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봄에 등후滕侯와 설후薛侯가 노나라에 와서 조현朝見하였다.注+제후諸侯가 서로 조현朝見한 것이다. 그 예例가 문공文公 15년에 보인다. [부주]林: 이것이 제후가 노魯나라에 조현朝見한 시초이고, 또 여견旅見(여러 제후가 함께 와서 조현朝見하는 것)의 시초이기도 하다.
여름에 은공隱公이 정백鄭伯과 시래時來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시래時來는 내郲이다. 형양현熒陽縣 동쪽에 이성釐城이 있다. 정鄭나라 땅이다.
가을 7월 임오일에 은공이 제후齊侯‧정백鄭伯과 함께 허許로 쳐들어갔다.注+모의謀議에 참여한 것을 급及이라 한다. 도로 허숙許叔을 그곳에 살게 하였기 때문에 멸滅했다고 하지 않은 것이다. 허許는 영천潁川허창현許昌縣이다.
겨울 11월 임진일에 은공隱公이 훙薨하였다.注+사실은 시해弑害된 것인데 훙薨이라고 기록하고, 또 죽은 장소를 말하지 않은 것은 사책史策에 숨겨야 할 바이기 때문이다.
傳
11년 봄에 등후滕侯와 설후薛侯가 노나라에 조현朝見하러 와서 행례行禮의 선후先後를 다투었다.注+설薛은 노국魯國설현薛縣이다. [부주]林: 등滕과 설薛이 똑같이 후작侯爵이기 때문에 먼저 예禮를 행하려고 다툰 것이다.
설후는 “우리나라가 등滕나라보다 먼저 봉封해졌다.注+설薛의 조상 해중奚仲이 하夏나라 때에 봉封해졌으니 주周나라가 생기기 이전에 봉해졌다.”고 하고, 등후는 “우리는 주나라의 복정卜正이고,注+복정卜正은 복관卜官의 장長이다. [부주]朱: 우리 조상은 주周나라 복관卜官의 장長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설나라는 서성庶姓이니, 우리가 설나라보다 뒤에 예禮를 행할 수 없다.注+서성庶姓은 주周나라의 동성同姓이 아니다.”고 하였다.
傳
이에 은공隱公은 우보羽父를 시켜 설후에게 청하기를 “임금님과 등군이 고맙게도 과인寡人의 안부安否를 묻기 위해 오셨습니다.注+[부주]林: 고맙게 노군魯君에게 조현朝見하기 위해 왔다는 말이다.
주周나라 속담에 ‘산에 있는 나무는 공장工匠이 그 장단을 헤아려 사용하고, 빈객賓客을 대접하는 예는 주인이 선후를 선택한다.注+마땅한 바를 선택하여 행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주나라의 종맹宗盟에는 이성異姓이 뒤에 예禮를 행하였습니다.注+맹재서盟載書(盟辭를 기록한 문서文書)에 모두 동성同姓을 먼저 기록한다. 그 예例가 정공定公 4년에 보인다. [부주]林: 이는 주周나라 종실宗室이 맹세할 일이 있으면 모두 동성同姓을 앞에 기록하고 이성異姓을 뒤에 기록했다는 말이다.
과인이 만약 설薛나라에 조현朝見하러 간다면 감히 임성任姓의 제후들과 선후의 서열序列을 다투지 않을 것이니,注+설薛은 임성任姓이다. 치齒는 열列이다. 임금께서 과인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신다면 등군滕君이 먼저 예를 행하도록 청하고자 합니다.注+[부주]朱: 황貺은 사賜이다. 설군薛君이 우리나라에 왔으니, 이는 바로 나 과인寡人에게 은혜를 준 것이라고 겸손히 말한 것이다.” 고 하니, 설후가 허락하였다.
이에 등후에게 먼저 예를 행하게 하였다.
傳
여름에 은공隱公이 정백鄭伯과 내郲에서 회합하였으니, 이는 허국許國에 대한 토벌을 모의하기 위해서였다.
