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二十有二年春
에 하다注+須句雖別國 而削弱不能自通 爲魯私屬 若顓臾之比 魯謂之社稷之臣 故滅奔及反其君 皆略不備書 唯書伐邾取須句
[經]秋八月丁未
에 及邾人戰于升陘
하다注+升陘 魯地 邾人縣公冑于魚門 故深恥之 不言公 又不言師敗績
[經]冬十有一月己巳朔
에 宋公及楚人戰于泓
하야 宋師敗績
하다注+泓 水名 宋伐鄭 楚救之 故戰也 楚告命 不以主帥人數 故略稱人
傳
[傳]初平王之東遷也
注+周幽王爲犬戎所滅 平王嗣 故東遷洛邑에 辛有適伊川
이라가 見被髮而祭於野者
注+辛有 周大夫 伊川 周地 伊 水也하고 曰
秋
에 秦晉遷陸渾之戎于伊川
하다注+允姓之戎居陸渾 在秦晉西北 二國誘而徙之伊川 遂從戎號 至今爲陸渾縣也 計此去辛有過百年 而云不及百年 傳擧其事驗 不必其年信
傳
[傳]晉大子圉爲質於秦
이러니 將逃歸
할새 謂嬴氏曰 與子歸乎
인저注+嬴氏 秦所妻子圉懷嬴也 對曰
子는 晉大子而辱於秦하니 子之欲歸는 不亦宜乎잇가
寡君之使婢子侍執巾櫛
注+婢子 婦人之卑稱 [附注] 林曰 巾以帨手 櫛以理髮 皆賤役은 以固子也
注+[附注] 林曰 蓋欲以安固子之心也어늘 하리이다注+[附注] 林曰 不敢從汝而歸 恐失君臣之義 不敢漏泄此言 恐傷夫婦之恩
傳
請召大叔
하소서注+富辰 周大夫 大叔 王子帶 十二年奔齊
詩曰 協比其鄰
하면 昏姻孔
注+詩 小雅 言王者爲政 先和協近親 則昏姻甚相歸附也 鄰 猶近也 孔 甚也 云 旋也이라하니
王子帶自齊復歸于京師
하니 王召之也
라注+ 爲二十四年天王出居于鄭起
傳
[傳]邾人以須句故出師
로되 公卑邾
하야 不設備而禦之
하다注+卑 小也
詩曰 戰戰兢兢
하야 如臨深淵
하며 如履薄冰
注+詩 小雅 言常戒懼이라하고 又曰 敬之敬之
어다
天惟顯思
라注+顯 明也 思 猶辭也라하니이다注+周頌 言有國宜敬戒 天明臨下 奉承其命甚難
先王之明德으로도 猶無不難也하고 無不懼也온 況我小國乎잇가
邾人獲公冑
하야 縣諸魚門
하다注+冑 兜鍪 魚門 邾城門 [附注] 林曰 懸諸邾之城門以辱公
傳
天之棄商久矣
어늘 君將興之
하시니 不可赦也已
注+大司馬固 莊公之孫公孫固也 言君興天所棄 必不可 不如赦楚勿與戰리다
司馬
注+子魚也 曰 彼衆我寡
하니 及其未旣濟也
하야 請擊之
하소서 公曰 不可
하다
旣陳而後擊之
하야 宋師敗績
하다 公傷股
하고 門官殲焉
하다注+門官 守門者 師行則在君左右 殲 盡也
君子不重傷
注+[附注] 林曰 敵人已被傷者 不忍再傷之하고 不禽二毛
注+二毛 頭白有色니라
古之爲軍也
에 不以阻隘也
注+不因阻隘以求勝하니 寡人雖亡國之餘
注+宋 商紂之後나 不鼓不成列
이라注+恥以詐勝 [附注] 朱曰 敵人未成陣 則我不擊鼓以進兵 恥以詐取勝也
勍敵之人
이 隘而不列
은 天贊我也
注+勍 强也 言楚在險隘 不得陳列 天所以佐宋니 阻而鼓之
가 不亦可乎
잇가 猶有懼焉
이니이다注+雖因阻擊之 猶恐不勝
且今之勍者
는 皆吾敵也
니 雖及胡耈
라도 獲則取之
어늘 何有於二毛
릿가注+今之勍者 謂與吾競者 胡耈 元老之稱
明恥敎戰
은 求殺敵也
注+明設刑戮 以恥不果니 傷未及死
면 如何勿重
이릿가注+言尙能害己
三軍以利用也
오注+爲利興 金鼓以聲氣也
注+鼓以佐士衆之聲氣니 利而用之
면 阻隘可也
오 聲盛致志
면 鼓儳可也
니이다注+儳 巖 未整陳 [附注] 林曰 旣以聲盛而致士卒勇銳之志 乘敵人之儳巖未陳阻而鼓之可也
傳
[傳]丙子晨
에 鄭文夫人羋氏姜氏勞楚子於柯澤
注+楚子還 過鄭 鄭文公夫人羋氏 楚女 姜氏 齊女也 柯澤 鄭地하니 楚子使師縉示之俘馘
