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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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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歐陽公所次死節傳三人外 復錄死事者十五人이라 以十五人者不足以配三人之烈이나 然不忍遺之也 故別之曰 死事
然如張源德姚洪張敬達三人 其所凜然不爲不義屈이요 歐公所自爲點綴 亦多奇氣일새 予故幷錄之하노라
歐公小序 深取王淸史彦超 然不如源德等三人尤爲慘咽이라
嗚呼甚哉 終始五十三年 而天下五代하니 士之不幸而生其時하야 欲全其節而不二者固鮮矣
於此之時 責士以死與必去 則天下爲無士矣리라 然其習俗 遂以苟生不去爲當然하니
至於儒者以仁義忠信爲學하야 享人之祿하고 任人之國者하야도 不顧其存亡하고 皆恬然以苟生爲得하니
非徒不知愧 而反以其得爲榮者 可勝數哉 故吾於死事之臣 有所取焉이로라
어든 況死者人之所難乎
吾於五代 得全節之士三人而已 其初無卓然之節이라가 而終以死人之事者 得十有五人焉하대 而戰沒者 不得與也
然吾取王淸史彦超者 其有旨哉인저 其有旨哉인저 作死事傳하노라
張源德者 不知其世家 或曰 本晉人也 無所稱이라
하니 罕之遣源德見梁太祖 太祖時 源德自金吾衛將軍으로 爲蔡州刺史
乃遣劉鄩將兵萬人하야 屯于魏以虞變이라 魏軍果叛하야 迫其節度使賀德倫하야 以魏博二州降晉하다
當是時하야 入魏할새 諸將欲先擊貝州하니
晉王曰 貝城小而堅하니 攻之難卒下 且源德雖恃劉鄩之兵이나 하니
不如先取之則滄貝之勢分而易圖也라하고 乃先襲破德州然後 以兵五千攻源德이라
源德堅守不下하니 晉軍塹而圍之러라 已而 劉鄩大敗于하야 南走黎陽하고 晉軍攻破洺州하니
, 邢州節度使閻寶皆以城降晉하고 磁州刺史靳昭, 相州張筠, 滄州戴思遠皆棄城走
當此時하야 하니 而鎭定皆附于晉이라
自河以北山以東으로 四面千里六鎭數十州之地 皆歸晉이어늘 獨貝一州 圍之踰年不可下러라
源德已死 貝人謀曰 晉圍吾久하니 吾窮而後降이면 懼皆不免也라하고
乃告于晉曰 吾欲被甲執兵而降하야 得赦而後釋之하니 如何오하니 晉軍許諾이라 貝人三千出降하야 已釋甲하니 晉兵四面圍而盡殺之하다
夏魯奇 字邦傑이니 靑州人也 唐莊宗時 賜姓名曰 李紹奇러니 其後 莊宗賜姓名者 皆復其故하다
魯奇初事梁하야 爲宣武軍校하고 하야 爲衛護指揮使攻劉守光於幽州할새
守光將單廷珪元行欽以驍勇自負 魯奇每與二將鬪 輒不能解하니 兩軍皆釋兵而觀之
晉已下魏博하니 梁將劉鄩軍于洹水 莊宗以百騎覘敵이라가 遇鄩伏兵하야 圍之數重하야 幾不得脫이어늘
魯奇力戰하야 手殺百餘人하고 身被二十餘創하야 與莊宗決圍而出하니 莊宗益奇之하야 以爲磁州刺史하다
從戰中都하야 擒王彦章하니 莊宗壯之하야 賜絹千匹하고 拜鄭州防禦使하다
遷河陽節度使하야 爲政有惠愛하니 徙鎭忠武 河陽之人遮留하야 不得行하고 父老詣京師乞留 明宗遣中使往諭之하니 魯奇乃得去러라
唐師伐荊南할새 以魯奇爲招討副使한대 無功而還이라 徙鎭武信하고 東川하야 攻遂州하니 魯奇閉城拒之어늘
救兵不至하고 城中食盡하야 魯奇自刎死하니 年四十九
【原註】하고 魯奇 食盡力窮而死 故取捨異
姚洪 本梁之小校也 自董璋爲梁將으로 洪嘗事璋이라가 後事唐爲指揮使
遣洪將千人戍閬州한대 董璋反하야 遣人以書招洪하니 洪得璋書하고 輒投廁中이라
後璋兵攻破閬州하야 執洪하고 璋曰 爾爲 我遇汝厚어늘 奈何負我邪오하니
洪罵曰 老賊 爾昔爲하야 掃馬糞이라가 得一臠殘炙 感恩不已러니
今天子用爾爲節度使어늘 何苦反邪 吾能爲國家死 不能從人奴以生이라하니
璋怒하야 燃鑊于前하야 令壯士十人刲其肉而食이어늘 洪至死大罵 明宗聞之泣下하고 錄其二子而厚䘏其家하다
王思同 幽州人也 其父敬柔娶劉仁恭女하야 生思同이라 思同事仁恭하야 爲銀胡䩮指揮使한대
仁恭爲其子守光所囚하니 思同奔하야 以爲飛勝指揮使하다 梁晉相距于莘할새 遣思同築壘楊劉하니
以功遷神武十軍都指揮使하고 累遷鄭州防禦使하다 思同爲人敢勇하고 善騎射하며 好學하고 頗喜爲詩하며
輕財重義하고 多禮文士 然未嘗有戰功이라 明宗時 以久次爲匡國軍節度使하고 徙鎭雄武
是時 數爲寇어늘無亭障하니 思同列四十餘柵以禦之하다
居五年 來朝할새 明宗問以邊事하니 思同指畫山川하야 陳其利害
思同去하니 明宗顧左右曰 人言思同不管事라하더니 能若是邪아하고 於是 始知其材하야 以爲右武衛上將軍京兆尹西京留守하다
石敬瑭討董璋할새 思同爲先鋒指揮使한대 兵入而後軍不繼하니
思同與璋戰하야 不勝而却하고 敬瑭兵罷러라 思同徙鎭山南西道하고 已而 復爲京兆尹西京留守하다
應順元年二月 하야 馳檄四隣하야 言 奸臣幸先帝疾病하야 而立幼嗣하야 侵弱宗室하고 動搖藩方이라하고
陳己所以興兵討亂之狀이라 因遣安十十하야 以五弦謁思同하야 欲因其懽以通意
是時 諸鎭皆懷嚮背하야 所得潞王書檄 雖以上聞이나 而不絶其使어늘
獨思同執十十及從珂所使推官郝詡等하야 送京師하니 嘉其忠하고 卽以思同爲西面行營馬步軍都部署하다
三月 會諸鎭兵하야 圍鳳翔하고 破東西關城한대 從珂兵弱而守甚堅하니 外兵傷死者衆이라
從珂登城呼外兵而泣曰 吾從先帝二十年 大小數百戰하야 甲不解體하고 金創滿身하니 士卒固嘗從我矣로다
今先帝新棄天下하고 而朝廷信用奸人하야 離間骨肉하니 我實何罪而見伐乎아하고 因慟哭하니 士卒聞者皆悲憐之러라
興元張虔釗攻城西하야 督戰甚急하니 士卒苦之하야 反兵攻虔釗하니 虔釗走
羽林指揮使楊思權呼曰 潞王 吾主也라하고 乃引軍自西門入降從珂어늘 而思同未知하고 猶督戰이라
嚴衛指揮使尹暉麾其衆曰 城西軍入城受賞矣어늘 何用戰邪리오하니
士卒解甲棄仗하고 聲聞數里하야 遂皆入城降하니 諸鎭之兵皆潰
思同挺身走하야 至長安하니 西京副留守劉遂雍閉門不納이라 乃走潼關이라
從珂引兵東至昭應 前鋒追執思同하니 從珂責曰 罪可逃乎아하니
思同曰 非不知從王而得生이나 恐終死不能見先帝於地下라하니 從珂媿其言하야 乃殺之하다 漢高祖卽位 贈侍中하다
【原註】思同東走 將自歸于天子走異 故予其死하노라
張敬達 字志通이니 代州人也 小字生鐵이라 少以騎射事唐莊宗하야 爲廳直軍使하고
明宗時 爲河東馬步軍都指揮使하야 欽州刺史하고 累遷彰國大同軍節度使하고 하다
淸泰二年 契丹數犯邊하니 以河東節度使石敬瑭으로 兼大同彰國振武威塞等軍蕃漢馬步軍都總管하고 屯于忻州한대
屯兵聚譟하야 遮敬瑭하고 呼萬歲하니 敬瑭斬三十餘人以止之하다 廢帝疑敬瑭有異志하야 乃以敬達爲北面副總管하야 以分其兵하다
明年夏 徙敬瑭鎭天平하고 遂以敬達爲大同彰國振武威塞等軍蕃漢馬步軍都部署어늘 敬瑭因此遂反이라 卽以敬達爲太原四面招討使하다
六月 兵圍太原할새 敬達爲長城連柵하야 以攻之한대 所爲城柵將成 輒有大風雨하야 水暴至以壞之러라
敬瑭求救于契丹한대 九月 契丹耶律德光自雁門入하니 旌旗相屬五十餘里
德光先遣人告敬瑭曰 吾欲今日破敵 可乎아하니 敬瑭報曰 大兵遠來하고 而賊勢方盛하니 要在成功이요 不必速也라한대 使者未復命而兵已交
敬達陣於西山이러니 契丹以羸騎三千으로 革鞭木𩍐하고 人馬皆不甲冑하야 以趨唐軍이라
唐軍爭馳之하니 契丹兵走 追至汾曲 伏發하야 斷唐軍爲二하니 其在北者皆死하야 死者萬餘人이라
敬達收軍柵晉安이어늘 契丹圍之 廢帝遣趙延壽範延光等救之한대 延壽屯團柏谷하고 延光屯遼州하니 相去皆百餘里러라
契丹兵圍敬達者 自晉安寨南으로 長百餘里 闊五十里 敬達軍中望之하니
但見穹廬連屬如岡阜 四面亙以毛索掛鈴爲警하고 縱犬往來하니 敬達軍中有夜出者 輒爲契丹所得이라
이라 延壽等皆有二心하야 無救敬達意
敬達猶有兵五萬人馬萬匹이로대 久之食盡하야 以飼其馬하고 馬死者食之러니
已而馬盡이라 副招討使楊光遠勸敬達降晉하니 敬達自以不忍背唐이요 而救兵且至
光遠促之不已어늘 敬達曰 諸公何相迫邪 何不殺我而降고하니
光遠卽斬敬達降이라 契丹耶律德光聞敬達死하고 哀其忠하야 遣人收葬之하다
【原註】本紀 責其不誅光遠하고 而諷其殺己以降賊이라 故不書死而書如其志
終嘉其不降也일새라雖不屈而諷人降賊이라 故不得爲死節이라
王淸 字去瑕 洺州曲周人也 初事唐爲寧衛指揮使하고 後事晉爲奉國都虞候하다
叛襄州할새攻之하야 逾年不能下
淸謂行周曰 從進閉孤城以自守하니 其勢豈得久邪아하고 因請先登하야 遂攻破之하다
開運二年冬 從杜重威戰陽城할새 淸以力戰하야 功爲步軍之最하니 加檢校司徒하다
하고 虜軍其北以相拒한대 而虜以精騎竝西山出晉軍後하야 南擊欒城하야 斷晉餉道하니
淸謂重威曰 晉軍危矣 今去鎭州五里어늘 而守死于此하니 營孤食盡이면 將若之何
請以步兵二千爲先鋒하야 奪橋開路어든 公率諸軍繼進하야 以入鎭州 可以守也라하다
重威許之하고 遣與宋彦筠俱前하니 淸與虜戰하야 敗之하야 奪其橋 是時 重威已有貳志하야 猶豫不肯進하고 彦筠亦退走
하니 年五十三이라 漢高祖立 贈淸太傅하다
史彦超 雲州人也 爲人勇悍驍捷이라 起魏時 彦超爲漢龍捷都指揮使하야 以兵從하다
