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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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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유후留侯에 대한
此文 只是一意反覆하야 滾滾議論이라
이 문장은 다만 한 가지 뜻을 반복하여 의논을 막힘없이 전개하였다.
이나 子瞻胸中見解 亦本黃老來也니라
그러나 자첨子瞻흉중胸中의 견해는 또한 본래 황로黃老에서 온 것이다.
古之所謂豪傑之士者 必有過人之節하야 人情 有所不能忍者하니 匹夫見辱 拔劍而起하야 挺身而鬪 此不足爲勇也
옛날에 이른바 호걸스러운 선비는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행실이 있어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는 참지 못하는 일이 있었으니, 필부匹夫가 모욕을 당함에 을 뽑아 들고 일어나 몸을 솟구쳐 싸우는 것은, 이는 용맹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天下 有大勇者하니 卒然臨之而不驚하고 無故加之而不怒하나니 此其所挾持者甚大하고 而其志甚遠也
천하에 크게 용맹한 자가 있으니, 일이 갑자기 임하여도 놀라지 않고 까닭 없이 침해를 가하여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이는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심히 크고 그 뜻이 매우 원대한 것이다.
자방子房이 흙다리 위의 노인에게서 책을 받은 것은 그 일이 매우 괴이하다.
이나 亦安知其非秦之世 有隱君子者出而試之리오
그러나 또한 나라 시대에 은둔한 군자君子가 나와서 자방子房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觀其所以微見其意者하면 皆聖賢相與警戒之義어늘 而世不察하고 以爲鬼物이라하니 亦已過矣
노인이 자신의 뜻을 은미하게 나타낸 것을 살펴보면 모두 성현이 서로 함께 경계한 뜻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살피지 못하고 노인을 귀신이라고 하니, 또한 너무 잘못된 것이다.
且其意不在書하니라
그리고 또 노인의 뜻은 병서兵書를 전수하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當韓之亡, 秦之方盛也으로 待天下之士하야 其平居 無罪夷滅者 不可勝數하니 雖有이나 無所復施
나라가 망하고 나라가 막 강성할 적에 칼과 톱, 솥과 가마솥으로 천하의 선비를 대하여 평소에 죄없이 죽고 멸망한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아무리 맹분孟賁하육夏育과 같은 용맹이 있더라도 다시 힘을 쓸 데가 없었다.
夫持法太急者 其鋒 不可犯하고 而其勢 未可乘이어늘 하니
을 너무 급하게 집행하는 자는 그 예봉銳鋒을 범할 수 없고 그 형세를 탈 수 없는 법인데, 자방子房은 분하고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필부의 힘으로 일격을 가하는 사이에서 분풀이를 하고자 하였다.
當此之時하야 子房之不死者 其間 不能容髮하니 蓋亦已危矣
이때 자방子房이 죽지 않은 것은 그 사이가 털끝 하나도 용납할 틈이 없었으니, 진실로 너무 위태로웠다.
千金之子 不死於盜賊하나니 何者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은 도적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其身之可愛하야 而盜賊之不足以死也일새라
그 몸이 아까워 도적에게 자기 몸을 죽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子房 以蓋世之才 不爲하고 而特出於하야 以僥倖於不死하니 此圯上之老人 所爲深惜者也
자방子房은 세상을 덮을 만한 훌륭한 재주로써 이윤伊尹태공太公의 계책을 세우지 않고, 다만 협객인 형가荊軻섭정聶政의 계책을 내면서 요행으로 죽지 않기를 바랐으니, 이것을 흙다리 위의 노인이 깊이 애석하게 여긴 것이다.
是故 倨傲鮮腆而深折之하니 彼其能有所忍也然後 可以就大事
이 때문에 노인이 거만하게 대하고 거드름을 피워 자방子房을 깊이 꺾었으니, 노인은 자방子房이 능히 참을 줄 안 뒤에야 대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겼다.
曰 孺子可敎也라하니라
그러므로 “젊은이를 가르칠 수 있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초 장왕楚 莊王나라를 정벌하자, 정백鄭伯이 윗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을 끌고 맞이하였다.
