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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注疏》는 《論語》의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注釋書이다. 南宋 말엽 光宗 紹熙 연간(1190~1194)에
十三經 에 대한 권위 있는 注釋을 선정하여 국가적 사업으로 十三經注疏를 간행하였다. 이때 《논어》의 대표적 주석서로 三國시대 魏나라 何晏(?~249)의 《論語集解》와 《論語集解》를 상세히 敷演하고 考證한 宋나라 邢昺(932~1010)의 《論語正義》가 선정되었다. 이 두 책이 합본되어 《論語注疏解經》이라는 명칭으로 간행되었으며, 보통 《論語注疏》라고 부른다.
《論語注疏》는 朱熹의 《論語集註》와 함께 현재까지 《논어》의 대표적 주석서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論語集解》와 《論語正義》의 원본은 전하지 않고, 십삼경주소에 수록된 본이 전해진다. 십삼경주소는 여러 차례 간행되었는데 그중 淸나라 때의 학자 阮元(1764~1849)이 《校勘記》를 붙여 간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1. 《論語注疏》의 書名
《論語注疏》의 서명을 이해하기 위해 ‘注疏’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다.
‘注’는 經典의 난해한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注釋을 뜻한다. 막힌 水路에 물을 注入하여 소통시킨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注의 내용은 經典에 실린 글자나 단어의 뜻풀이를 비롯해 經典이 내포한 의미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注’를 ‘註’라고 표기하기도 하는데 의미는 다르지 않다. 그런데 淸나라 段玉裁는 《說文解字注》에서 “漢‧唐‧宋 학자들이 經典의 주석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글자에 ‘註’라고 쓴 것이 없는데, 明나라 사람들이 ‘注’를 ‘註’라고 바꾸어 쓰기 시작하였으니 古義에 크게 어긋난다.”
라고 하여, ‘注’라고 쓰는 것이 原義에 충실한 표현이라고 하였다. ‘註’는 원래 ‘기록하다’는 의미이다.
經典註釋學에서는 注를 ‘古注’와 ‘新注’로 구분한다. ‘古注’는 대개 漢‧唐代에 이루어진 經典 주석을 말하고, ‘新注’는 南宋 때의 程顥(1032~1085)‧程頤(1033~1107)와 朱熹(1130~1200)의 經典 주석을 일컫는다. 程顥‧程頤와 朱熹의 주석을 ‘新注’라고 부름으로써 ‘古注’는 ‘新注’의 상대적 개념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古注와 新注는 주석의 내용과 성격이 매우 다르다. 古注는 經典의 글자와 文句의 의미를 정확하게 풀이하는 데 집중하였으므로, 經典의 내용을 액면대로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익하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경전이 내포한 철학적 가치와 논점을 규명하는 데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 이것은 訓詁에 집중한 漢代의 학문 경향이 반영된 주석 방법인데, 이러한 학문 경향을 ‘漢學’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新注는 經典이 지닌 철학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역시 程‧朱에 의해 주도된 宋代의 학문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이를 ‘宋學’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경향은 각각 장단점이 있으나, 朱熹의 新注 역시 訓詁면에서는 古注를 많이 참고하였다. 따라서 古注에 대한 이해는 經典을 이해하기 위한 근본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疏’는 ‘注’에 대한 再注釋을 말한다. ‘疏’는 ‘通하게 하다’, ‘疏通시키다’라는 의미로, ‘注’만으로 經典의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을 보다 명확하게 풀이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注’는 경전에 대한 1차적 풀이이고, ‘疏’는 ‘注’의 의미를 부연한 2차적 풀이이다. ‘疏’를 ‘義疏’ 또는 ‘正義’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論語注疏》라는 명칭은 《論語》에 대한 注와 疏가 합본된 책임을 의미한다. 그 대상으로 《論語集解》와 《論語正義》가 선정되었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注疏’가 하나의 명칭으로 쓰이게 된 嚆矢 역시 十三經注疏이다.
《論語》 注釋은 漢나라 때부터 淸나라 말까지 총 1,100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중 何晏의 《論語集解》, 梁나라 皇侃(488~545)의 《論語義疏》, 邢昺의 《論語正義》, 朱熹의 《論語集註》를 ‘4대 주석’이라고 부른다. 또 淸나라 劉寶楠(1791~1855)의 《論語正義》 역시 중요한 주석서로 꼽힌다. 漢‧魏 시대에 나온 《論語》 古注가 몇 종 있는데, 孔安國‧包咸‧周氏‧馬融‧鄭玄과 陳群‧王肅‧周生烈 등이 지었다. 현재 이 책들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論語鄭氏注》로 불리는 鄭玄(127~200)의 주석은 최근 敦惶 新疆省 吐魯番 등지에서 唐나라 때의 寫本이 발견되어 원래 모습의 반 정도가 복원되었다. 사라진 《論語》 古注의 내용은 《論語集解》에 상당 부분 수용되어 있다.
본 해제의 서술과 긴밀하게 연관되기에, 皇侃의 《論語義疏》에 대해 잠시 설명하고자 한다. 《論語義疏》는 원래 명칭이 《論語集解義疏》이다. 皇侃이 《論語集解》에 인용된 諸家의 古注를 모으고 새로 수집한 漢‧魏 이래 諸家의 說을 덧붙여 완성한 것으로, ‘皇疏’라고 일컫는다. 이 책은 南宋 초에 중국에서 사라졌는데, 邢昺의 《論語正義》가 세상에 유행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唐代에 일본으로 전해진 판본이 1750년에 荻生徂徠의 제자 根本遜志에 의해 일본에서 간행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1788년 鮑廷博이 《知不足齋叢書》에 포함하여 간행함으로써 중국에 역수입되었다. 《論語義疏》는 引證한 내용이 광범위하고 《論語》 古注의 내용을 상당량 수용하고 있기에 ‘4대 주석’에 포함된 것이다. 그런데 皇侃의 학문경향이 老莊에 기울었으므로, 인용한 설이나 자신의 설 모두 老莊에 치우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2. 《論語注疏》의 著者:何晏과 邢昺
1) 何晏
何晏(?~249)의 字는 平叔이며, 태어난 곳은 南陽苑(지금의 河南省 南陽)이다. 다음은 〈何晏列傳〉의 全文이다.
