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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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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明宗四子하니 曰從璟從榮從厚從益이라 從璟 初名從審이니 爲人驍勇善戰하고 而謙退謹勅하야 從莊宗戰 數有功하야 爲金槍指揮使
明宗軍變于魏 莊宗謂從璟하야 曰 爾父於國 有大功이라 忠孝之心 朕自明信하니 今爲亂軍所逼爾
宜自往宣朕意하야 毋使自疑케하라 從璟 馳至衛州하야 爲元行欽所執이라
將殺之 從璟 呼曰 我父爲亂軍所逼이어늘 公等不亮其心하니
我亦不能至魏 願歸衛天子라하니 行欽釋之 莊宗憐其言하야 賜名璟하고 以爲己子
從莊宗如汴州할새 將士多亡於道로대 獨從璟不去 左右或勸其逃禍한대 從璟不聽이라
莊宗 聞明宗已渡黎陽하고 復欲遣從璟通問이어늘 行欽以爲不可하고 遂殺之 明宗卽位 贈太保
嗚呼 無父 烏生하고 無君이면 烏以爲生이리오마는 而世之言曰 爲忠孝者 不兩全이라하니 夫豈然哉
君父 人倫之大本이요 忠孝 臣子之大節이니 豈其不相爲用而又相害者乎
抑私與義而已耳 盖以其私 則兩害 以其義 則兩得이라
其父 以兵攻其君이면 爲其子者 從父乎 從君乎 曰 身從其居 志從其義 可也 身居君所 則從君하고 居父所 則從父
其從於君者 必辭其君하야 曰 子不可以射父하니 願無與兵焉이라하고
則又號泣而呼其父하야 曰 盍捨兵而歸吾君乎아하고 君敗則死之 父敗則終喪而事君이라
其從於父者 必告之하야 曰 君不可以射也 盍捨兵而歸吾君乎아하고 君敗則死之 父敗則待罪於君하야 君赦己 則終喪而事之
古之知孝者 莫如舜이요 知義者 莫如孔孟하니 其於君臣父子之際 詳矣
使其不幸而遭焉이면 其亦如是而已矣 從璟之於莊宗 知所從而得其死矣 哀哉


04. 後唐 李從璟傳記
明宗은 네 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從璟從榮從厚從益이다. 李從璟初名從審이다. 사람됨이 용맹하여 싸움을 잘하면서도 겸손하고 근신하여 莊宗을 따라 전투에 참여하여 수차례 공을 세워 金槍指揮使가 되었다.
명종의 군사가 魏州에서 변란을 일으키자 장종이 이종경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비가 나라에 큰 공이 있다. 忠孝의 마음을 내 자신이 확신하고 있으니, 지금은 반란군에게 핍박을 받아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네가 직접 가서 나의 뜻을 전하여 그에게 스스로 의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종경이 말을 달려 衛州에 이르러 元行欽에게 사로잡혔다.
장차 죽이려 할 때에 이종경이 소리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반란군에게 핍박받고 있는데 공들이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니,
나 또한 魏州로 갈 수 없다. 원컨대 돌아가 천자를 호위할 수 있게 해달라.”라고 하니 원행흠이 풀어주었다. 장종이 그 말을 가련히 여겨 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자기의 아들로 삼았다.
莊宗을 따라 汴州로 갈 때에 장수와 군사들이 대부분 길에서 도망쳤지만 李從璟만은 떠나지 않았다. 좌우에서 혹 화를 피하라고 권하였는데 이종경은 듣지 않았다.
장종은 明宗이 이미 黎陽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다시 이종경을 보내 소식을 전하려 하였지만 元行欽이 불가하다고 하고는 마침내 죽였다. 명종이 즉위함에 太保追贈되었다.
오호라! 아버지가 없으면 어찌 태어나며 임금이 없으면 어찌 살 수 있으리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를 실천하는 자는 둘 다 함께 잘할 수 없다.”라고 하니 어찌 그렇겠는가.
임금과 아버지는 人倫의 큰 근본이고, 는 신하와 자식의 큰 절개이니, 어찌 서로 통용되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방해가 되겠는가.
에 달려 있을 뿐이니, 를 따르면 둘이 서로 방해되고, 를 따르면 둘 다 잘될 수 있다.
