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봄에 적인狄人이 위衛나라를 침공侵攻하였다.注+전傳이 없다. 위衛나라가 형邢나라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송인宋人‧제인齊人‧초인楚人이 녹상鹿上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녹상鹿上은 송宋나라 땅이다. 여음汝陰에 원록현原鹿縣이 있다. 송宋나라가 맹주盟主가 되었기 때문에 제인齊人 위에 기록한 것이다.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注+우제雩祭를 지냈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물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여름서부터 가을까지 가물어서 오곡五穀을 모두 수확收穫하지 못하였다.
가을에 송공宋公‧초자楚子‧진후陳侯‧채후蔡侯‧정백鄭伯‧허남許男‧조백曹伯이 우盂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우盂는 송宋나라 땅이다. 초楚나라가 비로소 중국中國의 회맹會盟에 참여하여 회례會禮를 행하였기 때문에 작爵을 칭한 것이다. [부주]林: 초楚나라 임금을 비로소 ‘자子’로 칭한 것은 송宋나라와 초楚나라가 서로 패주霸主가 되기를 다투었기 때문이다.
송공宋公을 잡고서 송宋나라를 토벌하였다.注+초자楚子가 송공宋公을 잡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송공宋公이 덕德도 없으면서 맹주盟主가 되기를 다투어 제후諸侯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여러 나라가 함께 잡은 것으로 글을 만든 것이다. [부주]林: 초자楚子가 송공宋公을 잡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이적夷狄이 중국中國의 임금을 잡은 것으로 글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겨울에 공公이 주邾나라를 토벌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주邾나라가 수구須句를 멸滅하였기 때문에 토벌한 것이다.
초인楚人이 의신宜申을 보내어 와서 헌첩獻捷하였다.注+전傳이 없다. 송宋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서 얻은 전리품戰利品을 바친 것인데, ‘송宋’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가을에 송宋나라를 토벌하고 겨울에 와서 헌첩獻捷한 것이 동년同年의 일이어서 ‘송宋’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초자楚子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사자使者가 와서 임금의 명命이라 칭하지 않고 예禮를 행하였기 때문이다. [부주]林: 초楚나라 대부大夫가 비로소 경經에 나타났다.
12월 계축일癸丑日에 공公이 제후諸侯와 회합會合하여 박薄에서 결맹結盟하고서 송공宋公을 석방釋放하였다. 注+제후諸侯가 초楚나라와 함께 송宋나라를 토벌하자, 송宋나라가 항복降服하였으므로 박薄에서 결맹結盟하고서 송공宋公을 석방釋放한 것이다. 희공僖公은 본래 회기會期를 통보通報받지 못하였으나, 회합會合한다는 소식을 듣고 갔기 때문에 ‘공公이 제후諸侯와 회합會合하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부주]林: ‘제후諸侯’라고 기록한 것은 초楚나라가 마음대로 잡고 마음대로 풀어 준 것을 옳게 여기지 않은 뜻이다.
傳
21년 봄에 송인宋人이 녹상鹿上에서 결맹結盟하고서 초楚에게 제후諸侯가 자기를 맹주盟主로 추대推戴하도록 도와주기를 요구하니注+[부주]林: 초楚나라의 위세威勢를 빌어 제후諸侯의 패주霸主가 되기를 구한 것이다.초인楚人이 허락하였다.
공자公子목이目夷가 말하기를, “소국小國이 맹주盟主가 되기를 다투는 것은 화禍를 부르는 것이니 송宋나라는 망할 것이다.
”注+전쟁에 패배하는 것이다. [부주]林: 패전敗戰을 천행天幸으로 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傳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드니 공公이 무왕巫尫을 태워 죽이려 하였다.注+무왕巫尫은 여자 무당으로 기도해 비를 비는 일을 맡은 자이다. 혹자或者는 “왕尫은 무당이 아니고 앞 곱사이다. 그 얼굴이 위를 향하기 때문에 세속世俗에서는 ‘하늘이 그 병을 가엾게 여겨 비를 내리면 비가 그 코로 들어갈 것을 염려하여 가물게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희공僖公이 그들을 태워 죽이고자 한 것이다.”고 하였다.
