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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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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三十有二年春 城小穀注+小穀 齊邑 濟北 穀城縣城中有管仲井 大都以名通者 則不繫國하다
[經]夏 宋公齊侯遇于梁丘注+齊善宋之請見 故進其班 梁丘 在高平昌邑縣西南하다
[經]秋七月癸巳 公子牙卒注+牙 慶父同母弟僖叔也 飮酖而死 不以罪告 故得書卒 하다
[經]八月 癸亥 公薨于路寢注+路寢 正寢也 公薨 皆書其所 詳凶變하다
[經]冬十月己未 子般卒注+子般 莊公太子 先君未葬 故不稱爵 不書殺 諱之也하다
[經]公子慶父如齊注+無傳 慶父旣殺子般 季友出奔 國人不與 故懼而適齊 欲以求援 時無君 假赴告之禮而行하다
[經]狄伐邢注+無傳 邢國 在廣平襄國縣 [附注] 林曰 此狄入伐之始하다
[傳]三十二年春 城小穀하니 爲管仲也注+公感齊桓之德 故爲管仲城私邑
[傳]齊侯爲楚伐鄭之故 請會于諸侯注+楚伐鄭 在二十八年 謀爲鄭報楚하다 宋公請先見于齊侯注+[附注] 林曰 宋桓公志輔齊覇 請先與齊侯相見하야 遇于梁丘하다
[傳]秋七月 有神降于莘注+有神聲以接人 莘 虢地하다
惠王問諸內史過曰 是何故也注+內史過 周大夫 對曰 國之將興 明神降之하야 監其德也하고 將亡 神又降之하야 觀其惡也니이다
故有得神以興하고 亦有以亡하니 虞夏商周皆有之注+亦有神異니이다
王曰 若之何 對曰 以其物享焉하소서
其至之日 亦其物也注+享 祭也 若以甲乙日至 祭先脾 玉用蒼 服上靑 니이다 王從之하다
內史過往注+[附注] 朱曰 往 至莘地享神하야 聞虢請命注+聞虢請於神 求賜土田之命하고 反曰 虢必亡矣리라.
虐而聽於神注+[附注] 林曰 夫民 神之主也 虢公虐民而聽命於神 此以知其必亡이라하다
神居莘六月注+[附注] 林曰 六月 乃一百八十日也 虢公使祝應宗區史嚚享焉하니 神賜之土田注+祝 大祝 宗 宗人 史 大史 應區嚚皆名하다
史嚚曰 虢其亡乎ᄂ저
吾聞之하니 國將興 聽於民注+政順民心하고 將亡 聽於神注+求福於神이라
聰明正直而壹者也注+[附注] 林曰 聰則無所不聞 明則無所不見 正則自正於己 直則能正乎人 而壹者 專一於聰明正直 無有二心者也 依人而行注+唯德是與 [附注] 林曰 善則降之福 惡則降之禍 依人善惡而行 朱曰 善則神就之 惡則神去之이어늘 虢多凉德하니 其何土之能得注+凉 薄也 爲僖二年晉滅下陽傳이리오
[傳]初 公築臺하야 臨黨氏注+黨氏 魯大夫 築臺不書 不告廟라가 見孟任하고 從之하니注+孟任 黨氏女 閟 不從公어늘
而以夫人言한대 許之注+許以爲夫人하고 割臂盟公하야 生子般焉하다
講于梁氏할새 女公子觀之注+雩 祭天也 講 也 梁氏 魯大夫 女公子 子般妹러니 圉人犖自牆外與之戱注+圉人 掌養馬者 以慢言戱之어늘 子般怒하야 使鞭之한대
公曰不如殺之니라
是不可鞭이니라
犖有力焉하야 能投盖于稷門注+盖 覆也 稷門 魯南城門 走而自投 接其屋之桷 反覆門上이라하다
公疾 問後於叔牙한대 對曰 慶父材注+蓋欲進其同母兄니이다
問於季友한대 對曰 臣以死奉般注+季友 莊公母弟 故欲立般하노이다
公曰 鄕者牙曰 慶父材라하니라
成季使以君命命僖叔하야 待于鍼巫氏注+成季 季友也 鍼巫氏 魯大夫하고 使鍼季酖之注+酖 鳥名 其羽有毒 以畫酒 飮之則死
曰 飮此 則有後於魯國이어니와 不然이면 死且無後하리라
飮之하고라가 及逵泉而卒커늘 立叔孫氏注+逵泉 魯地 不以罪誅 故得立後 世其祿하다
[傳]八月癸亥 公薨于路寢하니 子般卽位하야 次于黨氏注+卽喪位 次 舍也하다
[傳]冬十月己未 共仲使圉人犖賊子般于黨氏注+共仲 慶父하니 成季奔陳注+出奔不書 國亂 史失之하다
立閔公注+閔公 莊公庶子 於是年八歲하다


32년 봄에 소곡小穀을 쌓았다.注+소곡小穀나라 이다. 제북濟北곡성현穀城縣성중城中관중정管仲井이 있다.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는 대도大都는 그 위에 국명國名을 붙이지 않는다.
