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序】柏舟는 共姜自誓也라 衛世子共伯이 蚤死어늘 其妻守義러니 父母欲奪而嫁之한대 誓而弗許라 故作是詩以絶之라
箋
○共姜
은 共伯之妻也
니 婦人
은 從夫諡
라 姜
은 姓也
라 僖
는 史記
에 作釐
한대 는 音僖
라하니라
疏
○正義曰:作柏舟詩者, 言其共姜自誓也. 所以自誓者, 衛世子共伯蚤死, 其妻共姜守義不嫁,
其父母欲奪其意而嫁之, 故與父母誓而不許更嫁, 故作是柏舟之詩, 以絶止父母奪己之意.
此誓云‘己至死無他心’, 與鄭伯誓母云‘
’, 皆豫爲來事之約, 卽盟之類也.
疏
【疏】言衛世子者, 依世家, 共伯之死, 時釐侯已葬, ‘
’, 則未成君, 故繫之父在之辭.
言世子, 以別於衆子, 曾子問曰 ‘君薨而世子生’之類也. 春秋公羊之說云 “存稱世子, 君薨稱子某, 旣葬稱子.” 左氏之義, ‘旣葬稱君’, 與此不同.
此詩便文說事, 非史策屬辭之例也. 言共伯者, 共諡伯字. 以未成君, 故不稱爵.
疏
【疏】言早死者, 謂早死不得爲君, 不必年幼也. 世家 “武公和, 篡共伯而立, 五十五年卒.”
楚語曰 “
.” 則未必有死年九十五以後也, 則武公卽位, 四十一二以上, 共伯是其兄, 則又長矣.
妻蓋少, 猶可以嫁. 喪服傳曰 “夫死,
, 子無
, 妻得與之適人.” 是於禮得嫁, 但不如不嫁爲善, 故云‘守義’.
禮記云 “一與之齊, 終身不改.” 故夫死不嫁, 是夫妻之義也. 此敍其自誓之由也, 自誓, 卽下云‘至死矢靡他.’ 是也.
但上四句, 見己所以不嫁之由, 下二句, 乃追恨父母奪己之意.
疏
○正義曰:
, 列女傳曰 “曹大家云釐音僖.” 則古今字異而音同也.
箋
【箋】箋云 舟在河中은 猶婦人之在夫家하니 是其常處라
傳
【傳】髧은 兩髦之貌라 髦者는 髮至眉니 子事父母之飾이라 儀는 匹也라
箋
【箋】箋云 兩髦之人은 謂共伯也니 實是我之匹이라 故我不嫁也라 禮에 世子昧爽而朝하니 亦櫛纚笄總拂髦冠緌纓이라
○禮
에 子生三月
이면 翦髮爲
하고 長大作髦
하여 以象之
라
傳
【傳】矢는 誓요 靡는 無요 之는 至也니 至己之死라도 信無它心이라
傳
【傳】諒은 信也라 母也天也 尙不信我라 天은 謂父也라
疏
○正義曰:言汎汎然者, 彼柏木之舟, 在彼中河, 是其常處, 以興婦人在夫家, 亦是其常處.
今我旣在夫家矣, 又髧然著彼兩髦之人共伯, 實維是我之匹耦, 言其同德齊意矣.
其人雖死, 我終不嫁, 而父母欲奪己志, 故與之誓言, ‘己至死, 誓無變嫁之心, 母也父也, 何謂尙不信我也, 而欲嫁我哉.’
疏
○正義曰:旣夕禮云 “旣殯, 主人脫髦.” 注云 “兒生三月, 翦髮爲鬌, 男角女羈,
否則男左女右, 長大猶爲之飾, 存之, 謂之髦, 所以順父母幼小之心. 至此尸柩不見, 喪無飾, 可以去之. 髦之形象未聞.”
內則注云 “髦者, 用髮爲之, 象幼時鬌, 其制未聞.” ‘髮至眉’, 亦無文, 故鄭云 “其制未聞.”
內則云 “子事父母, 總拂髦.” 是子事父母之飾也. 言‘兩’者, 以象幼時鬌, 則知
, 故‘兩髦’也.
疏
【疏】喪大記云 “小斂, 主人脫髦.” 注云 “士旣殯而脫髦, 此云小斂, 蓋諸侯禮也.
士之旣殯, 諸侯之小斂, 於死者, 俱三日也.” 則脫髦, 諸侯小斂而脫之.
