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注]窒은 謂窒塞也니 皆惕然後에 可以獲中吉이라
疏
凡訟之體, 不可妄興, 必有信實, 被物止塞, 而能惕懼,
.
疏
[疏]正義曰:‘終凶’者, 訟不可長, 若終竟訟事, 雖復窒惕, 亦有凶也.
‘不利涉大川’者, 以訟不可長, 若以訟而往涉危難, 必有禍患,
訟有孚나 窒惕中吉은 剛來而得中也요 終凶은 訟不可成也요 利見大人은 尙中正也요 不利涉大川은 入于淵也라
注
[注]凡不和而訟하니 无施而可로되 涉難特甚焉이라
唯有信而見塞懼者는 乃可以得吉也로되 猶復不可終하여 中乃吉也라
不閉其源하여 使訟不至니 雖每不枉이나 而訟至終竟이면 此亦凶矣라 故雖復有信이나 而見塞懼하여 猶不可以爲終也라
故로 曰 訟有孚나 窒惕하여 中吉이니 終凶也라하니라
而令有信塞懼者로 得其中吉은 必有善聽之主焉이니 其在二乎인저
以剛而來하여 正夫群小하고 斷不失中하니 應斯任也라
疏
‘訟 上剛下險 險而健 訟’者, 上剛卽乾也, 下險卽坎也, 猶人意懷險惡, 性又剛健, 所以訟也.
案, 上“需須也”, 以釋卦之名, 此訟卦, 不釋訟名者, 訟義可知, 故不釋也.
諸卦其名難者則釋之, 其名易者則不釋之, 他皆倣此.
疏
[疏]‘訟有孚 窒惕中吉 剛來而得中’者, 先疊出訟之繇辭, 以剛來而得中者, 釋所以訟得其有孚窒惕中吉者,
言
九二之剛來向下體, 而處下卦之中, 爲訟之主, 而聽斷獄訟, 故訟者得其有孚, 窒惕中吉也.
‘終凶 訟不可成’者, 釋終凶之義, 以爭訟之事, 不可使成,
‘利見大人 尙中正’者, 釋利見大人之義, 所以於訟之時, 利見此大人者, 以時方鬬爭, 貴尙居中得正之主而聽斷之.
‘不利涉大川 入于淵’者, 釋不利涉大川之義, 若以訟事, 往涉于川, 卽必墜于深淵而陷于難也.
疏
○正義曰:‘无施而可’者, 言若性好不和, 又與人鬬訟, 卽无處施設而可也, 言所往之處, 皆不可也.
‘涉難特甚焉’者, 言好訟之人, 習常施爲, 已且不可, 若更以訟涉難, 其不可特甚焉,
‘中乃吉’者, 謂此訟事, 以中途而止, 乃得吉也. 前注云“可以獲中吉”, 謂獲中止之吉.
‘不閉其源 使訟不至’者, 若能謙虛退讓, 與物不競, 卽此是閉塞訟之根源, 使訟不至也, 今不能如此, 是不閉塞訟源, 使訟得至也.
‘雖每不枉 而訟至終竟’者, 謂雖每訴訟, 陳其道理, 不有枉曲, 而訟至終竟, 此亦凶矣.
注
[注]
인저하니 无訟
은 在於謀始
요 謀始
는 在於作制
니 契之不明
은 訟之所以生也
라
疏
○正義曰:天道西轉, 水流東注, 是天與水相違而行, 相違而行, 象人彼此兩相乖戾, 故致訟也.
不云水與天違行者, 凡訟之所起, 必剛健在先, 以爲訟始, 故云“天與水違行”也.
‘君子以作事謀始’者, 物旣有訟, 言君子當防此訟源.
凡欲興作其事, 先須謀慮其始, 若初始分職分明, 不相干涉, 卽終无所訟也.
疏
○正義曰:‘訟之所以起 契之過’者, 凡鬬訟之起, 只由初時契要之過, 謂作契要不分明.
‘有德司契’者, 言上之有德, 司主契要, 而能使分明以斷於下, 亦不須責在下之人有爭訟也.
注
凡陽唱而陰和하여 陰非先唱者也니 四召而應하고 見犯乃訟이라
處訟之始하여 不爲訟先하니 雖不能不訟이나 而了訟必辯明矣리라
疏
○正義曰:‘不永所事’者, 永, 長也, 不可長久爲鬬訟之事, 以訟不可終也.
‘小有言 終吉’者, 言終吉者, 言初六應于九四, 然九四剛陽, 先來非理犯己, 初六陰柔見犯乃訟,
雖不能不訟, 是不獲已而訟也, 故小有言, 以處訟之始, 不爲訟先, 故終吉.
