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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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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경잡기(西京雜記)》는 한(漢)나라 유흠(劉歆)이 짓고 진(晉)나라 갈홍(葛洪)이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전형적인 잡록식의 필기문헌으로, 총 132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 짤막한 고사지만 그 내용은 매우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2. 저자

(1) 성명:유흠(劉歆(B.C. 53?~A.D. 23))
(2) 자(字)・별호(別號):일명 유수(劉秀), 자는 자준(子駿) 또는 영숙(穎叔)이다.
(3) 출생지역:경조군(京兆郡) 장안현(長安縣(현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유흠은 서한의 문학가이자 목록학자로 유향(劉向)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서(詩書)를 암송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성제(成帝) 때 왕망(王莽)과 함께 황문랑(黃門郞)이 되어 왕망의 중시를 받았다. 하평(河平) 4년(B.C. 26)에 부친과 함께 비서(秘書)를 교정하라는 명을 받고 육경(六經)‧전기(傳記)‧제자(諸子)‧시부(詩賦)‧술수(術數)‧방기(方技) 등의 전적을 모두 연구했다. 유향이 죽은 뒤 중루교위(中壘校尉)를 지냈다. 애제(哀帝) 때는 대사마(大司馬) 왕망의 추천으로 시중태중대부(侍中太中大夫)가 되었다가 기도위(騎都尉)로 전임되었고, 봉거광록대부(奉車光祿大夫)에 임명되어 부친의 전업(前業)을 마쳤다. 왕망이 제위를 찬탈한 뒤 그를 국사(國師)로 모셨다. 나중에 왕망이 그의 세 아들을 죽이고 남양(南陽)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왕망 주살을 모의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자살했다. 그는 부친 유향의 《별록(別錄)》을 개편하여 《칠략(七略)》을 지었는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는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완성된 것이다. 《한서》 권36 〈초원왕전(楚元王傳)〉에 그의 전(傳)이 있다.
(5) 주요저작:《칠략(七略)》‧《삼통력보(三統曆譜)》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총 132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고, 각 고사마다 제목이 달려 있다. 권수(卷數)는 판본에 따라 다른데, 6권본이 주종을 이룬다. 현존하는 주요 판본을 시대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송판서경잡기(宋版西京雜記)》본(6권) : 원제(原題)는 “송판”이라 되어 있지만, 사실은 명(明) 가정(嘉靖) 연간 야죽재본(野竹齋本)으로, 《사고간명목록표주(四庫簡明目錄標注)》에 수록되어 있는 명 가정 원년(1522) 심여문(沈與文) 교간본이다.
• 《사부총간(四部叢刊)》본(6권) : 명 가정 임자년(壬子年)(1552) 공천윤(孔天胤) 간본을 영인했다.
• 정각(程刻) 《한위총서(漢魏叢書)》본(6권) : 명 만력(萬曆) 12년(1584) 정영(程榮) 각본이다.
• 《패해(稗海)》본(6권) : 명 만력 연간 회계(會稽) 상준(商濬) 반야당(半埜堂) 교간본이다.
• 《진한도기(秦漢圖記)》본(6권) : 명 만력 30년(1602)에 섬서(陝西) 포정사사(布政使司)에서 만력 을유년(乙酉年(1585))의 여릉(廬陵) 곽자장(郭子章) 집본(輯本)을 중간했다.
• 만력본(6권) : 명 만력 연간 각본이다.
• 《고금일사(古今逸史)》본(6권) : 명 신안(新安) 오관(吳琯) 교간본으로, 공천윤 간본과 동일한 계통으로 추정한다.
• 《역대소사(歷代小史)》본(1권) : 함분루영인명각본(涵芬樓影印明刻本)으로, 공천윤 간본을 번각(翻刻)한 것으로 추정한다.
• 《진체비서(津逮秘書)》본(6권) : 명 숭정(崇禎) 연간 호남(湖南) 모진(毛晉) 급고각(汲古閣) 각본으로, 《패해》본을 번각했다.
• 하각(何刻) 《한위총서》본(6권) : 명 하윤중(何允中) 집본(輯本)으로, 공천윤 간본과 동일한 계통으로 추정한다.
• 《포경당총서(抱經堂叢書)》본(2권) : 청(淸) 건륭(乾隆) 연간 노문초(盧文弨) 교간본이다.
•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본(6권) : 청 건륭 41년(1776) 간본이다.
• 왕각(王刻) 《한위총서》본(6권) : 청 왕모(王謨) 각본으로, 하각 《한위총서》본을 번각했다.
• 《용위비서(龍威秘書)》본(6권) : 청 마준량(馬俊良)의 집간본(輯刊本)으로, 하각 《한위총서》본을 번각했다.
• 《학진토원(學津討原)》본(6권) : 청 장해붕(張海鵬) 조광각(照曠閣) 교각본(校刻本)으로, 《진체비서》본을 번각했다.
• 《예원군화(藝苑捃華)》본(6권) : 청 동치(同治) 7년(1868) 무본당각소홍태열본(務本堂刻邵鴻泰閱本)이다.
• 《정각루총각(正覺樓叢刻)》본(2권) : 청 광서(光緖) 연간 숭문서국(崇文書局) 간본으로, 《포경당총서》본을 복각했다.
• 《용계정사총서(龍溪精舍叢書)》본(2권) : 민국(民國) 6년(1917) 조양(潮陽) 정국훈(鄭國勳) 간본으로, 《포경당총서》본을 복각했다.
• 《관중총서(關中叢書)》본(2권) : 민국 23년(1934) 섬서(陝西) 통지관(通志館) 배인본(排印本)으로, 《포경당총서》본을 복각했다.