何晏은 何進의 손자이다. 어머니 尹氏가 太祖(曹操)의 부인이 되었기에 하안은 皇宮에서 성장하였고 또 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다고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老莊의 학설을 좋아하여 《道德論》과 여러 文賦를 지었다. 저술은 모두 수십 편이다.
何晏의 조부 何進(?~189)은 원래 백정 출신으로 알려졌다. 異腹 여동생이 宮女로 선발되어 東漢 靈帝의 총애를 받아 皇后로 책봉되자 侍中에까지 올랐다가, 中平 6년(189)에 十常侍들에게 피살되었다. 《後漢書》에 列傳이 있다. 何晏의 부친은 이름이 咸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사적이 없다. 何晏의 모친 尹氏는 何咸이 죽은 뒤 曹操의 부인이 되었으므로 何晏은 자연스럽게 宮中에서 성장하였다.
何晏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老子》와 《周易》에 대해 훌륭한 담론을 펼쳤으며, 《詩經》, 《書經》, 《大學》, 《論語》 등 儒家 經典에 정통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曹操의 총애를 받아 曹操의 딸 金鄕公主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거만하여 함께 생활하던 曹丕에게 미움을 받았고, 曹丕가 왕으로 있던 黃草 연간과 明帝의 재위 시절에는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였다. 明帝가 죽고 齊王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당시의 실권자였던 曹爽에게 영합하여 吏部尙書에까지 올랐다. 이때가 正始 年間(240~249)이다.
何晏은 正始 年間에 권력의 핵심에 있으면서 司馬懿의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불러 모아 吏部의 관직에 기용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젊은 학자였던 王弼(226~249)과 함께 ‘玄學’으로 불리는 학문 思潮를 일으켰다. ‘玄學’이란 道家哲學을 지칭하는 말로, 老莊의 재해석과 老莊으로 《周易》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儒家와 道家사상을 會通시켜 ‘貴無論’의 철학 체계를 세운 思潮를 말한다. 이를 ‘正始之風’이라고 한다.
何晏이 《論語集解》를 지은 것도 바로 이 시기인데, 구체적으로는 正始 6년(245)으로 추정된다.
何晏이 《論語集解》를 편찬한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되는 것은, 齊王이 《論語》를 애호하여 당시 여러 학자들이 訓說을 짓자 이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老莊思想에 경도된 何晏이었지만 《論語集解》에는 그런 성향이 많이 반영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何晏은 권력의 핵심에서 당시의 학문 사조까지 주도했지만, 249년에 曹爽이 司馬懿에게 죽임을 당하자 함께 처형되었다. 저서로 《論語集解》 외에 《道德論》, 《孝經注》, 《周易講說》 등이 있었는데, 현재 《論語集解》만 전한다.
2) 邢昺
邢昺(932~1010)의 字는 叔明이고 曹州 濟陰(지금의 山東 曹縣) 사람이다. 《宋史》에 그의 列傳이 수록되어 있는데, 家系나 先代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邢昺은 太平興國(宋 太宗, 976~984) 초 廷試에 급제한 뒤, 國子監丞으로서 講學의 임무를 전담하였다. 또 國子博士가 되어 太宗의 아들들에게 《孝經》, 《論語》, 《禮記》, 《尙書》, 《周易》, 《詩經》, 《春秋左氏傳》을 강론하는 등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邢昺의 생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업적은 眞宗 咸平 2년(999)에 翰林侍講學士가 되어 詔書를 받들고 杜鎬‧舒雅‧孫奭‧李慕淸‧崔偓佺 등과 함께 《周禮》, 《儀禮》, 《春秋公羊傳》, 《春秋穀梁傳》, 《孝經》, 《論語》, 《爾雅》의 義疏를 校定한 일이다. 이 義疏 중 《孝經義疏》, 《論語義疏》, 《爾雅義疏》는 邢昺 등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古文眞寶》 첫머리에 宋 眞宗의 〈勸學文〉이 수록되어 있음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眞宗은 당시 학문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邢昺으로 대표되는 발군의 학자들의 노력으로 이 무렵 經典 注疏 작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眞宗 景德 2년(1005), 眞宗과 邢昺의 대화는 그 상황을 잘 보여주므로 소개해둔다.
이해(1005) 여름에 上이 國子監에 행차하여 書庫의 책을 열람하며 邢昺에게 經板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邢昺이 말하기를 “國初에는 4천이 못 되었는데 지금은 10여 만이나 되어, 經과 傳과 正義가 모두 갖추어졌습니다. 제가 어려서 스승을 모시며 儒學을 배울 때 經典에 疏가 갖추어진 것이 백에 한둘도 없었으니, 인력의 한계로 인해 疏까지 傳寫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板本이 성대히 갖추어져 士庶의 집에까지 모두 있으니, 이것은 바로 儒者가 때를 만난 행운입니다.”라고 하였다.
3. 《論語注疏》의 篇章 구분 및 구성 방식
1) 《論語注疏》의 篇章 구분
《論語注疏》의 篇章 구분은 우리에게 익숙한 朱熹의 《論語集註》와 비교하는 것이 그 차이를 드러내는 데 편리하다. 이 두 책은 20篇의 편 구분은 동일하며, 각 편 내의 章 구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간략히 도표로 제시한다(《集註》는 《論語集注》, 《注疏》는 《論語注疏》를 가리킴).