장문중臧文仲이 말하였다.
“이는 한재旱災에 대한 대비책對備策이 아닙니다.注+[부주]林: 한재旱災를 대비하는 방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성곽城郭을 수축修築하고注+[부주]林: 성곽城郭을 수축修築하면 주린 백성들이 먹을 수 있다. 먹는 것을 줄이고 비용費用을 절약하며注+[부주]林: 임금의 성찬盛饌을 없애고 비용費用을 줄이는 것이다.농사農事에 힘쓰고 나누어 먹기를 권하는 것이注+색穡은 검소儉素이다. 권분勸分은 있고 없는 것을 서로 나누어서 융통融通해 구제救濟하게 하는 것이다. [부주]朱: 이미 가문 농사를 다시 정리하고, 또 부자富者를 권유勸誘하여 빈민貧民에게 나누어 주게 하는 것이다.급선무急先務입니다.
무왕巫尫이 무슨 힘이 있어 가뭄을 불렀겠습니까?注+[부주]林: 무왕巫尫이 무슨 능력으로 가뭄을 불렀겠느냐는 말이다.
하늘이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면 응당 내지 않았을 것이고,注+[부주]林: 그를 죽여 한재旱災를 막을 수 있다면 이는 하늘이 그를 죽이려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하늘은 이 사람을 내지 않은 것이 어떠했느냐는 말이다. 저가 가뭄을 불렀다면 태워 죽이면 가뭄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注+[부주]林: 이 사람이 과연 가뭄을 불렀다면 이 사람을 태워 죽이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어서 가뭄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공公이 그의 말을 따랐다.
이해에 기근饑饉이 들었으나 백성이 해害를 입지는 않았다.注+백성을 상해傷害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傳
가을에 제후諸侯가 송공宋公과 우盂에서 회합會合하였다.
자어子魚가 말하기를, “화禍가 이번 회합會合에 있을 것이다.
임금의 욕심이 너무 심하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注+[부주]林: 어찌 패자霸者의 일을 이룰 수 있겠느냐는 뜻이니 반드시 제후諸侯를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부주]朱: 송양공宋襄公이 패업霸業을 도모圖謀함에 있어 탐욕貪慾이 너무 심하므로 제후諸侯가 그의 요구를 감당堪當할 수 없으니 반드시 변란變亂이 생길 것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초자楚子가 송공宋公을 잡고서 송宋나라를 토벌하였다.
겨울에 박薄에서 회맹會盟하고서 송공宋公을 석방釋放하니,注+[부주]林: 송공宋公이 초楚나라에 복종服從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박薄에서 회맹會盟하고서 송공宋公을 석방釋放한 것이다.자어子魚가 말하였다.
“화禍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注+[부주]林: 자어子魚는 송공宋公이 석방釋放될 때 자못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보고서, 양공襄公은 여전히 제후諸侯의 맹주盟主되기를 탐할 것이므로 화禍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안 것이다.
실實로 태호太皥와 유제有濟의 제사를 맡아注+사司는 주관主管하는 것이다. 태호太皥는 복희伏羲이다. 네 나라는 모두 복희伏羲의 후손後孫이기 때문에 그 제사를 주관한 것이다. 임任은 지금의 임성현任城縣이다. 전유顓臾는 태산泰山 남쪽과 무양현武陽縣 동북쪽에 있고, 수구須句는 동평東平수창현須昌縣 서북쪽에 있다. 네 나라의 봉지封地가 제수濟水에 가깝기 때문에 대대로 제수濟水에 제사를 지냈다. [부주]林: 제濟는 제수濟水이다.제하諸夏에 복종하여 섬겼다.注+제하諸夏와 함께 왕사王事를 행한 것이다.