4. 내용

《서경잡기》는 ‘필기(筆記)’ 형식으로 기록된 것으로 대부분 짤막한 고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매우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기록된 인물은 제왕장상(帝王將相)‧공경대신(公卿大臣)‧비빈궁녀(妃嬪宮女)‧문인학사(文人學士)‧명공명장(名工名匠)‧일반백성 등이며, 기록된 일은 궁중일사(宮中逸事)‧전장제도(典章制度)‧풍속습관‧궁원진기(宮苑珍器)‧기인묘기(奇人妙技) 등이다. 따라서 《서경잡기》를 통해 서한의 정치‧경제‧문학‧문화‧민속 등 여러 방면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첫째, 궁전 건축물과 궁중 생활에 대한 기록. 이러한 내용은 《서경잡기》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서한은 정치‧경제‧군사‧문화 등의 방면에서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물질생활이 풍부하고 사치스러웠다. 따라서 누대(樓臺)‧전실(殿室)‧원지(苑池)‧유포(囿圃) 등의 궁정 건축물이 대대적으로 축조되었는데, 《서경잡기》에는 이러한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서경잡기》에는 궁중 생활을 반영한 고사가 적잖이 들어 있다. 이러한 고사는 주로 제왕을 비롯한 왕공귀족 등 통치자들의 사치스럽고 음탕한 면모를 묘사하고 있다.
둘째, 문인 일사와 그 작품에 대한 기록. 《서경잡기》에 수록된 문인 일사는 문인들의 학술전승‧학문태도‧창작활동‧교유행적 등이 매우 폭넓게 기술되어 있다.
셋째, 전장제도에 대한 기록. 《서경잡기》에는 종묘 제사의 의례(儀禮), 제왕 장례시의 염복(殮服), 황제의 대가(大駕) 행렬, 황태자 속관(屬官)의 칭호 등 한대의 예악제도(禮樂制度)와 정치제도를 보여주는 고사가 들어 있다.
넷째, 사회 풍속습관에 대한 기록. 《서경잡기》에는 한대 상하 각 계층에서 성행했던 풍속습관으로, 7월 7일 칠석날, 9월 9일 중양절(重陽節), 3월 상사일 삼짇날에 행하는 여러 가지 세시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에 유행했던 각종 오락 활동이 기록되어 있으며, 사냥을 즐기고 개와 말을 키우길 좋아하던 한대인의 풍속이 잘 반영되어 있다.
다섯째, 기문이사(奇聞異事)에 대한 기록. 《서경잡기》에는 신비한 색채를 띤 지괴적인 고사가 들어 있는데, 수량은 많지 않지만 독자들에게 신기함과 흥미를 유발시키는 내용이다.
이밖에도 상만등(常滿燈)‧피중향로(被中香爐)‧구층박산향로(九層博山香爐)‧칠륜선(七輪扇) 등 기묘한 기물들은 한대 명장들의 절묘한 건축술과 공예술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일부 고사에는 일종의 철학적인 담론도 담겨 있다.

