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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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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數十年之間 易世者五이어늘 其所當州郡 分割畫次 如掌하니 太史公所欲爲而不能者
嗚呼
러니 後世鑒古矯失하야 而自秦漢以來 爲國孰與三代長短
及其亡也하얀 未始不分하고 至或無地以自存焉하니 蓋得其要則雖萬國而治 失其所守則雖一天下라도 不能以容이니 豈非一本於道德哉
而其勢未分이러니 曁其衰也하얀 하니 鎭之大者 連州十餘 小者 猶兼三四
故其兵驕則逐帥하고 帥彊則叛上하야 土地爲其世有하고 干戈起而相侵하니 天下之勢 自玆而分이라
然唐自中世 多故矣
其興衰救難 常倚鎭兵扶持하고 而侵凌亂亡 亦終以此하니 豈其利害之理然歟
初起幷代하야 取幽滄하야 有州三十五하고 其後又取梁魏博等十有六州하야 合五十一州하야 以滅梁하고 岐王稱臣할새 又得其州七하고 破蜀하고 已而復失하야 惟得秦鳳階成四州하고 而營平二州 陷于契丹하니 其增置之州一이라
合一百二十三州하야 以爲唐하다
하고 하니 合一百九州하야 以爲晉하다
之初 秦鳳階成 復入于蜀하고 이라
合一百六州하야 以爲漢하다
代漢 하고 하니 又增置之州五 而廢者三이라 合一百一十八州하야 以爲周하다
宋興因之하니 此中國之大略也
其餘外屬者 彊弱相幷하야 不常其得失이라
至于周末하야 閩已先亡하고 而在者七國이라
自江以下二十一州爲이며以南及四十六州爲蜀하며 自湖南北十州爲楚이며 自浙東西十三州爲吳越이며南北四十七州爲南漢이며 自太原以北十州爲이며 而荊歸峽三州爲南平이니 合中國所有二百六十八州而不在焉이라
唐之封疆 遠矣
前史備載寄治 이라
五代亂世 文字不完하야 而時有廢省하고 又或陷于夷狄이로되 不可考究其詳하니 其可見者 具之如
自唐有方鎭으로 而史官不錄于地理之書하니 以謂方鎭兵戎之事 非職方所掌故也
然而後世因習하야 以軍目地而沒其州名하고 又今置軍者 徒以虛名升建爲州府之重하니 此不可以不書也
州縣 凡唐故而廢于五代 若五代所置而見于今者 及縣之割隷今因之者 皆宜列以備職方之考하고 其餘嘗置而復廢어나 嘗改割而復舊者 皆不足書
山川物俗 職方之掌也 五代短世 無所遷變일새 故亦不復錄하고 而錄其方鎭軍名하야 以與前史互見之云이라


01. 《오대사五代史》 〈직방고職方考〉에 대한
수십 년 동안에 세상이 바뀐 것이 다섯 번인데 그 해당되는 을 나누고 구획한 것이 손바닥을 보는 듯하니, 태사공太史公이 하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오호라!
삼대三代 이상은 땅을 나누어 다스리지 않음이 없었는데, 후세에는 옛날을 거울삼아 잘못을 고치느라 비로소 천하를 으로 만들었으나, 이래 국가들이 삼대三代와 비교해 어느 쪽이 낫고 못한가?
그 국가들이 망할 때에는 땅이 나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혹 자존自存할 땅조차 없게 된 나라도 있었으니, 그 요령要領을 얻으면 비록 만국萬國이라도 잘 다스려질 것이고 그 지킬 바를 잃으면 비록 천하를 통일하더라도 용납될 수 없으니, 어찌 한결같이 도덕道德에 근본을 두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라가 융성할 때 비록 천하를 이름하여 10라 하였으나 그 형세는 아직 나뉘지 않았었는데 쇠약해질 때에 이르러서는 절도사를 두어서 방진方鎭이라 불렀으니, 방진 중에서 큰 것은 10여 개를 연이었고 작은 것도 서너 개를 아울렀다.
그러므로 그 병사들이 교만하면 장수將帥를 축출하고 장수가 강하면 위를 배반하여 토지가 대대로 그의 소유가 되고 전란을 일으켜 침범하였으니, 천하의 형세가 이로부터 나뉘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중세中世부터 변고가 많았다.
