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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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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五年春二月 天王使家父來求車하다
[經]三月乙未 天王崩注+無傳 桓王也하다
[經]夏四月己巳 葬齊僖公注+無傳하다
[經]五月 鄭伯突出奔蔡注+突旣簒立 權不足以自固 又不能倚任祭仲 反與小臣 造賊盜之計 故 例在昭三年하다 鄭世子忽復歸于鄭注+忽實居君位 故今還以復其位之例 爲文也 稱世子者 忽爲大子 有母氏之寵 宗卿之援 有功於諸侯 此大子之盛者也 而 知三公子之疆 修小善 潔小行 從匹夫之仁 忘社稷之大計 故君子謂之善自爲謀 言不能謀國也 父卒而不能自君 鄭人亦不君之 出則降名以赴 入則逆以大子之禮 始於見逐 終於見殺 三公子更立 亂鄭國者 實忽之由 復歸例在成十八年하다
[經]許叔入于許注+許叔 莊公弟也 隱十一年 鄭使許大夫奉許叔居許東偏 鄭莊公旣卒 乃入居位 許人嘉之 以字告也 叔本不去國 雖稱入 非하다
[經]公會齊侯于艾注+[附注] 林曰 齊地하다
[經]邾人牟人葛人來朝注+無傳 三人皆附庸之世子也 其君應稱名 故其子降稱人 牟國 今泰山牟縣 葛國 在梁國寧陵縣東北하다
[經]秋九月 鄭伯突入于櫟注+櫟 鄭別都也 今河南陽翟縣 未得國 直書入 하다
[經]冬十有一月 公會宋公衛侯陳侯于袲 伐鄭注+袲 宋地 在沛國相縣西南 先行而後伐也하다
[傳]十五年春 天王使家父來求車하니 非禮也
諸侯不貢車服注+車服 上之所以賜下하고 天子不私求財注+諸侯有常職貢
[傳]祭仲專注+[附注] 林曰 祭仲旣逐昭公立厲公 遂專鄭政하니 鄭伯患之하야 使其壻雍糾殺之하다
將享諸郊하니 雍姬知之注+[附注] 林曰 雍姬 雍糾之妻 祭仲之女하고
謂其母曰 父與夫孰親 其母曰 人盡夫也어니와 父一而已 胡可比也注+婦人在室則天父 出則天夫 女以爲疑 故母以所生爲本解之리오
遂告祭仲曰 雍氏舍其室而將享子於郊하니 吾惑之하야 以告하노이다
祭仲殺雍糾하야 尸諸周氏之汪注+汪 池也 周氏 鄭大夫 殺而暴其尸以示戮也하다
公載以出注+愍其見 故載其尸共出國曰 謀及婦人하니 宜其死也로다
[傳]夏 厲公出奔蔡하니 六月乙亥 昭公入하다
[傳]許叔入于許하다
[傳]公會齊侯于艾하니 謀定許也
[傳]秋 鄭伯因櫟人殺檀伯하고 而遂居櫟注+檀伯 鄭守櫟大夫하다
[傳]冬 會于袲하야 謀伐鄭하고 將納厲公也러니
弗克而還하다


15년 봄 2월에 천왕天王가보家父를 노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와서 수레를 요구하였다.
3월 을미일에 천왕天王하였다.注+이 없다. 환왕桓王이다.
여름 4월 기사일에 제희공齊僖公을 장사 지냈다.注+이 없다.
5월에 정백鄭伯나라로 도망가니,注+이 임금의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임금이 되었으나, 권세가 자신의 위치를 굳히기에 부족하였고, 또 채중祭仲을 신임하지 않고 도리어 소신小臣과 모의하여 그를 해칠 계획을 하였다. 그러므로 ‘자분自奔’(스스로 도망함)한 것으로 글을 만들어, 죄를 그에게로 돌린 것이다. 소공昭公 3년 에 보인다. 세자世子이 다시 정나라로 돌아갔다.注+이 실로 임금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돌아와서 복위復位로 글을 만든 것이다. ‘세자世子’라고 칭한 것은 태자太子로서 어머니의 총애와 종경宗卿(祭仲을 이름)의 원조를 받았으며, 제후諸侯(齊나라를 이름)에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니, 이것이 태자의 훌륭한 점이다. 그러나 깨끗한 절조節操만을 지켜 대국의 원조를 잃었고, 세 공자公子의 강성함을 알면서도 채중祭仲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작은 이나 닦고 작은 행실이나 깨끗이 하여 필부匹夫만을 따르고 사직社稷대계大計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자신을 위한 계획은 좋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국가의 이익은 헤아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비 장공莊公이 죽은 뒤에 스스로 임금의 위엄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정인鄭人들도 그를 임금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출분出奔할 때에는 낮추어 이름을 기록해 통고하였고, 그가 들어올 때에는 태자太子로 맞이하고, ‘세자홀世子忽’이라고 기록해 통고하였다. 처음에는 축출되고 끝내는 살해되었으니 세 공자公子가 번갈아 임금이 되어 나라를 어지럽힌 것은 실로 에서 연유緣由한 것이다. 복귀復歸성공成公 18년에 보인다.
허숙許叔로 들어갔다.注+허숙許叔허장공許莊公의 아우이다. 노은공魯隱公 11년에 정장공이 나라 대부에게 허숙許叔을 모시고 허국許國동편東偏에 거처하게 하였는데, 정장공이 죽자 허국許國수도首都로 들어가서 임금이 되었다. 허인許人이 그를 아름답게 여겨 를 기록해 통고하였기 때문에 ‘’이라 기록한 것이다. 은 본래 나라를 떠나지 않았으니, 비록 ‘’이라고 칭하였지만 국역國逆는 아니다.