정백이 허국를 치려고 5월 갑진일에 대궁大宮에서 군대들에게 병기兵器를 나누어 줄 때注+대궁大宮은 정鄭나라 조묘祖廟이다. [부주]林: 수병授兵은 거마車馬를 준 것이니, 아마도 조묘祖廟에서 병거兵車를 준 것인 듯하다. 모든 출사出師에는 반드시 조묘祖廟에 고告하고서
를 모시고 가는 것이다.공손알公孫閼과 영고숙潁考叔이 병거兵車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어注+공손알公孫閼은 정鄭나라 대부大夫이다. 영고숙이 수레의 끌채를 옆에 끼고 달아나니,注+주輈는 수레의 끌채이다. [부주]林: 수레를 줄 때에 말(馬)이 없었기 때문에 끌채를 끼고 달아난 것이다.자도子都가 창을 빼들고 영고숙을 뒤쫓아注+자도子都는 공손알公孫閼이고 극棘은 창이다. 큰길까지 갔으나 따라잡지 못하자 자도가 크게 노하였다.注+규逵는 아홉 대의 수레가 나란히 갈 수 있는 길이다.
傳
가을 7월에 은공隱公이 제후齊侯‧정백鄭伯과 연합하여 허許를 토벌討伐하였다.
경진일에 대군大軍이 허성許城 밑에 붙었다.注+허성許城 밑에 붙은 것이다. [부주]林: 부傅는 붙는 것이다.
영고숙이 정백의 기旗무호蝥弧를 들고 먼저 성으로 올라가자注+무호蝥弧는 기명旗名이다.자도子都가 밑에서 그를 향해 활을 쏘니 영고숙이 성에서 떨어져 죽었다.注+전顚은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러자 하숙영瑕叔盈이 다시 무호를 가지고 성으로 올라가서注+하숙영瑕叔盈은 정鄭나라 대부大夫이다. 사방으로 깃발을 휘두르며 “임금께서 성에 오르셨다.”고 고함을 치니,注+주周는 두루이고, 휘麾는 부름이다. [부주]林: 사방으로 무호기蝥弧旗를 휘두르며 고함쳐 부른 것이다. 정나라 군대가 모두 성으로 올라갔다.
임오일에 드디어 허성許城으로 들어가니 허장공許莊公이 위衛나라로 도망갔다.注+도망간 것을 《춘추》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병란兵亂 중에 도망갔으므로 있는 곳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傳
제후齊侯가 허국許國을 은공隱公에게 양여讓與하니, 은공이 말하기를 “군君께서 허국許國이 직공職貢을 바치지 않는다고注+직공職貢을 바치지 않은 것이다. 하시기에 군君을 따라 허국許國을 토벌한 것입니다.
그런데 허국許國이 이미 죄罪에 상응相應한 벌罰을 받았으니, 아무리 군君께서 명하셔도 과인寡人은 감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제후齊侯는 허국許國을 정인鄭人에게 주었다.
傳
정백이 허許나라 대부 백리百里에게 허숙許叔을 모시고서 허국許國의 동편東偏에 거주하게 하며注+허숙許叔은 허장공許莊公의 아우이다. 동편東偏은 동쪽 교야郊野이다. [부주]林: 허국許國의 동편에 거주하게 하였다고 말하여 허국許國을 전부 점령占領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말하기를 “하늘이 허나라에 화를 내리고 귀신도 허군許君을 만족하게 여기지 않아 과인寡人의 손을 빌려 허許를 토벌討伐하게 하였다.注+덕德이 부족한 나의 손을 빌려 허국許國을 토벌하게 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인은 한두 명의 부형父兄에게 물자物資를 공급하여 편안히 지내게 하지 못하였는데,注+부형父兄은 동성同姓의 군신群臣이다. 공共은 주는 것이고 억億은 편안함이다. 어찌 감히 허국許國 토벌한 것을 스스로의 공로功勞로 삼겠는가?
과인은 아우가 있으나 서로 화목하지 못하여, 사방을 떠돌며 입에 풀칠을 하게 하였는데,注+아우는 공숙단共叔段이다. 호餬는 죽이다. 공숙단의 출분出奔은 은공 원년에 있었다. [부주]林: 공숙단으로 하여금 사방의 나라에서 기식寄食하게 하였다는 말이다. 더구나 어찌 오래도록 허나라를 점유占有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허숙을 모시고서 이곳의 백성을 안무安撫하라.
내 장차 공손획公孫獲으로 하여금 그대를 보좌輔佐토록 하겠다.注+획獲은 정鄭나라 대부大夫공손획公孫獲이다.
