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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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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01.
予覽歐陽公所次死節傳호니 王彦章裴約及劉仁贍尤爲嗚咽하야 或欲泣下
蓋三人者 天之所生이니 非五代兵戈晦冥之際所能沒者
而歐陽公點綴情事 當爲千古絶調 卽如史記漢書 恐多不逮
語曰 世亂 識忠臣이라하니 誠哉 五代之際 不可以爲無人이니 吾得全節之士三人焉하야 作死節傳하노라
王彦章 字子明이니 少爲軍卒하야하야 爲開封府押衙左親從指揮使行營先鋒馬軍使
卽位 遷濮州刺史하고 又徙澶州刺史하다 彦章爲人驍勇有力하야 能跣足履棘行百步
持一鐵槍하야 騎而馳突하야 奮疾如飛어늘 而他人莫能擧也하니 軍中號王鐵槍하다
梁分魏相六州하야 爲兩鎭할새不從하야 遣彦章將五百騎入魏하야以虞變한대
魏軍果亂하야 夜攻彦章하니 彦章南走 魏人降晉하고 晉軍攻破澶州하야 虜彦章妻子하야 歸之太原하야 賜以第宅하고 供給甚備
間遣使者하야 招彦章하니 彦章斬其使者以自絶이라 然晉人畏彦章之在梁也하야 必欲招致之하야 待其妻子愈厚하다
自梁失魏博으로 與晉夾河而軍할새 彦章常爲先鋒이라 遷汝鄭二州防禦使匡國軍節度使北面行營副招討使하고 又徙宣義軍節度使하다
是時 晉已盡有河北하야 하고 築河南北爲兩城하야 號夾寨
而梁末帝昏亂하야 小人趙巖張漢傑等用事하야 大臣宿將多被讒間하니 彦章雖爲招討副使 而謀不見用이라 龍德三年夏 晉取鄆州하니 梁人大恐이라
宰相敬翔顧事急하야 以繩內靴中하야 入見末帝하야 泣曰 先帝取天下하고 不以臣爲不肖하야 所謀無不用이러니
今彊敵未滅 陛下棄忽臣言하니 臣身不用이면 不如死라하고 乃引繩將自經이라
末帝使人止之하고 問所欲言하니 翔曰 事急矣 非彦章이면 不可라하다
末帝乃召彦章하야 爲招討使하고 以段凝爲副하다 末帝問破敵之期하니 彦章對曰 三日이라하니 左右皆失笑러라
彦章受命而出하야 馳兩日至滑州하야 置酒大會하고 陰遣人具舟於楊村하고
命甲士六百皆持巨斧하며 載冶者하고 具韛炭하야 乘流而下
彦章會飮이라가 酒半 佯起更衣하고 引精兵數千하야 沿河以趨德勝이라
舟兵擧鎖燒斷之하고 因以巨斧斬浮橋하니 而彦章引兵急擊南城이라 浮橋斷하고 南城遂破하니 蓋三日矣러라
是時 在魏하고 以朱守殷守夾寨한대 聞彦章爲招討使하고 驚曰 彦章驍勇이라 吾嘗避其鋒하니 非守殷敵也
然彦章兵少하야 利於速戰이니 必急攻我南城하리라하고 卽馳騎救之
行二十里하야 而得夾寨報者하니 曰 彦章兵已至라하야늘 比至而南城破矣러라
莊宗徹北城爲栰하야하야 與彦章俱浮於河하야 各行一岸하야 每舟栰相及 輒戰하야 一日數十接이라
彦章至楊劉하야 攻之幾下 晉人築壘博州東岸이라 彦章引兵攻之不克하고楊劉하야 戰敗
是時 段凝已有異志하야 與趙巖張漢傑交通이라 彦章素剛하야 憤梁日削하고 而嫉巖等所爲하야
嘗謂人曰 俟吾破賊還하야 誅姦臣以謝天下라하니 巖等聞之懼하야 與凝叶力傾之러라
其破南城也 彦章與凝各爲捷書以聞한대 凝遣人告巖等하야 匿彦章書而上己書
末帝初疑其事러니 已而 使者至軍하야 獨賜勞凝而不及彦章하니 軍士皆失色이라
及楊劉之敗也 凝乃上書言彦章使酒輕敵而至於敗라하니 趙巖等從中日夜毁之하야 乃罷彦章하고 以凝爲招討使
彦章馳至京師入見하야 以笏畫地하야 自陳勝敗之跡하니 巖等諷有司하야 劾彦章不恭하야 勒還第하다
唐兵攻兗州하니 末帝召彦章하야 使守捉東路 是時 梁之勝兵皆屬段凝하고 京師秪有五百騎하니
皆新募之兵이라 不可用이어늘 乃以屬彦章하고 而以張漢傑監之
彦章至遞坊하야 以兵少戰敗하야 退保中都하고 又敗 與其牙兵百餘騎死戰이라
唐將夏魯奇素與彦章善하야 識其語音曰 王鐵槍也라하고 擧矟刺之하니 彦章傷重하야 馬踣被擒이라
莊宗見之曰 爾常以孺子待我러니 今日服乎아하고 又曰 爾善戰者어늘 何不守兗州而守中都 中都無壁壘어늘 何以自固오하니
彦章對曰 大事已去 非人力可爲라하니 莊宗惻然하야 賜藥以封其創하다
彦章 武人이니 不知書 常爲俚語謂人曰 豹死留皮하고 人死留名이라하니 其於忠義 蓋天性也
莊宗愛其驍勇하야 欲全活之하야 使人慰諭彦章하니 彦章謝曰 臣與陛下血戰十餘年이라 今兵敗力窮하니 不死何待
且臣受梁恩하니 非死不能報어늘 豈有朝事梁而暮事晉이며 生何面目見天下之人乎아하다
莊宗又遣하야 往諭之한대 彦章病創하야 臥不能起하야 仰顧明宗하고 呼其小字曰 汝非邈佶烈乎
我豈苟活者리오하고 遂見殺하니 年六十一이라 晉高祖時 追贈彦章太師하다
