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公食邑於周 留相天子 乃封其長子伯禽於魯 都曲阜
伯禽十三世 至隱公元年 春秋託始於此 歷二百四十二年 爲哀公十四年西狩獲麟 春秋以終
康叔始食采於康 成王誅武庚 以殷餘民 封康叔于衛 居故商墟
漢書地理志 滕封三十一世 爲齊所滅 戰國策 則謂滅於宋 未知孰是
傳十世 至昭侯 昭侯封其父文侯之弟成師於曲沃 是爲桓叔
大王長子太伯 與其弟仲雍 避少弟季歷賢而有聖子 去之荊蠻 號曰句吳
在西都畿內棫林之地 幽王之難 友寄帑於虢鄫之間 因取二國之地 謂之新鄭
武王求大伯仲雍之後 得仲雍曾孫周章 已爲吳君 別封其弟虞仲於周之北故夏墟
武王封叔於虢 周室東遷 虢公忌父 虢公林父 世佐王室
其先四岳 佐禹平水土 封於呂 商末大公呂望 佐文武定天下 以功封營丘爲諸侯
女修孫大費 與禹平水土 佐舜調馴鳥獸 賜姓嬴 是爲柏翳
十九世 至非子 爲周孝王主馬汧渭間 馬大蕃息 孝王分爲附庸而邑之秦
吳回裔孫鬻熊 爲周文武師 成王封鬻熊曾孫熊繹於荊蠻 胙以子男之田
周武王誅紂 立其子武庚 武庚以三監畔 成王誅之 乃更封微子爲宋公 以奉湯祀
虞閼父爲周武王陶正 王以元女大姬 嫁其子滿 而封諸陳侯 奉虞帝祀
自茲輿期十一世 至茲丕父 始見於春秋 共公庚輿以下 微不復見
魯 齊桓初覇 郳君附從 進爵爲子 始列諸侯 謂之小邾子
魯成公十五年 遷葉 昭公九年 遷夷 十一年 遷白羽 定公四年 遷容城
共 鐘吾 州 陽 黎 道 柏 貳 軫 英氏 遂 崇 冀 厲 巢 庸 介 根牟 邿 極 牟 鄣 鄀 濮 鄟 姒 於餘丘 蓐 房 絞 淮夷 戎 北戎 驪戎 陸渾戎 大戎 小戎 犬戎 姜戎 雒戎 茅戎 戎蠻 盧戎 山戎 無終 狄 赤狄 皐落氏 廧咎如 潞氏 甲氏 留吁 鐸辰 白狄 鮮虞 肥 鼓 鄋瞞
后稷이 邰(태)에 封해졌는데, 夏나라가 衰하자 后稷의 아들 不窋(불굴)이 官職을 잃고 西戎으로 내쫓겼다.
不窋의 손자 公劉가 西戎에서 邠(빈)으로 遷國하였다.
9世를 傳하여 太王에 이르러 狄人의 逼迫으로 인해 邠을 버리고 岐로 가서 살았다.
文王이 天命을 받고 일어나서 豊에 都邑을 정하였는데, 武王이 商나라를 이기고서 鎬로 都邑을 옮겼다.
그 뒤 平王이 王城으로 遷都하였고, 敬王이 또 成周로 천도하였다.
周平王 49년부터 《春秋》에 기입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아홉 王을 거치며 2백 20년을 傳해 오다가 赧王(난왕)에 이르러 秦나라에 의해 滅亡하다.
魯 姬姓이고 侯爵으로 周文王의 넷째 아들 周公의 자손이다.
周公은 周를 食邑으로 받아 그곳에 머물면서 天子를 輔佐하였으므로 주공의 長子 伯禽을 魯나라에 封하여 曲阜에 都邑하게 하였다.
伯禽으로부터 13世를 傳하여 隱公 元年에 이르러 《春秋》가 시작되었고, 이로부터 2백 42년 뒤인 哀公 14년 ‘西狩獲麟’에서 《春秋》가 끝났다.
