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년元年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에 제사齊師‧송사宋師‧조사曹師가 섭북聶北에 주둔駐屯[次]하여 형邢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注+제齊나라가 제후諸侯의 군대를 거느리고 형邢나라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섭북聶北에 주둔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틈을 엿보아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차次의 예例는 장공莊公 3년 전傳에 보인다. 섭북聶北은 형邢나라 땅이다.
여름 6월에 형邢나라 사람들이 이의夷儀로 옮겨 갔다. 注+형邢나라 사람들이 옮겨 가는 것을 마치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즐거워하였기 때문에 자발적自發的으로 옮긴 것으로 말을 만든 것이다. 이의夷儀는 형邢나라 땅이다.
제사齊師‧송사宋師‧조사曹師가 형邢나라에 성을 쌓았다. 注+전례傳例에 “환난患難을 구제救濟하고 재해災害을 분담分擔하는 것이 예禮이다.”고 하였다. 같은 일에 재차再次 세 나라를 열기列記한 것은 글에 제후諸侯의 군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을 7월 무신일戊辰日에 부인夫人강씨姜氏가 이夷에서 훙薨하니, 제인齊人이 그 시신屍身을 가지고 갔다.注+민공閔公 2년 전傳에 보인다. 제인齊人이 살해殺害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숨긴 것이고, 살해殺害된 지명地名을 기록한 것은 국외國外에서 훙薨한 사실을 밝힌 것이다.
8월에 희공僖公이 제후齊侯‧송공宋公‧정백鄭伯‧조백曹伯‧주인邾人과 정檉에서 회맹會盟하였다.注+정檉은 송宋나라 땅이다. 진陳나라 진현陳縣 서북에 정성檉城이 있다. 희공僖公이 그 회맹會盟에 참여하였는데도 결맹結盟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돌아와서 결맹結盟한 것을 종묘宗廟에 고告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주]林: 이것이 여섯 번째 의상지회衣裳之會이다.
겨울 10월 임오일壬午日에 공자公子우友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역酈에서 거사莒師를 패배敗北시키고 거나莒挐를 잡았다.注+역酈는 노魯나라 땅이다. 나挐는 거자莒子의 아우이다. 아우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경卿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卿이 아니면 기록하지 않는다. 계우季友의 공功을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에 특별히 그가 잡은 사람을 기록한 것이다. 대부大夫을 잡으면 산 채로 잡거나 죽은 채로 잡거나 모두 ‘획獲’이라 한다. 획獲의 예例는 소공昭公 23년 경經주注에 보인다.
12월 정사일丁巳日에 부인씨夫人氏의 상喪(靈柩)이 제齊나라에서 돌아왔다.注+희공僖公이 제齊나라에 시신屍身의 반환返還을 요청하여 장사葬事 지낸 것이다. 종묘宗廟에 고告하였으므로 ‘상지喪至’라고 기록한 것이다. 제후齊侯가 애강哀姜을 죽인 뒤에 그 시신屍身을 가지고 돌아가서 노魯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나, 희공僖公이 반환해 주기를 요청하므로 그 시신屍身을 돌려보낸 것이다. 강씨姜氏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궐문闕文이다.
傳
원년元年 봄에 즉위卽位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희공僖公이 출분出奔하였기 때문이다.注+나라가 어지러워 출분出奔하였다가 다시 들어왔기 때문에 즉위卽位의 예禮를 거행하지 않은 것이다.
희공僖公이 출분出奔하였다가 다시 들어왔는데도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 사실을 숨긴 것이다.
나라의 좋지 않는 일을 숨기는 것이 예禮이다.注+좋지 않은 일은 숨기고 좋은 일만을 드러내는 것은 군친君親의 명예名譽를 보존하기 위한 의리義理이다. 때문에 모든 일에 휘諱하는 예例가 있다. 《춘추春秋》에 휘諱한 것은 모두 당시의 신자臣子가 자기 생각에 따라 숨긴 것이므로 심천深淺에 일정한 기준이 없다. 성현聖賢께서 그 휘諱한 것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따라 사람의 도리道理를 밝힌 것이니 때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傳
제후諸侯가 형邢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注+사실은 대부大夫인데 제후諸侯라 한 것은 모든 나라를 한 데 묶어서 한 말이다.
형인邢人이 흩어져 제후諸侯의 군대로 도망해 오니,注+섭북聶北에 주둔해 있는 제후諸侯의 군대로 도망해 온 것이다. 형邢나라가 패전敗戰해 군대가 흩어진 것을 경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노魯나라에 통고通告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제후諸侯의 군대가 드디어 적인狄人을 축출逐出하고서 형인邢人의 기물器物을 모두 꾸려 옮겨 주었는데, 제후諸侯의 군대 중에 그 기물器物을 사사로이 취取한 자가 없었다.注+모두 꾸려 형인邢人에게 돌려주고 사사로이 취한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부주]林: 형邢의 기용器用을 갖추었다는 것은 위衛나라에 제복祭服과 소‧양‧돼지‧닭‧개와 문재門材와 어헌魚軒과 승마乘馬‧중금重錦 등을 보내 준 것과 같은 것이다.
