歐陽公所次死節傳三人外에 復錄死事者十五人이라 以十五人者不足以配三人之烈이나 然不忍遺之也라 故別之曰 死事라
然如張源德姚洪張敬達三人은 其所凜然不爲不義屈이요 歐公所自爲點綴이 亦多奇氣일새 予故幷錄之하노라
歐公小序는 深取王淸史彦超나 然不如源德等三人尤爲慘咽이라
嗚呼甚哉
라 히 終始五十三年
에 而天下五代
하니 士之不幸而生其時
하야 欲全其節而不二者固鮮矣
라
於此之時에 責士以死與必去면 則天下爲無士矣리라 然其習俗이 遂以苟生不去爲當然하니
至於儒者以仁義忠信爲學하야 享人之祿하고 任人之國者하야도 不顧其存亡하고 皆恬然以苟生爲得하니
非徒不知愧요 而反以其得爲榮者를 可勝數哉아 故吾於死事之臣에 有所取焉이로라
吾於五代에 得全節之士三人而已요 其初無卓然之節이라가 而終以死人之事者는 得十有五人焉하대 而戰沒者는 不得與也라
然吾取王淸史彦超者는 其有旨哉인저 其有旨哉인저 作死事傳하노라
張源德者
는 不知其世家
니 或曰 本晉人也
라 에 無所稱
이라
하니 罕之遣源德見梁太祖
라 太祖時
에 源德自金吾衛將軍
으로 爲蔡州刺史
라
乃遣劉鄩將兵萬人하야 屯于魏以虞變이라 魏軍果叛하야 迫其節度使賀德倫하야 以魏博二州降晉하다
晉王曰 貝城小而堅
하니 攻之難卒下
라 且源德雖恃劉鄩之兵
이나 하니
不如先取之則滄貝之勢分而易圖也라하고 乃先襲破德州然後에 以兵五千攻源德이라
源德堅守不下
하니 晉軍塹而圍之
러라 已而
오 劉鄩大敗于
하야 南走黎陽
하고 晉軍攻破洺州
하니
而
, 邢州節度使閻寶皆以城降晉
하고 磁州刺史靳昭, 相州張筠, 滄州戴思遠皆棄城走
라
自河以北山以東으로 四面千里六鎭數十州之地가 皆歸晉이어늘 獨貝一州는 圍之踰年不可下러라
源德已死에 貝人謀曰 晉圍吾久하니 吾窮而後降이면 懼皆不免也라하고
乃告于晉曰 吾欲被甲執兵而降하야 得赦而後釋之하니 如何오하니 晉軍許諾이라 貝人三千出降하야 已釋甲하니 晉兵四面圍而盡殺之하다
夏魯奇는 字邦傑이니 靑州人也라 唐莊宗時에 賜姓名曰 李紹奇러니 其後에 莊宗賜姓名者 皆復其故하다
魯奇初事梁
하야 爲宣武軍校
하고 하야 爲衛護指揮使
라 從
攻劉守光於幽州
할새
守光將單廷珪元行欽以驍勇自負라 魯奇每與二將鬪에 輒不能解하니 兩軍皆釋兵而觀之라
晉已下魏博하니 梁將劉鄩軍于洹水라 莊宗以百騎覘敵이라가 遇鄩伏兵하야 圍之數重하야 幾不得脫이어늘
魯奇力戰하야 手殺百餘人하고 身被二十餘創하야 與莊宗決圍而出하니 莊宗益奇之하야 以爲磁州刺史하다
從戰中都하야 擒王彦章하니 莊宗壯之하야 賜絹千匹하고 拜鄭州防禦使하다
遷河陽節度使하야 爲政有惠愛하니 徙鎭忠武에 河陽之人遮留하야 不得行하고 父老詣京師乞留라 明宗遣中使往諭之하니 魯奇乃得去러라
唐師伐荊南
할새 以魯奇爲招討副使
한대 無功而還
이라 徙鎭武信
하고 東川
反
하야 攻遂州
하니 魯奇閉城拒之
어늘
旬
救兵不至
하고 城中食盡
하야 魯奇自刎死
하니 年四十九
라
姚洪은 本梁之小校也라 自董璋爲梁將으로 洪嘗事璋이라가 後事唐爲指揮使라
中
에 遣洪將千人戍閬州
한대 董璋反
하야 遣人以書招洪
하니 洪得璋書
하고 輒投廁中
이라
後璋兵攻破閬州
하야 執洪
하고 璋曰 爾爲
에 我遇汝厚
어늘 奈何負我邪
오하니
洪罵曰 老賊
아 爾昔爲
하야 掃馬糞
이라가 得一臠殘炙
에 感恩不已
러니
今天子用爾爲節度使어늘 何苦反邪오 吾能爲國家死요 不能從人奴以生이라하니
璋怒하야 燃鑊于前하야 令壯士十人刲其肉而食이어늘 洪至死大罵라 明宗聞之泣下하고 錄其二子而厚䘏其家하다
王思同은 幽州人也라 其父敬柔娶劉仁恭女하야 生思同이라 思同事仁恭하야 爲銀胡䩮指揮使한대
仁恭爲其子守光所囚
하니 思同奔
하야 以爲飛勝指揮使
하다 梁晉相距于莘
할새 遣思同築壘楊劉
하니
以功遷神武十軍都指揮使하고 累遷鄭州防禦使하다 思同爲人敢勇하고 善騎射하며 好學하고 頗喜爲詩하며
輕財重義하고 多禮文士라 然未嘗有戰功이라 明宗時에 以久次爲匡國軍節度使하고 徙鎭雄武라
是時
에 數爲寇
어늘 而
無亭障
하니 思同列四十餘柵以禦之
하다
居五年에 來朝할새 明宗問以邊事하니 思同指畫山川하야 陳其利害라
思同去하니 明宗顧左右曰 人言思同不管事라하더니 能若是邪아하고 於是에 始知其材하야 以爲右武衛上將軍京兆尹西京留守하다
石敬瑭討董璋
할새 思同爲先鋒指揮使
한대 兵入
而後軍不繼
하니
思同與璋戰하야 不勝而却하고 敬瑭兵罷러라 思同徙鎭山南西道하고 已而오 復爲京兆尹西京留守하다