與彦章同時 有裴約者하니 潞州之牙將也 莊宗以李嗣昭爲昭義軍節度使하니 約以裨將守澤州
嗣昭卒하고 其子繼韜以澤潞叛降于梁하니 約召其州人하야 泣而諭曰 吾事故使二十餘年 見其分財饗士하야 欲報梁仇러니 不幸早世
今郞君父喪未葬 違背君親하니 吾能死于此 不能從以歸梁也라하니 衆皆感泣하다
梁遣董璋率兵圍之하니 約與州人拒守하고 求救於莊宗이라 是時 莊宗方與梁人戰河上이라가 建大號
聞繼韜叛降梁하고 頗有憂色이러니 及聞約獨不叛하야 喜曰 吾於繼韜何薄이며 於約何厚완대 而約能分逆順邪아하고
吾不惜澤州與梁이니 一州易得이어니와 約難得也로다 爾識機便하니 爲我取約來하라하다
存審以五千騎馳至러니 而梁兵已破澤州하야 約見殺하다
하야 又有劉仁贍者焉이라 仁贍 字守惠이니 彭城人也 父金事楊行密하야 爲濠滁二州刺史하고 以驍勇知名이라
仁贍爲將하야 輕財重士하고 法令嚴肅하고 少略通兵書
事南唐하야 爲左監門衛將軍黃袁二州刺史하야 所至稱治 使掌親軍하고 以爲武昌軍節度使하다
周師征淮할새 先遣李穀하야 攻自壽春하니 景遣將劉彦貞하야 拒周兵하고 以仁贍爲淸淮軍節度使하야 鎭壽州하다
李穀退守正陽浮橋하니 彦貞見周兵之却하고 意其怯하야 急追之
仁贍以爲不可어늘 彦貞不聽하니 仁贍獨按兵城守 彦貞果敗於正陽하다
世宗攻壽州하야 圍之數重하고하야中流擊其城이라
又束巨竹數十萬竿하야 上施版屋하야 號爲竹龍하야 載甲士以攻之하고
又決其하야 入于淝河하야 攻之百端하야 自正月 至于四月하되 不能下러니
而歲大暑하고 霖雨彌旬하야 周兵營寨水深數尺하고 淮淝暴漲하야 礮舟竹龍 皆飄南岸하야 爲景兵所焚하야 周兵多死러라
世宗東趨하야 以李重進爲廬壽都招討使하니 景亦遣其元帥齊王景達等하야 列砦하고 爲夾道하야 以屬城中하다
而重進與張永德兩軍相疑不協일새 仁贍屢請出戰이로대 景達不許하니 由是憤惋成疾하다
하야 盡破紫金山砦하고 壞其夾道하니 景兵大敗하야 諸將往往見擒이라
而景之守將廣陵馮延魯, 光州張紹, 舒州周祚, 泰州方訥, 泗州範再遇等 或走或降하야 皆不能守하니
雖景君臣이라도 亦皆震懾하야 奉表稱臣하고 願割土地輸貢賦하야 以效誠款이어늘 而仁贍獨堅守하야 不可下러라
하니 仁贍子崇諫幸其父病하야 謀與諸將出降이라
仁贍立命斬之하니 監軍使周廷構哭於中門하되 救之不得이라 於是 士卒皆感泣하야 願以死守하다
三月 仁贍病甚하야 已不知人하니 其副使孫羽詐爲仁贍書하야 以城降이라
世宗命舁仁贍至帳前하야 嘆嗟久之하고 賜以玉帶御馬하야 復使入城養疾한대 是日卒하다
制曰 劉仁贍盡忠所事하야 抗節無虧하니 前代名臣幾人可比 予之南伐 得爾爲多라하고
乃拜仁贍檢校太尉兼中書令天平軍節度使어늘 仁贍不能受命而卒하니 年五十八이라
世宗遣使吊祭하고 喪事官給하며 追封彭城郡王하고 以其子崇讚爲懷州刺史하며 賜莊宅各一區하다
李景聞仁贍卒하고 亦贈太師하다 壽州故治壽春이니 世宗以其難克으로 遂徙城下蔡하고하고 曰 吾以旌仁贍之節也라하다
嗚呼 天下惡梁久矣 然士之不幸而生其時者 不爲之臣可也어니와
其食人之祿者 必死人之事 如彦章者 可謂得其死哉인저 仁贍旣殺其子以自明矣 豈有垂死而變節者乎
載仁贍降書하니 蓋其副使孫羽等所爲也 當世宗時하야 어늘
攻之久不下라가 其後力屈而降하니 世宗頗嗟其忠이나 然止以爲大將軍이라 視世宗待二人之薄厚而考其制書 乃知仁贍非降者也
自古忠臣義士之難得也어늘 五代之亂 三人者或出於軍卒하고 或出於僞國之臣하니 可勝嘆哉 可勝嘆哉


01. 死節한 인물의 傳記
내가 歐陽公編次한 〈死節傳〉을 보니, 王彦章裴約劉仁贍의 사적에서 더욱 목이 메어 혹 눈물이 흘러내리려 하였다.
대개 이 세 사람은 하늘의 間氣로 태어난 이들이니, 五代의 암흑과도 같았던 전란의 시절이 그 자취를 매몰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구양공이 이들의 사적을 모아 엮은 글은 천고의 絶調가 되기에 마땅하니, ≪史記≫와 ≪漢書≫ 같은 경우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을 듯하다.
“세상이 혼란해지면 忠臣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五代 시절에 사람이 없었다고 할 수 없으니, 내가 節操를 온전히 한 선비 세 사람을 얻어 〈死節傳〉을 짓는다.
王彦章子明이니 鄆州 壽昌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 군졸이 되어 太祖를 섬겨 開封府押衙 左親從指揮使 行營先鋒馬軍使가 되었다.
