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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洵(1)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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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장시랑張侍郎에게 올린 두 번째 글
告知己者之言으로 情詞可涕
자신을 알아준 사람에게 한 말로 정사情詞가 눈물을 흘리게 할 만하다.
省主侍郎執事 洵始至京師時 平生親舊 往往在此한대
성주시랑省主侍郎 집사執事께. 제가 애초 경사京師에 이르렀을 때 평생平生친구親舊들이 왕왕往往 이곳에 있었는데,
不見者蓋十年矣로되 惜其老而無成하여
만나지 못한 지가 거의 10년은 되었는데도 제가 늙도록 이룬 것이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問所以來者하고 旣而皆曰 子欲有求 無事他人이요 須張益州來乃濟
온 까닭을 물어보고는 이윽고 모두 말하기를 “그대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섬길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장익주張益州라야 이루어줄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且云 公不惜數千里走表하고 爲子求官하니 苟歸 立便殿上하여 與天子相唯諾 顧不肯邪
또 이르기를 “장공張公은 수천 리 밖에서 를 올리는 것을 꺼리지 않고 그대를 위해 관직官職을 구하였으니, 만약 조정朝廷으로 돌아가 편전便殿에 서서 천자天子와 응대하게 되면 어찌 돌봐주지 않으시겠는가?”라 하였습니다.
退自思 公之所與我者 蓋不爲淺이나 所不可知者 唯其力不足이요 而勢不便이라
물러나 스스로 생각해보니, 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후의厚意가 대개 얕지 않았으나, 저를 알아주지 못한 것은 오직 제 능력能力이 부족한데다가 또 형세形勢가 〈저를 추천하시기에는〉 편치 않아서입니다.
不然이면 公於我無愛也
그렇지 않다면 상공相公께서는 저를 사랑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聞之古人하니 이라하니이다
옛사람에게서 듣자니 “해가 한가운데 있을 때 반드시 〈사물을〉 말릴 것이며, 칼을 잡았으면 반드시 베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當此時也 天子虛席而待公이며 其言宜無不聽用이라
이때를 당하여 천자天子께서는 자리를 비워놓고 공을 기다렸으며, 그 말은 마땅히 듣고 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洵也與公有如此之舊하고 適在京師하며 且未甚老 而猶足以有爲也
저는 공에게 이와 같은 구면舊面이 있고 마침 경사京師에 있으며 또한 그다지 늙지 않아서 여전히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此時而無成이면 亦足以見他人之無足求하고 而他日之無及也已
이때를 만나서도 이룬 것이 없게 된다면 또한 다른 사람이 제게 구할 만한 것이 없고 훗날에는 이러한 기회를 얻지 못할 따름임을 족히 알겠습니다.
昨聞車馬至此有日하고 西出百餘里迎見이라
어제 공의 거마車馬가 이곳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으로 백여 리를 맞아 뵈러 나갔습니다.
雪後苦風 晨至鄭州하니 脣黑而裂이요 僮僕無人色이라
눈 온 뒤의 모진 바람 속에서 새벽에 정주鄭州에 이르니 입술은 까맣고 터졌으며 아이종 녀석은 사람의 기색이 없었습니다.
從逆旅主人得束薪縕火라가 良久 乃能以見이라
객관客館 주인에게서 땔나무 묶음과 삼부스러기 불씨를 얻느라 한참이 되어서야 이에 뵐 수 있었습니다.
出鄭州十里許 有導騎從東來한대 驚愕下馬立
정주鄭州를 10리 남짓 나서자 이끄는 기병騎兵이 동쪽에서 왔는데 깜짝 놀라 말에서 내려 길가에 서 있었습니다.
且至라하며 從者數百人이요 足聲如雷
송단명宋端明(송기宋祁)께서 이르실 거라면서 종자從者가 수백 명이나 되고 발소리가 우레와 같았습니다.
已過 乃敢上馬徐去
이미 지나간 뒤에야 감히 말에 올라 천천히 떠났습니다.