傳
만약 과인寡人이 천수天壽를 누리고 죽어 땅에 묻힌 뒤에注+수명壽命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다. [부주]朱: 수명대로 살다가 죽어 지하地下에 묻히는 것이다. 하늘이 혹시 예禮로 대우하여 허국에 내린 화를 철회撤回한다면注+하늘이 허국을 예우禮遇하여 화禍 내린 것을 후회한다는 말이다. 어찌 이 허공許公으로 하여금 다시 허국許國의 사직社稷을 받들게 하지 않겠는가.注+무녕無寧은 영寧이고, 자玆는 차此이다. [부주]林: 어찌 이 허숙許叔이 허국許國의 동편에 거주하는 데 그칠 뿐이겠는가. 허장공許莊公이 나라로 돌아와서 그 사직社稷의 제사를 받든다는 말이다. 주朱: 후일에 다시 허국許國의 사직社稷을 받들 자가 어찌 이 허공許公이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그때에 가서 우리 정나라가 청고請告하는 일이 있으면 마치 오랜 혼구昏媾처럼注+알謁은 고告함이다. 아내의 아버지를 혼昏이라 하고, 겹 사돈을 구媾라 한다. [부주]朱: 허공許公이 나라로 돌아온 뒤에 만약 우리 정나라가 허국許國에 청구請求하는 일이 있으면 너희 허국은 우리 정나라를 옛날의 인척姻戚처럼 대해야 하고 소외疎外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마음을 낮추어 따르고,注+강降은 마음을 낮추는 것이다. 다른 종족宗族으로 하여금 이곳 가까이 살게 하여, 우리 정나라와 이 땅을 다투게 하지 말라.注+[부주]朱: 너희는 나라를 단단히 지켜 다른 종족으로 하여금 이곳에 살며 서로 침해侵害하게 하여 우리 정나라와 허국의 땅을 다투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자손의 복망覆亡을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인데, 더구나 허국許國의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겠는가.注+깨끗이 재계齋戒하고서 제향祭享하는 것을 인사禋祀라 하는데, 허국許國산천山川의 제사를 이른다.[부주]朱: 가령 다른 종족이 이 곳에 살면서 우리 정나라와 다투게 된다면 장차 우리 자손이 전복顚覆되는 위망危亡을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느 겨를에 허국許國의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내겠느냐는 말이다.
과인寡人이 그대를 이곳에 거주하게 하는 것은 허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변경邊境을 공고鞏固히 하려는 것이기도 하다.注+어圉는 변경邊境이다.”고 하였다.
傳
공손획公孫獲을 허국許國의 서편西偏에 거처하게 하며 말하기를 “모든 너의 기용器用과 재물을 허국에 두지 말고, 내가 죽거든 서둘러 이곳을 떠나라.注+[부주]朱: 이而는 여汝이다.
우리 선군先君께서 이곳에 새로 도읍都邑을 세운 뒤로注+이곳은 지금의 하남河南신정新鄭을 이른다. 정나라의 옛 도읍都邑은 경조京兆에 있었다. [부주]朱: 장공莊公의 아버지 무공武公이 비로소 하남河南으로 도읍을 옮겼다.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이미 쇠미衰微해져서 주周나라 자손들이 날로 질서秩序을 잃고 있다.注+정鄭나라도 주周나라의 자손이다.
그러나 저 허나라는 태악太岳의 후손이다.注+태악太岳은 신농神農의 후예後裔로 요堯임금 때에 사악四岳이었다. 윤胤은 후계後繼이다.
하늘은 이미 주나라의 덕德을 버렸으니, 우리가 어찌 허국許國과 다툴 수 있겠는가.注+[부주]朱: 이는 공손획公孫獲에게 오래 거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傳
이에 대해 군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정장공이 이번에 일을 처리한 것이 예禮에 부합하였다.
예는 국가國家를 경영經營하고 사직社稷을 안정시키고 인민人民의 질서를 정하고 후사後嗣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注+[부주]林: 예禮의 작용作用은 국가를 경영하고 사직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에게 장유長幼존비尊卑의 질서를 가르치고 후사後嗣를 위하여 만세萬世토록 무궁한 이익을 끼치는 것이다.
허국許國이 법도를 지키지 않자 토벌하였고 죄罪를 승복承服하자 용서해 주었으며,注+형刑은 법法이다. [부주]朱: 허국이 어지러워 형정刑政이 없기 때문에 정나라가 토벌하였고, 죄를 승복承服하자 그 나라를 점유占有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덕을 헤아려 처리하고 힘을 헤아려 행동行動하고注+[부주]林: 허許나라 덕德의 후박厚薄을 헤아려 처리하고, 정나라 힘의 강약을 헤아려 시행施行했다는 말이다. 시기를 보아 움직여서 후손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으니,注+내가 죽거든 서둘러 떠나라고 한 것은 후인後人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이다.예禮를 알았다고 할 수 있다.”