此共伯之死, 時僖侯巳葬, 去髦久矣, 仍云‘兩髦’者, 追本父母在之飾, 故箋引‘世子昧爽而朝’, 明君在時事也.
髦者, 事父母之飾也, 若父母有先死者, 於死三日, 脫之, 服闋, 又著之, 若二親竝沒, 則因去之矣, 玉藻云 “親沒不髦.” 是也.
疏
○正義曰:以共伯已死, 不忍斥言, 故以兩髦言之也. 世子昧爽平旦而朝君, 初亦如是.
櫛髦, 乃櫛纚笄, 內則注云 “纚, 所以韜髮者也, 笄, 今之簪.” 則著纚, 乃以簪約之.
又著總, 又拂髦而著之, 故內則注云 “拂髦, 振去塵而著之, 旣著髦, 乃加冠, 又著緌纓, 然後朝君也.”
禮世子之記曰 “朝夕至于寢門外.” ‘朝’, 卽昧爽也. 又內則云 “由命士以上, 父子皆異宮, 昧爽而朝.” 世子亦是命士以上, 故知‘昧爽’也.
疏
【疏】‘文王之爲世子, 雞初鳴而衣服, 至於寢門外’者, 鄭玄云 “文王之爲世子也, 非禮之制, 故不與常世子同也.”
內則云 “子事父母, 雞初鳴, 端韠紳.” 注云 “端, 玄端, 士服也, 庶人, 以深衣.” 然則命士以下, 亦於雞鳴之時朝者,
命士以下, 當勉力從事, 因早起而適父母之所, 不主爲朝也.
異宮者, 則敬多, 故內則注云 “
.” 是也. 但文王之爲世子, 加隆焉, 故雞初鳴而至寢門耳.
疏
【疏】內則云 “子事父母, 雞初鳴, 咸盥潄․櫛纚笄總․拂髦․冠․緌․纓․端․鞞․紳․搢笏.”
謂命士以上, 父子異宮, 昧爽而朝, 更不言衣服之異, 則纚笄以下同, 故云‘亦櫛․纚笄․總․拂髦․冠緌纓也’.
禮記文王世子云 “親疾, 世子親齊玄冠而養.” 蓋亦衣
端矣. 不幷引端․韠․紳․搢笏者, 以證經之兩髦, 故盡首服而已.
士冠禮曰 “皮弁笄, 爵弁笄.” 注云 “
.” 然則此冠, 言緌纓, 則無笄矣.
上言纚笄者, 爲纚而著笄也. 問喪曰 “
.” 注云 “雞斯, 當爲笄纚.” 是著纚, 必須笄也.
疏
○正義曰:序云 ‘父母欲奪而嫁之’, 故知天謂父也. 先母後天者. 取其韻句耳.
序
〈백주柏舟〉는 공강共姜이 스스로 맹세한 시이다. 위 세자衛 世子 공백共伯이 일찍 죽자, 그의 처 〈공강共姜이〉 절의를 지켰는데, 친정 부모가 〈수절하려는〉 뜻을 빼앗아 재가再嫁시키려 하자 맹세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시를 지어 거절한 것이다.
箋
○공강共姜은 공백共伯의 처妻이니, 부인婦人은 남편의 시호諡號를 따른다. 강姜은 성姓이다. ‘희僖’는 ≪사기史記≫에 ‘희釐’로 썼는데, 조대가曹大家는 음音이 희僖라고 하였다.
疏
○정의왈正義曰:〈백주柏舟〉시詩를 지은 것은 공강共姜이 스스로 맹세함을 말한 것이다. 스스로 맹세한 이유는 위 세자衛 世子 공백共伯이 일찍 죽자 그의 처 공강妻 共姜이 절의를 지켜 재가하지 않았는데,
친정부모가 그의 절의를 빼앗아 시집보내려 하였으므로 부모에게 맹세하여 다시 시집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백주柏舟〉시詩를 지어 자기의 절의를 빼앗으려 한 부모의 생각을 그치게 한 것이다.
여기에서 맹서盟誓하기를 ‘나는 죽음에 이르더라도 다른 마음이 없다.’라고 한 것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정백鄭伯이 어머니와 맹서하기를 ‘황천에 가기 전에는 서로 만나지 않겠다.’라고 한 것은 모두 앞으로 올 일을 미리 약속한 것이니, 바로 맹세의 종류이다.