太祖入立 遷虎捷都指揮使하고 戍于晉州하다 攻晉州할새 州無主帥하야 知州王萬敢不能拒어늘 彦超以戍兵堅守月餘한대
太祖遣王峻救之하니 旻兵解去 以功遷龍捷右廂都指揮使하고 領鄭州防禦使하다
周漢戰高平할새 彦超爲前鋒하야 先登陷陣하니 以功拜感德軍節度使하다
周兵圍漢太原하니 契丹救漢하야 出忻代 世宗遣符彦卿拒之하고 以彦超爲先鋒하야 戰忻口
彦超勇憤俱發하야 左右馳擊하니 解而復合者數四하야 遂歿於陣하다
是時 世宗敗漢高平하야 乘勝而進한대 圍城之役 諸將議不一이라 故久無成功이라
世宗欲解去而未決이라가 聞彦超戰死하고 遽班師하니 倉卒之際 亡失甚衆이라
世宗旣惜彦超而憤無成功하야 憂忿不食者數日이러라 贈彦超太師하고 優䘏其家焉하다
孫晟 初名鳳이요 又名忌 密州人也 好學有文辭하고 尤長於詩
少爲道士하야할새 常畫唐詩人하야 置于屋壁하고 晨夕事之하니 簡寂宮道士惡晟하야 以爲妖하야 以杖驅出之
乃儒服北之趙魏하야 謁唐莊宗于鎭州하니 莊宗以晟爲著作佐郞하다
鎭汴州할새 辟爲判官한대 守殷反하야 伏誅어늘 晟乃棄其妻子하고 亡命陳宋之間하다
惡晟하야 以謂敎守殷反者 晟也라하고 畫其像購之로대 不可得하야 遂族其家하니 晟奔于吳하다
하고 多招四方之士한대 得晟하고 喜其文辭하야 使爲敎令하니 由是知名하다
晟爲人口吃하야 遇人不能道寒暄이라가 已而 坐定 談辯鋒生하야 聽者忘倦하니
昪尤愛之하야 引與計議 多合意일새 以爲右僕射하야竝爲昪相이라 晟輕延巳爲人하야 常曰 金碗玉杯而盛狗屎 可乎아하다
晟事昪父子二十餘年 官至司空하야 家益富驕하야 每食不設几案하고 使衆各執一器하야 環立而侍하고 號肉臺盤이라하니 時人多效之하다
周世宗征淮하니 하야 始遣泗州牙將王知朗하야 至徐州하야 奉書以求和로대 世宗不答이라
又遣翰林學士鍾謨文理院學士李德明하야 奉表稱臣이로대 不答이라
乃遣禮部尙書王崇質副晟奉表하니 謨與晟等皆言 景願割壽濠泗楚光海六州之地하고 歲貢百萬以佐軍이라하야늘
而世宗已取滁揚濠泗諸州하고 欲盡取南乃止하야 因留使者不遣하고 而攻壽州益急이라
謨等見世宗英武하야 非景敵이요 而師甚盛하야 壽春且危하고 乃曰 願陛下寬臣五日之誅하야 容臣還取景表하야 盡獻淮北諸州하소서하다
世宗許之하야 遣供奉官安弘道하야 押德明崇質南還이로대 而謨與晟皆見留
德明等旣還하니 景悔하야 不肯割地 世宗亦以暑雨班師하고 留李重進張永德等하야 分攻廬壽한대 周兵所得揚泰諸州 皆不能守어늘 景兵復振이라
重進與永德兩軍相疑有隙하야 永德上書言重進反이라하거늘 世宗不聽이라 景知二將之相疑也 乃以遺重進하야 勸其反하다
晟之奉使也 語崇質曰 吾行必不免이라 然吾終不負永陵一抔土也라하니 永陵者 昪墓也
及崇質還하야 而晟與鍾謨俱至京師하야 館于都亭驛할새 待之甚厚 每朝會入閣하야 하고 召見 必飮以醇酒
已而 周兵數敗하야 盡失所得諸州하니 世宗憂之하야 召晟問江南事한대 晟不對 世宗怒로대 未有以發이라
會重進以景蠟丸書來上 多斥周過惡以爲言이라 由是 發怒曰 晟來使我 言景畏吾神武하야 願得北面稱臣하야 保無二心이러니 安得此指斥之言乎아하고
亟召侍衛軍虞候韓通하야 收晟下獄하고 及其從者二百餘人皆殺之하다
晟臨死 世宗猶遣近臣問之한대 晟終不對하고 神色怡然하야 正其衣冠하고 南望而拜曰 臣惟以死報國爾라하고 乃就刑하다
晟旣死하고 鍾謨亦貶耀州司馬하다 其後世宗怒解하야 憐晟忠하고 悔殺之하야 召拜鍾謨衛尉少卿하다
景已割江北하니 遂遣謨還한대 而景聞晟死하고 亦贈魯國公하다


02. 國事를 위해 죽은 사람의 傳記
歐陽公이 편차한 〈死節傳〉의 세 사람 외에 다시 國事를 위해 죽은 사람 열다섯을 수록하였다. 열다섯 사람이 〈〈사절전〉에 실린〉 세 사람의 功烈에 짝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차마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구별하여 ‘死事’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張源德姚洪張敬達 세 사람과 같은 경우 그들이 의연히 不義에 굴복하지 않았고 구양공이 스스로 엮은 내용들이 또한 奇氣가 많기 때문에 내가 〈〈死事傳〉을 여기에〉 아울러 수록하였다.
구양공의 小序王淸史彦超의 뜻을 깊이 인정하였으나, 장원덕 등 세 사람의 일을 서술한 대목이 더욱 참담하고 목이 메이는 것만은 못하다.
오호라! 심하도다. 開平으로부터 顯德에 이르기까지 始終 53년 동안 천하에 五代가 들어섰으니, 선비로 불행히 그 시대에 태어나 절조를 온전히 하고자 하면서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자는 진실로 드물었다.
이러한 때에 죽거나 반드시 그 나라를 떠나는 것을 선비들에게 요구했다면 천하에 선비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 습속이 마침내 구차하게 살고 그 나라를 떠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니,
儒者로서 仁義忠信을 배워 남의 祿을 받고 그 사람의 나라에 임용된 자에 이르러서도 그 나라의 存亡은 돌아보지 않고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구차히 사는 것을 옳다고 여겼다.
그러니 단지 부끄러움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처신을 영광으로 여긴 자를 이루 다 셀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國事를 위해 죽은 신하들에 대해 취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군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 그의 아름다운 점을 이루어주기를 좋아하고 그가 두루 다 잘하기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죽음은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임에 있어서랴.
내가 五代 시절에 절조를 온전히 한 선비는 세 사람을 알 뿐이요, 애초에는 우뚝한 절조가 없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섬기던〉 군주의 國事를 위해 죽은 자는 열다섯 사람을 아는데, 전쟁 중에 죽은 사람은 그 가운데에 끼이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王淸史彦超를 넣은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뜻이 있어서이다. 〈死事傳〉을 쓰노라.
死事傳〉에 立傳하지 못한 자가 다섯 사람이니, 馬彦超는 〈朱守殷傳〉에 덧붙였고, 宋令詢李遐張彦卿鄭昭業은 〈本紀〉에 보일 따름이다.
張源德은 그 世系를 알 수 없으니, 어떤 사람은 본래 사람이라고 한다. 젊어서 을 섬길 때에는 이름이 알려진 바가 없었다.
李罕之를 따라 潞州를 점거하고서 을 배반하고 에 항복하니, 이한지가 장원덕을 보내 太祖를 알현하게 하였다. 태조 때에 장원덕은 金吾衛將軍에서 蔡州刺史가 되었다.
나라 貞明 3년(917)에 魏博節度使 楊師厚가 죽으니 末帝魏州相州 등 여섯 주를 나누어 두 개의 으로 만들면서 魏軍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劉鄩에게 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에 주둔하여 변란에 대비케 하였다. 위군이 과연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 賀德倫을 겁박하여 위주와 博州를 가지고 에 투항하였다.
이때 張源德劉鄩의 휘하에서 貝州를 지키고 있었다. 晉王 땅으로 들어왔을 때 장수들이 먼저 패주를 치고자 하니,
진왕이 말하기를 “貝城이 작지만 견고하니 공격하여 대번에 함락시키기 어렵다. 또 장원덕이 비록 유심의 병력을 믿고 있으나 滄州와 서로 머리와 꼬리의 형세이고 지금 德州는 그 가운데 위치하여 방비가 없으니,
먼저 덕주를 취하면 창주와 패주의 세력이 분리되어 도모하기 쉬운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는, 먼저 덕주를 습격하여 격파한 뒤 5천의 병사로 장원덕을 공격하였다.