하다注+師縉 楚樂師也 俘 所得囚 馘 所截耳
婦人送迎不出門
하고 見兄弟不踰閾
注+閾 門限하며 하나니라注+邇 近也 器 物也 言俘馘非近婦人之物
丁丑
에 楚子入享于鄭
注+爲鄭所饗에 九獻
注+用上公之禮 九獻酒而禮畢하고 庭實旅百
注+庭中所陳 品數百也하고 加籩豆六品
하다注+食物六品加於籩豆 籩豆 器
享畢
하고 夜出
에 文羋送于軍
이어늘 取鄭二姬以歸
하다注+二姬 文羋女也 [附注] 林曰 姬 二女姓
爲禮卒於無別
이로다注+[附注] 朱曰 言取二甥女 是無別也
諸侯是以知其不遂霸也
하다注+言楚子所以師敗城濮 終爲商臣所弑
22년 봄에
공公이
주邾나라를 토벌하여
수구須句를 취하였다.
注+수구須句가 비록 별도의 한 나라이지만 국토國土가 줄어들고 국력國力이 약해 독자적獨自的으로 제후諸侯와 교통交通할 수 없으므로 전유顓臾처럼 노魯나라의 속국屬國이 되었는데, 노魯나라는 이 수구須句를 사직社稷의 신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인邾人이 수구須句를 멸滅한 것과 수구자須句子가 노魯나라로 도망온 것과 노魯나라가 그 임금을 되돌려 보낸 것을 모두 생략하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오직 주邾나라를 토벌하여 수구須句를 취한 것만을 기록하였다.
여름에 송공宋公, 위후衛侯, 허남許男, 등자滕子가 정鄭나라를 토벌하였다.
가을 8월
정미일丁未日에
노인魯人이
주인邾人과
승형升陘에서
전쟁戰爭하였다.
注+승형升陘은 노魯나라 땅이다. 주인邾人이 공公의 투구를 어문魚門에 매달았기 때문에 그것을 매우 수치羞恥로 여겨 공公을 기록하지 않고, 또 군대가 패전敗戰한 것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겨울 11월
기사삭己巳朔에
송공宋公이
초인楚人과
홍泓에서
전쟁戰爭하다가
송군宋軍이
대패大敗하였다.
注+홍泓은 물 이름이다. 송宋나라가 정鄭나라를 토벌하니 초楚나라가 구원救援하였다. 그러므로 전쟁한 것이다. 초楚나라가 노魯나라에 통고通告한 문서에 주장主將과 군대의 수數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人’으로 약칭略稱한 것이다.
傳
22년 봄에
주邾나라를
토벌討伐해
수구須句를
탈취奪取하고서 그 임금을
귀국歸國시켰으니
예禮에 맞았다.
注+작은 나라를 구휼救恤하는 예禮에 맞았다는 말이다.
傳
여름에 송공宋公이 정鄭나라를 토벌하니 자어子魚가 말하였다.
“내가 앞서 말한 ‘
화禍’라는 것이 이번
전쟁戰爭에 있을 것이다.”
注+송공宋公은 정백鄭伯이 초楚나라에 간 것에 노怒하였기 때문에 정鄭나라를 토벌한 것이다. 이것이 11월에 홍泓에서 전쟁이 일어난 원인原因이 되었다.
傳
당초에
평왕平王이
동천東遷할 때에
注+주유왕周幽王이 견융犬戎에 의해 멸망滅亡되자 평왕平王이 왕위王位를 승계承繼하고서 낙읍洛邑으로 동천東遷하였다.신유辛有가
이천伊川에 갔다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야외野外에서
제사祭祀 지내는 자를 보고
注+신유辛有는 주周나라 대부大夫이고, 이천伊川은 주周나라 땅이다. 이伊는 물 이름이다. 말하였다.
“1백 년이 되지 않아 이곳은 융戎이 될 것이다.