應順元年二月
에 하야 馳檄四隣
하야 言 奸臣幸先帝疾病
하야 而立幼嗣
하야 侵弱宗室
하고 動搖藩方
이라하고
陳己所以興兵討亂之狀
이라 因遣
安十十
하야 以五弦謁思同
하야 欲因其懽以通意
라
是時에 諸鎭皆懷嚮背하야 所得潞王書檄을 雖以上聞이나 而不絶其使어늘
獨思同執十十及從珂所使推官郝詡等
하야 送京師
하니 嘉其忠
하고 卽以思同爲西面行營馬步軍都部署
하다
三月에 會諸鎭兵하야 圍鳳翔하고 破東西關城한대 從珂兵弱而守甚堅하니 外兵傷死者衆이라
從珂登城呼外兵而泣曰 吾從先帝二十年에 大小數百戰하야 甲不解體하고 金創滿身하니 士卒固嘗從我矣로다
今先帝新棄天下하고 而朝廷信用奸人하야 離間骨肉하니 我實何罪而見伐乎아하고 因慟哭하니 士卒聞者皆悲憐之러라
興元張虔釗攻城西하야 督戰甚急하니 士卒苦之하야 反兵攻虔釗하니 虔釗走라
羽林指揮使楊思權呼曰 潞王은 吾主也라하고 乃引軍自西門入降從珂어늘 而思同未知하고 猶督戰이라
嚴衛指揮使尹暉麾其衆曰 城西軍入城受賞矣어늘 何用戰邪리오하니
士卒解甲棄仗하고 聲聞數里하야 遂皆入城降하니 諸鎭之兵皆潰라
思同挺身走하야 至長安하니 西京副留守劉遂雍閉門不納이라 乃走潼關이라
從珂引兵東至昭應에 前鋒追執思同하니 從珂責曰 罪可逃乎아하니
思同曰 非不知從王而得生이나 恐終死不能見先帝於地下라하니 從珂媿其言하야 乃殺之하다 漢高祖卽位에 贈侍中하다
【原註】思同東走
는 將自歸于天子
니 與
走異
라 故予其死
하노라
張敬達은 字志通이니 代州人也라 小字生鐵이라 少以騎射事唐莊宗하야 爲廳直軍使하고
明宗時
에 爲河東馬步軍都指揮使
하야 欽州刺史
하고 累遷彰國大同軍節度使
하고 하다
淸泰二年
에 契丹數犯邊
하니 以河東節度使石敬瑭
으로 兼大同彰國振武威塞等軍蕃漢馬步軍都總管
하고 屯于忻州
한대
屯兵聚譟하야 遮敬瑭하고 呼萬歲하니 敬瑭斬三十餘人以止之하다 廢帝疑敬瑭有異志하야 乃以敬達爲北面副總管하야 以分其兵하다
明年夏에 徙敬瑭鎭天平하고 遂以敬達爲大同彰國振武威塞等軍蕃漢馬步軍都部署어늘 敬瑭因此遂反이라 卽以敬達爲太原四面招討使하다
六月
에 兵圍太原
할새 敬達爲長城連柵
하야 以攻之
한대 所爲城柵將成
에 輒有大風雨
하야 水暴至以壞之
러라
敬瑭求救于契丹한대 九月에 契丹耶律德光自雁門入하니 旌旗相屬五十餘里라
德光先遣人告敬瑭曰 吾欲今日破敵이 可乎아하니 敬瑭報曰 大兵遠來하고 而賊勢方盛하니 要在成功이요 不必速也라한대 使者未復命而兵已交라
敬達陣於西山이러니 契丹以羸騎三千으로 革鞭木𩍐하고 人馬皆不甲冑하야 以趨唐軍이라
唐軍爭馳之하니 契丹兵走라 追至汾曲에 伏發하야 斷唐軍爲二하니 其在北者皆死하야 死者萬餘人이라
敬達收軍柵晉安이어늘 契丹圍之라 廢帝遣趙延壽範延光等救之한대 延壽屯團柏谷하고 延光屯遼州하니 相去皆百餘里러라
契丹兵圍敬達者가 自晉安寨南으로 長百餘里요 闊五十里라 敬達軍中望之하니
但見穹廬連屬如岡阜요 四面亙以毛索掛鈴爲警하고 縱犬往來하니 敬達軍中有夜出者가 輒爲契丹所得이라
敬達猶有兵五萬人馬萬匹
이로대 久之食盡
하야 以飼其馬
하고 馬死者食之
러니
已而馬盡이라 副招討使楊光遠勸敬達降晉하니 敬達自以不忍背唐이요 而救兵且至라
光遠促之不已어늘 敬達曰 諸公何相迫邪아 何不殺我而降고하니
光遠卽斬敬達降이라 契丹耶律德光聞敬達死하고 哀其忠하야 遣人收葬之하다
【原註】本紀엔 責其不誅光遠하고 而諷其殺己以降賊이라 故不書死而書如其志요
는 終嘉其不降也
일새라 然
雖不屈而諷人降賊
이라 故不得爲死節
이라
王淸은 字去瑕니 洺州曲周人也라 初事唐爲寧衛指揮使하고 後事晉爲奉國都虞候하다
淸謂行周曰 從進閉孤城以自守하니 其勢豈得久邪아하고 因請先登하야 遂攻破之하다
開運二年冬에 從杜重威戰陽城할새 淸以力戰하야 功爲步軍之最하니 加檢校司徒하다
하고 虜軍其北以相拒
한대 而虜以精騎竝西山出晉軍後
하야 南擊欒城
하야 斷晉餉道
하니
淸謂重威曰 晉軍危矣라 今去鎭州五里어늘 而守死于此하니 營孤食盡이면 將若之何오
請以步兵二千爲先鋒하야 奪橋開路어든 公率諸軍繼進하야 以入鎭州면 可以守也라하다
重威許之하고 遣與宋彦筠俱前하니 淸與虜戰하야 敗之하야 奪其橋라 是時에 重威已有貳志하야 猶豫不肯進하고 彦筠亦退走라
史彦超
는 雲州人也
니 爲人勇悍驍捷
이라 起魏時
에 彦超爲漢龍捷都指揮使
하야 以兵從
하다
太祖入立
에 遷虎捷都指揮使
하고 戍于晉州
하다 攻晉州
할새 州無主帥