傳
정백鄭伯은 졸卒에게 돼지를 내게 하고, 항行에게 개나 닭을 내게 하여, 영고숙을 쏘아 죽인 자를 저주詛呪하게 하였다.注+1백 인으로 이루진 부대部隊가 졸卒이고 25인으로 이루진 부대가 행行이다. 행行은 졸卒의 항렬行列이기도 하다. 영고숙을 쏘아 죽인 자를 미워했기 때문에 졸卒과 행行으로 하여금 저주詛呪하게 한 것이다. [부주]林: 가豭는 수퇘지이다
이에 대해 군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정장공은 정사政事와 형벌刑罰의 도리를 잃었다.
정사政事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형벌로써 사악邪惡을 바로잡는 것이다.
이미 어진 정사政事가 없고 위엄 있는 형벌이 없기 때문에 전투戰鬪 중에 아군我軍의 선봉先鋒을 쏘아 죽이는 사악한 일이 생긴 것인데,注+대신大臣들이 불목不睦하는데도 악인惡人에게 형벌刑罰을 시행하지 못하였다. [부주]林: 신하가 임금의 은덕을 생각하지 않고 임금의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악邪惡한 행동을 했다는 말이다. 사악한 행위를 하였는데도 처벌하지 않고 저주하였을 뿐이니, 장차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傳
주환왕周桓王이 정鄭나라의 오鄔‧유劉注+이 두 읍邑은 하남河南구지현緱氏縣에 있는데, 서남에는 오취鄔聚가 있고, 서북에는 유정劉亭이 있다.‧위蔿‧우邘注+위蔿와 우邘는 정나라의 두 읍邑이다. 등 네 곳의 땅을 취取하고 대신 소분생蘇忿生注+소분생蘇忿生은 주무왕周武王의 사구司寇였던 소공蘇公이다.의 땅인 온溫注+지금의 온현溫縣이다.‧원原注+심수현心水縣 서쪽에 있다.‧치絺注+야왕현野王縣 서남에 있다.‧번樊注+일명 양번陽樊이다. 야왕현野王縣 서남에 양성陽城이 있다.‧습성隰郕注+회현懷縣 서남에 있다.‧찬모欑茅注+수무현脩武縣 북쪽에 있다.‧향向注+지현軹縣 서쪽에 지명地名이 향상向上인 곳이 있다.‧맹盟注+지금의 맹진盟津이다.‧주州注+지금의 주현州縣이다.‧형陘注+주석注釋하지 않았다.‧퇴隤注+수무현脩武縣 북쪽에 있다.‧회懷注+지금의 회현懷縣이다. 이 12읍邑은 모두 소분생蘇忿生의 땅인데, 찬모欑茅‧퇴隤는 급군汲郡에 속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하내河內에 속하였다. 등의 읍邑을 정鄭나라에 주었다.
군자君子는 이 일로 환왕桓王이 정나라를 잃게 될 것을 알았다.
내 마음을 미루어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행동하는 것이 덕德의 준칙準則이고 예禮의 상도常道인데, 환왕桓王은 소분생蘇忿生의 배반背叛으로 자기도 소유所有할 수 없는 땅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그 사람이 내조來朝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注+소씨蘇氏가 주왕周王을 배반하였으므로 12읍邑은 주왕周王이 소유할 수 없는 땅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환공桓公 5년에 제후諸侯가 주왕周王을 따라 정鄭나라를 정벌한 장본張本이다.
傳
정鄭나라와 식息나라가 언어言語 문제로 서로 불화不和하여注+말이 서로 어그러진 일로 분한忿恨하였다는 말이다.식후息侯가 정나라를 치니, 정백鄭伯이 식息나라 군대와 국경國境에서 전쟁하였다.
군자君子는 이 일로 인해 식息나라가 장차 망亡할 것을 알았다.注+[부주]朱: 초楚나라가 식국息國을 멸망시킨 것이 장공莊公 14년 전傳에 보인다.
