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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2)

춘추좌씨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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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十有九年春王三月 宋人執滕子嬰齊하다注+稱人以執 宋以罪及民告
[經]夏六月 宋公曹人邾人盟于曹南하다注+無傳 曹雖與盟而猶不服 不肯致餼 無地主之禮 故不以國地 而曰曹南 所以及秋而見圍
鄫子會盟于邾注+不及曹南之盟 諸侯旣罷 鄫乃會之於邾 故不言如會하니 己酉 邾人執鄫子하야 用之하다注+稱人以執 宋以罪及民告也 鄫雖失大國會盟之信 然宋用之 爲罰已虐 故直書用之 言若用畜産也 不書社 赴不及也 不書宋使邾 而以邾自用爲文 南面之君 善惡自專 不得託之於他命
[經]秋 宋人圍曹하다注+[附注] 林曰 諸夏圍國始此
[經]衛人伐邢하다注+伐邢在圍曹前 經書在後 從赴
[經]冬 會陳人蔡人楚人鄭人盟于齊하다注+地於齊 齊亦與盟 [附注] 林曰 楚始與夏盟 書法如盟幽翟泉 謹始也
[經]梁亡하다注+以自亡爲文 非取者之罪 所以惡梁
[傳]十九年春 遂城而居之하다注+承前年傳取新里 故不復言秦也 爲此冬梁亡傳
[傳]宋人執滕宣公하다
[傳]夏 宋公使邾文公用鄫子于之社하야 欲以屬東夷하다注+睢水受汴 東經陳留梁譙沛彭城縣入泗 此水次有妖神 東夷皆社祠之 蓋殺人而用祭 [附注] 林曰 欲徼福于神以屬東夷之衆
司馬子魚曰
古者六畜不相爲用注+司馬子魚 公子目夷也 六畜不相爲用 謂若祭馬先 不用馬하고 小事不用大牲注+[附注] 林曰 謂若及夾室用雞之類이온 而況敢用人乎잇가
祭祀 以爲人也注+[附注] 林曰 所以爲民祈福 神之主也 用人이면 其誰饗之릿가
齊桓公存三亡國以屬諸侯注+三亡國 魯衛邢로되 義士注+謂欲因亂取魯 緩救邢衛이어늘 今一會而虐二國之君注+宋公三月以會召諸侯 執滕子 六月而會盟 其月二十二日執鄫子 故云一會而虐二國之君하고 又用諸淫昏之鬼注+하야 將以求霸하니 不亦難乎잇가
得死爲幸이리다注+恐其亡國
[傳]秋 衛人伐邢하야 以報菟圃之役하다注+邢不速退 所以獨見伐
於是衛大旱하야 卜有事於山川하니 不吉이라注+有事 祭也
寗莊子曰
昔周饑 克殷而年豐이니이다
今邢方無道하고 諸侯無伯注+伯 長也하니 天其或者欲使衛討邢乎
從之하야 하다
[傳]宋人圍曹하니 討不服也注+曹南盟 不脩地主之禮故
子魚言於宋公曰
文王聞崇德亂而伐之하야 軍三旬而不降注+崇 崇侯虎이어늘 退脩敎而復伐之하야 因壘而降注+復往之 備不改前 而崇自服 [附注] 林曰 壘 軍壘也 言不增兵 但因舊壘而崇自服하니이다
詩曰 刑于寡妻하야 至于兄弟하야 以御于家邦注+詩 大雅 言文王之敎 自近及遠 寡妻 嫡妻 謂大姒也 刑 法也이라하니
今君德無乃猶有所闕
而以伐人하니 若之何注+[附注] 林曰 如之何可以服人
盍姑內省德乎잇가
無闕而後動하소서
[傳]陳穆公請脩好於諸侯하야 以無忘齊桓之德하다
盟于齊하니 脩桓公之好也注+宋襄暴虐 故思齊桓
[傳]梁亡 不書其主 自取之也注+不書取梁者主名
梁伯好土功하야 亟城而弗處注+[附注] 林曰 亟城其邑 而無民以居處其地하니 民罷而弗堪하다
則曰 某寇將至라하고 乃溝公宮注+溝 塹 [附注] 林曰 蓋鑿池環城公宮 曰 秦將襲我라하니 民懼而潰하다
秦遂取梁하다


19년 봄 주왕周王 3월에 송인宋人등자滕子영제嬰齊를 잡았다. 注+이 잡았다고 칭한 것은 나라가 등자滕子죄악罪惡이 백성에까지 미쳤다고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 성공成公 15년에 보인다. 전례傳例는 이름을 기록하는 것으로 의의意義를 삼지 않으니, 이름을 기록하기도 하고 기록하지 않기도 한 것은 모두 알려온 문서文書에 따른 것이다.
여름 6월에 송공宋公조인曹人주인邾人나라의 남방南方에서 회맹會盟하였다.注+이 없다. 나라가 비록 회맹會盟에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복종하지 않아 식물食物를 보내지 않았으니 지주地主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라 안의 지명地名을 기록하지 않고 나라의 남쪽이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이 가을에 포위를 당하게 된 원인이다.
