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序】何彼襛矣는 美王姬也라 雖則王姬라도 亦下嫁於諸侯니 車服不繫其夫하고 下王后一等이어늘
箋
【箋】下王后一等
은 謂車乘
하되 하고 服則褕翟
이라
○襛
은 韓詩
에 作茙
하니 茙
은 說文云 衣厚貌
라 王姬
는 武王女
니 姬
는 周姓也
라 杜預云
이라
云 古者曰 車聲如居
하니 所以居人也
라하야늘 今曰車音
을 尺奢反
하니 云舍也
라
韋昭曰 古皆音尺奢反이러니 從漢以來로 始有居音이라 繫는 本或作繼라
厭翟
은 王后
之第二者也
라 翟
은 雉也
니 次其羽相迫
이라 故曰厭也
라
疏
○正義曰:作何彼襛矣詩者, 美王姬也. 以其雖則王姬, 天子之女, 亦下嫁於諸侯,
其所乘之車, 所衣之服, 皆不繫其夫爲尊卑, 下王后一等而已, 其尊如是, 猶能執持婦道, 以成肅敬雝和之德, 不以己尊而慢人,
此王姬之美, 卽經云 ‘曷不肅雝 王姬之車’, 是也. 定本雖王姬, 無則字.
疏
【疏】此詩主美肅雝之德, 因言顔色之美. 以善道相求之事, 敍者本其作意, 略不言耳.
王姬者, 王女而姬姓, 春秋 ‘築王姬之館于外’, 杜預云 “不稱字, 以王爲尊.” 是也.
言雖則王姬亦下嫁於諸侯者, 以諸侯之女嫁於諸侯, 是其常令, 雖則王姬之尊, 亦下嫁於諸侯, 亦謂諸侯主也,
然上無二王, 王姬必當嫁於諸侯, 言雖則者, 欲美其能執婦道, 故言雖則, 爲屈尊之辭.
疏
則王姬嫁於王者之後, 似非下嫁, 言王姬必下嫁者, 必二王之後,
,
其實列土諸侯, 不得純敵天子, 亦爲下嫁也. 因姑․姊․妹女子有恩, 二王後有敵義, 故服之, 非實敵也.
若二王之後嫁女於諸侯, 爵雖尊, 非下嫁也, 故魯之孝․惠娶於商, 及宋人來媵, 皆無異於諸侯也, 然得行禮樂, 唯祭爲然也.
疏
【疏】此王姬體王之尊, 故下王后一等, 不繫夫之尊卑, 唯二王後之夫人, 得與王后同, 亦降一等, 不繫於夫也.
此時齊侯子, 未爲諸侯. 若爲諸侯, 其夫人車服, 自當下王后一等, 要本王姬車服不爲繫於夫也.
天子尊無二上, 故其女可下王后一等, 若諸侯之女下嫁, 則各從夫之爵, 不得下其母一等也.
何休云 “天子嫁女於諸侯, 備姪娣, 如諸侯禮義, 不可以天子之尊, 絶人繼嗣之路.”
皇甫謐云 “武王五男二女,
, 王姬宜爲媵, 今何得適齊侯之子, 何休事無所出, 未可據信也. 或以尊, 故命同族爲媵.”
疏
○正義曰:王后五路, 重翟爲上, 厭翟次之, 六服, 褘衣爲上, 褕翟次之.
巾車職云 “王后之五路, 重翟, 鍚面朱總, 厭翟, 勒面繢總, 安車, 彫面鷖總, 皆有容蓋.”
疏
【疏】注云 “重翟, 重翟雉之羽也, 厭翟, 次其羽, 使相迫也.
勒面, 謂以如
龍勒之韋, 爲當面飾也. 彫者, 畫之, 不龍其韋.
安車, 坐乘車, 凡婦人車皆坐乘. 鄭司農云 ‘鍚, 馬面鍚也. 鷖總者, 靑黑色, 以繒爲之.
總著馬勒, 直兩耳與兩鑣. 容謂幨車, 山東謂之裳幃, 或曰潼容’. 玄謂 ‘朱總繢總, 其施之如鷖總, 車衡輨亦宜有焉.’