末帝가 즉위하자 濮州刺史로 승진하고 또 澶州刺史로 자리를 옮겼다. 왕언장은 사람됨이 날래고 용력이 있으며 힘이 좋아서 맨발로 가시나무를 밟으며 백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
鐵槍 하나를 쥐고서 말을 타고 돌진하여 나는 듯이 신속히 내달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의 창을〉 들 수조차 없었으니 군중에서 王鐵槍이라고 불렀다.
이 천하를 놓고 다투어 서로 강적이 되었는데, 王彦章만은 마음속으로 항상 晉王을 가볍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亞次는 닭싸움이나 시키는 어린아이일 뿐이니,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였다.
魏州相州 등 여섯 주를 나누어 兩鎭으로 만들면서, 魏軍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왕언장에게 5백의 騎兵을 거느리고 로 진입하여 金波亭에 주둔하면서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위군이 과연 난을 일으켜 밤에 왕언장을 공격하니 왕언장이 남쪽으로 달아났다. 魏人에 투항하고 晉軍澶州를 격파하고서 왕언장의 처자식을 포로로 잡고 太原으로 보내 저택을 하사하고 부족함 없이 물자를 잘 대주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使者를 보내 왕언장을 부르니, 왕언장이 사자의 목을 벰으로써 스스로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晉人은 왕언장이 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반드시 자기편으로 불러 오고자 하여 왕언장의 처자식을 매우 두텁게 대우하였다.
魏州博州를 잃고 나서 黃河를 끼고 과 대치할 때, 王彦章이 항상 선봉이 되었다. 승진하여 汝鄭二州防禦使 匡國軍節度使 北面行營副招討使가 되고, 다시 宣義軍節度使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에 이 이미 河北의 땅을 다 차지하고서 쇠사슬로 德勝口를 차단하고 황하 남북으로 두 개의 성을 쌓고 ‘夾寨’라고 불렀다.
末帝昏暗하여 소인인 趙巖張漢傑 등이 권력을 전횡하여 大臣宿將들이 참소를 많이 받으니, 왕언장이 비록 招討副使의 신분이었으나 계책이 쓰이지 못하였다. 龍德 3년(923) 여름에 鄆州를 차지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재상 敬翔이 사태가 위급한 것을 보고 끈을 가죽신 속에 넣고서 들어와 말제를 알현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先帝께서 천하를 취하시고 신을 못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으시고서 신의 계책을 쓰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강한 적이 망하기도 전에 폐하께서 신의 말을 버리고 소홀히 하시니 신이 쓰이지 못한다면 죽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고서는, 끈을 〈목에 묶어〉 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말제가 사람을 시켜 저지하고 하고자 하는 말을 물으니, 경상이 말하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왕언장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말제가 이에 왕언장을 불러 招討使로 삼고 段凝招討副使로 삼았다. 말제가 얼마 만에 적을 격파할 수 있는지 묻자, 왕언장이 사흘이라고 대답하니 좌우에서 모두 비웃었다.
王彦章이 명을 받고 출정하여 이틀을 달려 滑州에 도착해서 크게 술자리를 마련하고서 몰래 사람을 보내 楊村에 미리 배를 대어두게 하고,
甲士 6백 인에게 명하여 모두 큰 도끼를 들게 하였으며, 대장장이를 배에 태우고 풀무와 숯을 갖추어 물결을 타고 내려가게 하였다.
왕언장이 사람들과 모여 술을 마시다가 주흥이 반쯤 무르익었을 때 거짓으로 일어나 변소에 가는 척하고는 정예병 수천 명을 이끌고서 黃河를 따라 德勝으로 달려갔다.
배를 탄 병사들이 쇠사슬을 들어 불태워 잘라버리고 이어서 큰 도끼로 浮橋를 끊어버리니, 왕언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급히 南城을 공격하였다. 부교가 끊어지고 남성이 마침내 함락되니 3일이 걸렸다.
이때에 莊宗魏州에 있으면서 朱守殷에게 夾寨를 수비하게 하였는데, 王彦章招討使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언장은 날래고 용맹하여 내가 그 銳鋒을 피해왔으니 수은이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언장은 兵力이 적어 速戰速決이 유리하니 반드시 우리 南城을 급히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즉시 말을 달려 구원하러 갔다.
20리를 가서 협채의 소식을 보고하러 오는 자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언장의 병사가 이미 당도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남성에 당도해보니 남성이 함락되어 있었다.
장종이 北城을 철거하여 뗏목을 만들어 楊劉로 내려가, 왕언장과 함께 黃河 위에서 배를 타고서 각각 한쪽 江岸으로 가서 서로의 배와 뗏목이 접촉할 때마다 전투를 벌여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교전하였다.
왕언장이 양류에 당도하여 공격해서 거의 함락할 지경에 이르자, 의 군대가 博州의 동쪽 강안에 보루를 쌓았다. 왕언장이 병사를 이끌고 가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다시 양류를 공격하다가 패전하였다.
이때에 段凝이 이미 다른 뜻을 품고서 趙巖張漢傑 등과 결탁하였다. 王彦章은 평소 강직하여 의 영토가 날로 줄어드는 것에 분개하고 조암 등이 하는 짓을 미워하여,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적들을 격파하고 돌아온 뒤 간신들을 주살하여 천하에 보답하겠다.”라고 하니, 조암 등이 그 말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단응과 힘을 합쳐 왕언장을 해치려 하였다.
南城이 격파되었을 때 왕언장과 단응이 각각 승첩 보고서를 올렸는데, 단응이 사람을 보내 조암 등에게 고하여 왕언장의 보고서를 숨기고 자신의 보고서를 올리게 하였다.
末帝가 처음에 그 일을 의아하게 여겼는데, 얼마 뒤 사자가 軍中에 당도하여 단응의 노고만 치하하고 왕언장에게 아무 보상도 내리지 않으니 군사들이 모두 失色하였다.
楊劉에서 패배하자 단응이 글을 올려 왕언장이 술에 빠져 적을 가볍게 여겨 패배하게 되었다고 하니, 조암 등이 중간에서 밤낮으로 헐뜯어 마침내 왕언장을 파직하고 단응을 招討使로 삼았다.
