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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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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상서형부시랑에 추증된 왕공의 묘지명
篇中 多倒句倒字相點次하니 荊公好奇處
문장文章 가운데 도치倒置하여 나열한 곳이 많은데, 이는 형공荊公이 문장을 기이奇異하게 짓기를 좋아하였음을 드러낸 부분이다.
江陵縣 有合葬龍山之西者하니 爲宋龍川令贈尙書刑部侍郞王公之墓
강릉현江陵縣 용산龍山의 서쪽에 합장合葬한 분이 계시니, 용천령龍川令 증상서형부시랑贈尙書刑部侍郞 왕공王公이다.
公之卒 得年七十一이요 其葬之歲在辛卯하니 爲皇祐三年十二月甲申이라
할 때의 연세가 71세였고, 장례葬禮를 모신 해는 신묘년辛卯年으로, 황우皇祐 3년 12월 갑신일甲申日이었다.
龍川 其所卒也 以刑部侍郞贈公者 曰公之子
용천龍川은 그분이 한 곳이고,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증직贈職한 것은, 의 아들인 광록경光祿卿 의 벼슬에 의해서였다.
公諱文亮이요 字昭遠이니 其先
문량文亮이고, 소원昭遠이니 그의 선조先祖에서 승상丞相을 지낸 이다.
丞相十有六世之孫儉 爲唐正議大夫 刺明州하니 始去長安之萬年하야 爲明之奉化人하다
승상丞相의 16세손世孫정의대부正議大夫 명주자사明州刺史를 지냈으니, 처음에 장안長安만년현萬年縣에 살다가 이주하여 명주明州봉화인奉化人이 되었다.
大夫之兄曰潨이니 潨生紳하고 紳生韶하며 韶生公하니 四世咸爲縣令하다
정의대부正議大夫이었는데, 을 낳고, 를 낳았으며, 을 낳았는데, 4가 모두 현령縣令을 지냈다.
公嘗試策入等하야 爲其屬州之掾이라가
전씨錢氏오월국吳越國으로 있을 때에 책문策問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에 들어, 오월吳越이 되었다.
國除 遷於京師하다 復掾密州라가 尉夔奉節하고 爲邢之任令이러니
오월吳越에 귀속되자 경사京師로 돌아왔고, 다시 밀주密州이 되었다가 기주夔州 봉절현奉節縣가 되었으며, 다시 형주邢州 임현任縣현령縣令이 되었는데,
擧者二十餘人호되 不用하니 歎曰 吾旣其衰矣로다 而爲是하니 是不可以已耶아하고 卽以疾去하다
경관京官으로 추천한 사람이 20여 명에 이르렀으나 임용되지 않자, 탄식하기를 “내가 이미 노쇠하였는데, 이런 지위에 있으니, 어찌 사직辭職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하고, 즉시 병을 이유로 물러났다.
去之八年토록 無復言進이러니 仕黨故强起之한대 復嘆曰 仕不仕 惟義也 吾敢自必於其間耶아하고 起令龍川이라가 遂卒하다
물러난 지 8년 동안 다시 벼슬에 나가겠다는 말을 한 일이 없었는데, 같이 벼슬했던 동료들이 강제로 나오게 하니, 다시 탄식하기를 “벼슬을 하고 아니하는 것을 오직 의리義理에 맞게 할 뿐이니, 내가 감히 스스로 그 사이에서 내 신념만 기필期必할 수 있겠는가.” 하고, 다시 관계官界에 나아가 용천龍川현령縣令이 되었다가 하였다.
始公尙少 以文稱於士友하고 嘗渡浙江할새 有忘白金百斤於舟러니 公最後獨見之하고 留三日하야 得忘者歸之而後去호되 而不告以名하다
이 아직 어렸을 때에 문장文章으로 사우士友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았고, 일찍이 절강浙江을 건널 때에 백금白金 100을 배에 놓아두고 간 사람이 있었는데, 이 맨 마지막에 홀로 이를 발견하고, 3일을 머물면서 잃어버린 사람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된 이후에야 그 자리를 떠나면서,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다.
他日 從者以爲言하니 於是 又稱其長者러라
후일에 종자從者가 이 소문을 퍼뜨리니, 이에 또한 훌륭한 어른이라는 칭예稱譽를 얻게 되었다.
今兩縣吏民 皆曰賢令也라하더니 旣亡 皆哀焉하다
지금 그가 다스렸던 두 의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어진 수령이었다고 말하였는데, 그가 사망死亡하자 모두 슬퍼하였다.