繢, 畫文也. 蓋, 如今小車蓋也. 皆有容有蓋, 則重翟厭翟謂蔽也. 重翟, 后從王祭祀所乘, 厭翟, 后從王賓饗諸侯所乘.
安車無蔽, 后朝見於王所乘, 謂去飾也. 詩國風碩人曰 ‘翟蔽以朝’, 謂諸侯夫人始來, 乘翟蔽之車, 以朝見於君, 以盛之也.
此翟蔽, 蓋厭翟也. 然則王后始來乘重翟矣.’” 巾車又云 “翟車, 貝面組總, 有握, 輦車, 組
, 有翣羽蓋.”
注云 “翟車以出桑, 輦車宮中所乘.” 此王后五等車所用也.
疏
【疏】其諸侯之夫人始嫁, 及常乘之車則無文, 說者各爲其見,
崔靈恩以爲 “二王之後夫人, 各乘本國先王之上車, 魯之夫人乘重翟. 知者, 以魯夫人服褘衣, 與王后同, 故知車亦同也.
其同姓異姓侯伯夫人皆乘厭翟, 子男夫人乘翟車, 所用助祭饗賓朝見各依差次, 其初嫁之時, 侯伯以下夫人所乘車皆上攝一等.
疏
【疏】崔又一解云 “諸侯夫人初嫁不得上攝, 以其逼王后故也, 卿大夫之妻得上攝一等.” 案鄭注巾車引詩翟茀以朝, 謂厭翟也,
旣不上攝, 鄭注巾車云 “乘翟茀之車以盛之者, 以乘祭祀之車, 故言盛也.”
以五等諸侯夫人初嫁皆乘厭翟, 與鄭不合.
其三公之妻與子男同, 其孤妻夏篆, 卿妻夏縵, 大夫墨車, 士乘棧車, 初嫁皆上攝一等.
之衣, 皆以祭服, 加以纁袡, 約士昏禮女次純衣纁袡故也.
其諸侯夫人用自祭之服, 卿大夫之妻用助祭之服, 此序以經有王姬之車, 故因言車服, 謂嫁時之車服耳,
箋
【箋】箋云 何乎아 彼戎戎者는 乃栘之華라 興者는 喩王姬顔色之美盛이라
箋
【箋】箋云 曷은 何요 之는 往也라 何不敬和乎리오 王姬往乘車也라하니 言其嫁時에 始乘車則已敬和라
○車는 協韻이니 尺奢反이요 又音居라 或云古讀華爲敷니 與居爲韻이라 後放此하다
疏
○正義曰:何乎彼戎戎者, 乃唐棣之華, 以興王姬之顔色, 亦如此華然.
王姬非直顔色之美, 又能執持婦道, 何事不敬和乎. 王姬往乘車時, 則已敬和矣.
以其尊而適卑, 恐有傲慢, 今初乘車時, 已能敬和, 則每事皆敬和矣.
疏
○正義曰:以戎戎者華形貌, 故重言之, 猶柏舟以汎爲汎汎之義. 言戎戎者, 毛以華狀物色言之, 不必有文.
疏
○正義曰:釋木文, 舍人曰 “唐棣, 一名栘.” 郭璞曰 “今白栘也, 似白楊, 江東呼夫栘.”
疏
○正義曰:詩美王姬肅雝, 非云何事不敬和乎, 言事事皆敬和.
王姬始乘車則已敬和, 後至齊侯之家, 自然敬和, 故樂記云 “肅肅, 敬也, 雝雝, 和也.” 夫敬與和, 何事不行也.
箋
【箋】箋云 華如桃李者는 興王姬與齊侯之子 顔色俱盛이라 正王者는 德能正天下之王이라
疏
○正義曰:言何乎彼戎戎者, 其華之色, 如桃李華也, 以興王姬顔色之盛, 與齊侯之子, 誰能有此顔色者, 是平王之孫, 與齊侯之子耳.
上章言唐棣之華, 此章不言木名, 直言華如桃李, 則唐棣之華, 如桃李之華也.
以王姬顔色, 如齊侯之子顔色, 故擧二木也. 箋云‘華如桃李者 興王姬與齊侯之子顔色俱盛’, 是以華比華然後爲興.