증자鄫子회맹會盟하기 위해 나라에 가니,注+증자鄫子조남曹南회맹會盟에 뒤늦게 가니 제후諸侯가 이미 흩어진 뒤였다. 증자鄫子나라로 가서 회맹會盟하려 하였기 때문에 회맹會盟에 갔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기유일己酉日주인邾人증자鄫子를 잡아 제사祭祀희생犧牲으로 썼다.注+이 잡았다고 칭한 것은 나라가 증자鄫子죄악罪惡이 백성에 미친 것으로 나라에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 증자鄫子가 비록 대국大國회맹會盟신의信義를 잃기는 하였으나, 나라가 그를 제사에 희생으로 쓴 것은 이 너무 모질었다. 그러므로 ‘그를 제사에 희생으로 썼다.’고 솔직하게 기록한 것이니, 마치 짐승을 쓰듯이 했다는 말이다. 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통고通告문서文書언급言及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가 주인邾人을 시켜 희생으로 쓰게 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주인邾人이 스스로 그를 희생으로 쓴 것으로 글을 만든 것은 남면南面한 임금은 한 일이나 한 일이나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의 명이라고 핑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을에 송인宋人나라를 포위包圍하였다.注+[부주]林: 제하諸夏가 다른 나라를 포위한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위인衛人나라를 토벌하였다.注+나라를 토벌한 일이 나라를 포위하기 전에 있었는데, 에 뒤에 기록한 것은 통고通告해 온 순서에 따른 것이다.
겨울에 진인陳人채인蔡人초인楚人정인鄭人회합會合하여 나라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나라 땅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나라도 결맹에 참여한 것이다. [부주]林: 나라가 비로소 제하諸夏결맹結盟한 것이다. 서법書法장공莊公 16년에 있었던 유지幽地결맹結盟희공僖公 29년에 있은 적천翟泉결맹結盟을 기록한 것과 같으니 시작을 삼간 뜻이다.
나라가 하였다.注+나라가 스스로 망한 것으로 글을 만든 것은 한 자의 가 아님을 드러낸 것이니 나라를 미워한 것이다.
19년 봄에 드디어 성을 쌓고서 백성을 거주居住시켰다.注+전년前年의 ‘나라가 신리新里하였다.’는 글의 뒤를 이은 것이므로 다시 나라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겨울에 나라가 망한 의 배경이다.
송인宋人등선공滕宣公을 잡았다.
여름에 송공宋公주문공邾文公에게 증자鄫子차수次睢희생犧牲으로 쓰게 하여 동이東夷복속服屬시키고자 하였다.注+수수睢水변수汴水를 받아들여 동으로 흘러 진류陳留팽성현彭城縣을 거쳐 사수泗水로 들어가는데, 이 물가에 요신妖神이 살고 있으므로 동이東夷가 모두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 지내는데 사람을 잡아 희생犧牲으로 쓴 듯하다. [부주]林: 에게 을 빌어 동이東夷의 무리를 복속服屬시키고자 한 것이다.
나라 사마司馬자어子魚가 말하였다.
“옛날에는 육축六畜을 서로 쓰지 않았고,注+사마司馬자어子魚공자公子목이目夷이다. 육축六畜을 서로 쓰지 않았다는 것은 마선馬先(말의 선조先祖)의 제사에 말을 희생으로 쓰지 않는 이다. 작은 제사에는 큰 희생犧牲을 쓰지 않았는데,注+[부주]林: 흔묘釁廟에는 을 사용하고 흔문釁門협실夾室에는 닭을 사용하는 이다. 하물며 감히 사람을 쓴다는 말입니까.
제사는 사람을 위해서 지내는 것이고注+[부주]林: 제사는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이다. 백성은 주인主人이니, 사람을 희생으로 쓴다면 그 어느 흠향歆饗하겠습니까.
제환공齊桓公해 가는 세 나라를 보존시켜 제후諸侯들을 복속服屬시켰는데도注+망해 가는 세 나라는 나라‧나라‧나라이다.의사義士는 오히려 부족不足하다고 하였는데注+어지러운 틈을 타서 나라를 취하려 하였고, 나라와 나라를 늦게 구원한 것을 이름이다. 임금께서는 지금 한 번의 회합會合에서 두 나라 임금을 해치고,注+송공宋公이 3월에 회맹會盟을 이유로 제후諸侯소집召集하고서 등자滕子를 잡았고, 6월에 회맹會盟하고서 그 달 22일에 증자鄫子를 잡았기 때문에 한 번의 회합에서 두 나라 임금을 해쳤다고 한 것이다. 증자鄫子음혼淫昏귀신鬼神(妖邪한 귀신鬼神)의 제사에 희생犧牲으로 써서注+주사周社가 아니기 때문이다.패자霸者가 되기를 구하고자 하시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명대로 살다가 죽으면 다행일 것입니다.”注+나라를 망칠까 두렵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가을에 위인衛人나라를 토벌하여 토포菟圃의 전쟁을 보복報復하였다.注+형군邢軍이 속히 물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홀로 토벌討伐당한 것이다.