그래서 쇠미한 형세를 일으키고 곤란한 상황을 구제하는 일을 늘 방진 병력의 도움에 의지하였고 침략侵略난망亂亡 또한 마침내 이 때문이었으니, 어쩌면 그 이해利害의 이치가 그러한 것인가!
희종僖宗소종昭宗 이래로 국가가 날이 갈수록 더욱 분열하더니, 후량後梁 초에 천하가 11개로 나뉘어 남쪽에는 이 있고, 서쪽에는 이 있고, 북쪽에는 이 있었으며, 주씨朱氏는 차지한 78을 세웠다.
장종莊宗은 처음 병주幷州대주代州에서 일어나 유주幽州창주滄州를 차지하여 35개 를 소유하였고, 그 후에 또 양주梁州위주魏州박주博州 등 16를 차지하여 도합 51를 소유하여 나라를 멸망시켰으며, 기왕岐王칭신稱臣하자 또 그 일곱 개를 얻었고 동광同光 연간에 을 점령했다가 이윽고 다시 잃어서 오직 진주秦州봉주鳳州계주階州성주成州의 4만을 얻었고 영주營州평주平州의 2는 거란에 함락되었으니, 그 증가한 는 하나였다.
그리하여 123를 합하여 을 세웠다.
석씨石氏가 중국에 들어와 즉위하여 거란契丹에 16를 바치고 금주金州를 얻었으며, 또 더 둔 가 하나이니, 109주를 합하여 을 세웠다.
유씨劉氏의 처음에는 진주秦州봉주鳳州계주階州성주成州가 모두 에 들어가고, 은제隱帝증치增置가 하나이다.
그래서 106를 합하여 을 세웠다.
곽씨郭氏을 대신함에 10유민劉旻에게 들어갔고, 세종世宗봉주鳳州계주階州성주成州영주瀛州막주莫州회남淮南의 14를 취하였는데, 또 증치增置가 다섯이고 없앤 주가 셋이라 도합 118주로 를 세웠다.
이 일어나자 이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이것이 중국中國의 대략이다.
그 나머지 중국 밖의 나라들은 강한 쪽이 약한 쪽을 병탄幷呑하여 그 득실이 일정하지 않았다.
후주後周 말기에 이르러 이 먼저 망하고 남아 있는 것은 일곱 나라였다.
양자강揚子江 이하 21남당南唐이고, 검각劍閣으로부터 남쪽 및 산남山南서도西道 46이고, 동정호洞庭湖로부터 남북쪽 10이고, 절강浙江으로부터 동서쪽 13오월吳越이고, 오령五嶺으로부터 남북쪽 47남한南漢이고, 태원太原으로부터 북쪽 10동한東漢이며, 형주荊州귀주歸州협주峽州 3남평南平이니, 중국에 있는 268를 합하였고 은 여기에 들지 않았다.
나라가 봉강封疆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전 시대 역사에 다 기재되어 있으나 기미책羈縻策을 써서 지방에 위임해 통치하느라 이름만 있는 가 그 가운데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오대五代 때에는 기록이 온전하지 못하여 때로 없어진 도 있고 또 오랑캐에게 함락된 지방도 있었지만 상세한 실정을 상고하여 알 수 없으니, 알 수 있는 것은 도보圖譜와 같이 갖추어 기록해둔다.
나라 때 방진方鎭을 둠으로부터 사관史官들이 지리서地理書에 수록하지 않았으니, 방진의 병융兵戎에 관한 일은 직방씨職方氏가 관장하는 바가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를 그대로 인습因習하여 으로 그 지명을 부르고 그 의 이름은 인몰湮沒시켰으며, 게다가 지금 을 둔 것은 한갓 빈 명칭으로 승격시켜 와 같은 중요한 행정구역으로 삼은 것이니, 이는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은 무릇 나라 때 있었다가 오대五代 때 없어진 것과 오대 때 설치하여 오늘날에도 보이는 것 및 분할시키거나 예속시킨 을 지금 그대로 인습因習하는 것을 모두 열거하여 직방씨가 살펴보는 데 대비하고, 그 나머지 일찍이 두었다가 다시 없앴거나 일찍이 분할했다가 다시 복구시킨 것은 모두 기록할 게 못 된다.