하야 知州王萬敢不能拒
어늘 彦超以戍兵堅守月餘
한대
太祖遣王峻救之하니 旻兵解去라 以功遷龍捷右廂都指揮使하고 領鄭州防禦使하다
周漢戰高平할새 彦超爲前鋒하야 先登陷陣하니 以功拜感德軍節度使하다
周兵圍漢太原하니 契丹救漢하야 出忻代라 世宗遣符彦卿拒之하고 以彦超爲先鋒하야 戰忻口라
彦超勇憤俱發하야 左右馳擊하니 解而復合者數四하야 遂歿於陣하다
是時에 世宗敗漢高平하야 乘勝而進한대 圍城之役에 諸將議不一이라 故久無成功이라
世宗欲解去而未決이라가 聞彦超戰死하고 遽班師하니 倉卒之際에 亡失甚衆이라
世宗旣惜彦超而憤無成功하야 憂忿不食者數日이러라 贈彦超太師하고 優䘏其家焉하다
孫晟은 初名鳳이요 又名忌니 密州人也라 好學有文辭하고 尤長於詩라
少爲道士
하야 居
할새 常畫唐詩人
像
하야 置于屋壁
하고 晨夕事之
하니 簡寂宮道士惡晟
하야 以爲妖
하야 以杖驅出之
라
乃儒服北之趙魏하야 謁唐莊宗于鎭州하니 莊宗以晟爲著作佐郞하다
中
에 鎭汴州
할새 辟爲判官
한대 守殷反
하야 伏誅
어늘 晟乃棄其妻子
하고 亡命陳宋之間
하다
惡晟
하야 以謂敎守殷反者
는 晟也
라하고 畫其像購之
로대 不可得
하야 遂族其家
하니 晟奔于吳
하다
하고 多招四方之士
한대 得晟
하고 喜其文辭
하야 使爲敎令
하니 由是知名
하다
晟爲人口吃하야 遇人不能道寒暄이라가 已而오 坐定에 談辯鋒生하야 聽者忘倦하니
昪尤愛之
하야 引與計議
에 多合意
일새 以爲右僕射
하야 與
竝爲昪相
이라 晟輕延巳爲人
하야 常曰 金碗玉杯而盛狗屎
가 可乎
아하다
晟事昪父子二十餘年
에 官至司空
하야 家益富驕
하야 每食不設几案
하고 使衆
各執一器
하야 環立而侍
하고 號肉臺盤
이라하니 時人多效之
하다
周世宗征淮
하니 懼
하야 始遣泗州牙將王知朗
하야 至徐州
하야 奉書以求和
로대 世宗不答
이라
又遣翰林學士鍾謨文理院學士李德明하야 奉表稱臣이로대 不答이라
乃遣禮部尙書王崇質副晟奉表하니 謨與晟等皆言 景願割壽濠泗楚光海六州之地하고 歲貢百萬以佐軍이라하야늘
而世宗已取滁揚濠泗諸州
하고 欲盡取
南乃止
하야 因留使者不遣
하고 而攻壽州益急
이라
謨等見世宗英武하야 非景敵이요 而師甚盛하야 壽春且危하고 乃曰 願陛下寬臣五日之誅하야 容臣還取景表하야 盡獻淮北諸州하소서하다
世宗許之하야 遣供奉官安弘道하야 押德明崇質南還이로대 而謨與晟皆見留라
德明等旣還하니 景悔하야 不肯割地요 世宗亦以暑雨班師하고 留李重進張永德等하야 分攻廬壽한대 周兵所得揚泰諸州를 皆不能守어늘 景兵復振이라
重進與永德兩軍相疑有隙
하야 永德上書言重進反
이라하거늘 世宗不聽
이라 景知二將之相疑也
에 乃以
遺重進
하야 勸其反
하다
初에 晟之奉使也에 語崇質曰 吾行必不免이라 然吾終不負永陵一抔土也라하니 永陵者는 昪墓也라
及崇質還
하야 而晟與鍾謨俱至京師
하야 館于都亭驛
할새 待之甚厚
라 每朝會入閣
하야 하고 召見
에 必飮以醇酒
라
已而오 周兵數敗하야 盡失所得諸州하니 世宗憂之하야 召晟問江南事한대 晟不對라 世宗怒로대 未有以發이라
會重進以景蠟丸書來上에 多斥周過惡以爲言이라 由是로 發怒曰 晟來使我에 言景畏吾神武하야 願得北面稱臣하야 保無二心이러니 安得此指斥之言乎아하고
亟召侍衛軍虞候韓通하야 收晟下獄하고 及其從者二百餘人皆殺之하다
晟臨死에 世宗猶遣近臣問之한대 晟終不對하고 神色怡然하야 正其衣冠하고 南望而拜曰 臣惟以死報國爾라하고 乃就刑하다
晟旣死하고 鍾謨亦貶耀州司馬하다 其後世宗怒解하야 憐晟忠하고 悔殺之하야 召拜鍾謨衛尉少卿하다
景已割江北하니 遂遣謨還한대 而景聞晟死하고 亦贈魯國公하다
歐陽公이 편차한 〈死節傳〉의 세 사람 외에 다시 國事를 위해 죽은 사람 열다섯을 수록하였다. 열다섯 사람이 〈〈사절전〉에 실린〉 세 사람의 功烈에 짝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차마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구별하여 ‘死事’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張源德‧姚洪‧張敬達 세 사람과 같은 경우 그들이 의연히 不義에 굴복하지 않았고 구양공이 스스로 엮은 내용들이 또한 奇氣가 많기 때문에 내가 〈〈死事傳〉을 여기에〉 아울러 수록하였다.
