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01.
予覽歐陽公所次死節傳호니 王彦章裴約及劉仁贍尤爲嗚咽하야 或欲泣下라
蓋三人者
는 天之
所生
이니 非五代兵戈晦冥之際所能沒者
라
而歐陽公點綴情事는 當爲千古絶調니 卽如史記漢書가 恐多不逮라
語曰 世亂에 識忠臣이라하니 誠哉라 五代之際에 不可以爲無人이니 吾得全節之士三人焉하야 作死節傳하노라
王彦章
은 字子明
이니 라 少爲軍卒
하야 事
하야 爲開封府押衙左親從指揮使行營先鋒馬軍使
라
卽位
에 遷濮州刺史
하고 又徙澶州刺史
하다 彦章爲人驍勇有力
하야 能跣足履棘行百步
라
持一鐵槍하야 騎而馳突하야 奮疾如飛어늘 而他人莫能擧也하니 軍中號王鐵槍하다
梁分魏相六州
하야 爲兩鎭
할새 懼
不從
하야 遣彦章將五百騎入魏
하야 屯
以虞變
한대
魏軍果亂하야 夜攻彦章하니 彦章南走라 魏人降晉하고 晉軍攻破澶州하야 虜彦章妻子하야 歸之太原하야 賜以第宅하고 供給甚備라
間遣使者하야 招彦章하니 彦章斬其使者以自絶이라 然晉人畏彦章之在梁也하야 必欲招致之하야 待其妻子愈厚하다
自梁失魏博으로 與晉夾河而軍할새 彦章常爲先鋒이라 遷汝鄭二州防禦使匡國軍節度使北面行營副招討使하고 又徙宣義軍節度使하다
是時
에 晉已盡有河北
하야 하고 築河南北爲兩城
하야 號夾寨
라
而梁末帝昏亂하야 小人趙巖張漢傑等用事하야 大臣宿將多被讒間하니 彦章雖爲招討副使나 而謀不見用이라 龍德三年夏에 晉取鄆州하니 梁人大恐이라
宰相敬翔顧事急하야 以繩內靴中하야 入見末帝하야 泣曰 先帝取天下하고 不以臣爲不肖하야 所謀無不用이러니
今彊敵未滅에 陛下棄忽臣言하니 臣身不用이면 不如死라하고 乃引繩將自經이라
末帝使人止之하고 問所欲言하니 翔曰 事急矣라 非彦章이면 不可라하다
末帝乃召彦章하야 爲招討使하고 以段凝爲副하다 末帝問破敵之期하니 彦章對曰 三日이라하니 左右皆失笑러라
彦章受命而出하야 馳兩日至滑州하야 置酒大會하고 陰遣人具舟於楊村하고
命甲士六百
皆持巨斧
하며 載冶者
하고 具韛炭
하야 乘流而下
라
彦章會飮이라가 酒半에 佯起更衣하고 引精兵數千하야 沿河以趨德勝이라
舟兵擧鎖燒斷之하고 因以巨斧斬浮橋하니 而彦章引兵急擊南城이라 浮橋斷하고 南城遂破하니 蓋三日矣러라
是時
에 在魏
하고 以朱守殷守夾寨
한대 聞彦章爲招討使
하고 驚曰 彦章驍勇
이라 吾嘗避其鋒
하니 非守殷敵也
라
然彦章兵少하야 利於速戰이니 必急攻我南城하리라하고 卽馳騎救之라
行二十里하야 而得夾寨報者하니 曰 彦章兵已至라하야늘 比至而南城破矣러라
莊宗徹北城爲栰
하야 下
하야 與彦章俱浮於河
하야 各行一岸
하야 每舟栰相及
에 輒戰
하야 一日數十接
이라
彦章至楊劉
하야 攻之幾下
에 晉人築壘博州東岸
이라 彦章引兵攻之不克
하고 還
楊劉
하야 戰敗
라
是時에 段凝已有異志하야 與趙巖張漢傑交通이라 彦章素剛하야 憤梁日削하고 而嫉巖等所爲하야
嘗謂人曰 俟吾破賊還하야 誅姦臣以謝天下라하니 巖等聞之懼하야 與凝叶力傾之러라
其破南城也에 彦章與凝各爲捷書以聞한대 凝遣人告巖等하야 匿彦章書而上己書라