5. 가치와 영향

우선 문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서경잡기》는 잡기체(雜記體) 필기소설의 대표작으로 위진남북조 지인소설(志人小說)과 지괴소설(志怪小說)은 물론이고 멀리 명청대 소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대 부(賦)의 대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양웅(揚雄) 등의 작부(作賦) 능력과 창작과정 및 작품에 얽힌 일화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서, 한대 문인들의 문학 견해를 엿볼 수 있으며 문학 사료도 비교적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리고 일부 고사는 후대의 시인‧사인(詞人)‧희곡가(戱曲家) 등 여러 문인들이 제재와 전고로 즐겨 사용하여 그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에 중국문학의 여러 제재 근원 가운데 하나를 밝히는 데에도 매우 유용한 가치가 있다.
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서경잡기》는 종래로 정사(正史)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는 사료적인 특성이 부각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기술된 내용의 사실성이 입증되면서 그 가치를 주목받고 있다.
《서경잡기》가 언제 처음으로 국내에 전래되었는지 그 정확한 시기는 규명하기 어렵지만, 대략 고려 선종(宣宗) 때인 약 1100년경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다 분명한 기록은 조선 숙종(肅宗) 46년(1720)에 간행된 《오륜전비언해(伍倫全備諺解)》의 인용서목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숙종 22년(1696)에 언해에 착수해 24년 뒤인 숙종 46년(1720)에 완성되었다. 따라서 《서경잡기》는 1696년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어떤 사람이 양웅에게 부 짓는 것에 대해 물었더니, 양웅이 말하길 ‘천 편의 부를 읽어야만 비로소 부를 지을 수 있다.’라고 했다.[或問揚雄爲賦 雄曰 讀千首賦 乃能爲之]” 《서경잡기(西京雜記)》 권2 〈독천부내능작부(讀千賦乃能作賦)〉
• “두릉 지방의 두부자는 바둑을 잘 두었는데 그 솜씨가 천하제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시간만 허비한다고 비난하자, 두부자가 말하길 ‘그 이치에 정통하면 충분히 성인의 교화에 큰 보탬이 되지요.’라고 했다.[杜陵杜夫子善弈棊 爲天下第一 人或譏其費日 夫子曰 精其理者 足以大裨聖敎]” 《서경잡기》 권2 〈정혁기비성교(精弈棊裨聖敎)〉
• “토기 저금통은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돈을 저축하는 기구인데, 그것은 돈을 넣는 구멍은 있어도 빼내는 구멍은 없어서 가득 차면 깨뜨려야 하오. 흙은 하찮은 물건이고 돈은 귀중한 재물이오.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 않으며, 쌓이기만 하고 흩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오. 선비 가운데 재물을 긁어모으기만 하고 베풀 줄을 모르는 자는 장차 토기 저금통처럼 깨뜨려지는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소?[撲滿者 以土爲器 以畜錢具 其有入竅而無出竅 滿則撲之 土 麤物也 錢 重貨也 入而不出 積而不散 故撲之 士有聚歛而不能散者 將有撲滿之敗 可不誡歟]” 《서경잡기》 권5 〈추장천증유유도(鄒長倩贈遺有道)〉
(2) 색인어:서경잡기(西京雜記), 유흠(劉歆), 갈홍(葛洪), 서한(西漢), 필기(筆記)
(3) 참고문헌
• 《서경잡기》(김장환 역, 예문서원)
• 《서경잡기》(임동석 역, 동문선)
• 《西京雜記校注》(向新陽‧劉克任, 上海古籍出版社)
• 《西京雜記全譯》(成林‧程章燦, 貴州人民出版社)
• 《新譯西京雜記》(曹海東, 三民書局)
• 《記錄文學集》(飯倉照平 역, 平凡社)
• 《Das Hsi-ching tsa-chi, Vermischte Aufzeichungen über die Westliche Hauptstadt》(Heeren-Diekhoff Elfie 역, Ludwig-Maximilians Universität)

【김장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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