莊王曰 其君 能下人하니 必能信用其民矣리라하고 遂舍之하며 하니라
이에 장왕莊王이 말하기를 “그 임금이 능히 남에게 자신을 낮추니, 반드시 그 백성들을 믿고 잘 이용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그를 놓아주었으며, 월왕 구천越王 句踐회계산會稽山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돌아가 나라에 신첩臣妾 노릇하기를 3년 동안 게을리하지 않았다.
且夫有報人之志而不能下人者 是匹夫之剛也
저 남에게 보복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에게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필부의 강함일 뿐이다.
夫老人者 以爲 子房 才有餘 而憂其度量之不足이라
노인은 자방子房이 재주는 유여하다고 여겼으나 도량이 부족함을 걱정하였다.
深折其少年剛銳之氣하야 使之忍小忿而就大謀하니라
그러므로 소년의 강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깊이 꺾어서 그로 하여금 작은 분노를 참아 큰 계책을 성취하게 한 것이다.
何則
어째서인가?
非有平生之素 卒然相遇於草野之間하야 而命以僕妾之役이로되 油然而不怪者 此固秦皇帝之所不能驚이요 而項籍之所不能怒也
평생의 안면이 있지 않았는데, 갑자기 초야草野의 사이에서 서로 만나 종과 첩이 하는 일을 시키는데도 유연히 처하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이는 진실로 진 시황秦 始皇도 놀라지 않는 바요, 항적項籍도 성내지 않는 바이다.
觀夫高祖之所以勝而項籍之所以敗者하면 在能忍與不能忍之間而已矣
고조高祖가 승리한 이유와 항적項籍이 패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능히 참았는가 능히 참지 못하였는가의 사이에 달려 있을 뿐이었다.
項籍 惟不能忍이라
항적項籍은 참지 못하였다.
是以 百戰百勝하야 而輕用其鋒하고 高祖 忍之하야 養其全鋒하야 而待其弊하니 子房敎之也
이 때문에 백전백승하였으나 자기의 칼날을 함부로 사용하였고, 고조高祖는 이것을 참아서 그 온전한 칼날을 길러 상대방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렸으니, 이는 자방子房이 가르쳐준 것이다.
하니 由此觀之하면 猶有剛彊不忍之氣하니 非子房이면 其誰全之리오
회음후淮陰侯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을 적에 고조高祖가 성을 내어 말소리와 안색에 노기가 나타났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고조高祖는 아직도 강강剛彊하여 참지 못하는 기운이 있었던 것이니, 자방子房이 아니면 그 누가 온전히 해주었겠는가?
태사공太史公은 ‘자방子房이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기이하고 위대할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그 형상과 모양이 도리어 부인과 여자 같아, 그 지기志氣에 걸맞지 못하다.’고 의심하였으니, 아!
此其所以爲子房歟인저
이것이 바로 자방子房이 된 이유일 것이다.
왕준암王遵巖(왕신중王愼中)이 말하였다.
此文 若斷若續하야 變幻不羈하야 曲盡文家操縱之妙하니라
“이 문장은 마치 끊어지는 듯 이어지는 듯 변환變幻하여 얽매임이 없어서 문장을 다루는 묘리를 곡진히 다하였다.”
역주
역주1 留侯論 : 이 글은 蘇軾이 젊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留侯는 張良으로, 字는 子房이고, 시호는 文成이다. 漢 高祖에 의해 留侯로 봉해졌다.
역주2 夫子房受書於圯上之老人也 : 이 내용은 《史記》 〈留侯世家〉에 아래와 같이 보인다.
“張良이 일찍이 한가로이 下邳의 흙다리 위를 걸어가는데, 어떤 노인이 갈옷을 입고 張良이 있는 곳으로 와서 신발을 다리 밑으로 일부러 떨어뜨리고는 張良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젊은이가 내려가서 신발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張良이 놀라서 때리려고 하다가 노인이므로 억지로 참고 내려가 신발을 가져오니, 노인이 신발을 신겨달라고 하였다.