末帝初疑其事러니 已而오 使者至軍하야 獨賜勞凝而不及彦章하니 軍士皆失色이라
及楊劉之敗也에 凝乃上書言彦章使酒輕敵而至於敗라하니 趙巖等從中日夜毁之하야 乃罷彦章하고 以凝爲招討使라
彦章馳至京師入見하야 以笏畫地하야 自陳勝敗之跡하니 巖等諷有司하야 劾彦章不恭하야 勒還第하다
唐兵攻兗州
하니 末帝召彦章
하야 使守捉東路
라 是時
에 梁之勝兵皆屬段凝
하고 京師秪有
五百騎
하니
皆新
募之兵
이라 不可用
이어늘 乃以屬彦章
하고 而以張漢傑監之
라
彦章至遞坊하야 以兵少戰敗하야 退保中都하고 又敗에 與其牙兵百餘騎死戰이라
唐將夏魯奇素與彦章善하야 識其語音曰 王鐵槍也라하고 擧矟刺之하니 彦章傷重하야 馬踣被擒이라
莊宗見之曰 爾常以孺子待我러니 今日服乎아하고 又曰 爾善戰者어늘 何不守兗州而守中都오 中都無壁壘어늘 何以自固오하니
彦章對曰 大事已去라 非人力可爲라하니 莊宗惻然하야 賜藥以封其創하다
彦章은 武人이니 不知書라 常爲俚語謂人曰 豹死留皮하고 人死留名이라하니 其於忠義에 蓋天性也라
莊宗愛其驍勇하야 欲全活之하야 使人慰諭彦章하니 彦章謝曰 臣與陛下血戰十餘年이라 今兵敗力窮하니 不死何待오
且臣受梁恩하니 非死不能報어늘 豈有朝事梁而暮事晉이며 生何面目見天下之人乎아하다
莊宗又遣
하야 往諭之
한대 彦章病創
하야 臥不能起
하야 仰顧明宗
하고 呼其小字曰 汝非邈佶烈乎
아
我豈苟活者리오하고 遂見殺하니 年六十一이라 晉高祖時에 追贈彦章太師하다
與彦章同時에 有裴約者하니 潞州之牙將也라 莊宗以李嗣昭爲昭義軍節度使하니 約以裨將守澤州라
嗣昭卒하고 其子繼韜以澤潞叛降于梁하니 約召其州人하야 泣而諭曰 吾事故使二十餘年에 見其分財饗士하야 欲報梁仇러니 不幸早世라
今郞君父喪未葬에 違背君親하니 吾能死于此요 不能從以歸梁也라하니 衆皆感泣하다
梁遣董璋率兵圍之
하니 約與州人拒守
하고 求救於莊宗
이라 是時
에 莊宗方與梁人戰河上
이라가 建大號
라
聞繼韜叛降梁하고 頗有憂色이러니 及聞約獨不叛하야 喜曰 吾於繼韜何薄이며 於約何厚완대 而約能分逆順邪아하고
吾不惜澤州與梁
이니 一州易得
이어니와 約難得也
로다 爾識機便
하니 爲我取約來
하라하다
存審以五千騎馳至
러니 而梁兵已破澤州
하야 約見殺
하다
至
時
하야 又有劉仁贍者焉
이라 仁贍
은 字守惠
이니 彭城人也
라 父金事楊行密
하야 爲濠滁二州刺史
하고 以驍勇知名
이라
仁贍爲將하야 輕財重士하고 法令嚴肅하고 少略通兵書라
事南唐
하야 爲左監門衛將軍黃袁二州刺史
하야 所至稱治
라 使掌親軍
하고 以爲武昌軍節度使
하다
周師征淮할새 先遣李穀하야 攻自壽春하니 景遣將劉彦貞하야 拒周兵하고 以仁贍爲淸淮軍節度使하야 鎭壽州하다
李穀退守正陽浮橋하니 彦貞見周兵之却하고 意其怯하야 急追之라
仁贍以爲不可어늘 彦貞不聽하니 仁贍獨按兵城守라 彦貞果敗於正陽하다
世宗攻壽州
하야 圍之數重
하고 以
하야 自
中流擊其城
이라
又束巨竹數十萬竿하야 上施版屋하야 號爲竹龍하야 載甲士以攻之하고
又決其
하야 入于淝河
하야 攻之百端
하야 自正月
로 至于四月
하되 不能下
러니
