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부인夫人이 제齊나라로 도망갔다.注+부인夫人은 장공莊公의 어머니이다. 노인魯人이 책망責望하였기 때문에 도망간 것이다. 국내國內의 불미不美스러운 일을 숨기기 위해 ‘분奔’(도망감)을 ‘손孫’이라고 기록하여, 마치 자리를 사양하고서 떠난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여름에 선백單伯이 왕희王姬를 호송護送해 노魯나라로 왔다.注+전傳이 없다. 선백單伯은 천자天子의 경卿이다. 선單은 채지采地이고 백伯은 작위爵位이다. 주왕周王이 딸을 제齊나라로 출가出嫁시키려고 이미 노魯나라에 명하여 혼사婚事를 주관하게 하였기 때문에 ‘선백송녀單伯送女’라고 칭하고 ‘사使’라고 칭하지 않은 것이다. 왕희王姬의 자字를 칭하지 않은 것은 왕王을 높이기 위함이고, 또 내녀內女(魯나라의 딸)와 구별하기 위함이다. 천자天子가 딸을 제후에게 시집보낼 때에는 동성同姓제후諸侯에게 혼사를 주관하게 하고, 천자가 친히 혼사를 주관하지 않으니, 이는 신분身分의 존비尊卑가 대등對等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을에 왕희王姬가 머무를 집을 성 밖에 지었다.注+이때 장공莊公은 상중喪中이었다. 제후齊侯는 당연히 노魯나라로 와서 친영親迎할 것인데, 장공은 예禮를 갖추어 종묘宗廟에서 그를 접견하는 일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감히 주왕周王의 명命을 거역할 수가 없었으므로 머무를 집을 성 밖에 지은 것이다.
겨울 10월 을해일에 진후陳侯임林이 졸卒하였다.注+전傳이 없다. 동맹국同盟國이 아니었으나 이름을 기록해 부고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주왕周王이 영숙榮叔을 노魯나라에 보내어 환공桓公에게 추명追命(死後에 공덕功德을 찬양讚揚하는 왕명王命)을 내렸다.注+전傳이 없다. 영숙榮叔은 주周나라 대부이다. 영榮은 씨氏이고 숙叔은 자字이다. 석錫은 주는 것이니, 환공桓公에게 추명追命을 내려 그 덕德을 드러낸 것이니, 소공昭公 7년에 주왕周王이 위양공衛襄公에게 추명追命한 예例와 같다.[부주]林: 이것이 석명錫命의 시초이다. 환공桓公은 임금인 형兄을 시해하고서 스스로 임금이 되고 주왕周王에게 명命을 청하지 않았는데도, 주왕周王은 그가 죽은 뒤에 명을 내려 주었기 때문에 천왕天王이라고 칭하지 않은 것이다.
왕희王姬가 제齊나라로 시집갔다.注+전傳이 없다. 제후齊侯가 맞이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혼주婚主인 환공桓公이 그를 접견接見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사齊師가 기국紀國의 병郱‧자鄑‧오읍郚邑의 백성들을 이주移住시켰다.注+전傳이 없다. 제齊나라가 기국紀國을 멸망滅亡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 나라 세 읍邑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그 땅을 취한 것이다. 병郱은 동완東莞임구현臨朐縣 동남에 있고, 오郚는 주허현朱虛縣 동남에 있고, 북해北海도창현都昌縣 서쪽에 자성訾城이 있다.[부주]林: 이것이 읍邑의 주민住民을 옮긴 시초이다.
傳
원년元年 봄에 즉위를 칭稱하지 않은 것은 문강文姜이 국외國外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注+문강文姜은 환공桓公과 함께 제齊나라에 갔다가 환공桓公이 제齊나라에서 피살被殺되었기 때문에 감히 환국還國하지 못하였다. 장공莊公은 아버지는 시해弑害되고 어머니는 외국外國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차마 즉위식卽位式을 거행할 수 없었다. 문강文姜이 돌아오지 않은 사실에 의거해 기록하였기 때문에 전傳에 ‘문강文姜이 외국外國에 나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칭한 것이다. 문강文姜은 이때에 장공莊公의 뜻에 감동하여 돌아왔으나, 경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종묘宗廟에 고告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傳
3월에 부인이 제齊나라로 도망갔다.
