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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2)

춘추좌씨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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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九年春 毛伯來하다注+求金以共葬事 雖踰年而未葬 故不稱王使 [附注] 林曰 來求止此 自是魯雖不修貢 周無求矣
[經]夫人姜氏如齊하다注+無傳 歸寧
[經]二月 叔孫得臣如京師하야 辛丑 葬襄王하다注+
[經]晉人殺其大夫先都하다注+下軍佐也 以作亂討 故書名
[經]三月 夫人姜氏至自齊하다注+無傳 告于廟
[經]晉人殺其大夫士縠及箕鄭父하다注+與先都同罪也
[經]楚人伐鄭하다注+
公子遂會晉人宋人衛人許人救鄭하다
[經]夏 狄侵齊하다注+無傳
[經]秋八月 曹伯襄卒하다注+無傳 七年 同盟于扈
[經]九月癸酉 地震하다注+無傳 地道安靜 以動爲異 故書
[經]冬 楚子使椒來聘하다注+[附注] 林曰 楚君臣 始並見於經
[經]秦人來歸僖公成風之襚하다注+衣服曰襚 秦辟陋 故不稱使 不稱夫人 從來者辭
[經]葬曹共公하다注+無傳
[傳]九年春王正月己酉 使賊殺先克하다注+箕鄭等所使也 亂殺先克 不赴 故不書
乙丑 晉人殺先都梁益耳하다注+乙丑 正月十九日 經書二月 從告 [附注] 林曰 作亂故也
[傳]毛伯衛來求金하니 非禮也注+天子不私求財 故曰非禮
[傳]二月 莊叔如周葬襄王하다
[傳]三月甲戌 晉人殺箕鄭父士縠蒯得하다注+梁益耳蒯得不書 皆非卿
[傳]范山言於楚子曰 晉君少하야 不在諸侯하니 北方可圖也니이다注+范山 楚大夫 [附注] 林曰 時晉靈公幼少 志不在於諸侯 楚居南方 故言北方諸侯可圖也 楚子師于狼淵以伐鄭注+陳師狼淵 潁川潁陰縣西有狼陂하야 囚公子堅公子尨及樂耳하다注+三子 鄭大夫 [附注] 林曰 生獲曰囚
鄭及楚平하다
[傳]公子遂會晉趙盾宋華耦衛孔達許大夫救鄭이나 不及楚師하다
卿不書 緩也
以懲不恪하다注+華耦 華父督孫 公子遂獨不在貶者 諸魯事 自非指爲其國褒貶 則皆從國史 不同之於他國 此春秋大意 他皆放此 [附注] 林曰 以懲諸大夫奉命出會而不共恪者
[傳]夏 楚侵陳하야 克壺丘注+壺丘 陳邑하니 以其服於晉也
[傳]秋 楚公子朱自東夷伐陳注+子朱 息公也하니 陳人敗之하고 獲公子茷하다
陳懼하야 乃及楚平하다注+以小勝大 故懼而請平也 傳言晉君少 楚陵中國 明年所以有厥貉之會
[傳]冬 楚子越椒來聘 執幣傲注+子越椒 令尹子文從子 傲 不敬하니
叔仲惠伯曰 是必滅若敖氏之宗하리라
傲其先君하니 神弗福也리라注+十二年傳曰 先君之敝器 使下臣致諸執事 明奉使皆告廟 故言傲其先君也 爲宣四年楚滅若敖氏張本 [附注] 林曰 奉使必告廟而來 言辭稱先君以 故以其傲其先君
[傳]秦人來歸僖公成風之襚하니 禮也注+秦慕諸夏 欲通敬於魯 因有翟泉之盟 故追贈僖公 幷及成風 本非魯同盟 無相赴弔之制 故不譏其緩 而以接好爲禮
諸侯相弔賀也 雖不當事 苟有禮焉이면 書也하야 以無忘舊好하나니라注+送死不及 故曰不當事 書者 書於典策 垂示子孫 使無忘過厚之好


9년 봄에 모백毛伯나라에 와서 (賻儀)을 요구하였다.注+양왕襄王장사葬事를 치르기 위해 을 요구한 것이다. 양왕襄王한 지가 1년이 지났으나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왕사王使’라고 칭하지 않은 것이다.[부주]林: 나라에 와서 전재錢財를 요구한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었고, 이후로는 나라가 비록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아도 나라는 요구하는 일이 없었다.
부인夫人강씨姜氏나라에 갔다.注+이 없다. 부모를 뵙기 위해 친정親庭에 간[歸寧] 것이다.
2월에 숙손득신叔孫得臣경사京師에 가서 신축일辛丑日양왕襄王장사葬事를 지냈다.注+이 장사에 참여하는 것이 이다.
진인晉人이 그 대부大夫선도先都를 죽였다.注+선도先都하군좌下軍佐이다. 을 일으킨 주살誅殺[討]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3월에 부인夫人강씨姜氏나라에서 돌아왔다.注+이 없다. 종묘宗廟한 것이다.