장원덕이 굳게 수비하여 함락되지 않으니 晉軍이 참호를 파고 포위하였다. 얼마 후 유심이 옛 元城에서 대패하여 남쪽의 黎陽으로 도주하고 진군이 洺州를 공격하여 격파하니,
衛州刺史 來昭邢州節度使 閻寶는 모두 성을 가지고 진에 투항하였고, 磁州刺史 靳昭相州刺史 張筠滄州刺史 戴思遠은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이때 이 이미 全燕을 먼저 함락시켰고 鎭州定州도 모두 에 투항하였다.
이에 河北山東에서부터 사방 천 리의 六鎭과 수십 의 땅이 모두 에 귀속되었는데도 貝州 한 지역만은 포위한 지 1년이 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張源德의 방비가 이미 굳건하였는데 패주 사람들이 이 이미 하북을 다 차지했다는 말을 들은 데다 성안의 양식도 모두 바닥이 나자 마침내 장원덕에게 나가서 항복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장원덕이 따르지 않아 마침내 살해당하였다.
장원덕이 죽고 나서 패주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이 우리를 포위한 지 오래이니 우리가 궁한 처지에 몰린 다음 항복하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까 두렵다.”라고 하고는,
이에 에 고하기를 “우리가 갑옷을 입고 병기를 쥐고서 항복한 다음 사면을 받은 뒤 무장을 풀고 싶은데 어떠한가?”라고 하니 晉軍이 허락하였다. 그런데 패주 사람 3천 명이 성을 나가 항복하고서 무장을 풀자 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포위하고서 모두 죽여버렸다.
夏魯奇邦傑이니 靑州 사람이다. 莊宗 때에 姓名을 하사하여 李紹奇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장종이 성명을 하사했던 사람들 모두 본래의 성명을 회복하였다.
하노기는 처음에는 을 섬겨 宣武軍校가 되었고, 뒤에 으로 도주하여 衛護指揮使가 되었다. 周德威를 따라 幽州에서 劉守光을 공격할 때,
유수광의 장수 單廷珪元行欽이 굳세고 용맹스러운 것으로 자부하였다. 하노기가 매번 이 두 장수와 싸울 때마다 번번이 승부를 가리기 어려우니 양측의 군사들이 모두 병기를 내려놓고서 싸움을 구경하였다.
이 이미 魏州博州를 함락하니 의 장수 劉鄩洹水에 주둔하였다. 莊宗騎兵 백 명을 데리고 적진을 정찰하다가 유심의 복병을 만나 몇 겹의 포위를 당해 거의 빠져나오지 못할 뻔하였다.
그런데 夏魯奇가 힘써 싸워 백여 명의 적을 맨몸으로 죽이고 20여 군데나 創傷을 입고서 장종과 함께 포위를 뚫고 탈출하니 장종이 더욱 기특하게 여겨 磁州刺史로 삼았다.
장종을 따라 中都에서 싸우면서 王彦章을 사로잡으니 장종이 장하게 여겨 명주 천 필을 하사하고 鄭州防禦使에 제수하였다.
河陽節度使로 승진하여 정사를 베풂에 끼친 은혜가 많으니, 忠武軍節度使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을 때 하양 사람들이 길을 가로막고 저지하여 떠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양의 父老들이 도성에 가서 하노기의 留任을 청하였다. 明宗이 환관에게 하양으로 가서 曉諭하게 하고서야 하노기가 떠날 수 있었다.
의 군사가 荊南을 정벌할 때 夏魯奇招討副使로 삼았는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武信軍節度使로 자리를 옮기고 東川董璋이 반란을 일으켜 遂州를 공격하니 하노기가 성문을 닫아걸고 항거하였다.
그러나 열 달이 지나도록 구원병이 오지 않고 성안의 양식도 바닥이 나 하노기가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으니 향년 49세였다.
吳巒은 병사가 아직 싸울 수 있는데도 싸우지 않았고, 夏魯奇는 양식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죽었다. 그러므로 〈立傳에 이들을〉 取捨함이 다른 것이다.
姚洪은 본래 의 하급 軍校였다. 董璋나라의 장수가 되었을 때부터 요홍이 동장을 섬기다가 뒤에 을 섬겨 指揮使가 되었다.
長興 연간에 요홍에게 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閬州를 지키게 하였는데 동장이 반란을 일으키고서 사람을 보내 서신으로 요홍을 부르니 요홍이 동장의 서신을 받은 즉시 뒷간에 던져버렸다.
뒤에 동장의 군대가 낭주를 공격하여 격파하고서 요홍을 잡고, 동장이 말하기를 “네가 군졸이었을 때 내가 너를 후하게 대우하였거늘 어찌하여 나를 저버렸느냐?”라고 하였다.
그러자 요홍이 욕하기를 “늙은 도적놈아. 네가 옛날에 李七郞(李讓)의 노예가 되어 말똥이나 쓸다가 저민 고기 한 점을 얻으면 감읍해 마지않더니,
지금 천자께서 너를 등용하여 節度使로 삼으셨거늘 어찌하여 굳이 반란을 일으켰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수는 있어도 남의 노예를 따라 살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동장이 노하여 앞에다 솥을 달구어놓고 壯士 열 명에게 요홍의 살점을 도려내어 먹게 하였는데, 요홍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동장을 크게 욕하였다. 明宗이 이 사실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고 두 아들을 錄用하였으며 그 집안에 후하게 恤典을 내렸다.
王思同幽州 사람이다. 그 아버지 王敬柔劉仁恭의 딸에게 장가들어 王思同을 낳았다. 왕사동은 유인공을 섬겨 銀胡䩮指揮使가 되었는데,
유인공이 아들 劉守光에게 유폐되니 왕사동은 으로 달아나 飛勝指揮使가 되었다. 땅에서 대치할 때 왕사동을 보내 楊劉에 보루를 쌓게 하니,
그 공으로 神武十軍都指揮使로 승진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鄭州防禦使가 되었다. 왕사동은 사람됨이 용감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시 짓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리고 재물을 하찮게 여기고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文士들을 두텁게 예우하였다. 그러나 戰功을 세운 적은 없었다. 明宗 때에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한 사람을 승진시켜주는 관례에 따라 匡國軍節度使가 되었으며, 자리를 옮겨 雄武軍節度使가 되었다.
이때 吐藩이 자주 노략질을 하였는데 秦州에는 이를 막아낼 보루가 없었다. 그러자 왕사동이 40여 개의 木柵을 벌여 세워 토번을 방어하였다.
왕사동이 부임한 지 5년째에 조정으로 들어왔을 때 명종이 변방의 일을 물으니 왕사동이 손가락으로 山川을 그어가며 그 利害를 설명하였다.
왕사동이 떠나자 명종이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왕사동이 일을 맡을 능력이 없다고 사람들이 말하더니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이에 그제야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右武衛上將軍 京兆尹 西京留守로 삼았다.
石敬瑭董璋을 토벌할 때 王思同先鋒指揮使가 되었는데, 군대가 劍門으로 진입하였음에도 後軍이 뒤따르지 못하니,
왕사동이 동장과 싸워 이기지 못한 채 퇴각하였고 석경당은 철군하였다. 왕사동은 자리를 옮겨 山南西道節度使가 되었고, 얼마 뒤 다시 京兆尹 西京留守가 되었다.
應順 원년(934) 2월에 潞王 李從珂鳳翔에서 반란을 일으켜 사방으로 檄文을 보내 “奸臣先帝께서 병중인 틈을 타 秦王을 살해하고 어린 후사를 세워 종실을 침탈하여 약하게 만들고 藩方을 동요시키고 있다.”라고 하고는,
자신이 병사를 일으켜 난리를 토벌하려는 근거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격문을 전달하는 편에 伶奴 安十十을 보내 五絃琴을 가지고 왕사동을 배알하게 하여 그가 기분이 좋은 틈을 타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때 여러 藩鎭이 모두 일의 형세를 살펴 유리한 쪽으로 붙으려는 마음을 품고서, 획득한 潞王의 격문을 조정에 보고하기는 하였지만 노왕의 사신을 사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왕사동만은 안십십과 이종가의 사신으로 온 推官 郝詡 등을 사로잡아 도성으로 압송하니, 愍帝가 그 충성을 가상히 여기고 즉시 왕사동을 西面行營馬步軍都部署로 삼았다.
3월에 여러 藩鎭의 군대를 모아 鳳翔을 포위하고 東西關城을 격파하였는데, 李從珂의 병력이 약소하였으나 수비가 몹시 견고하니 번진에서 온 군대의 사상자가 많아졌다.
이종가가 성 위에 올라가 번진의 군대를 부르면서 울며 말하기를 “내가 先帝를 따른 20년 동안 크고 작은 수백 차례의 전투에 참전하여 갑옷을 벗지 않고 칼과 창 자국이 온몸에 가득하니, 〈여기 온 번진의〉 士卒들은 본디 나를 따라 〈전투에 나섰던〉 이들이다.
지금 선제께서 막 천하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시고〉 조정에서는 간악한 이들을 신용하여 골육간을 이간시키고 있으니, 내가 실로 무슨 죄가 있어 토벌을 받는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통곡하니, 이 말을 들은 사졸들이 모두 슬퍼하고 동정하였다.
興元張虔釗가 성 서쪽을 공격하여 매우 급히 전투를 독려하니 사졸들이 힘들어하여 반란을 일으켜 장건소를 공격하니 장건소가 도주하였다.
羽林指揮使 楊思權이 “潞王은 우리 주인이다.”라고 외치고서 군사를 이끌고 서남쪽에서 들어가 이종가에게 투항했는데, 왕사동은 이 사실을 모르고 계속 전투를 독려하였다.
嚴衛指揮使 尹暉가 자신의 군사들을 지휘하여 “성 서쪽의 군사들은 성안으로 들어가 상을 받았는데 무엇하러 싸우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졸들이 갑옷과 병장기를 버리고 몇 리 밖까지 이 사실을 전파하고서 마침내 모두 성안으로 들어가 투항하니, 여러 번진의 군대가 모두 흩어져 떠났다.
왕사동이 몸을 빼어 달아나 長安에 이르니 西京副留守 劉遂雍이 성문을 닫아걸고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潼關으로 달아났다.
이종가가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昭應에 이르러 선봉 부대가 추격하여 왕사동을 사로잡으니, 이종가가 질책하기를 “네 죄를 피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사동이 말하기를 “왕을 따르면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끝내 죽어서 지하에서 先帝를 만나 뵙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이종가가 그 말을 부끄럽게 여겨 마침내 왕사동을 죽였다. 高祖(劉知遠)가 즉위하자 侍中에 증직되었다.