왕언장이 말을 달려 도성에 와서 궁중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고 로 땅을 그어가며 승패의 경과를 스스로 진달하니, 조암 등이 有司를 사주하여 왕언장을 不恭罪로 탄핵하여 강제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의 병사가 兗州를 공격하니 末帝王彦章을 불러 동쪽 방면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때에 의 정예병들은 모두 段凝에게 예속되었고 京師에는 단지 保鑾 500만 있었다.
이들은 모두 새로 징병한 군사들이라 전투에 투입할 수 없었는데 이들을 왕언장에게 예속시키고 張漢傑이 감독하게 하였다.
왕언장이 遞坊에 이르러 병사가 적어 전쟁에서 패배하여 물러나 中都를 지켰고, 다시 패배하자 親衛兵 백여 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당의 장수 夏魯奇가 평소 왕언장과 사이가 좋은 터라 그의 말소리를 알아듣고는 “王鐵槍이다.”라고 하면서, 긴 창을 들어 왕언장을 찌르니 왕언장이 중상을 입고서 말이 넘어져 사로잡혔다.
莊宗이 왕언장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항상 나를 어린아이로 취급하더니 오늘은 승복하겠느냐?”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너는 전투를 잘하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연주를 지키지 않고 중도를 지켰느냐? 중도에는 성벽이며 보루가 없는데 어떻게 굳게 지키겠느냐?”라고 하니,
왕언장이 대답하기를 “대세가 이미 기울었으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라고 하였다. 장종이 측은히 여겨 약을 내려 創傷을 치료해주었다.
王彦章武人이니 글을 알지 못하였다. 항상 俗語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忠義를 실천한 것은 대개 天性이었다.
莊宗이 그 날래고 용맹함을 아껴 온전히 목숨을 보전해주고자 사람을 시켜 왕언장을 위로하고 회유하니, 왕언장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이 폐하와 血戰을 벌인 것이 십여 년입니다. 지금 병사는 패배하고 힘은 다하였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또 신은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죽음이 아니고서는 보답할 길이 없거늘, 어찌 아침에는 나라를 섬기다가 저녁에는 을 섬길 수 있겠으며, 〈그렇게 하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천하 사람들을 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종이 또 明宗을 보내어 가서 회유하게 하였는데, 왕언장이 創傷으로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하고서 명종을 올려다보며 그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며 말하기를 “너는 邈佶烈이 아니냐.
내가 어찌 구차하게 연명하는 사람이겠느냐.”라고 하고는 마침내 죽임을 당하니 향년 61세였다. 高祖 때에 왕언장을 太師에 추증하였다.
王彦章과 같은 시기에 裴約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潞州牙將이었다. 莊宗李嗣昭昭義軍節度使로 삼으니 배약은 그의 裨將으로 澤州를 지켰다.
이사소가 죽고 그 아들 李繼韜가 택주와 노주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에 항복하니, 배약이 택주 사람들을 불러놓고서 울며 고하기를 “내가 돌아가신 使君을 섬긴 지 20여 년 동안 사군께서 재산을 나누어 군사를 길러 나라에 원수를 갚고자 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사군의 아들은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장사를 끝내기도 전에 君親을 배반하니, 내가 이곳에서 죽을 수는 있어도 그를 따라 나라에 갈 수는 없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에서 董璋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포위하게 하니 배약이 택주 사람들과 항거하며 수비하면서 장종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장종은 한창 의 군대와 黃河에서 싸우면서 이미 〈이라는〉 국호를 세웠던 터라,
이계도가 반역하여 에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근심하는 기색을 띠었다. 그러다가 배약이 홀로 반역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계도에게 무슨 홀대를 하였으며 배약에게 무슨 후대를 하였길래, 배약은 順逆을 분별해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符存審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택주를 나라에 주는 것은 아깝지 않으니, 하나의 는 쉽게 얻을 수 있어도 배약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다. 네가 시의적절하게 잘 대처할 줄 아니 나를 위하여 배약을 데리고 오라.”라고 하였다.
부존심이 5천의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遼州에 당도하였는데 의 군대가 이미 택주를 함락하여 배약은 살해당하였다.
世宗 때에 또 劉仁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유인섬은 守惠이니 彭城 사람이다. 아버지인 劉金楊行密을 섬겨 濠州滁州刺史가 되었고 날래고 용맹함으로 명성이 났다.
유인섬은 장수가 되어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將士를 중히 여겼으며 法令이 엄숙하였고 어려서부터 兵書를 대략 깨우쳤다.
南唐을 섬겨 左監門衛將軍, 黃州袁州刺史가 되어 부임하는 곳마다 잘 다스린다는 이름이 났다. 李景親衛軍을 맡게 하였고 武昌軍節度使로 삼았다.
의 군대가 淮南을 정벌할 때 먼저 李穀을 보내 壽春부터 공격하게 하니, 李景이 장수 劉彦貞을 보내 의 군대를 막게 하고 劉仁贍淸淮軍節度使도 삼아 壽州鎭駐하게 하였다.
이곡이 퇴각하여 正陽浮橋를 지키니, 유언정은 의 군대가 퇴각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겁을 먹었다 생각하여 급히 추격하였다.
유인섬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유언정이 따르지 않으니 유인섬이 홀로 병사를 출동시키지 않고 성에서 수비하였다. 유언정은 과연 정양에서 패배하였다.
世宗壽州를 공격하여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方舟를 싣고서 淝河에서부터 물결을 타고 가 성을 공격하였다.
또 큰 대나무 수십만 그루를 묶어 그 위에 版屋을 설치하고서 竹龍이라 이름하고 甲士를 태워 공격하였다.