而歲大暑하고 霖雨彌旬하야 周兵營寨水深數尺하고 淮淝暴漲하야 礮舟竹龍이 皆飄南岸하야 爲景兵所焚하야 周兵多死러라
世宗東趨
하야 以李重進爲廬壽
都招討使
하니 景亦遣其元帥齊王景達等
하야 列砦
下
하고 爲夾道
하야 以屬城中
하다
而重進與張永德兩軍相疑不協일새 仁贍屢請出戰이로대 景達不許하니 由是憤惋成疾하다
하야 盡破紫金山砦
하고 壞其夾道
하니 景兵大敗
하야 諸將往往見擒
이라
而景之守將廣陵馮延魯, 光州張紹, 舒州周祚, 泰州方訥, 泗州範再遇等이 或走或降하야 皆不能守하니
雖景君臣이라도 亦皆震懾하야 奉表稱臣하고 願割土地輸貢賦하야 以效誠款이어늘 而仁贍獨堅守하야 不可下러라
仁贍立命斬之하니 監軍使周廷構哭於中門하되 救之不得이라 於是에 士卒皆感泣하야 願以死守하다
三月에 仁贍病甚하야 已不知人하니 其副使孫羽詐爲仁贍書하야 以城降이라
世宗命舁仁贍至帳前하야 嘆嗟久之하고 賜以玉帶御馬하야 復使入城養疾한대 是日卒하다
制曰 劉仁贍盡忠所事하야 抗節無虧하니 前代名臣幾人可比오 予之南伐에 得爾爲多라하고
乃拜仁贍檢校太尉兼中書令天平軍節度使어늘 仁贍不能受命而卒하니 年五十八이라
世宗遣使吊祭하고 喪事官給하며 追封彭城郡王하고 以其子崇讚爲懷州刺史하며 賜莊宅各一區하다
李景聞仁贍卒
하고 亦贈太師
하다 壽州故治壽春
이니 世宗以其難克
으로 遂徙城下蔡
하고 而
하고 曰 吾以旌仁贍之節也
라하다
嗚呼라 天下惡梁久矣라 然士之不幸而生其時者는 不爲之臣可也어니와
其食人之祿者는 必死人之事니 如彦章者는 可謂得其死哉인저 仁贍旣殺其子以自明矣니 豈有垂死而變節者乎아
今
에 載仁贍降書
하니 蓋其副使孫羽等所爲也
라 當世宗時
하야 어늘
攻之久不下라가 其後力屈而降하니 世宗頗嗟其忠이나 然止以爲大將軍이라 視世宗待二人之薄厚而考其制書면 乃知仁贍非降者也라
自古忠臣義士之難得也어늘 五代之亂에 三人者或出於軍卒하고 或出於僞國之臣하니 可勝嘆哉아 可勝嘆哉아
내가 歐陽公이 編次한 〈死節傳〉을 보니, 王彦章과 裴約과 劉仁贍의 사적에서 더욱 목이 메어 혹 눈물이 흘러내리려 하였다.
대개 이 세 사람은 하늘의 間氣로 태어난 이들이니, 五代의 암흑과도 같았던 전란의 시절이 그 자취를 매몰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구양공이 이들의 사적을 모아 엮은 글은 천고의 絶調가 되기에 마땅하니, ≪史記≫와 ≪漢書≫ 같은 경우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을 듯하다.
“세상이 혼란해지면 忠臣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五代 시절에 사람이 없었다고 할 수 없으니, 내가 節操를 온전히 한 선비 세 사람을 얻어 〈死節傳〉을 짓는다.
王彦章은 字가 子明이니 鄆州 壽昌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 군졸이 되어 梁 太祖를 섬겨 開封府押衙 左親從指揮使 行營先鋒馬軍使가 되었다.