그 뒤 아홉 임금을 거치며 나라를 전하다가 頃公 讎에 이르러 楚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蔡 姬姓이고 侯爵인데, 武王의 母弟 叔度를 封한 나라이다.
무왕이 崩하자 叔度가 管叔 鮮과 함께 紂의 아들 武庚을 끼고 亂을 일으키니, 周公이 그를 追放하였다.
叔度의 아들 胡가 文王의 德을 따르고 행실을 고치니, 成王이 다시 蔡에 封하였다.
平侯가 新蔡로 遷都하고, 昭侯가 또 州來로 천도하였다.
그 뒤 세 임금을 거쳐 侯齊에 이르러 楚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曹 姬姓이고 伯爵인데, 武王의 母弟 叔振鐸을 封한 나라이다.
12세를 전하여 桓公 35년에 이르러 비로소 춘추시대로 들어섰다.
魯哀公 8년에 伯陽이 宋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衛 姬姓이고 侯爵인데, 武王의 同母少弟 康叔을 封한 나라이다.
강숙이 처음에는 康을 食邑으로 받았었는데, 成王이 武庚을 誅殺한 뒤에 殷나라 遺民의 叛亂을 염려해 강숙을 衛에 封하여 옛 商墟(殷墟)에 居住하게 하였다.
文公이 楚丘로 옮기고, 成公이 또 帝丘로 옮겼다.
그 뒤에는 稱號가 格下되어 ‘君’이라 하였으니, 濮水 북쪽의 땅만이 領土로 남았을 뿐이었다.
秦二世가 衛君 角을 廢하여 庶人으로 만들었다.
滕 姬姓이고 侯爵인데, 文王의 아들 叔繡를 封한 나라이다.
《漢書》 〈地理志〉에는 “滕나라는 封해진 지 31世 만에 齊나라에 의해 滅亡하였다.”고 하였고, 《戰國策》에는 “宋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고 하였으니, 어떤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晉 姬姓이고 侯爵으로 武王의 少子 唐叔 虞의 후손이다.
비로소 翼에 都邑하고서 당숙의 아들 燮父가 晉侯가 되었다.
10世를 傳하여 昭侯에 이르러 昭侯가 그 아버지 文侯의 아우 成師를 曲沃에 封하였으니, 이가 桓叔이다.
昭侯로부터 나라를 傳하여 哀侯에 이르러 환숙의 손자 武公에게 멸망되었다.
武公이 絳으로 옮겨 居住하였고, 景公이 또 新田으로 遷都하였다.
이로부터 6世 뒤에 韓‧魏‧趙가 晉나라 땅을 三分해 각각 一分씩을 차지하고서 그 임금 靖公 俱酒를 〈海上으로 옮겨〉 庶人으로 만들었다.
太王의 長子 太伯이 그 아우 仲雍과 함께 어질고 聖子를 둔 막내 아우 季歷을 피해 荊蠻으로 가서 그 곳을 ‘句吳’라고 호칭하였다.
그 뒤 17世를 전하여 壽夢에 이르러 비로소 王이라 칭하였다.
이로부터 8년 뒤에 越王 句踐에 의해 멸망하였다.
鄭 姬姓이고 伯爵으로 厲王의 少子 友의 후손이다.
원래는 西都의 畿內 棫林 땅에 있었는데, 幽王의 난리 때 友가 妻子를 虢國과 鄫國 사이로 보내어 居留시켰다가 괵국과 증국의 땅를 빼앗아 그 곳을 首都로 삼고서 新鄭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다섯 임금을 거쳐 康公 乙에 이르러 韓나라에 의해 滅亡하였다.
虞 姬姓이고 公爵으로 太王의 아들 仲雍의 후손이다.