疏
○正義曰:此文王也. 文者, 謚之正名也. 稱之則隨德不一, 故以德能正天下則稱平王.
鄭志張逸問 “箋云‘德能正天下之王’, 然則不必要文王也.” 答曰 “德能平正天下, 則稱爲平, 故以號文王焉.”
又大誥注, “受命曰寧王, 承平曰平王.” 故君奭云‘
’, 是文王也.
又洛誥云 “
.” 卽云 “
.” “文王騂牛一, 武王騂牛一.”
則乃命寧, 兼文․武矣, 故注云 ‘周公謂文王爲寧王’. 成王亦謂武王爲寧王, 此一名二人兼之.
武王亦受命, 故亦稱寧王, 理亦得稱平王, 但無文耳.
其釣維何오 維絲伊緡이로다 齊侯之子요 平王之孫이로다
箋
【箋】箋云 釣者
는 以此有求於彼
니 何以爲之乎
아 以絲
綸
이면 則是善釣也
니 以言王姬與齊侯之子 以善道相求
라
疏
○正義曰:其釣魚之法, 維何以爲乎, 維以絲爲繩, 則是善釣, 以興其娶妻之法, 亦何以爲之乎, 維以禮爲之, 則是善娶.
‘釣者 以此有求於彼’, 執絲綸以求魚, 娶者, 以己有求於人, 用善道而相呼. 誰能以善道相求呼者, 乃齊侯之子, 求平王之孫.
上章, 主美王姬適齊侯之子, 故先言‘平王之孫’, 此章, 主說齊侯之子, 以善道求王姬, 故先言‘齊侯之子’.
疏
○正義曰:釋言文, 孫炎曰 “皆繩名也.” 故采綠箋云 “綸 釣繳.” 抑又云 “言緡之絲.”
傳曰‘緡 被’者, 以荏染柔木, 宜被之以弦, 故云‘緡 被’, 謂被絲爲弦也.
綸 禮記云 “王言如絲, 其出如綸.” 謂嗇夫所佩, 與此別.
序
〈하피농의何彼襛矣〉는 왕희王姬를 찬미한 시詩이다. 비록 왕의 딸이라도 제후에게 낮추어 시집을 가니, 이때에는 수레와 복식을 그 남편의 신분에 연계하지 않고 왕후王后보다 한 등급만 낮춘다.
그런데도 오히려 부인의 도리를 지켜 엄숙하게 공경하고 화목하게 하는 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箋
‘하왕후일등下王后一等’은 엽적厭翟의 수레를 타되 말은 늑면勒面에 회총繢總을 하고, 옷은 요적褕翟을 입는 것을 말한다.
○농襛은 ≪한시韓詩≫에는 ‘융茙’자로 되어 있는데, 융茙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옷이 두터운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왕희王姬’는 무왕武王의 딸인데, 희姬는 주周나라 성姓이다. 두예杜預는 “왕희王姬는 왕을 존귀하게 여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석명釋名≫에 “옛날에 거車의 음音이 거居와 같다 하였는데, 사람을 태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거車의 음音을 ‘차’로 하니 ‘머무는 것’을 말한다.
위소韋昭는 “옛날에는 모두 음을 ‘차’로 하였는데, 한대漢代로부터 비로소 거居의 음音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계繫’는 계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엽적厭翟’은 왕후王后의 다섯 가지 수레 중 두 번째이다. ‘적翟’은 ‘꿩’인데, 꿩 깃을 차례로 이어 붙여 끝이 서로 겹치기 때문에 엽厭이라고 한 것이다.
‘
요적褕翟’의
요褕는 음이
요遙이고
적翟은 ‘
적狄’자로 쓰기도 하는데, 왕후의 6
복服 중 두 번째이다.
厭翟(≪六經圖考≫)
疏
서序의 [하피농의何彼襛矣]에서 [지덕之德]까지
○정의왈正義曰:〈하피농의何彼襛矣〉의 시를 지은 것은 왕희王姬를 찬미한 것이다. 비록 왕희가 천자의 딸이지만 역시 제후에게 낮추어 시집을 가니,
이때에는 그녀가 타는 수레와 입는 복식을 모두 남편과 연계하여 높이거나 낮추지 않고 왕후보다 한 등급만 낮추는 것이니, 존귀함이 이와 같은데도 도리어 부도婦道를 잘 지켜 엄숙하고 공경하면서도 화목한 덕을 이루고, 자신의 존귀함으로 남을 업신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왕희의 아름다움이니, 바로 경經에서 ‘어찌 엄숙하고 화목하지 않으리오. 왕희王姬의 수레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정본定本에는 〈‘수즉왕희雖則王姬’가〉 수왕희雖王姬로 되어 있고 ‘즉則’자字가 없다.