구양공의 小序는 王淸과 史彦超의 뜻을 깊이 인정하였으나, 장원덕 등 세 사람의 일을 서술한 대목이 더욱 참담하고 목이 메이는 것만은 못하다.
오호라! 심하도다. 開平으로부터 顯德에 이르기까지 始終 53년 동안 천하에 五代가 들어섰으니, 선비로 불행히 그 시대에 태어나 절조를 온전히 하고자 하면서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자는 진실로 드물었다.
이러한 때에 죽거나 반드시 그 나라를 떠나는 것을 선비들에게 요구했다면 천하에 선비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 습속이 마침내 구차하게 살고 그 나라를 떠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니,
儒者로서 仁義와 忠信을 배워 남의 祿을 받고 그 사람의 나라에 임용된 자에 이르러서도 그 나라의 存亡은 돌아보지 않고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구차히 사는 것을 옳다고 여겼다.
그러니 단지 부끄러움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처신을 영광으로 여긴 자를 이루 다 셀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國事를 위해 죽은 신하들에 대해 취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군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 그의 아름다운 점을 이루어주기를 좋아하고 그가 두루 다 잘하기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죽음은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임에 있어서랴.
내가 五代 시절에 절조를 온전히 한 선비는 세 사람을 알 뿐이요, 애초에는 우뚝한 절조가 없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섬기던〉 군주의 國事를 위해 죽은 자는 열다섯 사람을 아는데, 전쟁 중에 죽은 사람은 그 가운데에 끼이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王淸과 史彦超를 넣은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뜻이 있어서이다. 〈死事傳〉을 쓰노라.
〈死事傳〉에 立傳하지 못한 자가 다섯 사람이니, 馬彦超는 〈朱守殷傳〉에 덧붙였고, 宋令詢과 李遐와 張彦卿과 鄭昭業은 〈本紀〉에 보일 따름이다.
張源德은 그 世系를 알 수 없으니, 어떤 사람은 본래 晉 사람이라고 한다. 젊어서 晉을 섬길 때에는 이름이 알려진 바가 없었다.
李罕之를 따라 潞州를 점거하고서 晉을 배반하고 梁에 항복하니, 이한지가 장원덕을 보내 梁 太祖를 알현하게 하였다. 태조 때에 장원덕은 金吾衛將軍에서 蔡州刺史가 되었다.
梁나라 貞明 3년(917)에 魏博節度使 楊師厚가 죽으니 末帝가 魏州와 相州 등 여섯 주를 나누어 두 개의 鎭으로 만들면서 魏軍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劉鄩에게 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魏에 주둔하여 변란에 대비케 하였다. 위군이 과연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 賀德倫을 겁박하여 위주와 博州를 가지고 晉에 투항하였다.
이때 張源德은 劉鄩의 휘하에서 貝州를 지키고 있었다. 晉王이 魏 땅으로 들어왔을 때 장수들이 먼저 패주를 치고자 하니,
진왕이 말하기를 “貝城이 작지만 견고하니 공격하여 대번에 함락시키기 어렵다. 또 장원덕이 비록 유심의 병력을 믿고 있으나 滄州와 서로 머리와 꼬리의 형세이고 지금 德州는 그 가운데 위치하여 방비가 없으니,
먼저 덕주를 취하면 창주와 패주의 세력이 분리되어 도모하기 쉬운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는, 먼저 덕주를 습격하여 격파한 뒤 5천의 병사로 장원덕을 공격하였다.
장원덕이 굳게 수비하여 함락되지 않으니 晉軍이 참호를 파고 포위하였다. 얼마 후 유심이 옛 元城에서 대패하여 남쪽의 黎陽으로 도주하고 진군이 洺州를 공격하여 격파하니,
衛州刺史 來昭와 邢州節度使 閻寶는 모두 성을 가지고 진에 투항하였고, 磁州刺史 靳昭와 相州刺史 張筠과 滄州刺史 戴思遠은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이때 晉이 이미 全燕을 먼저 함락시켰고 鎭州와 定州도 모두 晉에 투항하였다.
이에 河北과 山東에서부터 사방 천 리의 六鎭과 수십 州의 땅이 모두 晉에 귀속되었는데도 貝州 한 지역만은 포위한 지 1년이 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張源德의 방비가 이미 굳건하였는데 패주 사람들이 晉이 이미 하북을 다 차지했다는 말을 들은 데다 성안의 양식도 모두 바닥이 나자 마침내 장원덕에게 나가서 항복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장원덕이 따르지 않아 마침내 살해당하였다.
장원덕이 죽고 나서 패주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晉이 우리를 포위한 지 오래이니 우리가 궁한 처지에 몰린 다음 항복하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까 두렵다.”라고 하고는,
이에 晉에 고하기를 “우리가 갑옷을 입고 병기를 쥐고서 항복한 다음 사면을 받은 뒤 무장을 풀고 싶은데 어떠한가?”라고 하니 晉軍이 허락하였다. 그런데 패주 사람 3천 명이 성을 나가 항복하고서 무장을 풀자 晉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포위하고서 모두 죽여버렸다.
夏魯奇는 字가 邦傑이니 靑州 사람이다. 唐 莊宗 때에 姓名을 하사하여 李紹奇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장종이 성명을 하사했던 사람들 모두 본래의 성명을 회복하였다.
하노기는 처음에는 梁을 섬겨 宣武軍校가 되었고, 뒤에 晉으로 도주하여 衛護指揮使가 되었다. 周德威를 따라 幽州에서 劉守光을 공격할 때,
유수광의 장수 單廷珪와 元行欽이 굳세고 용맹스러운 것으로 자부하였다. 하노기가 매번 이 두 장수와 싸울 때마다 번번이 승부를 가리기 어려우니 양측의 군사들이 모두 병기를 내려놓고서 싸움을 구경하였다.
晉이 이미 魏州와 博州를 함락하니 梁의 장수 劉鄩이 洹水에 주둔하였다. 莊宗이 騎兵 백 명을 데리고 적진을 정찰하다가 유심의 복병을 만나 몇 겹의 포위를 당해 거의 빠져나오지 못할 뻔하였다.
