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用人之術이 任之必專하며 信之必篤然後에 能盡其材而可共成事라
及其失也하얀 任之欲專하면 則不復謀於人而拒絶群議하니 是欲盡一人之用而先失衆人之心也라
信之欲篤하면 則一切不疑而果於必行하니 是不審事之可否하고 不計功之成敗也라
夫違衆擧事하고 又不審計而輕發이면 其百擧百失而及於禍敗는 此理之宜然也라
以其拒諫爲不惑群論하고 以其偏信而輕發로 爲決於能斷하야
至其信用一失而及於禍敗하얀 則雖悔而不可及하니 此甚可歎也라
前世爲人君者가 力拒群議하고 專信一人이라가 而不能早悟하야 以及於禍敗者多矣라
昔秦
은 地大兵强
하고 有衆九十六萬
하야 號稱百萬
일새 蔑視東晉
하야 指爲一隅
하야 謂可直以氣呑之耳
라
然而擧國之人이 皆言晉不可伐하야 更進互說者가 不可勝數라
其所陳天時人事를 堅隨以强辯折之하야 忠言讜論皆沮屈而去하니
如
은 老成之言也
로되 不聽
하고 은 至親之言也
로되 不聽
하고 은 堅平生所信重者也
라 數爲之言
하되 不聽
하고 惟聽信一將軍
者
하니
垂之言에 曰 陛下內斷神謀가 足矣니 不煩廣訪朝臣하야 以亂聖慮라하니 堅大喜하야 曰 與吾共定天下者는 惟卿爾라하고
於是에 決意不疑하야 遂大擧南伐이러니 兵至壽春에 晉以數千人擊之하야 大敗而歸하야 比至洛陽하얀 九十六萬兵이 亡其八十六萬이라
近五代時
에 後唐
가 患
之鎭太原也
에 地近契丹
하야 恃兵跋扈
라 議欲徙之於鄆州
한대 擧朝之士
가 皆諫以爲未可
하되
帝意必欲徙之하야 夜召常所與謀樞密直學士薛文遇하야 問之以決可否한대 文遇對曰 臣聞作舍道邊이면 三年不成이라하니
帝大喜曰 術者言我今年當得一賢佐하야 助我中興이라하더니 卿其是乎인저하고
我適見薛文遇하야 爲之肉顫하니 欲自抽刀刺之라하니
由是言之컨대 能力拒群議하고 專信一人이 莫如二君之果也요
方苻堅欲與慕容垂로 共定天下하고 淸泰帝以薛文遇爲賢佐하야 助我中興하얀 可謂臨亂之君이 各賢其臣者也라
或有詰予曰 然則用人者不可專信乎
아하야늘 應之曰
과 은 可謂專而信矣
로되 不聞擧齊蜀之臣民非之也
라
蓋其令出而擧國之臣民從하고 事行而擧國之臣民便이라
使令出而兩國之人不從하고 事行而兩國之人不便이면 則彼二君者가 其肯專任而信之하야 以失衆心而斂國怨乎리오
然其行文
이 不如
嫋娜紆徐
하니 須參互之
라야 爲入神解
라
03. 임금 노릇 하기 어려움에 대한 논論 상上
《논어論語》에서 말한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어떤 것이 어렵다는 것인가?
대개 사람을 쓰는 방법은 위임하기를 반드시 전적으로 하며, 신임하기를 반드시 독실하게 한 뒤에야 그 재주를 다하게 하여 함께 일을 이룰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잘못하는 경우에는, 위임하기를 전적으로 하고자 한즉 더 이상 남에게 상의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의론을 막아서 끊으니, 이는 한 사람을 쓰는 것만 극진하게 하고자 하여 먼저 뭇사람의 마음을 잃는 것이다.
신임하기를 독실하게 하고자 하면 일절 의심하지 않고 과감하게 결행하니, 이는 일의 가부可否를 살피지 않고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결과를 계산하지 않는 것이다.
대개 중인衆人의 뜻을 어기면서 일을 거행하고, 또 살피거나 계산하지 않고서 가벼이 발한다면, 백 번 거행에 백 번 실패하여 화패禍敗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요행히 공을 이룬 경우가 있으면, 인정人情은 성공하면 옳게 여기고 실패하면 그르게 여기는 법이니,
또 거기에 붙좇아 찬동하면서 뭇사람들을 거스르는 것을 ‘자기 혼자의 밝은 식견’이라고 하고,
간언諫言을 거부하는 것을 ‘군론群論에 미혹되지 않았다.’고 하고, 치우치게 믿어서 가벼이 발하는 것을 ‘잘 판단해야 할 것에서 결단을 했다.’고 하여,
후세의 인군人君으로 하여금 이 세 가지를 사모하여 그렇게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믿고 쓰는 것이 한 번 실패하여 화패禍敗에 미치게 되어서는, 비록 후회를 하더라도 소용이 없게 되니, 이것이 심히 한탄스러운 것이다.
전세前世에 임금이 된 자들 중에는 힘써 군의群議를 거부하고 오로지 한 사람을 믿으면서 조기에 깨닫지 못하여 화패禍敗에 이르게 된 경우가 많다.
일일이 들 수 없으니, 청컨대 시험 삼아 그중 한두 가지를 들어보겠다.
