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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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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四年春 齊人陳人曹人伐宋注+背北杏會故하다
[經]夏 單伯會伐宋注+旣伐宋 單伯乃至 故曰會伐宋 單伯 周大夫 [附注] 林曰 於是諸侯初用王師하다
[經]秋七月 荊入蔡注+하다
[經]冬 單伯會齊侯宋公衛侯鄭伯于鄄注+鄄 衛地 今東郡鄄城也 齊桓脩覇業 卒平宋亂 宋人服從 欲歸功天子 故赴以單伯會諸侯爲文 [附注] 林曰 衣裳之會二 此諸侯會王臣之始 是年鄭殺子儀 鄭厲公復國 會鄄 卽鄭厲公也하다
[傳]十四年春 諸侯伐宋할새 齊請師于周注+齊欲崇天子 故請師 假王命以示大順 經書人 傳言諸侯者 摠衆國之辭하니 單伯會之하야 取成于宋而還하다
[傳]鄭厲公自櫟侵鄭注+厲公以桓十五年入櫟 遂居之하야 及大陵하야 獲傅瑕注+大陵 鄭地 傅瑕 鄭大夫하니 傅瑕曰 苟舍我 吾請納君하리라한대
與之盟而赦之하다
六月甲子 傅瑕殺鄭子及其二子하고 而納厲公注+鄭子 莊四年稱伯 會諸侯 今見殺 不稱君 無諡者 微弱 하다
內蛇與外蛇鬪於鄭南門中이라가 內蛇死러니 六年而厲公入하다
公聞之하고 問於申繻曰 注+尙書洛誥 [附注] 林曰 子儀在鄭 常畏忌厲公之奪其國 其畏忌之氣燄 足以致蛇妖之異 對曰 人之所忌 其氣燄以取之 妖由人興也니이다
人無釁焉이면 妖不自作이요 人棄常則妖興이라
故有妖니이다
[傳]厲公入하여 遂殺傅瑕하고 使謂原繁曰
傅瑕貳注+言有二心於己하니 周有常刑일새 旣伏其罪矣어니와 納我而無二心者 吾皆許之上大夫之事하리니 吾願與伯父圖之注+上大夫 卿也 伯父 謂原繁 疑原繁有二心하노라
且寡人出 伯父無裏言注+하고 又不念寡人注+不親附己하니 寡人憾焉하노라
對曰 先君桓公命我先人典司宗祏注+桓公 鄭始受封君也 宗祏 宗廟中藏主石室 言己世爲宗廟守臣하시니 社稷有主어늘 而外其心하면 其何貳如之注+[附注] 林曰 子儀旣爲鄭國社稷之主 更復謀納厲公 是外其心리잇가
苟主社稷이면 國內之民 其誰不爲臣이리잇가
臣無二心 天之制也注+[附注] 林曰 此上天之所制 言天理自然니이다
子儀在位十四年矣注+子儀 鄭子也 而謀召君者 庸非貳乎注+庸 用也잇가
莊公之子猶有八人注+[附注] 朱曰 時子忽 子亹 子儀 皆死 獨厲公在 所謂八人者 不知何名字也하니 若皆以官爵行賂勸貳 而可以濟事하리니 君其若之何릿가
臣聞命矣이라하고 乃縊而死하다
[傳]蔡哀侯爲莘故 繩息嬀以語楚子注+莘役在十年 繩 譽也하니 楚子如息하야 以食入享이라가 遂滅息注+僞設享食之具하고 以息嬀歸하다
生堵敖及成王焉이로되 未言注+未與王言 [附注] 林曰 楚人謂未成君爲敖이어늘
楚子問之한대 對曰 吾一婦人而事二夫하니 縱弗能死 其又奚言이리오
楚子以蔡侯滅息이라하야 遂伐蔡注+欲以說息嬀 [附注] 林曰 楚子感息嬀之言 因思滅息取嬀之故 實由蔡侯 伐蔡以說息嬀하다
秋七月 楚入蔡하다
君子曰
商書所謂惡之易也 如火之燎于原하여 不可鄕邇 其猶可撲滅者 其如蔡哀侯乎注+尙書 盤庚 言惡易長而難滅ᄂ저
[傳]冬 會于鄄하니 宋服故也


14년 봄에 제인齊人진인陳人조인曹人나라를 토벌하였다.注+나라가 북행北杏의 회합에서 맺은 맹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여름에 선백單伯나라를 토벌討伐제후諸侯들과 회합하였다.注+나라를 토벌한 뒤에 선백單伯이 왔기 때문에 ‘회벌송會伐宋’(宋을 토벌한 제후들과 회합함)이라고 하였다. 선백單伯나라 대부大夫이다.[부주]林: 이때 제후諸侯가 처음으로 주왕周王의 군대를 사용하였다.
가을 7월에 (楚)이 나라를 침입侵入하였다.注+문공文公 15년에 보인다.
