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봄 주왕周王 3월에 송인宋人이 등자滕子영제嬰齊를 잡았다. 注+인人이 잡았다고 칭한 것은 송宋나라가 등자滕子의 죄악罪惡이 백성에까지 미쳤다고 노魯에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 예例가 성공成公 15년에 보인다. 전례傳例는 이름을 기록하는 것으로 의의意義를 삼지 않으니, 이름을 기록하기도 하고 기록하지 않기도 한 것은 모두 알려온 문서文書에 따른 것이다.
여름 6월에 송공宋公이 조인曹人‧주인邾人과 조曹나라의 남방南方에서 회맹會盟하였다.注+전傳이 없다. 조曹나라가 비록 회맹會盟에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복종하지 않아 식물食物를 보내지 않았으니 지주地主의 예禮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라 안의 지명地名을 기록하지 않고 조曹나라의 남쪽이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이 가을에 포위를 당하게 된 원인이다.
증자鄫子가 회맹會盟하기 위해 주邾나라에 가니,注+증자鄫子가 조남曹南의 회맹會盟에 뒤늦게 가니 제후諸侯가 이미 흩어진 뒤였다. 증자鄫子가 주邾나라로 가서 회맹會盟하려 하였기 때문에 회맹會盟에 갔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기유일己酉日에 주인邾人이 증자鄫子를 잡아 제사祭祀에 희생犧牲으로 썼다.注+인人이 잡았다고 칭한 것은 송宋나라가 증자鄫子의 죄악罪惡이 백성에 미친 것으로 노魯나라에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 증자鄫子가 비록 대국大國의 회맹會盟에 신의信義를 잃기는 하였으나, 송宋나라가 그를 제사에 희생으로 쓴 것은 벌罰이 너무 모질었다. 그러므로 ‘그를 제사에 희생으로 썼다.’고 솔직하게 기록한 것이니, 마치 짐승을 쓰듯이 했다는 말이다. 사社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통고通告한 문서文書에 언급言及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宋나라가 주인邾人을 시켜 희생으로 쓰게 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주인邾人이 스스로 그를 희생으로 쓴 것으로 글을 만든 것은 남면南面한 임금은 선善한 일이나 악惡한 일이나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의 명이라고 핑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을에 송인宋人이 조曹나라를 포위包圍하였다.注+[부주]林: 제하諸夏가 다른 나라를 포위한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위인衛人이 형邢나라를 토벌하였다.注+형邢나라를 토벌한 일이 조曹나라를 포위하기 전에 있었는데, 경經에 뒤에 기록한 것은 통고通告해 온 순서에 따른 것이다.
겨울에 진인陳人‧채인蔡人‧초인楚人‧정인鄭人과 회합會合하여 제齊나라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제齊나라 땅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제齊나라도 결맹에 참여한 것이다. [부주]林: 초楚나라가 비로소 제하諸夏와 결맹結盟한 것이다. 서법書法이 장공莊公 16년에 있었던 유지幽地의 결맹結盟과 희공僖公 29년에 있은 적천翟泉의 결맹結盟을 기록한 것과 같으니 시작을 삼간 뜻이다.
양梁나라가 망亡하였다.注+양梁나라가 스스로 망한 것으로 글을 만든 것은 취取한 자의 죄罪가 아님을 드러낸 것이니 양梁나라를 미워한 것이다.
傳
19년 봄에 드디어 성을 쌓고서 백성을 거주居住시켰다.注+전년前年전傳의 ‘진秦나라가 신리新里를 취取하였다.’는 글의 뒤를 이은 것이므로 다시 진秦나라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겨울에 양梁나라가 망한 전傳의 배경이다.
傳
송인宋人이 등선공滕宣公을 잡았다.
傳
여름에 송공宋公이 주문공邾文公에게 증자鄫子를 차수次睢의 사社에 희생犧牲으로 쓰게 하여 동이東夷를 복속服屬시키고자 하였다.注+수수睢水는 변수汴水를 받아들여 동으로 흘러 진류陳留‧양梁‧초譙‧패沛‧팽성현彭城縣을 거쳐 사수泗水로 들어가는데, 이 물가에 요신妖神이 살고 있으므로 동이東夷가 모두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 지내는데 사람을 잡아 희생犧牲으로 쓴 듯하다. [부주]林: 신神에게 복福을 빌어 동이東夷의 무리를 복속服屬시키고자 한 것이다.
송宋나라 사마司馬자어子魚가 말하였다.
“옛날에는 육축六畜을 서로 쓰지 않았고,注+사마司馬자어子魚는 공자公子목이目夷이다. 육축六畜을 서로 쓰지 않았다는 것은 마선馬先(말의 선조先祖)의 제사에 말을 희생으로 쓰지 않는 유類이다. 작은 제사에는 큰 희생犧牲을 쓰지 않았는데,注+[부주]林: 흔묘釁廟에는 양羊을 사용하고 흔문釁門과 협실夾室에는 닭을 사용하는 유類이다. 하물며 감히 사람을 쓴다는 말입니까.
제사는 사람을 위해서 지내는 것이고注+[부주]林: 제사는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이다. 백성은 신神의 주인主人이니, 사람을 희생으로 쓴다면 그 어느 신神이 흠향歆饗하겠습니까.
