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는 이어든 하고 하여 하여 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不敢私其財
니라
어시든 하며 어시든 하며 어시든 하고 이어시든 則
하며 이라도 하며 하고 하고 하고 하고 이니라
는 하며 不敬其親
이요 而敬他人
하며 하여 하며 하여 不顧父母之養
하며 하며 하여 不顧父母之養
하며 하여 하며 하여 니라
人物之生
이 하더니 에 하사 하시니 와 와 가 니
하며 造書契
하여 하시고 하며 하시고 하며 하며 하며 하시니 是爲
이니
이 或四百
하며 或六百
하며 或八百
하니 을 이요 而
과 이 皆賢臣也
라
하여 하여 하니 若
과 과 과 과 이 하니 하니라
孔子以
으로 하사 하여 하시며 하시며 하시며 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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則曰魯
와 曰衛
와 曰晉
과 曰鄭
과 曰趙
와 曰蔡
와 曰燕
과 曰吳
와 曰齊
와 曰宋
과 曰陳
과 曰楚
와 曰秦
이니 하여 하니 秦楚燕齊韓魏趙
이라
孔子之孫
하사 作
하시고 하사 하여 하시되 而
이 盛行
이라 하니라
後梁
과 後唐
과 後晉
과 後漢
과 後周 是爲
니 하여 라
에 하여 에 하니 若
와 와 와 司馬光
과 와 과 가 相繼而起
하여 하되 하고
하여 歷年三百
하니 과 과 와 이 하고 而
하여 이 竭忠報宋
하다가 하니라
이 하여 하고 하더니 至孫
하여 하고 하여 하다
始祖
는 都辰韓地
하여 하고 始祖
은 至
하여 로라하여 因姓高
하고 始祖
는 都河南慰禮城
하여 하여 三國
이 各保一隅
하여 互相侵伐
하더니
其後
에 이 滅百濟高句麗
하고 分其地
하여 하여 以
로 하니 百濟
는 歷年
이 六百七十八年
이요 高句麗
는 七百五年
이라
新羅之末
에 하여 國號
를 泰封
이라하고 이 하여 自稱後百濟
로라하다
至于
하여 이 하고 가 昏暴自恣
하며 而
하여 遂至於亡
하니 歷年
이 四百七十五年
이라
하니 이어시늘 하사 이 繼繼繩繩
하사 하사 하시니 삿다
我國
이 하여 壤地褊小
하나 禮樂法度
와 衣冠文物
을 하여 人倫
이 明於上
하고 敎化行於下
하여 風俗之美
하니
이 다섯 가지 일은 하늘이 펼쳐 준 모범이고 사람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도리이다.
사람의 행실이 이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오직 효도가 모든 행실의 근원이 된다.
[해설]오륜五倫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인륜성은 하늘이 만들어 준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고유의 이치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타당하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부자 관계에서 자식이 실천해야 할 효임을 거듭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효자가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첫닭이 울면 모두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기운을 낮추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옷이 더운지 추운지를 여쭈며, 무엇을 잡수시고 마시고 싶은지를 여쭈며,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돌봐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여쭈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부모님을 대면하며, 멀리 나가 놀지 않으며 나가 놀되 반드시 일정한 장소를 두며, 감히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감히 재물을 자기 것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출전] ○ 鷄初鳴……問何食飮 : 《예기禮記‧내칙內則》에 나온다.자식이 부모를 섬길 때에는 첫닭이 울면 모두 세수하고 양치질하며……며느리가 시부모를 섬길 때에는……부모님의 처소에 나아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옷이 따뜻한지 추운지를 여쭈며……아직 관례冠禮나 계례笄禮를 올리지 않은 남녀들은……새벽에 문안 인사를 드리며 무엇을 드시고 싶은지 여쭌다.[子事父母 鷄初鳴 咸盥漱……婦事舅姑……以適父母之所 下氣怡聲 問衣燠寒……男女未冠笄者……昧爽而朝 問何食飮矣]○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 : 《예기禮記‧곡례상曲禮上》에 나온다.무릇 남의 자식된 자의 예는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돌봐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여쭈며 동배들과 싸우지 않는 것이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 在醜夷不爭]○ 出必告(곡) 反必面 : 《예기禮記‧곡례상曲禮上》에 나오는데 줄여서 출곡반면出告反面이라고도 한다.남의 자식된 사람은 외출할 때는 반드시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부모님을 대면하며 나가는 곳은 일정한 장소가 있어야 하며 익히는 일에도 일정한 직업이 있어야 한다.[夫爲人子者 出必告 反必面 所遊必有常 所習必有業]○ 不遠遊 遊必有方 : 《논어論語‧이인里仁》에 나온다.
부모님께서 생존해 계시면 멀리 나가 놀지 않으며, 나가 놀되 반드시 일정한 장소를 두어야 한다.[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 不敢有其身 不敢私其財 : 《예기禮記‧방기坊記》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도리로 임금을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도리로 관장을 섬기는 것은 백성들에게 두 마음을 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 동안 상喪을 치르고 임금이 돌아가셔도 3년 동안 상을 치르는 것은 백성들에게 의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면 감히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재물을 사유하지 않는 것은 백성들에게 상하上下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子云 孝以事君 弟以事長 示民不貳也……喪父三年 喪君三年 示民不疑也 父母在 不敢有其身 不敢私其財 示民有上下也]
[해설] 앞 문단에서 효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음 여기서는 효도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조목을 제시하고 있다. 어린 사람이 부모를 모시는 도리는 먼저 부모님의 의식주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혹시라도 불편한 것이 없는지 살피는 데 있다. 아울러 출입할 때 항상 부모님께 행선지를 분명하게 알려야 하며 일정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기치 못한 변고가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특히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서 자신의 신체를 함부로 손상시키는 행위를 금기시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부모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시거든 기뻐하되 잊지 않으며 미워하시거든 두려워하되 원망하지 않으며, 부모님께서 과실을 저지르시면 말리되 거스르지 않으며 세 번 간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시거든 부르짖고 울면서 따르며, 부모님께서 노怒하여 종아리를 때려 피가 흐르더라도 감히 미워하거나 원망치 않으며, 거처할 때에는 공경함을 극진히 하고, 봉양할 때는 즐거움을 극진히 하고, 병환이 드셨을 때는 근심을 극진히 해야 하고, 상喪을 당해서는 슬픔을 극진히 하고, 제사 지낼 때는 엄숙함을 극진히 해야 한다.