王思同이 동쪽으로 도주한 것은 天子에게 돌아가려 한 것이니, 元行欽이 도주한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 죽음을 〈國事에 죽은 것으로〉 인정하였다.
張敬達志通이니 代州 사람이다. 어릴 적 이름은 生鐵이다. 소싯적에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莊宗을 섬겨 廳直軍使가 되었고,
明宗 때에는 河東馬步軍都指揮使가 되어 欽州刺史를 맡았고, 여러 번 승진하여 彰國軍大同軍節度使가 되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武信軍晉昌軍의 절도사가 되었다.
淸泰 2년(935)에 契丹이 자주 변경을 침범하니 廢帝河東節度使 石敬瑭에게 大同軍彰國軍振武軍威塞軍 등의 蕃漢馬步軍都總管을 겸하게 하고 忻州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주둔병들이 모여서 소란을 일으키며 석경당을 가로막고서 萬歲를 외치니, 석경당이 30여 인을 참수하여 저지시켰다. 폐제는 석경당이 다른 뜻을 품었다고 의심하고서 이에 장경달을 北面副總管으로 삼고 군대를 나누었다.
이듬해 여름에 석경당의 자리를 옮겨 天平軍節度使로 삼고 마침내 장경달을 大同軍彰國軍振武軍威塞軍 등의 蕃漢馬步軍都部署로 삼자, 석경당이 이를 말미암아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즉시 장경달을 太原四面招討使로 삼았다.
6월에 唐軍太原을 포위했을 때 장경달이 긴 성채와 연이은 목책을 설치하고서 雲梯飛礮로 공격하였는데, 성채와 목책이 완성되려 할 때 문득 큰 비바람이 몰아쳐 홍수가 밀려와 무너져버렸다.
雲梯雲梯
石敬瑭契丹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9월에 거란의 耶律德光雁門으로부터 들어오니 그들의 깃발이 50여 리에 걸쳐 이어졌다.
야율덕광이 먼저 사람을 보내 석경당에게 고하기를 “내가 오늘 적을 격파하려고 하는데 괜찮겠는가?”라고 하니, 석경당이 대답하기를 “대군은 멀리서 왔고 적들의 기세는 한창 강성하니 공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굳이 速戰을 펼칠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는데, 使者復命하기도 전에 양군이 이미 교전하였다.
張敬達西山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거란에서 쇠약한 騎兵 3천에 가죽 채찍과 나무 鐙子를 착용시키고 사람과 말은 모두 甲冑를 입지 않은 채로 의 군대를 향해 돌진시켰다.
당의 군대도 다투어 거란군을 향해 돌진하니 거란군이 도주하였다. 이들을 추격하여 汾曲에 이르자 복병이 튀어나와 당의 군대를 둘로 끊어버리니, 북쪽에 있는 자들이 모두 죽어 죽은 병사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張敬達이 군대를 수습하여 晉安營寨를 세우자 契丹이 포위하였다. 廢帝趙延壽範延光 등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는데, 조연수는 團柏谷에 주둔하고 범연광은 遼州에 주둔하니 〈장경달의 영채와의〉 거리가 양군 모두 백여 리였다.
장경달을 포위한 거란군은 晉安의 영채 남쪽에서부터 백여 리의 길이에 오십 리의 폭으로 〈감싸고 있었다.〉 장경달이 군중에서 이들을 바라보니,
그저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란군의 軍幕이 산등성이처럼 서로 이어지고 사면에 털로 꼰 밧줄을 연결하여 방울을 매달아 警報로 삼고 개들을 풀어놓아 오가며 지키게 〈하는 광경이었으니,〉 장경달의 군중에서 밤에 영채를 나가는 자들은 번번이 거란군에 붙잡혔다.
이 때문에 영채를 굳게 닫아걸고서 감히 다시 나가지 못하였다. 조연수 등은 모두 두마음을 품어 장경달을 구원할 뜻이 없었다.
장경달에게는 그래도 5만의 병사와 만 필의 군마가 있었으나 오랫동안 포위를 당해 양식이 떨어지자 나무를 벗겨내고 똥을 체에 걸러 말에게 먹였고, 말이 죽으면 그 말을 식량으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 말도 다 떨어져버렸다. 副招討使 楊光遠이 장경달에게 에 투항할 것을 권유하니, 장경달은 스스로 차마 을 배반하지 못하겠고 구원병이 곧 당도하리라 여겼다.
양광원이 재촉을 그치지 않으니 장경달이 말하기를 “공들은 어찌하여 나를 압박하는가. 어찌하여 나를 살해하고서 항복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광원이 즉시 장경달의 목을 베고 투항하였다. 거란의 耶律德光이 장경달의 죽음을 듣고 그 충성을 애도하여 사람을 보내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내주었다.
本紀에서는 張敬達楊光遠誅殺하지 않고 자신을 살해하고서 적에게 투항하라고 넌지시 권한 것을 책망하였다. 그러므로 ‘’라고 쓰지 않고 그의 뜻대로 된 것을 쓴 것이며,
列傳에서 ‘’라고 기록한 것은 그가 투항하지 않은 것을 끝내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은 비록 굴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적에게 투항할 것을 넌지시 권하였으므로 死節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王淸去瑕洺州 曲周 사람이다. 처음에는 나라를 섬겨 寧衛指揮使가 되었고, 뒤에 을 섬겨 奉國都虞候가 되었다.
安從進襄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高行周를 따라 공격하였는데 해를 넘기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러자 왕청이 고행주에게 말하기를 “안종진이 외로운 성안에 갇혀 스스로 지키고 있으니 그 형세가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서는, 먼저 공격하겠다고 청하여 마침내 격파하였다.
開運 2년(945) 겨울에 杜重威를 따라 陽城에서 전투를 벌일 적에 왕청이 힘써 싸워 그 공이 步軍 가운데 으뜸이 되니 檢校司徒를 더하였다.
이해 겨울에 두중위가 中渡橋 남쪽에 주둔하고 契丹은 그 북쪽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는데, 거란이 정예 기병으로 西山으로 빠져나와 晉軍의 후방으로 나와 남쪽으로 欒城을 쳐서 진군의 軍糧路를 끊으니,
왕청이 두중위에게 말하기를 “진군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지금 鎭州와는 5리 거리인데 이곳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 있으니, 군대가 고립되고 양식이 떨어지면 장차 어찌하시겠습니까.
청컨대 步兵 2천으로 선봉을 삼아 다리를 빼앗아 길을 열거든, 공께서는 군대들을 이끌고 이어서 전진하여 진주로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두중위가 이를 허락하고 宋彦筠과 함께 전진하게 하니 왕청이 거란군과 전투하여 패퇴시켜 그 다리를 빼앗았다. 이때에 두중위는 이미 두 마음을 품고서 주저하며 전진하지 않으려 했고 송언균도 퇴주해버렸다.
왕청이 말하기를 “나는 이곳에서 홀로 죽겠다.”라고 하고는, 힘써 싸우다 죽으니 향년 53세였다. 高祖가 즉위하자 왕청을 太傅에 증직하였다.
史彦超雲州 사람이니 사람됨이 용맹하고 사나우며 날래었다. 그리하여 太祖 땅에서 일어났을 때 사언초를 漢龍捷都指揮使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태조가 조정에 들어와 황제에 즉위하자 虎捷都指揮使로 승진하고 晉州에서 적을 방어하였다. 劉旻이 진주를 공격할 때 진주에 主將이 없어 知州 王萬敢이 막아내지를 못하자 사언초가 戍兵을 이끌고 한 달 남짓 견고히 수비하였는데,
태조가 王峻을 보내 구원하니 유민의 병사가 포위를 풀고 떠났다. 이 공으로 龍捷右廂都指揮使로 승진하고 鄭州防禦使를 맡았다.
高平에서 싸울 때 사언초가 선봉이 되어 앞장서서 공격하여 적진을 함락하니 이 공으로 感德軍節度使에 배수되었다.
나라 군대가 나라 太原을 포위하니 契丹을 구원하러 忻州代州로 나왔다. 世宗符彦卿을 보내 방어하고 사언초를 선봉으로 삼아 忻口에서 싸우게 하였다.
사언초가 용맹과 憤氣가 함께 격발되어 이리저리 적진을 향해 돌격하니 적진에서 적병을 흩었다가 다시 조우하기를 서너 차례 한 끝에 마침내 사언초가 적진에서 戰歿하였다.
이때에 世宗高平에서 을 패퇴시키고서 승세를 타고 진격하였는데, 나라의 성을 포위하고 싸울 때 장수들의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戰功을 이루지 못하였다.
세종이 포위를 풀고 떠나고자 하였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사언초가 戰死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급히 회군하니, 창졸지간에 매우 많은 군사를 잃었다.
세종은 사언초가 죽은 사실이 애석하던 터에 전공도 이루지 못한 것이 분하여 근심과 분노로 며칠이나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사언초에게 太師를 증직하고 그 집안에 넉넉하게 恤典을 내렸다.
孫晟初名이고 또 다른 이름이 이니 密州 사람이다. 학문을 좋아하여 文辭에 뛰어났고 특히 시를 잘 지었다.
소싯적에 道士가 되어 廬山簡寂宮에 머무를 때, 항상 나라 시인 賈島의 초상을 그려 집 벽에 안치해두고 朝夕으로 섬기니 간적궁의 도사들이 손성을 미워하여 요사하다고 하면서 지팡이로 위협하여 쫓아내 버렸다.
賈島賈島
그리하여 마침내 儒者의 복색을 하고 북쪽으로 지방으로 가서 莊宗鎭州에서 알현하니, 장종이 손성을 著作佐郞으로 삼았다.
天成 年間朱守殷汴州鎭守할 때 孫晟을 불러서 判官으로 삼았는데, 주수은이 반란하여 伏誅되자 손성은 妻子를 버리고 지방 사이로 亡命하였다.
安重誨가 손성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주수은이 반란하도록 사주한 자는 손성이다.”라고 하고는, 그의 모습을 그려 수배하였으나 잡지 못하고서 마침내 그 집안을 滅族시키니, 손성은 로 달아났다.