경經에 강씨姜氏라고 칭하지 않고 ‘부인夫人’이라 칭한 것은 제齊나라와 관계를 단절하여 친속親屬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니, 예禮에 맞는 처사였다.注+강씨姜氏는 제齊나라 성姓이다. 문강文姜의 도리로는 제齊나라와 의절義絶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다시 제齊나라로 도망갔기 때문에 ‘강씨姜氏’라고 기록하지 않아 의리義理를 보인 것이다.
傳
가을에 왕희王姬가 머무를 집을 성 밖에 지었으니, 성 밖에 지은 것이 예禮에 맞는 처사였다.注+제齊나라는 강彊하고 노魯나라는 약弱한 데다가 또 제齊나라는 환공桓公의 피살被殺을 팽생彭生의 죄罪로 돌리니, 노魯나라는 제齊나라에 원수를 갚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상제喪制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예禮를 달리하여 변례變禮(正常이 아닌 특수한 정황情況에 적용하는 예禮)에 잘 대처對處한 것이다.
역주
역주1此錫命之始……而王追錫命 :
先公의 뒤를 이어 새로 諸侯가 된 자에게 天子가 爵命을 下賜하는 것과 諸侯가 죽은 뒤에 천자가 그의 功德을 찬양하는 글을 내리는 것이 모두 錫命이다.
역주2不稱卽位 文姜出故也 :
‘不稱卽位’를 左氏는 文姜이 國外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조선의 徐壽錫은 “卽位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前年에 즉위하였기 때문이다. 先公이 죽은 해에 즉위한 경우는 당시 임금 중에 더러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해에 두 임금이 있는 것은 교훈이 될 수 없기 때문에 聖人이 削除하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고, 李震相은 “諸侯는 歲首에 반드시 天王의 正朔을 宗廟에 告해야 하니, 비록 喪이 있다 하더라도 이 일은 廢할 수 없다. 그러므로 莊公이 처음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을 때에도 이 禮는 거행하였고, 다만 卽位禮만을 거행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역주3不稱姜氏 :
《正義》에 의하면 《公羊傳》과 《穀梁傳》에는 모두 ‘不稱姜氏’는 文姜을 貶下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는데, 左氏만이 여기에 意味를 부여하여, 齊나라 姓인 姜氏를 칭하지 않은 것을 ‘絶不爲親’이라고 풀이하였다. ‘絶不爲親’을 杜氏는 “文姜의 도리로는 齊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다시 齊나라로 도망갔기 때문에 ‘姜氏’라고 기록하지 않아 의리를 보인 것이다.”고 해석하였고, 楊伯峻은 “文姜이 남편을 죽인 죄가 있기 때문에 장공은 아버지의 被殺을 가슴 아프게 여겨 어머니와 母子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마땅했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조선 朴致遠의 《雪溪隨錄》에는 “姜氏(齊人)로 대하지 않은 것은 齊나라와 親屬관계를 단절하고 弑逆으로 대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한 뒤에야 ‘姜氏’를 삭제한 것이 魯人이 齊와 관계를 단절하여 親屬으로 여기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魯人이 文姜과 관계를 단절하여 친속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夫人’을 삭제해야 하지, ‘姜氏’를 삭제해서는 不當하다.”고 하였다.
역주4爲外禮也 :
《穀梁傳》과 그 疏에 의하면 天子의 命으로 婚主가 되면 王女가 머무를 집을 公門 안에 짓고서 婚主가 祭服을 입고 新郞을 맞는 것이 常禮이다. 그러나 魯莊公은 아직 喪中이므로 衰服을 祭服으로 갈아 입을 수 없고, 또 원수인 齊侯를 접견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머무를 집을 城外에 지어 齊侯가 城內로 들어와서 禮를 거행할 수 없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