겨울에 선백單伯제후齊侯송공宋公위후衛侯정백鄭伯에서 회합하였다.注+나라 땅으로 지금의 동군東郡견성鄄城이다. 제환공齊桓公패업覇業을 수행하여 마침내 나라의 난리를 평정시키니, 송인宋人이 복종하였다. 제환공齊桓公은 이 천자天子에게 돌리고자 하였기 때문에 ‘선백單伯제후諸侯회합會合하였다.’고 글을 만들어 나라에 통고通告한 것이다.[부주]林: 두 번째 의상지회衣裳之會이다. 이것이 제후諸侯주왕周王의 신하와 회합한 시초이다. 이해에 나라는 자의子儀를 죽였고 정여공鄭厲公이 다시 돌아와 복위復位하였으니, 에 회합한 정백鄭伯은 바로 여공厲公이다.
14년 봄에 제후諸侯나라를 토벌할 때에 나라가 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니,注+나라가 천자天子를 높이고자 하였기 때문에 천자天子의 군대를 요청한 것이니, 이는 왕명王命가탁假托하여 대순大順(道理)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에는 ‘’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에 ‘제후諸侯’라고 말한 것은 모든 나라를 한데 묶어서 한 말이다. 여름에 선백單伯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제후諸侯와 회합하여 나라와 화평和平을 맺고 돌아갔다.
정여공鄭厲公이 군대를 거느리고 을 출발하여 나라의 국도國都침공侵攻하기 위해 가다가注+정여공鄭厲公노환공魯桓公 15년에 으로 들어가서 드디어 그곳에 거주하였다. 대릉大陵에 이르러 부하傅瑕를 잡으니,注+대릉大陵나라 땅이다. 부하傅瑕나라 대부이다.부하傅瑕가 “만약 나를 놓아준다면 내가 임금님이 다시 군위君位에 오르도록 주선하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여공厲公은 그와 맹약盟約하고서 놓아주었다.
6월 갑자일에 부하傅瑕정자鄭子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厲公을 임금으로 맞아들였다.注+정자鄭子에 대해 노장공魯莊公 4년 에 ‘’이라 칭한 것은 제후諸侯와 회합하였기 때문이고, 지금 에 ‘’이라 칭하지 않은 것은 살해되었기 때문이며, 시호諡號가 없는 것은 미약微弱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하들이 임금의 상례喪禮를 거행하지도 않고 제후諸侯에게 통고하지도 않은 것이다.
당초에 나라 도성都城남문南門 밑에서 문안의 뱀이 문밖의 뱀과 싸우다가 문안의 뱀이 죽은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이 있은 지 6년 만에 여공厲公이 들어갔다.
노장공魯莊公은 이 소문을 듣고서 신수申繻에게 “뱀의 요얼妖孼(物類의 괴이怪異형상形象)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여공이 들어간 것인가?”라고 물으니,注+상서尙書》〈낙고洛誥〉에 ‘무약화지염염無若火之燄燄(불이 처음 붙을 때처럼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은 불의 기세가 아직 성대하지 않아서 진퇴進退할 수 있는 시기이다. 이는 인심이 견정堅正하지 못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부주]林: 자의子儀나라의 임금으로 있으면서 항상 여공厲公이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하고 꺼렸으니, 두려워하고 꺼린 그의 심기心氣의 불길이 뱀의 요얼妖孼을 부르기에 충분하였다.신수申繻가 대답하기를 “사람에게 꺼리는 일이 있으면 그 불편한 심기心氣가 불길처럼 점점 커져서 요얼妖孼을 부르는 것이니, 요얼은 사람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요얼이 들어올〉 틈이 없으면 요얼이 저절로 생기지 않고, 사람이 상도常道를 버리면 요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요얼이 생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공厲公이 들어가서 드디어 부하傅瑕를 죽이고 원번原繁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부하傅瑕는 두 마음을 품었으니,注+임금인 자의子儀를 배반하고 자기(厲公)에게 마음을 두었다는 말이다.나라는 이에 대한 처벌을 규정規定상법常法이 있으므로 그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지만, 나를 받아들이고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자들에게는 내가 모두 상대부上大夫관직官職으로 허락(報答의 뜻)하려 하니, 나는 이 일을 백부伯父와 함께 상의하기를 원한다.注+상대부上大夫이다. 백부伯父원번原繁을 이른다. 여공厲公원번原繁이 두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한 것이다.
그리고 과인寡人외국外國에 나가 있을 때에는 국내의 사정을 알려 주지 않았고,注+나를 다시 임금으로 모셔들이겠다는 말이 없었다는 말이다. 내가 에 들어와 있을 때에도 과인을 생각하지 않았으니注+자기에게 친하게 붙지 않았다는 말이다. 과인은 매우 유감遺憾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원번原繁이 대답하기를 “선군先君환공桓公께서 우리 선인先人에게 하여 종묘宗廟석실石室을 맡아 관리하게 하셨으니,注+환공桓公은 처음으로 나라에 해진 임금이다. 종석宗祏종묘宗廟 안에 신주神主를 간직해 두는 석실石室이다. 이는 자기가 대대로 종묘宗廟를 지키는 신하가 되었다는 말이다. 사직社稷에 주인이 있는데, 외국外國에 나가 있는 분에게 마음을 둔다면 이보다 더한 두 마음이 어디 있겠습니까.注+[부주]林: 자의子儀가 이미 나라 사직社稷의 주인이 되었는데, 다시 여공厲公을 받아들여 임금으로 세우기를 꾀한다면 이것이 바로 임금을 배반하고 밖에 나가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두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만약 사직을 주관主管한다면(임금이 됨) 국내의 백성 중에 그 누가 신하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하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은 하늘이 정한 제도입니다.注+[부주]林: 하늘이 제정한 바라는 것은 천리天理자연自然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자의子儀군위君位에 있은 지 이미 14년이나 되었으니,注+자의子儀정자鄭子이다.(厲公을 가리킴)을 불러들이기를 꾀한 자들이 注+이다.