그리고 水寨를 틔워 그 물결을 비하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공격하기를 정월부터 4월까지 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해에 더위가 극심하고 장맛비가 열흘이나 내려 나라 군대 營寨의 수심이 몇 자나 되었고 淮水淝河가 갑자기 범람하여 를 실은 배와 죽룡이 모두 남쪽 강기슭으로 떠내려가 李景 군대에게 불태워져 나라의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세종이 동쪽으로 濠梁으로 이동하여 李重進廬壽都招討使로 삼으니, 이경 또한 元帥齊王 李景達 등을 보내 紫金山 아래에 城砦를 벌여 세우게 하고 夾道를 만들어 성안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이중진과 張永德의 두 군대가 서로 의심하면서 협력하지 못하자, 유인섬이 나가서 싸우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이경달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로 인하여 울분이 치밀어 병이 생겼다.
이듬해 정월에 世宗이 다시 淮上에 이르러 紫金山城砦를 다 부수고 夾道를 파괴하니, 李景의 군대가 대패하여 장수들이 왕왕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이경의 守將廣陵馮延魯光州張紹舒州周祚泰州方訥泗州範再遇 등이 혹은 달아나고 혹은 항복하여 모두 지켜내지 못하니,
군주인 이경과 그의 신하들조차도 모두 두려워 떨면서 表文을 바쳐 稱臣하고 영토를 떼어주고 공물을 바쳐서 정성을 표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劉仁贍만은 굳게 수비하여 항복시킬 수 없었다.
세종이 이경이 보낸 使者 孫晟 등으로 하여금 〈유인섬이 지키는〉 성 아래로 가서 〈항복 사실을〉 알리게 하니, 유인섬의 아들인 劉崇諫이 아버지가 병중임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서 장수들과 出城하여 항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유인섬이 그 자리에서 아들을 참수하라고 명하니 監軍使 周廷構中門에서 곡하며 유숭간을 구원하려 하였으나 구원하지 못하였다. 이에 士卒들이 모두 감읍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지키기를 원하였다.
3월에 劉仁贍의 병이 위중하여 이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니, 副使 孫羽가 유인섬의 명의로 거짓 서신을 써서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世宗이 유인섬을 들것에 실어 장막 앞에 데려오도록 명하고서 오랫동안 감탄하고 玉帶御馬를 내려주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그날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이 조서를 내리기를 “유인섬은 자신이 섬기던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여 절조를 높이 지켜 흠결이 없었으니 前代名臣들 가운데 몇이나 여기에 비길 수 있겠는가. 나의 南征에 그대를 얻은 것이 큰 수확이다.”라고 하고는,
유인섬을 檢校太尉 兼中書令 天平軍節度使에 제수하였는데 유인섬이 명을 받지 못하고 죽으니 향년 58세였다.
세종이 사신을 보내 弔祭하는 한편 喪事에 필요한 물품을 에서 공급하게 하였으며 彭城郡王으로 追封하고 그 아들 劉崇讚懷州刺史로 삼고 莊園住宅 한 구역씩을 하사하였다.
李景 또한 유인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太師를 증직하였다. 壽州의 옛 治所壽春인데, 세종이 어렵사리 승리하였으므로 마침내 下蔡로 치소를 옮겼다. 그리고 유인섬의 軍鎭을 회복시켜 忠正軍이라 하고 말하기를 “내가 이로써 유인섬의 충절을 표창하노라.”라고 하였다.
오호라! 천하가 나라를 미워한 지 오래이다. 그러나 불행히 그 시대에 태어난 선비는 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는 것이 옳겠지만,
남의 녹을 받는 자는 반드시 〈자신이 섬기던〉 군주의 國事를 위해 죽는 것이니, 王彦章과 같은 이는 올바르게 죽었다고 이를 만하다. 劉仁贍은 이미 자신의 아들을 죽여 스스로를 증명했으니 어찌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변절할 일이 있겠는가.
지금 ≪周世宗實錄≫에 유인섬의 항복 문서가 실려 있으니, 이는 副使 孫羽 등이 지은 것이다. 세종 때에 王環에서 秦州를 수비하였는데,
세종이 공격하여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그 뒤 왕환이 힘이 다하여 항복하니 세종이 그의 충절을 매우 찬탄하였다. 그러나 단지 大將軍으로 삼았을 뿐이다. 세종이 두 사람을 대우한 정도의 차이를 비교해보고 세종이 내린 조서를 살펴보면 유인섬이 항복한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忠臣義士는 얻기가 어려웠는데, 五代의 혼란한 때 세 사람은 혹은 軍卒 출신이고 혹은 僞國의 신하 출신이었으니,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死節傳 : 〈死節傳〉은 節操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인물들의 列傳이다. 이 열전은 군주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들의 열전이라는 점에서 〈死事傳〉과 동일한 듯하다. 그러나 〈사절전〉의 인물들은, 國事를 수행하다 목숨을 바쳤다는 외적인 功業 외에, 내적으로 일관된 절조를 바탕으로 이룬 뛰어난 행적과 功烈이 〈사사전〉의 인물들에 비해 格의 차이가 있다. 이들은 倫常이 땅에 떨어지고 節義가 의미를 상실한 五代의 極亂한 시절에 節行이 絶倫했던 인물들로, 특별히 항목을 세워 따로 立傳할 만한 필요성이 있는 인물들이다.
死節이 死事와 구분되는 지점은 歐陽脩가 〈사사전〉의 小序에 “내가 五代 시절에 절조를 온전히 한 선비는 세 사람을 알 뿐이요, 애초에는 우뚝한 절조가 없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섬기던 군주의 國事를 위해 죽은 자는 열다섯 사람을 아는데, 전쟁 중에 죽은 사람은 그 가운데에 끼이지 못한다.”라고 한 부분에서 명확해진다.
≪舊五代史≫가 인물의 열전을 단순히 각 나라에 分屬시킨 반면, ≪新五代史≫는 도덕 명분을 더욱 중시하여 이에 따른 항목을 세우고 史論을 부기하였다. 이렇게 편차된 것은 구양수가 역사를 통해 적극적인 勸懲을 행하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사절전〉에는 王彦章‧裴約‧劉仁贍 단 세 명만이 입전되어 있다. 그만큼 오대 전 시기를 통틀어 절조를 온전히 한 사람이 드물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王彦章(863~923 字가 子明‧賢明으로 後梁의 신하이다. 왕언장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21 〈梁書 第21 列傳11〉과 ≪新五代史≫ 卷32 〈死節 第20〉에 실려 있다.
