를 경영하는 원대한 계획에는 어두웠고 강한 적국에 狂妄한 말을 퍼부어 마침내는 나라를 멸망시켜 천하가 폐허가 되게 하였으니, ≪書經≫ 〈說命〉의 이른바 ‘오직 입은 부끄러운 일을 일으킨다.’는 이 사람을 두고 말한 것일 것이다.[延廣功扶二帝 任掌六師 亦可謂晉之勳臣矣 然而昧經國之遠圖 肆狂言於強敵 卒使邦家蕩覆 宇縣丘墟 書所謂惟口起羞者 其斯人之謂歟]”라고 하였다.
또한 宋나라 때 司馬光이 편찬한 ≪稽古錄≫ 卷15에서는 “齊王(後晉 出帝 상유한의 깊은 책략을 버리고 경연광의 미친 계책을 믿어 안으로는 정사를 닦지 못하고 밖으로는 강한 이웃나라를 도발하여 백성들이 들풀에 피를 뿌리게 하고 오랑캐 騎兵이 궁궐을 더럽히게 하여, 살아서는 항복한 포로가 되고 죽어서는 떠돌아다니는 혼백이 되었으니, 이는 불행이 아니다.[齊王舍桑維翰之深謀 信景延廣之狂策 內政不修而外挑強隣 使黎民塗野草 胡騎汚宮闕 生爲降虜 死爲羇魄 非不幸也]”라고 하여 後晉의 패망에 경연광이 지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드러내었다.
역주2 梁邵王友誨 : 後梁의 皇族인 朱友誨(?~923. 921년에 형인 朱友能과 모반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유폐되었다. 후량이 後唐의 공격으로 멸망당하기 전날 밤 末帝 朱友貞에게 피살당하였다.
역주3 王彦章 : 863~923. 五代 때 鄆州 壽張 사람으로, 字는 子明 또는 賢明이다. 朱溫의 군졸이 되어 용맹함을 떨쳐 王鐵槍으로 불렸다. 後梁 末帝 때 거듭 승진하여 澶州刺史에 이르렀다. 後唐의 大軍이 兗州를 공격했을 때 패하고 포로로 잡혔는데, 굴하지 않다가 살해당했다. 歐陽脩가 지은 〈王彦章畫像記〉가 ≪文忠集≫과 ≪唐宋八大家文抄≫에 전한다.
역주4 明宗 : 後唐의 2대 황제 李嗣源(867~933.
역주5 朱守殷 : ?~927. 後唐 莊宗 李存勖을 섬겨 蕃漢馬步軍都虞侯‧宣武節度使‧巡檢 등에 올랐다. 明宗 李嗣源이 즉위하여 河南尹‧判六軍諸衛事로 삼고 다시 汴梁節度使에 제수하였다. 이보다 앞서 명종이 즉위하기 전 주수은이 德勝寨를 방어하고 있을 때 敗戰한 일이 있었는데, 명종이 주수은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장종이 듣지 않은 적이 있어 명종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명종 天成 3년(927) 汴州에서 모반을 일으켰다가 명종의 親征으로 토벌되고 그 族黨들과 함께 誅殺되었다.
역주6 橫磨大劍 : 橫磨劍이다. 횡마검은 길고 날카로운 칼로 정예병을 비유한다.
역주7 : 後晉 出帝가 契丹 太宗 耶律德光에 대해 손자를 자처했으므로, 거란의 황제를 翁이라 표현한 것이다.
역주8 伴食刺史 : 伴食은 主賓과 더불어 음식 대접을 받는다는 뜻으로, 보통 하는 일 없이 남을 따라 오가기만 하며 자리만 차지하는 무능한 관리를 비하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역주9 押衙孔目官 : 押衙는 儀仗과 侍衛를 관할하는 직책이고, 孔目官은 獄訟과 帳簿 등을 관할하는 직책이다.
역주10 戚城 : 孔悝城(공회성 불렀으며, 오늘날 河南省 濮陽에 있다.
역주11 中渡 : 河北省 正定縣 동남쪽 5리 지점에 滹沱河를 건너기 위해 지나야 하는 中渡橋를 가리킨다.
역주12 相州 : 지금의 河北省 成安縣‧廣平縣과 河南省 安陽縣 일대이다.
역주13 每服一事 授一牙籌 : 牙籌는 象牙나 짐승의 뼈 혹은 뿔로 만든 산가지이다. ≪舊五代史≫ 卷88 〈景延廣傳〉에 따르면, 이렇게 죄를 승복할 때 산가지를 주는 것은 契丹의 법이었다고 한다.
역주14 陳橋 : 鄕鎭의 명칭으로 중국 河北省 開封 동북쪽에 있다. 후일 宋 太祖 趙匡胤이 휘하 장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곳이기도 하다.
역주15 : ≪新五代史≫에는 ‘殆’로 되어 있으며, ‘殆’는 ‘怠’의 의미이다.
역주16 漢高祖 : 五代 때 後漢을 건국한 劉知遠(895~948. 契丹에 의해 後晉이 망하자 晉陽에서 제위에 올랐다. 즉위 후 이름을 暠로 고치고 汴京에 도읍하였다.
역주17 孤城被圍 : 後唐 末帝 李從珂가 수만의 대군으로 石敬瑭이 있던 晉陽을 포위 공격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18 (速)[遂] : 저본에는 ‘速’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遂’로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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