여름에 송공宋公제후齊侯양구梁丘에서 만났다.注+나라는 나라가 회견會見하기를 요청한 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그 서차序次를 올려 앞에 놓은 것이다. 양구梁丘고평高平창읍현昌邑縣 서남에 있다.
가을 7월 계사일에 공자公子하였다.注+경보慶父모제母弟희숙僖叔이다. 짐독鴆毒을 마시고 죽었으나, 가 있다고 고하지 않았으므로 ‘’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사망일死亡日을 기록한 것은 장공莊公질병疾病이 있었기 때문에 장공莊公소렴小斂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힐책詰責하지 않은 것이다.
8월 계해일에 장공莊公노침路寢에서 하였다.注+노침路寢정침正寢(正殿)이다. (죽음)에 대해 모두 죽은 장소를 기록한 것은 모두 흉변凶變을 상세히 기록하기 위함이다.
겨울 10월 기미일에 자반子般하였다.注+자반子般장공莊公태자太子인데, 아직 선군先君장전葬前이므로 을 칭하지 않은 것이다. 살해殺害되었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숨긴 것이다.
공자公子경보慶父나라로 갔다.注+이 없다. 경보慶父자반子般을 살해하자, 계우季友나라로 도망가고 국인國人경보慶父를 돕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보慶父는 겁이 나서 나라로 가서 구원救援을 요청하려 한 것이다. 이때 임금이 없었으므로 부고赴告가탁假托하여 간 것이다.
을 토벌하였다.注+이 없다. 형국邢國광평廣平양국현襄國縣에 있다.[부주]林: 이것이 중국中國으로 들어와 제후諸侯를 공격한 시초이다.
32년 봄에 소곡小穀을 쌓았으니 관중管仲을 위해 쌓은 것이다.注+장공莊公제환공齊桓公에 감동하였다. 그러므로 관중을 위해 그의 사읍私邑을 쌓아 준 것이다.
을 토벌한 일 때문에 제후齊侯제후諸侯들과 회견會見하기를 요청하였는데,注+을 토벌한 일은 장공莊公 28년에 보인다. 나라를 위해 나라에 보복하기를 모의謀議한 것이다. 송공宋公제후齊侯에게 회기會期 이전에 먼저 만나기를 청하여,注+[부주]林: 송환공宋桓公제환공齊桓公패업覇業을 도울 뜻으로 회기會期에 앞서 먼저 제후齊侯와 만나기를 청한 것이다. 여름에 양구梁丘에서 만났다.
가을 7월에 신읍莘邑의 어떤 사람에게 내렸다.注+어떤 사람에게 이 붙어 그 사람의 입을 빌어 말을 한 것이다. 나라 땅이다.
혜왕惠王내사內史에게 “이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묻자,注+내사內史나라 대부大夫이다.내사內史가 “나라가 하려 할 때에는 신명神明강림降臨하여 그 나라의 을 살피고, 하려 할 때에도 신명이 강림하여 그 을 살핍니다.
그러므로 으로 인해 한 나라도 있고, 으로 인해 망한 나라도 있었으니, 에도 모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注+에도 모두 신이神異(神의 괴이怪異)가 있었다는 말이다.”고 대답하였다.
혜왕惠王이 “이 을 어떻게 대접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묻자, 내사內史가 “그 이 내린 날과 상응相應하는 물품物品으로 제향祭享하소서.
이 내린 날을 조사하여 그 날짜에 맞는 제품祭品이 바로 이 에게 사용할 물품입니다.注+제사祭祀하는 것이다. 가령 갑일甲日이나 을일乙日에 내렸으면 그 에게 지내는 제사祭祀비장脾臟을 먼저 올리고, 폐백幣帛으로 올리는 창옥蒼玉을 사용하고, 복장服裝상의上衣청색靑色제복祭服을 입는다. 이런 로 제사지낸다는 말이다.”라고 하니, 혜왕惠王이 그 말을 따랐다.