왕언장은 勇力이 출중하여 일찍부터 후량 太祖 朱溫의 휘하에서 出身하여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무거운 鐵槍 하나를 잘 휘둘러 王鐵槍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당시 후량과 대립하던 晉(훗날의 後唐 그의 용맹을 두려워할 정도였는데, 후량의 末帝가 즉위하여 趙巖과 張漢傑 등의 小人이 권력을 전횡하자 機務에서 배제되어 그의 계책이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후당과 결전을 벌여 끝까지 자신의 절조를 지켜 전투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도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후당 莊宗 李存勖의 투항 권유를 거절하고 꿋꿋하게 죽음으로 나아갔다.
본 열전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던 왕언장이 재상 敬翔의 목숨을 건 諫言으로 出戰하여 黃河 연안인 德勝에서 晉(後唐 군대와 일전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 전투에서 왕언장과 후당 장종 이존욱이 서로의 계책을 모두 쏟아내어 승패를 주고받는 부분은 매우 생동감이 넘치며 왕언장의 민첩하고 용맹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왕언장에 대한 구양수의 평가는 열전에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지만 구양수의 〈王彦章畫像記〉에 구양수 개인의 감정과 열전 서술의 배경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唐宋八大家文抄≫에도 실려 있는데 왕언장의 열전과 더불어 表裏가 될 만하다.
구양수는 이 글에서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事勢를 관망하는 마음을 품었으나 공만은 분연히 굳건하게 흔들림 없는 자세를 취하여 조금도 굽히거나 나태하지 않았으니, 뜻은 비록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죽음으로 충성하였다. 공이 죽고 나자 후량 또한 멸망하였으니 슬프도다! 五代의 全 시기가 겨우 50년밖에 되지 않는데 13명의 황제가 교체되면서 다섯 번 나라가 바뀌고 여덟 개의 성씨가 갈렸으니, 선비로 불행히도 그때에 태어나 그 몸을 더럽히지 않고 그 절의를 온전히 할 수 있었던 자가 드물다.……내가 ≪五代史記≫를 편찬할 적에 善한 것을 선하게 여기고 惡한 것을 미워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의 傳을 지음에 이르러 비분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되, 아쉽게도 ≪구오대사≫의 기록은 소략하여 공의 사적을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였다. 康定 원년(1040) 내가 節度判官으로 이곳에 와서 滑州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공의 손자 睿가 기록한 家傳을 얻어 보니, ≪구오대사≫의 기록보다 사적이 퍽 많았다.……공의 가전을 읽다가 덕승에서 勝捷한 부분에 이르러서야 옛날의 명장은 반드시 기습을 펼친 후에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는 천하의 위대한 대장부가 할 수 있는 일이지 평범한 계책에 얽매여 있는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공은 특히 창을 잘 다루었으니 당시에 왕철창이라고 불렸다.……창 한 자루를 잘 다루는 용맹스러운 장수가 당시에 어찌 없었겠는가마는, 공의 이름만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것은 아마도 그 忠義의 절조가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구양수가 왕언장 등을 포함한 인물들을 따로 뽑아내 死節의 항목을 세운 이유와 왕언장의 열전을 기술하기 위해 참고한 자료, 왕언장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明나라 때 徐一䕫의 ≪始豐稿≫ 卷10 〈歐陽公書王彦章事〉에서는, 구양수 당시에 趙元昊가 반란을 일으켜 오랜 세월 쉬고 있던 군사를 움직이게 되었는데 구양수가 奇兵을 써서 승리를 취해야 한다는 논의를 펼쳤음에도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은 사정이 있었고 이러한 사정으로 구양수가 왕언장의 사적에 특별한 감회가 인 것이라 하면서, “옛사람은 글을 지을 때 그저 짓지 않았으니, 대개 반드시 목적이 있어 지었다.……공이 梁나라 장수 王彦章이 奇兵을 잘 쓴다고 여겼으므로 그 사적에 유독 마음을 두었다.[古人爲文非徒然也 蓋必有爲而作……公以梁將王彦章之善於用奇也 故於其事 獨惓惓焉]”라고 하였다.
裴約(?~922 潞州의 牙將 출신으로 後唐의 신하이다. 배약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52 〈唐書 第28 列傳4〉와 ≪新五代史≫ 卷32 〈死節 第20〉에 실려 있는데, 모두 배약이 澤州를 지키다가 殉節한 내용만 간략히 기술하였다.
배약은 원래 昭義軍節度使 李嗣昭를 섬겼는데 그가 죽자 그 아들 李繼韜가 後梁에 항복하니, 배약이 택주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성을 수비하면서 後唐 莊宗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장종이 택주는 아깝지 않으나 배약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다고 하면서 구원병을 보냈으나 이미 성이 함락되어 배약은 살해당하였다.
배약의 자세한 世系와 行歷은 알 수 없고 이상의 사실만이 기재되어 있으나, ≪신오대사≫의 史論 외에 ≪구오대사≫의 史評에도 “배약은 裨將의 신분으로 忠烈을 바쳤으니 더욱 귀하게 여길 만하다.[裴約以偏裨而效忠烈 尤可貴也]”라고 하였고, ≪山西通志≫ 등에 宋나라 때 택주의 鳳臺縣에 후당의 사절한 비장 배약을 위해 旌忠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祀典에 列書하였다는 등의 기사가 보이는 것을 보면, 후대까지도 절의를 지킨 인물로 칭송받았음을 알 수 있다.
劉仁贍(900~957 字가 守惠로 彭城 사람이며, 南唐의 신하이다. 유인섬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129 〈周書 第19 列傳9〉와 ≪新五代史≫ 卷32 〈死節 第20〉에 실려 있다.