篇名 | 章數 | 비고 |
注疏 | 集註 |
學而 | 16장 | 16장 | 동일 |
爲政 | 24장 | 24장 | 동일 |
八佾 | 26장 | 26장 | 동일 |
里仁 | 26장 | 26장 | 동일 |
公冶長 | 28장 | 27장 | 《集註》 제1장의 “子謂南容”이 《注疏》에는 제2장으로 독립 |
雍也 | 30장 | 28장 | 《集註》 제1장의 “仲弓問子桑伯子”가 《注疏》에는 제2장으로 독립《集註》 제3장의 “原思爲之宰”가 《注疏》에는 제5장으로 독립 |
述而 | 38장 | 37장 | 《集註》 9장의 “子於是日 哭則不可”가 《注疏》에는 제10장으로 독립 |
泰伯 | 21장 | 21장 | 동일 |
子罕 | 30장 | 30장 | 《集註》 제6장의 “牢曰 吾不試 故藝”가 《注疏》에는 제7장으로 독립《集註》 제30장의 “唐棣之華……室是遠而”가 《注疏》에는 제30장에 포함 |
鄕黨 | 21장 | 17장 | 차이가 많아 설명 생략 |
先進 | 24장 | 25장 | 《集註》 제2장의 “德行 顔淵閔子騫……”이 《注疏》에는 제3장으로 독립《集註》 제18장 전체가 《注疏》에는 제18장에 포함《集註》 제20장 전체가 《注疏》에는 제19장에 포함 |
顔淵 | 24장 | 24장 | 동일 |
子路 | 30장 | 30장 | 동일 |
憲問 | 44장 | 47장 | 《集註》 제2장 전체가 《注疏》에는 제1장에 포함《集註》 제28장 전체가 《注疏》에는 제26장에 포함《集註》 제40장 전체가 《注疏》에는 제37장에 포함 |
衛靈公 | 42장 | 41장 | 《集註》 제1장 “明日遂行”부터 《注疏》에는 제2장으로 독립 |
季氏 | 14장 | 14장 | 동일 |
陽貨 | 24장 | 26장 | 《集註》 제3장 전체가 《注疏》에는 제2장에 포함《集註》 제10장 전체가 《注疏》에는 제9장에 포함 |
微子 | 11장 | 11장 | 동일 |
子張 | 25장 | 25장 | 동일 |
堯曰 | 3장 | 3장 | 동일 |
계 | 501장 | 498장 | 《注疏》가 《集註》보다 총 3章이 더 많음 |
2) 《論語注疏》의 구성 방식
《論語注疏》의 구성 방식은 우선 각 편이 시작되는 첫머리에 해당 편의 大義를 제시하는데, 이것은 ‘疏’에 해당한다. 그리고 《논어》 원문을 제시한 뒤, 원문 각 구절 아래에 《論語集解》의 注를 붙였다. 그 아래에 《논어》 원문에 대한 疏를 붙였는데, 여기서도 각 章에 대한 大義를 먼저 제시한 뒤 글자나 어구를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論語集解》의 注를 풀이한 疏를 붙였는데, 각 구절에 대해 邢昺 자신의 견해를 붙이기도 하고, 注의 내용에 대해 상세히 고증하기도 하였다. 그 방식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①각 편의 첫머리에 大義 설명
②《論語》 經文 제시
③《論語》 經文에 대한 《論語集解》 注 제시
④《論語》 經文에 대한 疏
⑤《論語集解》 注에 대한 疏
위의 ③은 注, ① ④ ⑤는 疏에 해당한다. 〈學而〉편을 예로 들어 구성 방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각 편의 첫머리에 大義 설명
(원문의 표점과[ ]표시는 讀者의 편의를 위해 譯者가 붙인 것임)
學而 第一 [疏]○正義曰 自此至堯曰, 是魯論語二十篇之名及第次也. 當弟子論撰之時, 以論語爲此書之大名, 學而以下爲當篇之小目. 其篇中所載, 各記舊聞, 意及則言, 不爲義例, 或亦以類相從. 此篇論君子‧孝弟‧仁人‧忠信‧道國之法, 主友之規, 聞政在乎行德, 由禮貴於用和, 無求安飽以好學, 能自切磋而樂道, 皆人行之大者, 故爲諸篇之先.…… |
위 인용문의 ‘正義曰’ 이하가 邢昺의 疏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學而〉편 전체를 포괄하는 의의를 서술하였다. 이하 각 篇의 구성 방식도 이와 같다.
②《論語》 經文 및 ③ 《論語》 經文에 대한 《論語集解》 注 제시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馬曰 子者, 男子之通稱, 謂孔子也. 王曰 時者, 學者以時誦習之. 誦習以時, 學無廢業, 所以爲說懌.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包曰 同門曰朋.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慍, 怒也. 凡人有所不知, 君子不怒. |
④《論語》 經文에 대한 疏:각 章에 대한 大義 제시 및 글자나 어구 설명
[疏]‘子曰學而’至‘君子乎’○正義曰 此章勸人學爲君子也. 子者, 古人稱師曰子. 子, 男子之通稱, 此言子者, 謂孔子也. 曰者, 說文云 “詞也, 從口乙聲, 亦象口氣出也.” 然則曰者, 發語詞也. 以此下是孔子之語, 故以子曰冠之. 或言孔子曰者, 以記非一人, 各以意載, 無義例也. 白虎通云 “學者, 覺也, 覺悟所未知也.”…… |
《論語》 經文에 대해 풀이 범위를 설정(‘子曰學而’至‘君子乎’)하고, ‘正義曰’이라는 말로 邢昺 자신의 疏임을 밝힌 뒤 전체 장의 大義를 간략히 논하였다. 이어 설명하려는 《論語》 經文 글자나 구절을 ‘○○○’者라는 형태로 제시한 뒤 설명을 붙였다.
