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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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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六年春正月 公會宋公蔡侯衛侯于曹하다
[經]夏四月 公會宋公衛侯陳侯蔡侯伐鄭注+春旣謀之 蔡常在衛上 今序陳下 蓋後至하다
[經]秋七月 公至自伐鄭注+用飮至之禮 故書 [附注] 林曰 此書至伐之始하다
[經]冬 城向注+傳曰 書 時也 而下有十一月 因謂傳誤 此城向 亦俱是十一月 但本事異 各隨本而書之耳 經書 夏 叔弓如滕 五月葬滕成公 傳云 五月叔弓如滕 卽知但稱時者 未必與下月異也 又推校此年閏在六月 則月却而節前 水星可在十一月而正也 詩云定之方中 作 楚宮 此未正中也 功役之事 皆摠指天象 不與言曆數同也 故傳之釋經 皆通言一時 不月別하다
[經]十有一月 衛侯朔出奔齊注+惠公也 朔讒構取國 故不言二公子逐 罪之也하다
[傳]十六年春正月 會于曹하니 謀伐鄭也注+前年冬 謀納厲公不克 故復更謀
[傳]夏 伐鄭하다
秋七月 公至自伐鄭하야之禮也하다
[傳]冬 城向하니 時也注+[附注] 林曰 向 魯邑 凡土功水昏正而栽 今已冬 水星將正 故曰書時
[傳]初 衛宣公烝於夷姜하야 生急子注+夷姜 宣公之庶母也 上淫曰烝하야 屬諸右公子하다
爲之娶於齊러니 而美어늘 公取之하야 生壽及朔하야
屬壽於左公子注+左右媵之子 因以爲號하다
夷姜縊注+失寵而自經死하다
宣姜與公子朔構急子注+宣姜 宣公所取急子之妻 構 會其過惡하니 公使諸齊하고 使盜待諸莘하야 將殺之注+莘 衛地 陽平縣西北 有莘亭하다
壽子告之使行注+行 去也 [附注] 林曰 使急子出奔他國한대 不可曰 棄父之命이면 惡用子矣注+惡 安也리오
有無父之國則可也注+[附注] 朱曰 謂必不爲人所容也라하다
及行 飮以酒注+[附注] 朱曰 壽子欲竊急子之旌 故辭之以酒也하고 壽子載其旌以先하니 盜殺之注+[附注] 林曰旌 使者之旌하다
急子至曰 我之求也注+[附注] 林曰 急子語盜曰 君將使汝求殺我也어늘 此何罪
請殺我乎ᄂ저하니 又殺之하다
二公子故怨惠公하다
十一月 左公子洩 右公子職 立公子黔牟注+黔牟 羣公子하니 惠公奔齊하다


16년 봄 정월에 환공桓公송공宋公채후蔡侯위후衛侯에서 회합會合하였다.
여름 4월에 환공桓公송공宋公위후衛侯진후陳侯채후蔡侯와 회합하여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봄에 이미 모의謀議하였는데, 지금 ‘회합會合’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나라가 부정不正한 사람(厲公)을 임금으로 들여보내는 모의에 참여한 것을 숨긴 것이다. 나라는 항상 나라 앞에 기록하였는데 지금 나라 뒤에 기록한 것은 뒤늦게 도착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가을 7월에 환공이 정나라를 토벌하고 돌아왔다.注+음지飮至를 거행하였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부주]林: 이것이 ‘지벌至伐’(토벌에서 돌아와 음지飮至함)을 기록한 시초이다.
겨울에 에 성을 쌓았다.注+에 “기록한 것은 때에 맞았기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아래에 11월이 있음으로 인해 구설舊說에는 “이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에 성을 쌓은 것도 11월이지만 그 일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그 일에 따라 기록한 것뿐이다. 소공昭公 3년 에 “여름에 숙궁叔弓나라에 갔다. 5월에 등성공滕成公을 장사지냈다.”고 기록하였는데, 에는 “5월에 숙궁叔弓나라에 갔다.”고 하였으니, 만을 기록했어도 반드시 아래의 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추산推算해 보면 이해의 윤월閠月이 6월에 들어, 달은 뒤로 물러났으나 절기節氣는 앞당겨졌으니, 수성水星(定星)이 11월(9월)에 혼중昏中(初昏에 수성水星남방南方에 나타남)할 수 있다. 《시경詩經》 〈정지방중定之方中〉에 “정성定星(房星)이 바야흐로 혼중昏中하면 초구楚丘궁궐宮闕을 짓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정성定星(房星)이 혼중昏中으로 향하는 것이고 아직 혼중昏中한 것은 아니다. 토목공사土木工事의 일에는 모두 천상天象만을 지적하니, 이는 역수曆數를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에서 을 해석함에는 모두 만을 말하고 을 구별하지 않았다.
11월에 위후衛侯나라로 도망하였다.注+혜공惠公이다. 이 참소로 급자急子를 죽음에 빠뜨리고서 나라를 취하였다. 그러므로 두 공자公子가 축출하였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죄를 에게 돌린 것이다.
16년 봄 정월에 환공桓公송공宋公채후蔡侯위후衛侯에서 회합會合하였으니, 이는 나라 토벌하는 일을 모의하기 위함이었다.注+전년前年 겨울에 정여공鄭厲公을 들여보내려고 모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모의한 것이다.
여름에 정나라를 토벌하였다.