梁 末帝가 즉위하자 濮州刺史로 승진하고 또 澶州刺史로 자리를 옮겼다. 왕언장은 사람됨이 날래고 용력이 있으며 힘이 좋아서 맨발로 가시나무를 밟으며 백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
鐵槍 하나를 쥐고서 말을 타고 돌진하여 나는 듯이 신속히 내달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의 창을〉 들 수조차 없었으니 군중에서 王鐵槍이라고 불렀다.
梁과 晉이 천하를 놓고 다투어 서로 강적이 되었는데, 王彦章만은 마음속으로 항상 晉王을 가볍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亞次는 닭싸움이나 시키는 어린아이일 뿐이니,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였다.
梁이 魏州와 相州 등 여섯 주를 나누어 兩鎭으로 만들면서, 魏軍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왕언장에게 5백의 騎兵을 거느리고 魏로 진입하여 金波亭에 주둔하면서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위군이 과연 난을 일으켜 밤에 왕언장을 공격하니 왕언장이 남쪽으로 달아났다. 魏人이 晉에 투항하고 晉軍이 澶州를 격파하고서 왕언장의 처자식을 포로로 잡고 太原으로 보내 저택을 하사하고 부족함 없이 물자를 잘 대주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使者를 보내 왕언장을 부르니, 왕언장이 사자의 목을 벰으로써 스스로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晉人은 왕언장이 梁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반드시 자기편으로 불러 오고자 하여 왕언장의 처자식을 매우 두텁게 대우하였다.
梁이 魏州와 博州를 잃고 나서 黃河를 끼고 晉과 대치할 때, 王彦章이 항상 선봉이 되었다. 승진하여 汝鄭二州防禦使 匡國軍節度使 北面行營副招討使가 되고, 다시 宣義軍節度使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에 晉이 이미 河北의 땅을 다 차지하고서 쇠사슬로 德勝口를 차단하고 황하 남북으로 두 개의 성을 쌓고 ‘夾寨’라고 불렀다.
梁 末帝가 昏暗하여 소인인 趙巖과 張漢傑 등이 권력을 전횡하여 大臣과 宿將들이 참소를 많이 받으니, 왕언장이 비록 招討副使의 신분이었으나 계책이 쓰이지 못하였다. 龍德 3년(923) 여름에 晉이 鄆州를 차지하니 梁나라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재상 敬翔이 사태가 위급한 것을 보고 끈을 가죽신 속에 넣고서 들어와 말제를 알현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先帝께서 천하를 취하시고 신을 못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으시고서 신의 계책을 쓰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강한 적이 망하기도 전에 폐하께서 신의 말을 버리고 소홀히 하시니 신이 쓰이지 못한다면 죽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고서는, 끈을 〈목에 묶어〉 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말제가 사람을 시켜 저지하고 하고자 하는 말을 물으니, 경상이 말하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왕언장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말제가 이에 왕언장을 불러 招討使로 삼고 段凝을 招討副使로 삼았다. 말제가 얼마 만에 적을 격파할 수 있는지 묻자, 왕언장이 사흘이라고 대답하니 좌우에서 모두 비웃었다.
王彦章이 명을 받고 출정하여 이틀을 달려 滑州에 도착해서 크게 술자리를 마련하고서 몰래 사람을 보내 楊村에 미리 배를 대어두게 하고,
甲士 6백 인에게 명하여 모두 큰 도끼를 들게 하였으며, 대장장이를 배에 태우고 풀무와 숯을 갖추어 물결을 타고 내려가게 하였다.
왕언장이 사람들과 모여 술을 마시다가 주흥이 반쯤 무르익었을 때 거짓으로 일어나 변소에 가는 척하고는 정예병 수천 명을 이끌고서 黃河를 따라 德勝으로 달려갔다.
배를 탄 병사들이 쇠사슬을 들어 불태워 잘라버리고 이어서 큰 도끼로 浮橋를 끊어버리니, 왕언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급히 南城을 공격하였다. 부교가 끊어지고 남성이 마침내 함락되니 3일이 걸렸다.
이때에 莊宗이 魏州에 있으면서 朱守殷에게 夾寨를 수비하게 하였는데, 王彦章이 招討使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언장은 날래고 용맹하여 내가 그 銳鋒을 피해왔으니 수은이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언장은 兵力이 적어 速戰速決이 유리하니 반드시 우리 南城을 급히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즉시 말을 달려 구원하러 갔다.