산천山川물속物俗은 직방씨가 관장하는 것이나, 오대五代는 시대가 짧아 변천한 바가 없기 때문에 역시 기록하지 않고 그 방진方鎭의 명칭을 기록하여 전대前代 역사와 참고해 보도록 한다.


역주
역주1 五代史職方考論 : 이 글은 歐陽脩 자신인 編修한 《新五代史》 〈職方考〉의 서문과 結語를 추려 뽑되 그 안의 圖譜와 설명은 뺀 것이다. 職方은 원래 官名이다. 《周禮》 〈夏官〉에 職方氏란 관직이 있는데 천하의 地道와 사방 제후들이 바치는 貢物을 담당한다. 이 글에서 직방은 州‧府와 같은 국가 행정 구역의 설치를 뜻한다. 구양수는 이 글에서 五代의 각 왕조들과 기타 작은 조정들의 관할 구역 및 그 변천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따라서 이 글은 史料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五代는 後梁‧後唐‧後晉‧後漢‧後周이다.
역주2 三代以上 莫不分土而治也 : 三代는 고대의 夏‧殷‧周 세 왕조를 가리킨다. 이 시대까지는 제후에게 땅을 나누어주어 다스리게 하는 分封制, 즉 封建制를 시행하였다.
역주3 始郡縣天下 : 秦始皇이 六國을 통일하고 전국을 郡‧縣으로 분할하는 郡縣制를 실시하였다. 진시황은 전국을 36개 郡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 縣을 두었다. 郡縣이란 명칭은 周나라 때부터 보이지만 주나라 때에는 縣이 郡보다 더 컸다.
역주4 唐之盛時 雖名天下爲十道 : 唐 太宗 貞觀 원년(627)에 山河의 형세에 따라서 전국을 關內‧河南‧河東‧河北‧山南‧淮南‧隴右‧劍南의 10개 道로 행정구역을 나누었다.
역주5 置軍節度 號爲方鎭 : 唐나라 초기에 北周 및 隋나라의 제도를 따라 중요한 지역에 總管을 두어 몇 州의 軍事를 총괄하게 하다가 후에 都督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睿宗 景雲 2년(711)에 처음으로 節度使를 설치하였고 玄宗 天寶 초에 沿邊에 9개 절도사를 두어 그 지역의 軍‧民과 財政을 총괄하고, 그 관할 지역 안의 각 州‧軍의 刺史들은 모두 그 下屬이 되게 하였다. 方鎭은 한 方面의 軍事 지역과 업무를 鎭守한다는 뜻이다.
역주6 僖昭 : 僖宗과 昭宗의 병칭이다. 희종은 이름이 李儇이고 재위기간이 874~888년이다. 소종은 이름이 李曄이고 사실상 唐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마지막 황제인 哀帝가 즉위했을 때, 당나라는 이름만 남았고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다. 소종의 재위기간은 889~904년이다.
역주7 : 五代의 後梁을 가리킨다. 907년 朱溫이 稱帝하여 지금 河南省 開封 지역인 汴 땅에 도읍하여 국호를 梁이라 하였다. 세 명의 황제를 거쳐 17년 만인 923년에 後唐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주8 天下別爲十一……而朱氏所有七十八州以爲梁 : 後梁 초기에 중국이 11개 나라로 나뉘어, 후량 외에도 吳‧吳越‧荊南‧楚‧閩‧南漢‧岐‧前蜀‧燕‧晉의 10개 나라가 있었다.
吳는 楊行密이 893년에 당나라 淮南節度使로 楊州에 있다가 902년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吳王이 되어, 지금의 江蘇‧安徽‧江西‧湖北省 등의 일부 지역에 걸친 영토를 가졌다가 937년 南唐에 병합되었다.
浙은 吳越을 가리킨다. 893년에 錢鏐가 당나라 鎭海節度使가 되었고, 그 후에 지금의 浙江 지역 및 江蘇의 일부 지역에 걸친 영토를 가졌다가 907년에 책봉되어 吳越王이 되었고, 杭州에 도읍을 세웠다. 978년에 宋나라에 항복하였다.