이때에 李昪楊氏()의 皇位를 찬탈하고 사방의 선비들을 많이 초빙하고 있었는데, 손성을 얻고서 그 文辭를 좋아하여 그에게 敎令을 짓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손성은 사람됨이 어눌하여 다른 사람을 만나면 안부도 제대로 묻지 못하다가, 얼마 뒤 좌정하고 나서는 論辨銳鋒이 생겨 듣는 사람들이 지겨움을 알지 못하였다.
이변이 이에 더욱 손성을 아껴 그를 불러 함께 논의할 때 뜻이 합치되는 경우가 많자, 손성을 右僕射로 삼아 馮延巳와 함께 이변의 승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손성은 풍연사의 사람됨을 경시하여 항상 말하기를 “금 주발과 옥 술잔에다 개똥을 담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라고 하였다.
손성은 20여 년 동안 이변 父子를 섬겨 관직이 司空에 이르러 집안이 더욱 부귀하고 방자해져서, 식사 때마다 几案은 갖추지 않고 기녀들에게 그릇 하나씩을 잡고서 빙 둘러서서 모시게 하고서는 ‘肉臺盤’이라고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많이 따라하였다.
世宗 땅을 정벌하니 李景이 두려워하여 처음에는 泗州牙將 王知朗을 보내 徐州에 이르러 서신을 바치고 화친을 청했으나 세종이 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翰林學士 鍾謨文理院學士 李德明을 보내 表文을 받들어 올려 稱臣하였으나 세종이 답하지 않았다.
이에 禮部尙書 王崇質副使 孫晟을 보내 표문을 받들어 올리게 하니, 종모와 손성 등이 모두 말하기를 “이경이 壽州濠州泗州楚州光州海州 여섯 곳의 땅을 떼어 바치고 歲貢 百萬으로 폐하의 군대를 돕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은 이미 滁州揚州濠州泗州의 여러 주를 취하고서 淮南을 다 취하고 나서야 그만두고자 하여, 使者들을 억류하고서 보내주지 않고 壽州를 더욱 급히 공격하였다.
종모 등은 세종이 英武하여 이경이 대적할 수 있는 바가 아니요, 군대가 몹시 성대하여 壽春이 장차 위태로울 것을 보고서, 이에 말하기를 “바라건대 폐하께서 신들을 주벌할 날짜를 닷새만 늦추시어 신들이 돌아가 이경의 표문을 가지고 와서 淮北의 여러 주를 다 바치는 것을 용납해주소서.”라고 하였다.
세종은 이를 허락하고서 供奉官 安弘道를 보내 이덕명과 왕숭질을 압송하여 남쪽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나 종모와 손성은 모두 억류당하였다.
이덕명 등이 이미 돌아오니 이경이 앞서의 말을 후회하여 땅을 떼어 바치지 않으려 했고, 세종 역시 더위와 비로 회군하고서 李重進張永德 등을 남겨 廬州壽州를 나누어 공격하게 하였는데, 나라 병사들이 획득한 揚州泰州의 여러 주를 모두 지켜내지 못하자 이경이 군대를 다시 정비하였다.
이중진과 장영덕 兩軍이 서로 의심하면서 틈이 벌어져 장영덕이 글을 올려 이중진이 모반하였다고 하였는데 세종이 듣지 않았다. 이경은 두 장수가 서로 의심하는 것을 알게 되자, 이에 蠟丸書를 이중진에게 보내 모반을 권하였다.
당초에 孫晟이 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때, 王崇質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번에 사신 가면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끝내 永陵의 한 줌 흙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영릉은 李昪의 묘였다.
왕숭질이 돌아가자 손성과 鍾謨가 모두 京師에 이르러 都亭驛에서 유숙할 때, 나라에서 그들을 몹시 후하게 대우하였다. 朝會할 때마다 閣門 안으로 들어와 東省官의 뒤의 반열에 서게 하고 召見할 때에는 반드시 풍미가 좋은 술을 마셨다.
얼마 뒤 의 군대가 자주 패배하여 획득했던 여러 를 다 잃으니, 世宗이 근심하여 손성을 불러 江南의 일을 물었는데, 손성이 대답하지 않았다. 세종이 노엽기는 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 李重進李景蠟丸書를 가지고 와서 올렸는데, 그 글의 대부분이 나라의 과실과 죄악을 論斥하는 말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세종이 노여움을 드러내어 말하기를 “손성이 나에게 사신으로 왔을 때 이경이 나의 神武를 두려워하여 北面해서 稱臣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보증하겠다고 하더니, 어떻게 이런 指斥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라고 하고는,
급히 侍衛軍虞候 韓通을 불러 손성을 잡아다 하옥하고 그 종자 2백여 인은 모두 죽였다.
손성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세종이 그래도 近臣을 보내 물었는데, 손성은 끝내 대답하지 않고 편안한 기색으로 의관을 정제하고서 남쪽을 향하여 절하고 말하기를 “신은 오직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할 뿐입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형벌을 받았다.
손성이 죽고 나서 종모 또한 耀州司馬로 폄적되었다. 그 뒤 세종이 노여움을 풀고 손성의 충성을 가련히 여기고 죽인 것을 후회하여 종모를 불러 衛尉少卿을 배수하였다.
이경이 강북의 땅을 떼어 바치니 마침내 종모를 보내어 남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이경이 손성의 죽음을 듣고는 또한 魯國公을 증직하였다.


역주
역주1 死事傳 : 〈死事傳〉은 國事에 목숨을 잃은 인물들의 列傳이다. 歐陽脩는 小序에서, 극도로 혼란하고 왕조의 교체가 잦아 선비가 절조를 온전히 하기 지극히 어렵고, 仁義와 忠信을 버리고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절의를 굽히는 풍조가 만연한 五代 시절에 국사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위는 취할 만하다고 그 의의를 밝혔다.
다만 이는 앞서 〈死節傳〉의 해제에서 언급한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절조를 온전히 하여 목숨을 마친 死節의 인물들과는 차이가 있다. 〈사사전〉의 인물들은 구양수가 소서에서 말한 것처럼 “애초에는 우뚝한 절조가 없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섬기던 군주의 국사를 위해 죽은 자”들인 것이다.
구양수는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모두 15명을 찾았다고 했는데, ≪新五代史≫의 〈사사전〉에는 본서에 실린 張源德‧夏魯奇‧姚洪‧王思同‧張敬達‧王淸‧史彦超‧孫晟과 함께 본서에 실리지 않은 翟進宗‧沈斌을 포함한 10명이 立傳되어 있다. ≪新五代史≫의 徐無黨의 주석에 따르면, 그 외 立傳에 이르지 못한 5명은 馬彦超‧宋令詢‧李遐‧張彦卿‧鄭昭業으로 이들의 사적은 다른 열전과 本紀에 드러나 있다.
또 구양수는 소서에서 戰歿한 사람은 비록 국사에 죽었다 하더라도 〈사사전〉에 넣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왕청과 사언초 두 사람은 예외를 두어 전투 중에 죽었음에도 입전하였다. 이 두 사람 외에 다른 인물들은 모두 항거 중에 같은 편 사람에게 살해당하거나 자살하거나 또는 사로잡혀서 굴복하지 않다가 처형당하였다. 구양수는 이 두 사람을 입전한 데에 나름의 뜻이 있다고 말하였다. 소서에서 그 이유를 명시하지 않았으므로 확정 지어 말할 수는 없으나, 다른 인물들과 차이점을 찾자면 이들은 모두 契丹과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고 돌진하여 전몰한 이들이다. 혹 구양수는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인지 모르겠다.
張源德(?~915 世系가 자세하지 않으나 後梁의 신하로 貝州를 수비하다 패주 사람들에게 살해당했다. ≪舊五代史≫에는 傳이 없고 ≪新五代史≫ 卷33 〈死事傳 第21〉에 입전되었다. 본래 李罕之의 휘하에 있다가 그가 晉을 배반하고 後梁에 투항할 때 함께 투항하였으며, 魏州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晉에 투항할 때 패주를 지키면서 晉에 항거하였다. 구양수는 그가 항복하려는 패주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다가 패주 사람들에게 살해당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資治通鑑考異≫ 등의 기록은 이와 반대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열전의 본문 주석에서 밝혔다.
夏魯奇(882~931 字가 邦傑로 靑州 사람이다. 後梁에서 벼슬하다가 晉(後唐 투항한 이후 후당에서 신임을 받아 높은 자리에 올랐으며 董璋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遂州를 방어하다 자결하였다. 하노기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70 〈唐書 第46 列傳22〉와 ≪新五代史≫ 卷33 〈死事傳 第21〉에 실려 있다. 아래 ≪신오대사≫의 열전에도 그의 충성과 재능이 잘 기술되어 있거니와, ≪구오대사≫의 열전에서도 그를 두고 “충의로운 성품에 爲政의 도리에 더욱 통달하였고 백성들을 按撫하는 수단이 있었다.[性忠義 尤通吏道 撫民有術]”라고 평하였다. 하노기의 열전 말미에 附記된 ≪신오대사≫의 原註에서, 契丹과 싸우다 자결한 後晉의 吳巒과 하노기를 비교하면서 〈사사전〉의 인물 取捨 원칙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구양수가 입전의 원칙을 매우 엄격히 했음을 알 수 있다.
姚洪(?~930 하노기와 마찬가지로 後梁에서 벼슬하다가 後唐을 섬겨 指揮使에 올랐고 董璋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閬州를 지키던 중 성이 함락되어 처형된 인물이다. 요홍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70 〈唐書 第46 列傳22〉와 ≪新五代史≫ 卷33 〈死事傳 第21〉에 실려 있다. 요홍의 열전은 간략하다. 그러나 그가 동장의 투항 권유 서신을 측간에 던져 넣고 성이 함락되어 사로잡힌 후 살점이 베여나가는 잔혹한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동장을 질타하는 장면은 매우 강렬하다. 짧지만 강렬한 글에서 그의 忠烈이 생생히 전달된다.
王思同(892~934 幽州 사람으로 그의 모친이 유주의 軍閥이었던 劉仁恭의 딸이다. 유인공이 그 아들 劉守光에게 유폐되었을 때 달아나 後唐에서 벼슬하다가 후당 明宗이 죽고 潞王 李從珂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저항하다 사로잡혀 죽었다. 왕사동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65 〈唐書 第41 列傳17〉과 ≪新五代史≫ 卷33 〈死事傳 第21〉에 실려 있다. 왕사동은 이종가와 전투 중에 도주하다가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열전 말미에 부기된 ≪신오대사≫의 原註에서, 후당 莊宗을 보필하다가 달아난 元行欽과 왕사동을 비교하면서 왕사동의 도주는 단순한 도주가 아니라 天子에게 돌아가려 한 행위이고 따라서 〈사사전〉에 수록될 수 있음을 밝혔다.