⑤《論語集解》 注에 대한 疏:《論語集解》의 각 구절에 대한 풀이와 상세한 고증
[疏]○注 ‘馬曰子者’至‘說懌’ ○正義曰 云‘子者, 男子之通稱’者, 經傳凡敵者相謂皆言吾子, 或直言子, 稱師亦曰子, 是子者, 男子有德之通稱也. 云 ‘謂孔子’者, 嫌爲他師, 故辨之. 公羊傳曰 “子沈子曰” 何休云 “沈子稱子冠氏上者, 著其爲師也. 不但言子曰者, 辟孔子也. 其不冠子者, 他師也.” 然則書傳直言子曰者, 皆指孔子.…… [疏]○注 ‘包曰 同門曰朋’ ○正義曰 鄭玄注大司徒云 “同師曰朋, 同志曰友.” 然則同門者, 同在師門以授學者也, 朋卽群黨之謂, 故子夏曰 “吾離群而索居.” 鄭玄注云 “群謂同門朋友也.” 此言‘有朋自遠方來’者, 卽學記云“三年視敬業樂群也.” 同志, 謂同其心意所趣鄕也. 朋疏而友親, 朋來旣樂, 友卽可知, 故略不言也. [疏]○注 ‘慍怒’至‘不怒’ ○正義曰 云 ‘凡人有所不知, 君子不怒’者, 其說有二. 一云 “古之學者爲己, 已得先王之道, 含章內映, 而他人不見不知, 而我不怒也.” 一云 “君子易事, 不求備於一人, 故爲敎誨之道, 若有人鈍根不能知解者, 君子恕之而不慍怒也.” |
이 부분은 《論語集解》의 注에 대한 疏이다. 우선 疏를 붙일 부분의 범위를 설정하고, ‘正義曰’ 이하에서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앞과 마찬가지로 설명이 필요한 《論語集解》 注 부분의 글자나 어휘 등을 ‘○○○’者라는 형태로 제시한 뒤 설명을 붙였다.
4. 《論語注疏》의 注釋 특징
《論語注疏》의 注釋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注와 疏를 구분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論語集解》와 《論語正義》를 나누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1) 《論語集解》의 注釋 특징
(1) 《論語集解》의 저자 논란
《論語集解》는 현존하는 最古의 완전한 《論語》 주석서로 평가되는데, 이 책의 주석 특징을 논하기에 앞서 저자 문제의 논란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論語集解》는 何晏의 저술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何晏의 단독 저술이 아니다. 〈論語集解序〉의 끝에 “光祿大夫 關內侯 臣 孫邕, 光祿大夫 臣 鄭沖, 散騎常侍 中領軍 安鄕亭侯 臣 曹羲, 侍中 臣 荀顗, 尙書駙馬都尉 關內侯 臣 何晏 등은 이 책을 올린다.”라고 명시하고 있듯이, 何晏을 비롯하여 魏나라의 孫邕‧鄭沖‧曹羲‧荀顗 등 5명이 공동으로 편찬한 것이다. 또 앞서 소개했던 〈何晏列傳〉에는 何晏이 《道德論》을 지었다는 말은 있지만 《論語集解》를 편찬했다는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晉書》 〈鄭沖列傳〉에 “鄭沖이 孫邕‧曹羲‧荀顗‧何晏 등과 함께 《論語》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訓註 가운데 훌륭한 것을 모아 그들의 성명을 기록하고 그 뜻을 따랐으며, 온당치 못한 것이 있을 경우 그때마다 고치고서 책 이름을 《論語集解》라고 하였다. 책이 이루어지자 魏朝에 上奏하였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論語集解》의 주된 편찬자를 何晏이 아니라 鄭沖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何晏이 《論語集解》의 저자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까닭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論語集解》의 공동 편찬자 중 尙書 駙馬都尉였던 何晏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는 점이다. 둘째, 《論語集解》의 편찬과정에서 前人의 주석을 인용할 때 ‘馬融曰’, ‘王肅曰’ 등으로 표기하여 학자의 성명을 드러내었지만 包咸에 대해서만은 ‘包氏’라고 칭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咸’자가 何晏 부친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諱하여 그렇게 된 것이므로, 이 점에서 何晏이 《論語集解》의 편찬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皇侃이 《論語義疏》에서 “성명을 밝히지 않은 주석은 모두 何晏의 말이다.”
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論語集解》의 注釋 특징
《論語集解》 주석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현재 세상에 전하지 않는 여러 古注들을 상당량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漢代 孔安國의 《訓解》, 包咸의 《章句》, 周氏의 《章句》, 馬融의 《訓說》, 鄭玄의 《論語注》를 비롯하여, 何晏과 동시대 사람인 魏나라 陳群과 王肅과 周生烈이 각각 지은 《義說》 등을 두루 모아 주석에 반영함으로써, 《論語》 古注의 모습을 후대에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論語集解》 주석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후대에 안겨준 공헌이기도 하다.
〈論語集解序〉의 마지막 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近故(近古)에 司空 陳群, 太常 王肅, 博士 周生烈이 모두 《義說》을 지었다. 前世에는 傳授한 師說에 비록 異同이 있어도 訓解를 짓지 않았는데, 中間에 訓解를 지었다. 지금에 와서는 訓解가 매우 많으나, 소견이 각각 같지 않아 서로 得失이 있다. 지금 諸家의 說 중에 타당한 것만을 採集하여 그 姓名을 기록하고, 타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많이 고치고서 冊名을 《論語集解》라 하였다.
위 기록에 의하면 何晏 이전에 나온 《논어》 주석들 사이에 同異가 있었다는 사실과, 古注의 내용을 반영하기는 하되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何晏 자신의 견해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점 역시 《論語集解》 주석의 특징으로 거론할 수 있다. 또 皇侃이 “성명을 밝히지 않은 주석은 모두 何晏의 말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이전 주석의 단순한 수용을 넘어서서 何晏 자신의 견해도 주석에 반영하였다.
예컨대 〈學而〉편의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鮮矣”의 주석에 “鮮 少也 上 謂凡在己上者 言孝弟之人必恭順 好欲犯上者少也”라고 한 것, “君子務本 本立而道生”의 주석에 “本 基也 基立然後可大成”이라고 한 것, “傳而不習乎”의 주석에 “言凡所傳之事 得無素不講習而傳之”라고 한 것 등은 인용한 사람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전 주석에는 없던 何晏의 견해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論語集解》는 《論語》 古注의 단순한 集成이 아니라 기존 주석에 바탕을 둔 새로운 ‘論語注’를 만든 것이라고 하겠다.