荊은 荊南으로, 907년에 高季興이 後梁의 節度使가 되었고 924년에 後唐 莊宗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南平王이 되었다. 그래서 역사에서 荊南 또는 南平이라 부른다. 지금의 湖北省 江陵, 公安 일대 지역을 영토로 가졌고 荊州에 도읍을 세웠다. 963년에 송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湖는 楚이다. 896년에 馬殷이 지금의 湖南省 지역을 점거하고 있다가 907년 후량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楚王이 되어 長沙에 도읍을 세웠다. 952년에 南唐에 의해 멸망되었다.
閩은 893년 王潮가 지금의 福建省 지역을 점거하고 있다가 福建節度使에 임명되었고 그 아우 王審이 907년에 후량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閩王이 되어 長樂에 도읍을 세운 나라이다. 왕심의 아들 王延政 때에 와서 국호를 殷으로 고쳤다가 945년에 南唐에 의해 멸망되었다.
漢은 904년에 劉隱이 당나라 靑海軍節度使가 되어 지금의 廣東省‧廣西省 일대를 차지하다가 그 후에 後梁 貞元 3년(917)에 그의 아우 劉龔이 稱帝하고 廣州에 도읍을 세운 나라이다. 처음에는 국호를 吳越이라 하다가 漢으로 고쳤다. 역사에서 이 나라를 南漢이라 한다. 972년에 송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岐는 唐 僖宗 때 李茂貞이 武定‧鳳翔節度使를 역임하고 隴西郡王에 봉해졌으며 昭宗 때 岐王에 봉해져 세운 나라이다. 그 영토는 岐州‧隴州 등의 지역이었다. 923년에 後唐 莊宗이 후량을 멸망시키고 後唐을 세우니, 이무정이 表를 올려 稱臣하였다.
蜀은 903년 唐 昭宗 때 王建이 蜀王에 봉해졌고 907년에 왕건이 稱帝하고 成都에 도읍을 세운 나라이다. 국호를 蜀이라 했는데 역사에서는 前蜀이라 부른다. 925년에 孟知祥에게 멸망되었다.
後唐 明帝 때 촉왕에 봉해진 맹지상이 四川‧陝西 지역을 중심으로 925년에 세운 나라를 後蜀이라 한다. 후촉은 41년 만인 965년 宋나라에 합병되었다.
894년에 晉王 李克用이 劉仁恭을 幽州留守로 삼았는데 당나라에서 그에게 盧龍節度使를 제수하였다. 그 후 유인공의 아들 劉守光이 아버지를 감금하고 형을 살해하고 절도사의 자리를 차지했는데, 909년에 그가 後梁의 책봉을 받아서 燕王이 되었다. 그리고 911년 스스로 大燕皇帝라 일컬었으니, 이 나라가 바로 燕인데 晉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891년 唐 僖宗이 沙陀部 사람 李克用을 晉王에 봉했는데 이극용이 죽자 그의 아들 李存勖이 스스로 즉위하여 진왕이 되었다가 923년에 後梁을 멸망시키고 稱帝하여 국호를 唐이라 하였다. 이것이 역사에서 後唐이라 부르는 나라이다.
朱氏는 朱溫을 가리킨다. 그가 黃巢의 난에 가담하였다가 882년 관군에 항복하여 唐 僖宗으로부터 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 뒤 황소의 잔당과 그 밖의 군웅을 평정한 공로로 梁王에 봉해졌다. 후에 그는 昭宗을 살해하고 哀帝를 세웠으며, 907년에 애제로부터 帝位를 讓受받아 梁나라를 세우고 開封을 수도로 정함으로써 당나라를 멸망시켰다. 이 나라가 역사에서 말하는 後梁이다.
역주9 莊宗 : 後唐 李存勖의 廟號이다.
역주10 同光 : 後唐 莊宗의 年號(923~926)이다.