[출전] ○ 父母愛之……諫而不逆 : 《예기禮記‧제의祭義》에 나오는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또 《맹자孟子‧만장상萬章上》에도 만장萬章이 묻는 말 가운데 “父母愛之 喜而不忘 惡之 懼而無怨”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三諫而不聽 則號泣而隨之 : 《예기禮記‧곡례하曲禮下》에 나온다.신하된 예禮는 〈임금에게〉 드러내 놓고 간諫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 번 간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 나라에서 도망친다. 자식이 어버이를 섬길 때는 세 번 간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따른다.[爲人臣之禮 不顯諫 三諫而不聽 則逃之 子之事親也 三諫而不聽 則號泣而隨之]○ 怒而撻之流血 不敢疾怨 : 원래 《예기禮記‧내칙內則》에 나오는 내용이다.부모님께서 과실을 저지르시면 기운을 낮추고 얼굴색을 온화하게 하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말린다. 간하는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공경하고 효도하여 부모님이 기뻐하시면 다시 간한다. 만약 부모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더라도 부모로 하여금 고을에서 죄를 짓게 하느니 차라리 끊임없이 말리는 것이 낫다. 부모님께서 노하여 나를 매질하여 피가 흐르더라도 감히 미워하거나 원망해서는 아니되며 계속해서 공경하고 효도해야 한다.[父母有過 下氣怡色 柔聲以諫 諫若不入 起敬起孝 說則復諫 不說 與其得罪於鄕黨州閭 寧孰諫 父母怒不說而撻之流血 不敢疾怨 起敬起孝]○ 居則致其敬……祭則致其嚴 : 《효경孝經‧전傳7章》에 나온다.子曰 孝子之事親 居則致其敬…… 祭則致其嚴 五者備矣 然後 能事親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거처할 때에는 공경함을 극진히 하고 …… 제사 지낼 때는 그 엄숙함을 극진히 해야 하니 이 다섯 가지가 갖추어진 뒤에야 어버이를 잘 섬긴다고 할 수 있다.
[해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하늘이 정해준 관계이기 때문에 끊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모의 잘못을 그대로 보고 넘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부모님으로 하여금 불의에 빠지게 하는 것은 더 큰 불효를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님이 과실을 저질렀을 때는 적극적으로 말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이다.하지만 말리는 데는 일정한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논어論語‧이인里仁》에는 “부모님을 섬길 때는 기간幾諫해야 한다. 부모님이 따르지 않으시더라도 또 공경하여 어기지 않으며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事父母 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고 했는데 여기서 기간幾諫이란 은미하게 간하는 것으로 부모님의 잘못을 직접 지적하지 않으면서 고칠 수 있도록 은근하게 말리는 태도를 뜻한다.
부모님께 불효하는 자식은 자기 어버이는 사랑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하며, 자기 어버이는 공경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은 공경하며, 사지四肢를 게을리 하여 부모님에 대한 봉양을 돌아보지 않으며, 장기나 바둑,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부모님에 대한 봉양을 돌아보지 않으며, 재물을 좋아하고 처자식만을 사랑해서 부모님에 대한 봉양을 돌아보지 않으며, 이목耳目의 욕망을 좇아 부모를 욕되게 하며, 용맹을 좋아하여 싸우고 사나워서 부모님을 위태롭게 한다.
[출전] ○ 不愛其親……而敬他人 : 《효경孝經‧전傳6章》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자기 어버이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일컫고 자기 어버이는 공경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것을 패례悖禮라고 일컫는다.[不愛其親而愛他人者 謂之悖德 不敬其親而敬他人者 謂之悖禮]○ 惰其四肢……以危父母 : 《맹자孟子‧이루하離婁下》에 맹자가 세속에서 불효라고 일컫는 다섯 가지를 조목별로 열거한 내용이다.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세속에서 이른바 불효라고 하는 것은 다섯 가지가 있다. 사지四肢를 게을리하여 부모님에 대한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불효이며, 장기나 바둑,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부모님에 대한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두 번째 불효이며, 재물을 좋아하고 처자식만을 사랑해서 부모님에 대한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세 번째 불효이며, 이목耳目의 욕망을 좇아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이 네 번째 불효이며, 용맹을 좋아하여 싸우고 사나워서 부모님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다섯 번째 불효이다.[孟子曰 世俗所謂不孝者五 惰其四肢 不顧父母之養 一不孝也 博奕好飮酒 不顧父母之養 二不孝也 好貨財私妻子 不顧父母之養 三不孝也 從耳目之欲 以爲父母戮 四不孝也 好勇鬪狠 以危父母 五不孝也]
[해설] 이 부분은 원래 맹자가 세속에서 불효라고 일컫는 다섯 가지를 인용한 것인데 크게 나누면 부모님을 봉양하지 않는 것,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 부모를 위태롭게 하는 것의 세 가지로 다시 나눌 수 있다. 모두 자식의 게으름이나 방종한 생활을 경계한 것으로 부모님에 대한 봉양뿐만 아니라 부모를 욕되게 하거나 위태롭게 하지 않는 것이 도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사람의 행실이 착한지 아닌지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이 효도하는지 아닌지를 살펴볼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 어버이에게 효도한다면 그 마음을 군신간과 부부간과 장유간과 붕우간에 미루어감에 어떤 경우에 적용한들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효孝는 사람에게 중대한 것이면서 또한 고원高遠하여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해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어떤 인간관계든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다. 전통 유교 윤리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오륜사상五倫思想은 핏줄 의식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그 중에서도 부모는 자녀를 내 몸같이 아끼고 자녀도 부모를 내 몸처럼 아껴야 한다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덕목이 특별히 강조되었다. 부모가 자녀를 내 몸처럼 아끼는 것은 모성애 또는 부성애로 불리는 자연의 정에 의해서 가능했다면, 자녀가 부모를 내 몸처럼 아끼도록 하는 데 큰 힘이 된 것이 효사상孝思想이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가장 우선시했던 척도가 부모에게 효도하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효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근본으로서 숭상을 받았으며 때로는 여기서처럼 개인을 평가할 때 사회적 능력보다도 우선시했던 가장 중요한 척도로 간주되었다.