환공桓公제후齊侯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부주]林: 나라 땅이다.
주인邾人모인牟人갈인葛人나라에 와서 조현朝見하였다.注+이 없다. 3은 모두 부용국附庸國세자世子이다. 부용국의 임금은 으레 이름을 칭하므로 그 세자世子를 낮추어 ‘’이라고 칭한 것이다. 모국牟國은 지금의 태산泰山모현牟縣이고, 갈국葛國양국梁國영릉현寧陵縣 동북에 있다.
가을 9월에 정백鄭伯으로 들어갔다.注+나라의 별도別都(第二의 수도首都)로 지금의 하남河南양적현陽翟縣이다. 나라를 얻은 것이 아닌데도 바로 ‘’이라고 기록한 것은 의례義例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겨울 11월에 환공桓公송공宋公위후衛侯진후陳侯에서 회합하여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나라 땅으로 패국沛國상현相縣 서남에 있다. 먼저 회합會合를 거행한 뒤에 토벌한 것이다.
15년 봄에 천왕天王가보家父나라에 보내어 수레를 요구하였으니, 가 아니다.
제후는 수레와 의복衣服진공進貢하지 않고,注+거복車服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것이다. 천자는 사사로이 재물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注+제후諸侯가 항상 바치는 직공職貢(貢物)이 있다.
채중祭仲정권政權을 독점하니注+[부주]林: 채중이 소공昭公(忽)을 축출하고 여공厲公(突)을 세우고는 드디어 나라의 정권政權을 독점하였다. 정백이 이를 근심하여 채중의 사위 옹규雍糾를 시켜 채중을 죽이게 하였다.
옹규雍糾교외郊外에서 연회宴會를 열어 접대한다는 구실口實채중祭仲초청招請해 죽이려고 하였다.
옹규의 아내 옹희雍姬가 그 사실을 알고注+[부주]林: 옹희雍姬옹규雍糾의 아내로 채중의 딸이다. 그 어미에게 “아버지와 남편 중에 누구 더 친근親近합니까.”라고 물으니, 그 어미가 대답하기를 “출가하기 전에는 누구나 너의 남편이 될 수 있으나 아버지는 하나뿐이니, 어찌 남편이 아버지와 비교될 수 있느냐.注+여자는 출가하기 이전에는 아버지를 하늘처럼 받들고 출가하면 남편을 하늘처럼 받든다. 그러나 딸이 누구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지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낳아준 분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로 딸의 의심을 풀어 준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자 옹희雍姬는 드디어 채중에게 고하기를 “옹씨雍氏가 집을 놓아두고 교외에서 아버님을 접대하려 하니, 저는 그 일이 의심스러워 고합니다.”라고 하였다.
채중은 옹규를 죽여 그 시체를 주씨周氏 연못가에 버려 두었다.注+은 연못이다. 주씨周氏나라 대부大夫이다. 죽여 그 시체를 버려두어 모욕侮辱한 것이다.
여공厲公은 그 시체를 수레에 싣고 도망가며注+그가 살해당한 것을 가엾게 여겼기 때문에 그 시체를 수레에 싣고 함께 출국出國한 것이다. 말하기를 “일을 부인婦人과 상의하였으니 죽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였다.
여름에 여공厲公나라로 도망가니, 6월 을해일에 소공昭公이 들어갔다.
허숙許叔나라 수도首都로 들어갔다.
환공이 제후와 에서 회합會合하였으니, 이는 허국許國안정安定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가을에 정백鄭伯역인櫟人의 도움으로 단백檀伯을 죽이고서 드디어 에 거주하였다.注+단백檀伯을 지키는 나라 대부이다.
겨울에 환공이 송공宋公위후衛侯진후陳侯에서 회합하여 나라를 토벌하고서 여공厲公귀국歸國시키기를 모의謀議하였다.
그러나 승리하지 못하고 환군還軍하였다.


역주
역주1 以自奔爲文 罪之也 : 諸侯가 出奔한 것은 모두 신하에 의해 逐出된 것이고, 自意로 출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孔子의 經에 逐出한 자는 드러내지 않고 마치 自意로 출분한 것처럼 글을 만든 것은 그 죄가 신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임금이 무능한 탓이므로 임금의 죄만을 드러냈다는 말이다.
역주2 守介節 以失大國之助 : 齊나라의 請婚을 거절한 것을 이른다.
역주3 不從祭仲之言 : 齊나라가 두 번째 청혼했을 때 “大國의 도움이 있어야 임금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세 공자가 모두 임금이 될 수 있으니, 齊나라의 청혼을 받아 들이라.”고 권한 祭仲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이른다. 《春秋左傳桓公六年傳》
역주4 國逆 : 出奔한 사람을 本國에서 맞이하여 임금으로 세우는 것이다. 成公 18년 傳에 “본국에서 맞이해 임금으로 세우는 것을 ‘入’이라 한다.”고 하였다. 許叔은 出奔한 적이 없으니, 여기의 ‘入’은 許의 首都로 들어가 임금이 되었다는 뜻이고 본국에서 맞아들여 임금으로 세운 例는 아니라는 말이다.
역주5 無義例也 : ‘國逆而立之曰入’의 例가 아니라는 말이다.
역주6 會禮 : 대본에는 ‘禮會’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會禮’로 바로잡았다.
역주7 : 대본에는 ‘尸’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殺’로 바로잡았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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