疏
○正義曰:‘處訟之始’者, 始入訟境, 言訟事尙微, 故云“處訟之始”也.
‘不爲訟先’者, 言己是陰柔, 待唱乃和, 故云“不爲訟先”也.
不永所事는 訟不可長也니 雖小有言이나 其辯明也라
疏
[疏]正義曰:‘訟不可長’者, 釋不永所事, 以訟不可長, 故不長此鬬爭之事.
‘其辯明’者, 釋‘小有言’, 以訟必辯析分明, 四雖初時犯己, 己能辯訟, 道理分明, 故初時小有言也.
九二는 不克訟하여 歸而逋其邑이니 人三百戶면 无眚하리라
注
[注]以剛處訟하여 不能下物하고 自下訟上하니 宜其不克이니
邑過三百이면 非爲竄也니 竄而據强이면 災未免也라
疏
○正義曰:‘不克訟’者, 克, 勝也, 以剛處訟, 不能下物, 自下訟上, 與五相敵, 不勝其訟, 言訟不得勝也.
‘歸而逋其邑’者, 訟旣不勝, 怖懼還歸, 逋竄其邑, 若其邑强大, 則大都偶國, 非逋竄之道.
‘人三百戶 无眚’者, 若其邑狹少, 唯三百戶, 乃可也.
又鄭注周禮小司徒云“方十里爲成, 九百夫之地, 溝渠城郭道路三分去其一, 餘六百夫.
又以田有不易, 有一易, 有再易, 定受田三百家, 卽此三百戶者, 一成之地也.”
鄭注云“不易之田, 歲種之, 一易之田, 休一歲乃種, 再易之地, 休二歲乃種, 言至薄也.
疏
○正義曰:‘若能以懼 歸竄其邑 乃可免災’者,
.
疏
[疏]正義曰:‘歸逋竄’者, 釋歸而逋邑, 以訟之不勝, 故退歸逋竄也.
注
[注]體夫柔弱以順於上하여 不爲九二自下訟上하고 不見侵奪하여 保全其有라
故曰貞厲요 柔體不爭하고 繫應在上하여 衆莫能傾이라
疏
○正義曰:‘食舊德’者, 六三以陰柔順從上九, 不爲上九侵奪, 故保全己之所有,
‘貞厲’者, 貞, 正也, 厲, 危也, 居爭訟之時, 處兩剛之間, 故須貞正自危厲,
‘或從王事 无成’者, 三應於上, 上則壯而又勝,
疏
[疏]正義曰:‘從上吉’者, 釋所以食舊德以順從上九, 故得其吉, 食舊德也.
疏
[疏]正義曰:九四旣非理陵犯於初, 初能分辯道理,
注
故
로 其咎不大
하니 若能反從本理
하여 變前之命
하고 安貞不犯
하여 不失其道
하면 라
疏
○正義曰:‘復卽命渝’者, 復, 反也, 卽, 就也, 九四訟旣不勝,
若能反就本理, 變前與初爭訟之命, 能自渝變休息, 不與初訟, 故云“復卽命渝.”
‘安貞吉’者, 旣能反從本理, 渝變往前爭訟之命, 卽得安居貞吉.
疏
復, 反也, 卽, 從也, 本理謂原本不與初訟之理, 當反從此原本不爭之理,
初不犯己, 己莫陵於初, 是爲仁義之道, 自由於己,
注
[注]處得尊位하여 爲訟之主하여 用其中正하여 以斷枉直하니 中則不過하고 正則不邪하며 剛无所溺하고 公无所偏이라
疏
○正義曰:‘處得尊位 爲訟之主’者, 居九五之位, 當爭訟之時, 是主斷獄訟者也.
案, 上注云“善聽之主, 其在二乎.” 是二爲主也, 此注又云“爲訟之主, 用其中正, 以斷枉直.” 是五又爲主也.
疏
猶若復卦初九是復卦之主, 復義在于初九也, 六五亦居復之尊位, 爲復卦尊位之主, 如此之例, 非一卦也.
所以然者, 五居尊位, 猶若天子總統萬機, 與萬物爲主, 故諸卦皆五居尊位,
諸爻則偏主一事, 猶若六卿春官主禮秋官主刑之類, 偏主一事, 則其餘諸爻各主一事也,
卽六卿總歸於天子, 諸卦之爻, 皆以九五爲尊位也.
若卦由五位, 五又居尊, 正爲一主也, 若比之九五之類, 是也.
今此訟卦, 二旣爲主, 五又爲主, 皆有斷獄之德, 其五與二爻, 其義同然也,
疏
[疏]案, 上彖辭“剛來而得中.” 今九五象辭云“訟元吉, 以中正也.” 知彖辭剛來得中, 非據九五也.
輔嗣必以爲九二者, 凡上下二象, 在於下象者, 則稱來.
