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봄에 은공이 융戎과 잠潛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융戎‧적狄‧이夷‧만蠻은 모두 저강氐羌의 별종別種이다. 융戎인데도 회합會合을 기록한 것은 저들의 중국中國의 풍속을 따라 예禮를 행하였기 때문이니, 모두 중국에 거주居住하는 융자戎子‧구지駒支 등을 이른다. 진류陳留제양현濟陽縣 동남에 융성戎城이 있다. 잠潛은 노魯나라 땅이다. [부주]林: 이것이 노魯가 융과 외교外交한 시초이다. 그러므로 융戎과 잠潛에서 회합한 것은 춘추의 초기이고, 오吳와 황지潢池에서 회합한 것은 춘추의 종기終期이니, 이것이 춘추의 시종始終이다.
여름 5월에 거인莒人이 향向으로 들어갔다.注+향向은 작은 나라이다. 초국譙國용항현龍亢縣 동남에 향성向城이 있다. 거국莒國은 지금의 성양城陽거현莒縣이다. 장수將帥의 작위爵位가 낮고 군사가 적기 때문에 ‘인人’이라고 칭한 것이다. 땅을 점유占有하지 않은 것을 입入이라 한다. 그 예例는 양공襄公 13년에 보인다. [부주]林: 이것이 남의 나라로 들어간 시초이다.
무해無駭가 군사를 거느리고 극極으로 쳐들어갔다.注+무해無駭는 노魯나라의 경卿이다. 극極은 작은 부용국附庸國이다. 무해無駭에게 씨氏를 쓰지 않은 것은 사족賜族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족賜族의 예例는 은공隱公 8년에 보인다. [부주]林: 무해가 군대를 거느린 것에서 대부大夫가 제멋대로 군대를 움직인 단서를 볼 수 있다.
가을 8월 경진일에 은공이 융과 당唐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고평高平방여현方與縣 북쪽에 무당정武唐亭이 있다. 8월에는 경진일이 없고 경진은 7월 9일이니, 날짜에 착오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부주]林: 당唐은 노魯나라 땅이다. 이것이 융戎과 결맹結盟한 시초始初이다.
9월에 기紀나라 열수裂繻가 와서 여자를 맞이하였다.注+열수裂繻는 기국紀國의 대부大夫이다. 전傳에 “경卿이 임금을 위해 맞이한 것이다.”고 하여, 경卿이 자신의 아내를 맞이한 것과 구별하였다. 여자를 맞이하기 위해 오는 사람에게 그 나라 임금이 그를 사신使臣으로 보냈다는 ‘사使’字를 쓰기도 하고 이를 쓰지 않기도 하며, 혼례婚禮에 주인主人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사관史官이 각각 그 사실에 따라 기록한 것이니 포폄褒貶의 예例는 아니다.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
겨울 10월에 백희伯姬가 기紀로 시집갔다.注+전傳이 없다. 백희伯姬는 노魯나라의 딸로 열수裂繻가 맞이한 여자이다.
기紀자백子帛이 거자莒子와 밀密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자백子帛은 열수裂繻의 자字이다. 거莒나라와 노魯나라는 묵은 원한이 있기 때문에 기후紀侯가 노魯나라와 혼인婚姻한 뒤에 대부大夫를 시켜 거자莒子와 결맹結盟하게 하여 두 나라 사이를 화해和解시키려 한 것이다. 이에 자백子帛이 노나라를 위해 우호를 맺고 백성을 안식시켰기 때문에 전傳에 “노魯나라 때문이다.”고 한 것이다. 자백子帛을 노魯나라의 대부大夫처럼 대우하여 거자莒子 위에 기록하고 자字를 칭하여 훌륭하게 여겼다. 자字를 칭하는 예例는 민공閔公원년元年에 보인다. 밀密은 거莒나라의 읍邑으로 성양城陽순우현淳于縣 동북에 밀향密鄕이 있다. [부주]林: 이것이 외국과 특상맹特相盟한 시초이다.
12월 을묘에 부인夫人자씨子氏가 훙薨하였다.注+전傳이 없다. 환공桓公이 아직 임금이 되지 않았으니 중자仲子를 부인夫人이라 칭할 수 없다. 그러나 은공隱公이 나라를 사양하려고 환공桓公을 태자로 세웠기 때문에 부인夫人의 예禮로 그 어머니의 상喪을 치르려고 제후諸侯에게 부고赴告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이를 부인夫人이라 칭한 것이다. 그러나 반곡反哭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사葬事지낸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 예例는 은공隱公 3년에 보인다.