張敬達(?~936 字가 志通으로 代州 사람이다. 줄곧 後唐에 벼슬하였으며 후당과 後晉의 교체기에 후진의 石敬瑭을 공격하다가 거란의 지원에 힘입은 後晉軍에 포위되어 있던 도중 부하 장수들에게 살해되었다. 장경달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70 〈唐書 第46 列傳22〉와 ≪新五代史≫ 卷33 〈死事傳 第21〉에 실려 있다. 장경달은 계속 후당에만 충성하였음에도 〈사절전〉에 수록되지 못하고 〈사사전〉에 수록되었는데, 이는 장경달이 포위되어 있을 때 부하장수들에게 자신은 투항할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을 죽이고 투항하라고 권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열전 말미에 부기된 ≪신오대사≫의 原註에서 자세히 언급하였다.
王淸(?~946 字가 去瑕로 洺州 曲周 사람이다. 後唐에서 벼슬하여 指揮使에 올랐고 이어 後晉에서 벼슬하여 檢校司徒에 올랐다. 少帝 때 거란과의 전투 중에 다른 장수들이 두 마음을 품고 주저하는 통에 중과부적으로 戰歿하였다. 왕청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95 〈晉書 第21 列傳10〉과 ≪新五代史≫ 卷33 〈死事傳 第21〉에 실려 있다. ≪구오대사≫의 史評에서는 “살펴보건대 前代의 신하들의 사적이 많다. 예컨대 世道가 바야흐로 태평할 때에는 은총에 빙자하고 작록을 믿는 자가 실로 허다하고, 世運이 막히고 나서는 죽음으로 충성을 바친 자가 얼마 없다. 皇甫遇가 울분에 차서 죽고 王淸이 血戰을 벌이다가 사망한 것과 같은 경우는 근세 이래로 몇 사람뿐이다. 어떤 이는 난리를 맞아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어떤 이는 方正한 도리를 지키다 살해당하였으니, 아리따운 女色에 미혹되어 목숨을 잃고 술에 빠져서 몸을 망친 자와 비교해볼 때 서로간의 격차가 크다.[觀前代人臣之事迹多矣 若乃世道方泰 則席寵恃祿者實繁 世運旣屯 則效死輸忠者無幾 如皇甫遇憤激而歿 王淸以血戰而亡 近世以來 幾人而已 其或臨難捐軀 或守方遇害 比夫惑妖豔以喪其命 因醇酎以亡其身者 蓋相去之遠矣]”라고 表章하였다. 〈사사전〉의 다른 열전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만 왕청의 열전 역시 新舊史를 비교해보면, ≪신오대사≫에서는 여타의 전공이나 행적은 대부분 축약하였고 마지막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장면을 중점적으로 서술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신오대사≫가 勸懲과 褒貶이라는 특정한 목적의식 하에 인물의 열전을 찬술하였음을 드러내준다.
史彦超(?~954 雲州 사람으로 後周를 섬겨 많은 전공을 세웠고 後漢을 공격하던 도중 후한을 구원하러 온 契丹과의 전투 중에 戰歿하였다. 사언초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124 〈周書 第15 列傳4〉와 ≪新五代史≫ 卷33 〈死事傳 第21〉에 실려 있다. ≪구오대사≫의 史評에서는 후주의 신하들을 평가하면서 “예로부터 신하 된 자들은 人望이 무거워지면 반드시 위태로워졌고 功勳이 드높아지면 보전하기 어려웠으니, 賢者가 아니라면 누가 이를 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王鄴帥(王殷 明哲保身의 警戒에 어두웠고 周 太祖(郭威 의심이 많은 군주였으니 재앙을 당하지 않으려 한들 그럴 수 있었겠는가. 何福進 이하로는 모두 英俊한 장수들이니 兵馬를 통솔하여 나라를 지키는 重臣이 된 것은, 헤아려보면 또한 당연한 일이다. 오직 사언초는 외적을 막다가 전몰하였으니 충성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自古爲人臣者 望重則必危 功崇則難保 自非賢者 疇能免之 況王鄴帥昧明哲之規 周太祖乃雄猜之主 欲無及禍 其可得乎 自福進而下 皆將帥之英也 擁旌作翰 諒亦宜然 惟彦超以捍寇而沒 可不謂忠乎]”라고 하여 거란과 싸우다 전몰한 사실을 特記하였다. 〈사사전〉의 사언초의 열전 역시 ≪구오대사≫에 실린 여타 행적들은 축약하고 거란과의 전투 및 사후 경과 부분에 열전의 절반 정도를 할애하였다.
孫晟(?~956 初名이 鳳, 또 다른 이름이 忌로 密州 사람이다. 文辭에 재능이 있어 後唐 莊宗을 섬기다가 明宗 때 朱守殷의 判官으로 있던 중 주수은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강남으로 달아나 南唐의 李昪을 섬겨 두터운 대우를 받았다. 後周 世宗이 강남을 정벌할 때 講和를 목적으로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고 이후 양국간의 관계가 악화되자 처형되었다. 손성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131 〈周書 第22 列傳11〉과 ≪新五代史≫ 卷33 〈死事傳 第21〉에 실려 있다. 특이한 점은 ≪구오대사≫에서는 손성을 “성품이 음험하고 간사한 꾀를 좋아하였다.[性陰賊好奸謀]”라고 하였고, 손성이 簡寂宮에서 쫓겨난 기사에서 “당시 무리들의 큰 조롱거리가 되었다.[大爲時輩所嗤]”라고 하는 등 손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이 보이는데 반해, ≪신오대사≫에서는 이러한 부정적 평가들을 일체 생략하고 〈사사전〉에 수록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구양수가 ≪구오대사≫의 평가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인물을 평가하여 입전한 점을 알 수 있다.
宋나라 때 孔武仲의 ≪淸江三孔集≫ 卷18 〈書孫晟傳後〉에 “利害가 서로 부딪히고 禍福이 서로 상충되며 安危의 변화가 손바닥을 뒤집는 사이에 있어 의리를 따르지 않으면 살고 의리를 따르면 죽으니, 이러한 경계에 이르고 난 연후에야 人才의 強弱을 알 수 있다.……世宗이 江南의 虛實을 물었을 때 만약 손성이 대답한다면 장차 스스로 자기 군주의 社稷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고, 거절한다면 재앙이 자신에게 미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의리를 따르지 않으면 살고 의리를 따르면 죽는 때이다. 이때 손성은 홀로 大計를 돌아보고 애석해하여 입을 다문 채 응답하지 않았고, 도끼로 핍박해도 옛 군주를 잊지 않고서 남쪽을 향하여 절한 연후에 형벌을 받았다. 손성이 수립한 행적이 이와 같이 당당하니, 死節에 비할 때 무엇이 부끄럽겠는가. 그런데 ≪신오대사≫는 손성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고 〈사사전〉에 배열하였으니, 나는 감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利害之相攻 禍福之相勝 安危之變 在反手間 不順義則生 順義則死 至于此然後 人才之強弱見矣……世宗問以江南之虛實 使晟答之耶則將自危其主之社稷 拒之耶則災及其身 此所謂不順義則生 順義則死之時也 晟獨顧惜大計 黙不爲應 及逼以鈇鉞 猶不忘故主 南望而拜 然後就刑 晟之所立 堂堂如此 何愧于死節哉 而新史抑之 列于死事傳 吾未敢以爲然也]”라고 하였다. 孔武仲의 의견은 구양수가 손성을 〈사사전〉에 배열한 것도 부족하다는 의견이지만, 공무중의 의견을 통해 구양수가 ≪구오대사≫의 박절한 평가와 달리 손성을 〈사사전〉에 입전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역주2 自開平 訖于顯德 : 開平은 後梁 太祖 朱全忠의 연호로 907년에서 911년까지이며, 顯德은 後周 世宗 柴榮의 연호로 954년에서 960년까지이다.
역주3 君子之於人也 樂成其美而不求其備 : ≪論語≫ 〈顔淵〉에 “君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남의 악함을 이루어주지 않으니, 小人은 이와 반대이다.[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라는 말이 보이고, ≪書經≫ 〈商書 伊訓〉에 “남을 허여하되 完備하기를 요구하지 않고, 자기 몸을 검속하되 미치지 못할 듯이 한다.[與人不求備 檢身若不及]”는 말이 보인다.
역주4 不能立傳者五人……見於本紀而已 : 이 내용은 ≪新五代史≫의 原註(徐無黨. 이하 ≪신오대사≫의 원주는 원문 앞에 ‘【原註】’로 표기한다.
역주5 宋令詢李遐張彦卿鄭昭業 見於本紀 : 宋令詢은 〈唐本紀〉에, 李遐는 〈晉本紀〉에, 張彦卿과 鄭昭業은 〈周本紀〉에 보인다.
역주6 少事晉 : 여기에서의 晉은 정식으로 건국된 나라는 아니고, 太原을 중심으로 한 山西 지방의 군벌로 唐나라로부터 晉王에 봉해진 李克用과 그 아들 李存勖의 세력을 가리킨다.
역주7 從李罕之以潞州叛晉降(항)梁 : 李罕之(842~899 唐末의 군벌이다. 898년 昭義軍節度使 薛志勤이 죽자 이한지가 澤州에서 병사를 이끌고 潞州를 공격해 점거하고서 스스로를 留后라고 칭하였다. 李克用이 장수 李嗣昭를 보내 정벌하자 後梁 太祖 朱全忠에게 항복하기를 청하니 주전충이 병사를 보내 원조하였다.
역주8 梁貞明三年……爲兩鎭 : ≪五代史纂誤≫ 卷中에 “지금 〈梁本紀〉와 〈唐本紀〉와 〈賀德倫傳〉을 살펴보건대 魏州와 相州 등 여섯 州를 나누어 兩鎮으로 만든 것은 貞明 元年(915 일이다.[今按梁本紀唐本紀賀德倫傳 其分魏相六州爲兩鎮 乃貞明元年事]”라고 하였다.
역주9 源德爲鄩守貝州 : 爲는 服役의 뜻이다.
역주10 晉王 : 이때의 晉王은 李存勖이다.