疏
이 시는 공경하고 화목한 덕을 위주로 찬미하고, 이어서 안색의 아름다움을 말한 것인데, ‘바른 도로 서로 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서술하는 자가 작자의 뜻을 기본으로 하여 생략하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왕희王姬’는 왕의 딸로서 ‘희姬’성姓이니, ≪춘추春秋≫ 장공 원년莊公 元年에 ‘왕희의 관사를 밖에 지었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두예杜預가 “왕희의 자字를 말하지 않은 것은 왕을 존귀하게 여긴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수즉왕희 역하가어제후雖則王姬 亦下嫁於諸侯’라고 한 것은, 제후의 딸이 제후에게 시집가는 것은 일상의 법이고, 비록 존귀한 왕의 딸이라도 제후에게 낮추어 시집가야 하니, 역시 제후가 주체임을 말한다.
그러나 위[상上]에는 두 왕이 없으므로 왕희는 반드시 제후에게 시집을 가야 하는데, ‘수즉雖則’이라고 말한 것은 왕희가 부도婦道를 잘 지킴을 찬미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수즉雖則’이라고 말하여 존귀함을 굽힌 말로 만든 것이다.
‘하가어제후下嫁於諸侯’란 것은 비록 이왕二王의 후손에게 시집가는 경우라도 그러한 것이다.
疏
≪예기禮記≫ 〈단궁檀弓〉의 주注에 “주周나라의 왕희가 노魯나라의 주관으로 제齊나라에 시집갔다가 죽자, 상복을 내녀內女와 같이 입어주었으나, 천자는 그를 위한 복服이 없었으니 이왕二王의 후손에게 시집간 경우에야 복을 입어준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왕희가 이왕二王의 후손에게 시집가는 것은 ‘하가下嫁’가 아닌 듯한데 ‘왕희王姬는 반드시 낮추어 시집을 간다.’라고 한 것은, 이왕二王의 후손은 반드시 ‘통천삼통通天三統’하여 스스로 정삭正朔을 시행하여 천자와 대등한 의義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땅을 하사받은 제후로서 천자와 완전하게 대등할 수는 없어 역시 하가下嫁가 되고, 고姑․자姊․매妹의 여자에게는 은의恩義가 있고, 이왕二王의 후손에게는 대등한 의가 있어 복服을 입어주는 것이지 실제로 대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이왕二王의 후손이 딸을 제후에게 시집보낼 경우에는 작위는 비록 높지만 하가下嫁는 아니다. 그리하여 노魯나라의 효공孝公과 혜공惠公이 상商에 장가들고, 송인宋人이 잉첩으로 오기까지 하였으니 모두 제후諸侯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예악禮樂은 행할 수 있으니 제례祭禮에서만 그러하다.
疏
이 왕희는 왕의 존귀함을 이어받았다. 그리하여 왕후보다 한 등급을 낮추고, 남편의 높고 낮음과 연계하지 않는 것이다. 이왕二王 후손의 부인만은 지위가 왕후와 동일하다. 그러나 역시 한 등급을 낮추고 남편과 연계하지 않는다.
이때에 제후齊侯의 아들이 아직 제후가 되지 않았다. 만약 제후가 되었다면 그 부인의 수레와 복식은 자연 왕후보다 한 등급을 낮추어야 되니, 요지要旨는 왕희의 수레와 복식이 남편에 연계하지 않는 것이다.
천자의 존귀함은 둘이 없다. 그리하여 천자의 딸은 왕후보다 한 등급 낮출 수 있지만, 만약 제후의 딸이 낮추어 시집가는 경우라면 각각 남편의 작위를 따르고 자기 어머니보다 한 등급 낮출 수 없다.