근래 들어 흔히 유교의 효사상을 가족 이기주의 또는 집단 이기주의의 온상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원래 유교에서 강조하는 효는 자기 어버이만을 사랑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어버이도 자기 어버이처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를테면 《예기禮記‧예운禮運》에서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大道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공익公益을 위해서 일하고 어진 사람과 능력있는 사람을 뽑아서 신의信義를 강론하고 화목和睦을 닦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어버이만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는다.[孔子曰……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脩睦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고 했으며 《예기禮記‧제의祭義》에서도 “효에는 세 가지가 있다. 작은 효는 힘을 이용해서 하고 중간 정도의 효는 수고로움을 극진히 하며 큰 효는 〈효를 자기에게만〉 감추어 두지 않고 남에게 물려 준다.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여 힘든 것을 잊는 것은 힘을 썼다고 할 만하고, 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올바른 도리를 편안히 여기는 것은 수고로움을 극진히 했다고 일컬을 만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고 온갖 재화를 갖추는 것은 〈효를 자기에게만〉 감추어 두지 않았다고 일컬을 만하다.[孝有三 小孝用力 中孝用勞 大孝不匱. 思慈愛忘勞 可謂用力矣 尊仁安義 可謂用勞矣 博施備物 可謂不匱矣]”고 하여 자기 어버이만을 사랑하고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는 좁은 범위의 효에서 벗어나는 것이 큰 효임을 강조하고 있다.아울러 《맹자孟子‧양혜왕상梁惠王上》에서도 “우리 어버이를 어버이로 사랑하여 다른 사람의 어버이에게 미쳐가며 우리 아이를 아이로 사랑하여 다른 사람의 아이에게 미쳐가면 천하를 쉽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은혜를 미루어 가면 사해를 보존할 수 있고, 은혜를 미루어 가지 못하면 처자식도 보존하기 어렵다.[老吾老 以及人之老 幼吾幼 以及人之幼 天下可運於掌……推恩足以保四海 不推恩無以保妻子]”고 하여 사랑은 그 대상을 넓혀가는 것이 중요함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다만 그와 같은 대효大孝를 실천할 수 있는 자질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해 나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형성하게 되는 것이므로 일종의 사회적인 학습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立愛 自親始 : 사랑을 확립하는 일은 어버이로부터 시작된다.”는 《예기禮記‧제의祭義》의 구절이나, 《서경書經‧이훈伊訓》의 ‘立愛惟親 : 앞의 입애立愛 자친시自親始와 같은 뜻’과 같은 말이 전통적으로 중시되었다. 곧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정서는 부모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 것이 전통 유학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이가 아니라면 반드시 학문에 의지하여 알 수 있으니 학문하는 목적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장차 고금古今의 사리事理를 통달하여 마음 속에 보존하며 몸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니 학문하는 힘을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역대의 중요한 의리를 뽑아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둔다.
[출전] ○ 生知 : 생지生知는 태어나면서부터 도덕적 이치를 안다는 뜻인데 《논어論語》에 두 곳, 《중용中庸》에 한 곳 보인다.《논어論語‧술이述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재빨리 그것을 추구한 사람이다.[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논어論語‧계씨季氏》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배워서 아는 것이 그 다음이고 막혀서 배우는 것이 또 그 다음이다. 막히는데도 배우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하등下等의 인간이 된다.[孔子曰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중용中庸‧20장章》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며 어떤 사람은 막힌 다음 〈배워서〉 그것을 알지만 알게 됨에 이르러서는 마찬가지이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해설] 여기서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은 반드시 학문을 통해서 계발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나면서부터 도덕적 이치를 아는 생지자生知者인 경우에는 예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학에서 비록 지나간 성인聖人을 생지자로 인정한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생지자로 자처한 사람은 없었다. 이를테면 공자의 경우도 자신은 생지자가 아니며 옛것을 좋아하여 재빨리 그것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했을 뿐이다. 따라서 생지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학문을 통해서 자신의 도덕적 능력을 계발하고 인격을 수양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바람직한 인격을 형성할 때 모두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조한 부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태극이 처음으로 판별되어 음과 양이 비로소 나누어진 시기로부터 오행五行이 서로 생성됨에 먼저 이理와 기氣가 있었다.
사람과 물건이 많이 생성되더니 이에 성인聖人이 먼저 나타나서 하늘의 뜻을 계승하여 인간의 표준을 세웠으니, 천황씨天皇氏와 지황씨地皇氏와 인황씨人皇氏와 유소씨有巢氏와 수인씨燧人氏가 태고시절의 성인이다.
서계書契문자가 나타나기 이전이기 때문에 상고할 수가 없다.
[출전] ○ 繼天立極 : 주희朱熹의 《중용장구中庸章句‧서序》에 나온다. 상고시대의 성인들께서 천도를 이어 인도를 세움으로부터 도통의 전수에 유래가 있게 되었다.[自上古聖神 繼天立極而道統之傳 有自來矣]
[해설] 태극이나 음양, 오행, 이기와 같은 용어는 주자학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태극은 이기理氣의 이理에 해당하며 음양, 오행은 모두 기氣에 해당한다. 또 기氣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며 이理는 본체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인 박세무朴世茂의 경우처럼 태극과 음양, 오행이 차례대로 발생했고 그 이전에 이理와 기氣가 있었다는 설명은 주자학의 세계관을 제대로 설명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따라서 이 부분에서 주자학의 세계관을 설명하려고 했다고 간주하기보다는 다만 초학자들을 위해 관련 용어를 간단히 설명함으로써 태극, 이기 등의 용어가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미리 알려주는 정도의 효과를 의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다. 이어지는 내용은 모두 중국 또는 고대 동아시아의 전설에 기초한 것으로 역사로 기록되기 이전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복희씨가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긋고 서계書契문자를 만들어 결승結繩문자로 시행하던 정사를 대신했고, 신농씨가 쟁기와 보습을 만들며 의술과 약을 만들고, 황제씨가 방패와 창을 사용하며 배와 수레를 만들었으며 달력과 산수를 만들며 음률音律을 제정하셨으니 이들을 삼황三皇이라 일컫는다.