20리를 가서 협채의 소식을 보고하러 오는 자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언장의 병사가 이미 당도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남성에 당도해보니 남성이 함락되어 있었다.
장종이 北城을 철거하여 뗏목을 만들어 楊劉로 내려가, 왕언장과 함께 黃河 위에서 배를 타고서 각각 한쪽 江岸으로 가서 서로의 배와 뗏목이 접촉할 때마다 전투를 벌여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교전하였다.
왕언장이 양류에 당도하여 공격해서 거의 함락할 지경에 이르자, 晉의 군대가 博州의 동쪽 강안에 보루를 쌓았다. 왕언장이 병사를 이끌고 가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다시 양류를 공격하다가 패전하였다.
이때에 段凝이 이미 다른 뜻을 품고서 趙巖‧張漢傑 등과 결탁하였다. 王彦章은 평소 강직하여 梁의 영토가 날로 줄어드는 것에 분개하고 조암 등이 하는 짓을 미워하여,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적들을 격파하고 돌아온 뒤 간신들을 주살하여 천하에 보답하겠다.”라고 하니, 조암 등이 그 말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단응과 힘을 합쳐 왕언장을 해치려 하였다.
南城이 격파되었을 때 왕언장과 단응이 각각 승첩 보고서를 올렸는데, 단응이 사람을 보내 조암 등에게 고하여 왕언장의 보고서를 숨기고 자신의 보고서를 올리게 하였다.
末帝가 처음에 그 일을 의아하게 여겼는데, 얼마 뒤 사자가 軍中에 당도하여 단응의 노고만 치하하고 왕언장에게 아무 보상도 내리지 않으니 군사들이 모두 失色하였다.
楊劉에서 패배하자 단응이 글을 올려 왕언장이 술에 빠져 적을 가볍게 여겨 패배하게 되었다고 하니, 조암 등이 중간에서 밤낮으로 헐뜯어 마침내 왕언장을 파직하고 단응을 招討使로 삼았다.
왕언장이 말을 달려 도성에 와서 궁중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고 笏로 땅을 그어가며 승패의 경과를 스스로 진달하니, 조암 등이 有司를 사주하여 왕언장을 不恭罪로 탄핵하여 강제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唐의 병사가 兗州를 공격하니 末帝가 王彦章을 불러 동쪽 방면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때에 梁의 정예병들은 모두 段凝에게 예속되었고 京師에는 단지 保鑾 500騎만 있었다.
이들은 모두 새로 징병한 군사들이라 전투에 투입할 수 없었는데 이들을 왕언장에게 예속시키고 張漢傑이 감독하게 하였다.
왕언장이 遞坊에 이르러 병사가 적어 전쟁에서 패배하여 물러나 中都를 지켰고, 다시 패배하자 親衛兵 백여 騎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당의 장수 夏魯奇가 평소 왕언장과 사이가 좋은 터라 그의 말소리를 알아듣고는 “王鐵槍이다.”라고 하면서, 긴 창을 들어 왕언장을 찌르니 왕언장이 중상을 입고서 말이 넘어져 사로잡혔다.
莊宗이 왕언장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항상 나를 어린아이로 취급하더니 오늘은 승복하겠느냐?”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너는 전투를 잘하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연주를 지키지 않고 중도를 지켰느냐? 중도에는 성벽이며 보루가 없는데 어떻게 굳게 지키겠느냐?”라고 하니,
왕언장이 대답하기를 “대세가 이미 기울었으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라고 하였다. 장종이 측은히 여겨 약을 내려 創傷을 치료해주었다.
王彦章은 武人이니 글을 알지 못하였다. 항상 俗語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忠義를 실천한 것은 대개 天性이었다.
莊宗이 그 날래고 용맹함을 아껴 온전히 목숨을 보전해주고자 사람을 시켜 왕언장을 위로하고 회유하니, 왕언장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이 폐하와 血戰을 벌인 것이 십여 년입니다. 지금 병사는 패배하고 힘은 다하였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또 신은 梁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죽음이 아니고서는 보답할 길이 없거늘, 어찌 아침에는 梁나라를 섬기다가 저녁에는 晉을 섬길 수 있겠으며, 〈그렇게 하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천하 사람들을 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종이 또 明宗을 보내어 가서 회유하게 하였는데, 왕언장이 創傷으로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하고서 명종을 올려다보며 그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며 말하기를 “너는 邈佶烈이 아니냐.