疏
‘위 세자衛 世子’라고 말한 것은 ≪사기史記≫ 〈위세가衛世家〉에 의하면 공백共伯이 죽을 당시 희후釐侯를 이미 장사 지냈는데, ‘〈공백共伯이〉 희후釐侯의 묘도에 들어가 자살自殺하였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아직 〈즉위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임금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의 말로 쓴 것이다.
세자世子라 말한 것은 여러 아들들과 구별한 것이니,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서 ‘임금이 죽고 〈장례를 아직 치르지 않았는데〉 세자世子가 태어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한 것과 같은 종류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장공莊公 32년에 이를 설명하여 “군주君主가 살아 있을 때는 사자嗣子를 세자世子라 칭하고, 군주君主가 죽으면 자子 ‘아무개’라고 칭하고, 장사葬事하고 나서는 자子라 칭한다.”라고 하였는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뜻은 ‘장사葬事하고 나면 군君이라 칭한다.’라는 것이니 이와는 다르다.
이 시詩는 편리한대로 글을 써서 일을 설명說明한 것이지, 사책史策에 문장文章을 엮어 사실史實을 배열하는 예例가 아니다. 공백共伯이라고 말한 것은, 공共은 시호諡號이고 백伯은 자字이니 아직 인군人君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작위爵位를 칭하지 않은 것이다.
疏
‘조사早死’라고 한 것은 일찍 죽어 군주君主가 되지 못한 것을 말하니, 반드시 나이가 어린 것은 아니다. ≪사기史記≫ 〈위세가衛世家〉에 “위 무공衛 武公 화和가 공백共伯의 지위를 찬탈하여 군주가 된 지 55년 만에 죽었다.”라고 하고,
≪국어國語≫ 〈초어楚語〉에 “옛 위 무공衛 武公은 나이가 95세였는데도 오히려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깨우쳐 훈계해달라고 요구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죽은 나이가 반드시 95세 이후는 아닐지라도 무공武公이 즉위한 나이가 41, 2세 이상일 것이며, 공백共伯은 바로 그의 형이니 더욱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 처는 아마도 나이가 어려서 오히려 재가할 수 있었을 것이니,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전傳에 “남편이 죽었을 때에 처가 젊고 아들이 어리며, 아들에게 대공친大功親이 없으면 처는 아들을 데리고 시집갈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예법에 재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재가하지 않는 것이 선善이기에 ‘수의守義’라고 한 것이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한 번 혼례를 올려 부부가 되었으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그러기에 남편이 죽으면 재가하지 않는 것이 부부간의 의리이다. 이는 ‘자서自誓’한 이유를 서술한 것이니, 자서自誓는 바로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러도 맹세컨대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겠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다만 위 4구는 자기가 재가하지 않은 이유를 나타낸 것이고, 아래 2구는 바로 부모가 자기의 의지를 빼앗으려 함을 한탄한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사기史記≫에는 ‘희僖’자를 모두 ‘희釐’자로 썼는데, ≪열녀전列女傳≫에 “조대가曹大家가 희釐는 음音이 희僖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고금古今에 글자는 다르나 음은 같은 것이다.
둥둥 뜬 저 잣나무 배 저 황하 중류黃河 中流에 있네
箋
전운箋云:배가 하수 가운데 있음은 부인이 남편의 집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는 그녀가 항상 머물 곳이다.
傳
담髧은 양모兩髦의 모습이다. 모髦는 〈좌우로 늘어뜨린〉 머리털이 눈썹까지 이른 것이니 자식이 부모父母를 섬길 때의 꾸밈이다. 의儀는 짝이다.
箋
전운箋云:양모지인兩髦之人은 공백共伯을 이르니 실로 나의 짝이다. 그리하여 내가 재가하지 않은 것이다. 예禮에 세자世子는 먼동이 트면 부모에게 아침문안을 드리는데, 〈이때에〉 머리를 빗어, 묶고 머리싸개를 하여 비녀를 꽂고, 갈래머리의 먼지를 털어 달고, 관冠을 쓰고, 관冠끈의 남는 부분을 드리운다.
○예禮에 자식이 태어난 지 3개월이 되면 머리털을 잘라내 황새머리를 만들고, 장성해서는 모髦를 만들어 타鬌를 형상한다.