주周나라의
예禮가 먼저 없어졌다.”
注+머리를 풀어헤치고 제사 지내는 것은 오랑캐 풍속을 닮은 것이다.
가을에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육혼陸渾의
융戎을
이천伊川으로
이주移住시켰다.
注+윤성允姓의 융戎이 살고 있는 육혼陸渾이 진晉나라와 진秦나라의 서북西北에 위치位置하였으므로 두 나라가 이들을 달래어 이천伊川으로 이주移住시키고서 드디어 융戎이 살던 옛 땅의 이름에 따라 이천伊川을 육혼陸渾으로 고쳤으니, 지금의 육혼현陸渾縣이다. 계산해 보면 신유辛有의 시대에서 지금까지가 1백 년이 지났는데, 전傳에 ‘1백 년이 되지 않아’라고 한 것은 그 일의 징험徵驗만을 들어 말한 것이니, 그 연수年數를 믿을 필요는 없다.
傳
진晉나라
태자太子어圉가
인질人質이 되어
진秦에 있었는데 도망해 돌아오려 할 때에
영씨嬴氏에게 “그대와 함께 돌아가겠다.”고 하자,
注+영씨嬴氏는 진秦나라가 자어子圉에게 아내로 준 회영懷嬴이다.영씨嬴氏가 대답하였다.
“공자公子는 진晉나라의 태자太子로 진秦나라에서 굴욕屈辱의 생활을 하고 있으니, 공자公子가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임금님께서
비자婢子에게 수건과 빗을 들고서
공자公子를 모시게 한 것은
注+비자婢子는 부인婦人이 자신을 낮추어 일컫는 말이다. [부주]林: 수건으로 손을 닦아주고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는 것은 모두 천賤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공자公子를 안심하고
注+[부주]林: 공자公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진秦나라에 있게 하기 위함인데 만약
공자公子를 따라 함께
진晉나라로 간다면 이는
군명君命을 버리는 것이니 감히 따라가지 않겠습니다만 감히 이 말을
누설漏泄하지도 않겠습니다.”
注+감히 당신을 따라 진晉나라로 가지 않겠다는 것은 군신君臣의 의리를 잃을까 두려워서이고, 감히 이 말을 누설漏泄하지 않겠다는 것은 부부夫婦의 은애恩愛을 손상損傷할까 두려워서이다.
어圉는 마침내 도망해
진晉나라로 돌아왔다.
注+전傳의 말은 사소史蘇의 점占이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傳
“
태숙太叔을 불러들이소서.
注+부신富辰은 주周나라 대부大夫이다. 태숙太叔은 왕자王子대帶인데 희공僖公 12년에 제齊나라로 도망하였다.
시詩에 ‘이웃과
화목和睦하면
인척姻戚들도 매우
우애友愛한다.’고 하였습니다.
注+시詩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정월편正月篇〉이다. 왕자王者가 정치政治를 함에 있어 먼저 근친近親한 사람들과 화목和睦하게 지내면 인척姻戚들도 매우 서로 따른다는 말이다. 인隣은 근近이고, 공孔은 심甚이고, 운云은 선旋이다.
우리가 형제兄弟 사이에 화목和睦하지 못하다면 어찌 제후諸侯들의 불목不睦을 원망怨望할 수 있겠습니까?”
왕자王子대帶가
제齊나라에서 다시
경사京師로 돌아왔으니
왕王이 불러들인 것이다.
注+전傳의 말은 중손추仲孫湫의 말이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희공僖公 24년에 천왕天王이 성주成周에서 나가 정鄭나라로 가서 거주居住하게 된 원인原因이 되었다.
傳
주인邾人이
노魯나라가
수구須句를
구원救援한 일로
출병出兵하여
노魯나라를
침범侵犯하는데도
공公은
주邾나라를 얕보아
방비防備를 설치하지 않고서
방어防禦하였다.
注+비卑는 얕보는 것이다.
장문중臧文仲이 말하였다. “나라에는 약소국弱小國이 따로 없으니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방비防備가 없으면 아무리 군대가 많아도 믿을 수 없습니다.
시詩에 ‘조심하고 경계하기를 깊은 물가에 다다른 듯이, 엷은 얼음을 밟은 듯이 하라.’고 하고,
注+시詩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소민편小旻篇〉이다.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말이다. 또 ‘공경하고 공경하라.
천도天道는 밝아서
注+현顯은 명明이고, 사思는 어조사語助辭이다.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하기가 쉽지 않다.’