武王이 太伯과 仲雍의 後 裔를 수소문해 仲雍의 曾孫 周章이 이미 吳國의 임금이 된 것을 알고는 周章의 아우 虞仲을 周의 북쪽에 있는 옛날 夏나라의 舊址에 따로 封하였다.
12世를 전하여 虞公에 이르러 魯僖公 5년에 晉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虢 姬姓이고 公爵으로 王季의 아들 虢叔의 후손이다.
虢叔과 虢仲은 周王朝의 卿士로 있었는데, 文王은 두 아우를 사랑하여 ‘二虢’이라고 하였다.
武王이 虢叔을 虢에 封하였는데, 周王室이 東遷한 뒤에 虢公 忌父와 虢公 林父가 代를 이어 王室을 輔佐하였다.
召公이 周나라의 太保가 되어 召를 食邑으로 받았는데, 또 薊에 封하고서 北燕이라 호칭하였다.
14世를 傳하야 穆侯 7년에 이르러 비로소 춘추시대로 들어섰다.
이로부터 6世를 전하여 易王 噲(쾌)가 즉위하였고, 또 6世를 전하여 王喜에 이르러 秦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 先祖가 四岳(堯舜 때의 官名)으로 禹를 도와 水土를 平定한 功으로 呂에 封해졌었는데, 商나라 말엽에 太公 呂望이 文王‧武王을 도와 天下를 평정한 功勞가 있으므로 그를 營丘에 封하여 齊侯로 삼았다.
이로부터 세 임금을 거쳐 康公 貸가 卒함에 미쳐 田氏가 드디어 齊나라를 兼倂하였다.
秦 嬴姓이고 伯爵으로 顓頊의 遠孫인 女修의 후손이다.
女修의 손자 大費가 禹와 함께 水土를 平定하고, 舜을 도와 鳥獸를 길들인 공으로 嬴姓을 下賜받았으니, 이가 柏翳(백예)이다.
19世를 傳해 非子에 이르러 周孝王의 養馬官이 되어 汧水와 渭水 사이에서 말을 길러 말이 크게 蕃息하니, 孝王이 〈汧水와 渭水 사이의 땅을 나누어 주어〉 附庸國으로 삼고 秦에 都邑하게 하였다.
非子의 曾孫 秦仲이 西戎에게 죽음을 당하자 그 손자 襄公이 西戎을 討伐하여 功을 세웠다.
그러므로 平王이 東遷할 때 岐‧豊의 땅을 秦나라에 주어 제후가 되게 하였다.
寧公이 도읍을 平陽으로 옮기고, 德公이 다시 雍으로 옮기고, 文公이 다시 櫟陽(역양)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9世 뒤에 孝公이 都邑을 咸陽으로 옮겼고, 그 아들 惠文君이 스스로 王이라 호칭하였다.
始皇에 이르러 天下를 兼倂하고서 스스로 皇帝라 호칭하였으나 2世만에 亡하였다.
楚 羋姓(미성)이고 子爵으로 顓頊의 후손이다.
顓頊의 손자 重黎가 高辛氏의 火正이 되어 祝融으로 命名되었는데, 重黎가 죽자 그 아우 吳回가 뒤를 이어 축융이 되었다.
吳回의 遠孫 鬻熊(육웅)이 周나라 文王‧武王의 스승이었으므로 成王이 鬻熊의 曾孫 熊繹을 荊蠻에 封하고서 子爵‧南爵에 準하는 땅을 주었다.
그 뒤 郢으로 都邑을 옮기고서 國號을 楚로 고치었다.
이로부터 5世를 전하여 熊通에 이르렀으니, 이가 武王이다.
그 뒤 12王을 거쳐 王 負芻에 이르러 秦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商王 帝乙의 長庶子 啓가 微를 采邑으로 받았으므로 그를 微子라 하였다.
