然
이나 較之太史公所序
와 及班固所序
處
하면 猶隔一層
이라
史漢은 尙指顧從容이라 所以情事如覩나 而歐公不免譸張하니 須細細玩索하야 當自得之라
秦王從榮은 天成元年에 以檢校司徒兼御史大夫로 拜天雄軍節度使同中書門下平章事라
三年徙鎭河東이라 長興元年에 拜河南尹兼判六軍諸衛事하다 從璟死에 從榮於諸皇子次最長하고 又握兵柄이라
然其爲人輕雋而鷹視나 頗喜儒하야 學爲歌詩하야 多招文學之士하야 賦詩飮酒라
故後生浮薄之徒가 日進諛佞하야 以驕其心하니 自將相大臣으로 皆患之요 明宗頗知其非나 而不能裁制라
從榮嘗侍側明宗한대 問曰 爾軍政之餘에 習何事오하니 對曰 有暇讀書하고 與諸儒講論經義爾라하다
明宗이 曰 經有君臣父子之道라 然須碩儒端士라야 乃可親之라
吾見先帝好作歌詩하니 甚無謂也로대 汝將家子라 文章非素習이니 必不能工이라
傳於人口면 徒取笑也라 吾老矣라 於經義에 雖不能曉나 然尙喜屢聞之요 其餘不足學也라하다
是歲秋에 封從榮秦王이라 故事에 諸王受封이면 不朝廟나 而有司希旨하야 欲重其禮라
乃建議曰 古者因
而發爵祿
하니 所以示不敢專
이라 今受大封
이나 而不告廟
는 非敬順之道也
라하다
於是에 從榮이 朝服乘輅車하고 具鹵簿하야 至朝堂하야 受冊하고 出載冊以車하야 朝於太廟하니 京師之人이 皆以爲榮이라
三年
에 加兼中書令
하니 有司
가 又言 故事
에 班宰相下
어늘 今秦王位高而班下
하니 不稱
이라
於是에 與宰相分班而居右하다 四年에 加尙書令하니 食邑이 萬戶하다 太僕少卿何澤이 上書하야 請立從榮爲皇太子라
是時에 明宗已病하야 得澤書不悅하고 顧左右曰 群臣欲立太子하니 吾當養老於河東이라하고 乃召大臣하야 議立太子事하니 大臣皆莫敢可否라
從榮入白曰 臣聞姦人言欲立臣爲太子하니 臣實不願也라하니 明宗曰 此群臣之欲爾라하다
從榮出하야 見范延光趙延壽等曰 諸公議欲立吾爲太子하니 是欲奪吾兵柄而幽之東宮耳라하니 延光等患之하야 乃加從榮天下兵馬大元帥하다
有司가 又言 元帥或統諸道하고 或專一面하니 自前世無天下大元帥之名이라 其禮無所考按이라
請自節度使以下
로 凡領兵職者
는 皆具
하야 以軍禮
하고
其兼同中書門下平章事者
도 初見亦如之
나 其後許如
라 凡元帥府文符行天下
에 皆用帖文
하고 升班在宰相上
이라하다
從榮大宴元帥府하니 諸將皆有頒給이라 控鶴奉聖嚴衛指揮使는 人馬一匹絹十匹하고 其諸軍指揮使는 人絹十匹하고 都頭以下는 七匹至三匹이라
又請嚴衛捧聖千人爲牙兵하야 每入朝에 以數百騎先後하야 張弓挾矢하고 馳走道上하니 見者皆震懾이라
從榮又命其寮屬及四方遊士하야 試作征淮檄하니 陳己所以平一天下之意라
言事者請爲諸王擇師傅하야 以加訓導하니 宰相難其事하야 因請從榮自擇이라
從榮乃請翰林學士崔棁과 刑部侍郞任贊을 爲元帥判官하니 明宗曰 學士代予言은 不可也라하다
從榮出而恚曰 任以元帥어늘 而不得請屬寮하니 非吾所喩也라하다
將相大臣이 見從榮權位益隆이어늘 而輕脫如此하고 皆知其禍나 而莫敢言者라
惟延光延壽는 隱有避禍意하야 數見明宗하야 涕泣求解樞密하야 二人皆引去러니 而從榮之難作이라
十一月戊子에 雪하다 明宗幸宮西士和亭이라가 得傷寒疾이라 己丑에 從榮이 與樞密使朱弘昭馮贇으로 入問起居於廣壽殿하니 帝不能知人이라