또 하나의 특징 역시 何晏이 자신의 독창적 견해를 반영한 점과 관련된다. 何晏의 학문적 성향이 老莊思想에 경도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러한 경향이 실제로 《論語集解》의 주석에 많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論語集解》가 老莊思想을 통해 《論語》를 해석한 효시라고 평가되고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先進〉편의 “子曰 回也 其庶乎 屢空”이라는 구절의 ‘空’자를 대부분의 학자들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으로 풀이하며, 孔子가 가난한 처지에도 비관하지 않은 顔回를 칭찬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何晏은 이 구절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였다.
顔回가 聖人의 道에 가까워 자주 궁핍했지만 樂이 그 사이에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一說에는 “屢는 每와 같고, 空은 虛中과 같다.……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다.
何晏은 주석에서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空’자를 ‘궁핍하다(空匱)’는 뜻으로 풀이하였다.
이어 ‘一說’이라는 전제를 달아 ‘空’을 ‘虛中’ 즉 마음을 비운다는 것으로 풀이하였고,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풀이는 《莊子》 〈人間世〉에서 孔子가 顔回에게 일러주는 말 중 “道는 오직 마음을 비우는 곳에 응집된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마음을 齋戒하는 것이다.”
라는 구절을 반영한 풀이로 볼 수 있으며,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는 道를 알 수 없다는 莊子의 생각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주석은 何晏이 老莊思想을 반영하여 《論語》를 해석한 경우로 자주 거론되는데, 자신의 견해를 먼저 내세우고 ‘一說’을 소개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 색채가 짙지 않다.
또한 《論語》에서 위 구절보다 훨씬 더 老莊思想의 경향을 짙게 드러낼 수 있는 〈衛靈公〉편의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에 대해서 何晏이 “관리의 임용에 올바른 사람을 얻었기 때문에 作爲함이 없이 다스렸다.”
라고 풀이한 대목은, 朱熹가 《論語集註》에서 “인재를 얻어 여러 직책을 맡겼기 때문에 더욱 有爲의 흔적을 볼 수 없다.”
라고 풀이한 것과 거의 유사하다. 老莊에서 말하는 ‘無爲而治’의 개념은 자연에 순응하여 人爲를 가하지 않고 천하가 다스려지는 데 이르는 것을 말하는 반면, 儒家의 ‘無爲以治’는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백성을 교화함으로써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도 何晏의 《論語集解》에 나타나는 老莊의 색채는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후대의 儒者들에게 큰 거부반응 없이 수용되어 十三經注疏에 포함될 수 있었다.
2) 《論語正義》의 注釋 특징
邢昺의 《論語正義》는 새로운 설을 내세운 것이 거의 없고 何晏의 《論語集解》를 충실히 주석한 것이므로 특별히 볼 만한 내용이 없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邢昺의 《論語正義》가 《論語集解》에 대한 ‘疏’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論語正義》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疏인 皇侃의 《論語義疏》와 비교해봄으로써 그 특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論語正義》가 《論語義疏》의 체재를 따르고 있지만 皇侃과 邢昺은 살던 시대가 달랐다는 점, 皇侃은 老莊과 佛敎에 심취한 인물이고 邢昺은 儒者라는 점에서, 이 두 책에 대한 비교는 《論語》 해석에 대한 시대별 변화까지 살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四庫全書總目》에 기록된 다음 내용은 《論語正義》의 중요한 특징을 잘 요약하고 있다.
지금 이 책을 살펴보면, 대체로 皇氏의 번다함을 잘라내고 義理를 조금 펼쳤으니, 漢學과 宋學이 여기에서 전환하게 되었다. 이 疏가 나오자 皇疏가 미미해졌고, 程朱의 說이 나오게 되자 이 疏 역시 미미해졌다. 그러므로 《中興書目》에서 “이 책은 章句와 訓詁와 名物 부분에 자세하다.”라고 말한 것은 微言이 精微함에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거론한 《論語正義》의 특징은 첫째, 皇侃의 《論語義疏》에 들어있는 번거로운 내용들을 다 제거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논어》의 주석방식이 漢學에서 宋學으로, 즉 訓詁學에서 義理學으로 변화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며, 셋째는 名物과 典章制度에 대한 설명이 아주 자세하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다.
첫째, 《論語義疏》의 번거로운 내용들을 다 제거했다는 점이다. 皇侃의 疏에는 허황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예컨대 〈公冶長〉 1章의 “子謂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라는 구절을 풀이하면서, 皇侃은 《論釋》이라는 책에 나오는 公冶長과 관련된 逸話를 주석에 소개하였다. 公冶長이 새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남다른 능력을 지녔다가 살인 누명을 썼고, 또 그 능력 덕분에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논어》의 구절을 이해하는 데 불필요한 것이지만, 皇侃은 장황할 정도로 그 내용을 수록해두었다. 그런데 邢昺은 이 내용에 대해 “舊說에는 公冶長이 새들의 말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고 하였으나, 사리에 맞지 않는 허황된 말이므로 지금 취하지 않는다.”
라고 하여 그 설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아울러 《論語義疏》에서 老莊과 佛敎사상을 원용한 주석도 《論語正義》에서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해둔다. 예를 들면, 〈里仁〉편의 “德不孤 必有隣”이라는 구절의 ‘隣’에 대해 皇侃은 一說이라고 하며 ‘보답하다(報)’는 뜻으로 풀이한 설을 소개하였다.
‘報’자의 의미로 풀이할 경우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남들에게 보답을 받는다.’라는 말이 되며, 이것은 佛敎의 因果說과 깊이 관련된 주석이 된다. 그런데 邢昺은 이 설을 채택하지 않고 “이 장은 사람들에게 德을 수양하기를 권면한 것이다. 덕이 있는 이는 사람들이 우러러 사모하는 바이므로 반드시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찾아와서 그와 이웃이 되기 때문에 사는 것이 孤獨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풀이하였다.