하휴何休가 “천자가 딸을 제후에게 시집보낼 때에 질姪과 제娣를 제후의 예의와 똑같이 갖추는 것은 천자의 존귀함 때문에 남의 후사後嗣를 잇는 길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황보밀皇甫謐은 “무왕武王의 5남 2녀 중에 맏딸이 호공胡公에게 시집을 갔으니 〈그렇다면〉 왕희는 잉첩이 되었어야 하는데, 지금 어떻게 제후齊侯의 아들에게 갈 수 있었겠는가. 하휴何休가 언급한 일은 출처가 없으니, 근거해 믿을 수 없다. 혹 왕희가 존귀하기 때문에 동족을 명하여 잉첩으로 하였는가 보다.”라고 하였다.
疏
○정의왈正義曰:왕후의 오로五路에는 중적重翟이 첫째이고 엽적厭翟이 다음이며, 육복六服에는 위의褘衣가 첫째이고 요적褕翟이 다음이다. 지금 왕후보다 한 등급을 낮추는 것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수레는 ‘엽적厭翟’을 타고 옷은 ‘요적褕翟’을 입는 것을 안 것이다.
≪주례周禮≫ 〈춘관 건거春官 巾車〉에 “왕후의 오로五路에, 중적重翟은 석면錫面에 주총朱總을 하며, 엽적厭翟은 늑면勒面에 회총繢總을 하며, 안거安車는 조면彫面에 예총鷖總을 하니, 이들 수레 모두 휘장과 덮개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疏
주注에 “중적重翟은 꿩의 깃털을 중첩한 것이고, 엽적厭翟은 꿩의 깃털을 차례로 이어 붙여 서로 겹친 것이다.
늑면勒面은 옥룡玉龍처럼 새긴 가죽으로 말의 얼굴을 꾸미는 것이고, 조彫는 가죽에 그림을 그리고 용을 새기지 않은 것이다.
안거安車는 앉아서 타는 수레인데 부인의 수레는 모두 앉아서 탄다. 정사농鄭司農은 ‘양鍚은 말의 얼굴에 붙이는 양鍚 장식이다. 예총鷖總은 청흑색이니 비단으로 만든다.
총總은 말의 굴레에 붙여 두 귀와 양 재갈을 곧게 한 것이다. 용容은 수레의 휘장을 말하는데, 산동山東에서는 상위裳幃라 부르고, 혹은 동용潼容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는데, 나(정현鄭玄)는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주총朱總과 회총繢總은 예총鷖總처럼 설치하니 수레의 멍에와 바퀴통 휘갑쇠에도 설치한다.
회繢는 무늬를 그린 것이다. 개蓋는 지금의 작은 수레의 덮개와 같다. 모두 용容과 개蓋가 있는 경우는 곧 중적重翟과 엽적厭翟의 가림막을 말한다. 중적重翟은 왕후가 왕을 따라 제사할 때 타는 수레이고, 엽적厭翟은 왕후가 왕을 따라 제후를 빈향賓饗할 때 타는 수레이다.
안거安車에는 폐蔽가 없는데, 왕후가 왕을 조현朝見할 때 타는 수레이니 장식을 제거한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국풍 석인國風 碩人〉에서 「적폐翟蔽 타고 조회 드리네.[적폐이조翟蔽以朝]」라고 하였으니, 이는 제후의 부인이 처음 시집올 때에 적폐翟蔽의 수레를 타고 와서 인군을 뵙는 것을 말하니, 성대하게 한 것이다.
이 적폐翟蔽는 엽적厭翟이다. 그렇다면 왕후가 처음 시집올 때는 중적重翟을 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건거巾車〉에 또 “적거翟車는 패면貝面에 직조織組한 총總을 하고 휘장이 있으며, 연거輦車는 직조한 만輓을 하고 먼지를 막는 삽翣과 일산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주注에 “적거翟車는 뽕밭에 나갈 때 타고, 연거輦車는 궁중에서 타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왕후의 5등급 수레가 쓰이는 곳이다.
疏
제후의 부인이 처음 시집갈 때와 평상시 타는 수레에 대한 글은 없으나, 해설하는 자들이 각자 자기의 견해를 설명하였다.