제환공齊桓公은 망亡해 가는 세 나라를 보존시켜 제후諸侯들을 복속服屬시켰는데도注+망해 가는 세 나라는 노魯나라‧위衛나라‧형邢나라이다.의사義士는 오히려 덕德이 부족不足하다고 하였는데注+어지러운 틈을 타서 노魯나라를 취하려 하였고, 형邢나라와 위衛나라를 늦게 구원한 것을 이름이다. 임금께서는 지금 한 번의 회합會合에서 두 나라 임금을 해치고,注+송공宋公이 3월에 회맹會盟을 이유로 제후諸侯를 소집召集하고서 등자滕子를 잡았고, 6월에 회맹會盟하고서 그 달 22일에 증자鄫子를 잡았기 때문에 한 번의 회합에서 두 나라 임금을 해쳤다고 한 것이다. 또 증자鄫子를 음혼淫昏한 귀신鬼神(妖邪한 귀신鬼神)의 제사에 희생犧牲으로 써서注+주사周社가 아니기 때문이다.패자霸者가 되기를 구하고자 하시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가을에 위인衛人이 형邢나라를 토벌하여 토포菟圃의 전쟁을 보복報復하였다.注+형군邢軍이 속히 물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홀로 토벌討伐당한 것이다.
이때 위衛나라에 크게 가뭄이 들어 산천山川의 신神에 기우제祈雨祭 지낼 것을 점치니 불길不吉하였다.注+유사有事는 제사이다.
영장자寗莊子가 말하였다.
“옛날 주周나라에 기근饑饉이 들었을 때 은殷나라를 쳐서 이기자 풍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형邢나라가 바야흐로 무도無道하고 제후諸侯에는 후백侯伯이 없으니,注+백伯은 장長이다. 하늘이 혹시 우리 위衛나라로 하여금 형邢나라를 치게 하려는 것이 아닌지요.”
위후衛侯가 그의 말을 따라 군사를 일으키니 비가 내렸다.
傳
송인宋人이 조曹나라를 포위하였으니 이는 조曹나라가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注+조남曹南의 회맹會盟에서 조曹나라가 지주地主의 예禮를 수행修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어子魚가 송공宋公에게 말하였다.
“문왕文王은 숭崇나라의 덕德이 어지럽다는 말을 듣고 숭崇나라를 정벌征伐하여 30일 동안 공격攻擊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자,注+숭崇은 숭후崇侯호虎이다.퇴군退軍해 돌아와서 교화敎化를 닦은 뒤에 다시 정벌征伐하여 전의 보루堡壘를 이용하였으나 숭인崇人이 항복降服하였습니다.注+다시 가서 공격할 때 전비戰備를 전보다 늘리지 않았는데도 숭崇나라가 스스로 항복한 것이다. [부주]林: 누壘는 군루軍壘이니, 군대를 증원增員하지 않고 단지 전에 쌓았던 보루堡壘를 이용했을 뿐인데도 숭崇나라가 스스로 항복하였다는 말이다.
시詩에 ‘아내에게 본보기가 되어 형제兄弟에게 미쳐서 집안과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注+시詩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사제편思齊篇〉이니, 문왕文王의 교화敎化가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과처寡妻는 적처嫡妻이니 태사太姒를 이름이다. 형刑은 법法이다.
지금 임금의 덕德에 오히려 부족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남을 토벌하시니 어찌 남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注+[부주]林: 어떻게 남을 복종시킬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어찌 우선 안으로 자신의 덕을 반성하지 않으십니까?
덕德에 부족함이 없은 뒤에 움직이소서.”라고 하였다.
傳
진목공陳穆公이 제후諸侯가 서로 수호修好하여 제환공齊桓公의 덕德을 잊지 말기를 청하였다.
겨울에 제齊나라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이는 환공桓公이 수립樹立한 우호友好를 중수重修하기 위함이었다. 注+송양공宋襄公이 포학暴虐하기 때문에 제환공齊桓公을 생각한 것이다.
傳
양梁나라가 망亡한 것에 대해 경經에 양梁나라를 멸망시킨 나라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양梁나라가 멸망滅亡을 자초하였기 때문이다.注+양梁나라를 취한 나라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당초에 양백梁伯이 토목공사土木工事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자주 성城을 쌓고도 그 성안에 백성을 거주居住시키지 않았으니注+[부주]林: 자주 그 읍邑에 성城을 쌓고도 그 성안에 백성을 거주居住시키지 않은 것이다. 백성들이 성城을 쌓는 일에 지쳐서 그 노역勞役을 감내堪耐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양백梁伯은 ‘아무 적이 쳐들어 오려 한다.’라고 하고, 공궁公宮 밖에 해자를 파게 하며注+구溝는 해자를 파는 것이다. [부주]林: 공궁公宮의 성城 둘레에 못을 판 것인 듯하다. 말하기를 ‘진秦나라가 우리나라를 습격하려 한다.’라고 하니 백성들이 겁을 먹고 흩어졌다.
진秦나라가 드디어 양梁나라를 취하였다.
역주
역주1例在成十五年 :
成公 15년 傳에 “백성에게 無道한 임금을 제후가 討伐해 잡으면 ‘某人이 某侯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역주2傳例不以名……皆從赴 :
《春秋》에 임금을 잡은 기록이 모두 13번 보이는데, 오직 이 곳의 滕子嬰齊와 哀公 4년의 戎蠻子赤의 이름만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이름을 기록해 통고해 왔으면 《春秋》에 이름을 기록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주3次睢 :
杜注에는 次睢를 睢水의 물가로 해석하였으나, 譯者의 생각에는 地名으로 본 《左氏會箋》의 해석이 옳은 듯하다.
역주4釁廟, 釁門 :
釁廟는 새 宗廟가 완성되면 羊의 피를 받아 제사 지내는 것이고, 釁門은 문이 완성되면 닭의 피를 받아 제사 지내는 것이다.
역주5猶曰薄德 :
齊桓公이 비록 망해가는 세 나라를 보존시켰지만, 그 德은 오히려 不足했다는 말이다. 杜注에 겨우 망해가는 세 나라만을 보존시킨 것으로 말한 것은 옳지 않다. 楊伯峻 《春秋左傳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