이때 나라에 크게 가뭄이 들어 산천山川기우제祈雨祭 지낼 것을 점치니 불길不吉하였다.注+유사有事는 제사이다.
영장자寗莊子가 말하였다.
“옛날 나라에 기근饑饉이 들었을 때 나라를 쳐서 이기자 풍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나라가 바야흐로 무도無道하고 제후諸侯에는 후백侯伯이 없으니,注+이다. 하늘이 혹시 우리 나라로 하여금 나라를 치게 하려는 것이 아닌지요.”
위후衛侯가 그의 말을 따라 군사를 일으키니 비가 내렸다.
송인宋人나라를 포위하였으니 이는 나라가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注+조남曹南회맹會盟에서 나라가 지주地主수행修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어子魚송공宋公에게 말하였다.
문왕文王나라의 이 어지럽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정벌征伐하여 30일 동안 공격攻擊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자,注+숭후崇侯이다.퇴군退軍해 돌아와서 교화敎化를 닦은 뒤에 다시 정벌征伐하여 전의 보루堡壘를 이용하였으나 숭인崇人항복降服하였습니다.注+다시 가서 공격할 때 전비戰備를 전보다 늘리지 않았는데도 나라가 스스로 항복한 것이다. [부주]林: 군루軍壘이니, 군대를 증원增員하지 않고 단지 전에 쌓았던 보루堡壘를 이용했을 뿐인데도 나라가 스스로 항복하였다는 말이다.
에 ‘아내에게 본보기가 되어 형제兄弟에게 미쳐서 집안과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注+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사제편思齊篇〉이니, 문왕文王교화敎化가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과처寡妻적처嫡妻이니 태사太姒를 이름이다. 이다.
지금 임금의 에 오히려 부족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남을 토벌하시니 어찌 남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注+[부주]林: 어떻게 남을 복종시킬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어찌 우선 안으로 자신의 덕을 반성하지 않으십니까?
에 부족함이 없은 뒤에 움직이소서.”라고 하였다.
진목공陳穆公제후諸侯가 서로 수호修好하여 제환공齊桓公을 잊지 말기를 청하였다.
겨울에 나라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이는 환공桓公수립樹立우호友好중수重修하기 위함이었다. 注+송양공宋襄公포학暴虐하기 때문에 제환공齊桓公을 생각한 것이다.
나라가 한 것에 대해 나라를 멸망시킨 나라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멸망滅亡을 자초하였기 때문이다.注+나라를 취한 나라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당초에 양백梁伯토목공사土木工事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자주 을 쌓고도 그 성안에 백성을 거주居住시키지 않았으니注+[부주]林: 자주 그 을 쌓고도 그 성안에 백성을 거주居住시키지 않은 것이다. 백성들이 을 쌓는 일에 지쳐서 그 노역勞役감내堪耐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양백梁伯은 ‘아무 적이 쳐들어 오려 한다.’라고 하고, 공궁公宮 밖에 해자를 파게 하며注+는 해자를 파는 것이다. [부주]林: 공궁公宮 둘레에 못을 판 것인 듯하다. 말하기를 ‘나라가 우리나라를 습격하려 한다.’라고 하니 백성들이 겁을 먹고 흩어졌다.
나라가 드디어 나라를 취하였다.


역주
역주1 例在成十五年 : 成公 15년 傳에 “백성에게 無道한 임금을 제후가 討伐해 잡으면 ‘某人이 某侯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역주2 傳例不以名……皆從赴 : 《春秋》에 임금을 잡은 기록이 모두 13번 보이는데, 오직 이 곳의 滕子嬰齊와 哀公 4년의 戎蠻子赤의 이름만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이름을 기록해 통고해 왔으면 《春秋》에 이름을 기록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주3 次睢 : 杜注에는 次睢를 睢水의 물가로 해석하였으나, 譯者의 생각에는 地名으로 본 《左氏會箋》의 해석이 옳은 듯하다.
역주4 釁廟, 釁門 : 釁廟는 새 宗廟가 완성되면 羊의 피를 받아 제사 지내는 것이고, 釁門은 문이 완성되면 닭의 피를 받아 제사 지내는 것이다.
역주5 猶曰薄德 : 齊桓公이 비록 망해가는 세 나라를 보존시켰지만, 그 德은 오히려 不足했다는 말이다. 杜注에 겨우 망해가는 세 나라만을 보존시킨 것으로 말한 것은 옳지 않다. 楊伯峻 《春秋左傳注》
역주6 周社 : 周나라 祀典에 들어 있지 않은 제사이다.
역주7 師興而雨 : 李震相은 “邢나라를 토벌하자 마침 비가 내린 것이지 하늘의 뜻은 아니다.”고 하였다.
역주8 改[攻] : 저본에는 ‘改’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攻’으로 바로잡았다.

춘추좌씨전(2)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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