옛날에 진秦나라 부견苻堅은 영토가 넓고 군대가 강성하며, 군인 96만을 소유하여 ‘백만 대군’으로 불렸기 때문에, 동진東晉을 무시하여 한쪽 구석 정도로 지목하면서 “단지 기세만 가지고도 삼킬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진晉나라는 정벌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서로 나아가 번갈아 간언諫言하는 자가 이루 셀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아뢴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부견苻堅이 그때그때 억지 변설辨說로 꺾는 바람에 충언忠言과 당론讜論이 모두 저지되어 떠나갔다.
왕맹王猛‧부융苻融과 같은 경우는 노성老成한 이의 말인데도 듣지 않고, 태자太子 굉宏‧소자少子 선詵과 같은 경우는 지친至親의 말인데도 듣지 않고, 사문沙門 도안道安과 같은 경우는 부견이 평소에 깊이 신임했던 사람으로 자주 그를 위해 간언했는데도 듣지 않고, 오직 장군 모용수慕容垂 한 사람의 말만을 듣고 믿어주었다.
모용수의 말에 이르기를 “폐하陛下의 내단內斷과 신모神謀가 충분하니, 번거로이 조신朝臣들에게 널리 자문하여 성려聖慮를 어지럽힐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하니, 부견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나와 함께 천하를 안정시킬 자는 오직 경卿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저하지 않고 결심하여 마침내 크게 남쪽으로 정벌을 거행하였는데, 군대가 수춘壽春에 이르렀을 때 진晉나라가 수천 명으로 공격하여, 크게 패하여 돌아왔는데, 낙양洛陽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는 96만의 군사 중에 86만이나 잃어버렸다.
부견이 이로부터 군대의 위세가 꺾여서 다시 진작하지 못하고, 마침내 어지러이 망亡하기에 이르렀다.
오대五代 때에 가까워 후당後唐의 청태제淸泰帝가, 진조晉祖가 태원太原을 진무鎭撫할 적에 지역이 거란契丹에 가까워 군대를 믿고 발호할 것을 염려하여, 운주鄆州로 옮기고자 의론을 하였는데, 온 조정의 선비들이 모두 간언하여 불가하다고 하였다.
청태제는 속으로 반드시 그를 옮기고자 하여, 늘 함께 도모하던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설문우薛文遇를 밤에 불러 그에게 물어서 가부可否를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설문우가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 도로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가도 완성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결단코 폐하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굳이 다시 군신群臣에게 물어볼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청태제가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술자術者가 내게, 금년今年에는 마땅히 한 사람의 현명한 보좌를 얻어서 나의 중흥中興을 돕게 될 것이라고 하더니, 경卿이 바로 그 사람이구려.”라고 하고,
즉시 학사學士에게 명하여 제制를 기초起草하게 하여, 진조晉祖를 운주鄆州로 옮기게 하였다.
다음날 조서詔書가 선포되자, 조정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실색失色하였다.
6일 뒤에 진조晉祖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글이 이르니,
청태제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이숭李崧에게 이르기를
“내가 마침 설문우薛文遇를 만나, 그로 인해 살이 떨릴 지경이 되었으니, 스스로 칼을 뽑아 그를 찌르고 싶다.”라고 하니,
이숭이 대답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해도 소용이 없나이다.”라고 하고,
다만 군신君臣이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며 울 따름이었다.
이로 미루어 말해보건대, 힘써 군의群議를 거부하고 오로지 한 사람만을 믿는 것이 두 임금처럼 과감한 경우는 없었다.
그로 인해 화패禍敗와 난망亂亡을 초래한 것이 또한 두 임금처럼 혹독했던 경우도 없었다.
바야흐로 부견苻堅이 모용수慕容垂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고, 청태제淸泰帝가 설문우薛文遇를 어진 보좌로 여겨 “나의 중흥을 돕는다.”고 하기에 이르러서는, 가히 ‘어지러움에 처한 임금들이 각각 그 신하를 현명하게 여겼다.’고 할 만한 경우이다.
혹자가 나에게 힐난하기를 “그렇다면 용인用人하는 자는 오로지 한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라고 하거늘, 응답하기를 “제齊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등용한 것과 촉蜀나라 선주先主가 제갈량諸葛亮을 등용한 것은 ‘오로지하고, 믿어주었다.’고 할 만한데도, 제齊나라와 촉蜀나라의 온 신민臣民들이 그르게 여겼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대개 그 명령이 나오면 온 나라의 신민들이 따르고 일이 행해지면 온 나라의 신민들이 편해졌다.
그러므로 환공桓公과 선주先主가 전적으로 맡겨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명령이 나와도 두 나라의 백성들이 따르지 않고 일이 행해져도 두 나라의 사람들이 편해지지 않는다면, 저 두 임금이 어찌 전적으로 맡기고 믿어서 중인衆人들의 마음을 잃고 나라 사람들의 원망을 초래하려고 했겠는가?” 하였다.
무릇 구양공歐陽公의 논의가 가장 통절痛切하다.
그러나 그 행문行文이 삼소三蘇의 부드럽고 느긋한 것만은 못하니, 모름지기 참고하여 보아야 신묘한 견해에 들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