최영은崔靈恩은 “이왕 후손二王 後孫의 부인은 각각 자기 나라의 선왕이 타던 으뜸의 수레를 타는데, 노魯나라의 부인이 중적重翟을 탔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노魯나라의 부인이 위의褘衣를 입어 왕후와 동등하였기 때문에 수레도 같음을 안 것이다.
동성同姓이나 이성異姓의 구분 없이 후侯와 백伯의 부인은 모두 엽적厭翟을 타고, 자子와 남男의 부인은 적거翟車를 타는데, 조제助祭․향빈饗賓․조현朝見의 용도에는 각각 차등을 따르지만, 처음 시집올 때에는 후侯와 백伯 이하의 부인이 타는 수레는 모두 위로 한 등급 올린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사士의 처가 묵거墨車를 타 위로 대부의 수레로 대체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가,
疏
최영은崔靈恩이 또 다시 해석하여 “제후의 부인이 처음 시집갈 때에 상위의 수레로 대체하지 못하는 것은 왕후와 대등해지기 때문이지만, 경대부卿大夫의 처는 위로 한 등급을 높일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살펴보면 정현鄭玄이 〈건거巾車〉에 주注를 내면서 〈위풍 석인衛風 碩人〉 시에 ‘적거翟車를 타고 가 조회하네[적불이조翟茀以朝]’라고 한 것을 인용하였으니, 엽적厭翟을 이른다.
위衛나라는 후侯의 작위이기 때문에 엽적厭翟인 것이니, 최씨崔氏의 나중 해석은 정현鄭玄의 주注와 같다.
이미 위로 높이지 못하는데, 정현鄭玄이 〈건거巾車〉에서 “적불翟茀의 수레를 타 성대하게 하는 것은 제사 지내려 갈 때 타는 수레이기 때문에 ‘성대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주注하였으니, 두 유씨劉氏가 5등급의 제후부인諸侯夫人은 처음 시집갈 때 모두 엽적厭翟을 탄다고 한 것은 정현鄭玄과 부합하지 않는다.
삼공三公의 처는 자子․남男의 처의 경우와 동일하고, 고경孤卿의 처는 하전夏篆의 수레를 타고, 경卿의 처는 하만夏縵의 수레를 타고, 대부의 처는 묵거墨車를 타고, 사士의 처는 잔거棧車를 타는데, 처음 시집올 때에는 모두 한 등급을 높인다.
처음 시집갈 때의 옷은 모두 제복祭服에 검은색 단을 대니, ≪의례儀禮≫ 〈사혼례士昏禮〉의 ‘시집가는 여인은 차피次髲를 하고 순의純衣에 검은색 단을 댄다.’라고 한 것을 간략히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후 부인은 자신이 제사 지낼 때의 예복을 입고, 경대부卿大夫의 처는 제사를 도울 때의 예복을 입는데, 여기의 서序에서는 경經에 왕희의 수레가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수레와 복식을 말하였으니, 시집갈 때의 수레와 복식을 말한다.
만약 자기 나라에 있는 경우라면 자기 남편에 연계하여 각기 그의 작위를 따른다.
저리도 무성한건 무엇인가 산앵두 꽃이로세
산앵두 꽃(≪모시품물도고毛詩品物圖攷≫)
傳
흥興이다. 농襛은 ‘무성함’과 같다. 당체唐棣는 ‘산앵두’이다.
箋
전운箋云:저리 무성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산앵두의 꽃이다. 흥興한 것은 왕희의 안색이 매우 아름다움을 비유한 것이다.
○이栘는 곽박郭璞은 “지금의 흰 산앵두이니 ‘백양白楊과 비슷하고, 강동江東에서는 부이夫栘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어찌 공경하고 화목하지 않으리오 왕희王姬의 수레로세
箋
전운箋云:갈曷은 ‘어찌’이고, 지之는 ‘감’이다. ‘어찌 공경하고 화목하지 않겠는가. 왕희가 시집가면서 탄 수레이다.’라고 하였으니, 시집갈 때 처음 수레를 탔는데 이미 공경하고 화목하였음을 말한다.
○차車는 협운協韻이니 척尺과 사奢의 반절反切인 ‘차’이며 또 다른 음은 거居이다. 혹자或者는 지화之華의 화華를 부敷로 읽어 거居자와 운韻이 된다고 하였다. 뒤의 경우도 이와 같다.