是離下艮上, 而稱柔來, 今此云“剛來而得中.” 故知九二也.
九二在二陰之中, 故稱來, 九五在外卦, 又三爻俱陽, 不得稱來.
‘以斷枉直’者, 枉, 曲也, 凡二人來訟, 必一曲一直, 此九五聽訟, 能斷定曲直者,
疏
所以訟得大吉者, 以九五處中而得正位, 中則不有過差, 正則不有邪曲, 中正爲德, 故元吉.
疏
[疏]正義曰:‘或錫之鞶帶’者, 上九以剛居上, 是訟而得勝者也.
若以謙讓蒙錫, 則可長保有, 若因訟而得勝, 雖或錫與鞶帶, 不可長久, 終一朝之間, 三被褫脫,
疏
以其因訟得勝, 受此錫服, 非德而受, 亦不足可敬,
凡言或者, 或之言, 有也, 言或有如此, 故言或,
則上云“或從王事无成”, 及坤之六三“或從王事无成”之類, 是也.
此訟一卦及爻辭, 竝以人事明之, 唯‘不利涉大川’, 假外物之象, 以喩人事.
송訟은 진실이 있으나 막혀 두려워하여 중도中道에 그치면 길하다.
注
‘질窒’은 막힘을 이르니, 모두 두려워한 뒤에 중도中道에 그치면 길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疏
무릇 쟁송爭訟이라는 것은 남과 불화不和함이 있어서 정情이 서로 어그러지고 다투어 쟁송을 이루는 것이다.
무릇 쟁송하는 체體는 망령되이 일으킬 수가 없어서 반드시 신실信實이 있어야 하고, 남의 저지와 막힘을 당하고서 두려워하여 중도中道에 그치면 비로소 길함을 얻는 것이다.
끝까지 하면 흉하니, 대인大人을 봄이 이롭고 대천大川을 건넘은 이롭지 않다.
疏
정의왈正義曰:[終凶]쟁송爭訟은 장구하게 해서는 안 되니, 만약 쟁송하는 일을 끝까지 하면 비록 다시 막혀 두려워하더라도 또한 흉함이 있는 것이다.
[利見大人] 남과 이미 쟁송이 있으면 모름지기 대인이 결단하여야 한다.
[不利涉大川] 쟁송은 장구하게 해서는 안 되니 만약 쟁송함으로써 가서 위태로움과 험난함을 건너면 반드시 화환禍患이 있다.
그러므로 ‘대천大川을 건넘은 이롭지 않은 것’이다.
“송訟은 위는 강하고 아래는 험하여, 험하고 굳센 것이 송괘訟卦이다.
‘송訟은 진실이 있으나 막혀 두려워하여 중도中道에 그치면 길함’은 강剛이 와서 중中을 얻었기 때문이요, ‘끝까지 하면 흉함’은 쟁송을 이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요, ‘대인大人을 봄이 이로움’은 〈대인大人은〉 중정中正을 숭상하기 때문이요, ‘대천大川을 건넘이 이롭지 않음’은 깊은 못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注
무릇 불화不和하여 쟁송爭訟하니, 베푸는 곳마다 가可한 데가 없으나 험난함을 건넘이 특히 심하다.
오직 진실이 있으면서 막힘을 당하여 두려워하는 자는 비로소 길함을 얻을 수 있으나 오히려 다시 끝까지 해서는 안 되므로 중도中道에 그치면 비로소 길한 것이다.
그 근원을 막아서 송사가 이르지 않도록 하지 못하니, 비록 매번 잘못하지 않으나 송사를 끝까지 함에 이르면 이 또한 흉하므로, 비록 다시 진실이 있으나 막힘을 당하여 두려워해도 오히려 끝까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송訟은 진실이 있으나 막혀 두려워하여 중도에 그치면 길하니 끝까지 하면 흉하다.”라고 한 것이다.
송사를 잘 다스리는 자가 없으면 비록 진실함이 있다 한들 어떻게 밝힐 수 있겠는가.
진실이 있으면서 막혀 두려워하는 자로 하여금 중도에 그쳐 길함을 얻게 하는 것은 반드시 송사를 잘 다스리는 주체가 있기 때문이니, 이는 구이九二에 있을 것이다.
강剛으로서 와서 여러 소인小人들을 바로잡고 결단함에 중도를 잃지 않으니, 이 임무에 응하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이는 요사繇辭(卦辭)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訟 上剛下險 險而健 訟] 위의 강함은 바로 건乾이고 아래의 험함은 바로 감坎이니, 사람의 마음에 험악함을 품고 성품이 또 강건剛健한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쟁송하는 것이다.
이 두 구句는 괘卦의 상象을 인하여 쟁송이 있는 이유를 드러낸 것이다.