“명사明祀를 높이고 소국小國을 보호保護하는 것은 주周나라의 예禮이고,注+명사明祀는 태호太皥와 유제有濟의 제사이다. 보保는 안정安定시키는 것이다.만이蠻夷가 제하諸夏를 어지럽히는 것은 주周나라의 화禍이니,注+이곳에는 주邾나라가 수구須句를 멸滅하자 주邾나라를 만이蠻夷라고 하였고, 소공昭公 23년 전傳에 숙손표叔孫豹가 ‘주邾나라는 또 오랑캐이다.’고 하였으니, 주邾나라가 비록 조성曹姓의 나라이지만 그 나라가 제융諸戎과 인접隣接해 이례夷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표현해 만이蠻夷라고 말한 것이다. 활하滑夏는 제하諸夏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부주]林: 제후諸侯는 모두 주周나라의 신하이기 때문에 주周나라 왕실王室의 화禍라고 한 것이다. 만약 수구須句를 봉封해 준다면 이는 태호太皥와 유제有濟를 높여 제사를 수행修行하고 화禍를 푸는 일이오.”注+서紓는 푸는 것이다. 명년明年에 주邾나라를 친 전傳의 배경이다.
역주
역주1宋人齊人楚人盟于鹿上 :
李震相은 “楚나라가 中國의 會盟에 참여한 것은 魯나라와 陳나라가 앞에서 끌고 鄭나라가 뒤에서 밀면서 齊桓公 때의 友好를 重修하자고 가탁했기 때문이다. 諸侯들의 뜻은 宋公이 미워서 楚子를 끌어들인 것인데 宋公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楚나라에 도움을 청하였으니 어리석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역주2雩不獲雨 故書旱 :
가뭄이 들면 반드시 雩祭를 지내는데, 우제를 지낸 뒤에 비가 내리면 우제를 지낸 것을 기록하고, 우제를 지냈으나 비가 내리지 않으면 가물었다고 기록한다.
역주3宋公楚子……執宋公以伐宋 :
朴致遠은 “楚子를 諸侯의 위에 기록하고, 또 잡았다고 기록하여 中國의 제후들이 회합을 주관한 宋公을 救濟하지 않은 것을 나무란 것이다.”고 하였다.
역주4爲邾滅須句故 :
《左氏會箋》에 의하면 僖公 19년에 邾나라가 宋나라의 命에 따라 魯나라의 사위인 鄫子를 제사에 犧牲으로 썼으나, 宋나라의 威勢가 두려워 감히 보복하지 못하였다가 이제 諸侯가 宋나라를 토벌하기 때문에 僖公이 邾나라를 토벌한 것이지 須句 때문에 토벌한 것이 아니다. 須句를 위해 邾나라를 토벌한 일은 僖公 22년에 보이니, 이 일이 아니다.
역주6公本無會期……故書公會諸侯 :
諸侯의 會合에 魯君이 늦게 가면 會合에 참여한 諸侯의 國名을 列記하지 않고 참여한 모든 나라를 ‘諸侯’로 묶어 기록하는 것이 例이다. 그러나 이번 會合에는 僖公이 늦게 간 것이 아닌데도 ‘諸侯’라고 칭한 것은 이번 會合에 참여한 諸侯가 가을에 盂에서 會合했던 諸侯이기 때문에 다시 國名을 列記하지 않고 ‘諸侯’라고 말한 것이다. 〈疏〉
역주7幸運이……것이다 :
幸而後敗는 여러 가지 解釋이 있다. 楊伯峻은 僖公 15년 傳의 ‘幸而得囚’과 같은 句法으로 보아 전쟁에 패배만하고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뜻으로 풀었고, 貴州人民出版社의 《左傳全釋》과 中州古籍出版社의 《春秋左傳》에는 나중에 패망하면 다행이겠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杜注에는 敗만을 해석하고 幸而後에 대해서는 전혀 해석하지 않았으며, 林氏와 楊伯峻도 ‘後’를 해석하지 않았다. 두 飜譯本에는 ‘後’를 나중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譯者는 이상의 說들을 따르지 않고 이상과 같이 번역하였다.
역주8脩城郭……此其務也 :
朴致遠은 “臧文仲이 말한 가뭄에 대비한 方策은 긴요하고 완전하다고 이를 만하다. 城郭을 수리하면 饑民이 먹을 수 있고, 음식과 비용을 절약하면 財穀이 넉넉해지고 농사를 힘쓰면 곡식을 수확할 수 있고, 나누어 먹기를 권면하면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구제하게 되니 救荒의 方策은 이와 같을 뿐이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