이 때는 사람들의 본성이 지극히 순박했기 때문에 인위적인 정치를 베풀지 않고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출전] ○ 伏羲氏……以代結繩之政 : 공영달孔穎達의 《상서정의尙書正義‧서序》에 나온다.
옛날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에 처음으로 8괘를 긋고 서계書契문자를 만들어 결승結繩문자로 시행하던 정사를 대신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문적文籍이 나타나게 되었다.古者 伏犧氏之王天下也 始劃八卦 造書契 以代結繩之政 由是文籍生焉○ 無爲而治 : 《논어論語‧위영공衛靈公》에 나온다.하는 일 없이 천하를 다스린 사람은 순임금일 것이다. 대체 무엇을 하셨던가? 자신을 공손히 하고 남쪽만 바라보고 계셨을 뿐이다.[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해설] 역시 고대의 전설을 소개한 부분인데 그 중 복희씨와 신농씨에 대한 내용은 우리나라에도 널리 분포되어 있었던 내용이다. 일례로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도 복희씨와 신농씨가 그려져 있으며 민요 가사나 설화에도 수인씨나 신농씨가 자주 등장한다.
소호少昊와 전욱顓頊과 제곡帝嚳과 요임금, 순임금을 오제五帝라 일컫는다.
고요皐陶와 기夔와 직稷과 설契이 요임금과 순임금을 보좌했으니 요임금과 순임금의 다스림이 모든 왕의 으뜸이 되었다.
공자께서 서경書經을 산정刪定하심에 당唐‧우虞시대로부터 단정하셨다.
[해설] 전설의 시대를 지나 역사 기록이 존재하는 시기로 접어드는 부분이다. 공자가 산정했다고 전해지는 《서경》에는 요임금부터 기록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그 이전에도 여러 성인들이 존재했지만 공자가 《서경》을 산정할 때 요임금 때부터 기록하였다고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요임금과 순임금에 대한 기록은 공자 이후 전국시대에 《서경》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그 이전의 전설은 모두 한漢나라 이후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므로 이 내용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믿기는 곤란하다.
하夏나라 우왕과 상商나라 탕왕과 주周나라 문왕‧무왕을 삼왕三王이라 일컫는다.
왕조의 수명이 어떤 경우는 400년이며 어떤 경우는 600년이며 어떤 경우는 800년이었으니 삼대三代 시절에 융성했던 문물을 후세에는 미치지 못했고 상나라의 이윤伊尹이나 부열傅說, 주나라의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모두 뛰어난 신하였다.
주공周公이 예악禮樂을 제작하셨으니 전장典章과 법도가 지극히 찬란하게 갖추어졌다.
[해설]우禹임금이 다스렸다는 하夏나라까지는 기록만 있고 실제로 존재했다는 물증은 아직까지 없다. 또 상商나라에 대한 것도 원래는 기록뿐이었으나 은허殷墟가 발굴됨으로써 역사 시대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28년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역사적 실재 여부와는 별도로 유학에서는 하‧은‧주 삼대三代를 삼대 또는 삼왕三王의 시대로 일컬으며 이상적인 정치, 곧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구현되었던 시기로 간주하였는데, 특히 상나라의 이윤과 부열, 그리고 주나라의 주공과 같은 뛰어난 신하들에 의해 그와 같은 이상 정치가 가능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주周나라가 쇠미함에 미쳐 오패五覇가 제후들을 이끌어 왕실을 바로 세웠으니 이를테면 제나라 환공桓公, 진나라 문공文公, 송나라 양공襄公, 진나라 목공穆公, 초나라 장왕莊王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중국의 맹약을 주도하였으니 왕실의 위엄이 떨쳐지지 못했다.
[출전] ○ 五覇摟諸侯 : 원래 《맹자孟子‧고자하告子下》에서 맹자가 “오패五覇는 제후들을 이끌어 제후들을 공격한 자이다. 그 때문에 오패는 삼왕三王의 죄인이라고 하였다.[五覇者 摟諸侯 以伐諸侯者也 故曰 五覇者 三王之罪人也]”고 오패를 낮추어 평가한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고사] ○ 宋襄之仁 : 송나라 양공襄公의 어짊. 쓸데없는 인정이나 무익한 동정 등을 베푸는 것을 비유한다.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분수도 없이 남을 동정하는 것을 빗대어 일컫는 말로 많이 쓰인다. 춘추시대 송宋나라 양공襄公이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 권卷1》,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22 연年》 등에 소개되어 있다.송나라 양공이 패자가 될 야심을 품고 초나라의 군대와 홍수泓水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을 때의 일이다. 초군은 이 때 양공을 얕잡아 보고는, 적군을 앞에 둔 채 무모하게 강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던 양공에게 재상 목이目夷가 진언했다.“적은 대군大軍이고 아군은 세勢가 약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다 건너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치면 이길 수 있습니다.”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고 초군이 다 건너기를 기다렸다. 홍수를 다 건넌 초군의 진영이 채 정돈되지 않은 틈을 보고 목이目夷가 또 공격을 권했지만 양공은 여전히 듣지 않고 있다가 초군의 전열이 완전히 갖추어진 후에 비로소 출격했다. 결과는 물론 열세劣勢였던 송군의 참패였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깊게 입었다. 여러 사람이 원망하자 양공은 이렇게 말했다.“군자君子가 어찌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을 하겠는가!”양공은 결국 이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죽고 말았다.