살펴보건대, 위에서는 “수需는 기다림이다.”라고 하여 괘卦의 이름을 해석하였는데, 이 송괘訟卦에서는 송訟의 이름을 해석하지 않은 것은 송訟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
여러 괘卦에 그 이름이 알기 어려운 것은 해석하였고, 그 이름이 알기 쉬운 것은 해석하지 않았으니,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다.
疏
[訟有孚 窒惕中吉 剛來而得中] 먼저 송괘訟卦의 요사繇辭를 거듭 드러낸 것이니, ‘강剛이 와서 중中을 얻었다.[剛來而得中]’는 것을 가지고 쟁송함에 ‘진실이 있으나 막혀 두려워서 중도에 그치면 길함[有孚 窒惕中吉]’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을 해석한 것이다.
구이九二의 강剛이 하체下體를 향하여 와서 하괘下卦의 가운데에 처하여 송괘訟卦의 주체가 되어서 옥사獄事와 쟁송爭訟을 다스려 결단하므로, 쟁송하는 자가 ‘유부有孚 질척중길窒惕中吉’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終凶 訟不可終] ‘끝까지 하면 흉함’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쟁송하는 일은 〈끝까지 하여〉 이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利見大人 尙中正] ‘대인大人을 봄이 이로움’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쟁송할 때에 이 대인을 봄이 이로운 까닭은 이때에 막 싸우고 있으므로 중中에 거하고 정正을 얻은 주체를 높여 송사를 다스리고 결단함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不利涉大川 入于淵] ‘대천大川을 건넘이 이롭지 않음’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만약 쟁송을 가지고 가서 냇물을 건너려고 하면 반드시 깊은 못에 떨어져 험난함에 빠지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无施而可] 만약 성품이 불화不和를 좋아하고 또 남과 싸우고 쟁송하면 베푸는 곳마다 가可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니, 가는 곳마다 모두 불가함을 말한 것이다.
[涉難特甚焉] 쟁송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도常道에 맞는 일을 시행하더라도 이미 불가한데, 만약 다시 쟁송을 가지고 험난함을 건너면 그 불가함이 특별히 심함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험난함을 건넘이 특히 심하다.[涉難特甚焉]”라고 말한 것이다.
[中乃吉] 이 쟁송을 중도에 그쳐야 비로소 길함을 얻음을 말한 것이니, 앞의 주注에 “가이획중길可以獲中吉”이라고 한 것은 중지하면 길함을 얻음을 말한 것이다.
[不閉其源 使訟不至] 만약 겸허하고 사양하여 남과 다투지 않으면 바로 이 쟁송하는 근원을 막아서 쟁송이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제 이와 같이 하지 못하면 이는 쟁송의 근원을 막지 못하여 쟁송이 이르게 되는 것이다.
[雖每不枉 而訟至終竟] 비록 매번 쟁송함에 그 도리를 말하여 잘못함이 있지 않으나 쟁송이 끝까지 이르면 이 또한 흉함을 말한 것이다.
“하늘이 물과 어겨서 가는 것이 송괘訟卦이니, 군자君子가 이것을 보고서 일을 할 적에 시작을 잘 도모한다.”
注
〈공자孔子가〉 “쟁송을 다스림이 내 남과 같이 하나 반드시 백성들로 하여금 쟁송함이 없게 하겠다.” 하셨으니, 쟁송함이 없게 함은 시작을 잘 도모함에 달려 있고, 시작을 잘 도모함은 제도를 잘 만드는 데 달려 있으니, 문계文契(계약 문서)가 분명하지 않음은 쟁송이 생겨나는 이유이다.
사물마다 그 분수가 있어서 직책을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 쟁송이 어디로 말미암아 일어나겠는가.
그러므로 덕德이 있는 자가 사계司契하여 남을 독촉하지 않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천도天道는 서쪽으로 돌고 물은 흘러 동쪽으로 들어가니, 이것이 하늘이 물과 서로 어겨서 가는 것인바, 서로 어겨 감은 사람이 피차彼此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쟁송을 이룸을 형상한 것이다.
‘물이 하늘과 어겨서 간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무릇 쟁송이 시작되는 바는 반드시 강건함이 앞에 있어서 쟁송의 시초가 되므로 “하늘이 물과 어겨서 간다.[天與水違行]”라고 말한 것이다.