傳
시矢는 ‘맹세함’이고, 미靡는 ‘없음’이며, 지之는 ‘이름’이니 내가 죽음에 이를지라도 진실로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傳
량諒은 ‘믿음’이다. 어머니 아버지가 오히려 내 마음을 믿어주지 않은 것이다. 천天은 아버지를 이른다.
疏
○정의왈正義曰:‘둥실둥실 떠있는 저 잣나무 배가 저 하수 가운데에 있으니 이는 배가 항상 머물 곳’임을 말하여 ‘부인이 남편의 집에 있으니 이 또한 그녀가 항상 머물 곳’임을 흥興한 것이다.
지금 내가 남편의 집에 있고, 또 너풀거리는 양모兩髦를 한 저 사람 공백共伯이 실로 나의 짝이란 것은 그 덕을 같이 하고 뜻을 같이 함을 말한다.
그 사람이 비록 죽었지만 자기는 끝내 시집가지 않을 터인데 친정부모가 자기의 의지를 빼앗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부모에 맹세하기를 ‘내 죽음에 이를지언정 맹세코 바꾸어 재가하려는 마음이 없다. 그런데도 부모는 어찌하여 나를 믿지 못하여 재가시키려 하는가.’라고 한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의례儀禮≫ 〈기석례旣夕禮〉에 “빈례殯禮를 하고 나면 주인主人은 모髦를 벗는다.”라고 하였는데, 주注에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에 머리털을 잘라 타鬌를 만들되, 남아는 각角을, 여아는 기羈를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남아는 좌측, 여아는 우측에 매단다. 장성한 뒤에도 꾸며서 보존하는데, 이것을 ‘모髦’라고 부르니, 부모가 자신을 어리다고 여기시는 마음을 따르는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는 시구尸柩가 보이지 않고, 상喪에는 꾸밈이 없기 때문에 이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모髦의 모양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예기禮記≫ 〈내칙內則〉의 주注에 “모髦는 머리털로 만드니 어린아이 때의 타鬌를 형상한 것인데, 그 제도制度는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고 ‘발지미髮至眉’라는 글도 없다. 그리하여 정현鄭玄이 “그 제도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라고 한 것이다.
〈내칙內則〉에 “자식이 부모를 섬김에 상투하고 모髦에 먼지를 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자식이 부모를 섬길 때 꾸미는 것이다. ‘양兩’이라 말하여 어릴 때의 타鬌를 형상하였으니, 곧 협신挾囟으로 타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양모兩髦’라고 한 것이다.
疏
≪예기禮記≫ 〈상대기喪大記〉에 “소렴小斂을 하고 나서 주인主人은 모髦를 벗는다.”라고 하였는데, 주注에 “사士가 빈殯을 하고 나서 모髦를 벗으니 여기에서 말한 소렴小斂은 아마도 제후의 예인 듯하다.
사士의 기빈旣殯과 제후의 소렴小斂은 죽은 지 모두 3일 만에 한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탈모脫髦’는 제후의 경우 소렴小斂 후에 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백共伯이 죽을 당시에는 희후僖侯를 이미 장사葬事하여 모髦를 벗은 지 오래되었을 것인데도, 그대로 ‘양모兩髦’라고 말한 것은 부모가 살아 있을 때의 꾸밈을 추본追本하여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현鄭玄이 전箋에서 ‘세자매상이조世子昧爽而朝’를 인용하였으니, 이는 인군人君이 살아 있을 때의 일을 밝힌 것이다.
모髦는 부모를 섬길 때의 꾸밈이니, 만약 부모 중에 한분이 먼저 돌아가신 경우에는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모髦를 벗었다가 상복을 벗은 뒤에 다시 달고, 만약 양친이 모두 돌아가신 경우에는 따라서 벗으니, ≪예기禮記≫ 〈옥조玉藻〉의 “부모가 돌아가시면 모髦를 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공백共伯이 이미 죽었음을 차마 드러내어 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양모兩髦’로 말한 것이다. 세자世子는 먼 동이 트는 새벽에 군주君主에게 문안하니 애초부터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즐櫛과 모髦는 바로 빗질하고 머리싸개하고 비녀를 꽂는 것이니, ≪예기禮記≫ 〈내칙內則〉의 주注에 “사纚는 머리털을 감싸는 것이고, 계笄는 지금의 잠簪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머리싸개하고 이에 잠簪을 꽂아 고정시키는 것이다.