둘째, 《論語》의 주석방식이 漢學에서 宋學으로, 즉 訓詁學에서 義理學으로 변화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 점은 《論語正義》가 지닌 經學史的 의의로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爲政〉편에 나오는 “子曰 君子不器”라는 구절에 대해, 皇侃은 “이 장은 君子다운 사람은 하나의 일에 얽매여 고수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라고 풀이한데 비해, 邢昺은 “이 장은 군자의 德을 밝힌 것이다.”라고 풀이하여, 孔子의 말에 담긴 微言大義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先進〉편 마지막 장의 주석은 의리학으로의 변화 양상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孔子가 子路와 曾晳과 冉有와 公西華에게 “너희들을 알아줄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묻고 曾晳의 대답만을 인정해주었는데, 曾晳의 대답과 孔子가 인정한 말은 다음과 같다.
“늦봄에 봄옷이 만들어졌으면 冠者 대여섯 명, 童子 예닐곱 명과 함께 沂水에서 목욕하고 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니, 孔子께서 감탄하시며 “나는 曾點의 뜻을 인정하노라.”라고 하셨다.
《論語集解》에는 孔子의 대답에 대해 “曾點만이 시대를 안 것을 칭찬한 것이다.”
라는 周生烈의 注釋을 인용하였고, 皇侃의 주석도 거의 다르지 않다.
邢昺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仲尼께서 堯舜을 祖述하시고 文武를 법도로 삼으셨는데, 태어나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 임금이 등용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세 사람은 시대를 살피지 못하고 정치를 하는 데 뜻을 두었지만, 曾晳만은 시대를 알아 몸을 수양하고 德을 닦으며 회포를 노래하고 道를 즐기는 데 뜻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孔子께서 인정하신 것이다.
邢昺은 孔子가 曾晳의 말을 인정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仲尼께서 堯舜을 祖述하시고 文武를 법도로 삼으셨다.”라는 《中庸》의 구절을 인용하고, 曾晳이 말한 목욕의 의미를 몸을 수양하고 덕을 닦는 인격 수양의 경지까지 확대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시대의 주석과 차이를 보인다. 《論語》의 위 구절에 대해 朱熹는 《論語集註》에서,
曾點의 학문이, 人慾이 다한 곳에 天理만이 流行하여 가는 곳마다 충만하여 조금도 결함이 없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행동하는 사이에 침착함이 이와 같았다. 그 뜻을 말함에 있어서도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그 일상의 일을 즐기는 데 불과하였고, 애당초 자신을 버리고 공리를 추구하는 뜻이 없었다. 가슴속이 悠然하여 곧 천지 만물과 上下가 함께 流行하여 각각 제자리를 얻은 神妙함이 은연중 저절로 말 밖에 드러났으니, 저 세 사람이 政事와 같은 末端에 전념한 것에 비하면 그 氣象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라는 의미를 부여하였고, 또 程頤의 말을 인용하여 “이것은 바로 堯舜의 기상이다.”
라고까지 칭찬하였다. 朱熹의 이 주석은 성리학적 義理를 확고히 드러내기 위한 전형적인 해석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주석의 비교를 통해 邢昺의 《論語正義》가 宋學의 의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해가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셋째, 名物과 典章制度에 대한 설명이 아주 자세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爲政〉편의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라는 구절에 대해 《論語集解》에서 “所因 謂三綱五常 所損益 謂文質三統”이라는 馬融의 주석을 인용하였다. 皇侃은 “三綱 謂夫婦父子君臣也 三事爲人生之綱領 故云三綱也”라고 간단한 疏를 붙였지만, 邢昺은 《白虎通》의 기록을 인용한 뒤 총 286자의 긴 疏를 붙였는데, 三綱에 대한 풀이는 물론 夫婦와 父子와 君臣이 三綱의 관계가 되는 이유까지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 외의 다른 예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하나의 설명에는 반드시 출처를 분명히 밝히고 논증하여 신뢰성을 확보하였다. 疏의 내용이 너무 장황하여 원문의 가독성을 해치는 경우도 있지만, 상세한 고증을 통해 설명하려는 노력은 邢昺의 博學과 학문적 성실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점 역시 《論語正義》의 중요한 특징이자 후대에 공헌한 점이다.
5. 우리나라에 끼친 《論語注疏》의 영향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고려 말 性理學의 도입과 함께 四書集註가 들어왔고 뒤이어 국가적 사업으로 四書集註를 간행하게 되면서, 《論語》 해석에 朱熹 주석 이외의 견해가 들어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또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논어》 관련 주석서들이 다수 지어졌지만, 이 역시 朱熹의 주석을 부연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朱熹와 다른 견해를 제시한 학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 또한 대부분 朱熹 해석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었거나, 아니면 斯文亂賊으로 몰려 목숨을 잃은 일까지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우리나라에 끼친 《論語注疏》의 영향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인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향력은 미미하였을지라도 우리나라의 학자와 문인들은 《論語注疏》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였고, 여러 가지 필요에 의해 《論語注疏》의 내용을 언급한 기록이 상당수 발견된다. 여기서는 이런 기록들을 간략히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논어》는 三國시대 때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古事記》에 우리나라 《논어》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데, 百濟의 王仁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논어》를 가지고 가서 강론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王仁이 가지고 간 《논어》는 鄭玄의 注釋本이라는 연구가 있다.