정인鄭人이 위衛를 쳤다.注+전쟁戰爭에 종고鍾鼓를 울리며 쳐들어가는 것을 벌伐이라 한다. 그 예例는 장공莊公 29년에 보인다.[부주]林: 정벌征伐은 천자天子의 권한인데, 이것이 제후가 제멋대로 정벌한 시초이다.
傳
2년 봄에 은공隱公이 융戎과 잠潛에서 회합하였으니, 이는 혜공惠公 시대의 우호를 중수重修하기 위함이었다.
융이 결맹을 요청하였으나 은공이 사절하였다.注+그 수호修好는 허락하고 그 결맹은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이적夷狄을 다스리는 방법은 점차적으로 들어 주고 단번에 만족하게 들어 주지 않아야 하기[不一而足] 때문이다.
傳
거자莒子가 향向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향강向姜이 거나라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아注+[부주]林: 강姜은 향녀向女의 성姓이다. 거莒나라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부부夫婦의 금슬琴瑟이 좋지 않기 때문에 거나라에 사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아서 부모의 나라로 돌아간 것이다.향向으로 돌아가자, 여름에 거인莒人이 군사를 거느리고 향向으로 들어가서 강씨姜氏를 데리고 돌아왔다.注+전傳의 뜻은 혼인婚姻의 의리를 상실한 것을 말한 것이다. 득실得失이 크지 않기 때문에 경經에 문사文辭를 달리 만들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전傳에는 그 일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으니, 전문傳文을 자세히 살펴보면 시비是非가 판별되어 경계할 바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
傳
사공무해司空無駭가 군사를 거느리고 극極으로 쳐들어가니, 비금보費庈父(費伯)가 극極을 멸滅하였다.注+노魯나라는 사도司徒‧사마司馬‧사공司空이 모두 경卿이다. 금보庈父는 비백費伯이다. 전년前年에 낭郎에 성城을 쌓았는데, 금년에 그 성으로 인해 극極을 멸망滅亡시켰기 때문에 전년의 전傳에 그 일을 말한 것이다.
傳
융戎이 결맹結盟을 요청하자 가을에 당唐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다시 융戎과 수호修好한 것이다.
傳
9월에 기紀열수裂繻가 와서 노魯나라 딸을 맞이하였으니, 경卿으로서 임금을 위해 맞이한 것이다.
傳
겨울에 기紀자백子帛이 거자莒子와 밀密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이는 노魯나라 때문이었다.
傳
정인鄭人이 위衛를 쳤으니, 이는 공손활公孫滑의 반란을 토벌討伐한 것이다.注+원년에 늠연廩延을 탈취奪取한 반란의 죄를 다스린 것이다.
역주
역주1公會戎于潛 :
中國에서 멀리 사는 西戎은 衣服‧飮食‧言語‧贄幣가 중국과 달라 중국과 會盟할 수 없으므로 杜氏는 이 융을 중국에 와서 사는 羌의 別種이라 한 것이다.
역주2無駭帥師入極 :
朴致遠의 《雪溪隨錄》에 “제 마음대로 極으로 쳐들어간 것인가? 아니면 君命을 받고 쳐들어간 것인가? 前年 겨울 10월에 公子豫가 제 마음대로 군대를 거느리고 갔던 것으로 보면 無駭도 제 마음대로 쳐들어간 것인 듯한데, 四傳에 모두 제 마음대로 했다는 말이 없으니,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역주3紀子帛莒子盟于密 :
조선 朴世采의 《春秋補編》에는 ‘帛’字 위에 어떤 나라 이름이 빠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程子의 說을 인용하여, “紀子‧某伯‧莒子 세 사람이 結盟한 것이다. 杜預가 子帛을 裂繻의 字라 한 것은 옳지 않다. 《춘추》에 大夫를 제후 위에 기록한 例는 없다.”고 하였고, 《雪溪隨錄》에서도 이와 같이 말하였다.
역주4特相盟 :
魯나라 임금이 다른 한 나라 임금과 회합하는 것이다. 두 나라만이 회합할 경우 서로 主人 되기를 사양하기 때문에 회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春秋左氏傳桓公二年傳》 참조
역주5戎 :
원래는 西方에 살던 민족의 총칭으로 춘추시대에 그 일부가 中原으로 진입하여 漢族과 섞여 살았는데, 己氏戎‧北戎‧允戎‧伊洛戎‧犬戎‧驪戎‧蠻戎 등이 있었다.
역주6不一而足 :
《公羊傳》文公 9년 傳에 보이는데, 점차적으로 들어 주어야 하고 단번에 만족하게 들어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후세에서는 사물이나 방법이 많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다는 말로 쓰인다.
역주7莒子……向 :
莒子는 莒나라의 임금으로 姓은 己이며, 向은 莒나라의 남쪽에 있는 작은 나라로 姓은 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