그런데 夏魯奇가 힘써 싸워 백여 명의 적을 맨몸으로 죽이고 20여 군데나 創傷을 입고서 장종과 함께 포위를 뚫고 탈출하니 장종이 더욱 기특하게 여겨 磁州刺史로 삼았다.
장종을 따라 中都에서 싸우면서 王彦章을 사로잡으니 장종이 장하게 여겨 명주 천 필을 하사하고 鄭州防禦使에 제수하였다.
河陽節度使로 승진하여 정사를 베풂에 끼친 은혜가 많으니, 忠武軍節度使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을 때 하양 사람들이 길을 가로막고 저지하여 떠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양의 父老들이 도성에 가서 하노기의 留任을 청하였다. 明宗이 환관에게 하양으로 가서 曉諭하게 하고서야 하노기가 떠날 수 있었다.
唐의 군사가 荊南을 정벌할 때 夏魯奇를 招討副使로 삼았는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武信軍節度使로 자리를 옮기고 東川의 董璋이 반란을 일으켜 遂州를 공격하니 하노기가 성문을 닫아걸고 항거하였다.
그러나 열 달이 지나도록 구원병이 오지 않고 성안의 양식도 바닥이 나 하노기가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으니 향년 49세였다.
吳巒은 병사가 아직 싸울 수 있는데도 싸우지 않았고, 夏魯奇는 양식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죽었다. 그러므로 〈立傳에 이들을〉 取捨함이 다른 것이다.
姚洪은 본래 梁의 하급 軍校였다. 董璋이 梁나라의 장수가 되었을 때부터 요홍이 동장을 섬기다가 뒤에 唐을 섬겨 指揮使가 되었다.
長興 연간에 요홍에게 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閬州를 지키게 하였는데 동장이 반란을 일으키고서 사람을 보내 서신으로 요홍을 부르니 요홍이 동장의 서신을 받은 즉시 뒷간에 던져버렸다.
뒤에 동장의 군대가 낭주를 공격하여 격파하고서 요홍을 잡고, 동장이 말하기를 “네가 군졸이었을 때 내가 너를 후하게 대우하였거늘 어찌하여 나를 저버렸느냐?”라고 하였다.
그러자 요홍이 욕하기를 “늙은 도적놈아. 네가 옛날에 李七郞(李讓)의 노예가 되어 말똥이나 쓸다가 저민 고기 한 점을 얻으면 감읍해 마지않더니,
지금 천자께서 너를 등용하여 節度使로 삼으셨거늘 어찌하여 굳이 반란을 일으켰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수는 있어도 남의 노예를 따라 살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동장이 노하여 앞에다 솥을 달구어놓고 壯士 열 명에게 요홍의 살점을 도려내어 먹게 하였는데, 요홍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동장을 크게 욕하였다. 明宗이 이 사실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고 두 아들을 錄用하였으며 그 집안에 후하게 恤典을 내렸다.
王思同은 幽州 사람이다. 그 아버지 王敬柔가 劉仁恭의 딸에게 장가들어 王思同을 낳았다. 왕사동은 유인공을 섬겨 銀胡䩮指揮使가 되었는데,
유인공이 아들 劉守光에게 유폐되니 왕사동은 晉으로 달아나 飛勝指揮使가 되었다. 梁과 晉이 莘 땅에서 대치할 때 왕사동을 보내 楊劉에 보루를 쌓게 하니,
그 공으로 神武十軍都指揮使로 승진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鄭州防禦使가 되었다. 왕사동은 사람됨이 용감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시 짓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리고 재물을 하찮게 여기고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文士들을 두텁게 예우하였다. 그러나 戰功을 세운 적은 없었다. 明宗 때에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한 사람을 승진시켜주는 관례에 따라 匡國軍節度使가 되었으며, 자리를 옮겨 雄武軍節度使가 되었다.
이때 吐藩이 자주 노략질을 하였는데 秦州에는 이를 막아낼 보루가 없었다. 그러자 왕사동이 40여 개의 木柵을 벌여 세워 토번을 방어하였다.
왕사동이 부임한 지 5년째에 조정으로 들어왔을 때 명종이 변방의 일을 물으니 왕사동이 손가락으로 山川을 그어가며 그 利害를 설명하였다.
왕사동이 떠나자 명종이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왕사동이 일을 맡을 능력이 없다고 사람들이 말하더니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이에 그제야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右武衛上將軍 京兆尹 西京留守로 삼았다.
石敬瑭이 董璋을 토벌할 때 王思同이 先鋒指揮使가 되었는데, 군대가 劍門으로 진입하였음에도 後軍이 뒤따르지 못하니,
왕사동이 동장과 싸워 이기지 못한 채 퇴각하였고 석경당은 철군하였다. 왕사동은 자리를 옮겨 山南西道節度使가 되었고, 얼마 뒤 다시 京兆尹 西京留守가 되었다.
應順 원년(934) 2월에 潞王 李從珂가 鳳翔에서 반란을 일으켜 사방으로 檄文을 보내 “奸臣이 先帝께서 병중인 틈을 타 秦王을 살해하고 어린 후사를 세워 종실을 침탈하여 약하게 만들고 藩方을 동요시키고 있다.”라고 하고는,
자신이 병사를 일으켜 난리를 토벌하려는 근거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격문을 전달하는 편에 伶奴 安十十을 보내 五絃琴을 가지고 왕사동을 배알하게 하여 그가 기분이 좋은 틈을 타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때 여러 藩鎭이 모두 일의 형세를 살펴 유리한 쪽으로 붙으려는 마음을 품고서, 획득한 潞王의 격문을 조정에 보고하기는 하였지만 노왕의 사신을 사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왕사동만은 안십십과 이종가의 사신으로 온 推官 郝詡 등을 사로잡아 도성으로 압송하니, 唐 愍帝가 그 충성을 가상히 여기고 즉시 왕사동을 西面行營馬步軍都部署로 삼았다.
3월에 여러 藩鎭의 군대를 모아 鳳翔을 포위하고 東西의 關城을 격파하였는데, 李從珂의 병력이 약소하였으나 수비가 몹시 견고하니 번진에서 온 군대의 사상자가 많아졌다.