王淑妃告曰 從榮在此라하고 又曰 弘昭等在此라하니 皆不應하다 從榮等去에 乃遷於雍和殿하니 宮中皆慟哭이라
至夜半後에 帝蹶然自興於榻이나 而侍疾者皆去라 顧殿上守漏宮女曰 夜漏幾何오하니 對曰 四更矣라하니
帝卽唾肉如肺者數片하고 溺涎液斗餘라 守漏者曰 大家省事乎아하니 曰 吾不知也라하다
有頃
에 皆至
하야 曰 大家還魂矣
라하고 因進粥一器
라 至旦疾少愈
나 而從榮稱疾不朝
라
初에 從榮이 常忌宋王從厚賢於己하야 而懼不得爲嗣라 其平居에 驕矜自得이나 及聞人道宋王之善이면 則愀然有不足之色이라
其入問疾也에 見帝已不知人하고 旣去而聞宮中哭聲하야 以謂帝已崩矣라하고
乃謀以兵入宮하야 使其押衙馬處鈞으로 告弘昭等하되 欲以牙兵入宿衛하니 問何所可以居者아하니
弘昭等이 對曰 宮中皆王所可居니 王自擇之라하고 因私謂處鈞曰 聖上萬福이라 王宜竭力忠孝하니 不可草草라하다
處鈞具以告從榮하니 從榮還遣處鈞하야 語弘昭等하야 曰 爾輩不念家族乎아하다
弘昭贇及宣徽使孟漢瓊等
이 入告王淑妃
하야 以謀之曰 此事須得侍衛兵爲助
라하고 乃召侍衛指揮使
하야 謀於竹林之下
라
義誠有子在秦王府일새 未敢決其謀라 謂弘昭曰 僕爲將校니 惟公所使爾라하니 弘昭大懼라
明日에 從榮遣馬處鈞하야 告馮贇曰 吾今日入居興聖宮하고 又告義誠하니 義誠許諾이라하니
贇卽馳入內하야 見義誠及弘昭漢瓊等하고 坐中興殿閣議事라
贇責義誠하야 曰 主上所以蓄養吾徒者는 爲今日爾라 今安危之機에 間不容髮이어늘 奈何以子故懷顧望고
使秦王得至此門하면 主上安所歸乎며 吾輩復有種乎아하다 漢瓊曰 賤命不足惜이니 吾自率兵拒之라하고
卽入見曰 從榮反兵이 已攻端門이라하니 宮人相顧號泣이라 明宗問弘昭等하야 曰 實有之乎아하니 對曰 有之라하다
明宗이 以手指天하고 泣下라가 良久에 曰 義誠自處置하고 毋令震動京師하라하다
子重吉在側
한대 明宗曰 吾與爾父
로 起微賤
하야 至取天下
요 數救我於危窘
이어늘
從榮得何氣力而作此惡事오 爾亟以兵守諸門이라하니 重吉이 卽以控鶴兵守宮門하다
是日에 從榮自河南府로 擁兵千人以出이라 從榮寮屬甚衆이나 而正直之士는 多見惡라 其尤所惡者는 劉贊王居敏이요 而所昵者는 劉陟高輦이라
從榮兵出
에 與陟輦
으로 竝轡耳語
하야 行至
하야 南指日景
하고 謂輦曰 明日而今
에 誅王居敏矣
라하다
因陣兵橋北
하야 下據胡牀而坐
하야 使人召康義誠
하니 而端門已閉
요 叩左
하니 亦閉
라
而於門隙中見
하니 捧聖指揮使
이 率騎兵
하야 從北來
라 卽馳告從榮
하니 從榮驚懼
하야 索鐵厭心
하고 自調弓矢
라
皇城使安從益이 率騎兵三百衝之어늘 從榮兵射之하니 從益稍却이라 弘實騎兵五百이 自左掖門出하야 方渡河한대 而後軍來者甚衆이라
從榮乃走歸河南府
하니 其判官任贊已下
가 皆走出
이어늘 牙兵劫嘉善坊而潰
라 從榮夫妻匿牀下
한대 從益殺之
하다
明宗聞從榮已死하고 悲咽幾墮於榻하야 絶而蘇者再라 馮道가 率百寮入見하니 明宗曰 吾家事若此하니 慙見群臣이라하니
君臣相顧하야 泣下沾襟이라 從榮二子는 尙幼나 皆從死하다 後六日에 而明宗崩하다
내가 歐陽公이, 李從榮이 明宗을 시해한 부분을 서술한 것을 보니, 실로 文彩와 韻致가 많다.