私自傷至此 라하니 蓋窮困如此
제가 스스로 상심傷心이 여기에 이른 것은, 엎드려 생각건대 명공明公께서 이른바 “결백潔白하고 청렴淸廉하며 문채文彩가 있고 나라의 사마자장司馬子長(사마천司馬遷)에 비길 만하다.” 하셨으니 아마 곤궁困窮함이 이와 같아서일 것입니다.
豈不爲之動心而待其多言邪
어찌 거기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말이 많기를 기다리시겠습니까!
역주
역주1 上張侍郎第二書 : 張侍郞은 곧 張方平(1007~1091)이다. 자는 安道이며 그 선조는 宋州(지금의 河南 商丘市 남쪽) 사람인데 나중에 揚州로 옮겼다. 벼슬은 參知政事에까지 이르렀으며 《樂全集》이 있다. 至和 원년(1054) 張方平이 戶部侍郞으로 知益州가 되었기 때문에 張侍郞 혹은 張益州라고 하였다. 《續資治通鑑》 권56 嘉祐 원년(1056) 8월 조의 기록에 의하면, 端明殿學士 知益州 장방평을 불러 三司使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 편지 서두에 ‘省主’라고 한 것은 이 三司使에 대한 존칭이다. 三司使란 鹽鐵과 度(탁)支, 戶部의 세 관청을 총괄하는 벼슬인데, ‘計省’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 벼슬은 國政을 총괄하는 ‘參知政事’, 國家安全을 총괄하는 ‘樞密使’와 같은 우대를 받았다. 본문에서 “눈 온 뒤라 바람 속에 고생하였다.[雪後苦風]”라 하였으므로 張方平이 서울로 돌아온 때는 이미 한겨울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때 蘇洵은 이미 文名을 크게 떨쳤지만 官職을 구하려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따라서 蘇洵이 재차 張方平에게 글을 올려 거듭 천거해주기를 구한 것이다.
역주2 日中必熭 操刀必割 : 《新書》 〈宗首〉에 나온다. 熭는 曬와 같은 뜻이다. 때가 되어 할 일을 꼭 해야만 한다는 비유이다.
역주3 道周 : ‘길가, 길옆’이라는 뜻이다.
역주4 宋端明 : 宋祁(998~1061)를 가리키며, 자는 子京이고 安陸(지금의 湖北) 사람이다. 벼슬이 工部尙書까지 이르렀으며 형인 宋庠과 함께 文名을 떨쳐 당시 二宋으로 일컬어졌다. 嘉祐 원년(1058) 8월 張方平이 知益州를 그만두자 宋祁가 端明殿學士로 특별히 工部侍郞 知益州로 옮겼으므로 宋端明이라고 일컬었다.
역주5 伏惟明公所謂潔廉而有文 可以比漢之司馬子長者 : 子長은 司馬遷의 자이다. 張方平의 〈文安先生墓表〉에서는 “한참 있다가 蘇君이 과연 이르렀다. 그곳에 갔는데 和睦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博學하고 文才가 많음을 알았다. 조금 있다가 그가 지은 〈權書〉와 〈衡論〉을 얻어 살펴보았는데 큰 산의 구름이 산에서 나와 불현듯 사방을 덮어 방향을 가늠치 못하게 하다가 일순간에 확 걷힌 듯하였고, 큰 강이 도도하게 동으로 흘러 바다의 근원에 이른 것 같았다.……그래서 蘇君에게 말하기를 ‘左丘明과 《國語》, 司馬遷은 敍事에 뛰어났고 賈誼는 王道에 밝았는데 그대는 그것을 겸하였소.’라 하였다.”라 하였다. 雷簡夫의 〈上歐陽內翰書(歐陽內翰에게 올린 글)〉에서는 “張益州는 그(蘇洵)의 글을 한번 보더니 탄식하여 말하기를 ‘司馬遷이 죽었으니 그대가 아니면 우리 중 누가 비견되겠는가.’라 하였다.”라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순(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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