이종가가 성 위에 올라가 번진의 군대를 부르면서 울며 말하기를 “내가 先帝를 따른 20년 동안 크고 작은 수백 차례의 전투에 참전하여 갑옷을 벗지 않고 칼과 창 자국이 온몸에 가득하니, 〈여기 온 번진의〉 士卒들은 본디 나를 따라 〈전투에 나섰던〉 이들이다.
지금 선제께서 막 천하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시고〉 조정에서는 간악한 이들을 신용하여 골육간을 이간시키고 있으니, 내가 실로 무슨 죄가 있어 토벌을 받는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통곡하니, 이 말을 들은 사졸들이 모두 슬퍼하고 동정하였다.
興元의 張虔釗가 성 서쪽을 공격하여 매우 급히 전투를 독려하니 사졸들이 힘들어하여 반란을 일으켜 장건소를 공격하니 장건소가 도주하였다.
羽林指揮使 楊思權이 “潞王은 우리 주인이다.”라고 외치고서 군사를 이끌고 서남쪽에서 들어가 이종가에게 투항했는데, 왕사동은 이 사실을 모르고 계속 전투를 독려하였다.
嚴衛指揮使 尹暉가 자신의 군사들을 지휘하여 “성 서쪽의 군사들은 성안으로 들어가 상을 받았는데 무엇하러 싸우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졸들이 갑옷과 병장기를 버리고 몇 리 밖까지 이 사실을 전파하고서 마침내 모두 성안으로 들어가 투항하니, 여러 번진의 군대가 모두 흩어져 떠났다.
왕사동이 몸을 빼어 달아나 長安에 이르니 西京副留守 劉遂雍이 성문을 닫아걸고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潼關으로 달아났다.
이종가가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昭應에 이르러 선봉 부대가 추격하여 왕사동을 사로잡으니, 이종가가 질책하기를 “네 죄를 피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사동이 말하기를 “왕을 따르면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끝내 죽어서 지하에서 先帝를 만나 뵙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이종가가 그 말을 부끄럽게 여겨 마침내 왕사동을 죽였다. 漢 高祖(劉知遠)가 즉위하자 侍中에 증직되었다.
王思同이 동쪽으로 도주한 것은 天子에게 돌아가려 한 것이니, 元行欽이 도주한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 죽음을 〈國事에 죽은 것으로〉 인정하였다.
張敬達은 字가 志通이니 代州 사람이다. 어릴 적 이름은 生鐵이다. 소싯적에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唐 莊宗을 섬겨 廳直軍使가 되었고,
明宗 때에는 河東馬步軍都指揮使가 되어 欽州刺史를 맡았고, 여러 번 승진하여 彰國軍과 大同軍의 節度使가 되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武信軍과 晉昌軍의 절도사가 되었다.
淸泰 2년(935)에 契丹이 자주 변경을 침범하니 廢帝가 河東節度使 石敬瑭에게 大同軍과 彰國軍과 振武軍과 威塞軍 등의 蕃漢馬步軍都總管을 겸하게 하고 忻州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주둔병들이 모여서 소란을 일으키며 석경당을 가로막고서 萬歲를 외치니, 석경당이 30여 인을 참수하여 저지시켰다. 폐제는 석경당이 다른 뜻을 품었다고 의심하고서 이에 장경달을 北面副總管으로 삼고 군대를 나누었다.
이듬해 여름에 석경당의 자리를 옮겨 天平軍節度使로 삼고 마침내 장경달을 大同軍과 彰國軍과 振武軍과 威塞軍 등의 蕃漢馬步軍都部署로 삼자, 석경당이 이를 말미암아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즉시 장경달을 太原四面招討使로 삼았다.
6월에
唐軍이
太原을 포위했을 때 장경달이 긴 성채와 연이은 목책을 설치하고서
雲梯와
飛礮로 공격하였는데, 성채와 목책이 완성되려 할 때 문득 큰 비바람이 몰아쳐 홍수가 밀려와 무너져버렸다.
雲梯
石敬瑭이 契丹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9월에 거란의 耶律德光이 雁門으로부터 들어오니 그들의 깃발이 50여 리에 걸쳐 이어졌다.
야율덕광이 먼저 사람을 보내 석경당에게 고하기를 “내가 오늘 적을 격파하려고 하는데 괜찮겠는가?”라고 하니, 석경당이 대답하기를 “대군은 멀리서 왔고 적들의 기세는 한창 강성하니 공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굳이 速戰을 펼칠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는데, 使者가 復命하기도 전에 양군이 이미 교전하였다.
張敬達은 西山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거란에서 쇠약한 騎兵 3천에 가죽 채찍과 나무 鐙子를 착용시키고 사람과 말은 모두 甲冑를 입지 않은 채로 唐의 군대를 향해 돌진시켰다.
당의 군대도 다투어 거란군을 향해 돌진하니 거란군이 도주하였다. 이들을 추격하여 汾曲에 이르자 복병이 튀어나와 당의 군대를 둘로 끊어버리니, 북쪽에 있는 자들이 모두 죽어 죽은 병사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張敬達이 군대를 수습하여 晉安에 營寨를 세우자 契丹이 포위하였다. 廢帝가 趙延壽와 範延光 등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는데, 조연수는 團柏谷에 주둔하고 범연광은 遼州에 주둔하니 〈장경달의 영채와의〉 거리가 양군 모두 백여 리였다.
장경달을 포위한 거란군은 晉安의 영채 남쪽에서부터 백여 리의 길이에 오십 리의 폭으로 〈감싸고 있었다.〉 장경달이 군중에서 이들을 바라보니,
그저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란군의 軍幕이 산등성이처럼 서로 이어지고 사면에 털로 꼰 밧줄을 연결하여 방울을 매달아 警報로 삼고 개들을 풀어놓아 오가며 지키게 〈하는 광경이었으니,〉 장경달의 군중에서 밤에 영채를 나가는 자들은 번번이 거란군에 붙잡혔다.