세상에서는 이 일을 빗대어 ‘양공의 부질없는 어짊[宋襄之仁]’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해설] 《맹자孟子》에서 “공자를 배우는 사람은 오패五覇에 대해 거론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고 말한 것처럼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지향했던 유학에서는 패도覇道를 천시하였다. 그 때문에 《동몽선습童蒙先習》의 필자도 춘추전국시대를 주나라 천자天子의 위엄이 떨쳐지지 못한 무도한 시대였다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하지만 《논어論語》에서는 오패의 첫번째 인물인 제환공齊桓公을 보좌하여 패도를 이루었던 관중管仲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관중이 오랑캐를 물리쳐 중국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공자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수레를 타고 천하를 주유하셨으나 도道가 세상에서 시행되지 않아서 《시경》과 《서경》을 산정刪定하시며 예禮와 악樂을 결정하시며 《주역》을 해설하시며 춘추를 편수하셔서 지나간 성인을 계승하고 후세의 학자들을 인도하셨고, 그 도를 전수받은 이는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이다.
[출전] ○ 天縱之聖 : 《논어論語‧자한子罕》에서 “태재大宰가 자공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공자)은 성인이십니까? 어쩌면 그렇게도 재능이 많으십니까? 자공이 이렇게 대답했다. 본래 하늘이 거의 성인으로 놓아주셨고 또 재능도 많으시다.[大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라고 했다.○ 轍環天下 :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서 “옛적에 맹자가 변론을 좋아해서 공자의 도가 그 때문에 밝혀졌지만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서 마침내 길에서 늙었다.[昔者孟軻好辯 孔道以明 轍環天下 卒老于行]”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刪詩書……修春秋 :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에 “敍書傳禮記 刪詩正樂 序易彖繫象說卦文言 : 《서경書經》과 《예기禮記》를 서술하고 시詩를 산정하고 음악을 바로잡았으며 《주역》의 단전, 계사전, 상전, 설괘전, 문언전을 차례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繼往聖 開來學 : 공자의 공로를 높이 평가한 내용으로 주희의 《중용장구中庸章句‧서序》에 나온다.지나간 성인의 도道를 잇고 후세의 학자들을 인도해 주신 것은 그 공이 도리어 요순보다 더 높다.[所以繼往聖 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舞者]
[해설] 공자는 이전의 성인들, 곧 요임금이나 순임금과는 달리 임금이 아니었고, 또 주공과 같은 지위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념을 당대에는 시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자들을 양성함으로써 지나간 성인의 도道를 이어서 후세의 학자들을 인도한 계왕개래繼往開來의 공로는 이전의 성인들이 이루지 못한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여기서는 공자의 도를 전수하고 전수한 사람으로 안연과 증삼을 들고 있는데 이는 주자학자들의 도통관을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실제로 《논어論語》에 기술되어 있는 제자들 중에서 안연의 경우는 공자가 스스로 인정한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그러나 안연은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도를 이어주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또 증삼의 경우에는 ‘노둔하다’는 평가를 받은 만큼 도통의 중심에 서기는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증삼은 맹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추존받았으며 당대의 한유韓愈가 〈원도原道〉에서 “자사子思의 학문이 증자에게서 나왔다.”고 규정한 이후 공자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존중되었다. 또 송나라의 정이천程伊川 같은 학자는 “증삼은 노둔魯鈍함으로써 도道를 얻었다.[曾參以魯得之]”고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열국은 노魯‧위衛‧진晉‧정鄭‧조趙‧채蔡‧연燕‧오吳‧제齊‧송宋‧진陳‧초楚‧진秦나라 등이니 방패와 창이 날마다 이어져 전쟁이 끊이지 않아 마침내 전국시대가 되었으니 진秦‧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의 일곱 나라를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일컫는다.
[출전] ○ 干戈日尋 戰爭不息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소공昭公 1년年》에 나온다. 일심간과日尋干戈 이상정토以相征討 : 창과 방패가 날마다 이어져 서로 공격하였다.
[해설]열국列國은 모두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던 제후국들을 지칭한 것이다. 주나라는 천자국이 이들 열국과의 유대와 결속을 유지하면서 천하를 다스리는 봉건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이르러 주나라가 쇠미하게 되자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작은 제후국들이 멸망당하게 되는데 그 결과 전국시대에 이르렀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과정을 혼란 무도한 상황으로 파악하고 있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이 시기에 태어나 《중용中庸》을 저술하셨고, 그 문인의 제자인 맹가孟軻가 제나라와 양나라에서 왕도정치를 진술하셨는데 도가 또 시행되지 못하여 《맹자孟子》 7편을 저술하셨으나, 이단과 종횡과 공리의 학설이 성행해서 우리 유학의 도가 전해지지 못하였다.
[해설] 전국시대에는 자사와 맹자가 활동했지만 당시 제후들의 현실적인 요구는 부국강병을 통해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왕도주의를 내걸었던 유학의 이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제후들의 요구에 가장 적절하게 부합되었던 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변화를 역사적인 발전으로 파악했던 법가法家의 사상이었으며 결국 법가의 정치를 표방한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진시황 시대에 이르러서는 두 주나라를 병탄하고 여섯 제후국을 멸망시키며,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시행하며 시서詩書를 불태우고 유생들을 구덩이 속에 파묻어 죽이니 2대代만에 멸망하였다.