덕德을 헤아리지도 않고注+정장공鄭莊公의 어짊을 이른다. 힘을 요량料量하지도 않고,注+식息의 국력國力이 약弱함을 이른다. 친척을 가까이하지도 않고,注+정鄭과 식息은 동성同姓의 나라이다. 말의 시비를 따지지도 않고, 죄가 있는 지의 여부與否를 살피지도 않았다.注+언어 문제로 서로 원한이 생기면 시비를 분명히 따져 잘잘못을 살펴야 하고 경솔히 전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다섯 가지 잘못을 범하고서 남을 공격하였으니 군대를 상실喪失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注+위韙는 옳음이다.
傳
겨울 10월에 정백鄭伯이 괵虢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송宋나라를 토벌하였다.
임술일에 송宋나라 군대를 대패大敗시켜 그들이 정나라로 쳐들어왔던 원한을 보복報復하였다.注+송宋나라가 정鄭나라를 침입侵入한 일은 은공隱公 10년에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가 이 사실을 노나라에 통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제후국諸侯國에 대사大事가 발생했을 때 통고하면 기록하고 통고하지 않으면 기록하지 않는 것이 예例이다.注+명命은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한 정령政令이다. 중대한 일이 발생한 나라가 통고하는 고사告辭를 받아야 사관史官이 책策에 기록하고, 만약 떠도는 말을 전해 듣고서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 나라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통고하지 않으면 그 일은 간독簡牘에 기록할 뿐, 전책典策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이것이 주례周禮의 옛 제도였던 듯하다.
출사出師의 장비臧否도 그러하다.注+장비臧否는 선악득실善惡得失이다. 멸망한 나라가 패전을 통고하고 승리한 나라가 승전勝戰을 통고한다는 것은 모두
비록 한 나라가 멸망에 이르렀어도 멸망한 나라가 패전敗戰을 통고하지 않고, 승리한 나라가 승전勝戰을 통고하지 않으면 책策에 기록하지 않는다.
傳
우보羽父가 환공桓公을 죽이라고 청하여 장차 태재太宰注+태재太宰는 관명官名이다. [부주]朱: 우보羽父는 은공隱公이 끝까지 군위君位를 차지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환공桓公을 죽이기를 청한 것이다.가 되기를 구하니, 은공이 말하기를 “그가 어리기 때문에 내가 임시로 섭정攝政하고 있는 것이니, 지금은 그가 이미 장성하였으니 나는 장차 그에게 군위君位를 넘겨줄 것이다.注+환공桓公에게 군위君位를 넘겨 준다는 말이다.
이미 사람을 시켜 도구菟裘에 집을 짓게 하였으니, 나는 장차 그 곳에서 노년老年을 보낼 것이다.注+토구菟裘는 노읍魯邑인데, 태산泰山양보현梁父縣 남쪽에 있다. 은공은 더 이상 노魯나라 조정에 거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외방外方의 읍邑에 따로 거처할 집을 건축建築한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자 우보는 겁이 나서 도리어 환공에게 은공을 참소하여 죽이기를 청하였다.注+[부주]林: 우보羽父는 은공이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자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도리어 은공隱公을 환공桓公에게 참소하기를 “은공이 환공을 죽이려 한다.”고 하였다.
은공이 공자公子로 있을 때 정인鄭人과 호양狐壤에서 전쟁하다가 정나라의 포로捕虜가 되니,注+우리나라의 공자公子가 포로捕虜가 된 것을 숨겨야 하기 때문에 ‘지止’라고 한 것이다. 호양狐壤은 정나라 땅이다.정인鄭人이 그를 윤씨尹氏의 집에 수금囚禁하였다.
은공이 윤씨尹氏注+윤씨尹氏는 정鄭나라 대부大夫이다.에게 뇌물을 주고서 윤씨가 주제主祭하는 종무신鍾巫神에게 기도祈禱하고는注+주主는 윤씨尹氏가 주관해 제사지내는 것이다. [부주]林: 윤씨가 주제主祭하는 종무신鐘巫神에게 기도한 것이다. 드디어 윤씨尹氏와 함께 노魯나라로 돌아와서 노魯나라에 종무신鍾巫神의 신주神主를 세웠다.注+노魯나라에 종무鐘巫의 신주神主를 세운 것이다.
傳
11월에 은공이 종무에게 제사지내려고 사포社圃注+사포社圃는 원명園名이다.에서 재계齋戒하고서 위씨寪氏의 집에 머물렀는데,注+관館은 머무르는 것이다. 위씨寪氏는 노魯나라 대부大夫이다. 임진일에 우보羽父가 적賊(刺客)을 보내어 은공을 시해弑害한 뒤에 환공을 세우고서 위씨를 공격攻擊하니, 위씨의 종족宗族 중에 죽은 자가 있었다.注+임금 시해弑害한 죄를 위씨에게 씌우고자 하였으나 다시 정법正法으로 주벌誅伐할 수 없었다. 전傳의 말은 진퇴무거進退無據이다.