역주11 然與滄州相首尾 今德州居其中而無備 : 張源德의 貝州는 오늘날의 河北省 邢台市 일대이고, 滄州는 오늘날의 하북성 滄州市 일대로, 북쪽의 창주와 남쪽의 패주가 서로 머리와 꼬리의 형세이다. 德州는 오늘날의 山東省 德州市로 창주와 패주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역주12 故元城 : 元城은 西漢 때 설치된 곳으로 지금의 河北省 邯鄲市 大名縣 일대이다. 인근 고을과 합쳐지고 분리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는데, 歐陽脩가 이 글을 지은 때에는 後周 太祖 때 浚儀와 합쳐져 赤縣으로 개명된 뒤였으므로 원래의 원성 지역을 가리키기 위해 ‘옛 원성[故元城]’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역주13 衛州刺史來昭 : ≪五代史記纂誤補≫ 卷3에 “삼가 살펴보건대 ≪新五代史≫ 〈唐本紀〉에는 ‘來昭’가 ‘米昭’로 되어 있고, 薛居正의 ≪舊五代史≫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 부분은 오류이다.[謹按唐紀來昭作米昭 薛史同 此誤]”라고 하였다. ≪新五代史≫ 卷5 〈唐本紀 第5〉와 ≪舊五代史≫ 卷28 〈唐書 第4 莊宗紀2〉에 모두 ‘米昭’로 되어 있다.
역주14 晉已先下全燕 : 全燕은 옛 燕나라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당시 范陽節度使 劉仁恭이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유인공은 李存勖의 부친인 李克用의 도움으로 범양절도사가 되었다가 이극용을 배반하고 독립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아들 劉守光에게 지위를 빼앗기고 유폐되었다. 이극용은 죽을 때 이존욱에게 화살 세 개를 주면서 유인공과 契丹과 朱全忠에게 복수할 것을 유언하였는데, 유수광이 국호를 燕이라 하고 황제로 등극하자 이존욱은 913년에 정벌을 감행하여 유인공 부자를 사로잡아 죽였다.
역주15 貝人聞晉已盡有河北……遂見殺 : ≪資治通鑑考異≫에서는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莊宗實錄≫에는 ‘賊將 張源德이 貝州를 굳게 지키다가 河北이 모두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 마음을 바꿔 투항하려는 뜻이 생겨 사람들에게 물어 모의하였다. 그런데 패주의 여러 賊徒들은 모두 河南 사람이라 자신들에게 죄를 돌릴까 두려워하여 〈장원덕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어서 장원덕을 살해하였다. 그리고서 사람을 잡아먹으며 식량으로 삼고 그 성을 굳게 지켰다. 晉王이 돌아와 여러 해 동안 포위하여 공격하였는데 적들이 식량이 다 떨어진 뒤 우리 대장을 부르며 말하기를 「지금 죄를 청하고자 하는데, 진왕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가 장차 갑옷과 병기를 갖춘 채 알현하고 알현이 끝난 뒤에 바로 무장을 해제하려는데 어떤가?」라고 하였다. 우리가 대답하기를 「이보다 편리한 것이 없겠다.」라고 하니 적도들 3천 명이 갑옷을 입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우리 장수가 甘言으로 달래 모두 갑옷과 병기를 해제하니, 이윽고 四面에서 포위하여 모조리 죽였다.’라고 하였다.……살펴보건대 장원덕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면 그 무리들이 응당 즉시 진나라에 투항해야지 어찌 오히려 항거하여 성을 지키면서 진나라에 약조를 청한 이후에 성을 나왔겠는가. 분명히 무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항복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장종실록≫의 기사를 따른다.[莊宗實錄 賊將張源德固守貝州 旣聞河北皆平 而有翻然之志 詢謀於衆 群賊皆河南人 懼其歸罪 不從 因殺源德 噉人爲糧 固守其城 王歸 歷年攻圍 賊旣食竭 呼我大將曰 今欲請罪 懼晉王不我赦 我將衿甲持兵而見 已卽解之 如何 報曰 無便於此者 賊衆三千 衿甲出降 我將甘言喩之 俱釋兵解甲 旣而 四面陳兵 皆殺之……按源德若以不降而死 其衆當卽降於晉 豈得猶拒守與晉邀約而後出哉 明是衆懼死不降耳 今從莊宗實錄]”
역주16 後奔于晉 : ≪舊五代史≫ 卷70 〈唐書 第46 列傳22〉에는 主將과 不協하여 마침내 後唐 莊宗에게 투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역주17 周德威 : ?~919?. 五代十國 시기 後唐 李克用의 副將으로 朔州 馬邑 사람이다.
역주18 董璋 : ?~932. 어릴 때 汴州의 商人인 李七郞의 하인으로 말똥 청소하는 일을 하다가 이칠랑이 後梁의 朱全忠의 養子가 되자 주전충을 섬겨 澤州刺史에 이르렀다. 후에 後唐에 투항하여 後蜀을 정벌할 때 공을 세우고 劍南東川節度使가 되었다. 930년에 孟知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뒤에 사이가 틀어져 싸우다가 대패하였고 휘하에게 살해당하였다.
역주19 (日)[月] : 저본에는 ‘日’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月’로 바로잡았다.
역주20 吳巒 兵猶可戰而不戰 : 吳巒(?~944 後晉의 신하로, 契丹이 침공하였을 때 貝州를 지키다가 죽었다. 그러나 〈死事傳〉이 아니라 〈晉臣傳〉에 立傳되어 있다. 오만은 거란군이 성문을 뚫고 들어왔을 때 끝까지 분전한 것이 아니라, 적군이 들어와 성안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보고 즉시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역주21 長興 : 後唐 明宗 李嗣源의 연호로 930년부터 933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22 健兒 : 唐나라 때 변방의 土兵을 가리키던 말이다.
역주23 李七郞奴 : 李七郞은 汴州의 富豪였던 李讓이다. ≪舊五代史≫ 卷133 〈世襲列傳 第2〉와 ≪新五代史≫ 卷69 〈南平世家 第9〉에 따르면, 後梁 太祖 朱全忠이 宣武軍節度使로 있을 때 이양이 재물로 총애를 얻어 주전충의 양자가 되어 朱氏 성을 하사받고 개명하여 朱友讓이라 했다 한다. 또한 ≪舊五代史≫ 卷62 〈唐書 第38 列傳14〉의 〈董璋傳〉에 따르면 동장이 어렸을 때 高季興‧孔循과 함께 이칠랑을 섬겨 童僕이 되었다고 한다.
역주24 : 당시 晉王으로 있던 李存勖의 세력을 가리킨다.
역주25 吐蕃 : 중국 서남쪽의 이민족으로, 오늘날의 티베트 지역에 해당한다.
역주26 秦州 : 오늘날의 甘肅省 天水縣 일대이다.
역주27 劍門 : 劍門山으로 四川省 劍閣縣 북쪽에 있다. 蜀 지방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역주28 潞王從珂反鳳翔 : 潞王 李從珂(885~937 後唐 明宗 李嗣源의 양자로, 이사원이 죽고 이사원의 친아들인 李從厚가 제위에 오르자 반란을 일으켜 이종후를 폐위하고 즉위하였다. 후에 이사원의 사위인 石敬瑭이 契丹과 합세하여 공격하여 낙양이 포위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주29 賊殺秦王 : 秦王은 後唐 明宗 李嗣源의 次子인 李從榮(?~933. 성격이 포악하여 대신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사원의 병세가 중해지자 이종영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가서 병사들을 天津橋에 주둔시킨 후 궁궐로 들어가 이사원을 알현하고 나왔는데, 대신들이 이종영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이사원에게 고한 후 토벌하여 살해하였다.
역주30 伶奴 : 伶은 樂工을 가리키는 말이다. 뒤에 五弦琴으로 拜謁하게 했다는 말 등을 참고할 때, 집안에서 음악의 기예를 담당하던 노복으로 여겨진다.
역주31 愍帝 : 後唐 明宗 李嗣源의 친아들로 이사원을 이어 제위에 오른 李從厚이다.
역주32 元行欽 : ?~926. 처음에는 劉守光의 장수였다가 晉과의 전투 중에 잡혀 포로가 되어 투항하여 李紹榮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李存勖을 섬겼다. 이존욱의 近臣 郭從謙이 興敎門에서 난을 일으켜 이존욱이 살해되자 궁궐을 불태우고 도주하였다.
역주33 : 자신의 官等에 비해 낮은 직책의 임무를 겸하여 맡는 것을 領이라 한다. 이와 반대를 錄이라 한다. 都指揮使의 직책이 刺史보다 높았으므로 領이라 한 것이다.
역주34 徙鎭武信晉昌 : 이 부분에 대해 ≪資治通鑑≫의 주석에서 “明宗 때 遂州에 武信軍을 설치했다가 얼마 뒤 孟知祥에게 함락되었으니, 張敬達은 무신군에 가서 鎭守한 적이 없다. 後晉이 중국을 차지하고서 비로소 長安을 고쳐 晉昌軍으로 삼았으니, 歐陽脩가 또한 상세히 고증하지 못한 것이다. ≪자치통감≫에서 앞에 장경달이 建雄軍節度使에 있다가 石敬瑭을 대신하였다고 적었는데, 건웅군은 晉州이다. 구양수의 ≪五代史≫는 이를 오인하여 晉昌이라고 한 것인데, 또 무신군은 무슨 이유로 착오를 일으켰는지 알 수 없다.[明宗置武信軍於遂州 尋爲孟知祥所陷 張敬達未嘗往鎭 晉得中國 始改長安爲晉昌軍 歐亦考之未詳也 通鑑前書敬達自建雄節度代敬瑭 建雄軍晉州也 歐史誤以爲晉昌耳 又不知武信緣何而誤]”라고 하였다.
역주35 廢帝 : 後唐 末帝 李從珂이다.
역주36 雲梯飛礮(포) : 雲梯는 공성용 무기로 큰 나무를 받침대로 해 그 아래에 바퀴를 달고, 그 위에는 사다리를 세워 성벽에 갖다 대고 병졸들이 기어오르도록 만든 전쟁도구이다. 飛礮는 앞의 〈死節傳〉의 〈劉仁贍傳〉의 역주 ‘方舟載礮’ 참조.