또 상투를 틀고 모髦의 먼지를 털어 단다. 그리하여 〈내칙內則〉의 주注에 “불모拂髦는 먼지를 털어내고 다는 것이니, 모髦를 달고서 관을 쓰고 또 관끈을 매고 나머지를 드리운 뒤에 군주君主에게 문안드린다.”라고 한 것이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 “조석朝夕으로 침문寢門 밖에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조朝’는 바로 매상昧爽이다. 〈내칙內則〉에 또 “명사命士 이상은 부자父子가 모두 집을 달리하여 거처하고 매상昧爽에 문안드린다.”라고 하였으니, 세자世子 또한 명사命士 이상이기 때문에 ‘매상昧爽’임을 안 것이다.
疏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의 ‘문왕文王이 세자世子였을 때에 첫 닭이 울거든 의복을 단정히 하고 침문밖에 이르렀다.’라는 것에 대하여 정현鄭玄은 “문왕文王이 〈제후의〉 세자世子였을 때에 행한 것이지 〈왕세자가 행하기 위하여〉 제정된 예가 아니다. 그리하여 보통의 세자와는 다르다.”라고 하였다.
〈내칙內則〉에 “자식이 부모를 모실 때 첫 닭이 울거든 현단복玄端服을 입고 슬갑을 차고 가슴에 띠를 맨다.”라고 하고, 주注에 “단端은 현단玄端이니 사士의 의복이다. 서인은 심의深衣를 입는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명사命士 이하 또한 첫 닭이 울 때에 문안드리는 것은,
명사命士 이하는 생업에 힘써 종사하여야 하므로, 일찍 일어나 부모의 처소에 가는 것이지 문안을 위주로 함이 아니다.
사는 집을 달리하는 것은 공경을 중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내칙內則〉의 주注에 “집을 달리하는 것은 공경을 지극히 함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다만 문왕文王이 세자世子가 되었을 때에 더욱 극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첫닭이 울 때에 침문寢門 밖에 이른 것이다.
疏
〈내칙內則〉에 “자子가 부모를 섬김에 첫닭이 울거든 모두 세수하고 양치질하며, 머리를 빗어 묶고 머리싸개를 하여 비녀를 꽂고, 갈래머리의 먼지를 털어 달고, 관을 쓰고, 관끈을 매고 남는 부분을 드리우며, 현단복玄端服을 입고 슬갑을 차고 띠를 매고, 홀을 꽂는다.”라고 하였는데,
명사命士 이상은 부자가 집을 달리하여 거처하므로 새벽 일찍 문안드리는[매상이조昧爽而朝] 것만을 말하고, 의복衣服의 다름에 대하여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계纚笄 이하의 부분은 〈명사 이하와〉 같다. 그리하여 ‘역즐亦櫛․사纚․계笄․총總․불모拂髦․관冠․유緌․영纓’이라고 한 것이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부모가 아프시거든 세자가 친히 재계하고 현단복玄端服을 입고 관을 쓰고 봉양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현단복을 입는 것이다. 여기에서 ‘단端․필韠․신紳․진홀搢笏’을 아울러 인용하지 않은 것은 경經의 양모兩髦를 증명하기 때문에 수복首服만을 모두 다 말했을 뿐이다.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에 비녀는 “피변皮弁의 비녀와 작변爵弁의 비녀이다.”라고 하였는데, 주注에 “비녀가 있는 관冠은 한 가닥의 끈으로 비녀의 왼쪽 위에 매어 고정시켜 턱 아래로 감고, 다시 오른쪽 위로 향해 올려 비녀에다 매고, 매고 난 나머지 끈을 아래로 드리워 장식하며, 비녀가 없는 것은 두 가닥의 끈으로 관의 양쪽에다 매어 아래로 드리워진 가닥을 턱 아래에서 묶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관은 ‘유영緌纓’을 말하니 비녀가 없는 것이다.
위에서 사계纚笄를 말한 것은 머리싸개를 하여 비녀를 꽂았기 때문이다. ≪예기禮記≫ 〈문상問喪〉에 “부모가 처음 돌아가시면 계사雞斯한다.”라고 하고, 주注에 “계사雞斯는 계사笄纚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머리싸개를 할 때에는 반드시 비녀를 꽂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서序에 ‘부모욕탈이가지父母欲奪而嫁之’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천天이 부父를 말함을 안 것이다. 모母를 먼저하고 천天을 뒤에 함은 운구韻句를 취한 것이다.
〈백주柏舟〉는 2장章이니 장章마다 7구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