그러나 太史公(司馬遷)이 陳平과 周勃이 呂氏들을 주살한 사실을 서술한 부분과, 班固가 霍光이 昌邑王을 폐한 사실을 서술한 부분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한 층 격조가 떨어진다.
≪史記≫와 ≪漢書≫는 오히려 서술한 것이 여유롭기에 이 때문에 사실을 눈으로 보는 듯하지만 구양공은 속이고 과장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반드시 자세하게 완미하고 탐색해서 스스로 터득해야만 한다.
秦王 李從榮은 天成 元年(926)에 檢校司徒 兼御史大夫로서 天雄軍節度使 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었다.
天成 3년(928)에 河東으로 옮겨 진수하였다. 長興 元年(930)에 河南尹 兼判六軍諸衛事에 배수되었다. 李從璟이 죽자 이종영이 皇子들 중에 가장 연장자이고, 또 병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경솔하고 탐욕스럽지만 몹시 선비를 좋아하여 詩歌를 짓는 법을 배워 문학하는 선비를 많이 불러 시를 읊고 술을 마셨다.
그러므로 경박한 後生들이 날마다 찾아와 아부하여 그 마음을 교만하게 만드니, 將相과 大臣으로부터 모두 근심하였고, 明宗도 잘못된 일임을 잘 알았지만 재제하지 못하였다.
李從榮이 일찍이 明宗을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명종이 묻기를 “너는 軍政을 보는 여가에 무슨 일을 익히느냐?”라고 하니, “여유가 있을 때 독서를 하거나 선비들과 經書의 의리를 강론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명종이 말하기를 “經에 君臣과 父子의 도리가 있다. 그러나 반드시 큰 학자이거나 단정한 선비라야 이에 經典을 가까이할 수 있다.
나는 先帝께서 詩歌를 짓기 좋아하시는 것을 보았으니, 그다지 할 말이 없지만 너는 將帥 집안의 아들인지라 문장을 평소 익히지 않았으니 반드시 잘 지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지은 글이〉 사람들의 입에 전해진다면 한갓 비웃음만 받을 것이다. 나는 늙었기에 經書의 의리에 대해 비록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여러 번 듣는 것을 좋아하였고 그 나머지는 배울 것이 못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해 가을에 李從榮을 秦王에 봉하였다. 왕들이 冊封되면 太廟에 조회하지 않는 故事가 있었는데, 有司가 왕의 뜻에 맞추기 위해 禮式을 융숭하게 치르려고 하였다.
이에 건의하기를 “옛날에 禘祭와 嘗祭를 지내고서 爵祿을 지급하였으니, 이는 군왕이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음을 보인 것입니다. 지금 大封을 받고서 태묘에 고하지 않는 것은 공경하고 순종하는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종영이 朝服을 입고 輅車를 타고 儀仗隊를 갖추고서 朝堂에 이르러 冊命을 받고 나가서 수레에 冊書를 싣고 태묘에 조회하니, 京師의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長興 3년(932)에 兼中書令이 더해졌다. 有司가 또 말하기를 “故事에 親王은 班列이 재상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 秦王은 지위는 높지만 반열이 아래에 있으니 서로 맞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과 반열을 나누어 오른쪽에 자리하였다. 장흥 4년(933)에 尙書令을 더하니 食邑이 1만 호였다. 太僕少卿 何澤이 글을 올려 李從榮을 皇太子로 冊立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에 明宗이 이미 병들어 하택의 글을 보고 기뻐하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신하들이 태자를 세우려고 하니, 나는 河東에서 노년을 편하게 보내야겠다.”라고 하고, 이에 대신을 불러 태자를 책립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니, 대신들이 모두 감히 可否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종영이 들어와 아뢰기를 “姦人이 臣을 태자로 책립하려고 한다고 들었으니 臣은 실로 원치 않습니다.”라고 하니, 명종이 말하기를 “이는 신하들이 바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종영이 나와 范延光과 趙延壽 등을 보고 말하기를 “공들이 의논하여 나를 태자로 책립하려고 하니, 이는 나의 兵權을 빼앗고 東宮에 幽閉하려는 것이다.”라고 하니, 범연광 등이 근심하여 이에 이종영에게 天下兵馬大元帥를 더해주었다.
有司가 또 말하기를 “元帥는 혹 여러 道를 총괄하거나 혹 한 方面을 專擔하는데, 이전 시대에는 天下大元帥라는 칭호가 없었으므로 禮를 상고할 곳이 없습니다.