[君子以作事謀始] 일에 이미 쟁송이 있으면 ‘군자君子가 마땅히 이 쟁송의 근원을 막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무릇 이 일을 일으키고자 하면 먼저 그 시작을 도모하고 생각하여야 하니, 만약 처음에 직책을 나누기를 분명히 하여 서로 간섭하지 않게 하면 끝내 쟁송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訟之所以起 契之過] 무릇 싸우고 쟁송함이 일어남은 단지 처음의 계요契要(문서의 약속)의 잘못에서 연유하니, ‘계요契要를 만들 적에 분명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有德司契]덕德이 있는 윗사람이 문계文契를 맡고 주관하여 분명하게 해서 아래에서 결단할 수 있게 하고, 또한 모름지기 아래에 있는 사람을 독촉해서 쟁송이 있지 않게 함을 말한 것이다.
‘덕德이 있는 이가 사계司契한다.’는 글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보인다.
초육初六은 쟁송爭訟하는 일을 길게 하지 않으면, 다소 말(구설)이 있으나 끝내 길하리라.
注
쟁송爭訟의 시초에 처하였으니, 쟁송을 끝까지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쟁송하는 일을 길게 하지 않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길한 것이다.
무릇 양陽이 선창하면 음陰이 화답하여 음陰은 선창하는 자가 아니니, 구사九四가 부르면 응하고 침범을 당하면 비로소 쟁송한다.
쟁송의 시초에 처하여 쟁송을 먼저 하지 않으니, 비록 쟁송을 안 하지는 못하나 쟁송을 끝마침에 반드시 분변分辯하여 밝을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不永所事] ‘영永’은 길게 하는 것이니, 싸우고 쟁송하는 일을 길게(장구하게) 해서는 안 됨은 쟁송은 끝까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小有言 終吉] ‘종길終吉’이라고 말한 것은 초육初六이 구사九四에 응하나 구사九四의 강양剛陽이 먼저 와서 비리非理(도리가 아닌 것)로 자기를 침범하여, 초육初六의 음유陰柔가 침범을 당하고 나서 비로소 쟁송하였으니,
비록 쟁송을 안 하지는 못하나 이는 부득이하여 쟁송한 것이므로 ‘조금 말이 있는 것’이요, 쟁송의 시초에 처하여 쟁송을 먼저 하지 않았으므로 ‘끝내 길함’을 말한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處訟之始] 처음 쟁송하는 경계에 들어간 것이니, 송사訟事가 아직 미미함을 말하였으므로 “쟁송의 시초에 처하였다.[處訟之始]”라고 한 것이다.
[不爲訟先] 자기가 음유陰柔여서 선창하기를 기다려 비로소 화답함을 말하였으므로 “쟁송을 먼저 하지 않는다.[不爲訟先]”라고 한 것이다.
“쟁송하는 일을 길게 하지 않음은 쟁송은 길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비록 다소 말이 있으나 그 분변함이 밝은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訟不可長] ‘쟁송하는 일을 길게 하지 않음’을 해석한 것이니, 쟁송은 길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싸우고 다투는 일을 길게 하지 않는 것이다.
[其辯明] ‘다소 말이 있음’을 해석한 것이니, 쟁송함에 반드시 분변하기를 분명하게 하여야 하니, 구사九四가 비록 처음에는 자기를 침범하였으나 자기가 변론하고 쟁송함을 잘하여 도리가 분명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다소 말이 있는 것’이다.
구이九二는 쟁송하여 이기지 못하고서 돌아가 자기 고을에 숨는 것이니, 사람이 300호戶쯤 되게 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注
강剛으로서 송訟의 때에 처하여 남에게 낮추지 못하고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과 쟁송하니, 이기지 못함이 당연하다.
만약 능히 두려움으로써 자기 고을로 돌아가 숨으면 비로소 재앙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고을이 300호를 넘으면 도망가는 것이 아니니, 도망가더라도 강한 곳을 점거하면 재앙을 면치 못한다.
疏
○정의왈正義曰:[不克訟] ‘극克’은 이김이니, 강剛으로서 송訟의 때에 처하여 남에게 낮추지 못하고,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과 쟁송하여 구오九五와 서로 맞서나 쟁송을 이기지 못하니, 쟁송을 이길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歸而逋其邑] 쟁송하여 이미 이기지 못하면 두려워하고 돌아가서 자기의 고을로 돌아가는 것이니, 만약 그 고을이 강대하여 큰 도시여서 국도國都와 대등할 만하면 이는 도망하여 숨는 방도가 아니다.
[人三百戶 无眚] 고을이 협소하여 오직 300호戶가 되는 것과 같게 하여야 비로소 가可한 것이다.
‘삼백호三百戶’는 《예기禮記》의 정현鄭玄 주注에 “작은 나라 하대부下大夫의 제도이다.” 하였고,
또 《주례周禮》 〈소사도小司徒〉의 정현鄭玄 주注에 “사방 10리里가 성成이 되니 900부夫의 땅인데, 여기에 구거溝渠와 성곽과 도로로 3분의 1을 제하면 600부夫가 남는다.