張良은 이왕 신발을 가져왔으므로 무릎을 꿇고 신을 신겨주자, 노인은 신발을 신고 웃으면서 갔다. 張良이 놀라 바라보고 있는데, 노인이 1里쯤 가다가 되돌아와서 말하기를 ‘젊은이는 가르칠 만하다. 5일 후 새벽에 여기에서 만나자.’라고 하였다.
張良이 괴이하게 여겨 꿇어앉아 대답하고 5일 후 새벽에 가니, 노인이 먼저 와 있었다. 노인은 화를 내며 ‘젊은이가 노인과 약속하고 늦게 오는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책망하고 ‘5일 후에 다시 일찍 오라.’고 하였다. 5일 후 張良이 닭이 울 때에 가니, 노인이 역시 먼저 나와 있었다가 다시 성내며 말하기를 ‘왜 이리 늦는가? 5일 후 다시 일찍 오라.’라고 하였다.
5일 후 張良이 밤중이 되기 전에 가니, 잠시 후 노인이 와서 기뻐하고 책을 한 권 꺼내주면서 ‘이것을 읽으면 왕의 스승이 될 것이니, 10년 뒤에 흥하게 될 것이다. 13년 뒤에 젊은이는 나를 濟北의 穀城山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니, 그곳에 있는 黃石이 바로 나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떠나가서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張良이 그 책을 보니, 太公의 兵法이었다. 張良이 기이하게 여겨 항상 그 책을 외워 익혔으며, 이 책을 통하여 楚나라의 項羽를 이길 수 있었다. 13년 뒤에 張良이 穀城山을 지나다가 누른 바위(黃石)가 있는 것을 보고 절하였으며, 張良이 죽자 이곳에 장례하고 黃石과 함께 제사 지냈다.”
그 후 세상에서는 그 노인을 黃石公이라고 칭하였는데, 노인이 전한 병서는 《素書》와 《陰符經》이라 한다.
역주3 刀鋸鼎鑊 : 모두 형벌하는 도구로, 칼과 톱으로는 사람을 찔러 죽이고, 솥과 가마솥으로는 삶아 죽였다.
역주4 賁育 : 孟賁과 夏育으로 모두 전국시대의 이름난 역사들인데, 孟賁은 齊나라 사람이고, 夏育은 衛나라 사람이다.
역주5 子房不忍忿忿之心……而逞于一擊之間 : 張良의 집안은 父․祖 이상 5대가 모두 韓나라의 정승이었는데, 韓나라가 秦나라 始皇帝에게 멸망되자, 張良은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복수하고자 하였다. 張良은 남은 가산을 다 써서 力士들을 구하고 120근의 철추를 만들어 동쪽으로 유람 중인 始皇帝를 博浪沙에서 저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변성명하여 겨우 화를 모면하였다.
역주6 伊尹太公之謀 : 伊尹은 商나라를 개국한 成湯의 재상이고, 太公은 周나라를 개국한 武王의 軍師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은인자중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난 뒤에 비로소 천하를 도모하였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7 荊軻聶政之計 : 荊軻와 聶政은 모두 전국시대의 자객들로, 이들의 계책이란 목숨을 도외시하고 위험한 행동으로 일을 이루려는 계책을 이른다. 荊軻는 전국시대 衛나라의 이름난 자객으로 燕나라 태자 丹을 위해 秦나라의 始皇帝를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살해되었다. 聶政은 魏나라 軹邑 深井里(지금의 河南省 濟原縣) 사람으로 자신을 후대한 嚴仲子를 위하여 嚴仲子의 원수인 韓나라 재상 俠累를 죽이고 자살하였다.
역주8 楚莊王伐鄭……遂舍之 : 鄭伯은 鄭 襄公으로,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宣公 12년에 아래와 같이 보인다.