아버지가 군사로 임금을 공격하면 자식 된 자는 아버지를 따르겠는가 임금을 따르겠는가. 몸은 현재 있는 곳을 따르고 마음은 를 따라야 할 것이니, 몸이 현재 임금이 계신 곳에 있다면 임금을 따르고, 아버지가 계신 곳에 있다면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
임금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임금에게 까닭을 말하기를 “자식이 아버지를 쏠 수는 없으니, 함께 싸우는 일이 없고자 합니다.”라고 하고,
또 통곡하며 아버지에게 호소하여 “어찌 병기를 버리고 우리 임금에게 歸附하지 않습니까.”라고 하고, 임금이 패하면 따라서 죽고 아버지가 패하면 을 마치고 임금을 섬겨야 한다.
아버지를 따르는 자는 반드시 아버지께 고하여 “임금을 쏠 수 없으니, 어찌 병기를 버리고 우리 임금에게 귀부하지 않습니까.”라고 하고, 임금이 패하면 따라 죽고 아버지가 패하면 임금에게 待罪하여 임금이 자신을 용서해주면 을 마치고 임금을 섬겨야 한다.
옛날에 를 아는 사람은 임금만 한 사람이 없고, 를 아는 사람은 孔子孟子만 한 사람이 없으니, 이들은 君臣父子의 관계에 대해 상세히 안다 하겠다.
가사 불행히도 이런 일을 만나면 그들 역시 이와 같이 처신했을 것이니, 李從璟莊宗에 대해 따를 바를 알아 도리에 맞게 죽었다. 슬프다.


역주
역주1 唐從璟傳 : 李從璟(?~? 後唐 明宗의 첫째 아들로 초명은 從審이다. 후에 莊宗이 자신을 호종한 것을 가련히 여겨 璟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종경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51 〈唐書 第27 宗室列傳 第3〉, ≪新五代史≫ 卷12 〈唐家人傳 第3〉에 각각 실려 있다.
이 전기에서는 이종경이 비록 반란을 일으킨 명종의 長子이지만 장종을 호종하며 명종을 설득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만을 순차적으로 짧게 서술하였다.
歐陽脩는 이종경이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군주를 따른 것에 대해 君과 父는 人倫의 큰 근본이고, 忠과 孝는 신하와 자식의 큰 절개이므로 義에 따라 몸은 현재 있는 곳을 따르고 마음은 義를 따라야 하니, 이종경은 장종에 대해 따를 바를 알아 도리에 맞게 죽었다고 평하였다.
또한 ≪구오대사≫에서도 “李從審은 장종에게 후한 은혜를 입은 것을 마음에 새기고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려는 뜻 없이 군주의 곁에서 죽었으니, 충성스럽다 하지 않겠는가.[從審感厚遇之恩 無苟免之意 死于君側 得不謂之忠乎]”라고 하여 그의 충심을 높게 평가하였다.
歐陽脩는 이 짧은 열전을 통해 곤란한 상황에 처하여 義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忠과 孝를 온전히 실천한 이종경의 행동을 부각하였다. 이로서 忠과 孝가 상충될 경우 아들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명확하게 제시하여 이종경의 행동을 闡揚함과 동시에 후세에 훈계를 남겼다.
하지만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成海應(1760~1839 歐陽脩와는 상반된 평을 하였다. ≪硏經齋全集續集≫ 13冊 〈讀書記〉에서 曾子가 “부모의 명을 따르기만 하고 諫言하지 않는 것은 효도가 아니며, 간언하되 따르지 않는 것 역시 효도가 아니다. 효자는 오직 〈어버이의 뜻에 맞춰서〉 잘 변하므로 부모가 편안하게 여긴다.[以爲從而不諫 非孝也 諫而不從 亦非孝也 孝子唯巧變 故父母安之]”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후당의 이종심은 비록 스스로 處變하여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지만 효자의 도리를 가지고 따져보면 실로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後唐之李從審 雖自謂處變而不媿 律以孝子之道 則誠有媿矣]”라고 하여 이종경이 명종에게 끝까지 간언하지 않고 오히려 군주의 편에 서서 아버지를 따르지 않은 것은 不孝에 가깝다고 평가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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