注+《시경詩經》 〈주송周頌경지편敬之篇〉이다. 국가國家를 소유所有한 사람은 공경하고 경계해야 한다. 하늘은 밝게 아래를 굽어 살피므로 하늘의 명을 받들어 따르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이다.고 하였습니다.
선왕先王의 밝은 덕으로도 어려워하지 않음이 없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작은 나라이겠습니까?
임금님께서는 주邾나라를 작다고 얕보지 마소서.
벌과 전갈도 독이 있는데 하물며 한 나라이겠습니까?”
8월 정미일丁未日에 공公이 주군邾軍과 승형升陘에서 전투하다가 아군我軍이 대패大敗하였다.
주인邾人이
공公의 투구를
노획鹵獲하여
어문魚門에 달아 놓았다.
注+주冑는 투구이다. 어문魚門은 주邾나라의 성문城門이다. [부주]林: 그 투구를 주邾나라의 성문城門에 매달아 희공僖公을 모욕한 것이다.
傳
초인楚人이 송宋나라를 토벌하여 정鄭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
송공宋公이 전쟁戰爭하려 하자, 대사마大司馬고固가 간諫하였다.
“하늘이
상商나라를 버린 지 오래인데 임금님께서
부흥復興시키려 하시니,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注+대사마大司馬고固는 장공莊公의 손자 공손고公孫固이다. 군君께서 하늘이 버린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결코 불가능不可能하니 초楚나라를 용서하고 싸우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겨울 11월 기사삭己巳朔에 송공宋公이 초인楚人과 홍泓에서 전쟁戰爭하였다.
이때
송인宋人은 이미
전열戰列을 이루었으나
초인楚人은 아직
홍수泓水를 다 건너지 못하였다.
注+군대가 아직 홍수泓水를 다 건너지 못한 것이다.
사마司馬가
注+사마司馬는 자어子魚이다. “저들은 군대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저들이 다 건너기 전에
공격攻擊하소서.”라고 하니,
송공宋公은 “
불가不可하다.”고 하였다.
초군楚軍이 홍수泓水를 다 건넜으나 아직 전열戰列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 사마司馬가 또 공격하자고 고하니, 송공宋公은 또 “불가不可하다.”고 하였다.
초군楚軍이 전열을 이룬 뒤에 공격하였다가
송군宋軍이
대패大敗하여
송공宋公은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고,
문관門官들은 모두 죽었다.
注+문관門官은 문을 지키는 사람인데, 출전出戰한 때에는 임금의 좌우에 있으면서 임금을 보호한다. 섬殲은 다 죽은 것이다.
국인國人이 모두 송공宋公을 탓하니 송공宋公은 말하였다.
“
군자君子는 상처를 입은
적敵을 거듭 찌르지 않고,
注+[부주]林: 이미 상처를 입은 적敵을 차마 재차 상해傷害할 수 없다는 말이다.이모二毛를 포로로 잡지 않는 것이다.
注+이모二毛는 머리가 반쯤 세어 두 색깔이 나는 노인老人이다.
옛날의 전쟁에는 험한
지형地形을 이용해
적敵을 공격하지 않았으니,
注+험한 지형을 이용해 승리勝利를 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과인寡人이 비록
망국亡國의 후손이지만
注+송宋나라는 상商나라 주왕紂王의 후손이다. 전열戰列을 이루기 못한
적敵에게
진격進擊을 명하는 북을 치지 않았노라.”
注+속임수를 써서 승리하는 것을 수치羞恥로 여긴 것이다. [부주]朱: 적군敵軍이 전진戰陣을 갖추기 전에 우리가 북을 울려 진격進擊하지 않은 것은 속임수로 승리를 취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 것이다.
강한 적군이
지형地形이 험하여 전열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것이니
注+경勍은 강强이다. 초군楚軍이 험한 곳에 있어 전열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하늘이 송宋나라를 돕는 것이라는 말이다.적敵이 험한 곳에 있을 때
공격攻擊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래도 오히려 승리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注+비록 적敵이 험한 곳에 있어 전열을 갖추지 못한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하더라도 승리하지 못할까 두렵다는 말이다.
오늘날 임금님과
패권霸權을 다투는 자들은 모두 우리의
적敵이니 비록 늙은이라 하더라도 잡을 수만 있다면 잡아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저
이모二毛를
고려顧慮하겠습니까?
注+‘금지경자今之勍者’는 우리와 경쟁競爭하는 자들을 이름이다. 호구胡耈는 원로元老를 일컫는 말이다.