또 전지田地에는 불역不易이 있고 일역一易이 있고 재역再易이 있어서 정해진 수전受田은 300가호이니, 이 300호戶라는 것은 일성一成의 땅이다.” 하였다.
정현鄭玄의 주注에 “불역不易의 전지田地는 해마다 곡식을 심고, 일역一易의 전지田地는 1년을 쉬고서 비로소 곡식을 심고, 재역再易의 땅은 2년을 쉬고서 비로소 곡식을 심으니, 지극히 척박함을 말한 것이다.
만일 스스로 감추고 은둔하여 감히 구오九五와 서로 맞서지 않으면 재앙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疏
○정의왈正義曰:[若能以懼 歸竄其邑 乃可免災] 이 주注의 뜻과 같이 할 경우, 경문經文에 칭한 ‘기읍其邑’ 두 글자를 위에 연결하여 구句로 삼고, ‘인삼백호人三百戶’를 아래에 합쳐 구句로 삼아야 한다.
“쟁송을 이기지 못함은 돌아가 숨는 것이니,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과 쟁송함은 화환禍患의 이름이 스스로 줍듯이 하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歸逋竄] ‘돌아가서 고을로 도망함’을 해석한 것이니, 쟁송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가서 도망하여 숨는 것이다.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과 쟁송하는 것은 패역悖逆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화환禍患의 옴이 마치 손으로 직접 물건을 줍는 것과 같은 것이니, 화환禍患이 반드시 옴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왕숙王肅은 “마치 손으로 물건을 줍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육삼六三은 옛 덕德을 먹으니, 바르고 위태롭게 여기나 끝내 길할 것이다.
注
체體가 유약하여 위(上九)를 순히 따라서 구이九二처럼 아래에서 윗사람과 쟁송하지 않고 침탈을 당하지 않아서 자신의 소유를 보전한다.
그러므로 옛 덕德을 먹어서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쟁송하는 때에 거하고 두 강剛의 사이에 처하여, 모두 가까이 있는 자들과 뜻이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르고 위태롭게 여긴다.’고 하였고, 유순한 체體로 쟁송하지 않고 계응繫應(正應)이 위에 있어서 사람들이 기울게 할 수 없다.
위가 건장하여 다투면 이기므로 거스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혹 왕의 일에 종사하면 감히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食舊德]육삼六三이 음유陰柔로서 상구上九에게 순종하여 상구上九에게 침탈을 당하지 않으므로 자기의 소유를 보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덕德과 녹祿과 지위地位를 먹는 것이다.
[貞厲] ‘정貞’은 바름이요, ‘여厲’는 위태로움이니, 쟁송의 때에 거하고 두 강剛의 사이에 처하였으므로 모름지기 바르고 스스로 위태롭게 여긴다.
그러므로 “바르고 위태롭게 여긴다.[貞厲]”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육삼六三이 유순한 체體로 쟁송하지 않고 계응係應(繫應)이 위에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기울게 할 수 없다.
[或從王事 无成]육삼六三이 상구上九에 응하니 상구上九는 건장하고 또 이긴다.
그러므로 육삼六三이 혹 상구上九의 왕사王事에 종사하면 감히 저촉하거나 거스르지 못하여 감히 먼저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루지 못한다.[无成]”라고 말한 것이다.
“옛 덕德을 먹음은 윗사람을 따르면 길한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從上吉] 옛 덕德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상구上九에게 순종하기 때문에 그 길함을 얻어서 옛 덕德을 먹을 수 있는 것임을 해석한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구사九四가 이미 비리非理로 초육初六을 능멸하고 침범하였는데, 초육初六이 도리道理를 분변分辯하였다.
그러므로 구사九四가 쟁송에 이기지 못한 것이다.
돌아와 바른 이치에 나아가 명命을 고쳐서 정貞을 편안히 여기면 길하리라.
注
윗자리에 처하여 아랫사람과 쟁송하는 것은 고치고 변할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 허물이 크지 않으니, 만약 돌아와 본래의 이치(도리)를 따라서 예전의 명命을 변화시키고 정貞을 편안히 하여 범하지 않아서 그 도道를 잃지 않으면 인仁을 행하는 것이 자기에게 말미암은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復卽命渝] ‘복復’은 돌아옴이요, ‘즉卽’은 나아감이니, 구사九四가 쟁송에 이미 이기지 못하였으니,
만약 돌아와 본래의 이치에 나아가서 예전에 초육初六과 쟁송하려던 명命을 변화시키고, 스스로 변하고 휴식하여 초육初六과 쟁송하지 않으므로 “돌아와 바른 이치에 나아가 명命을 고친다.[復卽命渝]”라고 말한 것이다.