[고사] ○ 焚書坑儒 : 분서갱유의 시작은 기원전 213년, 시황제가 함양궁咸陽宮에 신하를 모아 주연을 베풀었던 일에서 비롯되었다. 그 자리에서 승상 이사李斯가 정치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엄금하고 유교의 경전經典을 포함한 정치성을 띤 서적을 몰수하여 태워 없애야 한다고 건의했다. 진시황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책을 소지하고 다니기만 해도 처벌하는 협서율挾書律을 반포하고, 《진기秦記》 이외의 역사서와, 박사관博士官에 속하지 않고 개인 소유로 되어 있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도 지방관에게 제출하여 30일 이내에 태워 버리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명령이 내려진 후 한 달만에 정부를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금서禁書를 소장하거나 연구, 토론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의약醫藥‧복서卜筮‧농경農耕에 관한 서적은 소각을 면하였다. 이것이 분서焚書사건인데, 이 협서율은 한대漢代에 이르러 혜제惠帝가 철폐할 때까지 계속되었다.이듬해에는 갱유坑儒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시황제는 불로장생을 꿈꾸어 신선술神仙術에 열중하였다. 그는 숱한 방사方士(도교의 수행자)들을 후대하는 한편 그들을 해외로 파견하여 신선과 불사약不死藥을 구해오도록 하였으나, 비용만 들 뿐 돌아오는 자가 없었다. 특히 총애하던 방사인 후생侯生‧노생盧生은 시황제의 행위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그를 비난하고는 도망하여 버렸다. 이 때에 또 그 밖의 다른 방사와 유생儒生들이 진시황의 분서를 공박하자 진노한 진시황은 그의 명령에 이번에는 함양성의 방사와 유생들을 소환하여 엄하게 문초하라고 명하였다. 그 중 정부의 일을 비난하는 등 법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460여 명을 체포해 산 채로 땅을 파고 묻어 버렸는데 이 때 묻힌 이들은 거의가 유학자였으므로, 이 일을 갱유坑儒라고 한다.
[해설] 법가의 통치술을 이용하여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은 사상 유례 없는 가혹한 학술탄압 정책을 시행하여 이후 두고 두고 지식인들의 비판을 받는다. 여기서도 마치 분서갱유 때문에 두 세대만에 망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폄하貶下하여 기록한 것이다.
한나라 고조가 포의布衣로 일어나 황제의 위업을 이루어서 왕조의 수명이 4백년에 이르렀는데 명제明帝 때에 서역西域의 불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유통하여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들을 속였다.
촉한蜀漢과 오吳와 위魏의 세 나라가 솥발처럼 대치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이 의리를 지켜 한나라를 부지하다가 병이 들어 전쟁터에서 죽었다.
[고사] ○ 三顧草廬 : 초가집을 세 번 방문함. 삼국시대 유비劉備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세 번씩이나 찾아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후한 말 한실漢室 부흥을 기치로 군사를 일으킨 유비가 사마휘司馬徽에게 군사軍師로 추대할 만한 인물을 천거해 달라고 청했다. 사마휘는 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 중 한 사람을 얻으라고 권했는데 후에 양양襄陽 땅에 사는 제갈량諸葛亮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알게 된 유비는 당장 예물을 가지고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마침 집에 없었다. 며칠 후 유비는 다시 찾아갔으나, 역시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일부러 피하는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같이 갔던 관우와 장비가 불평하면서 유비를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유비는 세 번째로 제갈공명의 초가집에 찾아갔다. 제갈량은 유비의 열의에 감동하여 마침내 군사軍師가 되기를 허락하였다. 이후로 제갈공명은 과연 기대대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수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제갈량이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에는 이 부분이 “三顧臣於草廬之中 : 〈선제先帝(劉備)께서 세 번이나 초가집에 있는 신臣을 찾아오셨다.”고 표현되어 있다.○ 死諸葛走生仲達 : 《삼국지三國志‧촉지蜀志‧제갈량전諸葛亮傳》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오는 내용이다. 죽은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산 사마중달司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는 뜻으로 오장원五丈原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제갈공명은 자신이 죽은 뒤 위魏의 군대가 공격해 올 것을 알고, 미리 자신의 모양을 본떠 나무인형을 만들게 하여 위군의 공격에 대비하게 했다. 이윽고 제갈공명이 죽은 뒤, 천문을 관측하던 사마중달은 공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촉蜀의 진영으로 공격해 들어갔는데, 촉의 군사들은 미리 준비했던 제갈공명의 목각인형을 맨 앞의 수레에 태우고 그들을 맞이했다. 죽은 줄 알았던 공명이 살아 있다고 생각한 사마중달[司馬懿]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군사를 돌려 도망쳤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도망치게 했다고 말한 것이다. 뒤에 이 말을 전해 들은 사마중달은 “산 사람의 계책이야 내가 헤아릴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의 계책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水魚之交 : 역시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에서 비롯된 말. 물과 물고기의 만남. 곧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군주와 신하의 사이가 친밀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서로 큰 도움이 되는 사이를 수어지교라고도 한다. 《삼국지三國志‧촉지蜀志‧제갈량전諸葛亮傳》의 기록이다. 제갈공명이 은둔해 있을 때 유비는 예의를 다해 세 번 씩이나 그의 집을 찾아감으로써[三顧草廬] 제갈공명을 맞이해 오는 데 성공했다.그런데 관우와 장비가 아직 어린 제갈공명(삼고초려 후 나왔을 때 그의 나이는 27세밖에 되지 않았다)에게 대한 예우가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불평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유비가 자신이 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고기가 물을 얻은 것이나 같다고 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그후 군주와 신하 사이가 서로 다시없이 친밀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해설]한漢나라의 성립과 함께 불교의 수입을 중요한 변화로 다루면서 불교를 혹세무민하는 종교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선조의 건국이 이전 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 불교적 사유思惟를 극복하면서 이루어졌고 또 불교적 사유를 대항 이념으로 파악하는 유학자의 한 사람인 저자著者가 불교의 수입을 부정적으로 파악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이어지는 삼국시대의 역사를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유비劉備의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간주하는 역사관을 적용하고 있는데 이는 진晉의 진수陳壽가 기록한 정사인 《삼국지三國志》의 역사관을 따르지 않고 원말명초元末明初의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역사관을 따른 것으로 역사는 항상 승리자를 중심으로 쓰여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진晉나라가 천하를 다스림에 왕조의 수명이 100여 년에 이르렀는데 다섯 오랑캐나라가 중화를 어지럽히니 송宋‧제齊‧양梁‧진陳에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수隋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왕조의 수명이 30년에 그쳤다.