내사內史가 가서注+[부주]朱: ‘’은 으로 가서 에게 제향祭享한 것이다. 괵국虢國에게 을 청하였다는 말을 듣고서注+괵국虢國에게 토전土田을 주겠다는 을 내리도록 청구請求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돌아와 말하기를 “은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학정虐政을 하면서 만을 따르기 때문입니다.注+[부주]林: 백성이 주인主人인데, 괵공虢公은 백성은 학대虐待하면서 만을 따르니, 이로써 괵국虢國이 반드시 망하리라는 것을 안 것이다.”라고 하였다.
에 머문 지 6개월이 되는 때에注+[부주]林: 6월은 바로 이 내린 지 1백 80일이 되는 날이다. 괵공虢公축응祝應송구宋區사은史嚚을 보내어 에게 제향祭享하게 하니, 토전土田을 주겠다고 하였다.注+대축大祝(下大夫로 제사祭祀독축讀祝을 맡은 관원官員)이고, 종인宗人(宗廟에 제사祭祀를 맡은 관원官員)이고, 태사太史(卜筮를 맡은 관원官員)이고, 은 모두 인명人名이다.
사은史嚚이 말하기를 “은 아마도 망할 것이다.
내가 듣건대 ‘나라가 일어나려 할 때는 임금이 백성의 말을 따르고,注+민심民心을 따르는 정치政治를 하는 것이다. 망하려 할 때는 의 말을 따른다.注+에게 을 구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하고 전일專一한 존재로서注+[부주]林: 귀가 밝으면 듣지 못하는 것이 없고, 눈이 밝으면 보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바르면 자기 몸을 바르게 가지고, 곧으면 다른 사람을 바로잡아 준다. 전일專一하여 두 마음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行爲에 따라 화복禍福을 시행하는데,注+오직 이 있는 자만을 돕는다는 말이다.[부주]林: 하면 을 내리고 하면 를 내리는 것이, 사람의 선악善惡에 따라 화복禍福을 시행하는 것이다.[부주]朱: 하면 이 와서 돕고, 하면 이 버리고 떠난다. 괵국虢國박덕薄德이 많으니 어찌 토전土田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注+함이다. 이것이 희공僖公 2년에 나라가 괵국虢國하양下陽격멸擊滅배경背景이다.
당초에 莊公이 를 높이 쌓고 그 臺 위에서 黨氏의 집을 굽어보다가注+당씨黨氏나라 대부大夫이다. 를 쌓은 것을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종묘宗廟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孟任을 보고는 그를 찾아가니, 孟任이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다.注+맹임孟任당씨黨氏의 딸이다. ‘’는 장공莊公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칼로 팔뚝을 베어 피를 내어 장공莊公과 그 피를 마시며 맹세하고는 장공莊公의 여자가 되어 자반子般을 낳았다.
우제雩祭를 지내기 위해 장공莊公양씨梁氏 집에서 그 의식儀式을 연습할 때 여공자女公子가 구경하고 있었는데,注+우제雩祭는 하늘에 제사祭祀 지내는 것이다. 연습演習하는 것이다. 양씨梁氏나라 대부大夫이다. 여공자女公子자반子般의 누이동생이다. 어인圉人이 담 밖에서 여공자女公子를 희롱하니,注+어인圉人은 말 기르는 일을 맡은 자이다. 방자한 말로 여공자女公子를 놀린 것이다.자반子般하여 사람을 시켜 그에게 매를 치게 하였다.
그러자 장공莊公이 말하기를 “매질을 할 바에야 죽이는 것이 낫다.
이 자에게 매질을 해서는 안 된다.
注+는 덮는 것이다. 직문稷門나라 성문城門이다. 이 달려가다가 스스로 몸을 던져뛰어 올라 성문城門 지붕의 서까래에 붙었다가 몸으로 위를 덮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공莊公을 앓을 때 숙아叔牙에게 후사後嗣에 대해 물으니, 숙아叔牙는 “경보慶父가 임금 재목材木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注+자신의 모형母兄을 천거하고자 한 것이다.