“楚軍이 鄭나라를 포위하여 3개월 동안 공격해 승리하고서 皇門으로 들어가 大路에 이르니, 鄭伯이 윗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羊을 끌고 와서 楚子(莊王)를 영접하며 말하기를, ‘저는 하늘의 뜻을 받들지 않고 君王을 잘 섬기지 아니해서 君王으로 하여금 노하여 우리나라에 오시게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저의 죄이니, 감히 명하시는 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鄭나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江南으로 데려가 海邊을 채우시더라도 명령대로 따를 것이고, 鄭나라의 영토를 깎아 제후들에 나누어주고 우리 백성들을 제후들의 臣妾이 되게 하시더라도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지난날의 우호를 생각하여 은혜를 베푸시어 周나라의 厲王과 宣王, 鄭나라의 桓公과 武公께 복을 구하기 위해 鄭나라의 社稷을 멸망시키지 않고, 鄭나라로 하여금 지난날의 잘못을 고치고서 楚나라의 諸縣과 같이 君王을 섬기게 하신다면, 이는 君王의 은혜이고 저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감히 바랄 수 없으므로 감히 진심을 토로하오니, 君王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라고 하였다.
楚子의 좌우 신하들이 ‘鄭伯의 요구를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나라를 공격해서 얻으면 다시 용인해주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하니, 楚王이 말하기를 ‘그 임금이 능히 남에게 자신을 낮추니 반드시 그 백성들을 믿고 잘 이용할 것이다. 이런 나라를 어찌 얻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하고서 30리를 물러나 鄭나라의 講和를 허락하였다.”
역주9 句踐之困於會稽而歸……三年而不倦 : 臣妾은 ‘자신은 신하가 되고, 아내는 妾이 된다.’는 뜻이나, 妾은 참으로 상대방의 妾이 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에게 복종함을 이른다.
춘추시대에 越王 句踐이 吳王 夫差와 싸워 대패하고 會稽山에서 농성한 끝에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본국으로 돌아오자, 외면으로는 吳나라를 지극 정성으로 받들어 吳王 夫差의 의심을 풀고자 하였는바 “吳나라에 臣妾 노릇하기를 3년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말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역주10 淮陰破齊而欲自王……見於辭色 : 淮陰侯는 韓信의 봉호이다. 韓信이 齊나라를 점령한 다음 高祖에게 사람을 보내어 “齊나라 지역은 反覆無常하니, 王을 두어 다스리지 않으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臣이 假王이 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高祖가 크게 화를 내자, 옆에 있던 張良이 은근히 高祖의 발을 밟으며 귓속말로 “大王께서 韓信을 王으로 봉해주지 않으면 배반할 것이니, 그를 王으로 삼아 힘을 다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高祖는 使者를 보고 큰소리로 “대장부가 諸侯를 평정했으면 마땅히 진짜 王이 될 것이지, 어찌 假王이 된단 말인가?”라고 하여, 방금 전 자신이 크게 노한 것이 마치 假王이란 말 때문이었던 것처럼 속이고 韓信을 齊王으로 삼았다.
이에 韓信은 힘을 다해 高祖를 도와 楚나라를 공격하여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韓信은 천하통일 후에 다시 楚王에 봉해졌으나 高祖의 의심을 받아 淮陰侯로 강등되고 반란을 획책하다가 결국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高祖本紀․淮陰侯列傳》
역주11 太史公……不稱其志氣 : 이 내용은 《史記》 〈留侯世家〉에 “나는 留侯의 사람됨이 아마도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기이하고 위대할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그의 畵像(초상화)을 보니 용모가 부인이나 예쁜 여인과 같았다. 孔子가 말씀하시기를 ‘외모로 사람을 취하다가 子羽에게서 잘못을 범하였다.’라고 하셨으니, 留侯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다.[余以爲其人計魁梧奇偉 至見其圖 狀貌如婦人好女 蓋孔子曰 以貌取人 失之子羽 留侯亦云]”라고 보인다. 子羽는 孔子의 제자인 澹臺滅明의 字이다. 澹臺滅明은 외모가 못생겼으나 인품이 고결하였다.
역주12 王遵巖 : 明나라의 文章家인 王愼中을 가리킨 것으로, 처음에 遵巖居士라 칭하다가 뒤에 南江으로 고쳤다. 古文에 뛰어나 唐順之와 함께 ‘王唐’으로 일컬어진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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