[安貞吉] 이미 돌아와 본래의 이치를 따라서 종전의 쟁송하려던 명命을 변화시키면 편안히 정貞에 거하여 길吉함을 얻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若能反從本理] ‘복즉復卽’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복復’은 돌아옴이요, ‘즉卽’은 따름이요, ‘본리本理’는 원본原本(원래)에 초육初六과 쟁송하지 않는 이치를 이르니, 마땅히 돌아와 이 원본原本의 쟁송하지 않는 이치를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돌아와 본래의 이치를 따른다.[反從本理]”라고 한 것이다.
다만 경문經文의 ‘투渝’자를 뒤바꾸어 ‘명命’자 위에 두었다.
그러므로 “예전의 명命을 변화시킨다.[變前之命]”라고 한 것이다.
‘전명前命’은 예전에 초육初六과 서로 쟁송하려던 명命을 이르니, 이제 마침내 변화시킨 것이다.
[安貞不犯]구사九四가 편안히 정정貞正에 거하여 다시는 초육初六을 범하지 않음을 이른다.
그러므로 “정貞을 편안히 하여 범하지 않는다.[安貞不犯]”라고 말한 것이다.
[爲仁由己 故吉從之] ‘위인유기爲仁由己’는 《논어論語》의 글이다.
초육初六이 자기를 침범하지 않아서 자기가 초육初六을 능멸하지 않으니, 이는 인의仁義의 도道를 행하는 것이 자기에게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仁을 행함이 자기에게 말미암는다.[爲仁由己]”라고 말한 것이다.
“돌아와 바른 이치에 나아가서 명命을 바꿈은 정貞을 편안히 하여 도道를 잃지 않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安貞不失] ‘돌아와 바른 이치에 나아가서 명命을 바꿈’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치로 돌아와 명命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안정安貞의 길함을 얻어서 그 도道를 잃지 않는 것이다.
注
처함이 높은 지위를 얻어 쟁송을 결단하는 주체가 되어서 자기의 중정中正함을 사용하여 굽음과 곧음을 결단하니, 중도中道에 맞으면 지나치지 않고 바르면 간사하지 않으며, 강하면 빠지는 바가 없고 공정하면 편벽되는 바가 없다.
疏
○정의왈正義曰:처함이 높은 지위를 얻고 중中하고 또 정正하여 옥송獄訟을 결단한다.
疏
○정의왈正義曰:[處得尊位 爲訟之主]구오九五의 자리에 거하여 쟁송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이는 옥송獄訟을 결단하는 것을 주관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 괘卦의 안에 옥송을 결단하는 사람이 모두 두 주체가 있다.
살펴보건대, 위의 주注에 “송사를 잘 다스리는 주체는 구이九二에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구이九二가 주체가 된 것이요, 이 주注에 또 “쟁송을 결단하는 주체가 되어서 자기의 중정中正함을 사용하여 굽음과 곧음을 판단한다.” 하였으니, 이는 구오九五가 또 주체가 된 것이다.
疏
한 괘卦에 두 주체가 있는 것은, 무릇 여러 괘卦 안에 이와 같은 경우가 많다.
오효五爻는 바로 그 괘卦의 높은 지위의 주체요, 나머지 효爻는 그 괘卦의 뜻의 주체가 된다.
예컨대 복괘復卦의 초구初九는 바로 복괘復卦의 주체이니 복괘復卦의 뜻은 초구初九에 있고, 육오六五 또한 복괘復卦의 높은 지위에 거하여 복괘復卦의 높은 지위의 주체가 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예例가 한두 괘卦가 아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오효五爻가 높은 지위에 거하였으니, 마치 천자天子가 만기萬機를 총괄해서, 만물萬物과의 관계에 있어 주체가 되는 것과 같으므로 여러 괘卦에 모두 오효五爻가 높은 지위에 거하는 것이다.
여러 효爻는 편벽되이 한 가지 일을 주장하니, 이는 마치 육경六卿에 춘관春官(禮部)은 예禮를 주관하고 추관秋官(刑部)은 형벌을 주관하는 것과 같은 따위여서 한 가지 일만을 편벽되이 주장하니, 그 나머지 여러 효爻는 각각 한 가지 일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육경六卿이 천자天子에게 총괄하여 돌아가는 것이니, 여러 괘卦의 효爻는 모두 구오九五를 높은 지위로 삼는다.
만약 괘卦가 오효五爻의 지위로 말미암고 오효五爻가 또 존위尊位에 있으면 바로 한 주체가 되니, 비괘比卦의 구오九五와 같은 따위가 이것이다.
지금 이 송괘訟卦는 구이九二가 이미 주체가 되었고 구오九五가 또 주체가 되어서 모두 옥송獄訟을 결단하는 덕德이 있으니, 오효五爻와 이효二爻가 그 뜻이 똑같다.
