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봄에 제인齊人이 정鄭첨詹을 잡았다.注+제환공齊桓公이 처음 패자覇者가 되었을 때 정鄭나라는 송宋나라를 토벌하였고 또 제齊나라에 조현朝見하지도 않았다. 첨詹은 정鄭나라의 집정대신執政大臣으로 제齊나라에 갔다가 잡혔는데도 ‘행인行人’이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죄를 그에게 돌린 것이다. 행인行人의 예例는 양공襄公 11년에 보인다. 대부大夫를 잡은 모든 곳에 모두 ‘인人이 잡았다.’고 칭하였으니, 대부大夫는 지위가 미천하기 때문이다.
여름에 제인齊人이 수국遂國에서 다 죽었다.注+섬殲은 다 죽는 것이다. 제인齊人이 수국遂國을 지키면서 수인遂人을 경시輕視하여 대비하지 않으니, 수인遂人이 제인齊人을 공격해 다 죽였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관史官이 스스로 죽은 것으로 글을 만든 것이다.
가을에 정鄭첨詹이 제齊나라에서 도망해 돌아갔다.注+전傳이 없다. 첨詹이 죽음으로 절개를 지켜 국난國難을 해결하지 않고, 구차히 도망해 죽음을 면하였기 때문에 ‘도逃’(도망했다)라고 기록하여 천하게 여긴 것이다.
겨울에 사슴이 많았다.注+전傳이 없다. 사슴이 많으면 오곡五穀에 해害를 입힌다. 재해災害가 되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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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봄에 제인齊人이 정鄭첨詹을 잡았으니, 이는 정鄭나라가 제齊나라에 조현朝見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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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수국遂國의 인씨因氏‧합씨頜氏‧공루씨工婁氏‧수수씨須遂氏가 제齊나라의 수졸戍卒을 대접하다가 수졸戍卒이 술에 취하자 죽이니, 제인齊人이 섬멸殲滅당하였다.注+향饗은 술과 음식을 대접한 것이다. 네 씨족氏族은 수국遂國에서 세력이 강한 종족宗族들이다. 제齊나라가 수국遂國을 멸滅하고서 수졸戍卒을 보내어 지킨 것은 장공莊公 13년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