傳
여름에 형인邢人이 이의夷儀로 옮겨가자 제후諸侯가 이의夷儀에 성을 쌓아 주었으니, 이는 형邢나라의 환난患難을 구제救濟하기 위해서였다.
후백侯伯이 환난患難을 구제하고 재해災害를 분담分擔하고 죄罪 있는 자를 토벌討伐하는 것이 예禮이다. 注+후백侯伯은 주장州長(方伯)이다. 곡식과 포백布帛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부주]林: 곡식과 포백布帛을 나누어 주어 천재天災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傳
가을에 초인楚人이 정鄭나라를 토벌討伐하였으니, 이는 정鄭나라가 제齊나라에 붙었기 때문이다.
희공僖公이 제후諸侯들과 낙犖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정鄭나라 구원救援하는 일을 모의謀議하기 위해서였다.注+낙犖은 바로 정檉이니, 지명地名이 둘이다.
傳
9월에 희공僖公이 주사邾師를 언偃에서 패배敗北시켰으니, 허구虛丘를 지키다가 돌아가려는 자들이었다. 注+허구虛丘는 주邾나라 땅이다. 주인邾人은 애강哀姜을 제齊나라로 송환送還한 뒤에 제인齊人이 애강哀姜을 살해殺害하니, 그대로 허구虛丘를 지키고 있으면서 노魯나라를 침벌侵伐하려 하였다. 그런데 희공僖公이 의리로써 제齊나라에 애강哀姜의 시신屍身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니 제齊나라가 강씨姜氏의 시신을 노魯나라에 돌려주었다. 그러자 주인邾人은 두려워서 돌아가려 하였기 때문에 희공僖公이 그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여 패배시킨 것이다.
傳
겨울에 거인莒人이 와서 뇌물賂物을 요구하자,注+경보慶父를 돌려준 것에 대한 뇌물賂物를 요구한 것이다.공자公子우友가 역酈에서 그들을 패배敗北시키고서 거자莒子의 아우 나挐를 포로捕虜로 잡았다.
나挐가 경卿이 아닌데도 기록한 것은 그를 잡은 계우季友의 공로功勞를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注+거인莒人은 이미 노魯나라를 위해 경보慶父를 치지도 못했으면서 노魯나라의 뇌물賂物을 받았는데, 또 거듭 와서 뇌물賂物을 요구하니 그들의 요구가 끝이 없었다. 그러므로 계우季友가 나挐를 잡은 공功을 아름답게 여겨 기록했다는 말이다.
희공僖公은 계우季友에게 문양전汶陽田과 비읍費邑를 주었다.注+문양전汶陽田은 문수汶水 북쪽의 토지土地이다. 문수汶水는 태산泰山내무현萊蕪縣에서 발원發源하여 서쪽으로 흘러 제수濟水로 들어간다.
傳
부인의 상구喪柩가 제齊나라에서 돌아왔다.
군자君子는 제인齊人이 애강哀姜을 죽인 것을 너무 심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여자는 남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注+여자는 삼종三從의 의리가 있으므로 남편 집에서 저지른 죄를 친정집에서 처벌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주
역주1一事而再列三國 於文不可言諸侯師故 :
僖公 14년에 “諸侯가 緣陵에 성을 쌓았다.”고 한 것은 성을 제대로 쌓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라는 뜻에서 國名을 列記하지 않고 諸侯라고 總稱한 것이다. 이곳에 만약 “諸侯의 군대가 邢에 성을 쌓았다.”고 기록하면 마치 성을 제대로 쌓지 않은 것처럼 비쳐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글의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再次 세 나라를 列記했다는 뜻이다.
역주2不言齊人殺 諱之 :
조선 학자 徐壽錫의 《潁水全書》에는 小君도 君과 같기 때문에 殺害된 것을 諱한 것이라고 하였다.
역주3國亂……故卽位之禮有闕 :
《潁水全書》에는 “先君이 非命에 죽었으면 그 아들이 차마 卽位式을 거행할 수 없기 때문에 卽位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고 하였다.
역주4如歸衛祭服……重錦之類 :
林氏는 邢나라의 器用을 꾸려 옮긴 것으로 보지 않고, 諸侯가 邢人을 옮기고서 필요한 器用을 보내 준 것으로 보았다.
역주5公[分] :
저본에는 ‘公’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分’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君子以齊人之殺哀姜也……從人者也 :
여자의 도리는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시집가기 전에는 친정아버지의 명을 따르고, 시집간 뒤에는 남편의 명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長子의 말을 따르는 三從의 도리만이 있을 뿐이다. 哀姜이 이미 魯나라로 出嫁하였으니, 잘못이 있으면 魯나라가 알아서 처벌할 일이지 친정인 齊나라에서 상관할 일이 아닌데, 그를 죽인 것은 지나친 처사라는 말이다. 徐壽錫은 “哀姜이 先君에게 罪를 지고서 도망갔다가 方伯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어찌 다시 宗廟에 配享해서야 되겠는가? 齊桓公이 이미 王法에 의거해 죽였으니 魯나라 臣子가 사사로이 요청해서는 안 되는데, 齊桓公이 魯나라의 요청을 들어준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