疏
살펴보건대, 위 단사彖辭에 “강剛이 와서 중中을 얻었다.” 하였는데, 지금 구오九五의 상사象辭에는 “쟁송에 크게 길함은 중정中正하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단사彖辭의 “강剛이 와서 중中을 얻었다.”고 한 것은 구오九五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왕보사王輔嗣(王弼)가 이것을 반드시 구이九二라고 말한 이유는 무릇 위아래 두 상象에서 아래 상象에 있는 것을 ‘내來’라고 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괘賁卦에 “유柔가 와서 강剛을 문식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비괘賁卦는 이離가 아래에 있고 간艮이 위에 있는데 유柔가 왔다고 칭하였으니, 지금 여기에서 “강剛이 와서 중中을 얻었다.”고 말하였으므로 강剛이 구이九二임을 아는 것이다.
또 무릇 ‘내來’라고 말한 것은 모두 다른 종류를 근거로 하여 ‘내來’라고 한 것이다.
구이九二가 두 음陰의 가운데 있으므로 내來라고 칭한 것이니, 구오九五가 외괘外卦에 있고 또 세 효爻가 모두 양陽이므로 내來라고 칭할 수 없는 것이다.
효사爻辭 가운데에 또한 아래 괘卦에서 위 괘卦를 향하여 온 것을 내來라고 칭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수괘需卦의 상육上六에 “부르지 않은 손님 세 사람이 올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하괘下卦의 세 양陽이 옴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수괘需卦의 상육上六의 음효陰爻에게 양陽이 와서 찾아옴이니, 또한 같은 종류가 아닌 데로 간 것이므로 내來라고 칭한 것이다.
[以斷枉直] ‘왕枉’은 굽음이니, 무릇 두 사람이 와서 쟁송할 적에 반드시 한 사람은 굽고 한 사람은 곧으니, 이는 구오九五가 쟁송을 다스려서 굽음과 곧음을 결단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굽음과 곧음을 결단한다.[以斷枉直]”라 한 것이다.
“쟁송에 크게 길함은 중정中正하기 때문이다.”
疏
정의왈正義曰:[以中正也] ‘원길元吉’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쟁송에 크게 길함을 얻는 까닭은 구오九五가 중中에 처하고 정위正位를 얻었기 때문이니, 중도에 맞으면 지나침이 있지 않고 바르면 간사함과 왜곡이 있지 않아서 중정中正을 덕德으로 삼으므로 크게 길한 것이다.
상구上九는 혹 반대鞶帶를 하사받더라도 하루아침을 마치는 사이에 세 번 벗으리라.
注
쟁송의 극極에 처하여 강剛으로서 위에 거하였으니, 쟁송하여 승리한 자이다.
쟁송으로써 하사를 받으면 영화를 어떻게 보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루아침을 마치는 사이에 반대鞶帶를 벗는 것이 세 번인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或錫之鞶帶]상구上九가 강剛으로서 위에 거하였으니, 이는 쟁송하여 승리한 자이다.
만약 겸양으로 하사를 받았다면 장구하게 보존할 수 있지만, 쟁송을 인하여 승리하였으면 혹 반대鞶帶를 하사받더라도 장구할 수 없어서 하루아침을 마치는 사이에 세 번 벗김을 당한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을 마치는 사이에 세 번 벗는다.[終朝三褫之]”라고 말한 것이다.
“쟁송으로 관복官服을 받음은 또한 공경할 것이 못 된다.”
疏
정의왈正義曰:‘하루아침을 마치는 사이에 세 번 벗는다.’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쟁송을 인하여 승리해서 이 하사하는 복식을 받은 것이요 덕德으로 받은 것이 아니니, 또한 공경할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을 마치는 사이에 세 번 벗김을 당하는 것’이다.
무릇 ‘혹或’이라고 말하는 것은, ‘혹或’이란 말은 ‘있다’는 뜻이니, 혹시라도 이와 같은 경우가 있으므로 ‘혹或’이라고 말한 것이다.
위에서 “혹 왕의 일에 종사하면 이룸이 없다.”는 것과, 곤괘坤卦의 육삼六三에 “혹 왕의 일에 종사하여 이룸이 없다.”는 따위가 이것이다.
그러므로 두원개杜元凱(杜預)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환공桓公 2년의 “반려류영鞶厲旒纓”에 주注하면서 “반鞶은 큰 띠를 이른다.”고 한 것이다.
이 송訟 한 괘卦와 효사爻辭는 모두 사람의 일을 가지고 밝혔고, 오직 ‘대천大川을 건넘이 이롭지 않다.’는 것만 외물外物의 상象을 빌려 사람의 일을 비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