역주37 契丹兵圍敬達者……閉壁不敢復(부)出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3에 “살펴보건대 ≪資治通鑑≫에는 契丹이 이끌고 온 군대가 단지 5만의 騎兵이었다고 했고, 이 열전에서 이른바 깃발이 서로 이어졌다는 것은 50여 리에 불과한데, 어찌 백여 리 길이의 둘레에 오십 리의 폭으로 감싸 산등성이처럼 서로 이어질 수 있겠는가.……지금 이 표현은 바로 거란의 軍勢를 극도로 묘사하여 장경달의 힘이 다하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文忠公(歐陽脩 대개 薛居正의 ≪舊五代史≫를 답습하였고 ≪자치통감≫은 또 이 두 책을 따랐으니, 또한 몹시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다.[按通鑑契丹所將止五萬騎 此傳所謂旌旗相屬者 不過五十餘里 安能長圍百餘里闊五十里連屬如岡阜耶……今乃極寫契丹軍勢 以見敬達之力窮 文忠公蓋仍薛史 通鑑又從此二書 亦不審之甚也]”라고 하였다.
역주38 削木簁(사)糞 : ≪舊五代史≫ 권48 〈末帝紀〉에 따르면 “말똥을 물에 일고 소나무와 감나무를 벗겨 말먹이로 공급했다.[淘馬糞 削松柹 以供䬴飼]”라고 하였다.
역주39 本紀……而傳錄其死者 : ≪新五代史≫ 권7 〈唐本紀〉에서 張敬達이 죽은 기사를 기록하면서 “楊光遠殺張敬達(양광원이 장경달을 살해하였다.)”이라고 하여 ‘死’를 쓰지 않았는데, 이는 장경달이 양광원에게 “어찌하여 나를 살해하고서 항복하지 않는가.[何不殺我而降]”라고 했던 그의 뜻대로 된 것을 쓴 것이고, 이 〈死事傳〉에는 “契丹耶律德光聞敬達死”라고 ‘死’를 썼다는 것이다. ‘死’라고 쓰는 의미에 대해서는, ≪新五代史≫ 권3 〈梁本紀〉의 “晉人克貝州 守將張源德死之(晉나라 군대가 貝州를 항복시킬 적에, 패주를 지키던 장수 張源德이 죽었다.)”에 대한 徐無黨의 原註에 “‘死’라고 쓴 것은 올바른 죽음을 얻었다는 의미이다.[書死 得其死也]”라고 하였다.
역주40 [己] : 저본에는 ‘己’가 없으나, ≪新五代史≫의 原註와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41 安從進 : ?~942. 後唐을 섬겨 貴州刺史‧保義彰武軍節度使 등을 역임하였고, 後晉 때에는 同中書門下平章事와 山南東道節度使가 되었다. 941년에 襄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襄州行營都部署 高行周의 군대에게 격파당해 양주에서 가족들과 함께 焚死하였다.
역주42 高行周 : 885~952. 嬀州 사람으로 자는 尙質, 시호는 武懿이다. 後唐 莊宗이 後梁을 멸망시킬 때 전공을 세워 端州刺史에 올랐고, 振武軍節度使를 거쳐 彰武軍과 昭義軍을 鎭守하였다. 後晉 高祖 때 西京留守가 되고, 安從進이 반란을 일으키자 襄州行營都部署로 이를 토벌했다. 後漢 高祖 때 中書令이 되었고, 招討使가 되어 鄴에서 杜重威를 평정하고 齊王에 봉해졌다. 後周의 태조가 즉위하자 尙書令이 되었고 재직 중에 죽었다.
역주43 開運二年冬……重威軍中渡橋南 : ≪五代史記纂誤補≫ 卷3에 “삼가 살펴보건대 〈本紀〉에, 杜重威가 陽城에서 전투한 일은 開運 2년 3월에 있었다고 되어 있고, 또 〈본기〉 및 두중위와 皇甫遇와 張彦澤 등의 열전에, 두중위가 中渡橋에 주둔한 일이 개운 3년에 있었다고 되어 있으니, 이 부분은 모두 오류이다.[謹按本紀杜重威戰陽城 在二年三月 又紀及杜重威皇甫遇張彦澤等傳 重威軍中渡 在開運三年 此俱誤]”라고 하였다.
역주44 是時……因力戰而死 : ≪資治通鑑≫에 이 부분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王淸이 무리에게 이르기를 ‘上將이 병권을 쥐고 앉아서 관망하면서 우리들이 곤궁하고 위급한데도 구원하지 않으니, 이는 필시 다른 뜻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마땅히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할 뿐이다.’라고 하니, 무리들이 그 말에 감격하여 물러서는 자가 없었다. 저녁까지 전투가 그치지 않자 거란이 새로운 병사를 이어서 투입하니 왕청과 병사들이 모두 죽었다. 이 때문에 여러 군대의 사기가 모두 꺾였다.[淸謂其衆曰 上將握兵坐觀 吾輩困急而不救 此必有異志 吾輩當以死報國耳 衆感其言 莫有退者 至暮戰不息 契丹以新兵繼之 淸及士衆盡死 由是諸軍皆奪氣]”
역주45 周太祖 : 後周를 개국한 郭威(904~954 가리킨다. 곽위는 邢州 堯山 사람으로 자는 文仲이다. 後唐‧後晉‧後漢에서 벼슬했으며, 후한 隱帝 乾祐 3년(950) 은제가 사람을 보내 자기를 해치려는 것을 알고 병사를 일으켜 汴으로 들어갔다. 은제가 살해된 뒤 劉贇을 황제로 옹립했다가 얼마 뒤 군대를 이끌고 契丹을 막던 중 兵變을 일으키고 돌아와 후한을 대신해 후주를 세웠다.
역주46 劉旻 : 985~954. 沙陀部 사람으로 初名은 崇이다. 五代 後漢 高祖 劉知遠의 동생으로, 유지원이 즉위하자 太原尹이 되었다. 後周를 창건한 郭威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 곽위가 후주를 세우자 태원에서 北漢을 건국하고 契丹과 연합해 후주를 공격하였으나 高平 전투에서 대패한 뒤 분을 못 이기고 죽었다. 廟號는 世祖이다.
역주47 廬山簡寂宮 : 道敎 사원으로 江西省 九江市 廬山 남쪽 金雞峰 아래에 있다. 南朝 宋나라 孝武帝 大明 5년(461) 道士 陸修靜이 창건하여 이곳에서 修道하고 포교하는 한편 道經을 정리했다고 전해진다. 南朝 때에는 廬山 최대의 道觀이었다.
역주48 賈島 : 779~843. 자는 浪仙이고 范陽 사람이다. 여러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하고, 無本이라는 法名으로 승려 행세를 하기도 하였으며, 스스로를 碣石山人이라 불렀다. 낙양에서 당대의 명사 韓愈와 교유하면서 還俗하여 長江縣主簿‧普州司倉參軍 등을 역임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鳥宿池邊樹 僧推月下門(새는 못가 나무에서 잠자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 두드리네.)”이라는 시구에서 推를 敲로 바꿀지 고민하다 한유의 수레와 부딪히기까지 했다는 推敲 고사로 유명하다. 저서에 ≪長江集≫, ≪詩格≫ 등이 있다.
역주49 天成 : 後唐 明宗 李嗣源의 연호로 926~930년 사이에 사용되었다.
역주50 朱守殷 : ?~927. 後唐 莊宗 李存勖을 섬겨 蕃漢馬步軍都虞侯‧宣武節度使‧巡檢 등에 올랐다. 明宗 李嗣源이 즉위하여 河南尹‧判六軍諸衛事로 삼고 다시 汴梁節度使에 제수하였다. 이보다 앞서 명종이 즉위하기 전 주수은이 德勝寨를 방어하고 있을 때 敗戰한 일이 있었는데, 명종이 주수은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장종이 듣지 않은 적이 있어 명종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명종 天成 3년(927) 汴州에서 모반을 일으켰다가 명종의 親征으로 토벌되고 그 族黨들과 함께 誅殺되었다.
역주51 安重誨 : ?~931. 山西 應州 사람이다. 소싯적부터 李嗣源을 따랐는데 이사원이 後唐 明宗으로 즉위하자 신임을 받아 樞密使 등을 역임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뒤에는 오히려 견제를 받아 명종의 명을 받은 李從璋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였다.
역주52 是時 李昪方篡楊氏 : 李昪(888~943 5대 10국의 하나인 南唐의 창시자로, 본명은 徐知誥, 묘호는 烈祖이다. 吳의 건국자인 楊行密의 부장 徐溫에게 발탁되어 양자가 되었다가 서온이 실권을 장악하자 권력을 얻기 시작했다. 서온이 죽은 뒤 오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스스로를 唐 玄宗의 여섯째 아들 李落胤의 후손이라 칭하며 이변으로 개명하였다.
≪五代史記纂誤續補≫ 卷3에 “살펴보건대 〈唐本紀〉에 朱守殷이 天成 2년(927) 자살하였다고 하였는데, 이해는 정해년으로 吳나라 乾貞 원년이다. 〈吳世家〉 및 〈南唐世家〉에 李昪이 楊氏의 황위를 찬탈한 것은 天祚 3년(937) 11년의 차이가 있다. ‘簒’자 위에 ‘謀’자가 빠진 듯하다.[按唐本紀朱守殷以天成二年自殺 是年丁亥爲吳乾貞元年 吳及南唐世家昪簒楊氏 在天祚三年 相去十一年 簒上疑脫謀字]”라고 하였다.
역주53 馮延巳 : 903~960. 廣陵 사람으로 자는 正中, 또 다른 이름은 延嗣, 시호는 忠肅이다. 南唐에서 벼슬하여 秘書郞‧駕部郞中‧翰林學士承旨 등을 역임하고 宰相과 太子少傅에 이르렀다. 동생 馮延魯‧魏岑‧陳覺‧査文徽 등과 정권을 좌우해 五鬼로 불렸다. 詞로 명성이 높았다. 저서에 ≪陽春集≫이 있다.
역주54 (奴)[妓] : 저본에는 ‘奴’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妓’로 바로잡았다.
역주55 李景 : 916~961. 五代十國 시기 南唐의 2대 황제이다. 아버지 李昪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원래 이름은 李璟이었으나 後周 世宗에게 복속을 맹세한 후 개명하였다.
역주56 (江)[淮] : 저본에는 ‘江’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淮’로 바로잡았다.
역주57 蠟丸書 : 밀랍으로 봉한 비밀스러운 書信을 가리키며, 친필서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역주58 使班東省官後 : 唐의 관제에 의거하면 東省은 국가의 機務를 관장했던 門下省과 中書省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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