계우季友에게 물으니, 계우季友는 “은 목숨을 걸고 자반子般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注+계우季友장공莊公모제母弟였기 때문에 자반子般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장공莊公계우季友에게 “조금 전에 숙아叔牙경보慶父재목材木이라고 하더라.”라고 하니,
성계成季가 사람을 시켜 임금의 으로 희숙僖叔에게 하여 침무씨鍼巫氏의 집으로 가서 기다리게 하고는注+성계成季계우季友이다. 침무씨鍼巫氏나라 대부이다. 침계鍼季를 시켜 그에게 짐독酖毒을 마시게 하며注+은 새 이름인데, 그 깃에 이 있다. 그 깃으로 술을 저어 마시면 죽는다.
“이것을 마시면 그대의 후손後孫나라에서 복록福綠을 누릴 것이지만 마시지 않으면 그대가 죽는 것은 물론이고 후손도 복록福祿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숙아叔牙는 그 을 마시고서 돌아오다가 규천逵泉에 이르러 하니, 나라는 그의 아들을 후계後繼로 세워 숙손씨叔孫氏로 삼았다.注+규천逵泉나라 땅이다. 가 있어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후사後嗣를 세워 대대로 祿을 먹게 한 것이다.
8월 계해일에 정침正寢에서 하니, 자반子般당씨黨氏의 집에 머물렀다.注+상주喪主의 자리로 나아간 것이다. 는 머무르는 것이다.
겨울 10월 기미일에 공중共仲어인圉人을 시켜 자반子般당씨黨氏 집에서 죽이니,注+공중共仲경보慶父이다. 성계成季나라로 도망갔다.注+에 도망간 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혼란하여 사관史官이 잊었기 때문이다.
경보慶父민공閔公을 세웠다.注+민공閔公장공莊公서자庶子인데, 이때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


역주
역주1 書日者……小斂 : 신하가 죽으면 임금이 그 小斂에 참여하는 것이 禮이므로 임금이 小斂에 참여하여야 죽은 날짜를 기록하여 임금이 禮를 잃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莊公이 僖叔의 小斂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疾病 때문이지 고의로 不參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死亡日을 기록하여 莊公을 꾸짖지 않았다는 말이다.
역주2 以此類祭之 : 《正義》에 “莘에 내린 이 神에 대한 祭祀의 禮가 祀典에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神에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하므로 內史過가 그 物로 祭享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物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시 그 神이 내린 날로 해석하여, 이 神이 처음 내린 날짜를 조사하여 神이 내린 날짜에 맞는 物品을 사용해 제사하라고 한 것이다. 《禮記月令》에 봄의 甲‧乙日, 여름의 丙‧丁日, 中央土(6월 12일부터 6월 30일까지 18일간)의 戊‧己日, 가을의 庚‧辛日, 겨울의 壬‧癸日에 사용하는 물품에 대해 具體的으로 실려 있는데, 杜注에 甲‧乙日만 들어 말한 것은 하나를 들어 나머지를 미루어 알게 한 것이다. 가령 丙‧丁日에 내렸으면 제사에 肺를 먼저 올리고 玉과 祭服을 모두 赤色을 사용하며, 戊己日에 내렸으면 제사에 염통을 먼저 올리고 玉과 祭服을 모두 黃色을 사용하며, 庚‧辛日에 내렸으면 제사에 肝을 먼저 올리고 玉과 祭服을 모두 白色을 사용하며, 壬‧癸日에 내렸으면 제사에 콩팥을 먼저 올리고 玉과 제복을 모두 玄色을 사용한다.
역주3 : 대본에는 ‘肆’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肄’로 바로잡았다.
역주4 莊公이……허락하고서 : 杜注에는 ‘許之’를 莊公이 夫人으로 삼겠다고 허락한 것으로 해석하였으나, 譯者는 ‘莊公이 夫人으로 삼겠다고 誘惑하자, 孟任이 莊公의 요청을 허락한 것’으로 번역하였다.
역주5 犖은……있다 : 杜氏의 말대로면 이는 날쌘 것이지 힘이 샌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譯者는 劉炫의 說을 취하여 車蓋로 번역하였다. 楊伯峻은 “蓋는 門扇(문짝)이니, 이는 稷門의 문짝을 이름이다. 城門의 문짝은 매우 무거운데 그것을 들어 던질 수 있다면 그 힘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역주6 즉위하여 : 杜注에는 卽位를 喪主의 자리로 나아간 것으로 해석하였으나, 譯者는 君位에 오른 뜻으로 번역하였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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