장공莊公의 아들이 아직 8명이나 남아 있으니,注+[부주]朱: 이때 자홀子忽자미子亹자의子儀는 모두 죽고 여공厲公만이 홀로 살았는데, ‘8’이라 한 것은 누구를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만약 모두 관작官爵을 뇌물로 삼아 두 마음을 품도록 권한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니, 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은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고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채애후蔡哀侯식후息侯간계奸計의 전쟁에서 나라의 포로가 되었던 원한을 갚기 위해 초자楚子 앞에서 식규息嬀의 미모를 칭찬해 말하니,注+의 전쟁은 장공莊公 10년에 있었다. 은 칭찬함이다. 초자楚子식국息國으로 가서 음식을 가지고 들어가 식후息侯를 대접하다가 드디어 식국息國을 멸망시키고서注+거짓으로 접대할 음식을 벌여 놓은 것이다. 식규를 데리고 돌아왔다.
식규는 나라로 온 뒤에 도오堵敖성왕成王을 낳았으나, 초자楚子와 말을 하지 않았다.注+초왕楚王과 말하지 않은 것이다.[부주]林: 초인楚人은 임금이 되지 못한 사람을 ‘’라 한다.
초자楚子가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한 여자로 두 남편을 섬겼으니 비록 죽지는 못할망정 또 어찌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초자楚子채후蔡侯 때문에 식국息國멸망滅亡시켰다고 하여, 드디어 나라를 토벌하기로 하였다.注+식규息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이다.[부주]林: 초자楚子식규息嬀의 말에 감동하여, 식국息國을 멸망시키고 식규息嬀를 데리고 온 일을 생각해 보니, 실로 채후蔡侯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라를 토벌하여 식규息嬀를 기쁘게 하려 한 것이다.
가을 7월에 초사楚師나라로 쳐들어갔다.
군자君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상서尙書》에 이른바 ‘악이 뻗어나는 것은 마치 불이 평원平原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가까이 갈 수도 없는데 오히려 끌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아마도 채애후蔡哀侯를 이른 것인 듯하다.”注+상서尙書》 〈반경盤庚〉篇으로 악을 기르기는 쉽고 제거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겨울에 에서 회합會合하였으니, 이는 나라가 복종하였기 때문이다.


역주
역주1 入例在文十五年 : 文公 15년 傳에 “大城을 陷落하는 것을 ‘入’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그 注에 “大都를 陷落하고도 占有하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다.
역주2 臣子……諸侯 : 임금의 禮로 喪을 치르면 諸侯에게 赴告하는 것이 禮인데, 예대로 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동맹국에 통고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역주3 猶有妖乎 : 古字에 ‘猶’는 ‘由’와 통용이니, “뱀의 妖孼로 말미암아 厲公이 들어가 임금이 된 것인가?”라고 물은 것이다.
역주4 無若火之燄燄……人心不堅正 : 〈洛誥〉의 말은 朋黨을 경계한 말로 붕당의 害가 불과 갈아서, 처음에는 불길이 미약하지만 그 불길이 점점 커져서 모든 것을 태우는 데 이르면 그 불을 끌 수 없듯이 붕당도 커지기 전에 방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杜氏는 原義와 관계없이 ‘燄燄’을 해석하기 위해 〈洛誥〉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人心不堅正’은 두려워하고 꺼리는 心氣를 이른다.
역주5 納我之言 : 裏言을 ‘納我之言’으로 풀이하면 위의 ‘出’이 出國할 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裏’에 ‘納’의 訓詁가 있는지 모르겠다. ‘裏’는 ‘內’의 뜻이니, 內言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므로 楊伯峻의 說에 따라 번역하였다. ‘裏言’을 ‘內言’으로 해석할 경우 위에 ‘出’도 출국할 때가 아니라 外國에 나가 있을 때가 되어야 한다.
역주6 : 桓公 15년 經에 ‘鄭伯突入于櫟’이라고 하였으니, 여기의 ‘入’도 바로 ‘入于櫟’의 ‘入’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므로 楊伯峻의 說에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7 어찌……아니겠습니까 : 杜注에는 ‘庸’을 ‘用’이라 하였으나, ‘用’으로 볼 경우에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豈’로 해석하는 것이 옳으므로 ‘어찌’로 번역하였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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