군대들에게
수치羞恥를 밝게 일러주고
전술戰術을 가르친 것은
적敵을 죽이도록 요구한 것이니,
注+형륙刑戮의 제도를 밝게 설치設置하여 용감勇敢하지 못한 자를 부끄럽게 한다는 말이다. 적敵이 상처를 입고도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거듭
상해傷害하지 않겠습니까?
注+그 적敵이 오히려 나를 해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거듭
상해傷害하는 것을 가엾게 여긴다면 애당초 상처를 입히지 않느니만 못하고,
이모二毛를 가엾게 여긴다면
적敵에게
항복降服하느니만 못합니다.
注+적군敵軍을 살상殺傷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본래 전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삼군三軍은
유리有利한 때를 보아 사용하는 것이고,
注+이로움을 위해 일으킨다는 말이다.금고金鼓는 소리로써 사기를 북돋워 주는 것이니,
注+북소리로 군사들의 사기士氣를 돕는 것이다.유리有利한 때를 만나 군대를 사용한다면 적이 험한 곳이 있을 때에 공격하는 것이 옳고, 북소리가 크게 울려
사기士氣가 높아졌으면 적이
전열戰列을 이루지 못했을 때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注+참儳은 험한 곳이니[巖]전진戰陣을 정제整齊하지 못한 것이다. [부주]林: 이미 북소리가 크게 울려 사졸士卒의 용감한 의지意志가 드높아졌으면 적군敵軍이 험한 곳에서 전진戰陣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공격해야 한다는 말이다.
傳
병자일丙子日 새벽에
정문공鄭文公의
부인夫人미씨羋氏‧
강씨姜氏가
가택柯澤에서
초자楚子를 위로하니
注+초자楚子가 송宋나라를 치고 돌아갈 때 정鄭나라에 들른 것이다. 정문공鄭文公의 부인夫人미씨羋氏는 초楚나라의 딸이고, 강씨姜氏는 제齊나라의 딸이다. 가택柯澤은 정鄭나라 땅이다.초자楚子가
사진師縉을 시켜 그들에게
부괵俘馘을 보여 주게 하였다.
注+사진師縉은 초楚나라의 악사樂師이다. 부俘는 잡은 포로이고, 괵馘은 베어온 적군敵軍의 귀이다.
군자君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論評하였다.
부인夫人은 남을
전송餞送하거나
영접迎接할 때
방문房門을 나가지 않고
형제兄弟를 만날 때에도 문지방을 넘지 않는 것이며,
注+역閾은 문지방이다.융사戎事에는
여인女人의
기물器物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다.”
注+이邇는 근近이고, 기器는 물物이다. 부괵俘馘은 부인婦人이 가까이 할 물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축일丁丑日에
초자楚子가
정鄭나라에 들어가
향연饗宴을 받을 때에
注+정鄭나라의 접대를 받은 것이다.정백鄭伯이 아홉 잔의 술을 올리고,
注+상공上公의 예禮를 사용한 것이다. 아홉 잔의 술을 올리고서 향례享禮를 마친 것이다. 뜰에 백 가지의
예물禮物을 벌여 놓고,
注+정중庭中에 벌여 놓은 물품物品의 수가 1백이라는 말이다.변두籩豆에 여섯 가지
식품食品을
추가追加하였다.
注+식물食物 여섯 가지를 변두籩豆에 추가追加한 것이다. 변두籩豆는 예식禮食에 사용하는 그릇이다.
연향宴享을 마치고
초자楚子가 밤에 나오는데,
문미文羋가
초자楚子를
초楚나라
군중軍中까지
호송護送하니,
초자楚子는
정鄭나라의
이희二姬를 데리고 돌아갔다.
注+이희二姬는 문미文羋의 두 딸이다. [부주]林: 희姬는 두 딸의 성姓이다.
“
초왕楚王은 아마도
수명壽命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注+수명壽命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말이다.
예禮를 행하면서
남녀男女의
분별分別이 없는 일로 끝을 맺었으니 말이다.
注+[부주]朱: 두 생질녀甥姪女를 취한 것이 바로 분별이 없다는 말이다.
남녀의 분별이 없는 것을 예禮라 할 수 없으니 장차 어찌 수명대로 살다가 죽을 수 있겠는가?”
제후諸侯는 이 일로 인해
초자楚子가
패업霸業을 이루지 못할 줄을 알았다.
注+초자楚子가 성복城濮에서 패전敗戰하고 끝내 상신商臣에게 시해弑害된 원인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