疏
○정의왈正義曰:저리 무성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산앵두의 꽃이니, 이것으로 왕희의 얼굴이 이 꽃처럼 아름다움을 흥興한 것이다.
왕희가 얼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부인의 도리까지도 잘 지키니, 무슨 일인들 공경하고 화목하지 않겠는가. 왕희가 시집가러 수레를 탈 때에 이미 공경하고 화목하였다.
존귀함으로 신분이 낮은 곳에 시집을 오니 오만함이 있을까 염려되었는데, 지금 처음 수레를 탔을 때 이미 공경하고 화목하였으니, 그렇다면 일마다 모두 공경하고 화목할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융융戎戎’은 꽃의 모습이기 때문에 거듭하여 말한 것이니, 〈패풍 백주邶風 柏舟〉에서 범汎을 범범汎汎의 뜻으로 여긴 것과 같다. 융융戎戎이라 한 것은 모형毛亨이 꽃의 모습으로 물색物色을 말한 것이니, 〈전箋에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疏
○정의왈正義曰:≪이아爾雅≫ 〈석목釋木〉의 글인데, 사인舍人은 “당체唐棣는 일명 이一名 栘이다.”라고 하고, 곽박郭璞은 “지금의 백이白栘이니 백양白楊과 비슷하고, 강동江東에서는 부이夫栘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疏
○정의왈正義曰:시가 왕희의 공경함과 화목함을 찬미하였으니, ‘무슨 일로 공경하고 화목치 않으리오.’ 한 것이 아니고, 일마다 모두 공경하고 화목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왕희가 처음 수레를 탔을 때에 이미 공경하고 화목하였으니, 제후齊侯의 집에 이른 뒤에도 자연 공경하고 화목할 것이다. 그리하여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숙숙肅肅은 공경함이고, 옹옹雝雝은 화목함이다.”라고 하였으니, 공경하고 아울러 화목한다면 무슨 일인들 행하지 못하겠는가.
저리도 무성한건 무엇인가 화사하네 복숭아 오얏 꽃처럼
李(오얏)(≪毛詩品物圖攷≫)
傳
평平은 ‘바름’이다. 무왕武王의 딸이자 문왕文王의 손녀인 〈왕희王姬가〉 제후齊侯의 아들에게 시집간 것이다.
箋
전운箋云:‘화여도리華如桃李’는 왕희와 제후齊侯의 아들이 모두 안색이 출중함을 흥興한 것이다. 정왕正王은 덕이 천하를 바르게 한 왕이다.
疏
○정의왈正義曰:저리도 무성한 것은 무엇인가. 꽃의 색이 마치 복숭아와 오얏 꽃과 같다고 말한 것이니, 이것으로 안색이 출중한 왕희와 제후齊侯의 아들을 흥興하여, ‘누가 이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는가. 바로 문왕文王의 손녀와 제후齊侯의 아들이다.’라고 한 것이다.
상장上章에서 ‘당체지화唐棣之華’를 말하였는데, 이 장에서는 나무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화여도리華如桃李’라고만 말하였으니, 그렇다면 ‘당체지화唐棣之華는 도桃․이李의 꽃과 같은 것이다.
왕희의 안색이 제후齊侯의 아들 안색과 같았다. 그리하여 두 나무를 든 것이다. 전箋에서 ‘화여도리華如桃李는 왕희와 제후齊侯의 아들이 모두 안색이 출중함을 흥興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화사함을 꽃과 비유한 뒤에 흥興으로 여긴 것이다.
疏
전傳의 [평정야平正也]와 전箋의 [정왕자 덕능정천하지왕正王者 德能正天下之王]
○정의왈正義曰:이 〈평왕平王〉은 문왕文王이다. ‘문文’은 시호의 정식 명칭이니, 문文이라 시호할 때에는 그 덕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그리하여 ‘덕이 천하를 바르게 하면 평왕平王이다.’라고 한 것이다.