내가 어찌 구차하게 연명하는 사람이겠느냐.”라고 하고는 마침내 죽임을 당하니 향년 61세였다. 晉 高祖 때에 왕언장을 太師에 추증하였다.
王彦章과 같은 시기에 裴約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潞州의 牙將이었다. 莊宗이 李嗣昭를 昭義軍節度使로 삼으니 배약은 그의 裨將으로 澤州를 지켰다.
이사소가 죽고 그 아들 李繼韜가 택주와 노주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梁에 항복하니, 배약이 택주 사람들을 불러놓고서 울며 고하기를 “내가 돌아가신 使君을 섬긴 지 20여 년 동안 사군께서 재산을 나누어 군사를 길러 梁나라에 원수를 갚고자 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사군의 아들은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장사를 끝내기도 전에 君親을 배반하니, 내가 이곳에서 죽을 수는 있어도 그를 따라 梁나라에 갈 수는 없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梁에서 董璋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포위하게 하니 배약이 택주 사람들과 항거하며 수비하면서 장종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장종은 한창 梁의 군대와 黃河에서 싸우면서 이미 〈唐이라는〉 국호를 세웠던 터라,
이계도가 반역하여 梁에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근심하는 기색을 띠었다. 그러다가 배약이 홀로 반역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계도에게 무슨 홀대를 하였으며 배약에게 무슨 후대를 하였길래, 배약은 順逆을 분별해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符存審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택주를 梁나라에 주는 것은 아깝지 않으니, 하나의 州는 쉽게 얻을 수 있어도 배약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다. 네가 시의적절하게 잘 대처할 줄 아니 나를 위하여 배약을 데리고 오라.”라고 하였다.
부존심이 5천의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遼州에 당도하였는데 梁의 군대가 이미 택주를 함락하여 배약은 살해당하였다.
周 世宗 때에 또 劉仁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유인섬은 字가 守惠이니 彭城 사람이다. 아버지인 劉金은 楊行密을 섬겨 濠州와 滁州의 刺史가 되었고 날래고 용맹함으로 명성이 났다.
유인섬은 장수가 되어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將士를 중히 여겼으며 法令이 엄숙하였고 어려서부터 兵書를 대략 깨우쳤다.
南唐을 섬겨 左監門衛將軍, 黃州와 袁州의 刺史가 되어 부임하는 곳마다 잘 다스린다는 이름이 났다. 李景이 親衛軍을 맡게 하였고 武昌軍節度使로 삼았다.
周의 군대가 淮南을 정벌할 때 먼저 李穀을 보내 壽春부터 공격하게 하니, 李景이 장수 劉彦貞을 보내 周의 군대를 막게 하고 劉仁贍을 淸淮軍節度使도 삼아 壽州에 鎭駐하게 하였다.
이곡이 퇴각하여 正陽의 浮橋를 지키니, 유언정은 周의 군대가 퇴각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겁을 먹었다 생각하여 급히 추격하였다.
유인섬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유언정이 따르지 않으니 유인섬이 홀로 병사를 출동시키지 않고 성에서 수비하였다. 유언정은 과연 정양에서 패배하였다.
世宗이 壽州를 공격하여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方舟에 礮를 싣고서 淝河에서부터 물결을 타고 가 성을 공격하였다.
또 큰 대나무 수십만 그루를 묶어 그 위에 版屋을 설치하고서 竹龍이라 이름하고 甲士를 태워 공격하였다.
그리고 水寨를 틔워 그 물결을 비하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공격하기를 정월부터 4월까지 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해에 더위가 극심하고 장맛비가 열흘이나 내려 周나라 군대 營寨의 수심이 몇 자나 되었고 淮水와 淝河가 갑자기 범람하여 礮를 실은 배와 죽룡이 모두 남쪽 강기슭으로 떠내려가 李景 군대에게 불태워져 周나라의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세종이 동쪽으로 濠梁으로 이동하여 李重進을 廬壽都招討使로 삼으니, 이경 또한 元帥인 齊王 李景達 등을 보내 紫金山 아래에 城砦를 벌여 세우게 하고 夾道를 만들어 성안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이중진과 張永德의 두 군대가 서로 의심하면서 협력하지 못하자, 유인섬이 나가서 싸우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이경달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로 인하여 울분이 치밀어 병이 생겼다.