가을 7월에 환공桓公이 정나라를 토벌하고 돌아와서 음지飮至를 거행하였다.
겨울에 향에 성을 쌓았으니 이를 기록한 것은 에 맞았기 때문이다.注+[부주]林: 나라 이다. 모든 토공土功(토목공사)은 수성水星(定星)이 혼정昏正(昏中)하면 판자板子를 세운다. 지금 이미 겨울이 되어 수성水星혼정昏正하려 하기 때문에 라고 기록한 것이다.
당초에 위선공衛宣公이강夷姜간음姦淫하여 급자急子를 낳고서注+이강夷姜선공宣公서모庶母이다. 손위 사람과 간음姦淫하는 것을 ‘’이라 한다.선공宣公은 이 급자急子우공자右公子에게 부탁하였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뒤에 급자急子를 위하여 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그 여자의 미모美貌가 뛰어나자, 선공宣公은 그 여자를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여 을 낳았다.
선공은 좌공자左公子에게 부탁하였다.注+좌우左右잉첩媵妾의 아들이므로 좌우를 호칭으로 삼은 것이다.
이강夷姜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注+선공의 총애를 잃었으므로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이다.
선강宣姜공자公子과 함께 급자急子무함誣陷하니注+선강宣姜선공宣公이 취한 급자의 아내이다. 는 없는 잘못을 부회附會(억지로 끌어댐)하는 것이다. 선공은 급자를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보내고 도적[刺客]을 시켜 에서 기다리다가 그를 죽이게 하고자 하였다.注+나라 땅이다. 양평현陽平縣 서북에 신정莘亭이 있다.
가 이 음모陰謀를 급자에게 알리면서 다른 나라로 도망가라고 권하니,注+은 떠나는 것이다.[부주]林: 급자急子에게 다른 나라로 도망가게 한 것이다. 급자가 반대하며 말하기를 “아버지의 을 버리면 어찌 자식이라 할 수 있는가.注+는 ‘’(어찌)이다.
천하에 아비 없는 나라가 있다면 그곳으로 도망가겠다.注+[부주]朱: 결코 사람들에게 용납容納되지 못한다는 말이다.”고 하였다.
출발에 임하여 급자急子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는注+[부주]朱: 급자의 를 훔칠 목적으로 술을 핑계 댄 것이다. 자신이 급자急子를 수레에 싣고 먼저 가니 도적이 그를 죽였다.注+[부주]林: 사자使者이다.
뒤에 급자急子가 도착하여 도적에게 말하기를 “나를 죽이라고 요구한 것인데注+[부주]林: 급자가 도적에게 “임금은 너희들에게 나를 죽이라고 요구한 것이다.”고 말한 것이다.에게 무슨 죄가 있어 죽였는가.
너희들은 나를 죽이라.”고 하니, 도적이 또 급자急子를 죽였다.
그 때문에 두 공자公子혜공惠公에게 원한怨恨을 품었다.
11월에 좌공자左公子우공자右公子공자公子검모黔牟를 임금으로 세우니注+검모黔牟는 여러 공자公子 중의 한 사람이다.혜공惠公나라로 도망하였다.


역주
역주1 今書會者 魯諱議納不正 : 謀議에 참여하였으면 ‘及’이라고 기록하고, 참여하지 않았으면 ‘會’라 하는 것이 例이다. 그렇다면 魯나라가 鄭厲公을 들여보내는 모의에 참여하였으니, 당연히 ‘及’이라고 기록해야 하는데도 ‘會’라고 기록한 것은 魯나라가 그 모의에 참여한 것을 숨기기 위해 ‘及’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역주2 舊說 : 舊說은 隋나라 때 학자 劉炫의 說을 이른다. 周曆의 11월은 夏曆의 9월이다. 《正義》에 실려 있는 그의 설은 다음과 같다. “《周語》에 ‘辰角(角星)이 새벽에 東方에 나타나면(9월) 비가 끝나고, 天根(氐星)이 새벽에 동방에 나타나면 물이 마르고, 駟星(房星)이 새벽에 동방에 나타나면 서리가 내리고, 火星(心星)이 새벽에 東方에 나타나면 바람이 쌀쌀하여 추위를 대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先王의 敎令에 ‘비가 끝나면(9월) 길을 닦고, 물이 마르면 다리를 놓고, 서리가 내리면 겨울옷을 준비하고, 바람이 쌀쌀해지면 城郭을 修築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周禮》 〈夏令〉에 ‘10월이 되면 다리를 놓고, 營室(定星)이 昏中(初昏에 南方에 나타남)하면 土工을 시작한다.’고 하였다. 先儒는 ‘建戌之月(9월)에 서리가 비로소 내리는데, 房星은 霜降 이후에 나타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心星이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鄭玄은 ‘辰角星이 나타나는 시기는 9월 初이고, 天根星이 나타나는 시기는 9월 末이다.’고 하였는데, 天根은 氐星이고, 火星이 나타나는 시기는 10월이다. 이상의 여러 說에 의거하면 火星이 나타나서 土工을 시작하는 것은 반드시 10월이므로 9월에는 土工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杜氏는 9월의 土工을 때에 맞았다고 하였으니,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아직 농사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土工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그런데 杜氏가 때에 맞았다고 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역주3 : 대본에는 ‘爲’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于’로 바로잡았다.
역주4 飮至 : 桓公 2년 經의 杜注와 역주 참고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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