≪정지鄭志≫에서 장일張逸이 “전箋에서 ‘덕이 천하를 바르게 한 왕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반드시 문왕文王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라고 묻자, “덕이 천하를 평정하면 평平이라 한다. 그리하여 문왕文王이라 한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또 ≪상서尙書≫ 〈대고大誥〉의 주注에서 “천명을 받으면 영왕寧王이라 하고, 태평함을 서로 이어받으면 평왕平王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상서尙書≫ 〈군석君奭〉에서 ‘〈상제上帝께서 의義를〉 결단하여 영왕寧王에게 덕을 거듭 권면하였다.[할신권영왕지덕割申勸寧王之德]’라고 할 때의 〈영왕寧王은〉 문왕文王이다.
또 ≪상서尙書≫ 〈낙고洛誥〉에 “사람을 보내어 은나라 사람을 경계하고 마침내 명命을 받아 편안하게 하였다.”라고 하고, 이어서 “내가 검은 기장과 울금으로 빚은 술 두 잔을 올리고 ‘밝게 공경하노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고, “증제사烝祭祀에 문왕文王에게는 붉은 소 한 마리를 올리고, 무왕武王에게도 붉은 소 한 마리를 올렸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내명녕乃命寧’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겸한다. 그리하여 주注에서 ‘주공周公이 문왕文王을 영왕寧王으로 부른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성왕成王도 무왕武王을 영왕寧王으로 불렀으니, 이는 하나의 명칭에 문文․무武 두 왕을 겸한 것이다.
무왕武王도 천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역시 영왕寧王이라 한 것이나, 이치상 평왕平王으로도 부를 수 있었을 것인데 다만 관련된 글이 없다.
낚시는 무엇으로 하는가 명주 낚싯줄이라네 제후의 아들이요 문왕의 손녀라네
傳
이伊는 〈어조사인〉 유維이고, 민緡은 ‘낚싯줄’이다.
箋
전운箋云:낚시란 이것으로 저것을 구하는 것이니, 무엇을 가지고 하는가? 명주실로 낚싯줄을 만들면 낚시를 잘할 수 있다. 이로써 왕희王姬와 제후齊侯의 아들이 선한 도로 서로 구함을 말한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낚시질 하는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명주실로 낚싯줄을 만들면 이것이 낚시를 잘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장가가는 법을 또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합당한 예로 하면 이것이 훌륭하게 장가가는 것임을 흥興한 것이다.
전箋의 ‘조자 이차유구어피釣者 以此有求於彼’는 명주 낚싯줄로 물고기를 잡는 것이고, 장가감은 자기가 남에게 구함이 있는 것이니 바른 도로 서로 부르는 것이다. 바른 도로 서로 찾아 부른 자는 누구인가? 바로 제후齊侯의 아들이 평왕平王의 손녀를 찾은 것이다.
윗장은 왕희가 제후齊侯의 아들에게 시집감을 위주로 하여 찬미하였기 때문에 ‘평왕平王의 손녀[평왕지손平王之孫]’를 먼저 말하고, 이 장은 제후齊侯의 아들이 바른 도로서 왕희를 구함을 위주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제후齊侯의 아들[제후지자齊侯之子]’을 먼저 말한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이아爾雅≫ 〈석언釋言〉의 글인데, 손염孫炎은 “〈민緡과 윤綸은〉 모두 줄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소아 채록小雅 采綠〉의 전箋에 “윤綸은 낚싯대에 매다는 줄이다.”라고 하고, 〈대아 억大雅 抑〉에도 “명주 줄을 매닮이여.[언민지사言緡之絲]”라고 하였는데,
그 전傳에서 말한 ‘민緡은 줄을 나무에 거는 것이다.[민 피緡 被]’는 유연한 나무가 활시위를 매기 알맞다. 그리하여 ‘민 피緡 被’라고 한 것이니, 명주실을 매어 활시위를 만든 것을 말한다.
‘윤綸’을 ≪예기禮記≫ 〈치의緇衣〉에서 “왕의 말씀이 처음에는 실같이 가늘고 작은 소리이더니, 나오고 나서는 윤綸과 같았다.”라고 하였으니, 〈이 윤綸은〉 색부嗇夫(옥송獄訟을 담당하는 관리)가 지니는 것을 말하니, 이 시와는 다르다.
〈하피농의何彼襛矣〉는 3장章이니 장章마다 4구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