또 《三國史記》에 신라의 薛聰이 “方言으로 九經을 읽으면서 학생들을 훈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논어》가 九經에 포함되고 百濟와 東晉의 왕래가 빈번했던 점을 감안하여, 百濟와 新羅에 존재했던 《논어》는 당시 중국에서 널리 통행되던 《論語集解》本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논어》는 經文뿐 아니라 注釋本까지 함께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 《論語注疏》와 관련된 기록은 《三國遺事》에 나타난다. 《三國遺事》 〈馬韓〉에 《論語》 〈子罕〉편의 “子欲居九夷”에 붙은 《論語正義》의 내용을 인용하며, “《論語正義》에서 九夷에 대해 玄菟‧樂浪‧高麗‧滿飾‧鳧臾‧素家‧東屠‧倭人‧天鄙라고 했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이 기록에 근거하면 고려 때에는 《論語正義》가 전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국의 여러 서적에 ‘高麗本 《論語集解》’
라는 기록이 보인다. 淸나라 錢曾의 《讀書敏求記》, 翟灝의 《四書考異》, 陳鱣의 《論語古訓》, 阮元의 《論語注疏校勘記》, 馮登府의 《論語異文考證》 등이 바로 그것이다. 위 기록 중 가장 앞선 기록인 錢曾의 《讀書敏求記》에 의하면, 필획이 奇古한 것이 六朝 또는 初唐人들의 隷書 碑版과 흡사한 高麗本 《論語集解》가 있었다고 한다. 이 高麗本 《論語集解》는 중국에서 통용되던 판본과 달랐는데, 그 글자체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중국의 통용본 《論語》의 미비점을 보충해주는 매우 훌륭한 善本이었다고 하였다. 또 “‘正平 甲辰年 五月 吉日에 삼가 기록하다.’라고 쓰여있는데, 正平이 朝鮮의 어느 때 年號인지는 모르겠으니 뒤에 살펴보기를 기다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錢曾의 말에 등장하는 ‘正平’이 뒤에 일본의 年號로 밝혀지면서
‘高麗本 《論語集解》’는 일본에서 간행된 正平本 《論語集解》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가, 우리나라에 와 있던 중국 사신에 의해 중국으로 전해져 중국에서 ‘고려본’으로 오인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근 正平本 《論語集解》와 중국 서적들에서 ‘高麗本 《論語集解》’라고 출전을 밝힌 뒤 인용한 《論語》 經文을 대조한 뒤, 正平本과 高麗本이 다른 본일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論語集解》가 간행되었을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실제로 간행되었다면 그 시점은 정황상 조선이 아니라 고려 때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고려 忠烈王 때 安珦이 朱子學을 수입하였고, 그의 제자인 白頤正이 元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四書集註를 우리나라에 들여왔으며, 뒤이어 權溥의 주청에 의해 四書集註가 간행되었다. 이후로 四書集註의 《論語集註》가 《論語》 注釋의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자, 이전에 유입 혹은 간행되었던 《논어》 주석서들은 자연스럽게 학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선의 論語學은 앞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朱熹의 《論語集註》에 드러난 義理사상을 수용하고 계승하는 대전제 하에 진행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흐름 속에서도 《論語注疏》의 모든 내용을 전면적이고 직접적으로 검토하고 여기에 자신의 견해를 붙인 연구가 있다. 바로 茶山 丁若鏞의 《論語古今註》이다. 《논어고금주》는 총 40권으로 茶山이 康津에 유배되어 있을 때 저술한 것이다. 《論語》 經文의 모든 구절에 대해 古今의 중국 주석은 물론 일본의 일부 주석서를 참고하고 경우에 따라 우리나라 문인들의 주석까지 소개한 뒤, 자신의 창의적인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論語學의 수준을 한 단계 제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이 책의 중요한 인용 서적 중 하나가 바로 《論語注疏》임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 論語學의 수준을 제고하는 데 《論語注疏》가 일정 부분 기여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 《論語注疏》의 주석 내용을 근거로 삼아 朱熹의 해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경우가 있다. 正祖와 大臣들이 經筵에서 《논어》를 강론할 때 주고받은 이야기인데, 그중 하나만 예를 든다. 《論語》 〈爲政〉편의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라는 구절의 ‘至於犬馬 皆能有養’에 대해, 朱熹는 “犬馬도 사람에게 의지해 먹으니, 이 또한 〈부모를〉 봉양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犬馬를 기를 때에도 모두 음식을 먹여 길러줌이 있으니, 만약 부모를 잘 봉양하기만 하고 공경이 지극하지 않다면, 犬馬를 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
즉 사람이 부모를 음식으로만 봉양할 뿐 공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개와 말에게 음식을 주어 기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냐는 뜻으로 풀이한 것이다.
《論語集解》에 소개된 이 구절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包咸이 말하기를 “개가 밤을 지켜 도둑을 막고, 말이 사람을 대신해 勞苦하는 것이 모두 사람을 봉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一說에는 “사람은 犬馬까지 飼養하니,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견마를 기르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하였다. 《孟子》에 “먹이기만 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돼지로 기르는 것이고, 사랑하기만 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짐승으로 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論語集解》의 주석에 따르자면, 《논어》의 ‘至於犬馬 皆能有養’은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다. 하나는 앞서 설명한 朱熹의 풀이와 같다. 다른 하나는 ‘개와 말도 밤에 도둑을 지키고 물건을 실어 나름으로써 사람을 봉양할 수 있다. 그러니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개와 말이 사람을 위해 봉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朱熹가 古注의 ‘一說’을 자신의 해석으로 선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朱熹의 풀이에 대해 正祖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였고, 經筵에 참여한 尹光顔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여기에 ‘犬馬에 이르러서도 모두 길러줌이 있을 수 있다.[至於犬馬 皆能有養]’라고 하였다. 지극히 높고 친한 것은 父母이고 지극히 낮고 천한 것은 犬馬인데, 〈朱子는〉 지금 犬馬처럼 천한 것으로 부모의 존귀함에 견주었다. 聖人의 말씀은 迫切하지 않고 子游는 聖人 문하의 뛰어난 제자이니,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는 聖人으로서 孝를 물은 子游에게 답한 말씀이라면 아마 이처럼 표현하시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런데 도리어 부모를 섬기는 예절에 짐승을 기르는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어찌 聖人의 말씀이 인륜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尹光顔이 대답하였다. “犬馬도 길러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은 何晏의 《論語集解》에서부터 이미 두 가지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犬馬가 사람을 봉양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사람이 犬馬를 기른다는 것입니다. 《論語集註》에서는 사람이 犬馬를 기르는 것이라고 풀이하였고, 또 《孟子》에 있는 ‘사랑하기만 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짐승으로 기르는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皆能’의 ‘能’자로 본다면, 犬馬를 주체로 하여 말한 것인 듯합니다. 만약 사람이 犬馬를 기르는 것이라면 또 어찌 能과 不能을 논하겠습니까. 그렇다면 犬馬가 사람을 봉양한다는 풀이도 한 가지 학설이 될 수 있습니다.”
