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集評] ○ 武陵桃源 秦人避世於此 至東晉始聞於人間 陶淵明作記 且爲之詩 詳矣
其後作者相繼 如王摩詰韓退之劉禹鍚 本朝王介甫 皆有歌詩 爭出新意 各相雄長 - 宋 陳巖肖, 《庚溪詩話》 卷下
○ 桃源詩 唐宋以來 作桃源行最傳者 王摩詰韓退之王介甫三篇
及讀摩詰詩 多少自在 二公便如努力挽强 不免面赤耳熱
此盛唐所以高不可及 - 淸 王士禎, 《池北偶談》 卷14
而蘇文忠之論 則以爲是其子孫 非卽避秦之人 至晉尙在也 此說似近理
蓋唐人之詩 但取
至後人 乃益硏核情事耳 不必以此爲分別也 - 淸 翁方綱, 《石洲詩話》 卷1
멀리서 보니 한 곳에 구름과 나무가 어리어 있고
가까이 들어서니 많은 집이 꽃과 대나무 사이에 흩어있다
속세의 객이 왔다는 소식에 놀라 다투어 몰려와서는
서로 이끌고 집으로 가선 사는 마을을 물어본다
저물 무렵 고기잡이와 나무꾼은 물길을 타고 돌아온다
세상에서 멀리 바라보면 그저 구름 속의 산뿐인 것을
靑溪 몇 굽이를 돌아 구름 자욱한 숲에 이르렀던가
[集評] 武陵桃源은 秦나라 사람들이 이곳에서 세상을 피하였는데, 東晉시대부터 세상에 소문이 전해지기 시작하여 陶淵明이 記文을 짓고, 또 그것을 시로 지었는데 상세하다.
그 후의 작자들이 계속 이어져, 王摩詰(王維), 韓退之(韓愈), 劉禹錫, 本朝(宋代)의 王介甫(王安石)가 모두 詩歌를 지으며 다투어 새로운 意境을 창출하였는데 각기 장점이 있다.
〈桃源詩〉 당송이래로 桃源行을 지어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왕마힐, 한퇴지, 왕개보가 지은 세 편이다.
한퇴지와 왕개보의 두 시를 보면 筆力과 意思가 매우 흡족할 만하다.
그러나 마힐의 시를 읽게 되면 매우 자연스러워서 두 사람이 힘써 끌어 잡아당기려 해도 얼굴이 붉어지고 귀가 뜨거워지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점이, 성당의 시가 높아서 미칠 수 없는 이유이다.
고금에 도화원에 대한 일을 읊은 것은 右丞(王維)에 이르러서 극치에 이르렀음은 진실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제영한 작품에는 당송의 여러 작가들 사이에 대략 같지 않은 점이 있다.
右丞, 韓文公(韓愈), 劉賓客(劉禹錫)의 작품은 곧바로 “신선이 되었다.[成仙]”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蘇文忠公(蘇軾)의 論에는 그들의 자손들이요, 秦나라를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 晉나라 때까지 살아있던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 설명이 사리에 가까운 듯하다.
대개 당나라 사람들의 시는 다만 興象과 超妙만을 취하였으나, 후대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더욱 事情을 깊이 연구하였으니 반드시 이것으로 분별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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