이듬해 정월에 世宗이 다시 淮上에 이르러 紫金山의 城砦를 다 부수고 夾道를 파괴하니, 李景의 군대가 대패하여 장수들이 왕왕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이경의 守將인 廣陵의 馮延魯와 光州의 張紹와 舒州의 周祚와 泰州의 方訥과 泗州의 範再遇 등이 혹은 달아나고 혹은 항복하여 모두 지켜내지 못하니,
군주인 이경과 그의 신하들조차도 모두 두려워 떨면서 表文을 바쳐 稱臣하고 영토를 떼어주고 공물을 바쳐서 정성을 표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劉仁贍만은 굳게 수비하여 항복시킬 수 없었다.
세종이 이경이 보낸 使者 孫晟 등으로 하여금 〈유인섬이 지키는〉 성 아래로 가서 〈항복 사실을〉 알리게 하니, 유인섬의 아들인 劉崇諫이 아버지가 병중임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서 장수들과 出城하여 항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유인섬이 그 자리에서 아들을 참수하라고 명하니 監軍使 周廷構가 中門에서 곡하며 유숭간을 구원하려 하였으나 구원하지 못하였다. 이에 士卒들이 모두 감읍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지키기를 원하였다.
3월에 劉仁贍의 병이 위중하여 이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니, 副使 孫羽가 유인섬의 명의로 거짓 서신을 써서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世宗이 유인섬을 들것에 실어 장막 앞에 데려오도록 명하고서 오랫동안 감탄하고 玉帶와 御馬를 내려주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그날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이 조서를 내리기를 “유인섬은 자신이 섬기던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여 절조를 높이 지켜 흠결이 없었으니 前代의 名臣들 가운데 몇이나 여기에 비길 수 있겠는가. 나의 南征에 그대를 얻은 것이 큰 수확이다.”라고 하고는,
유인섬을 檢校太尉 兼中書令 天平軍節度使에 제수하였는데 유인섬이 명을 받지 못하고 죽으니 향년 58세였다.
세종이 사신을 보내 弔祭하는 한편 喪事에 필요한 물품을 官에서 공급하게 하였으며 彭城郡王으로 追封하고 그 아들 劉崇讚을 懷州刺史로 삼고 莊園과 住宅 한 구역씩을 하사하였다.
李景 또한 유인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太師를 증직하였다. 壽州의 옛 治所는 壽春인데, 세종이 어렵사리 승리하였으므로 마침내 下蔡로 치소를 옮겼다. 그리고 유인섬의 軍鎭을 회복시켜 忠正軍이라 하고 말하기를 “내가 이로써 유인섬의 충절을 표창하노라.”라고 하였다.
오호라! 천하가 梁나라를 미워한 지 오래이다. 그러나 불행히 그 시대에 태어난 선비는 梁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는 것이 옳겠지만,
남의 녹을 받는 자는 반드시 〈자신이 섬기던〉 군주의 國事를 위해 죽는 것이니, 王彦章과 같은 이는 올바르게 죽었다고 이를 만하다. 劉仁贍은 이미 자신의 아들을 죽여 스스로를 증명했으니 어찌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변절할 일이 있겠는가.
지금 ≪周世宗實錄≫에 유인섬의 항복 문서가 실려 있으니, 이는 副使 孫羽 등이 지은 것이다. 세종 때에 王環이 蜀에서 秦州를 수비하였는데,
세종이 공격하여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그 뒤 왕환이 힘이 다하여 항복하니 세종이 그의 충절을 매우 찬탄하였다. 그러나 단지 大將軍으로 삼았을 뿐이다. 세종이 두 사람을 대우한 정도의 차이를 비교해보고 세종이 내린 조서를 살펴보면 유인섬이 항복한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忠臣과 義士는 얻기가 어려웠는데, 五代의 혼란한 때 세 사람은 혹은 軍卒 출신이고 혹은 僞國의 신하 출신이었으니,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