合葬于龍山者 天水郡太君權氏 善草隷書하고 誦數經하며 能略通其說하니 實唐之十七世孫云이라
용산龍山합장合葬부인夫人천수군태군天水郡太君 권씨權氏로, 초서草書예서隷書를 잘 썼고, 경서經書 여러 권을 암송暗誦하였으며, 그 이론理論에 대체로 통달하였으니, 나라 정효공貞孝公 의 17세손世孫이었다.
子男四人이니 向類高爲進士하야 充其業하고 其季 光祿君也
아들이 넷이니, 진사進士로서 각자의 사업을 실현하고 있고, 막내는 광록군光祿君이다.
女三人 皆歸聞人하다
딸이 셋인데 모두 유명한 사람들에게 출가하였다.
光祿君方潔勤審하고 下賢好學하니 人以爲君子之子焉이러라
광록군光祿君은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일을 조리있게 처리하고, 어진 사람을 섬기고 배우기를 좋아하니, 사람들이 의 아들로 손색이 없다고 여겼다.
땅이 어지러워지고부터 오랑캐들이 도적질하며 황하黃河 유역 일대를 점거하고 있어서, 한때 빼앗겨 어지러워졌다가 한때 수복하여 다스려졌다 한 것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 년이 되었다.
士大夫之家 流落顚頓하야 不常其世하니 後雖有振起者라도 多不知其族之所出이어늘 獨光祿卿之家 爲世其家하야 而能自道尤詳하야으로 至公四世之告命 皆具在하니라
이 때문에 사대부士大夫의 집안들도 유락流落하고 전복顚覆되어 계속 사대부로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되어, 후세後世에 비록 가문家門을 떨쳐 일으킨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씨족氏族세계世系를 모르게 된 사람이 많은데, 오직 광록군光祿君의 집안만은 그 가계家系를 대대로 매우 상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정의대부正議大夫 형제兄弟분부터 에 이르기까지 4 동안의 황제皇帝의 임명장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命其하야 銘公之墓者 光祿君也
같은 문중門中 사람인 에게 을 지어 올리도록 한 사람이 바로 광록군光祿君이다.
銘曰
이에 다음과 같이 을 지었다.
公先籍秦系相導
선대先代 땅에 본적을 두었고 승상丞相 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大夫相孫維作守
대부大夫 승상丞相후손後孫태수太守가 되었었네.
兄潨遂留家海浦하야
그분의 형님 해변海邊에 머물러 있었고,
子紳孫韶公祖考
그분의 아드님 과 손자 조부祖父부친父親이었네.
于東傳弗甚耀하니
동쪽에서 4를 이어오며 심히 드날리지 않은 것은,
藏仁厥家以賚後
집안에 인의仁義를 간직해두었다가 후손에게 물려주려 한 것이었네.
後蕃而昌其必效하야
후손이 번성蕃盛하고 창성昌盛하여 기어이 그 공효功效를 드러내게 되어,
今卿追公爲之兆
이제 광록경光祿卿업적業績으로 추술追述하여 그 에 세우게 된 것이네.
역주
역주1 贈尙書刑部侍郞王公墓誌銘 : 本 墓誌銘은 本文에서 墓主를 下葬한 때가 皇祐 3년(1051) 12월 甲申日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즈음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王安石은 31세였다.
역주2 光祿卿 : 皇室의 음식을 담당한 官員이다.
역주3 晉丞相導 : 晉은 東晉을 칭하며, 王導(276~339)는 東晉의 丞相을 歷任하였다.
역주4 方錢氏之王吳越也 : 錢俶이 五代十國時代에 吳越王으로 在位(948~978)했던 시기를 말한다.
역주5 貞孝公臯 : 唐代의 權臯로, 일찍이 安祿山의 麾下에 있었는데,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기미를 간파하고는 사망한 것처럼 소문을 내고 은둔하였다. 이에 크게 소문이 나서 玄宗이 監察御使로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死後에 貞孝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역주6 戎夷盜賊穴有中國……至于今歲千年 : 西晉이 南遷하여 東晉이 되고 華北 지방에 五胡十六國이 선 이후부터 宋代까지를 지칭한 것이다.
역주7 大夫伯仲 : 墓主의 曾祖인 正議大夫 王儉과 王潨 형제를 지칭한다.
역주8 宗人之子某 : 같은 門中 사람인 王安石이 自身을 지칭한 것이다.
역주9 : 저본에는 ‘西’로 되어 있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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