역주11 石氏入立 獻十有六州于契丹而得蜀金州 : 石氏는 石敬瑭을 가리킨다. 석경당은 처음 河東에서 군대를 일으켰는데 桑維翰의 건의에 따라 거란의 나라인 遼에게 스스로 臣子라고 칭하고 중국 북방의 燕州‧雲州 등 16州, 즉 소위 燕雲十六州를 遼나라에 넘겨주고 지원군을 얻어서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晉나라(936~946)를 세웠다. 이 나라를 역사에서 後晉이라 한다. 석경당이 죽고 出帝 石重貴가 즉위하여 景延廣의 주장에 따라 요나라와의 치욕적인 맹약을 폐기했다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역주12 又增置之州一 : 後晉의 高祖인 石敬瑭이 威州를 설치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13 劉氏 : 947년에 後晉의 河東節度使인 劉知遠이 세운 나라인 後漢을 가리킨다. 汴 땅에 도읍하고 국호를 漢이라 했는데, 역사에서 후한이라 한다. 두 황제를 거치고 겨우 4년인 950년에 後周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주14 隱帝時 增置之州一 : 隱帝는 後漢의 高祖인 劉知遠의 둘째 아들 劉承祐를 가리킨다. 그는 乾祐 원년(948) 2월에 즉위하였고 재위 기간이 3년이었다. 즉위한 해에 解州를 더 설치하였다.
역주15 郭氏 : 五代 때 後周를 가리킨다. 이 나라는 951년에 後漢의 무장인 郭威가 後漢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로, 汴 땅에 도읍하였고 국호는 周인데 역사에서 後周라 한다.
역주16 十州入于劉旻 : 劉旻(895~954)은 五代十國시대 十國 중의 하나였던 北漢을 건국했던 神武帝를 가리킨다. 그의 初名은 劉崇이었고 後漢의 高祖 劉知遠의 아우이다. 그는 後漢의 武將인 郭威가 2대 황제 隱帝를 시해하고 옹립했던 劉贇의 아버지인데, 郭威가 劉贇을 살해하고 後周를 건국하자 後漢을 북쪽에서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北漢을 세워 忻州‧代州‧嵐州‧石州‧憲州‧麟州‧幷州‧汾州‧沁州‧遼州의 10州를 차지하였다.
역주17 世宗取秦鳳階成瀛莫及淮南十四州 : 後周 世宗 顯德 원년(955)에 蜀을 정벌하여 秦州‧鳳州‧階州‧成州를 빼앗았고, 현덕 4, 5년에는 南唐을 정벌하여 淮南 14州를 취하였다. 현덕 6년에는 거란을 정벌하여 瀛州‧莫州를 취하였다. 막주를 취했다는 기록은 《新五代史》 〈世宗紀〉에는 없다. 세종은 邢州 龍岡 사람으로, 본명은 柴榮이며 後周의 太祖 郭威의 양자이다.
역주18 南唐 : 五代十國의 하나로 937년에 李昪이 吳를 멸망시키고 金陵에 도읍하여 국호를 唐이라 하였는데 역사에서 南唐이라 한다. 975년에 宋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주19 : 劍閣이라는 縣을 가리킨다. 지금의 四川省 劍閣縣 동북쪽에 古城이 있다.
역주20 山南西道 : 唐 玄宗 開元 연간에 山南道를 山南 東道‧西道로 나누었다. 山은 太華山과 終南山 두 산을 가리킨다.
역주21 : 五嶺을 가리킨다. 오령은 중국 江西, 湖南, 廣東, 廣西 네 省의 접경에 위치한 다섯 산인 大庾嶺‧越城嶺‧騎田嶺‧萌渚嶺‧都龐嶺을 가리킨다.
역주22 東漢 : 五代十國시대 十國의 하나로 劉旻(895~954)이 세운 北漢의 이칭이다.
역주23 : 唐나라 때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 軍‧守捉‧鎭‧戍 등의 행정구역을 두었는데, 軍이 그중에서 가장 크다.
역주24 羈縻 : 말에 굴레를 씌우고 소에 고삐를 매어 통제한다는 말로, 이민족들을 회유하여 적당히 친선을 유지하는 중국의 외교 방법이다. 前漢 司馬相如의 〈難蜀父老〉에 “대개 천자가 이적을 다루는 것은 그 이치가 기미의 방책을 써서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일 뿐이다.[蓋天子之牧夷狄也 其義羈縻勿絶而已]”라고 하였다.
역주25 虛名之州 在其間 : 唐나라의 州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실권은 없고 다른 민족이 통치하는 지방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역주26 : 《五代史》 〈職方考〉의 圖表를 가리킨다. 이 도표에 지방 행정구역인 州‧府 등의 명칭과 각 나라의 영역을 상세히 표시하였는데, 도표는 빼고 이 글만 발췌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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