유인섬이 남당에서 벼슬하던 시절에는 이미 江北에서 後周 世宗이 활약하며 통일의 기반을 닦고 남당을 압박해오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남당의 많은 장수들이 후주의 군대를 맞아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거나 항복하였고, 결국에는 남당의 군주 李景 역시 表文을 바쳐 稱臣하며 講和를 구걸하는 처지였다.
이 무렵 남당에서는 드물게 후주의 군대와 맞서 싸워 항복시키지 못한 장수가 바로 유인섬이었는데, 당시 유인섬은 이미 병이 위중한 상태였다. 그의 아들이 그 틈에 장수들과 항복을 모의하자 유인섬은 아들을 斬首할 것을 명할 정도로 자신의 절조를 바꾸지 않았다. 결국 유인섬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중태에 빠지자 副使 孫羽가 유인섬의 명의로 항복 문서를 꾸며 투항하였고 유인섬은 이내 병으로 사망하였다.
마지막의 항복 사실로 인해 자칫 유인섬은 〈死節傳〉에 실리지 못할 수도 있었으나, 구양수는 사론에서 아들을 죽일 정도로 절조가 굳었던 유인섬이 변절한 것이 아니라 부사 손우가 항복한 것임을 여러 가지 사실을 들어 논증하고 유인섬을 忠臣義士의 반열에 두었다.
역주2 間氣 : 빼어난 인물이 세상에 드물게 품부받고 태어나는 天地의 특수한 기운을 말한다. 영웅과 위인들은 위로 星象의 精氣에 응하여 천지간의 특수한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는데, 세대를 격하여[間世] 드물게 나온다는 데서 온 말이다. 孟子가 “5백 년 만에 반드시 王者가 태어나는데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인물이 있다.[五百年必有王者興 其間必有名世者]”라고 하였다.(≪孟子≫ 〈公孫丑 下〉)
역주3 鄆州壽昌人也 : ≪五代史記纂誤補≫ 卷3에 “삼가 살펴보건대, ≪唐書≫ 〈地理志〉에 鄆州에 壽張縣은 있어도 壽昌縣은 없다. 歐陽公의 〈王彦章畫像記〉에도 壽張人이라 하였으니 이 부분은 오류이다.[謹按唐書地理志鄆州有壽張縣 無壽昌縣 歐陽公王彦章畫像記亦作壽張人 此誤]”라고 하였다. ≪舊唐書≫ 卷38 〈地理志〉와 ≪新唐書≫ 卷38 〈地理志〉에 모두 壽張이 등재되어 있다.
역주4 梁太祖 : 朱全忠(852~912. 宋州 碭山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朱三이다. 처음에는 黃巢를 따라 同州防御使가 되었다가 唐나라에 항복하여 河中行營招討副使가 되고 全忠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황소를 격파하고 李克用에 대항한 공으로 梁王에 봉해지고 宣武‧宣宜‧護國‧忠武 네 鎭의 節度使가 되었다. 唐 昭宗을 죽이고 後梁을 건국하였다. 6년 동안 재위하다가 乾化 2년(912) 아들 朱友珪에게 살해되었다.
역주5 末帝 : 朱友貞(888~923. 後梁 太祖 朱全忠의 셋째 아들로 均王에 봉해졌다. 朱友珪가 부친을 죽이고 즉위하자 얼마 뒤 병사를 일으켜 주우규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王彦章이 晉王 李存勖과 싸우다 패하여 汴京이 함락되자 신하인 皇甫麟의 손을 빌려 목숨을 끊었고 이로써 후량은 멸망하였다.
역주6 梁晉爭天下……獨彦章心常輕晉王 : 여기에서의 晉은 정식으로 건국된 나라는 아니고, 太原을 중심으로 한 山西 지방의 군벌로 唐나라로부터 晉王에 봉해진 李克用의 세력을 가리킨다. 이극용이 죽고 그의 아들 李存勖이 晉王의 작위를 세습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진왕은 바로 이존욱을 가리킨다. 이존욱은 후에 後唐을 건국하였고 묘호는 莊宗이다. 이 글에서 이존욱의 建國을 기점으로 앞부분에서는 晉으로 호칭하고 뒷부분에서는 唐으로 호칭하고 있다.
역주7 亞次鬪雞小兒耳 : 亞次는 李存勖의 어릴 때 이름이다. 亞子라고도 표기한다. 옛날에 경박한 행동을 일삼는 소년들을 비하할 때 鬪雞走馬라고 하여 닭싸움이나 시키고 말이나 내달린다고 표현하였다. 曹植의 〈名都篇〉에 “東郊 길에서 닭싸움하고, 長楸 사이에서 말 달리네.[鬪鷄東郊道 走馬長楸間]”라고 하였으며, 司馬光의 〈眞率會〉에 “일곱 사람의 나이 합하면 오백여 세인데, 꽃 앞에서 함께 취하니 고금에 드문 일이라. 말타기와 닭싸움은 우리의 일이 아니요, 모시옷 입고 머리 희니 더욱 눈부시네.[七人五百有餘歲 同醉花前今古稀 走馬鬪雞非我事 紵衣絲髮且相輝]”라고 하였다.
역주8 魏軍 : 여기에서의 魏는 義武節度使 王處直의 세력을 가리킨다. 왕처직은 909년 後梁 太祖 朱全忠으로부터 北平王에 봉해졌다. 이후 921년에 의붓아들인 王都가 왕처직을 살해하고 李存勖에게 투항하였다.
역주9 金波亭 : 오늘날의 河北省 邯鄲市 大名縣의 동쪽에 있었다.
역주10 以鐵鎖斷德勝口 : 德勝口는 옛날의 澶州 境內에 있던 곳으로 오늘날의 河南省 濮陽市에 속하며 黃河에 임해 있다. 쇠사슬을 강에 놓아 배들이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역주11 [人] : 저본에는 ‘人’이 없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2 莊宗 : 晉王의 신분으로 있다가 後唐을 세운 李存勖의 廟號이다.
역주13 楊劉 : 黃河의 北岸으로 현재의 山西省 東阿縣에 있던 지명이다.