진인晉人이 그 대부大夫사곡士縠기정보箕鄭父를 죽였다.注+선도先都와 같은 을 지었기 때문이다.
초인楚人나라를 토벌하였다.注+초자楚子낭연狼淵을 치고 있었고 직접 토벌하지는 않았다.
공자수公子遂진인晉人송인宋人위인衛人허인許人회합會合하여 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
여름에 적인狄人나라를 침공侵攻하였다.注+이 없다.
가을 8월에 조백曹伯하였다.注+이 없다. 문공文公 7년에 동맹同盟하였다.
9월 계유일癸酉日지진地震이 있었다.注+이 없다. 대지大地특성特性[地道]은 안정安靜이므로 움직이는 것을 이변異變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기록한 것이다.
겨울에 초자楚子를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注+임금이 대부大夫를 보낸 것으로 칭하여 그 문사文辭중국中國제후諸侯동일同一하게 하였다. 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사관史官이 글을 생략省略한 것이다.[부주]林: 나라의 군신君臣이 비로소 함께 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진인秦人이 와서 희공僖公성풍成風수의襚衣를 주었다.注+의복衣服을 ‘’라 한다. 나라는 먼 변방邊方누추陋醜[辟陋]한 나라이기 때문에 ‘使’라고 칭하지 않은 것이다. 성풍成風을 ‘부인夫人’으로 칭하지 않은 것은 수의襚衣를 가지고 온 자의 말을 그대로 따라 기록했기 때문이다.
조공공曹共公을 장사 지냈다.注+이 없다.
9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기유일己酉日(刺客)을 시켜 선극先克을 죽였다.注+기정箕鄭 등이 시킨 것이다. 난병亂兵선극先克을 죽인 것이다. 부고赴告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을축일乙丑日진인晉人선도先都양익이梁益耳를 죽였다.注+을축乙丑정월正月 19일인데, 에 2월로 기록한 것은 부고赴告를 따른 것이다. [부주]林: 을 일으켰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모백毛伯이 와서 을 요구하였으니 가 아니다.注+천자天子는 사사로이 재물財物을 요구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비례非禮’라고 한 것이다.
왕명王命’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양왕襄王장전葬前이기 때문이다.
2월에 장숙莊叔나라에 가서 양왕襄王을 장사 지냈다.
3월 갑술일甲戌日진인晉人기정보箕鄭父사곡士縠괴득蒯得을 죽였다.注+양익이梁益耳괴득蒯得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이 아니기 때문이다.
범산范山초자楚子에게 “진군晉君은 어려서 제후諸侯패주霸主가 되는 데 뜻이 없으니 북방北方도모圖謀할 수 있습니다.”注+범산范山나라 대부大夫이다. [부주]林: 이때 진영공晉靈公은 어려서 제후諸侯패주霸主가 되는 데 뜻이 없었다. 나라는 남방南方에 있기 때문에 북방北方제후諸侯도모圖謀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고 하자, 초자楚子낭연狼淵을 치고서 나라를 토벌하여注+낭연狼淵에 진을 치고서 나라를 토벌하는 부대部隊원군援軍이 된 것이다. 영천潁川영음현潁陰縣 서쪽에 낭피狼陂가 있다.공자公子공자公子악이樂耳를 사로잡았다.注+세 사람은 나라 대부大夫이다. [부주]林: 생포生捕하는 것을 ‘’라 한다.
나라가 나라와 화평和平하였다.
공자수公子遂나라 조돈趙盾나라 화우華耦나라 공달孔達나라 대부大夫회합會合나라를 구원하였으나 초군楚軍에 미치지 못하였다.
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늦게 출병出兵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록하여 일 처리에 삼가지 않은 징계懲戒한 것이다.注+화우華耦화보독華父督증손曾孫이다. 에 다른 나라의 대부大夫폄하貶下하고 공자수公子遂만을 폄하貶下하지 않은 것은 모든 나라의 일에 있어 나라의 일을 지적해 포폄褒貶하는 경우가 아니면 모두 국사國史를 그대로 따르고 타국他國대부大夫동일同一하게 기록하지 않는 것이 《춘추春秋》의 대의大意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이와 같다. [부주]林: 이렇게 기록하여 대부大夫들이 임금의 명을 받고 회합會合에 나가서 일 처리를 삼가지 않은 것을 징계懲戒한 것이다.
여름에 나라가 나라를 침공侵攻하여 호구壺丘에서 승전勝戰하였으니注+호구壺丘나라 이다. 이는 나라가 나라에 복종服從하였기 때문이다.
가을에 나라 공자公子동이東夷로부터 나라를 토벌하니,注+자주子朱식공息公이다.진인陳人초군楚軍패배敗北시키고서 공자公子을 사로잡았다.
진인陳人초군楚軍의 다시 침공侵攻할 것이 두려워 나라와 화평和平하였다.注+소국小國으로서 대국大國을 이겼기 때문에 두려워서 화평和平을 요청한 것이다. 의 말은 진군晉君이 어렸기 때문에 나라가 중국中國침릉侵陵했다는 뜻이다. 명년明年궐맥厥貉회합會合이 있게 된 원인이다.