이 때문에 영채를 굳게 닫아걸고서 감히 다시 나가지 못하였다. 조연수 등은 모두 두마음을 품어 장경달을 구원할 뜻이 없었다.
장경달에게는 그래도 5만의 병사와 만 필의 군마가 있었으나 오랫동안 포위를 당해 양식이 떨어지자 나무를 벗겨내고 똥을 체에 걸러 말에게 먹였고, 말이 죽으면 그 말을 식량으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 말도 다 떨어져버렸다. 副招討使 楊光遠이 장경달에게 晉에 투항할 것을 권유하니, 장경달은 스스로 차마 唐을 배반하지 못하겠고 구원병이 곧 당도하리라 여겼다.
양광원이 재촉을 그치지 않으니 장경달이 말하기를 “공들은 어찌하여 나를 압박하는가. 어찌하여 나를 살해하고서 항복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광원이 즉시 장경달의 목을 베고 투항하였다. 거란의 耶律德光이 장경달의 죽음을 듣고 그 충성을 애도하여 사람을 보내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내주었다.
本紀에서는 張敬達이 楊光遠을 誅殺하지 않고 자신을 살해하고서 적에게 투항하라고 넌지시 권한 것을 책망하였다. 그러므로 ‘死’라고 쓰지 않고 그의 뜻대로 된 것을 쓴 것이며,
列傳에서 ‘死’라고 기록한 것은 그가 투항하지 않은 것을 끝내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은 비록 굴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적에게 투항할 것을 넌지시 권하였으므로 死節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王淸은 字가 去瑕니 洺州 曲周 사람이다. 처음에는 唐나라를 섬겨 寧衛指揮使가 되었고, 뒤에 晉을 섬겨 奉國都虞候가 되었다.
安從進이 襄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高行周를 따라 공격하였는데 해를 넘기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러자 왕청이 고행주에게 말하기를 “안종진이 외로운 성안에 갇혀 스스로 지키고 있으니 그 형세가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서는, 먼저 공격하겠다고 청하여 마침내 격파하였다.
開運 2년(945) 겨울에 杜重威를 따라 陽城에서 전투를 벌일 적에 왕청이 힘써 싸워 그 공이 步軍 가운데 으뜸이 되니 檢校司徒를 더하였다.
이해 겨울에 두중위가 中渡橋 남쪽에 주둔하고 契丹은 그 북쪽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는데, 거란이 정예 기병으로 西山으로 빠져나와 晉軍의 후방으로 나와 남쪽으로 欒城을 쳐서 진군의 軍糧路를 끊으니,
왕청이 두중위에게 말하기를 “진군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지금 鎭州와는 5리 거리인데 이곳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 있으니, 군대가 고립되고 양식이 떨어지면 장차 어찌하시겠습니까.
청컨대 步兵 2천으로 선봉을 삼아 다리를 빼앗아 길을 열거든, 공께서는 군대들을 이끌고 이어서 전진하여 진주로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두중위가 이를 허락하고 宋彦筠과 함께 전진하게 하니 왕청이 거란군과 전투하여 패퇴시켜 그 다리를 빼앗았다. 이때에 두중위는 이미 두 마음을 품고서 주저하며 전진하지 않으려 했고 송언균도 퇴주해버렸다.
왕청이 말하기를 “나는 이곳에서 홀로 죽겠다.”라고 하고는, 힘써 싸우다 죽으니 향년 53세였다. 漢 高祖가 즉위하자 왕청을 太傅에 증직하였다.
史彦超는 雲州 사람이니 사람됨이 용맹하고 사나우며 날래었다. 그리하여 周 太祖가 魏 땅에서 일어났을 때 사언초를 漢龍捷都指揮使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태조가 조정에 들어와 황제에 즉위하자 虎捷都指揮使로 승진하고 晉州에서 적을 방어하였다. 劉旻이 진주를 공격할 때 진주에 主將이 없어 知州 王萬敢이 막아내지를 못하자 사언초가 戍兵을 이끌고 한 달 남짓 견고히 수비하였는데,
태조가 王峻을 보내 구원하니 유민의 병사가 포위를 풀고 떠났다. 이 공으로 龍捷右廂都指揮使로 승진하고 鄭州防禦使를 맡았다.
周와 漢이 高平에서 싸울 때 사언초가 선봉이 되어 앞장서서 공격하여 적진을 함락하니 이 공으로 感德軍節度使에 배수되었다.
周나라 군대가 漢나라 太原을 포위하니 契丹이 漢을 구원하러 忻州와 代州로 나왔다. 周 世宗이 符彦卿을 보내 방어하고 사언초를 선봉으로 삼아 忻口에서 싸우게 하였다.
사언초가 용맹과 憤氣가 함께 격발되어 이리저리 적진을 향해 돌격하니 적진에서 적병을 흩었다가 다시 조우하기를 서너 차례 한 끝에 마침내 사언초가 적진에서 戰歿하였다.
이때에 世宗이 高平에서 漢을 패퇴시키고서 승세를 타고 진격하였는데, 漢나라의 성을 포위하고 싸울 때 장수들의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戰功을 이루지 못하였다.
세종이 포위를 풀고 떠나고자 하였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사언초가 戰死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급히 회군하니, 창졸지간에 매우 많은 군사를 잃었다.
세종은 사언초가 죽은 사실이 애석하던 터에 전공도 이루지 못한 것이 분하여 근심과 분노로 며칠이나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사언초에게 太師를 증직하고 그 집안에 넉넉하게 恤典을 내렸다.
孫晟은 初名이 鳳이고 또 다른 이름이 忌이니 密州 사람이다. 학문을 좋아하여 文辭에 뛰어났고 특히 시를 잘 지었다.
소싯적에
道士가 되어
廬山의
簡寂宮에 머무를 때, 항상
唐나라 시인
賈島의 초상을 그려 집 벽에 안치해두고
朝夕으로 섬기니 간적궁의 도사들이 손성을 미워하여 요사하다고 하면서 지팡이로 위협하여 쫓아내 버렸다.
賈島
그리하여 마침내 儒者의 복색을 하고 북쪽으로 趙와 魏 지방으로 가서 唐 莊宗을 鎭州에서 알현하니, 장종이 손성을 著作佐郞으로 삼았다.