[해설] 삼국시대 이후 진晉나라가 패권을 차지했다가 이른바 오호五胡에 의해서 중국이 통치되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설명하고 있다. ‘중화를 어지럽혔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최초의 이민족 지배를 달가워하지 않는 저자의 역사관이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또 수隋나라의 경우 왕조의 수명이 30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도 소략한 편이다.
당나라 고조와 태종이 수隋나라 왕실의 어지러움을 틈타 일개 집안을 변화시켜 나라로 만들어 왕조의 수명이 300년에 이르렀다.
후량後梁과 후당後唐과 후진後晉과 후한後漢과 후주後周를 오계五季라고 하니, 아침에 나라를 얻었다가 저녁이면 잃어버려서 크게 혼란함이 극도에 이르렀다.
[해설] 당나라의 통치를 정통으로 받아들여 일개 집안을 변화시켜 나라로 만들었다고 표현한 반면 이어지는 오계五季는 왕조의 수명이 짧다는 이유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말세末世 곧 혼란한 시대였다는 뜻으로 ‘季’자를 붙이고 있다. 특히 조득모실朝得暮失이라고 표현할 만큼 흥망이 거듭되면서 혼란이 극도에 이르렀다고 기술함으로써, 한족漢族으로서 중국 전역을 통치하고 또 오랫동안 유지한 왕조라야 정통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사대적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송나라 태조가 국가를 세운 초기에 다섯 별이 규성奎星에 모여 염濂‧낙洛‧관關‧민閩에 여러 현인들이 배출되었으니,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와 사마광司馬光과 장재張載와 소옹邵雍과 주희朱熹 같은 학자들이 서로 이어 나타나 이 유학의 도를 밝히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로 삼았지만 자기 몸조차도 용납받지 못했다.
주자가 제가諸家의 학설을 모아서 사서와 오경을 주해하셨으니 배우는 자들에게 크게 공을 세웠다.
[해설] 조선조의 건국이념인 유학은 구체적으로는 중국 송대에 일어난 성리학을 지칭한다. 그 때문에 역사를 서술할 때도 송나라에 대해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이다. 특히 송나라의 문치文治를 높이 평가하여 오성취규五星聚奎와 같은 표현을 쓰는가 하면 성리학자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그들의 학문적 성과를 드러내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힘이 강하지 못하여 왕조의 수명이 300년에 그쳤으니 거란과 몽골과 요遼와 금金이 차례대로 침략하고 망조를 드리움에 미쳐 문천상文天祥이 충성을 다하여 송나라에 보답하다가 마침내 연경의 옥에서 죽었다.
[해설]송宋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여 그 멸망을 아쉬워하는 저자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그 때문에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멸망의 순간까지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원元나라에 끝까지 항전했던 문천상文天祥을 거론하면서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랑캐 원元나라가 송宋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면면히 백년을 이어갔으니 오랑캐가 세력을 떨침이 이 때만한 적이 없었다.
하늘이 더러운 덕을 싫어하셨는지라 대명大明이 하늘 한 가운데로 떠올라 성인聖人과 신인神人이 계승하였으니 아! 천만년을 이어가리로다.
[출전] ○ 聖繼神承 於千萬年 : 한유韓愈가 지은 〈평회서비平淮西碑〉에 “[聖子神孫 繼繼承承 於千萬年].”이라고 했는데 이 표현을 축약한 것이다.
[해설]원元나라가 한족漢族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예덕穢德이라고 일컬은 부분에서 원나라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명明나라의 출현을 마치 하늘의 뜻인 양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저자의 사대의식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수립 직후 국가의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웃 강대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 학자들의 한계와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도리는 천지와 더불어 시종始終을 함께하니 삼대三代 이전에는 성스러운 임금, 명철한 군주와 어진 재상과 뛰어난 보좌관들이 서로 함께 강론하여 밝혔다.
그 때문에 다스려진 날이 항상 많았고 어지러운 날이 항상 적었는데 삼대三代 이후에는 용렬한 임금, 어두운 군주들과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신하와 집안의 도리를 해치는 자식들이 서로 함께 그것을 무너뜨렸다.
그 때문에 어지러운 날이 항상 많고 다스려진 날이 항상 적었다.
세상이 다스려지고 어지러우며 편안하고 위태로운 것과 나라가 일어나고 폐지되며 보존되고 멸망하는 까닭은 모두 인륜人倫이 밝혀졌느냐 밝혀지지 않았느냐가 어떠한지에서 말미암는다.
[해설] 삼강 오상의 도리, 곧 인륜성人倫性이 천지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강조하면서 그것을 드러내 밝히는 것이 통치자들의 의무라고 보고 있다. 특히 삼대시절까지는 통치자들이 인륜을 잘 드러내 밝혔기 때문에 세상이 잘 다스려졌고, 그 이후에는 통치자들의 무능으로 인륜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워졌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어서 세상이 다스려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인륜이 밝혀졌느냐 아니냐에 따른 것이므로 인륜을 잘 살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동방에 처음에는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의 아들을〉 임금으로 삼았다.
요堯임금과 동시대에 즉위하여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했으니 이가 단군檀君이다.
[출전] ○ 우리나라 고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내용 중 대부분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온다.
[해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여 단군조선의 건국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특히 신인神人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다는 기록을 그대로 실은 것으로 보아 저자는 단군신화를 기록하지 않은 《삼국사기三國史記》보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근거로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周나라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기자가〉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쳐서 여덟 조목의 가르침[八條之敎]을 베풀었으니 어진 사람 기자의 교화가 있었다.