위의 正祖의 질문과 尹光顔의 대답을 살펴보면, 완곡하기는 하지만 《論語集解》의 설 가운데 朱熹의 선택과는 다른 설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論語注疏》의 내용을 통해 當代의 현안을 해결한 경우도 있다. 《肅宗實錄》 7년(1681) 11월 9일자 기사에, 吏曹判書 金錫冑가 箚子를 올려 文廟 제사 의식의 개정에 관해 논한 것이 보인다. 그 내용 중 孔子의 제자 申棖이 文廟의 東廡에 배향되어 있고 또 동일 인물인 申黨이 西廡에 배향되어 있으므로 두 位 중 하나를 없애야 한다고 건의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肅宗實錄》 8년 1월 17일자 기사에는 弘文館에서 金錫冑의 논의에 대해 기록을 검토하여 결과를 보고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弘文館에서 아뢰기를 “申棖‧申黨이 한 사람의 두 이름인지를 널리 살피라고 명하셨습니다. 《論語》와 《孔子家語》와 《史記》에 나오는 孔門의 제자는 서로 異同이 있습니다. 《논어》에는 申棖은 있으나 申黨은 없고, 《사기》에는 申黨은 있으나 申棖은 없으며, 《공자가어》에는 申續이 있고 申棖‧申黨은 모두 없습니다. 唐나라 開元 중에 처음 70제자를 孔廟에 從祀할 때 《논어》와 《사기》 두 책에 실린 것에 맞추었으므로 申棖‧申黨이 함께 祀典에 있게 되었습니다. 宋나라 때에 이르러 邢昺이 《論語注疏》에서 비로소 漢나라 鄭氏의 설을 인용하여 申棖‧申黨‧申續을 한 사람으로 단정하였습니다. 嘉靖 중에 바로잡을 때 申黨을 없애고 申棖을 두었으니, 실로 邢昺의 설을 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답하기를 “《魯論》에 이미 申棖은 있으나 申黨은 없고, 邢昺의 《論語注疏》에 이르러 아주 상세하니, 전에 判付한 대로 申黨을 없애고 申棖을 남겨두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論語》 〈公冶長〉편의 “子曰 吾未見剛者 或對曰 申棖 子曰 棖也慾 焉得剛”이라는 구절에 ‘申棖’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史記》 〈仲尼弟子列傳〉에는 ‘申黨 字周’로 기록되어 있어 중국에서도 두 사람으로 오인하여 각기 孔廟에 配享하였다가, 宋나라 때 와서 《論語注疏》의 기록을 근거로 申棖만 配享하게 되었다. 《논어주소》에는 “鄭玄은 ‘申棖은 孔子의 제자 申續인 듯하다.’라고 하였고, 《사기》에는 ‘申黨의 字가 周이다.’라고 하였고, 《공자가어》에는 ‘申續의 字가 周이다.’라고 하였다.”
라고 하여, 申棖과 申黨과 申續을 모두 한 인물로 확정 지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肅宗 때까지 申棖과 申黨 모두 文廟에 배향하고 있다가 역시 《논어주소》의 기록에 근거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논어주소》 기록에 대해 일정 정도 신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 《論語注疏》 번역의 의의
子께서 냇가에 계실 때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이고 낮이고 그치지 않는구나.”
《論語》 〈子罕〉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論語集解》에는 이 구절에 대해 包咸의 말을 인용하여 “지나가는 모든 것이 냇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邢昺은 疏에서 “이 章은 孔子께서 時事가 지나가고 나면 돌아올 수 없다고 탄식하신 것을 기록하였다. 逝는 往이다. 夫子께서 냇가에 계실 때 냇물의 흐름이 매우 빠르고 또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보셨기에 느낌이 일어 歎息하신 것이니, ‘모든 時事가 지나가는 것이 이 냇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밤에도 낮에도 그치지 않는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論語集解》에는 인용되지 않았지만 새로 발견된 鄭玄의 注에는 “사람이 나이가 드는 것이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음을 말하여, 道를 지니고서도 등용되지 못함을 아파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두 해석에 따르자면 孔子가 흘러가버린 시간 속에서 뜻을 얻지 못한 자신의 불우함을 탄식한 말로 읽힌다.
그런데 朱熹의 《論語集註》에는 이 구절에 대해, 신진대사가 부단히 이어지는 天地 造化의 대원리가 끝없이 흐르는 냇물과 같음을 발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주지시킨 말로 풀이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天地의 造化는 가는 것은 지나가고 오는 것은 계속되어 한순간의 정지도 없으니, 바로 道體의 本然이다. 그러나 지적하여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냇물의 흐름만 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시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항상 성찰하여 털끝만 한 間斷도 없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위 해석을 보면, 《論語》의 동일한 구절에 대해 古注와 新注의 해석에 큰 차이가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근 《論語集解》와 《論語集註》의 차이를 비교분석한 일련의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연구를 촉발시킨 근본적 문제의식은, 연구자의 말을 빌리자면 ‘경전의 해석에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論語》에 담긴 의미를 찾고 이를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낸 朱熹의 노력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다양한 관점에서 《논어》를 살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연구가 연구자 개인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재 학계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論語注疏》의 번역은 《논어》 연구자들에게 《논어주소》의 내용을 쉽게 파악하고 이해하여 전문적인 연구에 활용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 산발적으로 진행되어 왔던 《논어》 古注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古注의 내용을 상당 부분 수용한 《論語集註》의 연구에도 훌륭한 참고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본 번역서의 출간을 계기로 《논어》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논어》를 읽고자 하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 번역서는 유용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번거롭고 어려운 내용은 제쳐두고 《논어》 經文의 번역만 읽더라도, 기존 번역과의 同異를 발견할 것이므로 그 과정에서 《논어》 번역에 대한 취사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또 기존 번역의 근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발견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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