청컨대,
節度使 이하로 군사를 통솔하는 직분을 가진 자는 모두
櫜鞬을 갖추고
軍禮로
庭參하고,
櫜鞬
同中書門下平章事를 겸한 자는 처음 참견할 때에는 또한 이와 같이 禮를 갖추고 이후에는 客禮로 보는 것을 허여하십시오. 元帥府의 문건을 천하에 공포할 때에는 모두 帖文을 사용하고, 반열을 올려 宰相의 위에 있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李從榮이 元帥府에서 크게 연회를 베푸니 장수들에게는 모두 하사품이 있었다. 控鶴指揮使, 奉聖指揮使, 嚴衛指揮使는 1인당 말 1匹과 명주[絹] 10匹이고, 諸軍의 指揮使는 1인당 명주 10匹이고, 都頭 이하는 7匹에서 3匹이었다.
또 嚴衛와 捧聖 1천 명을 牙兵으로 삼을 것을 청하여 아병들이 매번 入朝할 때에 수백의 기병으로 앞뒤를 호위하며 활에 살을 먹인 채로 도로를 내달리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였다.
이종영이 또 寮屬과 四方의 遊士들에게 명하여 시험삼아 〈征淮檄〉을 지어서 자신이 천하를 통일하려는 뜻을 진달하게 하였다.
言事하는 이가 諸王을 위하여 師傅를 택하여 訓導해줄 것을 청하니, 宰相이 그 일을 난처하게 여겨 인하여 李從榮에게 스스로 선택하도록 청하였다.
이종영이 이에 翰林學士 崔棁과 刑部侍郞 任贊을 元帥判官으로 삼기를 청하니, 明宗이 “學士들이 나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이종영이 나와 성내어 말하기를 “나에게 元帥의 직임을 맡겼거늘 下僚조차 청할 수 없으니, 나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將相과 大臣들이 이종영이 권력과 지위가 더욱 높아졌는데도 경박함이 이와 같음을 보고, 모두 禍亂이 발생할 것을 알았지만 감히 말하는 자는 없었다.
范延光과 趙延壽만은 은밀히 화를 피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자주 명종을 뵙고 눈물을 흘리며 樞密에서 解職시켜 주기를 청하여 두 사람이 모두 조정을 떠났는데, 이종영의 난이 일어났다.
11월 戊子日에 눈이 내렸다. 明宗이 宮의 서쪽 士和亭으로 행행하였다가 寒疾에 걸렸다. 己丑日에 李從榮이 樞密使 朱弘昭‧馮贇과 함께 들어가 廣壽殿에서 안부를 물었는데, 皇帝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王淑妃가 황제에게 “從榮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또 “朱弘昭 등도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이종영 등이 떠나자 이에 황제를 雍和殿으로 옮기니, 궁중이 모두 통곡하였다.
한밤중에 이른 뒤에 황제가 갑자기 스스로 침상에서 일어났는데, 간호하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었다. 殿上에서 물시계를 지키던 궁녀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밤의 시각이 얼마나 되었느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4更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곧장 肺처럼 생긴 살덩이 몇 조각을 뱉어내고 침과 위액을 1말[斗] 남짓 쏟아냈다. 물시계를 지키던 궁녀가 “폐하께서는 정신이 드십니까?”라고 하니, 황제가 “나는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六宮이 모두 이르러 “황제께서 정신이 돌아왔다.”라고 하고 인하여 죽 한 그릇을 올렸다. 아침에 이르러 병이 조금 나아졌지만 이종영은 병을 핑계 대고 조회하지 않았다.
당초에 李從榮이 宋王 李從厚가 자신보다 뛰어남을 시기하여 자신이 後嗣가 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평소에 교만하고 잘난 체하다가 타인이 宋王의 훌륭한 점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근심스럽게 안색이 좋지 않았다.
들어가 皇帝의 병문안을 할 때에 황제가 이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떠난 뒤에 궁중의 곡소리를 듣고 황제가 이미 崩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군사를 궁에 들일 것을 계획하여 押衙 馬處鈞을 시켜 朱弘昭 등에게 고하기를 “牙兵을 데리고 궁에 들어가 宿衛하고자 하니 어디에 거처해야 할지를 물어라.”라고 하였다.