[고사] ○ 箕子朝鮮 : 중국에서 은殷나라가 주周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은의 신하였던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세웠다고 전해지는 나라이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은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등에 나타나는데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조선시대까지는 거의 인정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서 부인되고 있다. 왜냐하면 기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기원전 1211년 경인데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는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저술된 것이기 때문에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본국이 자리잡고 있었던 황하유역의 문명을 전파했을 것이므로 한반도의 문명에 그런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한반도의 문명은 황하유역의 그것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독립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보고 고대에 조선까지 지배했다는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 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해설] 지금은 기자조선의 존재가 부인되고 있지만 이 글의 저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기자가 조선에 와서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기자조선을 인정했는데 그 이유는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공자가 기자를 인자仁者로 인정했기 때문에 그런 인물의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노관盧綰의 난리를 피하여 망명해 와서 기준箕準을 유인하여 쫓아내고 왕검성王儉城을 차지하였는데 손자인 우거왕右渠王대에 이르러 한나라 무제가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분할하여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菟‧진번眞蕃의 사군四郡을 만들었다.
소제昭帝가 평나平那와 현도를 합쳐서 평주平州로 만들고 임둔과 낙랑을 동부의 두 도독부都督府로 만들었다.
[해설] 위만조선의 성립과 멸망, 그리고 한사군漢四郡의 설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대립을 놓고 위만조선의 입장에서 글을 쓰기보다는 한나라 무제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저자의 역사인식이 중국 중심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며 그 때문에 우리 역사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준箕準이 위만을 피해 바다에 떠서 남쪽으로 내려와 금마군金馬郡에 정착했으니 이것이 마한馬韓이다.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이 노역을 피하여 한韓나라로 들어오자 한韓나라가 동쪽 영토를 분할하여 제공하니 이것이 진한辰韓이다.
변한弁韓은 한韓나라의 영토에 나라를 세웠으니 그 시조와 연대를 알 수 없다.
[해설]삼한三韓의 성립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삼한의 성립이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대부분 중국의 기록에 의존하여 추측하고 있을 뿐으로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진한의 영토에 도읍을 정하여 박朴을 성씨로 삼고,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朱蒙은 졸본卒本땅에 이르러 스스로 고신高辛씨의 후예라고 일컬어 그에 따라 고高를 성씨로 삼았고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는 하남河南땅 위례성慰禮城을 도읍지로 정하여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아서 삼국이 각각 한 모퉁이를 차지하여 서로 공격하였다.
[해설]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성립에 관 : 명하고 있다. 특히 삼국의 시조에 관해 소략하게나마 언급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기록은 대부분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근거로 삼아 서술한 것이다.
그 뒤에 당나라 고종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분할하여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유인원劉仁願과 설인귀薛仁貴로 하여금 머물러서 진무케 하였으니 백제는 왕조의 수명이 678년에 이르렀고 고구려는 705년이었다.
[해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는데 두 나라를 멸망시킨 주체가 당나라인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실제로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는데 이런 사실을 기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역시 저자가 중국중심 사관에 얽매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신라의 말기에 궁예弓裔가 북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고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완산주完山州를 점거하여 스스로 후백제後百濟라고 일컬었다.
신라가 멸망하니 박朴‧석昔‧김金의 세 성씨가 서로 왕위를 전수하여 왕조의 수명이 992년에 이르렀다.
[해설] 궁예와 견훤의 등장으로 이른바 후삼국이 성립되고 그에 따라 신라가 멸망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위계승 과정이 박朴‧석昔‧김金 세 성姓에 의해 이어졌다고 기록한 점이 이채롭다.
태봉泰封의 여러 장수들이 고려의 시조 왕건을 세워서 왕으로 삼으니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고 하여 여러 흉악한 인물들을 이겨 없애고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도읍을 송악松嶽으로 옮겼다.
고려의 말년에 이르러 공민恭愍에게 후사後嗣가 없고 가짜 임금 신우辛禑가 어둡고 포악하며 스스로 방자하였으며 공양恭讓이 임금 노릇을 못하여 마침내 망하기에 이르니 왕조의 수명이 475년이었다.
[해설] 고려의 성립과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왕건이 흉악한 무리를 이겨 없앴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의 성립 자체를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 말엽에 이르러 공민왕에게 후사가 없었다고 기록하면서 조선조 성립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있다. 실제로 공민왕에게는 아들인 왕우王禑가 있었지만 조선조 건국 세력들은 왕우王禑가 신돈辛旽의 자식이라고 강변하여 공민왕에게 후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그러나 왕우가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내용은 의심의 여지가 많다. 왜냐하면 당시 우왕을 임금으로 섬겼던 이색이나 정몽주 같은 신하들은 모두 유학자로서 만약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의혹이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면 그들이 신하로 자처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몰아간 것은 신왕조 성립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세력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천명天命이 진정한 군주에게 돌아가니 명明나라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고쳐 내리자 한양에 도읍을 정하여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손들이 끊임없이 계승하여 거듭 빛내고 여러 차례 스며들어서 지금에 이르니 실로 만세토록 끝없을 아름다움이로다.
[해설] 조선조 건국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조선조 건국의 정당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저자로서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천명天命이 조선의 태조太祖에게 돌아갔다고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어서 명明나라 태조에게 국호를 인가 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국가를 수립하는 초기에 이웃 나라이자 강대국이었던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현실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비록 궁벽하게 바다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영토가 편소褊小하지만 예악법도와 의관문물을 모두 중화의 제도를 따라 인륜이 위에서 밝혀지고 교화가 아래에서 시행되어 풍속의 아름다움이 중화中華를 방불하였다.
이 때문에 중화인들이 우리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컬으니 이 어찌 기자箕子가 끼쳐준 교화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 너희 소자小子들은 의당 보고 느껴서 흥기興起할지어다.
[해설] 앞에서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느냐 아니냐의 관건이 인륜人倫이 밝혀졌느냐 아니냐에 있다고 주장한 저자로서는 조선조의 초기에 인륜이 위에서 밝혀지고 교화가 아래 백성들에게서 시행되었다고 언급한 것은 통치의 성과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라 하겠다. 특히 국토가 편소함에도 불구하고 예악과 제도를 중화의 제도를 따랐다고 한 것은 당시의 지식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문화적 자부심을 엿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런 자부심의 근거가 중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소중화라고 일컫는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주체적인 역사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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