天成 年間에 朱守殷이 汴州를 鎭守할 때 孫晟을 불러서 判官으로 삼았는데, 주수은이 반란하여 伏誅되자 손성은 妻子를 버리고 陳과 宋 지방 사이로 亡命하였다.
安重誨가 손성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주수은이 반란하도록 사주한 자는 손성이다.”라고 하고는, 그의 모습을 그려 수배하였으나 잡지 못하고서 마침내 그 집안을 滅族시키니, 손성은 吳로 달아났다.
이때에 李昪이 楊氏(吳)의 皇位를 찬탈하고 사방의 선비들을 많이 초빙하고 있었는데, 손성을 얻고서 그 文辭를 좋아하여 그에게 敎令을 짓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손성은 사람됨이 어눌하여 다른 사람을 만나면 안부도 제대로 묻지 못하다가, 얼마 뒤 좌정하고 나서는 論辨에 銳鋒이 생겨 듣는 사람들이 지겨움을 알지 못하였다.
이변이 이에 더욱 손성을 아껴 그를 불러 함께 논의할 때 뜻이 합치되는 경우가 많자, 손성을 右僕射로 삼아 馮延巳와 함께 이변의 승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손성은 풍연사의 사람됨을 경시하여 항상 말하기를 “금 주발과 옥 술잔에다 개똥을 담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라고 하였다.
손성은 20여 년 동안 이변 父子를 섬겨 관직이 司空에 이르러 집안이 더욱 부귀하고 방자해져서, 식사 때마다 几案은 갖추지 않고 기녀들에게 그릇 하나씩을 잡고서 빙 둘러서서 모시게 하고서는 ‘肉臺盤’이라고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많이 따라하였다.
周 世宗이 淮 땅을 정벌하니 李景이 두려워하여 처음에는 泗州의 牙將 王知朗을 보내 徐州에 이르러 서신을 바치고 화친을 청했으나 세종이 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翰林學士 鍾謨와 文理院學士 李德明을 보내 表文을 받들어 올려 稱臣하였으나 세종이 답하지 않았다.
이에 禮部尙書 王崇質과 副使 孫晟을 보내 표문을 받들어 올리게 하니, 종모와 손성 등이 모두 말하기를 “이경이 壽州‧濠州‧泗州‧楚州‧光州‧海州 여섯 곳의 땅을 떼어 바치고 歲貢 百萬으로 폐하의 군대를 돕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은 이미 滁州‧揚州‧濠州‧泗州의 여러 주를 취하고서 淮南을 다 취하고 나서야 그만두고자 하여, 使者들을 억류하고서 보내주지 않고 壽州를 더욱 급히 공격하였다.
종모 등은 세종이 英武하여 이경이 대적할 수 있는 바가 아니요, 군대가 몹시 성대하여 壽春이 장차 위태로울 것을 보고서, 이에 말하기를 “바라건대 폐하께서 신들을 주벌할 날짜를 닷새만 늦추시어 신들이 돌아가 이경의 표문을 가지고 와서 淮北의 여러 주를 다 바치는 것을 용납해주소서.”라고 하였다.
세종은 이를 허락하고서 供奉官 安弘道를 보내 이덕명과 왕숭질을 압송하여 남쪽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나 종모와 손성은 모두 억류당하였다.
이덕명 등이 이미 돌아오니 이경이 앞서의 말을 후회하여 땅을 떼어 바치지 않으려 했고, 세종 역시 더위와 비로 회군하고서 李重進과 張永德 등을 남겨 廬州와 壽州를 나누어 공격하게 하였는데, 周나라 병사들이 획득한 揚州와 泰州의 여러 주를 모두 지켜내지 못하자 이경이 군대를 다시 정비하였다.
이중진과 장영덕 兩軍이 서로 의심하면서 틈이 벌어져 장영덕이 글을 올려 이중진이 모반하였다고 하였는데 세종이 듣지 않았다. 이경은 두 장수가 서로 의심하는 것을 알게 되자, 이에 蠟丸書를 이중진에게 보내 모반을 권하였다.
당초에 孫晟이 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때, 王崇質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번에 사신 가면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끝내 永陵의 한 줌 흙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영릉은 李昪의 묘였다.
왕숭질이 돌아가자 손성과 鍾謨가 모두 周의 京師에 이르러 都亭驛에서 유숙할 때, 周나라에서 그들을 몹시 후하게 대우하였다. 朝會할 때마다 閣門 안으로 들어와 東省官의 뒤의 반열에 서게 하고 召見할 때에는 반드시 풍미가 좋은 술을 마셨다.
얼마 뒤 周의 군대가 자주 패배하여 획득했던 여러 州를 다 잃으니, 世宗이 근심하여 손성을 불러 江南의 일을 물었는데, 손성이 대답하지 않았다. 세종이 노엽기는 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 李重進이 李景의 蠟丸書를 가지고 와서 올렸는데, 그 글의 대부분이 周나라의 과실과 죄악을 論斥하는 말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세종이 노여움을 드러내어 말하기를 “손성이 나에게 사신으로 왔을 때 이경이 나의 神武를 두려워하여 北面해서 稱臣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보증하겠다고 하더니, 어떻게 이런 指斥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라고 하고는,
급히 侍衛軍虞候 韓通을 불러 손성을 잡아다 하옥하고 그 종자 2백여 인은 모두 죽였다.
손성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세종이 그래도 近臣을 보내 물었는데, 손성은 끝내 대답하지 않고 편안한 기색으로 의관을 정제하고서 남쪽을 향하여 절하고 말하기를 “신은 오직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할 뿐입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형벌을 받았다.
손성이 죽고 나서 종모 또한 耀州司馬로 폄적되었다. 그 뒤 세종이 노여움을 풀고 손성의 충성을 가련히 여기고 죽인 것을 후회하여 종모를 불러 衛尉少卿을 배수하였다.
이경이 강북의 땅을 떼어 바치니 마침내 종모를 보내어 남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이경이 손성의 죽음을 듣고는 또한 魯國公을 증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