주홍소 등이 “궁중은 모두 왕이 거처할 수 있으니 왕께서 스스로 택하소서.”라고 하였다. 인하여 마처균에게 사적으로 말하기를 “聖上께서 회복하셨으니 왕은 忠孝에 힘을 다해야 할 것이고 경솔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마처균이 이 말을 이종영에게 갖추어 고하니, 이종영이 마처균을 다시 보내 주홍소 등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가족을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주홍소와 馮贇 및 宣徽使 孟漢瓊 등이 들어가 王淑妃에게 고하여 모의하기를 “이 일은 반드시 侍衛兵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고, 이에 侍衛指揮使 康義誠을 불러 竹林의 아래에서 모의하였다.
강의성은 아들이 秦王府에 있었기에 감히 모의를 결정할 수 없었다. 주홍소에게 “저는 將校이니 오직 공의 지휘를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니, 주홍소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튿날 李從榮이 馬處鈞을 보내 馮贇에게 말하기를 “나는 오늘 興聖宮으로 들어가 거처할 것이고 또 康義誠에게 고하니 강의성이 허락하였다.”라고 하니,
풍빈이 즉시 궐내로 달려 들어가 康義誠‧朱弘昭‧孟漢瓊 등을 보고 中興殿 內閣에 앉아 일을 의논하였다.
풍빈이 강의성을 꾸짖기를 “主上께서 우리들을 기른 것은 지금 같은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오늘같이 위태로울 때에는 조금의 시간도 지체해서는 안 되는데, 어찌하여 아들의 일로 주저하는가.
만약 秦王이 이 문에 이른다면 주상께서는 어디로 돌아가겠으며 우리들도 씨가 남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맹한경이 “저의 목숨은 아깝지 않으니 제가 군사를 이끌고 가 막아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궐내로 들어가 皇帝를 뵙고 “이종영의 반란군이 이미 端門을 공격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宮人들이 서로 돌아보고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렸다. 明宗이 주홍소 등에게 “실제로 〈반란이〉 일어났는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라고 하였다.
명종이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눈물을 흘렸다. 한참 뒤에 황제가 말하기를 “강의성이 알아서 처리하고, 京師를 놀라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潞王의 아들 李重吉이 곁에 있었는데, 명종이 말하기를 “나는 너의 아비와 함께 미천한 신분으로 일어나 천하를 취하는 데에 이르렀고 수차례 위험한 상황에서 나를 구해주었는데,
이종영은 무슨 氣力으로 이런 악행을 저지르는가. 너는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문들을 지켜라.”라고 하니, 이중길이 控鶴의 군사로 宮門을 지켰다.
이날에 李從榮이 河南府로부터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이종영의 寮屬들이 매우 많았으나 정직한 선비들은 대부분 미움을 받았다. 그중에 더욱 미움을 받던 사람은 劉贊과 王居敏이고,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은 劉陟과 高輦이었다.
이종영의 군사가 나가서 유척‧고련과 함께 말을 나란히 몰고 귓속말을 하면서 가서 天津橋에 이르러 남쪽으로 해 그림자를 가리키며 고련에게 말하기를 “내일 지금 시간에 왕거민을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천진교 북쪽에 진을 치고 말에서 내려 胡床에 걸터앉아 사람을 시켜 康義誠을 부르니 端門(正門)은 이미 닫혀 있었고, 좌측 掖門을 두드리니 역시 닫혀 있었다.
그래서 문틈으로 보니 捧聖指揮使 朱弘實이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에서 오고 있었다. 즉시 말을 달려가 이종영에게 고하니, 이종영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鐵甲을 찾아 가슴을 가리고 손수 활과 화살을 준비하였다.
皇城使 安從益이 기병 3백을 거느리고 공격해 왔는데, 이종영의 군사들이 활을 쏘니 안종익이 조금 물러났다. 주홍실의 기병 5백이 왼쪽 액문을 나와 막 강을 건너려고 하였는데 뒤에서 오는 군사들이 매우 많았다.
이종영이 이에 달아나 河南府로 돌아가니, 判官 任贊 이하가 모두 달아나 定鼎門으로 나갔고 牙兵들은 嘉善坊을 노략질하고 흩어져 달아났다. 이종영 부부가 침상 아래에 숨어 있었는데, 안종익이 그들을 죽였다.
明宗이 이종영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열하다 몇 차례 걸상에서 떨어져 혼절했다가 깨어난 것이 두 번이었다. 馮道가 百官을 거느리고 들어와 뵈니 명종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의 일이 이와 같으니 신하들을 보기 부끄럽다.”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흘려 옷깃이 젖었다. 이종영의 두 아들은 아직 어렸지만 모두 따라서 죽었다. 6일 뒤에 명종이 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