역주14 [擊] : 저본에는 ‘擊’이 없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5 保鑾 : 황제의 親衛兵을 가리킨다.
역주16 [捉] : 저본에는 ‘捉’이 없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7 明宗 : 後唐 莊宗 李克用의 의붓아들인 李嗣源이다. 장종을 이어 뒤에 황제에 올랐다. 명종은 그의 廟號이다.
역주18 (已而)[而已] : 저본에는 ‘已而’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而已’로 바로잡았다.
역주19 顧符存審曰 : ≪五代史記纂誤補≫ 卷3에 “삼가 살펴보건대 薛居正의 ≪舊五代史≫ 〈莊宗紀〉에, 이해 3월에 李存審(符存審 幽州節度使로 삼았다고 하였고, 8월에 梁人이 澤州를 함락시켰을 때 택주를 구원하러 보낸 자는 李紹斌으로 되어 있으며, 〈裴約傳〉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부존심이라고 한 것은 오류이다.[謹按薛史莊宗紀是年三月以李存審爲幽州節度使 八月梁人陷澤州 而遣救澤州者 則李紹斌也 裴約傳同 此作符存審誤]”라고 하였다. ≪舊五代史≫ 卷52 〈唐書 第28 列傳4〉의 배약의 열전에는 이 부분이 “顧李紹斌曰”로 되어 있다.
역주20 遼州 : 보통 遼州는 현재의 遼寧省 일대에 있던 지명이나, 여기에서의 요주는 隋나라 때 설치된 이래 箕州‧儀州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唐나라 말엽에 다시 요주가 된 지역을 가리킨다. 지금의 山西省 左權‧和順‧楡社縣 일대에 속한다.
역주21 周世宗 : 五代 後周 世宗 柴榮(921~959. 邢州 龍岡 사람으로, 후주 太祖 郭威의 외조카인데 나중에 양자로 들어가 성을 郭氏로 바꾸었다. 곽위가 후주를 건국하자 晉王에 봉해졌고 곽위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제도를 정비하고 활발한 정벌활동을 펼쳐 중원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역주22 李景 : 916~961. 五代十國 시기 南唐의 2대 황제이다. 부친 李昪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원래 이름은 李璟이었으나 後周 世宗에게 복속을 맹세한 후 개명하였다.
역주23 方舟載礮(포) : 方舟는 배 두 척을 나란히 연결한 것을 가리킨다. 礮는 돌쇠뇌를 뜻하며 砲와 같은 글자이다. 그러나 화약 발명의 역사를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礮는 흔히 생각하는 대포의 형태는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포라고 할 만한 형태가 등장한 것은 元나라 때이며, 五代 시절에는 창이나 화살 앞부분에 화약통을 부착한 형태인 火槍이나 火箭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礮는 창이나 화살 등에 화약통을 부착한 형태의 무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역주24 淝河 : 현재 安徽省 안으로 흐르는 두 줄기의 하천을 가리킨다. 北淝河는 淮水 좌측 강안의 支流이고, 南淝河는 合肥에서 안휘성 중부의 巢湖로 흘러들어간다.
역주25 水砦 : 水軍의 兵營으로 물위에 설치한 영채를 가리킨다.
역주26 濠梁 : 淮水의 한 支流로 石梁河라고도 한다. 현재의 安徽省 滁州市 鳳陽縣 경내에 있다.
역주27 (州) : 저본에는 ‘州’가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28 紫金山 : 현재의 江蘇省 南京 동쪽에 있는 산으로, 산에 紫紅色의 沙巖이 많아 자금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역주29 明年正月 世宗復(부)至淮上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3에 “살펴보건대 〈周本紀〉에, 世宗이 다시 南征한 일이 顯德 4년 2월로 되어 있고 正月로 되어 있지 않으며, 薛居正의 ≪舊五代史≫와 ≪資治通鑑≫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이 부분은 오류이다.[按周本紀世宗復南征在顯德四年二月 非正月 薛史通鑑同 此誤]”라고 하였다.
역주30 世宗使景所遣使者孫晟等 至城下示之 : ≪五代史記纂誤續補≫에서는 위의 주석과 같이 世宗이 다시 南征한 때를 顯德 4년으로 고증하였으므로 이 기사가 그에 따른 연이은 오류로 보았다. 그러므로 卷3에 “살펴보건대 〈周本紀〉에, 顯德 3년 11월에 이미 孫晟을 죽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사를 世宗이 다시 淮上에 당도한 일 아래에 서술하였으니, 이때는 현덕 4년인데 어찌 다시 손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按周本紀顯德三年十一月已殺孫晟 此乃敍世宗復至淮上之下 是四年矣 安得復有孫晟]”라고 하였다.
역주31 復其軍曰 忠正軍 : 壽州는 五代十國의 吳가 다스릴 때에는 忠正軍이라고 불렸는데, 오에 이어 南唐이 들어서고 나서 淸淮軍으로 개칭되었다. 劉仁贍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淸淮軍節度使로 재직하였는데, 後周 世宗이 유인섬의 충절을 기리는 뜻에서 옛 이름으로 회복한 것이다.
역주32 周世宗實錄 : 北宋 太祖 때 王溥 등이 편찬한 것으로, 建隆 2년(961) 완성하였다. 전체 40권이나, 현재 輯本 1권이 남아 있다.
역주33 王環爲蜀守秦州 : 爲는 服役의 뜻이다. 王環(?~957 五代十國 때 鎭州 眞定 사람이다. 後唐의 孟知祥이 西川節度使로 있을 때 왕환이 그의 부하로 있었는데, 맹지상이 독립하여 後蜀을 건국하자 계속 그를 섬겨 벼슬이 鳳州節度使에 이르렀다. 後周 世宗이 후촉을 정벌하여 秦州가 포위되자 다른 장수들은 모두 항복하였으나 왕환만 항복하지 않고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하고 성이 함락되어 사로잡혀 마침내 항복하고 右驍衛大將軍에 임명되었다. 세종이 南唐을 정벌할 때 泗州에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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