周武王이 紂를 誅伐한 뒤에 紂의 아들 武庚을 임금으로 세워 〈祖上의 宗廟를 받들게 하였으나〉 武庚이 三監과 함께 背叛하니, 成王이 그를 죽이고 다시 微子를 宋公으로 封하여 成湯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 후 王偃 에 이르러 王이라 호칭하고 覇者가 되기를 圖謀하니, 齊‧魏‧楚가 聯合해 멸망시켰다.
武王이 商나라를 이기고서 夏禹의 後孫을 수소문해 東樓公을 찾아내어 杞에 封하여 禹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4世를 傳하여 武公 29년에 이르러 비로소 춘추시대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侯로 칭해졌는데 뒤에는 格下되어 子로 칭해졌다가 이내 다시 伯으로 칭해졌다.
이로부터 32년 뒤에 楚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舜의 후손으로 有虞에 封해진 사람이 始祖이다.
虞閼父가 周武王의 陶正이 되니, 武王이 큰딸 大姬를 閼父의 아들 滿에게 시집보내고서 그를 陳侯로 封하여 虞舜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로부터 3년 뒤에 楚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邾 曹姓이고 子爵으로 祝融의 손자 晏安의 후손이다.
武王이 그 後孫 曹挾을 邾에 봉하여 附庸國으로 삼았다.
魯隱公 元年에 邾儀父 克이 蔑에서 會盟하였다.
北杏의 회맹에서 齊桓公에게 붙좇아 따랐으므로 爵位가 올라 子가 되었다.
《路史》에는 “邾는 魯나라에 合倂되었고, 鄒는 楚나라에게 멸망되었으니, 같은 나라가 아니다.”고 하였으니, 어느 說이 옳은지 자세히 알 수 없다.
或者는 “嬴姓으로 少昊의 후손이다.”고 하였다.
武王이 玆輿期를 莒에 봉하였는데, 莒나라의 임금은 諡는 없고 號만이 있다.
玆輿期로부터 11世를 전하여 玆丕父에 이르러 비로소 《春秋》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共公 庚輿 이후로는 쇠미하여 다시 《春秋》에 나타나지 않았다.
夷父 顔이 周나라에 功이 있었므로 周나라가 그 아들 友를 郳에 봉하여 附庸國으로 삼았다.
魯莊公 5년에 友의 曾孫 犂來가 비로소 魯나라에 와서 朝見하였다.
齊桓公이 처음으로 覇者가 되었을 때 郳君이 붙좇아 따르니, 爵位를 子로 올려 비로소 諸侯로 삼고서 小邾子라 하였다.
春秋 이후에도 6世를 전하다가 楚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春秋 때에는 나라는 작고 鄭나라에 近接했으므로 鄭나라의 逼迫을 받았는데, 뒤에는 楚나라에 붙었다.
魯成公 15년에 葉(섭)으로 遷都하고, 昭公 9년에 夷로 천도하였다가 11년에 다시 白羽로 천도하고, 定公 4년에 容城으로 천도하였다.
文叔으로부터 11世를 傳하여 莊公에 이르러 비로소 《春秋》에 나타난다.
越 姒姓이고 子爵인데, 그 先祖는 小康의 庶子이다.
그 뒤로 20여 世를 전하여 允常에 이르렀다.
允常의 아들 句踐 16년이 魯哀公 14년이다.
6世를 전하여 王 無彊에 이르러 楚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共, 鐘吾, 州, 陽, 黎, 道, 柏, 貳, 軫, 英氏, 遂, 崇, 冀, 厲, 巢, 庸, 介, 根牟, 邿, 極, 牟, 鄣, 鄀, 濮, 鄟, 姒, 於餘丘, 蓐, 房, 絞, 淮夷와 戎으로 北戎‧厲戎‧陸渾戎‧大戎‧小戎‧犬戎‧姜戎‧雒戎‧茅戎‧戎蠻‧盧戎‧山戎‧無終과 狄으로 赤狄‧皐落氏‧廧咎如‧潞氏‧甲氏‧留吁‧鐸辰‧白狄‧鮮虞‧肥鼓‧鄋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