경經에 은공의 장사葬事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은공을 임금의 상례喪禮로 장사葬事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注+환공桓公이 은공을 시해하고서 찬립簒立했기 때문에 상례喪禮를 제후諸侯의 예로 치르지 않은 것이다.
역주
역주1辱在寡人 :
辱은 恭敬을 표시하는 謙辭로, 감사하고도 영광스럽다는 뜻으로 쓰이고, 在는 存問의 뜻이다. 辱在는 곧 높으신 몸을 굽혀 이렇게 찾아와 安否를 물어주니 영광이라는 뜻이다.
역주2遷廟主 :
新死者의 入廟로 인해 遞遷된 神主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新死者를 이른 듯하다.
역주5無寧……其社稷 :
이 句는 異說이 많다. ‘玆’에서 句를 떼어, ‘無寧’을 ‘寧’으로 처리하고 ‘玆’를 ‘此地’로 보아, “어찌 이 허의 동부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겠는가. 허장공이 다시 돌아와서 그 사직의 제사를 받들 것이다.”로 해석한 설도 있고, ‘無寧’을 ‘寧非’로 보아, “어찌 이 허장공이 다시 그 사직을 받들지 않겠는가.”로 해석한 설도 있으며, ‘玆’를 ‘使’로 보아, “어찌 허장공으로 하여금 다시 그 사직을 받들게 하지 않겠는가.”로 해석한 설도 있다. 조선의 李恒福도 《魯史零言》에서 ‘無寧’을 ‘寧非’로‘ 玆’를 ‘此地’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역자는 ‘玆’를 ‘使’로 해석한 楊伯峻의 說을 취하여 번역하였다.
역주6無滋他族 :
滋는 ‘玆’와 마찬가지로 ‘使’의 뜻이다. 李恒福의 《魯史零言》에도 使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역주7許祀禋 :
禋祀는 諸侯가 封內의 山川에 지내는 祭祀인데, 여기서는 허나라 領土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8新邑於此 :
此는 新鄭地方을 가리킨다. 정나라가 원래에는 서쪽에 있었는데, 周平王이 東遷한 뒤에, 鄭武公이 虢나라와 檜나라를 쳐서 그 땅을 합병하고서 이곳에 나라를 세웠다.
역주10互言 :
互文과 같은 말로 두 句 이상의 글에 同義의 말을 한 번만 사용하여 글자의 중복을 피하는 修辭法인데, 여기서는 패전한 나라나 승전한 나라 중 한 쪽이 고하면 기록할 뿐, 두 나라가 모두 고하여야 기록한다는 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역주11羽父請殺桓公‧‧‧‧‧‧反譖公于桓公而請弑之 :
《史記》 魯世家에 의하면 公子揮(羽父)가 은공에게 아첨하기를 “백성들이 임금님을 좋아했으므로 임금님께서 마침내 임금이 되신 것입니다. 제가 임금님을 위하여 子允(桓公)을 죽일 것이니, 임금님께서는 저를 相(정승)으로 삼으소서.”라고 하자, 은공은 “先君의 命이 계셨다. 자윤이 어리기 때문에 내가 대신 섭정한 것이다.”고 하며, 그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우보는 자윤이 이 사실을 듣고 자기를 죽일 것을 두려워하여, 도리어 은공을 자윤에게 참소하기를 “은공이 임금 자리를 굳히기 위해 그대를 제거하려 하니, 그대가 그를 圖謀하겠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 은공을 죽이겠다.”고 하니, 자윤이 허락했다. 그러므로 우보가 자객을 보내어 은공을 시해한 것이다.
역주12正法 :
임금을 시해한 역적은 그 宗族을 滅하고 그 집을 연못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은 위씨에게 弑君의 죄를 씌우고자 하였으나, 사실은 위씨가 시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법을 시행해 다 죽일 수 없었다는 뜻이다.
역주13進退無據 :
매우 곤란한 처지를 만나 의지할 곳이 없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위씨를 죽이자니 실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이 아니고, 위씨를 놓아두자니 임금을 시해한 사람이 없게 되므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서 傳을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뜻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