겨울에 나라 자월초子越椒가 와서 빙문聘問할 때 가지고 온 폐백幣帛을 바치는 태도態度가 오만하였다.注+자월초子越椒영윤令尹자문子文종자從子(조카)이다. 는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본 숙중혜백叔仲惠伯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사람이 반드시 약오씨若敖氏종족宗族멸망滅亡시킬 것이다.
저희 선군先君에게 오만하였으니 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注+문공文公 12년 에 “선군先君의 변변찮은 기물器物하신下臣으로 하여금 집사執事에게 바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사명使命을 받든 사람은 모두 종묘宗廟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 선군先君에게 오만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선공宣公 4년에 나라가 약오씨若敖氏장본張本이다. [부주]林: 사명使命을 받든 사람은 반드시 종묘宗廟하고서 떠나기 때문에 빙문국聘問國접빈사接賓使와의 언사言辭선군先君을 칭하며 서로 말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그 선군先君에게 오만하였다고 한 것이다.
진인秦人이 와서 희공僖公성풍成風수의襚衣를 주었으니 에 맞았다.注+나라가 제하諸夏를 사모하여 나라와 통호通好하고자 하였다. 희공僖公 29년에 적천翟泉에서 동맹同盟한 것으로 인하여 추후追後희공僖公수의襚衣를 주고 아울러 성풍成風에게까지 준 것이다. 나라는 본래 방악方嶽동맹국同盟國이 아니므로 서로 달려가 조상弔喪하는 법제法制가 없다. 그러므로 늦은 것을 나무라지 않고 친근親近하게 우호友好한 것을 부합符合했다고 한 것이다.
제후諸侯가 서로 조상弔喪하고 축하祝賀하는 일이 설령 제때에 미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진실로 예에 부합하였으면 사책史策에 기록하여 옛 우호友好를 잊지 않는다.注+사자死者에게 물건을 보내면서 장전葬前에 미쳐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제때에 미치지 못했다.[不當事]’고 한 것이다. 기록하는 것은 전책典策에 기록해 자손에게 해 보여 지난날의 두터운 우호友好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역주
역주1 求金 : 周王이 魯나라에 요구한 일이 세 번 있었는데, 隱公 3년의 ‘毛氏子來求賻’와 桓公 15년의 ‘家父來求車’와 이번의 ‘求金’이다.
역주2 卿共葬事 禮也 : 文公 6년 經의 역주를 참고할 것.
역주3 楚子師於狼淵 不親伐 : 傳에 ‘楚子師於狼淵以伐楚’라고 하였으니, 楚穆王이 직접 楚軍을 指揮한 것을 알 수 있다. 杜注에 ‘楚子不親伐’이라 한 것은 옳지 않은 듯하다. 《春秋》에 宣公 5년 이전은 楚子를 대체로 楚人으로 칭하였다. 楊伯峻 《春秋左傳注》
역주4 稱君以使大夫……史畧文 : 正義에 “莊公 23년의 ‘荊人來聘’에는 楚子가 아무개를 보내어 왔다고 칭하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임금이 大夫를 보낸 것으로 칭하여 그 禮를 中國의 諸侯와 동일하게 하였다. 그 禮가 이미 동일하였고 보면 椒도 氏를 기록하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 氏를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해 傳에 貶下한 文辭가 없으니, 이는 史官이 文辭를 스스로 省略한 것으로 義例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역주5 毛伯衛來求金……未葬也 : 先王이 崩하면 嗣王은 그 해를 넘긴 뒤에[踰年] 정식으로 卽位하고서 스스로 ‘王’이란 稱號를 사용해 使臣을 보낼 수 있다. 비록 踰年하였어도 아직 先王의 葬禮를 치르지 않았으면 ‘王’이란 칭호를 사용해 사신을 보낼 수 없기 때문에 ‘王命毛伯來求金’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毛伯來求金’으로 기록했다는 말이다.
역주6 爲伐鄭援也 : 傳에 분명히 楚子가 親伐하였다고 하였고, 또 다른 部隊가 있었다는 말이 없는데, 杜氏는 經文에 楚子를 ‘楚人’으로 기록한 것을 가지고 楚子가 親伐하지 않은 것으로 誤解하여, ‘楚子不親伐’이라고 註釋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이 군대를 援軍으로 해석하여 經의 注와 서로 부합되게 한 것이다. 《左氏會箋》
역주7 魯[曾] : 저본에는 ‘魯’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會’로 바로잡았다.
역주8 相接 : 接은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이다.
역주9 方嶽 : 四方의 山嶽인데, 곧 그 地方의 뜻으로 쓰인다. 隱公元年傳 ‘秋七月’ 아래의 역주를 참고할 것.
역주10 : 장사 지내기 이전의 尸身을 이르는 말이다.

춘추좌씨전(2)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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